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15:11- 22
요절: 출애굽기 15:11
인간의 잠재된 욕망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신(神)이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식욕이나 성욕과 달리 신이 되고 싶다는 욕망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에덴의 낙원에
죄성이 없던 이브도 마귀의 이 한마디 말에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란 말입니다.
이 말이 얼마나 강렬하였던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어겨가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습니다. 이후의 인간들은 누구라도 신들이 되고자 하는
끝없는 욕망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그 말이 ‘해탈’이든
‘성불’이든 ‘군자’이든 ‘성인’이든 ‘초인’이든 ‘신선’이든
간에 한계 상황을 초월하고픈 신(神)이 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가나 단전 호흡이나 선도
수련이나 이들의 하나같은 목적은 초월 의지의 실천입니다.
모든 종교는 마귀가 여자에게 속였듯이 인간들에게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라는 교리를 가지고 속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이것입니다. [이는 비록
하늘이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들이 있어 (신도 많고
주도 많으나) 우리에게는 오직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이니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분
안에 있으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니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느니라.](고전8:5).
구원받은 기독교인들도
알게 모르게 초인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초인이 되어 보고자 하는 욕망이 가득한 사람들이
신비주의와 은사주의로 빠지며, 거짓 표적과 능력에 속아서
마귀의 종노릇을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종교적 본성이 있고,
앙천(仰天)의지가 있다고 합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우리를
초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죽음에 처해 버립니다.
십자가는 세상 지혜와 육신의 힘과 능력을 파괴해 버립니다.
기독교는 세상의 모든 종교가 추구하고 나가는 것과 정반대
방향입니다. 하지만 변질된 기독교는 세상과 동일한 목표와
동일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무지한 목사들은
사도들의 표적을 지녀야 사역을 할 수 있는 줄로 압니다.
이런 표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권능)을 얻기 위해 40일 금식
기도를 하고, 용하다는 목사님들에게 안수를 받고, 별별
미친 짓을 다합니다. 성도들은 성령 세례나 성령 체험을
받아야만 구원받은 줄로 압니다. 그러나 갈보리의 십자가는
성도들에게 초인 의지, 초월자가 되라고 말씀하는 대신
연약함을 자랑하라고 말합니다. 전지전능한 힘과 지혜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에 처해지라고 말합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는 초인(超人)이 아니라 힘과 지혜가
바닥난 늙은 노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초인(超人)이
아니라 성도들 사이에서 약하고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
사역했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2:3). 그가 말년에 자신에
대해 깊이 깨달은 한 가지는 드디어 나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도다! 나는 신이 되었도다!가 아니라 [죄인들 중에
내가 우두머리니라](딤전1:15)였습니다.
성도들은 사자처럼
담대하지만 칼날이 닥쳤을 때 파리처럼 죽어 가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타종교나 무속 신앙을 믿는
사람들과 동일한 종류의 믿음이나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의 찬양
중에 가장 압권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오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으신 이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 속에서 영화로우시며
찬양할 만큼 두려우시며 이적들을 행하시는 이가
누구니이까?](11). 모세는 하나님의 전능하시며
위대하신 사역을 목격한 후에 놀라움과 감탄을
연발했습니다. 이분은 그동안 이집트 사람들이 숭배하던
태양신 라(Ra), 하늘의 여왕, 나일강의 수신들, 이스라엘
사람들이 들었던 수많은 신(神)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이방 민족들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자신들의 머리 수만큼이나 많은 신들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이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을 보면
인간보다 더 더럽고 추악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매우 무식하거나 한(恨)을
품고 있습니다. 중국의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힘은 있지만
지혜가 없습니다. 바빌론에는 3,000여종이 넘는 신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호흡도 없고, 지각도 없었습니다.
아테네에는 신들이 너무 많았는지라 사람들이 다 섬기지
못해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란 푯말도 있었습니다.
