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18:13-27
요절: 출애굽기 18:18
하나님의 사역은 백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한명의 특출난 슈퍼스타보다는 한 가지
일만 할 줄 아는 백명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혼자
다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모든 은혜와
은사를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지체들에게 각양의
다양한 은사들을 주셔서 함께 이루어 가도록 하셨습니다. [너희는
서로 남의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우리는 함께 해야 할 일을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서로 해야 할 일들은 함께 하시도록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개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이 사회에서는 동역은 곧 부담과
짐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합심 동역 없이는 교회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우리는 몸의 각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위기의 순간에
친구들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세 친구는 밤을 세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에스더는 민족이 모두 죽을 수도
있는 위기 앞에서 삼촌 모르드개에게 부탁하여 온 민족이 다
함께 금식하고 기도하도록 부탁했습니다. 기도마저도
우리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함께 기도해야 하는
것이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조차도 혼자
따로 기도하신 적이 있지만 때로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가셔서 함께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홀로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이스라엘의 목자요, 탁월한 지도자였던 모세에게
혼자가 아닌 동역의 지혜, 함께 짐을 나누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남에게 떠 맡기지 말라.” 하나님이 나에게 하라고
한 일을 남과 나누어서 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나의
십자가는 남이 대신 저 줄 수 없습니다. 반대로 교회가 함께
해야 할 일이라면 혼자서 다 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모세는 어느 경우에 해당하는지 오늘 본문을 신중하게 살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매우 이중적인 내용입니다. 겉과
속이 다르고, 의미가 중첩되는 그런 본문입니다. 조심해서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진리의 지식을 배우고, 영적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능력과 지혜와 권위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는
목자로서 양들을 먹이고 돌보았습니다. 모세는
재판관으로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분쟁을 조절하고,
재판했습니다. 모세는 대언자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서
선포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의 신실한 종으로서 힘에
넘치게 일을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또 모세는
참으로 나중에 말하게 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그분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으되](히3:5)라고 말합니다.
그는 신실했습니다. 이런 모세를 도와주겠다고 나선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장인 이드로였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다음
날 모세는 백성을 재판하고자 하여 앉았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의 곁에 섰으므로](13). 재판관으로서의
모세는 장차 온 세상을 심판하시며 우리를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불평하고 다투기를 좋아한 것으로 볼 때 이웃들과 다투고
불평한 일은 다반사였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
못한 자들은 결코 이웃들과도 신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 종일 재판해야 했습니다.
사건이 너무 많았던 것입니다. 만약 교회의 목사가 가정
문제, 부부 문제를 다 재판해 주려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거기다 성도들이 목사의 판단을 존중하거나 순종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조건 자기 편 들어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대법원에 계류
중인 사건 중에 교회 관련 재판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 내의 문제가 자체적으로 해결되지 못해 세상 법정으로
가는 소송 건수는 해마다 급증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교회
소송 전문 변호사까지 있습니다. 광야의 교회 역시 이런
문제로 인해 모세는 힘들고 지쳤습니다. 형제가 형제를
고소하고, 교회가 교회를 고소하고, 성도가 목사를 고소하는
이런 일은 너무나 흔합니다. 이런 일은 비단 현 세대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다행이 광야의 교회는 신정 국가였기
때문에 세상 법정이 없었지만, 신약 시대의 고린도 교회는
교회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자주 가져갔습니다. 분쟁이 있는
것도 잘못이지만 그 분쟁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서 세상
법정의 판사에게 재판을 받아야 하는 일은 더 서글픈
일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사람과 문제가 있을 때에
감히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소하고 성도들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고전6:1). 우리는 손해를 당할지언정 같은
믿음의 형제나 교회를 고소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오히려 형제가 형제를 고소하며 그것도
믿지 않는 자들 앞에서 하는도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
가운데 전적으로 허물이 있나니 그 까닭은 너희가 서로를
고소하기 때문이라. 차라리 부당한 일을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빼앗기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6:6-7).
