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16:1-2
요절: 출애굽기 16:2
출애굽기 16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는
장면입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가장 기본적인
필요가 먹는 문제라는 점에서 빵이 비같이 내리는 일은 꿈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먼저 당했던
시험은 물이 없는 문제였고, 다음은 빵이 없는 문제였습니다.
이 둘은 인간이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가장 집착하는
문제입니다.
광야에서 첫 번째 당했던
갈증의 문제는 마라의 쓴물이 단물로 바뀜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엘림에서 그들은 갈증을 완전히
해결했습니다. 민수기 33장에는 그들이 진을 친 장소들이
차례대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엘림에서 움직여 홍해 옆에
진을 쳤고](민33:10). 이 말씀을 통해 이들이 엘림과 시내산
사이의 신광야는 홍해 옆이란 사실이 분명합니다. 이제
이집트를 떠난 지 한달 반이 지났습니다(1). 성경은 인명과
지명, 날짜를 정확히 기록함으로써 역사적 가치를 한층 높여
줍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그때는/
이집트 땅에서 그들이 떠난 뒤 둘째 달 십오일이더라.](출16:1).
모세는 40년을 광야에서 양을 치며 생활해 본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양떼들인 이스라엘을 이끌면서 광야의
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광야의 여행은
하나님의 도움없이는 아무도 살아 날 수 없습니다. 이미
한달 반을 버텨온 것도 주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백성들 중에
노약자와 어린이, 여자들은 탈진하거나 병으로 쓰러져
인구가 절반은 줄어들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명의
사망자나 병자도 없었습니다. 이는 마치 저 하늘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요 나그네인 성도들의 일생에서 아무도
잃어버리지 않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의 전체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며](2).
16장에는 무려 여섯 번에 걸쳐 불평이란 말이 나옵니다(2,7,8,9,12).
불평은 불신의 표현이며, 반역의 첫 단계입니다. 불평은
은혜와 감사를 저 버린 행위입니다. 불평의 순간 우리는
지금까지 받았던 모든 은혜를 무효로 돌리게 됩니다.
이스라엘 역시 불평함으로써 이집트에서 얻었던 은혜,
홍해의 기적, 마라에서의 보살핌과 긍휼을 일거에 무효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고
배반하는 죄를 짓기 전에 그가 먼저 불평하는 무리 속에
있었으며, 함께 동조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겟세마네에서 깨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던 것
이전에 이미 패배했습니다. 마가복음 14:4,5절에는 신약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요, 주님이 세세토록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함께 전파되도록 하신 향유가 든 옥합을 깨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님께서 가장 위대하게
평가하신 아름다운 헌신을 두고 사람들은 분개하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속으로 분개하여
이르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느냐?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향해 불평하매](막14:4,5).
여기서 분개하고 불평한 어떤 사람들이란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정체는 마태복음 26:9입니다. [그분의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같이 허비하느냐?](마26:8).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비하는 여인을 향해 분개하고
불평했던 제자들은 모두 주님을 버리고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 때 단 한 명이라도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듯이 책망하고
바로 잡아 주었더라면 그들은 실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불평은 불만족에서 옵니다.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입니다. 만족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주의
손을 여시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시145:16).
주님은 여러분의 소원을 아시며,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의 탐욕과 욕심을 만족케
해 주실 수는 없습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며 풍요를 사랑하는 자도 소출로 만족하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5:10)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죄는 만족이 없습니다. 정욕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지옥의
입은 만족이 없습니다.
연초에 우리 나라
사람들은 ‘올해는 소원하시는 일이 다 이루어지기를
빕니다.’란 연하장을 보냅니다. 소원성취하소서! 새해
인사말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소원합니까? 소원 성취의
비결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이 비결을 배우시고 마음과
입술에 불평을 모두 제거해 버리시기 바랍니다.
소원 성취 비결의 첫 번째
방법은 시편 145:19입니다. [그분께서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그들을 구원하시리로다.](시145:19). 여러분들은 대부분
자신의 소원 성취를 위해 부단히 애를 쓰기도 하고, 공부도
하고, 유경험자들이나 선배들, 전문가들의 조언을 구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물론 기도를 많이 했을 것입니다. 소원이
너무 더디게 이루어지거나 아직 응답이 없어서 마음이 상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불평이 이미 터져 나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말씀을 봅시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부르짖음에 앞섭니다.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주님께 많은 말을 잘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소원 성취의 비결 두 번째
방법은 시편 10:17입니다. [[주]여, 주께서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예비하시오며 주의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시10:17).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겸손한 자에게 더 많은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십니다. 그것이 죄의 용서이든지 성령 충만이든지,
지혜를 구하는 것이든지 무엇일지라도 주님은 그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소원 성취의 비결 세 번째
방법은 시편 37:4입니다. [너는 또 [주]를 기뻐하라.
