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7월 06일- 출애굽기
출애굽기(XL)
말씀: 출애굽기 14:13-14
요절: 출애굽기 14:14
40. 너희는 조용히 있을지니라.
믿음의 바닥을 보여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은 위대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믿음이 없거나 적을 때 꾸짖으시지만 그 믿음을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늘 평가하십니다. 큰 믿음은 칭찬하시고, 적은 믿음은 책망하시고 도우시며, 없는 믿음은 크게 꾸짖으십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믿음이 적어서 그 문제에 관한 한 늘 책망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버리시거나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바닥을 드러내 보일 때 주님은 우리를 책망하시지만 우리 앞에 닥친 환경을 해결해 주심으로써 믿음을 가지도록 도우십니다. 우리는 모두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만큼은 노골적이지 않다 할지라도 여러 가지 삶의 문제로 하나님께 불평한 적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몇 가지 예를 보겠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로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들풀을 예로 드시면서 책망하셨지만 믿음을 도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입히시거든, 오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물며 너희는 더 잘 입히시지 아니하겠느냐?](마6:30). 사람들은 먹고 사는 문제가 눈 앞에 닥치고 해결되지 않으면 믿음의 바닥을 드러내 보입니다. 바다에서 풍랑에 빠져 죽을 위기에 놓인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면서 우리를 돌아보셔야 하지 않느냐?고 항의하듯 따지자, 주님은 ‘오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며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매우 고요하게 되거늘](마8:26). 성도들이라 해도 생명이 위기에 처하면 누구나 믿음의 바닥을 보이게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의 출애굽 사건 역시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집트를 떠날 때는 금, 은, 의복을 마음껏 빌려서 기분좋게 나왔지만 이제 파라오의 기병들이 추격하자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출애굽기 14:10-12절까지는 그들의 극단적 생각과 말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죽게 생겼는데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란 태도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셨지만 풍랑을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순간 순간 이런 태도를 취하지만 저주를 받기 보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것은 불평과 불만뿐이지만 주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보이시고, 우리의 믿음 없음을 도우십니다.
베드로조차도 시선을 주님이 아닌 덕치는 풍랑으로 돌렸을 때 물에 빠져 죽음의 위기에 처했음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즉시 손을 내미사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오 믿음이 적은 자여, 어찌하여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마14:31). 주님은 책망하셨지만 역시 손을 내미셔서 베드로를 붙잡으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내미는 손길이 없다면 우리는 저 바다 속 깊이 빠져 들고 말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빵을 가져 오지 않음을 의논할 때 ‘오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16:8)라며 탄식하셨습니다. 성도들은 각별히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만이라도 참 자유를 얻어야 할 것입니다. 광야로 인도하신 주님은 그들에게 농사지을 땅을 주시지 않으셨지만 그들은 단 한끼도 굶어 본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가장 노하셨던 장면은 제자들이 마귀들린 아이를 두고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을 때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오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요? 언제까지 너희를 용납하리요? 그를 이리로 내게 데려오라, 하시고](마17:17). 누구나 다 강한 믿음을 원하고, 큰 믿음을 소유하고 싶어하지만 우리는 이런 책망을 들으면서 주님의 손길을 체험하면서 성장을 이루어야 합니다.
첫째, 두려워 말라.
1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오늘 [주]께서 너희에게 보여 주시는 [주]의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이집트 사람들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13). 하늘을 찌를듯한 원성과 불평으로 가득찬 백성들 앞에 모세가 일어섰습니다. 이것이 목자의 모습이요, 영적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들을 향해 던진 모세의 한 마디를 “두려워하지 말라”였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자신이 이끄는 양무리들의 마음 속에 이는 두려움을 잔잔케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소유하도록 해야 합니다. 근심과 불안을 제거하는 것은 환경을 conrtrol하는 것보다 더 급한 문제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가장 짧고도 위대한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입니다. 모세는 출애굽 여정 40년간 그의 설교 주제 중에 가장 많이 사용했던 단어 가운데 하나는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였습니다.
주님은 늘 자신의 종들에게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되었을 때, 죄와 불신이 가져다주는 결과입니다. 아담은 범죄했을 때, [그가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벌거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매](창3:10)라고 했습니다. 그는 벌거벗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두려웠습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두려움의 영이 아니요, 권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이기 때문이라.](딤후1:7). 두려움은 죄의 결과이며, 상태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그 죄를 제거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회복시켜 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두려움이 있다면 이 시간 죄를 자백하고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제거하기 위해 흘리신 주님의 보혈을 바라 보십시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들 후에 [주]의 말씀이 환상 속에서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防牌)요, 네가 받을 지극히 큰 보상(報償)이니라, 하시니](창15:1).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동일한 명령을 주셨습니다. [내가 네게 명령하지 아니하였느냐?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이는 네가 어디로 가든지 [주] 네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기 때문이니라, 하시니라.](수1:9). 기드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삿6:23).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준 유훈 역시 ‘두려워 말라’였습니다. [또 다윗이 자기 아들 솔로몬에게 이르되,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크게 용기를 내어 이 일을 행하고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이는 네가 [주]의 집에서 섬기기 위한 모든 일을 마치기까지 [주] 하나님 곧 나의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대상28:20). 이사야 대언자의 설교 역시 이것은 단골 주제였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이르기를, 마음을 강하게 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께서 오셔서 원수를 갚으시리니 곧 하나님께서 보응하시리라. 그분께서 오셔서 너희를 구원하시리라, 하라.](사35:4). 천사 가브리엘이 다니엘에게 준 말씀 역시 두려워 말라였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단10:12).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주님의 말씀 역시 “두려워 말라”입니다. [적은 양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너희 아버지께서 그 왕국을 너희에게 주시기를 참으로 기뻐하시기 때문이니라.](눅12:32).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성도들이 어떤 사건 앞에서 두려움이 스며들지 않고,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면 이미 문제 해결은 다 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시편 23편을 즐겨 읽고, 외웁니다. [내가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참으로 해(evil)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위로하시나이다.](시23:4). 어미 새의 품에 있는 아기 새처럼 거친 폭풍우 속에서도 완전한 평안을 유지하는 비결은 바로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주께서는 마음으로 주를 굳게 의지하는 자를 완전한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하기 때문이니이다.](사26:3).
