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14:19-31
요절: 출애굽기 14:29
오늘 본문은 어느
교회에서나 역경을 이기는 표본적인 예로 자주 하는
설교이며, 성도들에게 매우 익숙한 구절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을 통해 여러분은
무엇을 배웁니까? 인생에는 누구나 건널 수 없는 홍해가
있지만 하나님의 도움으로 무사히 건너 본 체험을 간직한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건너기 전에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일이 지나고 나서 보면 거짓말처럼 안전하게 건넜을 뿐만
아니라 모든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된 그런 경험들을 해
보셨을 것입니다. 홍해 앞에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후
처음으로 맞는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이었고, 그들의 지혜와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첫째, 파라오에게 항복한다. 둘째,
모세와 아론을 죽여서 파라오에게 목을 갖다 바치고 용서를
빈다. 셋째,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다 죽는다. 넷째,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 비참한 종살이를 하느니 바다에 투신
자살하고 만다. 다섯째, 일단 항복하고 후일을 도모한다. 이
정도일 것입니다. 이 중에서 백성들의 여론은 단연 첫
번째가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들은 믿음을 가졌습니다.
믿음이 바닥난 상황에서
모세를 통해 들려 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기적같이 그들의
두려운 마음을 진정시켰고, 그들은 모세의 지도를 따라
홍해를 건넜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의 불평은 접어
두고 그들이 홍해를 건넜던 일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마른 땅같이 건넜으나 이집트 사람들은
그것을 시도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으며](히11:29). 여기서
‘그들’이라고 말한 것은 홍해를 건넜던 백성들 전체를
지칭한 것입니다. 홍해를 건널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우리를 건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종을 통해 들려 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믿음을
가지는 것 밖에 없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지금이 나의
힘과 지혜가 완전히 무용한 상태입니까? 그렇다면 불만에
가득찬 말을 내뱉지 말고, 더욱 말씀을 들으러 교회로
오십시오.
19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진영(陣營) 앞에 가던 하나님의 천사가 이동하여 그들
뒤로 가매 그들 앞에 있던 구름 기둥도 그들의 뒤로
옮겨가서](19).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을 이끄신
지도자가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의 천사가 앞장서고
있었음을 봅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은 지금도 구원을
상속받을 저희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천사들은 저 하늘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교회와 각 개인들과 분명히 함께 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를 잡으러 적군들이 몰려 왔을 때 게하시는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 때 엘리사는 천사를 보내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게하시의 눈을 열어 현 상황을 단지 보여
달라고 기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광경은 참으로
놀라왔습니다. [기도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여시사 보게 하옵소서, 하니 [주]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보라,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6:17). 우리 주위에도 이런
일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면
천사들은 우리를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靈)들로서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히1:14).
여기서 ‘하나님의 천사’라고
단수를 사용하면 그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라고 복수를 쓰면 말 그대로 일반
천사들입니다. [이는 나를 소유하신 하나님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천사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행27:23),
[내 육체 안에 나를 시험하는 것이 있었으되 너희가
그것을 업신여기지도 아니하고 거부하지도 아니하며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같이 심지어 그리스도 예수님같이
영접하였도다.](갈4:14).- 여기서 동격 관계를 볼 수 있다.
이외에 [주]의 천사라고
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현현하신 것으로 하나님과 동격으로
사용됩니다. 사사기 13:8에서 주의 천사를 알아 보지 못한
마노아가 이름을 묻자 [[주]의 천사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네가 이같이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은밀(隱密)하니라,
하니라.](삿13:18)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주님이심을
표현한 것입니다. 구약 성도들은 그 진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의 천사가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이에 마노아가 그가 [주]의
천사인 줄 알고 자기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나](삿13:21-22). 지금
핵심은 천사론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천사 즉 주님이시란 사실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구속자요, 인도자이셨던 것같이 지금 현재 교회
성도들의 구속자요, 인도자이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선한 목자이시며, 혼들의 목자이십니다(벧전2:25).
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큰 목자이십니다(히13:20). 주님은 모든
목자들의 목자이시므로 목자장(벧전5:4)이시기도 합니다.
그런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보살펴 주시며,
건져내십니다. 특별히 여러분은 주님을 두려워할 때 위기의
순간에 주의 천사로부터 건져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편
34:7, [[주]의 천사가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둘러 진을
치고 그들을 건지는도다.](시34:7).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을 지녔을 때 그들 앞서 가던 구름 기둥은 즉시 뒤로
옮겨졌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그들을 위기에서
보호하셨던 것입니다. 만약 계속 불평만 하고 있고, 모세의
음성에 귀를 막았다면 하나님의 천사는 움직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이집트
사람들의 진영과 이스라엘의 진영 사이에 이르러 서니라. 이
구름 기둥이 저들에게는 구름과 흑암이 되었고 이들에게는
밤에 빛을 주었으므로 밤새도록 저편이 이편에 가까이 오지
못하니라.](20). 동일한 구름 기둥이 한 편에는 구름과
흑암이 되고, 한편에는 밤에 빛을 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참으로 놀라운 진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복음이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빛이 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흑암이 됩니다.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거치는 반석이요,
올무가 됩니다.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제 친구 목사
중의 한 명은 늘 이런 고민이 있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성도마다 떠나는 이유를 대는데, ‘설교에 은혜가 없다.
