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17:8-16
요절: 출애굽기 17:11
반석에서 물이 갈라진 그
곳의 지명은 르비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불신과
주님을 시험한 죄로 인해 그곳 이름을 맛사와 므리바로
이름을 개명했는데, 맛사는 다툼이란 뜻이고 므리바는 ‘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라는 불신의 시험을 뜻하는
이름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광야에서는 처음으로 적을
만나게 됩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병장기를 들고 목숨을 건
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적은 아말렉 족속이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하늘에서 만나가 내렸고,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 기둥이 그들 위에 머물며 인도했습니다. 그렇다고 적이
쳐들어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침에 일어나
성경을 읽었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고 해서 오늘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아말렉은 ‘전사같은’(warlike)이란
뜻입니다. 그들은 에서의 후예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아브라함 때부터 히스기야 왕 때까지 이스라엘과 자주
전쟁을 벌였습니다.
출애굽기는 신약의 진리를
예표하는 상징들로 넘치는 책인데 파라오는 사탄을,
이집트는 세상을, 이스라엘은 구원받은 성도를,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며, 이집트에서 신음하던 백성들은
죄아래 고통받은 죄인들을 잘 보여 줍니다. 광야의 여행은
성도의 순례의 길을 보여 줍니다. 광야는 믿음과 시련의
장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말렉은
성도의 영적 생활을 방해하는 육신을 잘 예표해 줍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1).
반석에서 갈라진 물을 마신 후에 아말렉이 들이닥쳤습니다.
만나를 먹은 것은 말씀을 취한 것이라면 영적 반석에서 나온
영적 음료를 마신 것은 성령을 받은 사건에 비유됩니다.
성령이 성도의 몸 안에 내주할 때 그때부터 영적 전쟁이
시작됩니다. “그때에 아말렉이 와서”란 말은 성도가
성령을 받은 때에 육신이 살아나서란 말과 같습니다. 성도가
성령을 받으면 우리 안에는 두 가지 성품이 존재하게 됩니다.
옛 성품과 새 성품, 옛 사람과 새 사람이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를 믿고 난 후에 곧 바로 내 안에 어떤
전쟁이 벌어지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육신은 성령을 거슬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거스르기 때문이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갈5:17)는 말씀의 역사적인
예가 바로 아말렉과의 전쟁입니다. 베드로전서 2:11에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순례자인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들을 삼가라.](벧전2:11)는
말씀대로 흔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들을 예표하는
족속이 아말렉 족속입니다.
아말렉은 언제 오는가?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영적 음료를 마신
후에 옵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육신과의 치열한 전쟁을
치루는 장면을 서술한 대표적인 성경이 로마서 7장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새
마음을 주십니다.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만 합니다.
반석에서 갈라진 물이 나오는 축복은 곧 바로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는 엄청난 부흥을
이룹니다. 그 때 곧바로 들이닥친 아말렉이 있었는데 구제
문제로 인한 갈등과 분열이었습니다(행6:9-11). 사도행전 8:7-8에는
도시에 엄청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곧 바로 성령을
돈으로 사겠다는 아말렉이 등장했습니다(행8:19). 이런 예는
사도행전 13장에도 계속됩니다. 안식일에 온 도시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해서 모였습니다(행13:44). 그러나 곧
바로 아말렉이 등장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 무리들을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거슬러 말하고
반박하며 모독하거늘](행13:45). 이런 예는 성경 전반을
타고 흐르는 구조입니다. 여러분에게 은혜와 축복의 샘이
터지고 그것을 마시면 곧 바로 아말렉 족속이 들이닥칩니다.
이는 개인이나 교회나 국가나 예외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난 놀라운 사건이 나옵니다. 이것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곧 바로
바리새인들은 주님을 죽일 것을 모의했습니다(요11:447-57).
말씀을 받으면 즉시 마귀가 날아들고, 성령이 역사하면 곧
바로 악령이 찾아 오는 이런 역사는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쉼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아말렉은 언제 오는가?
성도가 지치고 낙심할 때 옵니다. [곧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길에서 너를 만나 네가 약하고 피곤할
때에 네 뒤를 치되 곧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신25:18).
