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6월 01일- 출애굽기
출애굽기(XXXV)
말씀: 출애굽기 12:29-39
요절: 출애굽기 12:29, 30
35. 출애굽의 밤
어느 민족이나 어느 개인에게나 특별한 날(낮)이나 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가장 특별한 밤은 오늘 본문의 출애굽의 밤이었습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이 가장 실감나는 장면이 바로 출애굽의 밤일 것입니다. 유구한 역사와 함께 한 이스라엘은 민족적 위기에서 탈출한 이런 밤이 많이 있었는데, 출애굽은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잊혀질 수 없는 그런 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파라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가게 하여 나를 섬기게 하라. 그가 가는 것을 네가 거부하면, 보라, 내가 네 아들 곧 너의 처음 난 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출4:23). 그러나 파라오는 그 말을 우습게 알았고,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 한치의 오차없이 그대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전에 모세가 이 말을 파라오의 면전에서 차마 하지 못하고 전하지 않았던 사실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후에 11:5에서 이 말씀을 파라오에게 전했는데, 하나님의 경고는 결코 늦추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예수를 믿으면 좋다는 이야기만 하다 잘 안될 때 최후의 순간에 지옥이나 심판에 대해서 전함으로 그 사람의 혼을 정말 지옥으로 보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한밤중에 [주]께서 이집트 땅의 처음 난 것 곧 왕좌에 앉은 파라오의 처음 난 자로부터 옥에 갇힌 자의 처음 난 자까지 다 치시고 또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과 온 이집트 사람들이 다 일어나고 이집트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으니 이는 그곳에서 사람이 죽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더라.](29-30). 하나님은 어린양의 피가 없는 모든 집을 다 치셨습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가축까지 처음 난 것은 다 죽었는데, 이는 하나님이 모두를 죽이신 것과 같았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파라오와 같이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전도자들은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그와 같이 멸망하리라.](눅13:3).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로되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막16:16).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전혀 근거없는 허황된 소리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는 마치 귀먹은 자들에게 외친 것처럼 아무 반응도 불러 일으키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헛되이 돌아 오지도 않으며, 떨어지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의 자녀를 죽여왔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처음 난 자들을 죽이셨습니다. 왕궁에서부터 지하 감옥까지 그 재앙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고, 하나님의 죽음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싶판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이가 없으며 왕자나 죄수나 동일한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집집마다 죽음이 있었습니다. 방에서는 사람이 죽고, 외양간에서는 소가 죽고, 산이나 들이나 이집트 땅의 처음 난 것들은 다 죽었습니다. 이는 마지막 날 주님의 재림의 때에 있을 심판의 전주곡입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이전에 있었던 일들은 이후에 있을 일들에 대한 모형입니다.
하나님은 파로오에게 거듭되는 경고와 여러 차례의 예비적 심판을 보내셨지만 그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무시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9:22에서 파라오에게 보여 주신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인내를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노를 보이시고 자신의 권능을 알게 하고자 하사 파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들에게 심히 오래 참으심으로 인내하시고](롬9:22).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향해 참으시는 까닭은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바울 사도는 회개하지 않는 세상에 대해서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혹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함을 알지 못한 채 네가 그분의 선하심과 관대하심과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2:4). 베드로는 주님의 오래 참으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디신 것이 아니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 ](벧후3:15a). 하나님의 성품이 오래 참으심이라면 우리 안에 맺혀야 할 성령의 열매 역시 오래 참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가 오래 참음이란 사실과 사랑은 오래 참는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다행히 저와 여러분은 이런 오래 참으심을 멸시하지 않고, 구원받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잠시는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참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부당한 일을 당할 때는 좀처럼 참지 못합니다. 성령의 열매가 우리 안에 맺히고, 우리 안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는 결코 오래 참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구원받은 이유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서 찾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런 까닭으로 긍휼을 얻었나니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내 안에서 심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앞으로 그분을 믿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될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1:16). 저와 여러분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성경은 오래 참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 살펴보고 다음 구절로 넘어가겠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구해야 할 최상의 은사는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의 특징 중 첫 번째가 바로 오래 참음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우쭐대지 아니하며](고전13:4). 오래 참는 것, 기다림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의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집나간 탕자를 향해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욥의 인내, 열매를 기다리는 농부....기다림과 오래 참음이 없다면 우리의 영적 생활은 결코 올바르게 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설명하면서, [순수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친절함과 성령님과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권능과 오른 손과 왼손에 든 의의 병기로 그리하며](고후6:6-7)라고 했습니다. 오래 참음이 없다면 구령이나 교회 사역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전에 어떤 젊은 목사님이 자신이 겪는 어려움과 고민에 대해 토로하며 조언을 구했습니다. 나이 지긋한 목사님이 다 듣고 나서 하신 한 마디는 “오래 참으시게”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젊은 설교자 디모데에게 설교 사역의 핵심이 “모든 오래 참음”에 있음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너는 말씀을 선포하라. 때에 맞든지 맞지 아니하든지 항상 예비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딤후4:2). 저는 이런 오래 참음이 없어서 여러번 실패를 반복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미국에서 목회 경력 만2년이 지났는데 벌써 십년을 한 것처럼 아득했습니다. 저는 지금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분의 영광스런 권능에 따라 모든 강력으로 강건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인내와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1:11). 부부 관계이든 목양 관계이든 부자지간이든 친구 관계이든 우리는 오래 참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새겨야 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행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안에서 서로 참아 주며](엡4:2). 이것이 교회와 가정에서 학교와 직장에서 필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 조급함이 사역을 망치고, 자식을 망치고, 친구를 망치고, 가정을 파괴합니다. 마가에 대해 참지 못하고 성질을 냈던 바울과 마가에 대해서 오래 참고 기다렸던 바나바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나바는 기다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결과 마가는 마가복음을 쓸 수 있고 바울은 말년에 로마의 감옥에서 마가를 일컬어 [... 마가를 데리고 함께 오라. 이는 그가 나의 사역에 유익하기 때문이라](딤후4:11)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마가를 ‘나의 아들 마가’(벧전5:13)라고 했는데 이는 바울과 달리 마가를 향한 바나바의 오래 참음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 교회 성도들에게 복을 주셔서 모두 상대를 향해 오래 참는 선한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골로새서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요,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로서 긍휼히 여기는 심정과 친절과 겸손한 마음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골3:12). 잠언 기자는 [오래 참으면 통치자도 설득할 수 있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잠25:15)고 했습니다.