광야 교회와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서로를 참고
용납하기보다는 서로 고소하고 빼앗으려는데 있었습니다.
덕분에 모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앉아서 백성들을
재판해야 했습니다. 이 때 장인 이드로가 모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모세의
장인이 모세가 백성에게 행하는 모든 일을 보고 이르되,
그대가 이 백성에게 행하는 이 일이 도대체 무엇이냐?
어찌하여 그대는 홀로 앉았고 온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대의 곁에 섰느냐? 하니](14). 이드로는 모세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왜 홀로 앉아 있는지 모세에게 물었습니다.
이드로는 모세가 앉고 백성은 서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
했습니다. “어찌하여 그대는 홀로 앉았고, 온 백성은
종일토록 서 있느냐?” 뭔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식입니다. 이방인들은 교회에 오면 이드로와 같은 질문을
하는데, 내용은 반대입니다. “왜 목사는 혼자 앞에 강단에
서 있고, 성도들은 앉아 있느냐?” “왜 목사 혼자만
설교하느냐? 돌아가면서 하면 안 되느냐? 왜 목사 혼자만 ...어찌하여
목사만, 어찌하여 우리는 ...”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이드로는 분권형 leadership을 선호했습니다. 이드로는 권력
분산, 집단 지도체제를 선호했습니다. “어찌하여 그대는
홀로 앉았고”란 이드로의 말에는 지도체제에 대한 그런
비판이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날 이드로의 후예들이 만든
종파가 장로 교회, 형제 교회, 지방 교회같은 것입니다.
목사를 견제하고 분권형이 이상적인 교회 운영 제도요,
성경적인 것처럼 주장합니다. 복수 장로제란 것이 대부분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 모세의 자리에는 누가
앉아 있었습니까? [그때에 예수님께서 무리와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으니](마23:1-2). 모세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백성들이 서 있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백성들에게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되, 말은 들으라고 했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장인
이드로의 질문에 대한 모세의 답변입니다. [모세가 자기
장인에게 대답하되, 백성이 내게로 와서 하나님께 여쭈려
함이니이다. 그들이 일이 있으면 내게로 오니 내가 이편과
저편 사이에서 재판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규와
법도를 알게 하나이다, 하매](15-16). 모세는 장인 앞에서
분쟁하고, 다투고, 시기하고, 싸우는 백성들을 비난하거나
욕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답변은 너무나 온유합니다. ‘백성이
내게로 와서 하나님께 여쭈려 함이니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불신자들 앞에서 교회를 욕하거나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비록 실수와 허물이 있어도 사랑으로
덮어주고 감싸주어야 합니다. 모세는 재판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법규와 법도를 알게 해 주었습니다.
실제로 모세 앞에 나온 사람들은 하나님께 여쭈려고만 온
것은 아닙니다. 신명기 1:12에 [그런즉 내가 어찌 홀로
너희의 성가신 일과 너희의 무거운 짐과 너희의 다투는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으랴?](신1:12). 백성들은 성가신 일,
무거운 짐, 다투는 일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드로 앞에서 백성들은 변호했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모세는 참으로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모세의
장인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가 행하는 일이 좋지 아니하도다.](17).
아무리 장인이지만 모세의 면전에서 직접적으로 “그대가
행하는 일이 좋지 아니하도다”라는 권면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동양 정서에는 사람의 면전에서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충고하거나 권면하는 일은 거의 금기시 합니다.
말을 하더라도 따로 시간을 내어서 조용히 말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그러나 이드로는 그 자리에서 모세가 하는 일에
대해서 충고와 권면을 주었습니다. 충고와 조언은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에게 조언을
주면 그는 성질을 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합니다(잠1:7).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이 하는 행동이
항상 옳습니다(잠12:5). 그래서 충고를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참으로 지혜로운
자였습니다. 그가 지혜로운 이유는 권고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정치인들 같았으면 언론과의
전쟁을 선포하거나 언론과는 긴장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떠들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에게 비판적인 충고, 쓴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드로의 충고와
권면이 성경적이거나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의 관점은
진리냐? 비진리냐? 옳으나 그르냐?의 기준이 없었습니다.
