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2003년 5월 11일- 출애굽기        







출애굽기(XXXII)




말씀: 출애굽기 11:7-10

요절: 출애굽기 11:7-8




32. 승리 선언







성도는 누구나 예외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음을 선포하는 승리의 전사이며, 승리의 소식을 알려주는 전령들입니다. 전쟁에서 적을 이겼다는 소식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얼마 전 전 세계의 모든 뉴스는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동맹군과 이라크와 아랍권 사이에 일어나는 전쟁을 상세히 보도했습니다. 미국을 지원하는 쪽은 미·영 동맹군이 고전한다는 소식에 걱정했고 반대로 아랍권은 만세를 불렀습니다. 반대로 미국이 쉽게 전쟁을 끝내 버리자 미국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찬물을 끼얹은 듯이 기가 죽어 버렸고, 지원했던 쪽은 만세를 불렀습니다. 승리를 전하는 앵커들의 목소리는 그지없이 밝고 들떠 있었으며, 바그다드 광장에 높이 서 있던 후세인의 동상이 쓰러지는 장면은 몇날 몇일이나 반복적으로 방영했습니다. 승리의 소식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기쁩니다. 전쟁이든 스포츠이든 무엇이든 진 것보다는 이기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예감하면서, 아니면 확신하면서 전쟁에 나가는 군사들은 매우 복된 군대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대장이 패전을 모르는 사령관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은 구원의 창시자이시며, 구원의 대장이십니다. [자신을 위하여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며 또 자신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신 그분께서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서 그들의 구원의 대장을 고난들을 통하여 완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2:10). 그래서 주님은 복음을 증거해서 혼을 이겨오는 것을 soul-winnig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의로운 자의 열매는 생명 나무니 혼들을 얻는 자는 지혜로운 자니라.](잠11:30). 여기서 혼들을 얻는다는 말이 혼을 이겨온다는 뜻에서 win(이기다, 승리하다)이란 단어를 씁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집트에서 자기 백성을 구출하는 것이 영적 전쟁의 승리이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복음을 통해 잃어버린 혼들을 구원하는 일은 혼을 이겨오는 영적 전쟁에서의 승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라고 불립니다. [그러므로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고난을 견디어 내라. 전쟁을 치르는 자는 아무도 이 /세상/ 삶의 일에 얽매이지 아니하나니 이것은 자기를 군사로 택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2:3-4). 구약에서는 실제로 쇠로 만든 칼과 화살을 잡고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반면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 갑옷을 입고 성령의 칼을 들고 전쟁을 수행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사건들은 우리들의 영적 교훈과 배움을 위해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세의 승리 선언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는 40년 전에 파라오를 피해 광야로 도망을 갔던 패배한 군사였습니다. 하지만 오늘 모세는 파라오 앞에서 당당히 승리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40년이 지나 모세가 파라오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40년간 은밀히 힘을 길렀거나 군대를 양성했거나 파라오의 궁에 첩자를 심어 두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움과 손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우리가 이전에 패배하고, 등을 돌려야 했던 것에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으러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승리를 선언하셨습니다. [너희에게 이 일들을 말하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기운을 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우리는 세상을 이기신 주님의 군대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승리를 주장할 수 있고 쟁취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주신 승리를 감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7절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이로써 [주]가 이집트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을 두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7). 하나님은 마지막 10번째 장자 재앙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물론이고 거기에 속한 짐승이나 개 한 마리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이 민족 차별, 인종 차별, 성별에 대한 차별, 계급 차별, 종교 차별....뭐든지 차별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인본주의자들은 차별을 없애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모든 것에 차별을 두십니다. 오늘날 인종, 성별, 연령, 종교 등의 차별을 철저히 폐지하고 있습니다. 법에서 남녀 성별 차별을 금지하기 때문에 교단에서는 여자 목사, 여자 집사를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취하시지 않는 분이시지만 철저히 차별을 두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차별을 철폐하신 곳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시는 음성에는 인종, 성별, 종교, 계급, 민족, 언어의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니라면 주님은 모든 면에서 철저히 차별하시는 차별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면에서 정통 기독교와 성경은 인본주의자들에게 철저히 배척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을 철저히 구별하십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철저히 구별하십니다. 셈, 함, 야벳을 다르게 대하십니다. 주님은 주인과 종의 제도를 인정하셨습니다. 주님은 왕과 신하의 제도를 인정하십니다. 사람들은 모든 차별을 없애자고 주장하며, 통합을 외칩니다. 남녀 차별을 없애자! 성 차별을 금지하자!고 외치다 보니 이제는 동성연애가 합법화되고 있습니다. 인종 차별을 없애기 위해 국제 결혼을 장려하고, 종교간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 에큐메니칼 운동을 벌이고, 종교 다원주의를 수용합니다. 차별이 있다는 것은 차이와 특징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많은 청년 기독교인들이 의롭고 거룩한 분노를 일으키며 교회 안에서 남녀 차별을 없애고, 교회와 세상의 경계를 구분하여 열린 예배, 사회 참여 등을 외치는 무지를 자주 목격하고 있습니다.

