❏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말씀: 출애굽기 18:1-12

요절: 출애굽기 18:12


18장은 17장과 19장의
연속적인 사건이 아니라 삽입장입니다. 계속해서 연대기적
기술로 나가다가 18장에 이르러서 모세의 장인과 모세의
부인 십보라가 등장합니다. 17장은 르비딤의 사건이고, 19장은
이집트 땅에서 나온지 석달이 지나 시내 광야에
이르렀습니다(19:1). 오늘 본문은 시내 산을 떠나 바란(파란)
광야에 들어가는 시점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모세와 그의
부인 십보라, 아들 둘(게르솜, 엘리에셀)과의 재회는 훨씬
뒤였습니다. [둘째 해 둘째 달 이십일에 구름이 증거의
성막에서 떠오르매 이스라엘 자손이 시내 광야에서부터
이동하더니 바란 광야에 구름이 머무니라
.](민10:11-12).
그리고 29-20절을 보면, [모세가 자기의 장인 미디안 족속
라구엘의 아들 호밥에게 이르되,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리라
한 곳으로 우리가 이동하니 당신은 우리와 함께 가소서.
우리가 당신을 선대하리이다. 이는 주께서 이스라엘에
관하여 선하게 말씀하셨음이니이다, 하매 그가 모세에게
이르되, 나는 가지 아니하고 내 땅 내 친족에게로
떠나가리라, 하니
](민수10:29-30)란 말이 나옵니다. 이
구절과 오늘 본문에 나오는 18:24-27절과 비교하면 모세의
장인이 등장한 시기는 출애굽한 후 약 11개월이 지난 뒤의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18장의 사건과 19장은 시간 순으로
보면 18장이 19장의 8개월 후의 일이 됩니다.


출애굽기의 사건들의 시간
배열은 영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16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만나가 내려왔고, 17장에서 영적
반석이 갈라짐으로 생수가 터져나왔는데 이는 주님의
죽으심으로 성령이 오신 장면을 나타내며, 곧 이어 아말렉이
쳐들어와 전쟁을 벌이는데 이는 육신과 성령의 다툼을
나타내는 성도의 일상 생활을 보여 주는 일입니다. 18장은
천년 왕국의 모습을 예표합니다. 십보라가 돌아온 것은
이스라엘이 주께 돌아온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십보라는
교회를 예표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예표합니다.
그녀는 모세를 피 남편이라 부르며 비난했고, 그로 인해
헤어졌는데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린 십자가로
인해 주님을 배척하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후에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모세의
장인이요, 미디안의 제사장인 이드로가 하나님께서 모세와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 곧 [주]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신 일에 관하여
들으니라.
](1).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행하신 일은 이집트
뿐만 주변 모든 민족들에게 알려졌습니다. 미디안의
제사장이었던 이드로 역시 멀리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신 이적들, 놀라운 일들을 듣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막상 주님의 이적을 눈으로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께 불평하고, 그것들을 중히
여기지 않았지만 멀리 이방에 있던 이드로는 그것을 듣고
찾아 왔습니다. 시편 28:5에 [그들은 [주]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분께서 손으로 경영하신 것을 중히 여기지
아니하므로 그분께서 그들을 멸하시고 세우지
아니하시리로다.
](시28:5)고 말합니다. 이는 육신적인
성도들이 교회를 다니지만 성령께서 교회를 통해 하시는
일에 대해 전혀 경이로움이 없는 것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에 대한 놀람과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은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① 와서
보라
. 시편 66:5에 말하기를, [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라. 그분께서 사람들의 자녀들에게 행하신
것을 보니 그분은 두려운 분이시로다.
](시66:5)라고 합니다.
주님은 구원도 하시고, 심판도 하십니다. 주님은 일으켜
세우시기도 하시고, 무너뜨리기도 하십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처럼 멀리서 듣고 와서 보는 일은 너무나 복된
일입니다. 여러분이 차분하게 성경을 읽으면서 주님이 하신
일들을 본다면 주님에 대해 놀라고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성경을 통독해 본 적이 없는
형제가 어느날 앉아서 차분히 성경을 통독한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경을 통독했을 때 그는 성령 충만을
경험했고, 그동안 배우지 못했던 놀라운 영적 진리들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성지 순례를 떠나서 ‘이곳이
홍해다.’, ‘이곳이 시내 산이다 ’, ‘여기가 갈보리다’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으로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십시오.