설교가 사람을 세워주지 못한다’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방장에게 이 집 음식은 맛이 없다는 말이나 택시 기사에게
운전을 잘 못한다는 말보다 목사에게는 더 치명적인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여기서
목회를 그만 두어야 옳다고 생각했고, 고민을 했습니다.
목회를 그만 둘 생각까지 하는데 받은 진리의 깨우침이
있었는데,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이 구름 기둥이
저들에게는 구름과 흑암이 되었고, 이들에게는 밤에 빛을
주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그분의 설교를
듣고 멀리서, 심지어 광주에서도 달려오고 있고, 설교
테이프를 보내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만약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데
마음에 은혜가 없다면 여러분은 목사를 탓하기에 앞서
자신의 영적 상태를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저
역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설교를 듣고
나면 힘이 빠집니다. 어떤 분은 성질이 납니다. 어떤 분은
소화가 안 되서 병원을 다녀왔다는 분까지 있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많이 당황했습니다. 그 때 제가 힘을 준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0:29, [유두고라
하는 젊은이가 창문에 걸터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오랫동안 /말씀을/ 선포하매 졸다가 삼층 다락방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더라.](행20:9). 아마 우리
교회에도 높다란 난간이 있고, 안전 장치가 없다면 오후
설교에는 매주 목이 부러지거나 죽는 사람이 많이
나오겠구나!란 생각이 듭니다.
다시 본문을 보십시오.
주의 구름 기둥이 중간에 서서 막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정예 기병대가 진군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사이에
모세와 백성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21-22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바다 위로 자기 손을 내밀매 [주]께서 강한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다를 뒤로 물러가게 하시니 물들이 나뉘어
바다가 마른 땅이 되매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가 마른 땅위로 가고 물들은 그들의 오른편과 왼편에서
벽이 되니라.](21-22). 모세는 주의 명령대로 바다 위로
자기 손을 내밀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순간에 강한 동풍으로
바다를 가르셨습니다. 바람이 얼마나 세었으면 바닷 물이
갈라질 정도이겠습니까? 아마 이 바람을 파라오의 군대로
보냈다면 그들은 200마일 이상 날라가서 흔적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바람은 자연 현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일으키신 것인데, 실상은 주님의 콧김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주의 거센 콧김에 물들이 함께
모이되 큰 물들이 산더미같이 똑바로 일어서고 깊음들이
바다의 중심부에서 엉겼나이다.](출15:8), 주님의 콧김이
이러하다면 주님께서 입으로 한번 후 불어 버리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대 자연이라고 감탄하는 이 우주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것이란 사실을 볼 때 하나님은
무한광대하신 분이란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아버지로, 목자로, 참된 친구요, 남편으로
부르면서 작은 문제 앞에서 절망하고, 불평하고, 낙담과
실의에 빠져 못살겠다, 죽고 싶다고 한다면 얼마나 한심한
노릇입니까? 사람들은 흔히 자기 문제 외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평소에는 신앙
생활을 잘하는데, 정작 신앙이 필요할 때는 전혀 믿음이
발휘되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몸이 아프든, 돈이 안
벌리든, 빚을 지든, 부부 관계에 문제가 생기든, 자녀가
사고를 치든, 인간들에게 환멸을 느끼든, 자신에게 절망을
하는 그런 상황에 처할 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님은 안
보이고, 문제만 보입니다.
어느 분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경남 거창 고등학교를 세우신 전 영창 교장
선생님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이곳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경남의 시골 거창에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학교를 하나 세워 후학을 양성하려는 꿈을 가지고
실천했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학교는 폐교 위기에
놓였습니다. 그는 산에 올라가 어느 굴에서 3일간이나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응답은 오지 않고, 속에는
아무런 느낌도 확신도 오지 않자 기도고 뭐고 다 때려
치운다며 산을 내려 왔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가득한 원망을
안고 내려 오면서 내려가면 자신이 가진 땅 한 마지기(200평)을
팔아서 동아일보에 ‘하나님 믿지 말라. 나처럼 믿으면
하나님께 속는다’고 광고를 내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산을 내려오며 저녁 노을을 보는데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머리 속에 ‘잘 만든 기계가 소리없이
돌아간다고 하나님께서 저렇게 조용히 일하시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머리를 스치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산을
내려왔습니다. 그는 아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내려왔지만 문제와 절망 속에서 전능하신 창조주를 보게
되었습니다. 상황과 현실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면 그 문제는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과연
그 다음날 미국의 신학교에서 동창생이었던 목사에게서
학교 운영에 필요한 돈이 도착했습니다. 헌금을 보낸 분은
여러분도 다 아는 수정 교회의 로버트 슐러 목사였습니다.