이들은 후에도 여자들을 포로로 취하고 아이들까지
잡아가는 그런 족속이었습니다(삼상30:1-2). 아말렉의 전술
전략은 매우 치사했는데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이었습니다.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며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만군의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숨어 그를 기다린
일을 내가 기억하나니](삼상15:2). 그들은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고, 틈을 노렸습니다. 성도의
순례의 길에 가장 먼저, 가장 자주 만나는 적이 바로
아말렉입니다.
아말렉은 언제 오는가?
그들은 다른 어떤 적보다 먼저 옵니다. [또 그가 아말렉을
바라보며 비유를 지어 이르되, 아말렉은 민족들 중에서
첫째였으나 그의 끝은 영원토록 멸망에 이르리로다.](민25:20).
에서는 육신을 따라 난 자였습니다. 그는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핍박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옛 사람, 우리의
육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란 난 새 사람을 핍박합니다.
약속의 자녀였던 이삭이 가장 먼저 에서에게 핍박을 받은
것처럼 성도들 역시 가장 먼저 육신으로부터 시험을
받습니다.
아말렉은 언제 오는가?
이스라엘이 속박의 때에 있을 때는 오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참 자유를 얻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을 받을 때 이들은
공격했습니다. 이는 성도들의 경험과 일치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할 때 육신은 그런
삶이 싫다고 들고 일어납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이스라엘이 아말렉을 선제 공격한 것이 아니라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먼저 공격했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기뻐하며,
영적인 것들에 참여할 뿐입니다. 그러나 육신은 그런 때에
공격을 가함으로써 갈등을 유발시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에게서 사람들을 택하고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막대기를 내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하매](8). 지금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하나 까딱하지 않게 하시고 혼자 다
싸우셨습니다. 이집트에서도, 홍해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와 싸우기 위해 나무 막대기 하나 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나가서 싸워야 했습니다.
그들은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나가야 했습니다.
처음으로 이들은 하나님의 군대로서, 군사로서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싸우라고 명하실 때는
그 전쟁은 승리가 보장된 싸움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위해
힘써 싸우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유다서는 영적 전쟁을
독려하기 위해 쓰여진 성경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공통으로 얻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를 쓰려고
열심을 내던 차에 성도들에게 단 한 번 전달된 믿음을 위해
힘써 싸우라고 편지하여 너희에게 권고할 필요를 느꼈노니](유1:3).
주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싸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싸우라고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아들
디모데야, 전에 너에 관하여 주어진 대언들에 따라 내가
네게 이것을 명하노니 곧 그것들을 힘입어 선한 싸움을
싸우며](딤전1:18)라고 영적 전쟁을 수행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성도들은 모두 이런 전쟁을 위해 부름받은
그리스도의 군사들입니다. 디모데후서 2:3-4, [그러므로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고난을 견디어 내라.
전쟁을 치르는 자는 아무도 이 /세상/ 삶의 일에 얽매이지
아니하나니 이것은 자기를 군사로 택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2:4).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영원한
생명을 붙들라. 이것을 위하여 너 역시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들 앞에서 선한 고백을 하였도다.](딤전6:12).
주님은 구원의 대장으로서 우리를 지휘하시며, 명령을
내리십니다. 이전처럼 주님이 단독으로 파라오와 그의
군대를 다 해치울 수도 있지만 주님은 싸우도록 하셨는데,
이는 우리에게 그런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승리가
목표입니다. 싸움은 끝장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싸우다가
휴전을 선언해 버리고, 중단해 버리는지 모릅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였노라.](히12:4)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는 후퇴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뒤로 물러서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이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뒤로 물러가면 내 혼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에 이를 자들이 아니요, 오직 믿어서 혼의 구원에 이를
자들이니라.](히10:38-39). 하나님이 전신갑주를 주신 것은
구경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입고 전쟁터로 나가서
싸우라고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것은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적을
무찌르라고 주신 것입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싸워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날 저희들에게 동일한 명령을 주십니다.
‘마귀를 대적하라.’(약4:7, 벧전5:9). 오늘날 미국과 같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를 제외하고 많은 나라들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극심한 박해와 고통, 죽음을
의미하는 나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환란이 닥치면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곧 목이 베이는
일이 됩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육신의 위험이 없는
사회에 살다 보니 영적 위험조차 감지하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영적 군대입니다. 영적
전투는 이곳이나 회교권 국가나 공산주의 국가나
동일하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다시 9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예표하는
여호수아란 이름을 처음 접하게 됩니다(행7:45, 히4:8).