② 와서
들으라
. 또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아, 너희는 다 와서 들으라. 그분께서 내
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밝히 보이리로다.
](시66:16).
집회에 참석하는 것은 와서 듣는 것입니다. 주께서 행하신
일을 와서 보고, 와서 듣고, 그것들을 기억하십시오.
설교자들은 주님의 행하신 일들을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들을 밝히 드러내 보일 때 그것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사건 사건들이 나의 혼을 위해 주님이 하신 일이란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은 자라게 되며,
강건하게 됩니다. 성경의 모든 기록들은 우리의 배움을 위한
것이며, 교훈을 위한 것입니다. 나와 관련이 없는 말씀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아, 너희는
와서 들으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보고 듣는 종들에게
주님을 계시와 조명을 주십니다.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녀들에게
나타내소서.
](시90:16)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기억하라
. [내가 [주]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리니 참으로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이적(異蹟)들을
기억하리이다
.](시77:11). 이드로처럼 멀리서 듣고
찾아와서 다시 모세에게 주님의 역사를 듣고, 보는 이방인은
믿음을 얻고,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의 행하신 일들을 잊어 버렸습니다.
[그분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들에게 보이신 이적들을
잊었도다.
](시78:11). [/그러나/ 그들은 그분께서 행하신
일들을 곧 잊어버리고 그분의 계략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시106:13).
이는 오늘날 교회 성도들이 자신이 받은 구원을 곧
잊어버리는 것이나 받은 은혜를 곧 잊어 버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듣고, 읽고, 배운 말씀을 곧 잊어버리는 것도
같은 것입니다. 이전에 지은 죄는 잊어 버려도 됩니다.
나에게 해를 입힌 형제들의 행위는 잊어버려도 됩니다. 뒤에
있는 것들은 잊어 버려도 됩니다. 그러나 주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선한 손길과 은혜의 역사, 첫 사랑의 감격과 구원의
기쁨은 기억해야 합니다.



묵상하고, 깊이 생각하십시오.
[내가 또한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고 주께서 행하신 일
이야기하리이다
.](시77:12).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손이 행하시는 일을 깊이
생각하나이다.
](시143:5). 우리는 매주 아침 [묵상과
경건]의 시간을 갖습니다. 이는 여러분이 매일 효과적으로 [묵상과
경건]의 시간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을 묵상하고(시63:6),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고, 주의 훈계들을 묵상하고(시119:15,78),
주의 법규들을 묵상(시119:23,48)하십시오. 다윗은 종일토록
묵상했고, 밤이 깊도록 묵상했으며, 새벽 일찍 묵상했습니다.
그는 말씀을 묵상하기 위해 밤의 경점보다 앞서 갔다고
고백했습니다(시119:148). 묵상을 하지 않는 사람은 걱정, 근심,
염려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이것들을
묵상하고 네 자신을 이것들에 온전히 드려 네가 유익을
끼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딤전4:15)고
권면했습니다.



선포하십시오.
[내가 또한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고 주께서 행하신 일을 이야기하리이다
.](시77:12).
말씀을 묵상한 후에는 증거와 선포가 뒤따릅니다. 마음
속에서 한 일은 입으로 표현됩니다. 이것이 선교요,
전도입니다. 마음에 가득하면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입이
근질거리게 마련입니다. [오 /너희는/ [주]께 감사하고
그분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분께서 행하신 일을 만백성
가운데 알릴지어다
.
](시105:1).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도다!, 죽음에서 부활하셨도다!
승천하셨도다! 이런 일들은 묵상하면 할수록 외치고
싶어집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주]께서
행하신 일들
을 밝히 보이리로다.
](시118:17)라며 전도의
열정을 불살랐습니다. 이것이 성도가 이 땅을 살아야 하는
목적이요, 이유입니다. 말이 아닌 예배를 통해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감사의 희생물로 희생물을 드리며 기뻐함으로 그분께서
행하신 일들
을 밝히 보일지어다
.](시107:22).


