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2003년 6월 15일- 출애굽기        







출애굽기(XXXVII)




말씀: 출애굽기 13:1-16

요절: 출애굽기 13:9




37. 구속받은 성도에게 주어진 임무







오늘날 인본주의자들이 기독교인들에게 갖는 못된 감정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가 인본주의를 지향하지 않고 지나치게 교회 중심, 하나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 내에서 신앙 생활을 하는 신자들은 자신들의 생활이 교회 중심도, 하나님 중심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감할 것입니다. 진정 인간다운 인간으로서 살고 싶은 사람은 독실한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한국에서 무교회 주의를 주창한 김교신 목사와 더불어 주로 문필 활동을 했던 함석헌 선생은 '씨알의 소리'라는 잡지에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란 글에서 3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첫째, 한국 교회는 실천이 없다. 둘째, 한국 교회는 계급주의를 형성하고 있다. 셋째, 성도들이 성령은 받았는데 도덕적 수준은 올라가지 못했다. /신앙과 생활의 분리/라고 지적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분이 성경적인 신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 지적은 참으로 적절한 지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우스개 소리로 한국 교회의 목사들이 하는 설교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합니다. # 믿어라, 돈내라. 집짓자(김용옥). 이는 참으로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몇 가지 명령을 통해 구원받은 성도에게 주어진 임무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우리 모두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며, 세상을 밝게 비추고, 그들의 불신과 죄악을 정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정죄할 수 있는 도덕적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성도는 어떤 죄인도 그들을 죄와 저주로부터 인도해 낼 수 없습니다.

주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처음 난 것은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로 돌리라(2). 구속받은 성도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자신을 더러운 것들로부터 거룩히 구별하는 것입니다. 분리는 성별의 첫 걸음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분리주의자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분리했으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림으로써 의를 행하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뒹굴어야 한다. 기독교인들이 따로 자기들끼리만 뭉쳐 있어서는 안된다. 세상 속으로 참여, 연합을 공공연히 외치는 제도권 교회의 슬로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칩니다. 분리되지 않으면 누구도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합니다. 금이 빛을 내기 위해서는 모든 불순물에서 완전히 분리되어야 하며, 금에 썩여 있던 이물질들은 철저히 녹여서 제거해 버려야 합니다. 그때만이 금은 금으로서의 가치를 발휘하고 빛을 냅니다. 소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물질을 제거하고 분리해서 순수한 소금이 되어야만 그 맛을 냅니다. 썩여 있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분리되어야만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듯이, 성도들은 교회로 분리되어야만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구속하러 세상에 오셨지만 죄인들과 분리되신 분이셨습니다. [이는 이러한 대제사장께서 우리에게 합당한 분이셨기 때문이니 그분은 곧 거룩하시고 해가 없으시고 더러움이 없으시고 죄인들로부터 분리되시고 하늘들보다 더 높이 되신 분이시라.](히7:26). 십자가와 성령은 우리를 분리시켜 줍니다. 우리는 분리주의자들이지만 분리해서 세상을 등지고 수도원 생활을 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분리했으면 주님께 자신을 드림으로써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분리된 자들만이 세상을 이깁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처음 난 것 곧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를 여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그것은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1-2). 이스라엘 백성은 다 죽음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특히 처음 난 것들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다 직접적인 죽음에서 어린 양의 피로 인해 죽음에서 건짐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생명은 주님의 것입니다. 이들은 장차 오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모형이요, 속죄를 통한 구원을 미리 보여준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부모들은 누구라도 장자에 대한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장자들 역시 자신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구원받은 후 우리 자신에 대한 권한이나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음에 처해졌고, 저주를 받았고,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심판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자신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현재 사는 삶은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며, 우리의 몸은 주님께 거룩한 산제물로, 의의 병기로 드려져야만 합니다.

누가복음에 주님의 모친 마리아는 예수님을 성전에 데려가, 어린 예수님을 주님께 바쳤는데 이는 율법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주}의 율법에 기록된바, 태를 여는 남자마다 {주}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이를 {주}께 드리고](2:23).

저와 여러분은 구원의 첫 열매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일어나신 첫 열매이신데, 우리는 모두 거기에 동참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18, 롬8:23을 찾겠습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약1:1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최초의 부류입니다. 구약 성도들은 약속은 받았지만 우리는 약속의 실체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들뿐 아니라 우리 곧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한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삼으심 즉 우리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림은](롬8:23).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자신을 거룩히 구별하여 주께로 돌려야 합니다.