둘째, 가만히 서서
하나님 앞에 가만히 서있는 것은 막연히 넋을 놓고 놀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힘과 지혜를 그치고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다시 1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오늘 [주]께서 너희에게 보여 주시는 [주]의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이집트 사람들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13). 모세가 백성들에게 두 번째 한 말은 ‘가만히 서 있으라’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가만히 서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하면 울고 불고 난리치느라 가만히 서 있는 일도 매우 힘든 일이 될 것입니다. 모든 자기 노력을 포기하는 일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더 어려운 일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합니다. 육신의 힘이 완전히 빠져서 물 위로 떠오르기 전까지 건져내기 어려운 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무슨 방도가 없습니다. 시험의 순간에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은 참으로 현명한 일입니다. 육신이 죽음에 처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조용히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리저리 살아 움직이는 육신적인 행동은 일을 점점 어렵게만 만들 뿐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은 자신의 키를 한치도 자라게 할 수 없고 자기 머리를 한 올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으면서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입니다. 때로 가만히 있는 것은 무기력해 보이고, 비능률적으로 보이고, 게으르게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육신의 힘을 포기하고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일은 육신의 피땀으로 얼룩진 어떤 노력보다 더 많은 열매를 거둡니다. 특히 나의 믿음이 바닥났을 때 우리는 주님 앞에서 잠잠하기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적인 지혜나 잔꾀를 부리는 것은 믿음이 아니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입니다.
때로 우리는 불가항력적인 일 앞에서는 포기하는 법을 배우지만 먹고 사는 문제나 자녀 문제나 가정 문제, 직장 문제, 교육 문제 등에서는 좀처럼 포기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과외 공부에 애들 좋은 것이라면 물 불 가리지 않는 부모들의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너에게 해 줄 것 다 해 주었다’. 사람이 하는 일과 하나님의 일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있어도 건강을 줄 수는 없습니다. 돈은 벌어 줄 수 있어도 행복을 줄 수는 없습니다. 침대는 사 줄 수 있어도 단잠을 줄 수는 없습니다. 좋은 책을 사 줄 수 있지만 건전한 지혜를 줄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선택해 줄 수 있어도 믿음을 줄 수는 없습니다. 친구를 소개 해 줄 수 있어도 우정을 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하십니다. 대학 아니 그 이상까지 교육을 시켜 줄 수 있지만 기대하는 사람으로 자라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일은 모두 주님의 영역이며, 주님이 하셔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를 준비해서 할 수는 있지만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이 말씀을 심어주고 자라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사람의 한계를 인정하고 늘 주님의 손길을 의뢰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런 문제에서 육신의 지혜와 힘을 그치고 조용히 주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여호사밧은 모압의 군대가 이웃 족속과 연합하여 쳐들어 올 때 주께 기도하면서 육신의 힘과 지혜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신뢰했습니다. [오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심판하지 아니하시려나이까? 이는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대적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오니 우리가 어떻게 할 줄도 모르며 우리 눈이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대하20:12). 이것은 적을 맞이하는 여호사밧의 최선의 결정이요, 가장 훌륭한 전략이었으며, 강력한 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여호사밧에게 이렇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 전쟁에서는 너희가 싸울 필요가 없나니 너희는 정열하고 가만히 서서 너희와 함께하는 [주]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오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마주보고 나가라. 이는 [주]가 너희와 함께할 것임이라, 하셨느니라, 하매](대하20:17).
이와는 반대로 적을 대항하기 위해서 이집트와 활발한 외교적 동맹 관계를 구축하고 군사력을 정비했던 이스라엘에게 주님은 무엇이라고 응답하셨는지 보십시오. [이는 이집트 사람들의 도움은 헛되고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임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외치기를, 그들의 힘은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라, 하였느니라.](사30:7).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힘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문제는 주님의 도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도움을 받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힘으로 동분서주하는 것입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 더욱더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성도들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인 줄을 알지어다. ...](시46:10a).
세 번째, 주의 구원을 보라.
다시 1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오늘 [주]께서 너희에게 보여 주시는 [주]의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이집트 사람들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13).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한 세 번째 말은 ‘오늘 주께서 너희에게 보여 주시는 구원을 보라’고 외친 것입니다. 주의 구원을 보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역의 구경꾼으로 가만히 서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이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들의 불신과 불평은 이제 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백성들은 모세가 전하는 말씀을 통해 안정을 찾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평했습니다. 히브리서 11:29,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마른 땅같이 건넜으나 이집트 사람들은 그것을 시도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으며](히11:29). 하나님은 믿음이 바닥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도우셨습니다.