7절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이로써 [주]가 이집트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을 두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과 통합하고 하나되게 하기 위함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별하시려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자기 자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히 구별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느니라.](히13:12). 구별을 두시기 위해서...이것은 세상의 시대 정신과 너무나 반대되는 것이지만 우리가 붙들고 고수해야 할 진리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구별되어야 합니다. 말하는 것, 옷입는 것, 생각하는 것, 돈 쓰는 것, 일하는 것 등 어디에서나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나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구별, 차별, 분리, 나눔 이것은 성경의 관점이며, 하나님의 가치관이란 점을 기억하고 우리 역시 동일한 가치관을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말들은 모두 부정적이고, 세상이 싫어하는 말이며, 반사회적인 말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가치관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히브리 백성과 이집트 백성들에게 공히 이 사실을 알려 주셨고,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잠시후면 주님이 오실 때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들이 어떻게 구별되는지 세상이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해 주실 때 우리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삶을 사는 것을 포기하고, 세상과 연합하고자 함으로써 저주를 받았습니다. 출애굽기에만 하나님은 구별이란 단어를 무려 21 구절이나 사용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많은 민족들 가운데 있는 이름조차 셀 수 없는 많은 신들 가운데 한 분 하나님을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 역시 많은 종교가 있고, 많은 철학이 있지만 유일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룩히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시중에 많은 성경이 있지만 오직 한 권의 성경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많은 교회가 있지만 참 교회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별하는 능력이야 말로 성결에 이르는 첫 계단이라 할 수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왕의 이 모든 신하가 내게 내려와서 내게 절하며 이르기를, 당신과 당신을 따르는 온 백성은 나가소서, 한 뒤에야 비로소 내가 나가리이다, 하고 심히 분노하여 파라오를 떠나 밖으로 나가니라.](8). 모세는 파라오 앞에서 당당히 승리를 선언했습니다. 파라오 앞에서 ‘왕의 이 모든 신하가 내게 내려와 내게 절을 할 것이다’라고 한 것은 이전의 모세 같았으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주님으로부터 10번째 재앙이 무엇인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 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구걸이 아니라 승리를 선언했고, 파라오를 향해 심히 분노하며 밖으로 나갔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왕을 향해 슬픈 기색을 하거나 안색이 나쁘기만 해도 목숨이 위험했습니다. 더욱이 왕에게 분노한다는 것은 목이 열 개라도 부족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계속되는 파라오의 완악함에 분노를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서 모세가 분노를 폭발한 첫 번째 장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모세의 분노로만 보아 넘겨서는 안됩니다. 모세 성질 한번 더럽네! 이런 식이 아닙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만 증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까지 증거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전도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연민과 동정의 음성과 표정으로, 때로는 불같은 분노로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전달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울면서 말씀을 전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우리 주님 역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연민을 보이셨는데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전달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눈물로 훈계를 하고 가르쳤는데 모두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도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는 결코 효과적인 구령의 열매를 거둘 수 없을 것입니다. 죄에 대해 전하면서 히죽 히죽 웃거나, 지옥에 대해서 전하면서 잔잔한 미소를 보이거나, 하늘 나라에 대해서 전하면서 짜증 썩인 목소리를 낸다면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전사 통지서를 전하는 사람이 웃으면서 전해 보십시오. 병원 의사가 환한 미소로, ‘댁의 병은 불치병입니다’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십자가의 전달자들은 마땅히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모세의 분노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파라오에게 보이신 분노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불신으로 마음이 완악한 자들을 향해 분노하십니다. 모세 역시 전에 하나님이 주신 사역을 계속 거부했을 때 주님은 분노를 발하셨습니다(출4:14).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우상 숭배를 했을 때 역시 모세를 통해 분노를 보이셨습니다. 출애굽기 32:19, [모세가 진영에 가까이 이르러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을 보고 크게 분노하여 자기 손에서 그 판들을 던져 산밑에서 깨뜨리니라.](출32:19).