여호수아란 이름이 이전까지 한번도 나오지 않다가 이제
나와서 영적 군대를 지휘하는 지휘자로 나서는 장면은 매우
의미깊은 일입니다. 여호수아는 예수님과 동일한
이름입니다. 죄인들을 위해 반석이 갈라진 후에야
여호수아가 등장한 것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우리의 구원의 대장으로 나오시는 주님을 보여 주는
일입니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의 후손으로 눈의
아들이었습니다(대상7:27). 그의 나이는 모세보다 27살이
어렸고 당시 나이가 53세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성경에서 총
250회나 나옵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모세가 자기에게 말한 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니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라.](10-11).
여호수아는 이때부터 가나안에 입성하기 까지 계속해서
전쟁을 지휘했는데 아간의 범죄로 인한 단 한번의 패배
외에는 모두 승리로 이끈 백전불패의 용사였습니다.
백성들은 무명 잡졸들이었지만 장수는 알렉산더나
징기스칸을 훨씬 능가하는 용장이었습니다. 잘 훈련된 군사,
훌륭한 무기로 이기는 장군은 그다지 칭찬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예는 모두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나간 전투에서의 승리였습니다. 다윗은 비류와 잡류들을
이끌고 전쟁에 나가서 이겼습니다. 기드온은 소수의 300명의
무리들이 칼과 창이 아닌 바가지와 항아리를 들고 나가서
싸워 이겼습니다. 이런 예는 주님의 군사들은 숨겨둔 죄만
없다면 어떤 전쟁에서도 이긴다는 진리를 보여는 것입니다.
마귀가 아무리 강해도 우리가 주님께 고백하지 않는 숨겨 둔
죄로 인해 스스로 승리를 헌납하지 않는 이상 교회를 이길
수 없고, 성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항복하지 않는 이상 지는 일은 없다!’ 마귀를 우리 안에
죄를 숨겨 둠으로서만 승리를 쟁취할 수 있습니다.
전쟁의 진행 상황이 매우
재미있게 돌아갔습니다. 여호수아는 전쟁터로 나갔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갔습니다. 모세는 손을
들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성령의 검을 가장 날카롭게
사용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하며, 지혜를 줍니다. 성도는
육신을 신뢰할 필요가 없습니다(빌3:3). 오직 주님을
의뢰하며 기도하면 됩니다. 여호수아가 전쟁을 할 때 전쟁이
보이는 산 꼭대기에서 세 사람이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대언자입니다. 아론은 대제사장입니다. 훌은
이스라엘의 왕의 타이틀(명칭)입니다(창49:10). 모세가 손을
들었다는 말은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디모데전서 2:8에
남자들은 어디서나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곳에서 남자들이 진노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2:8),
시편에도 [내가 주께 부르짖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을 향하여 손을 들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시28:2)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손을 들고 하는 기도는 쉽게 지칩니다.
모세 역시 급박한 전쟁을 보면서도 손이 무거워져
내려왔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손이 내려오지 않아야
하는데, 손은 자꾸만 내려왔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밀렸습니다. 이는 전쟁의 승패가 육신의 힘과 지혜, 전략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기도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기도에
대해서 너무나 간과하는 것이 바로 이점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고
하셨으며,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
주시려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눅18:1). 그러나 모세
혼자서는 도저히 전쟁이 끝날 때가지 손을 들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 우리는 기도의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모세의 손이 무거워지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밑에
놓아 그로 하여금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의 손이 해가 지도록 그대로 있더라.](12). 아론과 훌이
곁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습니다. 우리는 지치고
낙심할 때 끝까지 붙들어줄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지친
모세의 손을 붙들어줄 동역자가 필요했듯이 우리 역시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디도(고후8:23)를 동반자요, 동료 협력자로 함께
다녔습니다. 그는 동료 군사였습니다(빌2:23). 두기고, 디모데,
실라, 누가, 빌레몬 등은 모두 그의 동료 일꾼이요, 동료
종이었습니다.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 합심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를 돕는 하늘의 중보자와 땅의 중보자를 함께
모시고 있습니다. 저 하늘에서는 주님이 우리의
중보자이십니다(롬8:34, 히7:25). 땅에서는 우리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 중보자이십니다(롬8:26-27).