그런 신들 가운데 주와
같으신 이가 누가 있습니까? 전에 대학교에서 ‘증산도’,
‘대순진리교’란 민족 신을 섬기는 학생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제가 성경을 가지고 있자, 왜 한국인이
유대 민족의 신인 여호와를 섬기느냐?며 항의를 했습니다.
그들은 단군을 상제로, 강 증산을 메시야로 섬기고 있었는데
단군이 언제 홍해는 고사하고 한강 물이라도 갈라 본 적이
있습니까? 단군이 언제 왜적을 부산 앞 바다에서 수장을
시킨 적이 있습니까?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우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는 만백성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나 [주]는 하늘들을 만드셨음이로다.](대상16:26).
실제로 성경에는 신들이라
불리는 존재들이 있었습니다(창6). 그들은 천사들로서
타락하여 이 땅에 내려와 많은 악한 일들을 행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여 거인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운명은 사람들과 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라. 너희는 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자녀들이라, 하였으나 너희는 사람들같이 죽을 것이요,
통치자들 중의 하나같이 넘어지리로다.](시82:6~7). 결코
주님과 비교할 수 있는 그런 존재들일 수가 없습니다.
신들이라 불리는 자들의 운명이 사람과 다름없이 죽고,
넘어진다면 그런 존재를 믿고 섬기는 인간은 얼마나 허망한
존재들입니까?
주님과 비기겠다고 스스로
나선 존재가 있었는데 그는 루시퍼였습니다. [이는 네가
네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내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의
별들 위로 내 왕좌를 높이리라. 또 내가 북쪽의 옆면에 있는
회중의 산 위에 앉으리라. 내가 구름들이 있는 높은 곳 위로
올라가서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같이 되리라, 하였음이라.](사14:13~14).
그는 비교를 불허하는 주님의 권위와 위엄에 스스로
도전장을 내었는데 그 역시 결과는 좋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너는 끌려가 지옥으로 곧 그 구덩이의 옆면으로
내려가리로다.](사14:15). 타락한 천사나 사악한 자들이나
마귀나 운명은 다 같습니다.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는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자신을 높여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도록 할 것입니다. [그는 대적하는 자요,
하나님이라 불리거나 혹은 경배를 받는 모든 것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로서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살후2:14). 그러나 그 역시
결과는 산채로 불 못에 던져지고 맙니다. 우리는 세상 어느
누구도 감히 하나님과 비교가 될만한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오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으신 이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 속에서 영화로우시며 찬양할 만큼 두려우시며
이적들을 행하시는 이가 누구니이까?](11). 지상에는
신들이라 불리는 헤아릴 수 없는 우상들이 사람들의 경배와
찬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하나님과 같으며,
하나님같이 거룩하시며, 영화로우시고,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고, 이적을 행하십니까?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
가운데는 누구도 비교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본래 신들이 아닌 것들을
섬깁니다(갈4:8).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본성대로
행하고, 범죄합니다.
히스기야 왕 때에
아시리아 왕의 군대 대장이었던 랍사게는 하나님을 많은
민족들 가운데 한 신(神)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군을 이끌고 와서 항복을 종용하며 유다 백성들의 간담을
녹이며, 그들의 주 하나님을 모독했습니다. [민족들의
신들 중에 자기 땅을 아시리아 왕의 손에서 건져 낸 자가
있느냐? 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스발와임과
헤나와 이바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져 내었느냐? /이/ 나라들의 모든 신들 중에서 누가
자기 나라를 내 손에서 건져 내었기에 [주]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능히 건져 낸단 말이냐? 하셨느니라.](왕하18:33-35).