출애굽의 밤을 생각하며 우리는 주의 심판의 엄위함, 죄에 대한 엄중한 진노, 죄인을 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는 동시에 파라오와 이스라엘을 향해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가?를 동시에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밤에 파라오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서 떠나 너희가 말한 대로 가서 [주]를 섬기고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떼도 소떼도 가져가고 내게도 축복하라, 하고](31-32). 파라오는 처음에는 가지 못하게 했다가 남자들만 가라, 소떼와 양떼는 두고 가라, 자식들은 남겨 두고 가라 하며 계속해서 타협책을 썼습니다. 그는 4번에 걸쳐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결국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한 타협책을 정리해 봅시다. 첫 번째 타협-출8:25 [파라오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리라, 하니], 이는 하나님을 섬기되 세상을 버리지 말라. 세상과 함께 하고 동화되고, 친구가 되고, 세상을 사랑하라. 결코 세상과 분리되지 말라는 마귀의 제안입니다. 두 번째 타협-출8:28 [파라오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가게 하리니 너희가 광야에서 주 너희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하매], 이는 정녕 떠나야 한다면 멀리는 떠나지 말라. 교회는 다니더라도 세상에서 이전에 하던 것들을 더럽게 여기지 말라. 광신자가 되지 말라. 그런 것입니다. 세 번째 타협-출10:10, [파라오가 그들에게 이르되, 주가 너희와 함께할지니 그리하면 내가 너희와 너희의 어린것들을 보내리라. 너희는 조심하라. 이는 너희 앞에 악이 있기 때문이니라. 그리할 수 없나니 이제 너희 남자들만 가서 주를 섬기라. 이는 너희의 구하는 바가 그것이기 때문이라, 하므로 그들이 파라오의 눈앞에서 쫓겨나니라], 너희들만 가라. 한 마디로 말하면 믿음의 전수를 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말아라. 네 번째 타협-출10:24 [파라오가 모세를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주를 섬기되 오직 너희의 양떼와 소떼는 두고 너희의 어린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하니] 이 말은 완전히 단절하지는 말라. 몸은 떠나도 마음은 여기에 있게 하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마지막 재앙을 통해 파라오의 이런 제안과 타협안이 얼마나 가증한 것인지 심판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자든 불신자이든 완전한 굴복과 순종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신자들은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기초한 인격적인 순복을 해야 하며, 불신자들은 심판과 벌을 통해 강제적인 순복을 해야 합니다.
33절을 보십시오.[이집트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었도다, 하며 백성을 재촉하여 그 땅에서 급히 내보내려 하므로](33). 하나님은 이집트인들의 장자만 치셨지만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이 다 죽은 자가 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백성들을 재촉해서 급히 내보내려 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하나님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의 상황을 시편 기자는 이렇게 씁니다. [그들이 떠날 때에 이집트가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들에 대한 두려움이 저들 위에 임하였음이라.](시105:38). 430년의 종살이가 종결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교회의 모형으로써 세상에 걸림돌이요, 그들에게 사망의 향기를 풍겼습니다. 이집트인들은 빨리 내 보내지 않으면 재앙이 자신들 모두에게도 임할 것이라고 생각했던지 이들을 급히 내 보내려했습니다. 한편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급하게 되었습니다.
