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16:3-36
요절: 출애굽기 16:4
오늘 말씀은 매우 특이한
장면입니다.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하나님께 불평을 했는데,
주님은 그 불평에 대해서 심판하는 대신 하늘에서 빵을
비같이 내리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 불평을
했더니 하나님은 빵을 주셨다! 하나님께 불평을 했더니 물을
주셨다! 하나님께 불평을 했더니 고기를 주셨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성도들의 불평에
응답해 주십니다. 이는 불평이 정당해서가 아닙니다. 때로
하나님은 잘못된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이는 그들을
시험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때로 여러분은 자녀들의 불평과
투정을 들어 줄 때가 있을 겁니다. 이유는 징징대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일 때도 있고, 바라는 것을 줌으로써 그들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게 하려는 목적 때문입니다. 부모님들은
자녀가 요구하는 것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 위해서
그들의 잘못된 요구, 불평을 들어줍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의 잘못된 요구를 반복적으로 들어줌으로써 그것이
점차 쌓이면 한번에 엄한 징계의 매질을 할 수 있습니다.
쉬운 말로 쓴 맛, 뜨거운 맛을 보게 함으로써 다시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 응답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응답되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의 요구에 “안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훨씬 더 좋은
기도 응답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고기 솥 옆에 앉았던
때와 빵을 배불리 먹던 때에 [주]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터이니 이는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전체 회중을 굶주려 죽게 하기 때문이로다, 하니라.](3).
이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너무나 고달픈
생활을 하여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
땅에서 고기 솥 옆에 앉지도 못했으며, 배불리 먹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극언(極言)을 서슴지 않았는데, “[주]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터이니”말입니다. 그들은 이집트
사람들이 하나님의 재앙에 죽어 나갈 때 함께 죽었더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란 말입니다. 물건은 써보아야 알고,
사람은 겪어 보아야 안다는 말대로 이스라엘은 출애굽한지
한달 반만에 하나님을 향해 불평과 불신을 폭발시켜
버렸습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말을 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들은 지금 양식이 없어 굶어
죽는다고 소리쳤지만 현재도 소와 양이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었다’고
주장했는데 이들을 인도하여 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끝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현재가 좋아야 모든 것이 좋다는 입장입니다.
현재가 고생스러우면 과거나 미래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현재가
괴로우면 지난날에 베푸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영적
회복은 받은 은혜를 기억하는데서 출발합니다.
이스라엘 회중이 불평했던
것은 주님의 행하신 바 일들을 잊어버리고, 주님께서 행하실
일들을 기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지난날들에
나를 위해 베푸신 선한 손길을 기억하고, 앞으로 나를 위해
준비해 둔 약속들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하며 기도합시다.
시편 기자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께서 행하신 일들을 곧 잊어버리고 그분의
계략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광야에서 크게 탐욕을
부리고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이에 그분께서
그들이 요구한 것을 주셨으되 그들의 혼은 야위게 하셨도다.](시106:13~15).
그들은 한달 반만에 모든 것을 다 잊어 버렸습니다. 불과 몇
일전의 사건도 잊었습니다. 배은망덕한 인간들이 자주 하는
말이 “너가 언제?”란 말입니다. 이는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입니다. 이들은 반대로 “내가 전에...”란 말도 입에
달고 다닙니다. 남이 한 일은 다 잊고, 자신이 한 일은 다
기억합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이런 자세라면 그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자신을 잊고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강력한 각성제이며, 불평은 자신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잊게 하는 마취제와 같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주님의 은혜가 기억납니다. 찬양하십시오.
주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이 생깁니다. 기도하십시오. 마음
속에 평안과 확신이 찾아옵니다.
마음이 타락한 성도들의
기억 세포는 주님의 은혜를 담아 두지 못하며, 주님이
행하신 일은 모두 지워 버립니다. 대신 온갖 악한 생각과
상상들만 가득 저장해 두었다고 쏟아냅니다. 불평과 불만은
아무리 기억력이 좋은 사람의 머리도 닭대가리, 새대가리로
만들어 버리는데 그들의 기억력의 한계는 3초입니다. 우리는
불평하기 전에 먼저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지난날에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 일들을 기억하며, 나를 위해 예비해
두신 크고 비밀한 일들을 행하실 주님을 기다린다면 언제나
승리할 수 있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능력 있는
일들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먹을 것이 없다면 주님께
부르짖으면 될 일입니다. 현재 상황을 감사함으로 아뢰면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아뢰라.](빌4:6).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불평을 한다고 해서 해결될 것도 없거니와
설령 해결되었다 해도 그 혼은 야위게 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에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빵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날마다 나가서 정한 양을
거둘지니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법 안에서 걷는지 걷지
아니하는지 내가 그들을 시험하리라.](4). 주님은
백성들의 불평에 대해서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빵을 비같이 내리리니’입니다.