그분께서 네 마음의 소원들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라.](시37:4).
주님을 기뻐하는 것은 우리의 힘입니다. 주를 기뻐하는
것이야말로 예배의 본질이며, 경배의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성도들을 향해 [항상 {주}를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고 권면했습니다. 주를
기뻐하며 찬양하고, 주를 기뻐하며 감사하는 일이야말로
우리 영혼의 참된 만족을 가져다 줍니다. 저는 이상 세 가지
중요한 영적 원칙을 제시해 드렸습니다. 말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탐욕과 탐심이
가득한 죄인인지라 좀처럼 만족을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만족하라고 하십니다. 첫째,
받은 급료로 만족하라. 침례인 요한은 [..너희가
받은 급료로 만족하라](눅3:14)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고액
연봉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을지 모릅니다. 주님은 고용주들에게
품꾼의 삯을 갈취하지 말고, 해가 넘도록 지급을 미루지
못하도록 엄히 명하셨지만 악한 주인들은 잘 지키지
않습니다. 한 달 죽도록 일해서 쥐꼬리 봉급만큼 받는
사람들은 저절로 불평이 터져 나오게 마련입니다. 어떤 때는
그나마 월급을 떼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님! 저는
급료에 만족하려고 해도 이번 달은 돈을 받지 못했습니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했는데
불평이 터지는군요! 라며 주님께 자신의 소원을 쏟아
내십시오. 우리는 성인 군자도 아니고, 초인들도 아닙니다.
불신자들과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그런 상황에서 불평을
발하지 않고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이며, 십자가에 못박힌 성도의 삶입니다. 이런 때
불평하지 않고 주님 앞에 기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신음하는 것이 주께 감추어지지 아니하였나이다](시38:9).
둘째,
너희가 가진 것들로 만족하라. [너희 행실을
탐욕이 없게 하고 너희가 가진 것들로 만족하라. 이는
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라.](히13:5). 현대인들은 한
세기 전의 사람들보다 참으로 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생활
규모가 커지고, 그만큼 복잡해졌습니다. 예전에 테이블이
없으면 사과 궤짝(박스)를 엎어놓고 밥상으로 썼습니다.
쇼파가 없으면 헌옷이나 신문지를 깔고 앉았습니다. 그래도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됩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변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의식이
변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백화점을 한 번 돌아보면 다 필요한 것들처럼 보입니다.
저것은 꼭 있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생활을 단순화하십시오.
우리는 대부분 없는 것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들이 다시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셋째,
처지에 만족하라. 사도 바울은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 이는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대로
만족하기를 배웠음이라.](빌4:11).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수고하고 공부하고, 땀흘리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맥이 빠지게 하는 말씀 같습니다.
오늘날 강단은 성경과는 반대로 성도들에게 현재의 처지에
만족하지 말고 끊임없이 주님께 더 많은 것을 요구하라고
합니다. 탐욕을 촉구하는 설교에만 아멘!으로 화답하는
성도들은 결코 영적인 것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처지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만이 주님을 위해 시간을 낼 수
있고, 헌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환경이 아니라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구중 궁궐에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초가삼간에도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족하는 법은 배워야 합니다.
넷째,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만족하라. [그러나
만족함이 있는 경건은 큰 이득이 되나니...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니라.](딤전6:6,8)고
했습니다. 아마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성도들은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말씀에 대해서도 불평할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먹을 것과 입을 것, 그것으로
만족하라고 할 수 있는가? 투덜대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평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말합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불평하다가 파멸시키는 자에게 멸망을
당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불평하지 말라.](고전10:10).
교회의 분란도 처음에는
불평에서 시작합니다. 초대 교회의 공동체에도 불평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는 배급 문제로 불평이
터졌습니다. [그 무렵에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났는데
그리스 말 하는 사람들이 자기 과부들이 날마다 주는
배급에서 빠지므로 히브리 사람들에게 불평을 터뜨리매](행6:1).
불평은 결코 주님의 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불평은
마귀의 영에서 나온 것입니다. 유다서에는 영벌받을 자들을
언급하며 이들의 특징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들은
투덜거리는 자들이요, 불평하는 자들이며 자기 정욕대로
걷는 자들이라. 이들의 입은 크게 부풀린 말을 하며 이득을
위하여 사람의 외모에 감탄하느니라.](유1:16).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불평하지 말라. 불평이 없이 하라 엄히 명령하고 있습니다.