하나님은 자신의 종들을 통해 자신의 말씀을 증거하시며, 자신의 마음을 보이시는 분이십니다. 죄악을 향해 분노하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침례인 요한 역시 그러했습니다(마3:7). - “...오 독사들의 세대여, 누가 너희에게 경고하여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사도 바울 역시 그러했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너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께서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율법에 따라 나를 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명령하느냐? 하니](행23:3). 우리 주님 역시 지상 사역 당시 여러 번 분노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완악할 때 분노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頑惡)하므로 그분께서 근심하사 분노하시며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앞으로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다른 손과 같이 온전하게 회복되니라.](막3:5). 제자들이 불신에 빠졌을 때(막9:19), 백성들이 성전을 더럽혔을 때(요2:16) 주님은 분노하셨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오 독사들의 세대여..., 뱀들아...“(마12:34,23:33)라며 독설(毒舌)을 퍼부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인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마치 감정없는 기계처럼, 얼음처럼 냉냉하게 복음을 전한다면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런 분노를 자신의 육신적 혈기에서 나오는 분노를 합리화하는데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저는 전에 성경을 열심히 읽고, 주를 위해 헌신한 형제들 가운데 자신의 못된 성질을 폭발하면서 이런 구절들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화를 낼 수는 있지만 범죄해서는 안되며, 오래도록 분을 품어서는 안됩니다. [화를 내도 범죄하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4:26). 어리석은 분노는 자신의 영혼과 듣는 이의 혼을 파괴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까닭없이 화를 내어서는 안됩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진노와 분노와 소리 지르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엡4:31). [이제는 너희도 이 모든 것을 내어 버리라. 곧 분노와 진노와 악의와 신성 모독과 너희 입에서 나오는 더러운 대화라.](골3:8).

성도들이 주님의 영으로 충만한 가운데 분노하는 것은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하지만 모세의 분노가 언제나 다 환영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던 분노에 대해서 주님께서 단호히 책임을 물으셨습니다. 민수기 20:10, [모세와 아론이 그 반석 앞으로 회중을 함께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반역자들아, 이제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야만 하랴? 하고 손을 들어 그 막대기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민20:10-11). 모세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집행했지만 그는 백성들을 향한 분노로 인해 말과 행동 모두 실수하고 말았습니다. 말에서는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라고 함으로써 주님의 영광을 가렸고, 주님께서 “반석에게 말하라”한 것을 “반석을 침으로써, 그것도 두 번이나 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그때에 [주]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서 나를 거룩히 구별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민20:12). 때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내는 어리석은 분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복들과 약속들을 잃어버리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잠언 기자가 말하기를, [분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 영을 다스리는 자는 도시를 취하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고 했습니다. 성질이 급한 사람들은 일단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 놓고 뒤늦게 후회하지만 쓸어 담기란 매우 힘듭니다. 신중한 사람은 자기의 분노를 한 박자 더디게 하고, 늦출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분노를 늦추는 것이 사람의 신중함이요, 범법을 간과하는 것이 그의 영광이니라.](잠19:11).

예) 전에 어떤 목사님은 교회에서 하도 말이 많이 들어오니까 감당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럴 때마다 설교에서 그걸 언급했는데, 교인들이 견디지를 못했습니다. 목사님은 바로 잡아 준다고 성경 구절들을 제시했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드러났습니다. 그러자 할 수 없이 분노가 치밀 때마다 이 일은 한 달 뒤쯤에 설교하자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한 달 정도 기다려 보니 어느 덧 그 문제는 유야무야 되고 없었습니다. 때론 바울이 잘못한 베드로를 즉석에서 책망을 하듯이 즉각적으로 해야 할 일도 있겠지만 형제들간의 대부분의 문제는 분노를 더디, 늦추는 것이 최상입니다. 부부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 다혈질의 부부가 있었는데 하두 자주 싸우다 보니 살림이 남아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로 약속을 했는데, 분노를 폭발할 때면 서로 물 한잔씩을 입에 물고 있기로 했습니다. 찬물이 입에서 더워지면 뱉어내었는데, 그렇게만 해도 싸움이 거의 없어지더라는 것입니다. 분노를 늦추는 것이 사람의 신중함입니다.

다시 8절을 보십시오. [왕의 이 모든 신하가 내게 내려와서 내게 절하며 이르기를, 당신과 당신을 따르는 온 백성은 나가소서, 한 뒤에야 비로소 내가 나가리이다, 하고 심히 분노하여 파라오를 떠나 밖으로 나가니라.](8). 모세는 파라오의 신하들로부터 절을 받을 것이며, 항복을 받을 것이라고 공언했습니다. 파라오 앞에서 파라오의 신하들이 모세에게 찾아와 절을 하며 ‘당신과 당신을 따르는 온 백성은 나가소서’란 말을 듣기 전에는 나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입니까? 일반적으로 해방이나 독립이란 자신의 나라를 점령한 국가의 군대를 몰아냄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출애굽은 파라오를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파라오를 몰아내고, 이집트를 정복하게 하셨다면 오늘날 교회는 이 세상을 개혁하고, 정복하는 혁명 정신으로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예표하는 이집트를 떠나게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 역시 이 세상을 버리고, 떠나야 할 것임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이 말은 앞으로 대환란을 거칠 유대인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대환란의 재앙을 겪으면서 온 세상은 모두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 땅으로 귀환하도록 허락할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아부를 하거나 가게 해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절을 받으며 ‘나가소서’란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싸움을 해야 하는 군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습니까? 주님이 승리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됩니다. 주님이 전사(戰士)시며, 주님의 대장이십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닌 영적인 전투입니다.