우리는 주의 구원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주]의 구원을 소망하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3:26)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을 때 우리는 주의 구원을 볼 수 없게 됩니다. 보는 것은 믿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하지만 믿는 것은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모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실체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 안에서 죽었으며 약속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멀리서 그 약속들을 보고 확신하며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또 땅에서는 자기들이 나그네요, 순례자라 고백하였으니](히11:13). * 보고, 확신하며, 받아들였으며, 고백하였으니(순서를 볼 것). 모세 역시 이런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성경은 모세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가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을 보는 것 같이 하여 견디어 냈으며]라고 합니다(히 11:27). 이것이 바로 믿음의 눈이 지닌 특징입니다.
저는 여기서 시간을 좀 내어서 믿음의 눈에 대해서 말씀을 정리하고 넘어 가겠습니다. 시편 기자는 [내 눈이 항상 주를 향함은](시편 25:15)이라고 고백했는데, 욥은 자신의 실체적 간증을 이렇게 기술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성경은 자주 믿음을 눈으로 시각화해서 비유해서 표현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 역시 주님이 믿음의 눈을 소유했음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너희 아버지 아브라함은 나의 날 보기를 기뻐하다가, 보고 반가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56). 아브라함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실체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있었기에 보고, 기뻐하였고, 반가워했습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을 눈먼 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보지 못하는 존재요, 듣지 못하는 자라고 말하는데 복음을 전파해서 믿음을 갖는 것을 눈을 열어 주는 것으로 비유한 예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눈을 열어 주어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 함이요...](행 26:18)란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진리에서 떠나면 눈에 멀게 됩니다. 우리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주의에 빠졌을 때 그들은 십자가를 볼 수 없었습니다. [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인들아, 누가 너희를 미혹하여 진리에 순종치 못하게 하더냐? 너희 가운데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눈 앞에 명백히 제시되지 아니하였느냐?](갈3:1).
주님은 우리의 눈을 만드신 분이신데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보는 것으로 행하는 것을 매우 경계하셨고, 주의를 주셨지만 믿음의 눈을 갖도록 격려하십니다. 영국의 위대한 성경 교사였던 아더 핑크는 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1. 눈은 수동적인 기관입니다. 눈은 스스로 빛을 비추거나, 바라보는 대상에게 아무 것도 주지 못합니다. 눈이 해, 달, 별을 바라보며 무엇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나눌 수 없습니다. 눈은 아무 것도 더하지 못하며, 단지 마음 안에(망막에, 그러면 뇌에 전달됩니다.) 상(像)을 남기거나 비출 뿐입니다. 믿음도 그와 같습니다. 믿음은 아무 것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 안에서 붙들고 있는 것에 아무 것도 주지 못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 혼의 시각에 비쳐지는 대로 단순히 받거나 또는 마음 안에 취합니다. 과연 불 뱀에 물린 이스라엘 사람들이 놋 뱀을 바라보고 치유되었을 때 놋 뱀과 무엇을 나누었을까요? 우리는 아무 것도 그리스도에게 더하지 못하며, 다만 그분을 바라보며 구원을 받습니다(이사야 45:22).
2. 눈은 인도하는 기관입니다. 낮에 빛이 있을 때 눈을 뜬 사람은 자기 길을 볼 수 있으며, 눈 먼 사람이나 밤길을 걷는 사람처럼 도랑에 빠지거나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도 그와 같습니다. "사악한 자들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들은 심지어 어디에 걸려 넘어지는지도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의인들의 행로는 빛나는 광채 같아서 점점 더 빛나 완전한 낮에 이르느니라"(잠언 4:19,18).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 관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함이라"라고 말합니다(고후 5:7).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믿음이 우리의 본(本)이신 분을 봄으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로를 달릴 수 있습니다.
3. 눈은 매우 빨리 기능을 하는 기관으로서, 아주 멀리 있는 것들도 봅니다. 우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땅위에 있는 것들에서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산을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땅의 것들과 가장 높이 떠 있는 별을 동시에 볼 수 있으며, 넓디넓은 온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시력은 얼마나 놀라운지요! 동일하게 믿음의 권능도 놀라운 것입니다. 실로 믿음이란 시각이 예민한 은혜로서, 조상들의 믿음이 행했듯이, 아주 멀리 있는 것도 봅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약속된 것들을 보았습니다(히 11:13). 그와 같이, 믿음은 순간적으로 영원 과거를 뒤돌아보며 땅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영존하는 근원과 그 역사를 볼 수 있으며, 동시에 장차 올 영원을 향해 돌아서서 휘장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감춰진 영광들을 봅니다.