2-3절을 보십시오. [이에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전에 돌려보낸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녀의 두 아들을 데리고 왔으니 그 중 하나의
이름은 게르솜이라. 이는 모세가 이르기를, 내가 타국에서
외국인이 되었다, 하였음이더라
.](2-3). 십보라는 이드로의
딸로서 모세가 미디안에 도피했을 때 결혼했습니다(출2:21).
40년이 지나 모세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집트로 떠날 때,
모세는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은 채 그냥 갔다가
죽임을 당할 뻔 했는데, 이 때 십보라가 예리한 돌을 취하여
자기 아들의 포피를 베어 내었습니다. 이 일로 십보라는
모세를 ‘내게 피흘리는 남편’이란 심한 욕을 했습니다.
출애굽기 4:25-26, [십보라가 예리한 돌을 취하여 자기
아들의 포피(包皮)를 베어 그의 발 앞에 던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흘리는 남편이로다, 하니 이에
그분께서 그를 가게 하시니라. 그때에 그녀가, 당신은 피
흘리는 남편이로다,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
](출4:25).
십보라가 위험에 처한 남편 모세를 보고 곧 바로 할례를
행했다는 것은 그녀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금방
알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그녀가 전에 할례를 반대했던
적이 있었고, 그로 인해 모세는 지금까지 할례를 행하지
않았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십보라는 모세를 ‘피흘리는
남편’이라고 했는데, 이는 피를 흘리게 하는 남편, 사람을
죽게 하는 남편이란 의미로서 할례로 인해 죽을 뻔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십보라와 아이들은
모세와 동행해서 이집트로 가지 못하고 다시 장인 이드로의
집으로 돌려보내졌다가 오늘 본문에서 돌아 온 것입니다.
십보라는 이스라엘의 예표로서 피 흘리는 남편인 모세와
헤어졌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인해 주님을 거부한 것을 예표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기
때문이라. 그분은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
](고전1:23).
피를 흘렸던 것이 십보라에게 거침이 되었듯이 주님의
십자가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거침이 되었습니다.


십보라와 모세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특이하게도 유명한
인물들이 두 아들을 낳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요셉도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삭도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부모의 세대를 전대라고 하면, 자식의 세대를 후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법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과 결혼 관계가 성립됩니다(사54:6, 렘31:32).
그래서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섬기면 간음, 음행, 더러운
여인으로 묘사됩니다. 모세로부터 솔로몬까지는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는 단일 국가였지만 소로몬 이후의 후대 역사는
남북 왕국으로 갈라집니다. 두 아들은 이 두 왕국을
예표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그녀의
두 아들을 데리고 왔으니 그 중 하나의 이름은 게르솜이라.
이는 모세가 이르기를, 내가 타국에서 외국인이 되었다,
하였음이더라. 다른 하나의 이름은 엘리에셀이니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내 아버지의 하나님께서 나의 도움이 되사
파라오의 칼에서 나를 구원하셨다, 하였음이더라
.](3-4).
첫째 아들의 이름은 게르솜인데 ‘내가 타국에서 외국인이
되었다’란 뜻입니다. 첫 아들의 이름은 이스라엘이 타국
땅에 흩어진 역사를 보여 줍니다. 앗시리아, 바빌론에 이어
로마 시대에는 2000년이나 전세계에 흩어졌습니다.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엘리에셀인데 ‘내 아버지의 하나님께서
나의 도움이 되사 파라오의 칼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란
뜻입니다. 둘째 아들의 이름은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기의 순간에 주님의 보호를 통해 구원받는 하나님의
손길을 드러냅니다. 주님은 흩어진 이스라엘을 모으십니다.
수세기 동안 이방인들의 박해와 위협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도움으로 구원받았습니다. 둘째 아들의 이름은 출애굽기 2장에
등장하지 않고 출애굽기 18장에서만 나옵니다. 이는 이 장이
천년 왕국을 예표하는 장이라고 말한 대로, 엘리에셀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표하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십보라와 아이들이 등장한
시점을 보십시오. 모세가 파라오 앞에 섰을 때나 출애굽의
밤이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있기 전에 온 것이 아니라
주께서 행하신 일들을 다 들은 후에 등장했습니다. 이때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율법의 수여자였습니다.
모세는 여수룬의 왕이었고, 하나님의 손에서 율법을 받아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배척한 메시야가 교회를 세우고, 먹일 때는
돌아오지 않다가 왕이요, 메시야로 오실 때 비로소
돌아옵니다. 이런 예는 설교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진리의 지식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성경의 절묘한 배합입니다. 영적 보화는 끊임없는 탐구로
캐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구절 구절 속에 깊은
진리들을 숨겨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함께 광야에
있는 모세에게 이르니 곧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진(陣)을 친
곳이라
.](5). 모세와 십보라가 재회한 장소를 주목해
보십시오.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진을 친 곳’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산은 언제나 왕국 또는 정부의 권세를
드러내는 말입니다. 에를 들어 주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미 내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노라,
하시리로다
.](시2:6)고 말합니다. [내가 산들을 향하여
눈을 들리니 나의 도움이 거기서 오는도다
.](시121:1). 산은
왕국, 권세를 예표하는 단어입니다. 이는 생수가 성령을
예표하거나 물이 하나님의 말씀을 예표하는 것과 같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가며 이르기를, 너희는 오라. 우리가
주의 산에 오르고 야곱의 하나님의 집에 이르자. 그분께서
자신의 길들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리니 우리가 그분의 길들
안에서 걸으리라
, 하리니 이는 법이 시온에서 나갈
것이요, 주의 말씀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갈 것임이니라
.](사2:3).
주의 산에 정부가 있습니다. 거기에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가 다 자리 잡은 왕정국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곳 역시 산 정상에서였습니다. 주님이 왕국의 헌법을
선포하신 곳 역시 산에서였습니다. 제자들에게 왕국의
영광을 보여 준 곳 역시 변화산에서였습니다. 주님이
승천하신 곳이 산이었듯이, 재림하시는 곳 역시 산이 될
것입니다(슥14:4). 하나님의 산이란 말은 하나님의 정부,
왕국이 세워지는 곳입니다. 십보라가 이곳에 있는 모세를
찾아왔듯이 이스라엘 역시 왕국이 세워지는 그 때에
자신들의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와 만날 것입니다.