우리의 손을 붙들고 지키시는 분이 계십니다. 동시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중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권면하노니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중보(仲保) /기도/와 감사를 드리되](딤전2:1).
13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의 백성을 무찌르니라.](13). 모세가
손을 들었을 때 여호수아의 칼날은 아말렉과 그의 백성들을
무찌를 수 있었습니다. 전쟁은 기도로만 할 수 없습니다.
적을 베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말씀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칼날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기도없는 말씀은 썩은
짚단도 베지 못합니다. 반면 기도를 힘입은 말씀은 마귀의
심장도 도려냅니다. 기도는 칼을 든 여호수아의 팔에 지치지
않는 힘을 제공했으며, 기도는 여호수아의 칼이 무엇이나 벨
수 있도록 양날을 세워주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처럼
무기력한 것은 기도와 말씀이 함께 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벽 기도와 철야 기도를 할 정도로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내는 교회들이 무기력한 것은 적을 벨 칼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 책을 출판하고, 신학교를 운영할 정도로
성경 공부가 많은 교회들이 부실한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말씀은 분리되어서는 안됩니다.
여호수아가 칼을 들고 싸우는 일이 매우 큰 일이며, 힘든
일이듯이 모세가 산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는 일 역시 동일한
수고와 힘이 드는 일입니다. 기도는 결코 잠깐 짬을 내서 몇
마디 내뱉는 말이 아닙니다. 기도는 전투이며, 기도는
일입니다. 성도가 성경 공부를 하기 위해서 책을 읽고,
설교를 듣고, 테잎을 듣고, 어디서 배워야 하는 것처럼 기도
역시 그런 동일한 수고와 노력이 필요한 일이란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틴 루터는 일이 많을수록 기도시간을
늘려나갔습니다. 그는 강의와 저술과 반대자들을 대적하는
힘든 전쟁을 벌였나가면서 하루 4시간씩 기도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오늘 할 일이 아무리 많더라도 하루를
시작하는 처음 3시간은 기도하며 보내리라.”(마틴 루터)고
했는데, 이는 시간이 남아 돌거나,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시간이 너무 부족하고 할 일이 너무 많고, 적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 말씀의 능력은 배가 됩니다.
성도들에게 외적을
물리치는 일보다 더 힘든 일은 내 안에 있는 육신을
물리치는 일입니다. 내 안의 생각들을 통제하는 일은 더욱
힘듭니다. 그 무엇으로도 내 안의 자아를 죽이지는 못합니다.
육신의 정욕이나 탐심은 나도 모르게 솟아납니다. 육신을
처리하는 단 한 가지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승리의 제반 요건을 모두 갖추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면 우리는
총알받이와 다름없는 희생자요, 주님은 악독한 군주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승리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 후에
싸우라는 것은 승리를 쟁취해 오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적장의 목을 가져 오너라!와 같은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아말렉을 맞이해서 승리하는 방법은 손을 들어
기도하고, 칼날로 쳐서 무찌르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방법으로 우리가
할 일은 첫째, 말씀을 마음 가운데 두십시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 속에
숨겼나이다](시119:11). 둘째, 항상 기도하십시오. 셋째,
자기 몸을 절제하십시오. 몸은 주인이 길들이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와 같이 달리되 목표가 없는
것같이 하지 아니하고 또 이와 같이 싸우되 허공을 치는
자같이 하지 아니하며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하게 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 자신이 버림을 받을까 염려함이로다](고전
9:27). 절제는 매우 중요한 덕목입니다.
넷째, 몸을 주님께 내어
드리십시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관례(慣例)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함과 불법에게
종으로 내어 주어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어 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롬6:18).
주님께서 우리 몸을 사용하시도록 하십시오. 우리 몸은 이제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 주인되신
주님께 양도하십시오. 이것을 헌신(獻身)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13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의 백성을 무찌르니라.](13). 여기서 한
가지 더 명심해야 할 것은 이번의 승리가 항구적이고
지속적인 완전한 승리를 보장해 주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아말렉이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아말렉은
다시 도전할 것입니다. 성도는 그때마다 다시 무찔러 주면
됩니다. 이는 우리 안에 있는 육신의 본성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다만 싸움을 걸어올 때마다 무찔러야 합니다.