34-36절을 보십시오. [백성이 반죽을 발효시키기도 전에 반죽과 반죽 그릇을 가져다가 옷에 묶어 어깨에 메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이집트 사람들에게서 금은 보석과 의복을 빌리매 [주]께서 이집트 사람들의 눈앞에서 백성에게 은총을 베푸사 이집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빌려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이집트 사람들을 노략하였더라.](34-36). 공포에 질린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용히 그냥 나가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이들이 나가면서 무엇이든지 요구하는 것은 다 주었는데, 금이나 은이나 옷 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집트 백성들을 약탈하거나 빼앗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빌리게 하셨습니다. 이 일 역시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무엇을 빌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담보물이나 계약서 없이, 언제 갚겠다는 기약도 없고, 한번 떠난 이스라엘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 올 일도 없습니다. 이집트인들 역시 이들을 다시 보고 싶지 않을 상대이고 보면 금과 은, 의복을 그냥 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지 않으셨다면 간밤에 자식 죽고, 가축 죽은 마당에 금, 은, 의복을 쉽게 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집트 사람들을 노략하였더라’는 말은 하나님이 승리하신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리품을 취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승리하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은 금, 은은 고사하고 돌에 맞아 죽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국가에 자연재해나 전염병 등의 대 재앙이 닥치면 그 나라에 있는 소수 민족들은 엄청난 박해와 죽임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올해는 일본의 관동대지진이 발생한지 80년째 되는 해인데 그 때 조선인들은 약 7,000명이 죽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역사적으로 매우 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장자 재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원망이나 불평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 사람들의 눈앞에서 은총을 베푸셨다는 말은 ‘두려움’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구하는 대로 빌려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 사람들의 종에서 이제는 무엇이든지 요구하였고, 노략했습니다.
37-38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떠나 숙곳에 이르니 아이들 외에 걷는 남자가 약 육십만 명이요, 섞인 무리와 양떼와 소떼와 심히 많은 가축도 그들과 함께하였더라.](37).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집트 땅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란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재물을 가지고 나올 것이란 말씀도 성취하셨습니다. 민수기에는 두 번의 인구 조사가 나오는데 남자만 약 육십만명이었고, 총 인구는 이백만이 넘었을 것입니다.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70명이 430년 만에 남자만 60만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출애굽 때에는 섞인 무리들이 함께 했습니다. 이들은 혼혈을 말합니다. 예를들어 이스라엘 남자와 이집트 여자가 살거나, 반대라 이집트 남자가 이스라엘 여자와 살며 자식을 낳았거나 한 그런 경우입니다. 400년 이상 이집트에서 살아온 이스라엘로서는 이런 사람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은 출애굽의 여정에서 적지 않는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 첫 예는 레위기 24:10-11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로서 그 아버지는 이집트 사람인 어떤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나가더니 이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과 한 이스라엘 사람이 진영에서 서로 싸우다가 이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주의 이름을 모독하여 저주하므로 그들이 그를 끌고 모세에게로 가니라. (그 어머니의 이름은 슬로밋이요, 단 지파에 속한 디브리의 딸이더라.)](레24:10-11). 국제 결혼, 인종간의 결합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차별이 있을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분리시켜 놓으신 것을 사람이 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밤과 낮을 나누시듯이 성별을 나누시고, 인종을 나누시고, 민족을 나누셨습니다. 또 한번의 예는 민수기 11:4입니다. [그들 가운데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에 빠지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소리내어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까?](민11:4). 이들은 자신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 전체를 탐욕에 빠지게 하여 소리내어 울게 했습니다. 신성 모독, 불신, 탐욕이 섞여 있는 이들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대 타민족과 결혼하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순수성을 유지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런 계명은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출애굽 과정에서 그들은 발람의 계략에 빠져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오히려 그 이교도들 가운데 섞여서 그들의 행위들을 배우며](시106:35). 후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이 일은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우상 숭배에 빠지고 민족들의 종으로 팔려 다녔습니다. 솔로몬조차도 스스로 이방 여인들을 취함으로 왕국을 망하게 했습니다. 결국 70년간 바빌론의 종살이를 한 후에 느헤미야의 주도로 이스라엘 땅에서 섞인 무리들은 비로소 제거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이 율법을 듣고 섞여 사는 모든 무리를 이스라엘에서 다 분리시켰느니라.](느13:3). 혼혈은 적그리스도의 정책입니다(창34:19 참조). 그리스도인들 역시 믿지 않는 자들과 결혼함으로써 섞인 무리가 되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들과 공평하지 못한 멍에를 메지 말라. 의와 불의가 어찌 사귀겠으며 빛과 어둠이 어찌 친교를 나누겠으며](고후6:14).