4. 눈은 비록 작지만 성능이 매우 뛰어난 기관입니다. 낮에 빛이 있을 때 눈을 뜬 사람은 자기 시야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뒤에 있는 것을 돌아보거나 앞에 있는 것들을 볼 수 있으며, 샘물을 들여다보거나 깊은 골짜기 아래의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으며, 멀리 하늘의 천체(天體)를 바라 볼 수 있습니다. 믿음도 그와 같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광대한 범위 안에 있는 모든 것에까지 미칩니다. 믿음은 먼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알게 하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깨닫게 합니다. 믿음은 지옥을 들여다보며, 하늘들을 관통해 봅니다. 믿음은 주변 세상의 온갖 허탄한 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순수한 믿음이 처음에는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조금 밖에 취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점에서도 땅에 속한 예시가 영적인 진리를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곧, 유아(乳兒)의 눈은 빛을 보고 외부의 물체를 지각하지만, 계속해서 시각이 자랄 동안에는 많은 연약함과 혼란을 겪게 됩니다. 믿음도 그와 같습니다. 처음에 영적 지식의 빛은 매우 희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기는 멀리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비들 안으로 더 깊게 자라게 되며, 마침내 열려진 비전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5. 눈은 매우 확신을 주는 기능입니다. 눈은 다섯 가지 육체적 감각(五感) 중에서 가장 설득력이 있습니다. 눈으로 보면 얼마나 확실한지요!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은 사물을 단지 정신적인 착각이라고 확신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바른 마음을 가진 자들은 누구도 그들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늘에서 해가 빛나는 것을 보면 낮이라는 것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바로 그 본질에서 수많은 확신을 가져오는 은혜입니다. "믿음은 소망하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회의론자들은 성경에 관한 하나님의 영감을 부인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그 진리의 초자연적인 아름다움들을 바라볼 때 그 문제는 영단 번에 해결됩니다.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꾸며낸 한 경건한 사람으로 간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도가 일단 진정으로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보면, "내가 알기에 내 구속자께서 살아계시니"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6. 눈은 자취를 남기는 기관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 마음에 자취를 남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종종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며"라고 기도드릴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이유이며(시편 119:37), 대언자가 왜 "내 눈이 내 마음을 상하게 하였도다"라고 선언하였는지에 대한 이유입니다(애가 3:51). 계속해서 몇 분 동안 해를 바라보면, 해로부터 눈을 돌리거나 눈을 감을지라도, 해의 자취는 눈에 남습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믿음은 마음에 의(義)의 태양이신 분의 자취를 남깁니다. "그들이 그분을 바라보고 빛을 받게 되었으며 그들의 얼굴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였도다."(시편 34:5). 고린도후서 3:18은 이에 대해 더욱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듯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나니, 곧 주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권능이 자기 백성들의 몸을 죽을 것(mortality)에서 생명으로, 천한 것에서 영광스러운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처럼, 지금 성령님께서는 도덕적으로 변화시키는 권능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성품에 역사하고 계시며, 믿음을 실행으로 옮기심으로 자녀들이 점점 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7. 눈은 놀라운 기관입니다. 자기 의견을 표현하는데 유능한 사람들은 이 특별한 지체가 인간의 몸 중에서 가장 기묘하고 진기한 부분이라고 주장합니다. 창조자의 지혜와 권능의 많은 부분이 보는 기능을 형성하는 가운데 발견됩니다. 그와 같이 믿음은 영혼 안에 기묘하고 놀랍게 역사하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자의 지혜와 권능의 많은 부분이 새로운 피조물의 그 어느 부분보다도 믿음의 은혜가 형성되는 가운데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믿음의 행위를 권능으로 성취하사"라고 말합니다(살후 1:11).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을 때 임했던 위대하고 전능하신 그 뛰어난 권능이 동일하게 그 사실을 믿는 사람들 위에와 안에 역사하고 있습니다(엡 1:19).
8. 몸의 눈은 매우 예민한 기관입니다. 눈은 빨리 다치고 쉽게 해를 입습니다. 아주 작은 재 하나가 고통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눈을 회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눈물을 흘림으로 눈 안에 들어온 먼지나 티끌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이 믿음은 가장 섬세한 은혜로서, 깨끗한 양심 안에서 가장 잘 자랍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순수한 양심에 믿음의 신비를 간직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딤전 3:9). 생기 넘치는 믿음의 역사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는 마음 안에 들어온 죄의 먼지나 세상의 허탄한 것에 의해 쉽게 손상됩니다. 참된 믿음이 있는 곳에서는, 죄로 인해 상처를 입었을 경우, 스스로 경건한 슬픔의 길로 그 죄를 배출합니다.-아더 핑크의 ‘믿음의 눈’에서 전문 발췌.
다시 1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오늘 [주]께서 너희에게 보여 주시는 [주]의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이집트 사람들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13). 모세는 주의 구원을 보게 되면 오늘 본 이집트 사람들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구원을 맛본 성도들은 더 이상 더 이상 우리를 사로잡고, 추격하고, 정죄하는 모든 것들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우리를 정죄하던 의문에 쓴 증서들을 다 도말하셨고, 정사와 권세를 벗겨 내셨으며, 저주와 심판을 없애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조용히 있을지니라, 하니라.](14). 모세는 다시 한번 “너희는 조용히 있을지니라” 외쳤습니다.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한 남자만도 60만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잠든 깊은 밤보다 더 조용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들의 손과 발은 물론이고 아무도 혀도 놀리지 못한 채 오직 모세가 전하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싸우신다는 사실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조용히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바라본다면 주님이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 사신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싸우십니다. 영적 전쟁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시도록 우리가 조용히 있을 때 승리를 선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쟁은 주님이 싸우시는데 방해나 걸림돌이 되지 않고 믿음으로 순종할 때 항상 이김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진단하셨습니다. [{주}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식하여야 구원을 받을 것이요, 조용히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이것을/ 원치 아니하고](사30:15). 우리 모두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주님을 바라 보고 조용히 있는 법을 배우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출애굽기(XL)
말씀: 출애굽기 14:13-14
요절: 출애굽기 14:14
40. 너희는 조용히 있을지니라.