모세의 일이 옳은지 그른지,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는
개의치 않고, 좋은지 나쁜지를 기준으로 잡았습니다. 성경을
믿는 신자들은 나에게 좋으냐? 나쁘냐?를 판단 기준으로
잡아서는 안됩니다. 항상 성경을 기준으로 옳으냐? 그르냐?를
기준으로 잡아서 판단해야 합니다. 이드로는 기준이
틀렸습니다. 이드로는 판단이 옳고 그름을 떠나 판단의
기준이 틀렸습니다. 아무리 탁월한 판단력의 소유자라도
판단의 기준이 잘못되면 그의 판단은 틀릴 수 밖에 없습니다.
잘못된 자, 잘못된 저울로 바르게 측량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이 교회에 오면 늘 좋은 것 나쁜 것을
판단합니다. 예전에 교회는 문화적인 면에서도 세상을
앞질렀습니다. 어느 동네나 교회보다 더 좋은 건물은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교회에 오면 자기 집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처음으로 피아노를 보고,
만진 아이들이 수두룩합니다. 교회에서 처음으로 영사기나
슬라이드를 본 아이들도 많습니다. 교회는 집에 없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교회에서 주는 밥이 집에서 먹는 밥보다 훨씬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교회에 오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교회는 세상보다 더 뛰어난 것이
별로 없습니다. 이제 아이들은 교회에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런 아이들처럼 교회에 오면 좋다, 나쁘다로
판단하는 것은 성경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각이
기준입니다. 이드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그대와
또 그대와 함께한 이 백성이 다 분명히 지치리니 이는 이
일이 그대에게 너무 무겁기 때문이라. 그대가 이 일을 홀로
행할 수 없으리라.](18). 이는 모세를 무시한 말이
아닙니다. 냉철하게 현 상황을 통찰한 조언입니다. 이드로는
하루 동안 모세가 하는 일을 지켜보고 단숨에 문제점을
파악했습니다. 실제로 모세는 백성들의 계속되는 불평과
요구로 인해 지쳤습니다. 그는 민수기 11:14에 [이 일이
심히 무거워 나 혼자서는 이 온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민11:14)라고
주님께 탄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70명을 세워
주셨습니다(민11:17). 모세의 재판은 그냥 단순한 재판이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1:9절과 12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는 홀로 너희를 감당할
수 없도다.](신1:9).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런즉 내가
어찌 홀로 너희의 성가신 일과 너희의 무거운 짐과
너희의 다투는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으랴?](신1:12).
백성들은 성가신 일, 무거운 짐, 다투는 일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드로의 증언대로 모세는 홀로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이 때 모세는 주의 사역을 능력있게 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모세는 나를 걱정해 주시는 분은 장인
어른 밖에 없구나! 감격할 때가 아닙니다. 이드로는 모세가
홀로 하는 것으로 보았지만 모세는 결코 홀로가 아닙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기 때문이니라. 너는
놀라지 말라. 내가 네 하나님이기 때문이니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내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이드로는 훌륭한
조언자요, 지혜자였지만 그는 하나님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모세의 육신을 생각했습니다. 모세의 육신이 지치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만약 모세가 너무 지치고 힘들고 무거운
짐이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 짐을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네 짐을 주께 던져서 맡기라. 그분께서 항상 너를
붙드시고 의로운 자의 흔들리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55:22). 베드로 역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 이는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기 때문이니라.](벧전5:7).