6-7절을 보십시오. [그가
모세에게 이르되, 그대의 장인 나 이드로가 그대의 아내와
또 그녀와 함께한 두 아들을 데리고 그대에게 왔노라,
하니라. 이에 모세가 나가서 자기 장인을 맞아 경의를
표하고 그에게 입맞추고 그들이 서로 잘 지내는가 묻고 함께
장막에 들어가니라.
](6-7). 한 가지 더 주목해 볼 사실은
십보라와 아이들은 스스로 걸어와서 모세를 만난 것이
아니라 이방인 제사장인 이드로의 인도를 받아서 왔다는
점입니다. 물론 단순하게 생각해서 여자와 아이들의 여행이
위험하기 때문에 장인 이드로가 데려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이 우리의 배움을 위해
기록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영적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온 세상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 의해 본토로
귀환될 것입니다.


8-11절은 이드로가 모세를
통해 주님이 행하신 이적들을 듣고 난 후에 보인 반응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주]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파라오와 이집트 사람들에게 행하신 모든 일과 길에서
자기들에게 임한 모든 고난과 또 [주]께서 자기들을 구해
주신 일을 다 자기 장인에게 고하매
](8). 이드로는 천년
왕국 때의 이방인들을 예표합니다. 모세는 이드로에게
주님이 행하신 일들을 말해 주었는데, 천년 왕국 때에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방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것입니다.
그때에는 주를 아는 지식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들이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상하게 하거나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물들이 바다를 덮는 것같이 [주]를 아는 지식이 땅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11:9). 오늘날처럼 아무리 전해도
무슨 말인지 알아 듣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주님을 배우고, 그동안 주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모두 배우게 될 것입니다.


9-11절을 보십시오. [이드로가
[주]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사람들의 손에서 구해 내시려고
베푼 모든 선하심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이르되, [주]를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 너희를 이집트 사람들의 손에서와
파라오의 손에서 건져 내시고 백성을 이집트 사람들의 손
밑에서 건져 내셨도다. 이제 내가 [주]께서 모든 신들보다
크심을 알았으니 이는 그들이 교만하게 행한 일에서
그분께서 그들 위에 계시기 때문이로다, 하고
](9-11).
이드로는 말씀을 듣고 매우 기뻐했으며 주를 찬송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천년 왕국 때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전하는 증거를 듣고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을 미워하고 그들을 박해하던 민족들의 악한
감정들이 모두 제거 될 것입니다.


