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 04일- 출애굽기
출애굽기(XXXI)
말씀: 출애굽기 11:3-6
요절: 출애굽기 11:4
31. 내가 이집트 한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직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집트 사람들의 금, 은, 보석을 빌리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의 관계성을 보여 주는 일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지만 세상밖에 사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들이나 강탈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전혀 함께하지도 말라 함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반드시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하리라.](고전5:10).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빌린 돈으로 성막을 세우고, 각 지파별로 경제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으로부터 물질을 빌리고, 세상은 이스라엘로부터 영적인 것을 받습니다. 이런 관계는 이 세상이 끝나는 그날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이집트는 사실 히브리인 요셉과 요셉의 하나님으로 인해 7년 기근이란 대재앙을 무사히 넘겼습니다. 그들은 히브리인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400년 이상 그들을 종살이를 시켰습니다. 이집트는 이집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 히브리인들의 수고와 노력으로 엄청난 경제적 혜택을 누렸습니다. 이는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은 세상 속에 있는 교회로 인해 많은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철저히 분리되어야 하지만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주님은 영적인 것에 참여한 이방인들을 통해 물질로 섬김받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그 일로 인하여 그들이 기뻐하였거니와 또한 그들은 저들에게 빚진 자들이니 이는 만일 이방인들이 저들의 영적인 것에 참여하였거든 육신의 것으로 저들을 섬기는 것도 그들의 마땅한 본분이기 때문이라.](롬15:27).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요셉 이후로 이집트에 어떤 영적인 것도 뿌리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취해가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빌려 가라’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인 것을 뿌리면 이집트인들이 히브리인들에게 갚아야 합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영적인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둔다 해도 이것이 대단한 일이겠느냐?](고전9:11)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집트와 히브리인들의 관계는 영육간에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 육신적으로만 주종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0가지 재앙을 통해 이제 주종 관계는 해제되었고, 뒤바뀌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거나 강탈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가져가라고 하지 않고, 빌리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빌리게 하셨으므로 언젠가 하나님께서 돌려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거역할 때, 주님은 이들이 빌려 온 것을 돌려주실 것입니다.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이므로 주님께서 소유를 자신의 뜻대로 얼마든지 옮겨 주실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진 모든 재산은 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것도 강탈하거나 도둑질하거나 그냥 가져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다만 빌려 갈 뿐입니다. 교회가 들림받을 때 교회의 모든 재산은 세상에 남게 되고, 세상은 교회의 동산과 부동산을 모조로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빌린 것을 모두 갚고도 남게 될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집트 사람들의 눈앞에서 백성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이집트 땅에서 그 사람 모세를 파라오의 신하들의 눈앞과 그 백성의 눈앞에서 매우 위대한 자가 되게 하셨더라.](3). 일반적으로 극심한 재앙을 당하고,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입게되면 사람들의 마음은 극도록 악해지고, 민심은 흉흉하게 됩니다. 역사를 통해 볼 때 나라의 큰 자연 재해가 일어나도 그 나라의 소수 민족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죽입니다. 일본의 관동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일본인들은 재일 한인들의 소행이라고 덮어 씌워 죽였습니다. 유럽의 흑사병이나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이 났을 때, 유대인들은 많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지금 이집트 백성들은 히브리인들을 죽이거나 감금하거나 해야 할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 사람들의 눈앞에서 백성에게 은총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출3:21, 12:36).
이런 예는 요셉이 보디발에게 은총을 입게 하신 것이나 간수에게 은총을 입게 한 예에서도 잘 볼 수 있습니다(창39:21). 느헤미야가 왕 앞에서 은총을 입었고(느2:5), 에스더 역시 보는 사람들의 눈에 은총을 입.었습니다(에2:15).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의 완악한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오히려 은혜를 입게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히브리 백성들과 이집트 백성간의 내전이 불가피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출애굽하기도 전에 엄청난 피를 흘리는 전쟁을 치러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총을 얻는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잠언 3:3-4, [긍휼과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들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의 눈앞에서 은총과 큰 명철(明哲)을 얻으리라.](잠3:3-4).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답게 살 때, 성경적으로 바르게 행할 때, 하나님은 복을 주시고, 은총을 입게 해 주십니다.
사실 이집트인들의 눈에 히브리인들은 양떼를 치는 하층민이며, 가증한 사람들이었습니다(창46:34). 뿐만 아니라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은 그들은 철저히 심판하시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총을 입게 했다는 사실은 주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달리 설명하거나 이해할 방법이 없습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인정을 받고 은총을 얻는다면 주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해서 주어진 선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셉, 다니엘, 느헤미야, 에스더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방인들에게 은총을 입은 것은 타협의 산물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 중심적인 믿음을 확고히 했을 때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성도들에게 박해와 고난을 주십니다. 다만 특별한 필요를 위해서 은총을 입게 하시는데, 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동시에 인정을 받는 일은 현대 기도교인들이 미치도록 갈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로마서 14:18, [이러한 것들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며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느니라.](롬14:18). 여기서 이러한 것들이란 의와 화평과 희락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일 잘한다, 공부 잘한다, 돈 잘번다 이런 것으로 인정받아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철저히 성경적일 때 세상 사람들로부터 신실한 기독교인, 믿을만한 기독교인이란 소리를 들어야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선배 그리스도인 형제는 대구 경북대를 졸업해서 고려 증권에 입사했습니다. 주일이면 서울에 와서 예배를 드렸는데, 덕분에 회사의 어떤 모임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토요일 오후면 서울행 기차를 탔습니다. 당시에는 한국에 증권 열풍이 전국을 강타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신실했습니다. 덕분에 동료들에게는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고객이 그 친구에게 거액을 예탁했습니다. 이유는 정말 제대로된 그리스도인으로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직장 상사도 중요한 기밀 사항이나 어려운 일들은 모두 그 친구에게만 맡겼는데,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직장 상사에게 은총을 입었는데, ‘누구든지 교회를 다니려면 저 사람(김칠복)처럼 믿든지, 아니면 아예 교회 다닌다고 이야기도 하지 말라’고 선포했습니다. 직장 신우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개망신을 당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 때 당연히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며, 사람들에게도 그 신앙을 인정받습니다. 우리는 주의 눈 앞에서나 사람들의 눈 앞에서도 정직하게 행할 때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눈앞에서 뿐 아니라 사람들의 눈앞에서도 정직한 일들을 예비하려 함이라.](고후8:21).