둘째, 이 날을 기억하라(3). 구속받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두 번째 명령은 ‘이 날을 기억하라’입니다. 성도는 마땅히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주 주의 첫날에 모임으로써 주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바로 그 날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이 날을 기억하라. 너희가 이 날에 이집트 곧 속박의 집에서 나왔나니 이는 [주]께서 손의 권능으로 너희를 그곳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3).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빕월 첫날 곧 출애굽한 날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라마다 독립 기념일이나 건국 기념일이 있습니다. 이날을 기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역사를 잊어버리는 사람은 현재도 미래도 없습니다. 나라마다 국어와 국사를 그렇게 중요시하는데는 이 두 가지야말로 생존의 법칙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의 날이 있듯이 우리에겐 구원받은 날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십자가의 사건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것을 잊지 말고 기념하도록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주의 만찬입니다. 주님은 날(day)을 기념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날에 그 일을 행하신 주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감사를 드리신 뒤에 그것을 나누시고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부서진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하시고저녁 식사 뒤에 또 그와 같은 방법으로 잔을 집으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니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하셨느니라.](고전11:24-25).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국가 공휴일을 지정하셔서 노동자들에게 휴식이나 휴가를 주시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이 날에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잊어도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에게 생명을 주신 주님을 잊지는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우리의 기억을 도우시고 새롭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나의 복음대로 다윗의 씨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신 것을 기억하라.](딤후2:8).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전에 한 말을 기억하라.](유17).

셋째, 너희는 누룩 있는 빵을 먹지 말라(3). 구속받은 성도에게 주어진 세 번째 일은 누룩 있는 빵을 먹지않는 것입니다. 3절 하반부와 7절을 보십시오. [.. /너희는/ 누룩 있는 빵을 먹지 말라. 아빕월 이 날에 너희가 나왔느니라. [주]께서 너를 인도하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 곧 네게 주시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시거든 너는 이 달에 이 예식을 지켜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고 일곱째 날에는 [주]께 명절을 지킬지니라.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고 누룩 있는 빵은 네게서 보이지 아니하게 하며 또 네 모든 지역에서도 네게 누룩이 보이지 않게 할지니라.](3b-4). 누룩이 무엇인지는 여러 차례 살펴보았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위선과 율법주의)과 사두개인들(거짓 교리, 불신)의 누룩을 조심하라(마16:12), 헤롯의 누룩(정욕과 탐심)을 조심하라(막8:15)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성도들에게 묵은 누룩, 악의와 악독의 누룩을 벗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를 뜨게 함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들인즉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이는 우리의 유월절(逾越節)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의와 악독의 누룩으로도 말며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빵으로 하자.](고전5:6-8). 옛 생활의 청산 없이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전에 행했던 악한 습관, 정욕, 탐심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십자가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는 더러움을 내어버릴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7:1, 야고보서 1:21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 약속들을 가졌은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완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십자가의 피를 통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약속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더러움에 빠지는 것은 말씀의 능력이나 성령이 없어서가 아니라 여전히 죄를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 십자가를 환영할 리가 없고, 성령의 불같은 능력을 간구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접붙여진 말씀 곧 능히 너희 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1:21).