아말렉은 저와 여러분들을 계속 괴롭힐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패배한 아말렉은 지금 미국에 패배한 탈레반
정부나 후세인 정권처럼 게릴라전을 펼칩니다. 미국은
승전을 선언한 후에도 군인들이 주둔하며, 정찰하고, 치안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
아말렉이 길에서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할지니 곧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길에서 너를 만나 네가
약하고 피곤할 때에 네 뒤를 치되 곧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신25:17-18). 이 수법은 지금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지도자 모세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들은
일차 대상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과 관계성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공격의 빈도는 강력해집니다. 약하고
피곤할 때 쳐들어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속
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지면 낙심하지 않습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썩어
없어지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고후4:16).
때가 되면 거둔다는 소망과 믿음이 있으면 쉽게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행하다가 지치지 말지니 이는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면 정하신 때에 거둘 것임이라.](갈6:9).
우리가 당하는 환란이 곧 영광이란 사실을 알면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바라노니 너희를 위하여
당하는 나의 환난들에 대해 낙심하지 말라. 이것은 너희의
영광이니라.](엡3:13). 주님을 깊이 생각하면 낙심하거나
지치지 않습니다. [/너희는/ 죄인들이 자기를 대적하여
이같이 거역한 것을 견디어 내신 분을 깊이 생각할지니
이것은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히12:3).
주의 징계와 책망은 주님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는 은혜란
사실을 알면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자녀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하시는 권면의 말씀을 너희가
잊었도다. 이르시되, 내 아들아, 너는 {주}의 징계를
멸시하지 말며 그분께 책망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12:5).
끈질긴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눅18:1). 이런 점에서 에베소 교회는 크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교회 내에 있는 악을 척결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사악한 자들을 몰아내고, 장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시험해서 쫓아내었습니다. 그리고 참고 인내하며
수고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또 네가 참고 인내하며 내
이름을 위하여 수고하고 낙심하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2:3)고
칭찬하셨습니다. 순례의 길은 결코 짧은 여행이 아닙니다.
지난 후에는 밤의 경점처럼 짧게 느껴지지만 가고 있는
자들에게는 늘 먼 항해 길과 같게 느껴집니다.
주님은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지치치 않도록 쉽고 단순한 방법을 제시해 주셨는데,
주님을 우러러 보는 것입니다. [소년이라도 기진하고
피곤하며 청년이라도 완전히 쓰러지되 오직 주를 우러러
바라는 자들은 힘을 회복하리니 그들은 독수리같이 날개
치며 올라갈 것이요, 달려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며 걸어가도
기진하지 아니하리로다.](사40:30-31). 주를 우러러 볼 때
아말렉은 함부로 공격해 오지 못할 것입니다.
14-16절입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으로 삼고 또
여호수아의 귀에 그것을 말하라. 이는 내가 하늘 아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철저히 없앨 것임이라, 하시니라.
이에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닛시라 하였으니
그 까닭은 그가 이르기를, 이는 [주]께서 맹세하시기를 [주]가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음이라, 하였기 때문이더라.](14~16).
주님은 반드시 아말렉을 철저히 없앨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새 몸을 입을 때 우리 육신에 대한
모든 기억을 다 잊을 수 있을 것입니다(빌3:20-21). 주님은
우리의 천한 몸을 그분의 영광스런 몸과 같이 변화시켜 주실
것이며, 우리는 육신으로 인해 죄에 대한 유혹이나 어떤
공격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모세는 제단을 쌓았습니다.
구약 성도들은 주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반응으로 제단을
쌓았습니다. 들은 바 말씀이 있을 때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경배와 기도가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주어질 때 우리는 영적 제단을 쌓고 경배해야
합니다. 여호와 닛시란 이름은 주님이 우리의 깃발이란
뜻입니다. 모세는 이후로 주님이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리라
하신 말씀을 믿고 경배했습니다. 이것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경배입니다. 우리 역시 구원받은 후 여호와닛시의
하나님으로 인해 십자가로 육신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신의
모든 영역을 철저히 부수시고, 죽음에 넘겨 버립니다.
모세가 말한 여호와닛시는 신약에서 ‘갈보리의 십자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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