이드로는 [이제 내가 [주]께서
모든 신들보다 크심을 알았으니
](11)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무이며, 목적입니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불러냄을 받은 것은 이방 민족들에게
무엇인가를 증거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노아는 그의 세대가 곧 물에 빠져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증거 하기 불러냄을 받았습니다. 그는 “의의 전파자”(벧후2)였고,
120년 동안 증거한 여로가 7명의 회심자를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불러냄을 받았습니다. 그는 바벨이 바벨이란
사실과 고대 바빌론 사람들이 세미라미스와 님롯을
신격화하여 월신과 일신을 숭배하는 것이 마귀로부터 나온
것임을 증거 하기 위해 불러냄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의
교회”(행7)로 불리는데, 이집트에서 불러냄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세상의 모형인 이집트로부터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참되신 한 분 하나님으로써 사람들을 지으신 창조주요,
지지자이시며, 이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신 분이셔서 죄를
차마 용납하실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증거 하기 위해
불러냄을 받았습니다. 이드로는 모세의 증거를 통해, “이제
내가 주께서 모든 신들보다 크심을 알았나니”라는 고백을
했는데, 정확한 증거에 따른 정확한 열매였습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은 어떤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역 교회는 그분이 약속된 다윗의 아들이며,
유대인의 메시아며, 다윗의 보좌에 앉으실 분이라는 사실을
증거 하도록 하기 위해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불러냄을
받았습니다. 이 지역 교회는 오순절 날 유기체의 살아있는
몸으로 바뀌었으며, 그때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의
메시아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구주이신 것과 십자가에
죽으셔서 “세상 죄를 제거하신” 피의 대속을 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증거 하기 위해 불러냄을 받았습니다.
누군가 여러분의 증거를 통해, “예수는 나의 구주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다”란 고백을 듣게 된다면
여러분은 열매를 거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드로가 말씀을 듣는 자세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모세의 증거를 마음 깊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말씀에 대해 합당한 반응을 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주의 말씀으로 인해 기뻤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찬송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말씀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혀가
죽었다는 것은 맛을 보아도 반응하는 감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청각이 죽었다는 것은 소리를 들어도
반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몸은 물리적인 것에
반응을 하고, 우리의 혼은 정신적인 것에 반응을 합니다.
우리의 영은 영적인 것에 반응합니다. 미적 감각이 없는
사람에게 아무리 훌륭한 그림을 보여 줘도 감동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음악적 감각이 없는 사람에게 좋은 뮤지컬이나
오페라가 별로 감흥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 감각이 죽은 사람들, 영이 죽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제대로 반응할 수 없습니다. 이드로는 영적
감각이 살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는 주님이 말씀하신 다음 말씀과
비슷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장터에 앉아 서로를
부르며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를 향해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아니하고 우리가 너희를 향해 애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하는 아이들과 같도다.
](눅7:32). 이 말씀은
한 마디로 반응이 없다는 것입니다. 반응이 없다는 말은
죽었다는 말입니다. 심판을 목전에 두고도 울지 않았던
유다와 예루살렘의 거주민들처럼 오늘날 교인들은 울어야
할 때와 웃어야 할 때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영적 감각이
죽어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 육신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는 놀랄만큼 빠르고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하나님의
증거와 선포되는 말씀에 대해서는 흥미도, 관심도 없습니다.
그 사람 안에 전혀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모든 성도가 이드로와 같이 말씀에 반응하며, 기뻐하고
찬송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하나님을 위하여
번제 헌물과 희생물을 취하매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와서 모세의 장인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빵을 먹으니라
.](12).
이드로는 기뻐하고 찬송하는 정도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번제 헌물과 희생물을 취해 예배를
드렸습니다. 구약에서 성전이 완성되기 전에 예배의 형태는
주로 제단을 쌓거나 번제 헌물이나 희생물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성도의 가장 큰 특권은 예배하는 삶입니다.



이 장면은 예표적으로 너무나 복된 영적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이방인을 예표하는 이드로가 주님께 경배하고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빵을
먹었다는 것은 천년 왕국 때 이방인들이 함께 주님을 경배할
것임을 보여 줍니다. [마지막 날들에 주의 집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높임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모여들리라. 많은 백성들이 가며 이르기를,
너희는 오라. 우리가 주의 산에 오르고 야곱의 하나님의
집에 이르자. 그분께서 자신의 길들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리니 우리가 그분의 길들 안에서 걸으리라, 하리니
이는 법이 시온에서 나갈 것이요, 주의 말씀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갈 것임이니라.
](사2:2-3)의 모습을 미리
보여 주는 그런 장면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던 만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고, 하나님의 집으로 가자
외치는 이 장면이 바로 천년 왕국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는 십보라와 아이들, 이드로를 통해서 역사적 사건
속에 들어있는 예언적 의미들을 살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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