주님이 빵을 내리신 목적은 이스라엘을 시험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빵을 주심과 동시에 이들이 해야 할
일도 주셨습니다. 빵은 매일 거두어야 합니다. 빵은 정한
양만 거두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는 매우 쉬운 법이지만
이스라엘은 이 쉬운 법을 잘 지키지 못했습니다. 여섯째
날에는 두 배를 거두고, 안식일에는 거두어서는 안됩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빵은 백성들의 배를 채우는 것 외에
가르침의 요소가 풍성했습니다. 이를 통해 저녁에는 주님을
알게 되고, 아침에는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8-9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이들의 불평을 들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와 찬양만 들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불평과 탄식, 신음 소리까지 다 들으십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항상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늘에서
내린 빵, 만나에 대해서 좀 살펴보겠습니다. 만나는
초자연적 선물이었습니다. 인간이 땀흘려 만든 것이
아닙니다. 기도해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내려 주신 선물입니다. 만나는 땅의 소산물이
아닙니다. 인간의 상품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집트에서
가져 온 것도 아닙니다. 이집트에는 만나가 없었습니다.
만나는 하나님이 주신 초자연적인 선물이었습니다. 16절에
따르면 각 사람마다 1오멜씩 취하게 하셨는데, 2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먹으려면 200만 오멜이 필요합니다. 오멜은
에바의 십분의 일에 해당하는데 오늘날 도량형으로는 2.3리터
정도입니다. 이곳 단위로는 매일 900만 파운드며, 4500 톤에
해당하는 양입니다. 만약 이 정도 양을 차로 실어 나르려면
15톤 짜리 트럭 300대가 매일 밤마다 광야를 달려야 하는
분량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 얼마나 풍성합니까?
아무리 많은 사람이라도 먹일 수 있으며, 부족함이 없습니다.
주님은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며,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만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만 내렸습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영을 덮었고 아침에는 이슬이 군대
사방에 깔려 있더라. 깔려 있던 이슬이 올라가니, 보라,
광야의 지면에 둥글고 땅 위에 내리는 흰 서리같이 작은
것이 있으므로](13-14). 백성들은 만나를 거두기 위해서
멀리 떠날 필요가 없었습니다. 메추라기는 진영을 덮었고,
만나는 군대 사방에 깔렸기 때문에 문을 열면 바로 그곳에
있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 역시 마찬가지란 점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영적
진리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만나가 이스라엘 진영 곁에
있었듯이 하나님의 말씀 역시 그렇습니다. 신명기 30:11-14절에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가 이 날 네게 명령하는 이 명령이
네게 숨겨진 것도 아니요, 멀리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라.
이것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로 하여금 듣고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건너에 있는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로 하여금 듣고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나니 그러므로 네가 그것을
행할 수 있느니라.](신30:11~14). 여러분은 결코 성경이
너무 어려워서, 너무 멀리 있어서 행하지 못했다는 변명을
할 수 없습니다. 만나는 손으로 거두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만나는 그냥 발에 밟힙니다.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을
거두어 양식으로 취하지 않는다면 진리는 여러분의 발에
짓밟히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흔히 사람들은 성경이 매우
어려운 책이라고 말합니다. 또 아무나 읽고 이해할 수 없는
책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는 그렇게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도 주변에 언제나 진리를
배치해 두셨습니다.
만나는 크기가 매우
작았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깔려 있던 이슬이 올라가니,
보라, 광야의 지면에 둥글고 땅 위에 내리는 흰 서리같이
작은 것이 있으므로](14). 하나님은 거대한 바위
덩어리만한 것들을 내려 주셔서 쪼개고 잘라서 먹는 것이
아니라 매우 작은 흰 서리 같은 만나를 주셨습니다. 만나
하나는 마치 쌀 알갱이 하나처럼 작았습니다. 모양은 각진
곳이 전혀 없이 둥글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예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 글자 한 글자가 조합되어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고, 책이 됩니다. 우리는 매일 성경을
전부 통독하거나 다 읽지 못합니다. 다만 오늘 필요한 만큼
읽으면 됩니다. 그렇게 몇 줄, 몇 문단, 몇 페이지 읽은
말씀이 오늘 내가 하루를 살아 갈 수 있는 충분한 양식이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만나를 거두기를 거부하듯이 성경을
읽기를 거부한다면 여러분은 그날 굶어야 합니다. 만나를
매일 일정량을 거두어야 하듯이 여러분은 매일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의 장, 절은 매우 짧습니다. 어떤 절은
다 두 단어로 되어 있는 것도 있습니다(Jesus wept).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구절들이 다섯 단어로 되어 있기도 합니다(You
must be born again). 이런 작은 구절들이 우리 영혼의 뼈대가
됩니다. 여러분들은 크기가 작은 만나를 모아서 한 오멜을
취하듯이 잘게 잘게 쪼개진 성경의 각 구절들을 취해서
여러분의 양식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만나는 흰색이었습니다. 14절에서는
흰 서리 같다고 했고, 31절에서는 고수풀 씨 같이 희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집이 그것의 이름을 만나라
하였더니 그것은 고수풀 씨같이 희고 그 맛은 꿀로 만든
과자 같았더라.](31). 성경이 특별히 색을 밝혀 놓은 것은
색에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흰색은 순결을
상징합니다. 주의 말씀은 순수한 말씀입니다(시12:6).