그리스도인은 본래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5:19,3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위로자
성령을 보내 주셨고, 세상 끝날 까지 항상 함께 해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로 없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이드로는 모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모세 홀로 감당하는
것에 대한 충고와 조언을 준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불신자들에게 현명한 카운슬링을 받지만 그것이 성경적
진리와 어긋날 때, 믿음을 배제한 것일 때, 하나님의
도우심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을 때 그 충고는 무의미한
충고요, 헛된 지혜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저축을 하거나
주식이나 부동산에 투자를 하거나 노후에는 well-fare를
의지합니다. 제가 아는 분은 한푼도 저축을 하지 않고 최소
생활비를 제외한 전액을 헌금하고, 구제에 써버렸습니다.
그러자 주위에서 지금은 믿음이 있다고 그렇게 살고, 직장도
있고, 애들도 어리니까 그렇게 살지만 조만간 돈 들 일이
태산인데 어쩌려고 그러느냐?고 적금, 연금, 주식 투자 등의
재테크 요령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다 무의미한
소리였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외환은행 차장으로서 그
방면에 더 전문가였지만 통장없이 살았던 것입니다. 그녀의
말인즉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는데, 내가 늙으면
나를 떠난단 말인가?’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이 죽고 없을 때를 대비해서 살아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를
버렸을 때를 대비해서 살자!’고 외치는 것 같습니다. [너희
행실을 탐욕이 없게 하고 너희가 가진 것들로 만족하라.
이는 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라.](히13:5).
어리석은 부자처럼 창고에 쌓아두고 살라는 충고를 넙죽
넙죽 받아 들이는 그리스도인 보다 더 바보는 없습니다.
주님은 매일 만나를 주셨듯이, 매일 필요를 공급하십니다.
우리에게 창고를 준비하라고 하실 필요가 없는 것은 주님이
내일도, 그 다음 날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깜빡 잊지도 않으시고, 졸지도 않으시고, 멀리 여행을
떠나지도 않으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지켜 주십니다.
여러분은 불신자들의 믿음없는 세상 지혜, 세상 정보를
받아들이는 바보같은 짓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런 충고를 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삶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어떻게 놀랍도록 공급하시고, 보살피시는지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그 점에서 실패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이
세상의 충고를 가장 많이 받아들이는 분야는 단연 교육
분야입니다. 자녀 교육에 관한 한 목사의 설교나 성경을
제쳐두고 공부 잘 하는 자녀들을 둔 부모, 좋은 학군, 좋은
학원, 좋은 환경을 찾아다니며 돈을 쏟아 붓습니다. 교육에
관한 한 하나님은 비전문가이며,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분인 것 같기만 합니다. 하나님은 교육에도 누구보다 더
전문가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국에서 기독교 분야에
오랫동안 Best Seller를 차지한 ‘다니엘 학습법’이란 책의
저자가 있습니다. 김동환 전도사란 분이 저자인데, 이
청년은 2000년에 서울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는데 서울대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전학년 전부 A+였고 4년간
평점이 99.26이었습니다. 서울대에서 국비 유학 조건에
교수직까지 보장했지만 졸업하자마자 총신대에 진학해서
지금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특별한 머리를 지닌 학생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매일 아들을 새벽기도에 데려
다녔고, ‘성경 안보면 밥 안 주고, 기도 안 하면 회초리’를
들었습니다. 중간 고사 기간이든, 기말 고사 기간이든
시험과 공부를 핑계로 성경 안 읽고 기도 안하는 것은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교육을 ‘신본주의 교육’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오늘날 시험기간만 되면 교회 학생부가 쑥
줄어드는 현상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는 자신만 이 방법으로 성공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전도한 학생들을 자기 집에 불러 SKY School이란
과외방을 운영하며 자신이 공부한 신본주의 교육을
전파하여 성경을 읽고, 기도한 후에 공부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공부 방법임을 입증했습니다.