오늘날 교회는 이런 불의와 불법을 절대적으로 하면 안될 일로 가르치기보다는 가능하면 안하는 쪽으로 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설교하거나 결혼해서 믿게 하면 된다는 말 같지도 않는 소리를 하는 마귀의 종들이 강단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어떤 믿음 좋다는 교회 집사는 돈 없고 능력 없는 신자보다는 장래성 있고 돈 있는 불신자에게 딸을 시집보내겠노라고 당당하게 소신 발언을 했는데 책망받기 보다는 숨김없이 솔직한 사람이란 평을 받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모독하는 죄악입니다. 돈있고 능력있고 장래성 있는 불신자란 말은 신자의 입장에서는 전혀 성립되지 않는 말입니다. 돈 있다는 말은 돈을 사랑하는 배금주의를 지향하는 것인데 이는 모든 악의 뿌리를 택하겠다는 것이며, 능력있는 사람이란 능력이신 하나님, 말씀의 능력대신 눈에 보이는 능력을 추구한다는 말이며, 장래성 있다는 말은 인생은 잠깐 보이다 사라지는 수증기와 같고 바람과 같다는 진리에 무지한 말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보다 더 많은 보화를 가진 자가 누가 있고, 말씀을 믿는 성도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닌 자가 어디에 있을 수 있으며, 영적 생명을 지닌 그리스도인보다 더 밝고 보장된 장래를 지닌 사람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분리 대신 섞인 것을 택하겠다는 반역과 불신의 말이 공공연하게 인정받고, 용납되고, 솔직한 것이라면 이는 이미 불신과 배교의 깊은 늪에 빠져 있는 상태요, 마귀의 올무에 걸려 있다는 증거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에스라는 이 일을 가증한 일이라고 하며 하나님 앞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보십시오. 성도들은 모두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에스라 9:1-3, [이제 이 일이 끝난 뒤에 통치자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의 백성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분리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가증한 일들 곧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과 암몬 족속과 모압 족속과 이집트 사람들과 아모리 족속의 가증한 일들을 행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자기와 자기 아들들을 위하여 그들의 딸들을 취함으로 거룩한 씨가 그 스스로 그 땅의 백성과 섞이게 하였음이니이다. 참으로 이 범법에서 통치자들과 치리자들의 손이 으뜸이 되었나이다, 하므로 내가 이 일을 듣고 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스9:1-3). 결혼관이 무너지는 성도들에게서 바른 교회관을 찾을 수 없습니다. 바른 교회관이 없는 사람들로부터 어떤 선한 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출애굽의 밤에서 나온 이들은 모두 믿음이 충만하고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들을 가르치고, 먹이시고, 목양하십니다. 파라오 앞에 섰을 때보다 백성들 앞에 선 모세의 앞날이 더욱 험난해 보입니다.
39절입니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가지고 나온 반죽으로 누룩 없는 납작한 빵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그 반죽을 발효시키지 못하였음이라. 그들이 이집트에서 쫓겨났으므로 지체할 수 없었으며 또한 자기들을 위해 아무 양식도 예비하지 못하였더라.](39). 급하게 나오느라 그들은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고 어깨에 메고 나온 반죽으로 누룩없는 빵을 구워 먹었습니다. 대규모의 인구가 걸어서 이동하는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영화 십계에 나오는 그런 장면일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해 내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 약속의 땅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아무 양식도 예비하지 못하였더라”는 말은 앞으로 이들에게 닥칠 첫 번째 시험이 무엇인지를 예고해 주는 복선이며, 암시입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평생 먹을 것을 준비를 해 둔 뒤에나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는 상태에서 믿음의 길을 출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들이 앞으로 광야의 여행을 하면서 먹을 양식과 물을 철저히 비축하도록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으셨습니다. 나올 때도 금, 은, 옷을 빌렸지만 양식을 빌리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주님 역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생명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눅12:22).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구하지 말며 마음에 의심하지도 말라.](눅12:29). 주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 염려하지 말라. ② 의심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 지체하지 않고 바로 믿음의 길을 출발하는 것이지 이집트에서 여행 준비를 다 한 후에 출발하지 않습니다.
특히 주님께서 부르셨을 때는 더욱 준비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세금을 거두다가도 일어나야 하고, 그물을 던지다가도 그만 두어야 하며, 그물을 깁다가도 버려 두어야 하며, 땅을 갈다가도 농기구를 불태우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생활의 염려로 준비를 다 갖춘 다음에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곧 바로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저는 여러분이 모두 생활의 염려로 헤매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 살다보니 교회도 어느덧 자본주의의 영향 아래 들어가 버린 듯 합니다. 돈이 있어야 선교도 하고, 돈이 있어야 교회 운영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돈이 없어서, 아니면 모자라서 말씀 사역에 고통을 겪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현상이지 결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해야 헌금도 하고, 주일에 교회도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지만 사실은 반대여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기도 모임을 하고, 성경 공부를 하는 것은 어떤 생업 적인 활동보다 우선하며, 더욱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믿음으로 순종할 때 적자가 날 것 같은 나의 생업을 다 채워 주십니다. 다만 그런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결단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사람들만이 ‘그럴 리가 없다’고 태연스레 일터로 나갑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면 나머지 모든 삶의 영역에서도 주님을 믿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염려하지 말라. 의심하지 말라. 출애굽의 밤은 죽음과 구원, 주의 심판과 오래 참으심, 양식을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순례의 길을 출발한 이스라엘 등 여러 가지 교훈을 줍니다. 이 교훈들을 마음에 깊이 묵상하고, 영의 양식으로 삼으시길 빕니다.