그분은 친구에게 자기의 사정을 알리지 않았고, 도와 달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문제의 해결자는 주님이십니다.
여러분이 모두 문제를 보지 않고, 문제의 해결자 주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본문을 보십시오. [모세가
바다 위로 자기 손을 내밀매 [주]께서 강한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다를 뒤로 물러가게 하시니 물들이 나뉘어
바다가 마른 땅이 되매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가 마른 땅위로 가고 물들은 그들의 오른편과 왼편에서
벽이 되니라.](21-22). 이 구절은 영적 교훈뿐만 교리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 땅에서 어린
양의 피를 통해 죽음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홍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죽음의 침례를 받도록 하셨습니다. [모두가
구름과 바다 속에서 침례를 받아 모세에게 속하게 되고](고전10: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침례를 받음으로 그들의
죽음의 형벌에서 구원받았을 뿐 아니라 그들 역시 죽음에
처해졌음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서
구원받았을 뿐 아니라 죄에 대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침례의 영적 의미를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우리가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은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묻혔나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힘입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심을 받은
것같이 우리도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게 하려 함이라.](롬6:3-4).
우리는 분명히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음에 처하게
하셨고, 다시 그 죽음에서 나와서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
거하게 하셨습니다.
홍해 바다는 이스라엘에게
생명이 아니라 죽음의 바다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모세를 통해서 그 바다를 마른 땅처럼 건넜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죽음을
통과해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한 후에 죽음을 통과합니다. 반면 세상 사람들은
죽은 다음에 심판을 받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홍해를 건너듯
십자가를 통과해야 합니다.
이 구절을 예표적으로
보면 구원받은 성도들이 휴거 때에 저 하늘에 있는 깊음의
바다를 통과하는 장면을 미리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땅에서 공중으로 들림받을 것이며,
저 하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깊음의 바다를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넘으로써 이집트와는 완전한 단절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과할 때 세상과의 단절과 완전한 분리를
경험합니다.
23-25절을 보십시오. [이집트
사람들과 파라오의 말들과 그의 병거들과 기병들이 그들을
추격하여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오매 새벽에 [주]께서 불과
구름 기둥을 통해 이집트 사람들의 군대를 보시고 이집트
사람들의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또 그들의 병거 바퀴를
벗기사 그들이 몰기에 힘겹게 하시니 이집트 사람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이는 [주]가
이집트 사람들을 대적하여 그들을 위해 싸우시기 때문이라,
하니라.](23-25). 파라오의 추격은 집요했습니다. 그들은
바다 한 가운데로 들어왔는데, 주님은 그들의 추격을
늦추기만 하셨습니다. 이들을 홍해 바다에서 완전히
수장시켜 버릴 생각이셨기 때문입니다. 추격하던 이집트
사람들은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지금
추격할 것이 아니라 도망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죄인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며 죄를 짓다가 뒤늦게 깨닫지만 그들에게 남은 것은
무서운 진노와 심판밖에 없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판
뒤에 뒤늦게 자신의 죄를 깨닫고, ‘내가 무죄한 피를
배반하여 넘기고 범죄하였다’(마27:4)고 말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늘 멸망하기 직전,
심판이 집행되기 전, 때가 너무 늦어서야 깨닫게 됩니다.
평생을 하나님을 대적하면
산 무신론자들이나 하나님을 믿긴 했지만 일생동안
자신만을 위해서 산 사람들은 늘 뒤늦게 자신들의 생각과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깨닫지만 이미 늦어 버린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하기 전에” 라고
말합니다. [이제 /너는/ 젊은 시절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재난의 날들이 이르기 전에 혹은 네가 말하기를, 나는
아무 낙이 없다, 하는 해들이 가까이 이르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기 전에 혹은 비가 온 뒤에 구름들이
되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12:1~2). 후에 기억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정신없이 자기 길을
달리다가 자신을 대적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고
나서야 달리던 길을 돌이키려고 합니다. 마치 파라오와
이집트 백성들이 말을 몰고 광야를 달리다가 멈춘 것이
아니라 바다가 갈라진 홍해까지 말에게 채찍질을 하며
달렸듯이 오직 정한 목표를 따라 정신없이 달리지만 그들은
너무 멀리 달렸습니다.