불평은 불신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불평하고 직장 동료들은 상사에게, 상사는 부하 직원에게
불평하고,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불평하고, 선생님은
아이들이 어떻다고 불평할 때 제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불평은 관계성의 파괴 외에 아무 것도 생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일을 행하되 불평이나
시비가 없이 할지니](빌2:14)라고 합니다. 어떤
일에서도 불평하며 할 일이라면 안 하는 것이 낫습니다. [서로
대접하되 불평이 없이 하라.](벧전4:9). 형제들 간에는
특히 서로 불평해서는 안됩니다. 불평은 정죄를 받는
일입니다. [형제들아, 서로 불평하지 말지니 그리하여야
정죄를 받지 아니하리라. 보라,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시느니라.](약5:9). 이스라엘 회중이 집단적으로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을 할 때 주님은 이미 거기에 계셨고, 그들의
불평을 듣고 계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막
불평하고 있는데 누가 문 앞에서 귀를 기울이고 그 불평을
다 듣고 있습니다. 개나 고양이, 새나 쥐가 듣는 것이 아니라
불꽃같은 눈동자를 지닌 주님이 가만히 서서 듣고 계십니다.
학교 다닐 때 친구들이 화장실에서 어떤 선생님의 욕을 막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시는 분이
막 욕하고 있는 선생님이었습니다. 그것도 학교에서 가장
악질로 소문난 선생님이었는데, 아이들은 얼굴 색이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 한 아이가 하는 말, “올 해 내 인생은
끝났어!”였습니다. 군대에서도 이런 경험이 많습니다. 한참
고참 욕을 하는데, 어디선가 들려 오는 말 ‘나 여기 있어!’였습니다.
그의 군 생활은 거기서 종말을 고했습니다. 그렇다면 심판자
하나님께서 문 앞에 서 계시다면 얼마나 더 무서워해야
하겠습니까?
감사와 찬양이 우리
입술의 열매라면 불평과 투덜거림은 저주의 기도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원수들을 향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먹을 것을 찾아 위아래로 헤매게 하시고 만족하지
아니하여 불평하게 하소서.](시59:15). 여러분이
만족하지 아니하고 불평하는 것은 저주받은 죄의 결과요,
저주받은 아담의 본성이란 점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으로
만족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전도서 기자의 말대로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아니하고, 귀는 들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전1:8).
-안목의 정욕은 채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며 풍요를 사랑하는 자도 소출로
만족하지 못하나니...’(전5:10)라고 한 대로 물욕(物慾)은
결코 채워 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훈련하는 곳이 광야입니다. 광야는 볼 것이 없습니다.
아름다운 숲이나 나무나 폭포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걸으면서 여기에 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광야는 안목의 정욕을 자극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광야는 물욕을 채울 수 없습니다.
거기는 젖도 꿀도 어떤 소출도 거둘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둘을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이 두 가지를 차단함으로써 인생의 자랑을
없애 버리셨습니다. 그렇다면 광야에서 그들이 무엇으로
만족하며, 인생의 맛을 느끼고,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는 이 세상을 살면서
무엇으로 만족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만족을 아는
삶을 위해서 우리는 광야를 여행하면서 육신의 무기력함과
하나님만 의존하는 믿음과 영적 가치관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로 말하건대 나는 의로운 가운데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내가 깰 때에 주의 모습으로
만족하리이다.](시17:15). 다윗은 작정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였고, 주의 말씀으로 자신을 지켰습니다(3,4)
그래서 불평을 할만한 환경에서 오히려 주의 모습으로
만족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주의 모습으로
만족하시기를 바랍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은 이런 경험이 있을 겁니다. 아버지가 아이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많이 사 주었습니다. 아이는 신나서
정신없이 그것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놀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아버지가 없었습니다. 아이를 떼 놓기 위해서 장난감을
사 준 것인데 그는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것을 안
후에는 그렇게 재미있게 놀던 장난감이 더 이상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 아이의 만족은 장남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하나님이
주시는 여러 가지 은혜의 선물들, 재능들, 물질로 인해
정신없이 자기 인생을 살다 보면 어느덧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지? 모든 은혜의 선물은
아버지와 함께 할 때 만족을 주는 것이지 아버지가 없을
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저녁때에 아버지가 올 때
아이들은 장난감을 팽개치고 아버지에게 달려갑니다.
아이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만족하는가? [오 새벽에 주의 긍휼로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가 평생토록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시90:14).
주의 긍휼입니다. 시편 90편은 모세가 쓴 시편입니다. 모세는
매일 40년을 한결같이 새벽에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모세는 주님의 크신 긍휼을 늘
목격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불평을 들으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만나를 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새벽은
주님이 주신 만나를 거두는 시간입니다. 새벽은 주님이
기도하신 시간이며, 다윗이 비파와 하프를 들고 주를 찬양한
시간입니다. 새벽은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이동한 시간이며,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새벽부터 성경을 읽게 했습니다.