랍사게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들어보았고, 알았지만
신들이라 불리는 존재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마리아와는 달리
유다에는 일당 백, 일당 천의 특공대나 슈퍼맨은 없었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히스기야란 한 왕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히스기야는 유다를 구할만한
영웅이나 초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약하고 두렵고 떨리는 것은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 민족들의 신과는
전적으로 다른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사실을 믿고
기도했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어
보십시오. [[주] 앞에서 기도하여 이르되, 오 그룹들
사이에 거하시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는 땅의
모든 왕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나이다. [주]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주]여,
눈을 여시고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꾸짖으려고 보낸 말들을 들으시옵소서. [주]여, 진실로
아시리아의 왕들이 민족들과 그들의 땅을 멸하고 또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그들이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즉 나무와 돌이기 때문이니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신들을 멸하였나이다. 그런즉, 오 [주] 우리
하나님이여, 간청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땅의 모든 왕국이 주는 유일하신
[주] 하나님인 줄 알리이다, 하니라.](왕하19:15-19). 이 짧은
기도 속에 히스기야는 무려 아홉 차례에 걸쳐 주의 이름을
언급했습니다. 무려 5번이나 “주여”라고 주님을
불렀습니다. 히스기야는 정치적 영웅도 힘과 지혜가 탁월한
전략가도 아니었습니다. 외교에 능해 국제적 힘의 관계를
이용할 줄 아는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대신 그는 믿음의
영웅이었고, 위기의 때에 주를 찾고, 부를 줄 아는 기도의
영웅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살아가는 삶의 지혜요,
능력의 비결입니다.
주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어느 누가 하늘과 땅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창세기 1:1의 말씀이 우리의 신앙 지표가 되어서
어려울 때 주님을 부르는 확실한 보증 수표로 쓸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늘 이 말씀을 기준으로 도움을
구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너희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께 복을 받은 자로다.](시115:15). 이런
이유로 우리의 도움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그분으로부터
옵니다. [나의 도움이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께로부터
오는도다.](시121:2), [우리의 도움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의 이름에 있도다.](시124:8).
다시 11절을 보십시오. [오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으신 이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 속에서 영화로우시며 찬양할 만큼 두려우시며
이적들을 행하시는 이가 누구니이까?](11). 모세의
감동적인 이 신앙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되고 찬양이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신들은 인간의 땀과 피를 요구하고,
희생을 먹고 삽니다. 하지만 인간들에게 무엇을 해 줍니까?
아무 것도 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고, 건져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시며,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갖가지 은사(gift)를
주셨습니다. 신들 중에 주와 같으신 이가 누구입니까?
예레미야의 고백 역시
모세와 동일합니다. [오 [주]여, 주와 같으신 이가
없사오니 주는 크시며 주의 이름은 권능이 크시나이다.
오 민족들의 왕이여, 주를 두려워하지 아니할 자 누구리이까?
그리함이 주께 마땅한 일이오니 이는 여러 민족들의
지혜로운 자들 가운데서와 그들의 모든 왕국 안에서 주와
같으신 이가 없기 때문이니이다.](렘10:6-7). 권능이면
권능, 지혜면 지혜, 이름이면 이름, 무엇으로 어떤 것으로
비교해도 주님과 같으신 이가 없습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주] 우리 하나님 같으신 이가 누구리요!
그분께서는 높은 곳에 거하시나 [주] 우리 하나님 같으신
이가 누구리요! 그분께서는 높은 곳에 거하시나 자신을
낮추사 하늘과 땅에 있는 일들을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먼지
속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들어올려
통치자들 곧 자신의 백성의 통치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수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하여금 집을 지키게 하사 자녀들을
기쁘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시113:5~9).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주님은
인간사에 초연하게 뒷짐지고 구경만 하시거나, 관여하지
않는 분이 아니십니다. 저 높은 곳에 계시지만 자신을
낮추셔서 하늘과 땅에 있는 일들을 살피십니다. 어제
여러분이 무엇을 했는지, 여러분의 신상에 무슨 일이 있는지,
심지어 오늘 아침에 샤워를 할 때 내 머리카락이 몇 개나
빠졌는지까지 다 세시며, 내가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을
병에 담으시고, 내가 기도할 때 들으십니다. 가난한 자를
먼지 속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들어올리십니다. 수태하지 못하던 여자를 임신하게 하셔서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 일이 주님이 행하시는 일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수태하지 못한 여인이었지만
사무엘을 비롯해서 여러 형제들을 낳은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때 한나 역시 이 찬양을 했는데, [[주]와
같이 거룩한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외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기 때문이로다.](삼상2:2)고
노래했습니다. 인생 역전!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비롯되는
일입니다. 망했다고 해도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궁핍하다고 울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들어 올리십니다. 수태하지 못하던
여인들을 다산케 하시는 능력이 주님께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이 어디에, 누가 있단 말입니까? 이분이 바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한 하나님이십니다.