?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15:57). 그리스도는 만능의 열쇠이며, 해결책이며, 대답입니다. 나로서는 아무리 지혜를 짜고 방법을 고안해도 이길 수 없는 문제가 있다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기십시오. 이 말은 많은 성도들에게 뜬 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의미를 전혀 모르는 성도들은 이 말이 생소한 외국어처럼 들립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승리를 주시고, 영광을 받으시고, 화해하시고, 자신의 뜻을 이루시며, 승리를 주십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간단한 예로 사울이 무엇이든지 사무엘을 통해서 일했더라면 하나님의 진노를 사지 않았을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바빌론에서 사신이 왔을 때 이사야를 통해서 일을 처리했더라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말이나 일에든지 그리스도를 통한다면 하나님은 승리를 주십니다. 성도는 필히 이 원리를 배움으로써 마귀를 예표하는 파라오 앞에서 당당히 모세와 같이 승리를 선포할 수 있습니다.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 둘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이제 감사하노라.](고후2:14). 그리스도 안이란 우리의 홈 그라운드이며, 나의 영원한 안식처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간절히 승리를 갈구하면서 하나님께서 내 안에 어떤 일을 이루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마치 치과 의사에게 앓던 이를 뽑아 달라고 요청하듯이, 내 안에 있는 죄의 뿌리를 뽑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만약 하나나님께서 내 안에 죄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 주신다면 나는 다시 기도할 일도, 쓰러질 일도, 주님을 의뢰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어떤 일을 이루셔서 승리하게 하시지 않고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이 말이 생소한 말로 들리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영적 경험과 믿음이 얕은 형제들이 자주 오해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성경의 어휘들을 듣지만 전혀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상태에서 몇 년을 흘려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란 말은 바울 서신서에만도 150 회 이상 나오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가장 중요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영적인 일들을 이루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을 받도록 해 두셨습니다. 승리를 원한다면 내 안에 어떤 음성이 들리거나 빛이 임하거나 마음 가운데 기쁨이 가득 차는 체험을 구할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일들을 믿음으로 취하시기 바랍니다. 승리는 감정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그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라.](요일4:4).

? 우리는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우리에게 하나님에게서 난 믿음, 즉 말씀을 들음으로써 온 믿음만 있다면 승리를 쟁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믿는다면 언제나 그 말씀을 주장하고, 말씀의 칼로 무엇이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이미 본을 보여 주셨듯이, 우리는 언제나 말씀을 사용하는 법을 익혀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영원한 생명을 붙들라. 이것을 위하여 너 역시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들 앞에서 선한 고백을 하였도다.](딤전6:12). 믿음의 선한 고백이란 말씀을 증거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전달자요, 부활의 증인이 될 때 승리는 늘상 우리의 것이 됩니다. 환란 시대에 승리를 쟁취한 성도들의 간증을 보십시오. [그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거의 말로 그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계12:11). 마귀를 이긴 비결에 주목하십시오.

승리의 비결은 나에게 있지 않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우리 주님을 통해 주어지며, 우리 주님 안에서 이기게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입니다.

9-10절입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파라오가 너희 말을 듣지 아니할 것인즉 내가 이집트 땅에서 나의 이적들을 많게 하리라, 하시니라. 모세와 아론이 이 모든 이적을 파라오 앞에서 행하였으나 [주]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자기 땅에서 나가게 하지 아니하였더라.](9-10). 파라오는 모세가 당당히 자신 앞에서 승리를 선포하며, 나가는 모습에 마음이 더욱 완악해졌습니다. 갈 때까지 가보자! 누가 이기나 보자! 이런 오기가 극치를 이루었습니다. 이제 출애굽의 마지막 재앙이 오늘 밤 자정에 집행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반응하지 않는 것이 최대의 비극이요, 저주입니다. 파라오의 이런 모습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주님께서 늘 저희 마음에 은혜를 주셔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와 말씀에 합당하게 반응할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시간 내 안에 파라오와 같은 완악한 마음이 없는지 살펴보고 모세와 같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멸시하는 죄악과 죄인들에 대해 의로운 분노를 품을 수 있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모세와 같이 원수의 면전에서 승리를 선언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