이스라엘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구속을 받은 후 곧 바로 일주일 동안 누룩없는 빵을 먹었는데 이는 7일이 성도의 전생애를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임을 배웠습니다. 주님은 네 모든 지역에서 네게 누룩이 보이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죄는 단절되면 단절될수록 좋고,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좋습니다. 빵을 먹는 것은 우리의 일상 생활입니다. 누룩없는 빵은 맛이 없고 딱딱합니다. 이는 육신의 만족을 위해서 빵을 먹는 것이 아니란 점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는 때는 맛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 배부르고 나면 맛을 따지기 시작합니다. 맛있는 집을 찾아서 몇 시간을 달립니다. 어떤 사람은 어디서 들은 요상한 음식을 기억해 두었다가, “그것 한번 먹어 봤으면 합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젖과 꿀이 흐르고 온갖 양식이 풍족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일주일 동안의 누룩 없는 빵을 먹음으로써 자신들의 구원과 삶의 목적과 삶의 방식을 새롭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해마다 정한 때에 이 규례를 지키라고 하셨습니다(10). 1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는 해마다 그 정한 때에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10). 마음 가운데 성령이 없었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교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날과 달과 절기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여러 가지 지켜야 할 절기들을 주시고, 그 날을 통해 의미를 기억하도록 산 교육을 시키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신약 성도들에게는 이런 규례는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로 인해 이런 날과 달과 절기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이나 거룩한 날이나 월삭(月朔)이나 안식일로 인하여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이거니와 그 몸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느니라.](골2:!6-17). 대신 우리는 이런 외적인 날과 달, 절기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주님을 경배하고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따로 절기가 없습니다. 수요일은 주님이 죽으신 날로 기도 모임과 성경 공부를 하고, 주일은 부활하신 주의 첫날로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이런 생활을 통해 누룩을 내어 버리는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넷째, 신앙을 전수하라(8). 구원받은 성도가 절기만 지킨다고 의무를 다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절기나 명절은 사람들이 다 하면 할 수 있는 것이고, 외적인 형식입니다. 성도들 가운데도 참된 믿음은 없어도 모임이나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역시 주의 거룩한 절기들을 오늘날 연휴를 즐기는 휴가 정도로 생각해 버리고, 축제로 바꾸어 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너는 그 날에 네 아들에게 보여 주며 이르기를, 이것을 행함은 내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주]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로 인함이라, 하고](8). 믿음은 전파되어야 할 뿐 아니라 전수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같이 자식들에게 복음을 전수해야 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주님은 출애굽의 구속 사건이 모세와 아론의 당대에 끝이 나버리거나 채 50년도 지나지 않아서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리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사건이 몇 천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입에서 되뇌어 지고 있는 것은 믿음이 단절되지 않고, 전파되고 전수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는 그 날에 네 아들에게 보여 주며 이르기를....’ 신앙은 보여 주며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래 믿음은 보지 않고 믿는 것이지만 가족들 특히 자녀에게 신앙을 전수할 때는 보여 주며 말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믿음을 보여 주며 말했습니다. 이삭은 야곱에게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삭은 아들들을 축복할 때 야곱이 아닌 에서의 장자권을 인정하여 복을 주려했지만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후에 그것을 뒤집지 않았고, 주님의 섭리와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믿음으로 이삭은 앞으로 올 일들에 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히11:20). 그는 마지막 순간에 믿음을 보여 주며 말했습니다. 특히 어머니 리브가는 탁월한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믿음을 보여 주며 말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이삭이 눈이 멀어서 잘못하는 줄 알았지만 정확하게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머리에 손을 얹었고 요셉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아들들에게 축복하고 자기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히11:21). 그들의 신앙은 그렇게 전수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신앙의 전수가 가장 잘 된 한 예가 디모데입니다. [내가 네 속에 거짓 없는 믿음이 있음을 회상(回想)하노니 이 믿음은 먼저 네 할머니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었으며 /이제/ 네 속에도 있는 줄을 내가 확신하노라.](딤후1:5). 디모데는 아버지가 헬라인이었고 어머니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이방 문화와 이방 유산을 받은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할머니로 이어지는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자녀의 믿음은 가정에서 형성됩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약점을 잘 압니다. 부모의 위선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전에 어떤 아이가 ‘우리 아빠 어마는 뭐든지 돈 좀 있다고 돈으로 다 때워...’라고 한 아이가 말하자, 다른 아이가 ‘야 그건 좀 낫네, 우리 집은 말로 다 때워’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행실을 눈여겨보고, 그 진실성을 다 봅니다. 여러분들은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수해야 합니다. 자녀가 주일에 교회를 안가고 드러누워 자고, TV나 보고 있거나 친구들과 놀러 가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 두는 것은 그냥 두어서는 안됩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잔나 웨슬레는 말하기를, ‘자녀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지 않는 부모는 마귀의 일을 하는 것이며, 신앙을 무의미하게 하는 것이며, 구원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육신과 영혼을 멸망케 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 어떤 사람은 이르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위가 있으니 행위가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내 행위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느니라.](약2:18). “나는 내 행위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말할 수 있는 믿음만이 참 믿음이요,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다섯째, 주의 율법이 네 입에 있게 하라(9). 구속받은 성도가 해야 할 일은 주의 율법이 네 입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네 손 위의 표적과 네 눈 사이의 기념물로 삼고 [주]의 율법이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주]께서 강한 손으로 너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9). 주의 율법은 마음에 있어야만 입에 있을 수 있습니다. 주의 율법이 입에 있게 하기 위해선 성경을 읽어야 하고, 복음을 전파해야 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주의 율법이 있어야 할  입에 더러운 욕이 있고, 불평이 있고, 농담이 있고, 세상 가요가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선한 사람은 자기 마음의 선한 보고(寶庫)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자기 마음의 악한 보고에서 악한 것을 내나니 이는 /사람/의 입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하기 때문이니라.](눅6:45)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는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쉽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입술에 두는 것이 목사나 신학을 전공한 사람들에게서나 나오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너는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밤낮으로 그 안에서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이는 그리하면 네가 네 길을 형통하게 하며 또한 크게 성공할 것임이라.](수1:8).