새벽을 깨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새벽별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새벽 이슬과 같습니다. 고로
우리는 새벽에 주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범죄 할지라도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늘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깁니다. 긍휼은 은혜를 부어 줍니다. 주의
긍휼로 인해 우리는 만족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없다면 우리는 벌써 심판 받아 멸망하고 없을 것입니다. [나로
말하건대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긍휼을 누리고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두려워하며 주의 거룩한 전(殿)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시5:7). 주의 풍성한 긍휼을 외면하면
우리의 혼은 황폐하게 됩니다. 모두 주님의 풍성한 긍휼을
누리심으로 만족하고, 평생토록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생이
되기를 빕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만족하는가? [주께서 택하시고 주께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거룩한 전(殿)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65:4). 오늘날 우리는 시편 기자가
노래한 것처럼 성전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를 기록한
다윗 때에도 성전은 없었습니다. 성전은 아들 솔로몬이
건축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솔로몬의 성전에 관한
말씀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예언적인 말씀입니다.
천년 왕국에서 주님 앞에 있게 될 모습을 말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성전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지만
주님은 그것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진다고
하셨습니다. 성전이 하나님을 위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전을 위대하게 합니다. 모든 이방 성전(신전)은
그 안에 있는 신상이나 금이나 각종 보물들 때문에 가치가
있지만 하나님의 성전은 성전의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가치가 있습니다. 성도는 주님의 보좌 앞에서
주님과 친교하는 기쁨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배를 통해서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이 피로 사신 몸된 교회의 일원이며, 그 교회를
구현하는 지역 교회에서 찬양과 경배와 기도를 드림으로써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만족할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만족하는가? [이는 그분께서 사모하는 혼에게(longing soul)
만족을 주시며 주린 혼에게 선하심으로 채워 주시기
때문이로다.](시107:9). 의를 사모하는 혼, 말씀을 사모하는
혼, 주님을 사모하는 혼, 진리를 사모하는 혼, 하나님의
왕국을 사모하는 혼...뭔가를 사모하는 혼에게 주님을
만족을 주십니다. 여러분이 아무 것도 사모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채움 받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설레는
기대감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상응하는 만족을 얻게
될 것입니다. 불평을 하지말고, 주님으로부터 기대하십시오.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Expect Great Things from God!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Attempt Great Things for God!’고
외쳤습니다. 사모하는 혼이란 비젼이 있는 혼을 말합니다.
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합니다. [환상이 없는 곳에서는
백성이 망하려니와 법을 지키는 자는 행복하니라.](잠29:18).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바로 Vision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사모하는 혼에게 주님은 만족을 주십니다.
여러분은 교회의 부흥을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여러분은
자신의 영적 부흥과 성장을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가족,
친지들의 미적지근한 신앙이 변화 받도록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주님은 사모하는 혼에게 만족을 주십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만족하는가? [[주]께서 너를 항상 인도하사 가뭄
속에서도 네 혼을 만족시키시며 네 뼈를 기름지게
하시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으리라.](사58:11).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인도하시는 주님의 손길 아래서 혼의 만족보다 육신의
만족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필요를 알아서 채워 주시는
주님보다 꼭 먼저 불평을 발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항상
인도하심으로 인해 만족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도, 가뭄
속에서도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에 우리 혼은
만족할 수 있습니다. 항상 주님의 인도를 받는 혼은 물댄
동산,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인생입니까? 주님이 나의 목자란 사실을
감사하고 찬양하십시오. 내가 주님의 어린 양이란 사실에
감사하십시오. 불평할 틈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혼은
만족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무엇으로 만족하는가? [또 내가 기름진 것으로 제사장들의
혼을 흡족하게 할 것이요, 내 백성은 나의 선함으로
만족하게 되리라. [주]가 말하노라.](렘31:14). 불평으로
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님은 그들을 다시
회복킴으로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하시고, 백성들은
그것으로 만족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바빌론 70년 포로 생활의 징계를 통해서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았습니다. 이 말씀은 천년 왕국 때 문자적으로
성취될 예언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신약 성도들은
주님의 선함을 늘 맛보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오 /너희는/
[주]의 선하심을 맛보고 알지어다.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시34:8)라고 노래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은과 금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보는
것과 듣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이런 것으로 충분히
만족을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만족케 하시는
것을 누리지 못한 채 일생동안 불평으로 날을 지새우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비참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들의 입에서 불평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불평은 마귀가
성도들에게 주는 올무입니다. 불평은 누구도 세워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 생활에도 철저하게 갈보리의
십자가를 적용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입술에 할례를
행해주시고, 우리 혀를 정결케 하시고, 그 피로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 주시도록 기도하십니다. 2,000년 전에
십자가에 흘린 보혈과 그 죽음이 현재 우리 안에서
지속적으로 역사 하도록 우리 자신을 기꺼이 주님께 내어
드립시다. 불평과 불만족 대신 감사와 만족의 인생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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