출애굽기(XXXV)
말씀: 출애굽기 12:29-39
요절: 출애굽기 12:29, 30
35. 출애굽의 밤
어느 민족이나 어느 개인에게나 특별한 날(낮)이나 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가장 특별한 밤은 오늘 본문의 출애굽의 밤이었습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이 가장 실감나는 장면이 바로 출애굽의 밤일 것입니다. 유구한 역사와 함께 한 이스라엘은 민족적 위기에서 탈출한 이런 밤이 많이 있었는데, 출애굽은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잊혀질 수 없는 그런 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파라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가게 하여 나를 섬기게 하라. 그가 가는 것을 네가 거부하면, 보라, 내가 네 아들 곧 너의 처음 난 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출4:23). 그러나 파라오는 그 말을 우습게 알았고,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 한치의 오차없이 그대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전에 모세가 이 말을 파라오의 면전에서 차마 하지 못하고 전하지 않았던 사실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후에 11:5에서 이 말씀을 파라오에게 전했는데, 하나님의 경고는 결코 늦추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예수를 믿으면 좋다는 이야기만 하다 잘 안될 때 최후의 순간에 지옥이나 심판에 대해서 전함으로 그 사람의 혼을 정말 지옥으로 보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한밤중에 [주]께서 이집트 땅의 처음 난 것 곧 왕좌에 앉은 파라오의 처음 난 자로부터 옥에 갇힌 자의 처음 난 자까지 다 치시고 또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과 온 이집트 사람들이 다 일어나고 이집트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으니 이는 그곳에서 사람이 죽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더라.](29-30). 하나님은 어린양의 피가 없는 모든 집을 다 치셨습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가축까지 처음 난 것은 다 죽었는데, 이는 하나님이 모두를 죽이신 것과 같았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파라오와 같이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전도자들은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그와 같이 멸망하리라.](눅13:3).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로되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막16:16).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전혀 근거없는 허황된 소리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는 마치 귀먹은 자들에게 외친 것처럼 아무 반응도 불러 일으키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헛되이 돌아 오지도 않으며, 떨어지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의 자녀를 죽여왔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처음 난 자들을 죽이셨습니다. 왕궁에서부터 지하 감옥까지 그 재앙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고, 하나님의 죽음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싶판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이가 없으며 왕자나 죄수나 동일한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집집마다 죽음이 있었습니다. 방에서는 사람이 죽고, 외양간에서는 소가 죽고, 산이나 들이나 이집트 땅의 처음 난 것들은 다 죽었습니다. 이는 마지막 날 주님의 재림의 때에 있을 심판의 전주곡입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이전에 있었던 일들은 이후에 있을 일들에 대한 모형입니다.
하나님은 파로오에게 거듭되는 경고와 여러 차례의 예비적 심판을 보내셨지만 그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무시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9:22에서 파라오에게 보여 주신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인내를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노를 보이시고 자신의 권능을 알게 하고자 하사 파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들에게 심히 오래 참으심으로 인내하시고](롬9:22).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향해 참으시는 까닭은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바울 사도는 회개하지 않는 세상에 대해서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혹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함을 알지 못한 채 네가 그분의 선하심과 관대하심과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2:4). 베드로는 주님의 오래 참으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디신 것이 아니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 ](벧후3:15a). 하나님의 성품이 오래 참으심이라면 우리 안에 맺혀야 할 성령의 열매 역시 오래 참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가 오래 참음이란 사실과 사랑은 오래 참는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다행히 저와 여러분은 이런 오래 참으심을 멸시하지 않고, 구원받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잠시는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참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부당한 일을 당할 때는 좀처럼 참지 못합니다. 성령의 열매가 우리 안에 맺히고, 우리 안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는 결코 오래 참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구원받은 이유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서 찾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런 까닭으로 긍휼을 얻었나니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내 안에서 심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앞으로 그분을 믿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될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1:16). 저와 여러분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성경은 오래 참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 살펴보고 다음 구절로 넘어가겠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구해야 할 최상의 은사는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의 특징 중 첫 번째가 바로 오래 참음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우쭐대지 아니하며](고전13:4). 오래 참는 것, 기다림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의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집나간 탕자를 향해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욥의 인내, 열매를 기다리는 농부....기다림과 오래 참음이 없다면 우리의 영적 생활은 결코 올바르게 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설명하면서, [순수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친절함과 성령님과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권능과 오른 손과 왼손에 든 의의 병기로 그리하며](고후6:6-7)라고 했습니다. 오래 참음이 없다면 구령이나 교회 사역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전에 어떤 젊은 목사님이 자신이 겪는 어려움과 고민에 대해 토로하며 조언을 구했습니다. 나이 지긋한 목사님이 다 듣고 나서 하신 한 마디는 “오래 참으시게”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젊은 설교자 디모데에게 설교 사역의 핵심이 “모든 오래 참음”에 있음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너는 말씀을 선포하라. 때에 맞든지 맞지 아니하든지 항상 예비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딤후4:2). 저는 이런 오래 참음이 없어서 여러번 실패를 반복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미국에서 목회 경력 만2년이 지났는데 벌써 십년을 한 것처럼 아득했습니다. 저는 지금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분의 영광스런 권능에 따라 모든 강력으로 강건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인내와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1:11). 부부 관계이든 목양 관계이든 부자지간이든 친구 관계이든 우리는 오래 참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새겨야 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행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안에서 서로 참아 주며](엡4:2). 이것이 교회와 가정에서 학교와 직장에서 필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 조급함이 사역을 망치고, 자식을 망치고, 친구를 망치고, 가정을 파괴합니다. 마가에 대해 참지 못하고 성질을 냈던 바울과 마가에 대해서 오래 참고 기다렸던 바나바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나바는 기다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결과 마가는 마가복음을 쓸 수 있고 바울은 말년에 로마의 감옥에서 마가를 일컬어 [... 마가를 데리고 함께 오라. 이는 그가 나의 사역에 유익하기 때문이라](딤후4:11)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마가를 ‘나의 아들 마가’(벧전5:13)라고 했는데 이는 바울과 달리 마가를 향한 바나바의 오래 참음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 교회 성도들에게 복을 주셔서 모두 상대를 향해 오래 참는 선한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골로새서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요,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로서 긍휼히 여기는 심정과 친절과 겸손한 마음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골3:12). 잠언 기자는 [오래 참으면 통치자도 설득할 수 있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잠25:15)고 했습니다.