주님은 우리 입에 말씀을 두기를 기뻐하십니다. 주의 말씀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내가 내 말들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 속에 너를 가렸나니 이것은 내가 하늘들을 펴고 땅의 기초를 놓으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고자 하였음이라.](사51:16). 이스라엘이 이 말씀을 버렸을 때 그들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조용히 암송하는 좋은 습관을 기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경 암송은 조요한 내적 혁명을 이루는 수단이며, 영적 성장과 열매를 맺는 첩경입니다. 저희 교회에서 매주 하는 설교 본문에 인용되는 구절을 하루 아침과 저녁에 다섯 번씩만 읽어 보십시오. 6개월이면 삶이 완전히 바뀔 것이며, 1년이면 여러분의 가정이 바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입에 주의 말씀이 있다면 전도가 가능해집니다. 주님은 대언자들의 입에 말씀을 담아 주셨습니다. [[주]께서 자신의 손을 내미사 내 입에 대시며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들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1:9). 그리고 언약의 백성들에게도 그러하셨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되, 나로 말하건대 그들과 맺은 언약이 이것이라. 곧 네 위에 있는 내 영과 네 입에 둔 내 말들이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입과 네 씨의 입과 네 씨의 씨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주]가 말하노라.](사59:21). 일제 시대때 한국에는 최권능 목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분의 본명은 최봉석이었는데 말씀의 권능이 워낙 뛰어나서 성도들 사이에 최권능이라 불렸습니다. 이분은 매일 ‘예수 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복음을 전했는데,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일본 경찰에 잡혀 매질을 당했습니다. 몽둥이로 한 대 맞을 때마다 예수 천당, 예수 천당 외치자 일본 경찰이 왜 비명을 안지르고 예수 천당을 외치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최권능 목사는 내 안에는 예수가 가득차서 입이 열리면 예수만 나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 입술에 말씀을 담아 주셨는데, 우리 입술에 이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노라. [주]가 말하노니, 평강이 있을지어다. 멀리 있는 자와 가까이 있는 자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쳐 주리라, 하시기 때문이니라.](사57:19). 내 안에 말씀이 없으면 입술의 기도는 립써비스가 되고, 나의 전하는 메시지는 헛소리가 되고, 나의 찬양은 시끄러운 소음이 되고 맙니다. 입술에 말씀이 있을 때 그것이 기도든, 전도든, 찬양이든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여섯째, 첫 새끼를 다 구별하여 주께 돌리라(13). 이는 주님께서 구속받은 성도들의 경제관을 확립해 주는 말씀입니다. 2절에 이어서 다시 한번 주께 드려야 할 헌물을 말씀하셨는데 첫 소산물을 다 주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가나안에서는 이집트에서와는 달리 사유 재산 제도가 인정되고 부요한 경제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때에 중요한 것이 올바른 경제관, 물질관입니다. 11-1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너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가나안 족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고 그 땅을 네게 주시거든 너는 태를 여는 모든 것과 네가 소유한 짐승의 첫 새끼를 다 구별하여 [주]께 돌리라. 수컷은 [주]의 것이니라.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양으로 대속(代贖)할 것이요, 대속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자손들 가운데 사람에게서 처음 난 자는 다 대속할지니라.](11-13). 가나안 땅은 주님께서 이들에게 주신 것이기에 이스라엘의 땅은 근본적으로 다 주님의 것이고, 그들은 다 하나님의 소작농 즉 청지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황무지를 주신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땅을 주셨고, 소출 역시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돈이 없을 때는 돈이 생기면 십일조만 아니라 선교 헌금도 하고 십이조, 십삼조도 할 것 같지만 막상 돈이 생기면 십일조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돈은 생기면 생길수록 그보다 더 많이 필요한 곳이 생기는 법입니다. 셋방살이하는 사람은 전세방만 있어도 한숨 놓겠다 싶고, 그런 사람은 작은 아파트라도 자기 집이 있으면 될 것 같지만 막상 집을 구한 사람은 방한 칸이라도 더 있는 넓은 집이 필요해 지는 법입니다. 그러다 보면 돈은 더 버는데도 쓸 곳은 더 많아지고, 부족한 돈도 더 많아집니다. 첫 소산물을 다 구별하여 주께 돌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청지기요, 나의 모든 소유가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신앙 고백입니다.

14-16절은 8절의 반복으로서 자녀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오늘 말씀은 구속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구속받은 성도들의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구원받은 성도로써 이 말씀들을 새롭게 되새기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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