믿음의 바닥을 보여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은 위대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믿음이 없거나 적을 때 꾸짖으시지만 그 믿음을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늘 평가하십니다. 큰 믿음은 칭찬하시고, 적은 믿음은 책망하시고 도우시며, 없는 믿음은 크게 꾸짖으십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믿음이 적어서 그 문제에 관한 한 늘 책망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버리시거나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바닥을 드러내 보일 때 주님은 우리를 책망하시지만 우리 앞에 닥친 환경을 해결해 주심으로써 믿음을 가지도록 도우십니다. 우리는 모두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만큼은 노골적이지 않다 할지라도 여러 가지 삶의 문제로 하나님께 불평한 적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몇 가지 예를 보겠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로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들풀을 예로 드시면서 책망하셨지만 믿음을 도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입히시거든, 오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물며 너희는 더 잘 입히시지 아니하겠느냐?](마6:30). 사람들은 먹고 사는 문제가 눈 앞에 닥치고 해결되지 않으면 믿음의 바닥을 드러내 보입니다. 바다에서 풍랑에 빠져 죽을 위기에 놓인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면서 우리를 돌아보셔야 하지 않느냐?고 항의하듯 따지자, 주님은 ‘오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며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매우 고요하게 되거늘](마8:26). 성도들이라 해도 생명이 위기에 처하면 누구나 믿음의 바닥을 보이게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의 출애굽 사건 역시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집트를 떠날 때는 금, 은, 의복을 마음껏 빌려서 기분좋게 나왔지만 이제 파라오의 기병들이 추격하자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출애굽기 14:10-12절까지는 그들의 극단적 생각과 말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죽게 생겼는데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란 태도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셨지만 풍랑을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순간 순간 이런 태도를 취하지만 저주를 받기 보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것은 불평과 불만뿐이지만 주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보이시고, 우리의 믿음 없음을 도우십니다.
베드로조차도 시선을 주님이 아닌 덕치는 풍랑으로 돌렸을 때 물에 빠져 죽음의 위기에 처했음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즉시 손을 내미사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오 믿음이 적은 자여, 어찌하여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마14:31). 주님은 책망하셨지만 역시 손을 내미셔서 베드로를 붙잡으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내미는 손길이 없다면 우리는 저 바다 속 깊이 빠져 들고 말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빵을 가져 오지 않음을 의논할 때 ‘오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16:8)라며 탄식하셨습니다. 성도들은 각별히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만이라도 참 자유를 얻어야 할 것입니다. 광야로 인도하신 주님은 그들에게 농사지을 땅을 주시지 않으셨지만 그들은 단 한끼도 굶어 본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가장 노하셨던 장면은 제자들이 마귀들린 아이를 두고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을 때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오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요? 언제까지 너희를 용납하리요? 그를 이리로 내게 데려오라, 하시고](마17:17). 누구나 다 강한 믿음을 원하고, 큰 믿음을 소유하고 싶어하지만 우리는 이런 책망을 들으면서 주님의 손길을 체험하면서 성장을 이루어야 합니다.
첫째, 두려워 말라.
1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오늘 [주]께서 너희에게 보여 주시는 [주]의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이집트 사람들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13). 하늘을 찌를듯한 원성과 불평으로 가득찬 백성들 앞에 모세가 일어섰습니다. 이것이 목자의 모습이요, 영적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들을 향해 던진 모세의 한 마디를 “두려워하지 말라”였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자신이 이끄는 양무리들의 마음 속에 이는 두려움을 잔잔케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소유하도록 해야 합니다. 근심과 불안을 제거하는 것은 환경을 conrtrol하는 것보다 더 급한 문제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가장 짧고도 위대한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입니다. 모세는 출애굽 여정 40년간 그의 설교 주제 중에 가장 많이 사용했던 단어 가운데 하나는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였습니다.
주님은 늘 자신의 종들에게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되었을 때, 죄와 불신이 가져다주는 결과입니다. 아담은 범죄했을 때, [그가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벌거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매](창3:10)라고 했습니다. 그는 벌거벗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두려웠습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두려움의 영이 아니요, 권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이기 때문이라.](딤후1:7). 두려움은 죄의 결과이며, 상태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그 죄를 제거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회복시켜 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두려움이 있다면 이 시간 죄를 자백하고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제거하기 위해 흘리신 주님의 보혈을 바라 보십시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들 후에 [주]의 말씀이 환상 속에서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防牌)요, 네가 받을 지극히 큰 보상(報償)이니라, 하시니](창15:1).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동일한 명령을 주셨습니다. [내가 네게 명령하지 아니하였느냐?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이는 네가 어디로 가든지 [주] 네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기 때문이니라, 하시니라.](수1:9). 기드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삿6:23).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준 유훈 역시 ‘두려워 말라’였습니다. [또 다윗이 자기 아들 솔로몬에게 이르되,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크게 용기를 내어 이 일을 행하고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이는 네가 [주]의 집에서 섬기기 위한 모든 일을 마치기까지 [주] 하나님 곧 나의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대상28:20). 이사야 대언자의 설교 역시 이것은 단골 주제였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이르기를, 마음을 강하게 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께서 오셔서 원수를 갚으시리니 곧 하나님께서 보응하시리라. 그분께서 오셔서 너희를 구원하시리라, 하라.](사35:4). 천사 가브리엘이 다니엘에게 준 말씀 역시 두려워 말라였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단10:12).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주님의 말씀 역시 “두려워 말라”입니다. [적은 양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너희 아버지께서 그 왕국을 너희에게 주시기를 참으로 기뻐하시기 때문이니라.](눅12:32).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성도들이 어떤 사건 앞에서 두려움이 스며들지 않고,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면 이미 문제 해결은 다 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시편 23편을 즐겨 읽고, 외웁니다. [내가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참으로 해(evil)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위로하시나이다.](시23:4). 어미 새의 품에 있는 아기 새처럼 거친 폭풍우 속에서도 완전한 평안을 유지하는 비결은 바로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주께서는 마음으로 주를 굳게 의지하는 자를 완전한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하기 때문이니이다.](사26:3).