사무엘하 22:31에, [하나님으로 말하건대 그분의 길은
완전하고 [주]의 말씀은 단련되어 /순수하니/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가 되시는도다.](삼하22:31, 시18:30)라고
한 그 대로입니다. 시편 119:140에 [주의 말씀은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그것을 사랑하나이다.](시119:140)고
했으며, 잠언 30:5에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순수하며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방패가 되시느니라.](잠30:5).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한 젖이라고 했습니다(벧전2:2).
만나는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만나의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나는 구경하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만나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신체적 허기를 채워 줄 목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는 성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관해 두거나, 잘 보이는 서랍장에 넣어 두는 것이
아닙니다. 만나를 먹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광야의 여행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을 통해 영적 양식을
섭취하지 않으면 성도는 결코 순례자요, 나그네로 이 땅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욥이 그러했듯이 우리는 일용할
양식보다 말씀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욥이 극심한
시험 속에서 인내의 본으로 제시되면서 승리한 비결은 그의
타고난 천성이나 인품이 본래 그러했기 때문이 아니라
날마다 말씀을 먹음으로써 속 사람이 강건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분의 입술의 명령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내게
필요한 음식보다 그분의 입의 말씀들을 더 귀히 여겼도다.](욥23:12).
만나는 날마다 거두어야
했습니다. 주님은 오늘 나가서 내일의 몫을 거둘 수 없게
하셨습니다. 몇몇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런 시도를 했지만
결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아침에 내일 아침
식사까지 함께 할 수 없듯이 영혼의 양식 역시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매일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규칙적인 식사가 육신의 건강에 매우 중요하듯이 규칙적인
성경 읽기야말로 영혼의 건강을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만나는 아침에 거두어야
했습니다. 여러분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묵상과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만나를 아침에 거두어야 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주님이 새벽 별이요, 주의 말씀이 새벽
이슬에 비유되었다면 우리는 아침 일찍 주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새벽을 깨우는데 실패하면
결코 기도하는 시간과 성경 묵상의 시간을 내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경험적으로 이 사실을 잘 압니다. 따로
일터로 가지 않는 목회자인 제가 늦게 일어나도 기도와 말씀
묵상에 차질이 생기는데, 일터로 가야하는 여러분들이
새벽에 묵상과 경건의 시간을 놓친다면 하루 종일 굶어야 할
것입니다.
만나는 은혜로 주어졌지만
그것을 취하는 것은 백성들 각자의 몫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그들의 입속에 떠 먹여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값없는 은혜들을 취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몫입니다. 캘빈주의자들은 이런 것조차
하나님의 전적 은혜의 교리에 위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믿는 것조차 우리의 행위가 될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믿는 것은 우리의 몫이며, 주님이 제시하신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 역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데는 수고가 따릅니다.
이런 수고를 게을리 한다면 결코 성경의 진리를 배울 수
없을 것입니다. 아주 작은 만나를 식구별로 한 오멜씩
거두려면 시간이 소요되며, 수고가 필요합니다.
만나를 거두기 위해서는
몸을 웅크려야 합니다. 만나는 지면 위에 내려앉았기 때문에
몸을 굽히지 않고서는 만나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생명의 말씀을 취하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거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두는 자세 역시 중요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무릎을 꿇고 주님을 전적으로 의존해서 말씀의 양식을
취해야 합니다. 겸손한 자들은 진리를 쉽게 깨닫습니다.
주님은 겸손한 자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며, 몸을 숙이고,
무릎을 꿇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미국의 유명한 전도자였던
헤리 아이언사이드 목사가 젊은 때 경험했던 간증을 한토막
들려 드리겠습니다. “그는 어느 동네에서 프레이저 씨의
천막에 이르자 헤리는 자기를 소개하고 가벼운 인사말을
나눈 후 노인에게 자기는 복음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데 힘쓰고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아 그렇소?"