제 고등학교 친구 중에 한 명은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습니다. 매주 주일이면 집으로 가서 가족과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어느 일요일 아침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 중요한 시험이 있어서 오늘은 예배를 못 가겠다”고
하자, 그 어머니는 말하기를 “예배 빠져가며 공부해서 갈
수 있는 대학이라면 예배 드리고도 갈 수 있는 대학가면
되니 당장 오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 집은 형제들이 12명이
넘었습니다. 가난한 가정이었습니다. 대학을 가려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대학에 가야했습니다. 그날 그
어머니는 아이들을 다 모아두고 “예배를 날려가면서
공부해서 겨우 대학갈 정도면 예배 다 드리고 아예 대학가지
마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담임
선생님의 충고나 진학 지도사의 충고나 주위 어느 누구의
충고도 단연코 거부하고 오직 신본주의 교육을 시켰습니다.
오늘날 이런 신앙적 입장을 가진 부모들이 거의 없는 현실을
볼 때 얼마나 황당한지 모릅니다.
저는 성도들이 모든
분야에서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가 홀로가 아니란
사실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님은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전문가이시며, 지혜를 주시며, 힘과 능력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정 문제이든, 재정 문제이든,
사업이든, 교육이든, 나의 장래 문제이든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배제된 세상의 충고와
조언을 단호히 배격하고 주님만을 의로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다시 18절을 보십시오. [그대와
또 그대와 함께한 이 백성이 다 분명히 지치리니 이는 이
일이 그대에게 너무 무겁기 때문이라. 그대가 이 일을 홀로
행할 수 없으리라.](18). 오늘날 성도들이 빨리 배워야 할
사실 중에 하나는 “그대가 이 일을 홀로 행할 수 없으리라”란
이드로의 충고입니다. 혼자 다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라이놀드 니보의 유명한 기도문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the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그는 세 가지를 기도했는데 “내가 할 수 없는
일, 내가 바꿀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옵소서”였습니다.
때로 사람은 자신의 욕심과 야망과 꿈과 이상이 뒤범벅인
되어 냉철함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냉철함이
필요합니다. 다음에 그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능력 주셔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도전하고 바꿀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해 주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능력의 문제,
성격의 문제, 자신의 기질, 환경 등 바꾸어야 하고, 바꿀 수
있는 것들을 피해 가려 하지 않습니까? 맞설 용기가 없어서
다른 방법을 찾지는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그가 구한 것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구했습니다.
우리는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라면
할 수 있습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이제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 내가 그대에게 조언을 주리니
하나님께서 그대와 함께 계실지로다. 그대는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 쪽을 향하고 사정들을 하나님께로 가져가 그들에게
규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그들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과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여 주고](19-20).
이드로는 모세를 대안없는 비판을 한 것이 아니라 건전한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물론 모세가 하나님이 도우시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으면 이드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드로의 제안은 모세가 자신의 일을
분담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분담시키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대에게 조언을
주리니”란 이드로의 말은 고마운 충정이지만 실제로는
필요하지 않는 조언입니다. 모세는 충분히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 충고요 조언입니다. 모세는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말씀을 하던 사이였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5:4, [[주]께서 산에서 불 가운데서
너희와 얼굴을 마주 대하여 말씀하시매](신5:4), [그
뒤에는 이스라엘 가운데 모세와 같은 대언자가 일어나지
아니하였나니 이 모세는 [주]께서 얼굴을 마주 대하여
아시던 자요,](신34:10). 우리는 재림 때에나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할 것입니다. 그 날에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했습니다(고전13:12). [이는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보나 그때에는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볼
것이요,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같이 나도 알게 될 것임이라.](고전13:12).