여러분은 학교를 다 마친
후에, 집을 장만한 후에, 애들이 다 큰 후에, 내가 무엇을 한
후에, 문제가 해결된 후에, 직장을 옮긴 후에, 올해가 지난
후에, 주님을 섬겨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늦을 것입니다. 세월은 여러분을 기다려 주지 않고,
세상은 결코 여러분의 계획대로 되지 않으며, 하나님은
여러분의 잘못된 길 앞에서 여러분을 막으시며, 바퀴를
뽑아서 힘들게 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하기
전에라고 말씀합니다. [[주] 너희 하나님께서 어둠을
일으키시기 전에, 너희 발이 어두운 산들에 걸려
넘어지기 전에, 너희가 빛을 찾을 때에 그분께서 그 빛을
사망의 그늘로 변하게 하사 짙은 어둠으로 만드시기 전에
/너희는/ 그분께 영광을 돌릴지어다.](렘13:16). 여기서
주님은 계속해서 “...하기 전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어둠의 심판이 임한 이후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숨이 넘어간
후에, 지옥에 간 후에 멀리 눈을 들어 아브라함에게
소리쳤던 부자처럼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들을 때 “...한 후에”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스바냐 2:1-3을 보십시오. [오 원치 않는 민족아, 너희는
함께 모일지어다. 참으로 함께 모일지어다. 칙령이 나가기
전, 그 날이 겨같이 사라지기 전, [주]의 맹렬한
분노가 너희에게 이르기 전, [주]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지금까지 주의
공의를 행한 땅의 모든 온유한 자들아, 너희는 [주]를 찾으며
의를 구하고 온유를 구하라. 너희가 혹시 [주]의 분노의 날에
숨겨지리라.](습2:1-3). 주님은 무려 4번에 걸쳐 “...하기
전에” 돌이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불이
떨어지기 전에 롯은 탈출해야 했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닫히기 전에 그들은 회개하고 방주에 올라야 했습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 복음을 믿고,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파라오는 항상 일이 터진 후에 모세를 불렀고,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그는 실패했습니다. 그가 만약 일이 터지기
전에 그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면 모든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모두 이 시간 이후로
무엇을 미룬 것이 있다면 이 시간 돌이키시고, 이 시간
주님께 헌신하시고, 이 시간 결단하시기를 빕니다.
26-28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물들이
이집트 사람들과 그 병거들과 기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
하시니 모세가 자기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될 때에
바다가 그 세력을 회복하니 이집트 사람들이 바다를
거슬러 도망하나 [주]께서 이집트 사람들을 바다
한가운데서 뒤엎으시매 물들이 돌아와서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로 들어간 파라오의 군대를 다
덮고 그들 가운데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26-28).
이집트 사람들은 도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모세의 손은 바다 위로 내밀었고 갈라졌던 바다는 다시
회복되어 이집트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당했습니다. 주의
군대는 이집트의 군대를 맞이해서 칼도 활도 없이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늘 이와 같은
전쟁을 해야 합니다. 대장되신 주를 따라 기도하고,
믿음으로 순종한다면 적의 패배를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늘 이런 승리의 체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29-30절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한가운데서 마른 땅위로 걸어갔고
물들이 오른쪽과 왼쪽에서 그들을 위하여 벽이 되었더라. 그
날에 [주]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이집트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니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죽은 이집트 사람들을
보았더라.](29-30). 바다 한 가운데서 마른 땅위로 걸어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전무후무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다를 통과했을
때 바다에는 죽은 이집트 사람들의 시체가 떠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무서운 심판을
목격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인들보다 더 의롭고
거룩했기 때문에 홍해에서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보혈로 그들을 구속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죽음의 홍해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실 모두 죽은 것과 같습니다. 이들이 바닷가에 선 것은
죽음에서 부활한 것을 예표합니다.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 사는 삶은 모두 죽음에서 일어난
부활의 삶입니다.
31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주]께서 이집트 사람들에게 행하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주]를 두려워하며 또 [주]의 말씀과 그분의 종 모세의 말을
믿었더라.](31). 이스라엘은 이렇게 표적을 통해 믿는
것이 전통이 되었고, 역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믿기
전에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보고 나서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처음 기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을 믿으니라.](요2:11). [그때에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그분을
믿었으나](요11:45).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기로 작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도마야,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었으나 보지
않고 믿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요20:29)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들은 보았으므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후5: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체험들은 우리의 믿음을 돕고,
주를 두려워하고, 주의 말씀을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홍해를 마른땅처럼 걷는 믿음을 발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뒤에는 파라오가 추격하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힌 어려운 처지에 있지 않는 사람은 홍해를 가를 일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광야나 도시에 있으면서 홍해를 갈라
달라고 기도하거나 그것을 기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려움이 깊을수록 주님의 능력 역시 크게 드러나는
법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신뢰할 때 주님은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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