늙은 하나님의 종이 말했습니다. "잠시 여기 앉아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 함께 얘기해 봅시다". 그런 다음
그는 다 낡아 헤어진 그의 성경을 펼치고는 한 동안, 기력이
거의 쇠진해질 때까지 여기 저기를 들춰가며 하나님의
보배로운 말씀의 진리를 하나씩 하나씩 열심히 제시해
보였습니다. 그의 성경 해설이 너무도 쉽고
흥미진진했으므로 젊은 아이언사이드는 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감동 속에 이들 진리들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젊은 설교자의 빰을 타고 눈물이 흘러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노인께서는 어디서 이런 교훈들을 얻으셨는지요?"
헤리가 물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진리들을 알려줄 책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제게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노인께서는 이들 진리들을 신학교에서 배우셨는지요?"
헤리는 프레이저 씨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을 그는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난 이 진리들을 아일랜드 북부의 한 작은 시골 농가의 진흙
마룻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배웠소. 거기서 내 앞에 펼쳐진
이 성경을 가지고 나는 한 번에 수 시간씩 무릎을 꿇고는
하나님의 성령께 내 영혼에 그리스도를 계시해 주시고 내
심령에 말씀을 비춰주시기를 간구했소. 그분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성경 학교나 신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그 진흙 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있는
나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오" [아이언사이드의 생애]
중에서(전도출판사).
만나는 어떤 사람은 더
많이 거두었고, 어떤 사람은 적게 거두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그와 같이 하여 거두되 많이
거두는 자도 있고 적게 거두는 자도 있었으나](17). 이는
성경을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많이 거둔다고
남지 않고, 적게 거두는 자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언제나 차고 넘칩니다.
모은 만나는 반드시
사용해야 합니다. 만나는 모아서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거둔 만나는 반드시 먹어야 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도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으나](19).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반드시 사용해야 합니다. 배우 지식은
사용되어야만 합니다. “믿고 실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한 교리로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처럼 어리석고
의미없는 일은 없습니다. 생활과 동떨어진 진리는 성경적인
관점에서 결코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보다 못한 것이거나
진리와 전혀 다른 것입니다.”(A.W Tozer). 여러분이 듣고 배운
영적 진리들을 실천하지 않고, 그대로 두어서는 안됩니다.
만나는 자연인들이
보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그것을 보고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은 만나라,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것은 [주]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빵이라, 하니라.](15). 불평을
토로하고 불신에 빠졌던 이스라엘 자손은 보고도 알지
못했습니다. 만나란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이것이
무엇이냐?”란 물음에서 나왔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평과 불신에 빠진 성도는 결코 주님이 주신 은혜를
발견하지 못하며, 주님이 주신 선물을 보고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연인들은 결코 성경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고전2:14).
자연인들은 결코 십자가의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었듯이 먼저 깨달은 사람들이 진리를
가르쳐 주어야만 합니다.
만나는 멸시받았습니다.
민수기 11:4-6절에는 섞여 사는 무리들이 만나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에 빠지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소리내어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까? 우리가
이집트에 있을 때에 마음대로 먹었던 물고기와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양파와 마늘이 생각나거니와 이제는 우리의
혼이 메마르고 이 만나 외에는 우리 눈앞에 아무것도 없도다,
하니](민11:4-6). 이스라엘의 무리 가운데는 섞여 사는
무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불평을 선동했습니다. 이들은
만나를 멸시했습니다. 이들은 마치 오늘날 교회에는
나오지만 가짜 크리스찬들과 같습니다. 이들에게 성경은 늘
불평의 대상입니다.
만나는 언약궤 안에
보관되었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일 오멜을 가득히
담아 [주] 앞에 두어 너희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하니](33). 히브리서 9:44에 따르면 만나는 언약궤 안 금
항아리 속에 담았습니다. [거기에는 금 향로와 돌아가며
금으로 입힌 언약궤가 있고 이 궤 속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히9:44).
이스라엘 회중들의 천막에서는 유효기간이 하루밖에 되지
않던 만나가 언약궤 안의 금 항아리 속에서는 40년이
지속되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자신의 말씀인 성경을
어떻게 철저하게 보존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위대한
모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제의 양식으로 오늘을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매일 무엇을
먹었으며,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를 명백하게 제시해
주십니다.
만나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그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땅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35).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떠함에
상관없이 그들에게 만나를 공급하셨습니다. 그들이 불신과
불순종으로 우상 숭배에 빠졌을 때도 만나가 중단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마지막 때, 배교의
시대에도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거두어 가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양식이 없어서 먹지 못하는
일은 없습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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