모세는 이미 그런 수준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조언을 필요로 하지 않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주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는 성도는 세상의 조언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가족 가운데 지혜로운 장인이나
장모, 윗 어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 물정도 밝고,
안목도 넓고, 돈도 있고, 권세도 있는 그런 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른들이 성경을 모르는 분이라면
성경을 믿는 우리에게 줄 수 있는 훈계와 충고는 결국 “믿음을
버리라”는 것 뿐입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그대는
또 온 백성 중에서 능력이 있는 자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고 탐욕을 미워하는 자들을 예비하고
백성 위에 세워 천 명의 치리자와 백 명의 치리자와 쉰 명의
치리자와 열 명의 치리자로 삼아 그들로 하여금 언제나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 큰 문제이면 그들이 그대에게 가져올
것이나 작은 문제는 그들이 재판할 것이니 그리하면 그들이
그대와 함께 짐을 질 것인즉 일이 그대에게 쉬우리라.](21-22).
여기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의 관료가
조직되었습니다. 관료가 될 자격 요건은 첫째,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둘째, 진실하고 셋째, 탐욕을 미워하는
자들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인사 기준입니다.
만약 교회가 집사나 장로를 선출할 때, 아니면 어떤 직분을
맡길 때 이 기준을 따른다면 대부분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하나님의 집에서 외모를
취해서 직분을 맡기는 일은 이방인 제사장 이드로 보다도
영적 판단력이 떨어지는 처사입니다. 베드로는 집사를 뽑을
때 인사 원칙을 정직하고 성령님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으로
정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는 너희 가운데서
정직하다는 평판이 있고 성령님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행6:3).
사도 바울의 인사 기준은 좀 더 철저했습니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반드시 신중하며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아니하며
자기를 많은 술에 내어 주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익을 탐내지
아니하며 순수한 양심 속에 믿음의 신비를 간직한 자라야
할지니라. 이 사람들도 먼저 시험해 보고 그 뒤에 책망 받을
것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면 집사의 직분을 수행하게
할지니라. 이와 같이 집사들의 아내들도 반드시 신중하며
헐뜯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일에 신실한 자라야 할지니라.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을 잘 다스릴지니라.](딤전3:13-17).
이드로는 모세에게 작은
문제, 큰 문제를 분리했는데 이는 인위적인 분류입니다.
주님 앞에 작은 일들이란 없습니다. [작은 일들의 날을
멸시한 자가 누구냐? 이는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과 그 일곱 눈이 함께 있음을 보고 기뻐할 것임이니
이 일곱 눈은 이리저리 온 땅을 두루 달리는 주의 눈이라,
하셨느니라.](슥4:10). 우리는 모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모세가 자기 십자가를 벗어 버리려고
하면 주님은 더 큰 십자가를 지게 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표적
진리를 한 가지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그렇다면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
같은 관리는 바로 저희들을 예표합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내 왕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긴 뒤에
내 아버지와 함께 그분의 왕좌에 앉아 있는 것 같게 하리라](계3:21)고
말씀하셨고, [또 우리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셨음이니 우리가 땅에서 통치하리로다,
하더라.](계5:10)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천년 왕국 때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수고에 따라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과 같은 몇 개의 도시들을 다스리는 왕이 될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그대가
만일 이 일을 행하고 하나님께서도 그대에게 그리하라고
명령하시면 그대가 이 일을 감당하고 이 온 백성도 자기
처소로 평안히 가리라, 하니라.](23). 이드로는 모세에게
권고하면서 ‘하나님께서도 그대에게 그리하라고
명령하시면’이라고 단서를 달았는데, 이는 매우 훌륭한
조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방인
제사장 이드로의 한계가 있습니다. 이미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드로는 옳고 그름(right or wrong)의 기준이 없었습니다. 그의
가치관은 철저히 모세의 편의와 백성들의 편의 즉 편리함을
위한 제안들이었습니다. 일의 능률과 효율을 높이는
방안이었을 뿐입니다. “편리한 것이 좋은 것이고, 좋은
것이 선이고, 그것이 곧 옳은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입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이제는 “어떤 유익이 있는 것은 모든 선한 것이다. 나를
개선, 발전시키는데 유용한 것이 곧 도덕적으로 타당한
것이다”란 사고 방식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교회와
신학교에서는 이 부분을 설교하거나 주석할 때 99% 이상의
목사와 신학자들이 이드로를 극찬하는 설교를 합니다.