둘째, 가만히 서서
하나님 앞에 가만히 서있는 것은 막연히 넋을 놓고 놀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힘과 지혜를 그치고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다시 1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오늘 [주]께서 너희에게 보여 주시는 [주]의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이집트 사람들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13). 모세가 백성들에게 두 번째 한 말은 ‘가만히 서 있으라’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가만히 서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하면 울고 불고 난리치느라 가만히 서 있는 일도 매우 힘든 일이 될 것입니다. 모든 자기 노력을 포기하는 일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더 어려운 일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합니다. 육신의 힘이 완전히 빠져서 물 위로 떠오르기 전까지 건져내기 어려운 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무슨 방도가 없습니다. 시험의 순간에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은 참으로 현명한 일입니다. 육신이 죽음에 처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조용히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리저리 살아 움직이는 육신적인 행동은 일을 점점 어렵게만 만들 뿐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은 자신의 키를 한치도 자라게 할 수 없고 자기 머리를 한 올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으면서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입니다. 때로 가만히 있는 것은 무기력해 보이고, 비능률적으로 보이고, 게으르게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육신의 힘을 포기하고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일은 육신의 피땀으로 얼룩진 어떤 노력보다 더 많은 열매를 거둡니다. 특히 나의 믿음이 바닥났을 때 우리는 주님 앞에서 잠잠하기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적인 지혜나 잔꾀를 부리는 것은 믿음이 아니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입니다.
때로 우리는 불가항력적인 일 앞에서는 포기하는 법을 배우지만 먹고 사는 문제나 자녀 문제나 가정 문제, 직장 문제, 교육 문제 등에서는 좀처럼 포기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과외 공부에 애들 좋은 것이라면 물 불 가리지 않는 부모들의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너에게 해 줄 것 다 해 주었다’. 사람이 하는 일과 하나님의 일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있어도 건강을 줄 수는 없습니다. 돈은 벌어 줄 수 있어도 행복을 줄 수는 없습니다. 침대는 사 줄 수 있어도 단잠을 줄 수는 없습니다. 좋은 책을 사 줄 수 있지만 건전한 지혜를 줄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선택해 줄 수 있어도 믿음을 줄 수는 없습니다. 친구를 소개 해 줄 수 있어도 우정을 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하십니다. 대학 아니 그 이상까지 교육을 시켜 줄 수 있지만 기대하는 사람으로 자라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일은 모두 주님의 영역이며, 주님이 하셔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를 준비해서 할 수는 있지만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이 말씀을 심어주고 자라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사람의 한계를 인정하고 늘 주님의 손길을 의뢰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런 문제에서 육신의 지혜와 힘을 그치고 조용히 주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여호사밧은 모압의 군대가 이웃 족속과 연합하여 쳐들어 올 때 주께 기도하면서 육신의 힘과 지혜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신뢰했습니다. [오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심판하지 아니하시려나이까? 이는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대적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오니 우리가 어떻게 할 줄도 모르며 우리 눈이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대하20:12). 이것은 적을 맞이하는 여호사밧의 최선의 결정이요, 가장 훌륭한 전략이었으며, 강력한 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여호사밧에게 이렇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 전쟁에서는 너희가 싸울 필요가 없나니 너희는 정열하고 가만히 서서 너희와 함께하는 [주]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오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마주보고 나가라. 이는 [주]가 너희와 함께할 것임이라, 하셨느니라, 하매](대하20:17).
이와는 반대로 적을 대항하기 위해서 이집트와 활발한 외교적 동맹 관계를 구축하고 군사력을 정비했던 이스라엘에게 주님은 무엇이라고 응답하셨는지 보십시오. [이는 이집트 사람들의 도움은 헛되고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임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외치기를, 그들의 힘은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라, 하였느니라.](사30:7).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힘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문제는 주님의 도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도움을 받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힘으로 동분서주하는 것입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 더욱더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성도들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인 줄을 알지어다. ...](시46:10a).
세 번째, 주의 구원을 보라.
다시 1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오늘 [주]께서 너희에게 보여 주시는 [주]의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이집트 사람들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13).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한 세 번째 말은 ‘오늘 주께서 너희에게 보여 주시는 구원을 보라’고 외친 것입니다. 주의 구원을 보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역의 구경꾼으로 가만히 서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이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들의 불신과 불평은 이제 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백성들은 모세가 전하는 말씀을 통해 안정을 찾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평했습니다. 히브리서 11:29,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마른 땅같이 건넜으나 이집트 사람들은 그것을 시도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으며](히11:29). 하나님은 믿음이 바닥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도우셨습니다.