출애굽의 밤을 생각하며 우리는 주의 심판의 엄위함, 죄에 대한 엄중한 진노, 죄인을 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는 동시에 파라오와 이스라엘을 향해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가?를 동시에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밤에 파라오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서 떠나 너희가 말한 대로 가서 [주]를 섬기고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떼도 소떼도 가져가고 내게도 축복하라, 하고](31-32). 파라오는 처음에는 가지 못하게 했다가 남자들만 가라, 소떼와 양떼는 두고 가라, 자식들은 남겨 두고 가라 하며 계속해서 타협책을 썼습니다. 그는 4번에 걸쳐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결국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한 타협책을 정리해 봅시다. 첫 번째 타협-출8:25 [파라오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리라, 하니], 이는 하나님을 섬기되 세상을 버리지 말라. 세상과 함께 하고 동화되고, 친구가 되고, 세상을 사랑하라. 결코 세상과 분리되지 말라는 마귀의 제안입니다. 두 번째 타협-출8:28 [파라오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가게 하리니 너희가 광야에서 주 너희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하매], 이는 정녕 떠나야 한다면 멀리는 떠나지 말라. 교회는 다니더라도 세상에서 이전에 하던 것들을 더럽게 여기지 말라. 광신자가 되지 말라. 그런 것입니다. 세 번째 타협-출10:10, [파라오가 그들에게 이르되, 주가 너희와 함께할지니 그리하면 내가 너희와 너희의 어린것들을 보내리라. 너희는 조심하라. 이는 너희 앞에 악이 있기 때문이니라. 그리할 수 없나니 이제 너희 남자들만 가서 주를 섬기라. 이는 너희의 구하는 바가 그것이기 때문이라, 하므로 그들이 파라오의 눈앞에서 쫓겨나니라], 너희들만 가라. 한 마디로 말하면 믿음의 전수를 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말아라. 네 번째 타협-출10:24 [파라오가 모세를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주를 섬기되 오직 너희의 양떼와 소떼는 두고 너희의 어린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하니] 이 말은 완전히 단절하지는 말라. 몸은 떠나도 마음은 여기에 있게 하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마지막 재앙을 통해 파라오의 이런 제안과 타협안이 얼마나 가증한 것인지 심판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자든 불신자이든 완전한 굴복과 순종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신자들은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기초한 인격적인 순복을 해야 하며, 불신자들은 심판과 벌을 통해 강제적인 순복을 해야 합니다.
33절을 보십시오.[이집트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었도다, 하며 백성을 재촉하여 그 땅에서 급히 내보내려 하므로](33). 하나님은 이집트인들의 장자만 치셨지만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이 다 죽은 자가 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백성들을 재촉해서 급히 내보내려 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하나님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의 상황을 시편 기자는 이렇게 씁니다. [그들이 떠날 때에 이집트가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들에 대한 두려움이 저들 위에 임하였음이라.](시105:38). 430년의 종살이가 종결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교회의 모형으로써 세상에 걸림돌이요, 그들에게 사망의 향기를 풍겼습니다. 이집트인들은 빨리 내 보내지 않으면 재앙이 자신들 모두에게도 임할 것이라고 생각했던지 이들을 급히 내 보내려했습니다. 한편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급하게 되었습니다.