그들의 사고 방식에 쏙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 이드로는 그렇게 훌륭한 조언을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세의 사역을 방해한 것입니다. 이는
마태복음 16장의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걱정해 준
것과 같은 꼴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을 것을 말씀하자 인정이 많고, 예수님을 사랑한
베드로는 주님을 붙잡고 만류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그분을 붙잡고 만류(輓流)하기 시작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하지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임하지 아니하리이다,
하거늘](마16:22). 본문의 이드로와 신약의 베드로는 매우
닮았습니다. 그러나 충고에 대한 대처 방법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모세는 이들의 충고를 그대로 수용했지만
주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고 엄히 꾸짖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이에
모세가 자기 장인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가 말한 대로
다 행하여](24). 이는 이브의 말에 귀를 기울인 아담과
마찬가지로 모세가 행한 큰 실수였습니다. 민수기 11장을
보십시오. 모세는 자신이 혼자서 짐을 감당할 수 없다고
외쳤습니다. [이 일이 심히 무거워 나 혼자서는 이 온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민11:14). 그러자 주님은 모세
위에 있던 영을 취하여 칠십 명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장로들 중에서 네가 백성의
장로와 그들을 다스리는 관원(官員)으로 알고 있는 자 칠십
명을 내게로 모으고 회중의 성막으로 데려와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내가 내려와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 위에
있는 영(靈)을 취해 그들 위에도 있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민11:16-17).
나아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세 위에 있던 것들을 취해
나누었기 때문에 그게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후에
모세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들은 자신들도 주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모세와 동등한 지분과 권리를 요구했던
것입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온
이스라엘에서 능력 있는 자들을 택하고 그들로 하여금
백성의 우두머리 곧 천 명의 치리자와 백 명의 치리자와 쉰
명의 치리자와 열 명의 치리자로 삼으매 그들이 언제나
백성을 재판하되 어려운 사건은 모세에게 가져오고 작은
일은 스스로 재판하더라.](25-26). 모세가 뽑은 능력있는
자들은 후에 고라의 반역에 참여하여 모세에게 대항합니다.
모세를 대항한 자들은 결코 무지한 민중들이 아닙니다.
민수기 16:1-2절에 보면 “이들은 회중 안에서 유명하여
명성이 있는 자들이요, 그 집회에 속한 이백오십 명의
통치자들이더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장인의 충고를 듣고
뽑은 통치자들이 들고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조언과 충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아닌 세상 지혜자들의 말을 들어서는
안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자기 장인을 떠나가게 하니 그가 길을 떠나 자기 땅으로
돌아가니라.](27). 이드로는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경배하고 함께, 아론과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지만 결국은 자기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드로는 모압 여인 룻만도 못했으며,
여리고의 창녀 라합(수2:1)보다 못했습니다. 이를 예표적으로
적용하면 이방인들이 천년 왕국 동안 이스라엘과 함께
주님을 섬기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자기 길을 떠나는 것에
해당합니다. [주께서 나를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이교도들의 머리로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던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그들이 나에 대하여 듣고는 곧 내게
순종하며 낯선 자들이 스스로를 낮추어 내게 복종하리로다.
낯선 자들이 자취를 감추고 자기의 밀폐된 처소에서 나오며
무서워하리로다](시18:43-45). 그러나 이들이 마음으로
완전히 주님을 믿고 순종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천년 왕국이
끝날 무렵 사탄과 더불어 반역하고 맙니다(계20:7-9).
오늘 우리는 ‘경건하고
부유하고 지혜롭고 나이든’ 한 이방인이 광야의 교회에
들어와 하나님의 종 모세를 훈계하고 조언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통해서 영적 진리를
붙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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