신명기 33:26을 보십시오. [여수룬의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그분께서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자신의 위엄을 공중에 나타내시는도다.](신33:26).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며, 자신의 위엄을
공중에 나타내십니다. 모세는 이 하나님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행복한 자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같은 이가
없다면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 같은 이도 없을 것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자로다. 오 [주]께서
구원하신 백성이여, 너 같은 자 누구리요. 그분은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위엄의 칼이시로다! 네 원수들이 네게
거짓말하는 자로 드러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33:29). “너 같은 자 누구리요.” 기쁨과
행복에 찬 모세의 이 고백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 오늘 해야
할 고백이며, 찬양입니다.
시편 89:8을 보십시오. [오
[주]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강하신 이가
누구리이까? 주를 둘러싼 주의 신실하심에 견줄 것이
무엇이리이까?](시89:8). 주님의 강하심, 주님의 신실하심
역시 누구와도 견줄 수 없습니다. 주님은 강하신
하나님이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주] 네 하나님 그분은 하나님이시요, 신실한
하나님이시니라. ...](신7:9a). 주님은 자신의 말씀에
신실하셔서 기록된 약속의 말씀들을 모두 이루십니다.
주님은 믿는 자들에게 특히 신실하십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우리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13,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시험 외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신실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또한
시험 당할 때에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하여금 능히 그것을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주님의 신실함에
견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신실하사 너희를 굳게 세우시며 악으로부터 지키시리라.](살후3:3).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주님께 고백하면 주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요일1:9). 주님은 아멘이시오,
신실하고 진실한 증인이시며(계3:14), 재림하실 때 그분의
이름이 “신실하신 이, 참되신 이”라 일컬음을 받습니다(계19:11).
우리는 이런 점에서 비교를 불허하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다시 11절을 보십시오. [오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으신 이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 속에서 영화로우시며 찬양할 만큼 두려우시며
이적들을 행하시는 이가 누구니이까?](11). 영국의
유명한 성경 교사였던 아더 핑크는 이 구절을 설교하면서 ‘오,
주여, 오늘날 기독교계의 수많은 신들 중에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같으신 이가 누구니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숭배하는 많은 우상들은 결코 성경의
하나님과 같지 않습니다. 배교한 라오디케아 교회는
성도들의 머리 수를 셉니다. 그들은 헌금 액수를 셉니다.
그들은 좋은 프로그램과 건물을 자랑합니다.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들을 가지고 자랑하고, 시기하고, 분열하고,
다툽니다. 자가의 복음은 팽개쳐 버리고 ‘성공과 행복’,
‘물질적인 복을 받는 비결’에 대해서만 강론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서 찬양하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며, 두려워 하고, 행하신 이적들에 경이로움을 표현하는
성도들과 교회들이 몇이나 됩니까? 거의 전무(全無)한
실정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자신들의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께서
오른손을 내미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12). 이
부분은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면서도 간과하는
부분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산산조각 내셨고(6), 물에 빠져
죽게 하셨지만, 많은 수는 땅에 삼킴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고라의 자손들이 땅이 갈라져서 바로 지옥으로 직행했던
것처럼 홍해를 가로 질러 따라오던 기병대는 물로만 죽은
것이 아니라 동시에 지진이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구속(救贖)하신 백성을 주의 긍휼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인도하사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셨나이다.](13). 이제 홍해를 갓 건넌 백성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신약 성경의 조명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하여 한 번 고난을 받으사 의로운 자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육체 안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되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리심을 받으사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3:18). 갓 구원받은
우리를 주님은 이미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속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의 거룩한
처소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늘 주님의 임재
앞으로 인도함을 받아 나아가야 합니다.