우리는 주의 구원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주]의 구원을 소망하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3:26)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을 때 우리는 주의 구원을 볼 수 없게 됩니다. 보는 것은 믿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하지만 믿는 것은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모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실체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 안에서 죽었으며 약속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멀리서 그 약속들을 보고 확신하며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또 땅에서는 자기들이 나그네요, 순례자라 고백하였으니](히11:13). * 보고, 확신하며, 받아들였으며, 고백하였으니(순서를 볼 것). 모세 역시 이런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성경은 모세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가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을 보는 것 같이 하여 견디어 냈으며]라고 합니다(히 11:27). 이것이 바로 믿음의 눈이 지닌 특징입니다.
저는 여기서 시간을 좀 내어서 믿음의 눈에 대해서 말씀을 정리하고 넘어 가겠습니다. 시편 기자는 [내 눈이 항상 주를 향함은](시편 25:15)이라고 고백했는데, 욥은 자신의 실체적 간증을 이렇게 기술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성경은 자주 믿음을 눈으로 시각화해서 비유해서 표현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 역시 주님이 믿음의 눈을 소유했음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너희 아버지 아브라함은 나의 날 보기를 기뻐하다가, 보고 반가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56). 아브라함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실체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있었기에 보고, 기뻐하였고, 반가워했습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을 눈먼 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보지 못하는 존재요, 듣지 못하는 자라고 말하는데 복음을 전파해서 믿음을 갖는 것을 눈을 열어 주는 것으로 비유한 예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눈을 열어 주어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 함이요...](행 26:18)란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진리에서 떠나면 눈에 멀게 됩니다. 우리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주의에 빠졌을 때 그들은 십자가를 볼 수 없었습니다. [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인들아, 누가 너희를 미혹하여 진리에 순종치 못하게 하더냐? 너희 가운데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눈 앞에 명백히 제시되지 아니하였느냐?](갈3:1).
주님은 우리의 눈을 만드신 분이신데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보는 것으로 행하는 것을 매우 경계하셨고, 주의를 주셨지만 믿음의 눈을 갖도록 격려하십니다. 영국의 위대한 성경 교사였던 아더 핑크는 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1. 눈은 수동적인 기관입니다. 눈은 스스로 빛을 비추거나, 바라보는 대상에게 아무 것도 주지 못합니다. 눈이 해, 달, 별을 바라보며 무엇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나눌 수 없습니다. 눈은 아무 것도 더하지 못하며, 단지 마음 안에(망막에, 그러면 뇌에 전달됩니다.) 상(像)을 남기거나 비출 뿐입니다. 믿음도 그와 같습니다. 믿음은 아무 것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 안에서 붙들고 있는 것에 아무 것도 주지 못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 혼의 시각에 비쳐지는 대로 단순히 받거나 또는 마음 안에 취합니다. 과연 불 뱀에 물린 이스라엘 사람들이 놋 뱀을 바라보고 치유되었을 때 놋 뱀과 무엇을 나누었을까요? 우리는 아무 것도 그리스도에게 더하지 못하며, 다만 그분을 바라보며 구원을 받습니다(이사야 45:22).
2. 눈은 인도하는 기관입니다. 낮에 빛이 있을 때 눈을 뜬 사람은 자기 길을 볼 수 있으며, 눈 먼 사람이나 밤길을 걷는 사람처럼 도랑에 빠지거나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도 그와 같습니다. "사악한 자들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들은 심지어 어디에 걸려 넘어지는지도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의인들의 행로는 빛나는 광채 같아서 점점 더 빛나 완전한 낮에 이르느니라"(잠언 4:19,18).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 관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함이라"라고 말합니다(고후 5:7).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믿음이 우리의 본(本)이신 분을 봄으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로를 달릴 수 있습니다.
3. 눈은 매우 빨리 기능을 하는 기관으로서, 아주 멀리 있는 것들도 봅니다. 우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땅위에 있는 것들에서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산을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땅의 것들과 가장 높이 떠 있는 별을 동시에 볼 수 있으며, 넓디넓은 온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시력은 얼마나 놀라운지요! 동일하게 믿음의 권능도 놀라운 것입니다. 실로 믿음이란 시각이 예민한 은혜로서, 조상들의 믿음이 행했듯이, 아주 멀리 있는 것도 봅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약속된 것들을 보았습니다(히 11:13). 그와 같이, 믿음은 순간적으로 영원 과거를 뒤돌아보며 땅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영존하는 근원과 그 역사를 볼 수 있으며, 동시에 장차 올 영원을 향해 돌아서서 휘장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감춰진 영광들을 봅니다.