34-36절을 보십시오. [백성이 반죽을 발효시키기도 전에 반죽과 반죽 그릇을 가져다가 옷에 묶어 어깨에 메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이집트 사람들에게서 금은 보석과 의복을 빌리매 [주]께서 이집트 사람들의 눈앞에서 백성에게 은총을 베푸사 이집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빌려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이집트 사람들을 노략하였더라.](34-36). 공포에 질린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용히 그냥 나가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이들이 나가면서 무엇이든지 요구하는 것은 다 주었는데, 금이나 은이나 옷 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집트 백성들을 약탈하거나 빼앗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빌리게 하셨습니다. 이 일 역시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무엇을 빌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담보물이나 계약서 없이, 언제 갚겠다는 기약도 없고, 한번 떠난 이스라엘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 올 일도 없습니다. 이집트인들 역시 이들을 다시 보고 싶지 않을 상대이고 보면 금과 은, 의복을 그냥 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지 않으셨다면 간밤에 자식 죽고, 가축 죽은 마당에 금, 은, 의복을 쉽게 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집트 사람들을 노략하였더라’는 말은 하나님이 승리하신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리품을 취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승리하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은 금, 은은 고사하고 돌에 맞아 죽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국가에 자연재해나 전염병 등의 대 재앙이 닥치면 그 나라에 있는 소수 민족들은 엄청난 박해와 죽임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올해는 일본의 관동대지진이 발생한지 80년째 되는 해인데 그 때 조선인들은 약 7,000명이 죽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역사적으로 매우 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장자 재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원망이나 불평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 사람들의 눈앞에서 은총을 베푸셨다는 말은 ‘두려움’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구하는 대로 빌려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 사람들의 종에서 이제는 무엇이든지 요구하였고, 노략했습니다.
37-38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떠나 숙곳에 이르니 아이들 외에 걷는 남자가 약 육십만 명이요, 섞인 무리와 양떼와 소떼와 심히 많은 가축도 그들과 함께하였더라.](37).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집트 땅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란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재물을 가지고 나올 것이란 말씀도 성취하셨습니다. 민수기에는 두 번의 인구 조사가 나오는데 남자만 약 육십만명이었고, 총 인구는 이백만이 넘었을 것입니다.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70명이 430년 만에 남자만 60만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출애굽 때에는 섞인 무리들이 함께 했습니다. 이들은 혼혈을 말합니다. 예를들어 이스라엘 남자와 이집트 여자가 살거나, 반대라 이집트 남자가 이스라엘 여자와 살며 자식을 낳았거나 한 그런 경우입니다. 400년 이상 이집트에서 살아온 이스라엘로서는 이런 사람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은 출애굽의 여정에서 적지 않는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 첫 예는 레위기 24:10-11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로서 그 아버지는 이집트 사람인 어떤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나가더니 이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과 한 이스라엘 사람이 진영에서 서로 싸우다가 이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주의 이름을 모독하여 저주하므로 그들이 그를 끌고 모세에게로 가니라. (그 어머니의 이름은 슬로밋이요, 단 지파에 속한 디브리의 딸이더라.)](레24:10-11). 국제 결혼, 인종간의 결합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차별이 있을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분리시켜 놓으신 것을 사람이 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밤과 낮을 나누시듯이 성별을 나누시고, 인종을 나누시고, 민족을 나누셨습니다. 또 한번의 예는 민수기 11:4입니다. [그들 가운데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에 빠지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소리내어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까?](민11:4). 이들은 자신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 전체를 탐욕에 빠지게 하여 소리내어 울게 했습니다. 신성 모독, 불신, 탐욕이 섞여 있는 이들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대 타민족과 결혼하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순수성을 유지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런 계명은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출애굽 과정에서 그들은 발람의 계략에 빠져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오히려 그 이교도들 가운데 섞여서 그들의 행위들을 배우며](시106:35). 후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이 일은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우상 숭배에 빠지고 민족들의 종으로 팔려 다녔습니다. 솔로몬조차도 스스로 이방 여인들을 취함으로 왕국을 망하게 했습니다. 결국 70년간 바빌론의 종살이를 한 후에 느헤미야의 주도로 이스라엘 땅에서 섞인 무리들은 비로소 제거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이 율법을 듣고 섞여 사는 모든 무리를 이스라엘에서 다 분리시켰느니라.](느13:3). 혼혈은 적그리스도의 정책입니다(창34:19 참조). 그리스도인들 역시 믿지 않는 자들과 결혼함으로써 섞인 무리가 되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들과 공평하지 못한 멍에를 메지 말라. 의와 불의가 어찌 사귀겠으며 빛과 어둠이 어찌 친교를 나누겠으며](고후6:14).