14-16절은 출애굽의 사건이
주위 민족들에게 미칠 파장과 충격에 대한 언급입니다. 이
소식은 요원의 불길보다 더 빨리 주변 민족들에게
알려졌는데 듣는 사람들마다 간담이 녹아 났습니다. [백성이
듣고 두려워하며 슬픔이 블레셋의 거주민들을 사로잡으리니
에돔의 족장들이 놀라고 모압의 용사들이 벌벌 떨며
가나안의 거주민들이 다 녹으리이다. 그들에게 두려움과
무서움이 임하매 주의 크신 팔로 인하여 그들이 돌같이
잠잠하리니, 오 [주]여, 주의 백성 곧 주께서 사신 그 백성이
건너기까지 그리하리이다.](14-16). 출애굽의 목적이
이들을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온 민족들에게 알게 하려
함이었다는 점에서 이 일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불러냄을 받은 것은 민족들마다 저마다 신들이
있지만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 한 분만이 하늘과 땅을 만드신
유일한 참 하나님이란 사실을 증거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란 민족을 통해 온 세계의 모든
민족들에게 이 사실을 증거하시고자 하였으며, 이들을 통해
온 세상이 복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유일한 구원자임을
증거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그들을 데려오사 주의 상속의 산에 심으시리니, 오 [주]여,
그곳은 주께서 거하시려고 만드신 곳이니이다. 오 {주}여,
그곳은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주]께서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시리이다, 하였으니](17-18). 주님은
가나안 땅을 처음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준비해
두셨고, 거기에 이스라엘을 심으셨습니다. 이 땅은 주님이
백성들 가운데 거하실 곳이란 의미에서 주의 성속이 됩니다.
시편 기자 역시 [그 뒤에 그분께서 그들을 자신의 성소의
영역 곧 자신의 오른손이 /값 주고/ 사신 이 산으로
데려오시고](시78:54)라고 말했습니다. 후에 천년 왕국
때에도 주님은 이 곳에 보좌를 놓으실 것입니다. 이곳은
에스겔의 성전이 들어 설 곳입니다. 그리고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실 것입니다.
19절은 반복입니다. 20-21절은
모세가 아니라 모세의 여동생 미리암의 찬양입니다.
미리암은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여대언자입니다. 그리고
춤을 춘 기록은 성경에서 최초의 언급입니다. 주님을
찬양하는데 사용된 춤은 곧 이어 우상을 찬양하고 육신의
쾌락을 즐기는 도구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아론의 누이
여대언자 미리암이 손에 작은 북을 잡으매 모든 여인들도
그녀를 따라 나오며 작은 북을 잡고 춤을 추니 미리암이
그들에게 응답하기를, 너희는 [주]께 노래하라. 이는
그분께서 영화롭게 승리하셨음이요, 말과 거기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20~21). 특히 오늘날
춤과 음악은 육신의 욕구를 자극하는 더럽고 관능적이고
변태적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1. 우리는 예수를 믿고 난
후 믿음으로, 성령으로, 은사를 통해 초능력자나 슈퍼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자아가 십자가에 못박힌 연약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신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없이는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된다.
2. 주와 같은 이가
누구리이까? 위기와 어려움을 이기는데는 힘과 지혜가
뛰어난 영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약하고 떨면서도 주님을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하는 연약한 손이
필요하다.
3. 주와 같은 이가
누구리이까? 능력, 힘, 지혜, 신실함, 모든 면에서 주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는 이런 주를 찬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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