4. 눈은 비록 작지만 성능이 매우 뛰어난 기관입니다. 낮에 빛이 있을 때 눈을 뜬 사람은 자기 시야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뒤에 있는 것을 돌아보거나 앞에 있는 것들을 볼 수 있으며, 샘물을 들여다보거나 깊은 골짜기 아래의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으며, 멀리 하늘의 천체(天體)를 바라 볼 수 있습니다. 믿음도 그와 같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광대한 범위 안에 있는 모든 것에까지 미칩니다. 믿음은 먼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알게 하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깨닫게 합니다. 믿음은 지옥을 들여다보며, 하늘들을 관통해 봅니다. 믿음은 주변 세상의 온갖 허탄한 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순수한 믿음이 처음에는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조금 밖에 취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점에서도 땅에 속한 예시가 영적인 진리를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곧, 유아(乳兒)의 눈은 빛을 보고 외부의 물체를 지각하지만, 계속해서 시각이 자랄 동안에는 많은 연약함과 혼란을 겪게 됩니다. 믿음도 그와 같습니다. 처음에 영적 지식의 빛은 매우 희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기는 멀리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비들 안으로 더 깊게 자라게 되며, 마침내 열려진 비전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5. 눈은 매우 확신을 주는 기능입니다. 눈은 다섯 가지 육체적 감각(五感) 중에서 가장 설득력이 있습니다. 눈으로 보면 얼마나 확실한지요!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은 사물을 단지 정신적인 착각이라고 확신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바른 마음을 가진 자들은 누구도 그들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늘에서 해가 빛나는 것을 보면 낮이라는 것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바로 그 본질에서 수많은 확신을 가져오는 은혜입니다. "믿음은 소망하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회의론자들은 성경에 관한 하나님의 영감을 부인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그 진리의 초자연적인 아름다움들을 바라볼 때 그 문제는 영단 번에 해결됩니다.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꾸며낸 한 경건한 사람으로 간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도가 일단 진정으로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보면, "내가 알기에 내 구속자께서 살아계시니"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6. 눈은 자취를 남기는 기관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 마음에 자취를 남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종종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며"라고 기도드릴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이유이며(시편 119:37), 대언자가 왜 "내 눈이 내 마음을 상하게 하였도다"라고 선언하였는지에 대한 이유입니다(애가 3:51). 계속해서 몇 분 동안 해를 바라보면, 해로부터 눈을 돌리거나 눈을 감을지라도, 해의 자취는 눈에 남습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믿음은 마음에 의(義)의 태양이신 분의 자취를 남깁니다. "그들이 그분을 바라보고 빛을 받게 되었으며 그들의 얼굴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였도다."(시편 34:5). 고린도후서 3:18은 이에 대해 더욱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듯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나니, 곧 주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권능이 자기 백성들의 몸을 죽을 것(mortality)에서 생명으로, 천한 것에서 영광스러운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처럼, 지금 성령님께서는 도덕적으로 변화시키는 권능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성품에 역사하고 계시며, 믿음을 실행으로 옮기심으로 자녀들이 점점 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7. 눈은 놀라운 기관입니다. 자기 의견을 표현하는데 유능한 사람들은 이 특별한 지체가 인간의 몸 중에서 가장 기묘하고 진기한 부분이라고 주장합니다. 창조자의 지혜와 권능의 많은 부분이 보는 기능을 형성하는 가운데 발견됩니다. 그와 같이 믿음은 영혼 안에 기묘하고 놀랍게 역사하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자의 지혜와 권능의 많은 부분이 새로운 피조물의 그 어느 부분보다도 믿음의 은혜가 형성되는 가운데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믿음의 행위를 권능으로 성취하사"라고 말합니다(살후 1:11).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을 때 임했던 위대하고 전능하신 그 뛰어난 권능이 동일하게 그 사실을 믿는 사람들 위에와 안에 역사하고 있습니다(엡 1:19).
8. 몸의 눈은 매우 예민한 기관입니다. 눈은 빨리 다치고 쉽게 해를 입습니다. 아주 작은 재 하나가 고통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눈을 회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눈물을 흘림으로 눈 안에 들어온 먼지나 티끌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이 믿음은 가장 섬세한 은혜로서, 깨끗한 양심 안에서 가장 잘 자랍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순수한 양심에 믿음의 신비를 간직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딤전 3:9). 생기 넘치는 믿음의 역사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는 마음 안에 들어온 죄의 먼지나 세상의 허탄한 것에 의해 쉽게 손상됩니다. 참된 믿음이 있는 곳에서는, 죄로 인해 상처를 입었을 경우, 스스로 경건한 슬픔의 길로 그 죄를 배출합니다.-아더 핑크의 ‘믿음의 눈’에서 전문 발췌.
다시 1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오늘 [주]께서 너희에게 보여 주시는 [주]의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이집트 사람들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13). 모세는 주의 구원을 보게 되면 오늘 본 이집트 사람들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구원을 맛본 성도들은 더 이상 더 이상 우리를 사로잡고, 추격하고, 정죄하는 모든 것들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우리를 정죄하던 의문에 쓴 증서들을 다 도말하셨고, 정사와 권세를 벗겨 내셨으며, 저주와 심판을 없애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조용히 있을지니라, 하니라.](14). 모세는 다시 한번 “너희는 조용히 있을지니라” 외쳤습니다.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한 남자만도 60만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잠든 깊은 밤보다 더 조용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들의 손과 발은 물론이고 아무도 혀도 놀리지 못한 채 오직 모세가 전하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싸우신다는 사실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조용히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바라본다면 주님이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 사신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싸우십니다. 영적 전쟁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시도록 우리가 조용히 있을 때 승리를 선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쟁은 주님이 싸우시는데 방해나 걸림돌이 되지 않고 믿음으로 순종할 때 항상 이김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진단하셨습니다. [{주}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식하여야 구원을 받을 것이요, 조용히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이것을/ 원치 아니하고](사30:15). 우리 모두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주님을 바라 보고 조용히 있는 법을 배우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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