오늘날 교회는 이런 불의와 불법을 절대적으로 하면 안될 일로 가르치기보다는 가능하면 안하는 쪽으로 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설교하거나 결혼해서 믿게 하면 된다는 말 같지도 않는 소리를 하는 마귀의 종들이 강단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어떤 믿음 좋다는 교회 집사는 돈 없고 능력 없는 신자보다는 장래성 있고 돈 있는 불신자에게 딸을 시집보내겠노라고 당당하게 소신 발언을 했는데 책망받기 보다는 숨김없이 솔직한 사람이란 평을 받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모독하는 죄악입니다. 돈있고 능력있고 장래성 있는 불신자란 말은 신자의 입장에서는 전혀 성립되지 않는 말입니다. 돈 있다는 말은 돈을 사랑하는 배금주의를 지향하는 것인데 이는 모든 악의 뿌리를 택하겠다는 것이며, 능력있는 사람이란 능력이신 하나님, 말씀의 능력대신 눈에 보이는 능력을 추구한다는 말이며, 장래성 있다는 말은 인생은 잠깐 보이다 사라지는 수증기와 같고 바람과 같다는 진리에 무지한 말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보다 더 많은 보화를 가진 자가 누가 있고, 말씀을 믿는 성도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닌 자가 어디에 있을 수 있으며, 영적 생명을 지닌 그리스도인보다 더 밝고 보장된 장래를 지닌 사람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분리 대신 섞인 것을 택하겠다는 반역과 불신의 말이 공공연하게 인정받고, 용납되고, 솔직한 것이라면 이는 이미 불신과 배교의 깊은 늪에 빠져 있는 상태요, 마귀의 올무에 걸려 있다는 증거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에스라는 이 일을 가증한 일이라고 하며 하나님 앞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보십시오. 성도들은 모두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에스라 9:1-3, [이제 이 일이 끝난 뒤에 통치자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의 백성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분리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가증한 일들 곧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과 암몬 족속과 모압 족속과 이집트 사람들과 아모리 족속의 가증한 일들을 행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자기와 자기 아들들을 위하여 그들의 딸들을 취함으로 거룩한 씨가 그 스스로 그 땅의 백성과 섞이게 하였음이니이다. 참으로 이 범법에서 통치자들과 치리자들의 손이 으뜸이 되었나이다, 하므로 내가 이 일을 듣고 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스9:1-3). 결혼관이 무너지는 성도들에게서 바른 교회관을 찾을 수 없습니다. 바른 교회관이 없는 사람들로부터 어떤 선한 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출애굽의 밤에서 나온 이들은 모두 믿음이 충만하고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들을 가르치고, 먹이시고, 목양하십니다. 파라오 앞에 섰을 때보다 백성들 앞에 선 모세의 앞날이 더욱 험난해 보입니다.
39절입니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가지고 나온 반죽으로 누룩 없는 납작한 빵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그 반죽을 발효시키지 못하였음이라. 그들이 이집트에서 쫓겨났으므로 지체할 수 없었으며 또한 자기들을 위해 아무 양식도 예비하지 못하였더라.](39). 급하게 나오느라 그들은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고 어깨에 메고 나온 반죽으로 누룩없는 빵을 구워 먹었습니다. 대규모의 인구가 걸어서 이동하는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영화 십계에 나오는 그런 장면일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해 내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 약속의 땅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아무 양식도 예비하지 못하였더라”는 말은 앞으로 이들에게 닥칠 첫 번째 시험이 무엇인지를 예고해 주는 복선이며, 암시입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평생 먹을 것을 준비를 해 둔 뒤에나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는 상태에서 믿음의 길을 출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들이 앞으로 광야의 여행을 하면서 먹을 양식과 물을 철저히 비축하도록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으셨습니다. 나올 때도 금, 은, 옷을 빌렸지만 양식을 빌리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주님 역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생명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눅12:22).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구하지 말며 마음에 의심하지도 말라.](눅12:29). 주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 염려하지 말라. ② 의심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 지체하지 않고 바로 믿음의 길을 출발하는 것이지 이집트에서 여행 준비를 다 한 후에 출발하지 않습니다.
특히 주님께서 부르셨을 때는 더욱 준비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세금을 거두다가도 일어나야 하고, 그물을 던지다가도 그만 두어야 하며, 그물을 깁다가도 버려 두어야 하며, 땅을 갈다가도 농기구를 불태우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생활의 염려로 준비를 다 갖춘 다음에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곧 바로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저는 여러분이 모두 생활의 염려로 헤매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 살다보니 교회도 어느덧 자본주의의 영향 아래 들어가 버린 듯 합니다. 돈이 있어야 선교도 하고, 돈이 있어야 교회 운영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돈이 없어서, 아니면 모자라서 말씀 사역에 고통을 겪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현상이지 결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해야 헌금도 하고, 주일에 교회도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지만 사실은 반대여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기도 모임을 하고, 성경 공부를 하는 것은 어떤 생업 적인 활동보다 우선하며, 더욱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믿음으로 순종할 때 적자가 날 것 같은 나의 생업을 다 채워 주십니다. 다만 그런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결단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사람들만이 ‘그럴 리가 없다’고 태연스레 일터로 나갑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면 나머지 모든 삶의 영역에서도 주님을 믿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염려하지 말라. 의심하지 말라. 출애굽의 밤은 죽음과 구원, 주의 심판과 오래 참으심, 양식을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순례의 길을 출발한 이스라엘 등 여러 가지 교훈을 줍니다. 이 교훈들을 마음에 깊이 묵상하고, 영의 양식으로 삼으시길 빕니다.
'권별 강해 > 출애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속받은 성도에게 주어진 임무 (0) | 2005.04.07 |
---|---|
이 밤은 [주]의 밤이라 (0) | 2005.04.07 |
누룩이 있지 않게 하라 (1) | 2005.04.07 |
이것이 주의 유월절이니라 (1) | 2005.04.07 |
승리 선언 (0) | 2005.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