주님이 행하신 또 한 가지 일은 모세를 위대한 지도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다시 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집트 사람들의 눈앞에서 백성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이집트 땅에서 그 사람 모세를 파라오의 신하들의 눈앞과 그 백성의 눈앞에서 매우 위대한 자가 되게 하셨더라.](3). 40년 전에 모세는 스스로 위대한 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로부터는 배척을 받고, 파라오로부터는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모세를 위대하게 보아주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지금 모세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만을 의지했을 때 주님은 그를 높여 주셨습니다. 이는 신약 성경에 [{주}의 눈앞에서 너희 자신을 낮추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한 손 밑에서 스스로 겸손하라. 정하신 때가 되면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는 말씀대로 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위대한 자라고 인정한 사람은 침례인 요한이었습니다. 요한은 주의 눈앞에서 자신을 철저히 낮추었던 사람입니다. [그분은 반드시 흥하여야 하겠으나 나는 반드시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3:30). 뿐만 아닙니다. [곧 내 뒤에 오시지만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라.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푸는 것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요1:27)하며 철저히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침례인 요한을 일컬어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가 낳은 사람들 가운데 침례자 요한보다 더 큰 자가 일어나지 아니하였도다....](마11:11a)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정신은 자신을 자랑하고,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의 영에서 나온 정신입니다. 각 시대별로, 각 나라의 독재자들을 보십시오. 언론을 통해서, 사상 교육을 통해서 끝없이 자기를 높이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을 높인 자들의 결말은 비참하게 나락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모세는 스스로 자신을 높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기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서 우상화 정책을 펼 필요도 없었습니다. 모든 권세와 권위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교회의 목회자 역시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낮추면 하나님이 높여 주십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파라오와 이집트 백성들 눈에 매우 위대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인생 역전!이라고 합니다. 파라오의 눈을 피해 달아났던 도망자 모세가 파라오 앞에 신(神)이 되었습니다. 노예 민족의 출신인 한 늙은 노인이 제국의 파라오와 그 신한들 앞에서 위대한 자가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을 믿을 때 보잘 것 없는 인생은 위대한 인생으로 변합니다. 한국의 연세대를 가면 연대가 자랑하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용재 백낙준 선생입니다. 이분은 목사요, 사학자요, 교육자요, 교육 행정가요, 정치인이며, 사상가로서 한국 기독교계가 낳은 불세출의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아버지는 천자문 정도만 아는 사람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무당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교회 선교사에게 맡겼습니다. 이 때 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지혜를 주셨는데 미국 미시간 주 파아크(Park) 대학 학부과정부터 프린스턴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고, 동양 3국의 語文과 英語로 된 서적은 읽을 수 있고, 불어, 희랍어, 히브리어까지 읽었고 동양 고전은 거의 다 외워버렸습니다. 그는 생애 2만권의 장서를 읽은 지식인이며 90세에도 이백, 두보, 도연명의 시는 다 외우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지식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그 삶이 철저한 신앙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어서 존경을 받습니다. 백 낙준 선생은 무당의 아들에서 위대한 민족의 스승으로 존경받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백범 김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출생은 너무나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는 관상이 좋지 않다는 관상쟁이의 말에 따라 관상보다는 심상을 좋게 하자! 마음먹고, 늘 마음 가운데 좋은 뜻을 품기를 노력했습니다. 백범이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예수 그리스도를 품었을 때 누구도 그의 인상이 좋지 않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백정의 아들이 아니라 민족의 스승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노예의 아들에서 파라오의 신이 되기까지 모세의 인생을 인도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에게 동일한 인생을 주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이대로 인생이 끝난다면 저 하늘에서 그 보상이 더욱 클 것입니다.
4-6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파라오에게/ 이르되,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정이 될 즈음에 내가 이집트 한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이집트 땅의 처음 난 것은 왕좌에 앉은 파라오의 처음 난 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처음 난 자까지 다 죽을 것이요, 짐승의 처음 난 것도 다 죽을 것이니라. 온 이집트 땅에 큰 부르짖음이 있으리니 그와 같은 것이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으리라.](4-6). 주님께서 이집트 한 가운데 자정이 될 즈음에 이집트 한 가운데 들어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께서 이집트를 방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것은 이집트 백성들에게는 죽음의 심판이, 히브리인들에게는 구원의 은혜가 임하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난 것, 처음 난자를 치신 것은 모두를 치셨다는 예표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신약 성도들 가운데 첫 열매가 부활함으로써 믿는 자들이 모두 부활한다는 믿음과 소망이 되는 것처럼, 이집트의 처음 난자의 죽음은 나머지 이집트 사람들 전부의 죽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왜 주님이 죄없는 아이들을 죽이는가? 의문을 갖기도 하는데, 이는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의 사내 아이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한 유아 살해의 죄를 묻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로마서 9:22에 나오는대로 자신의 진노를 보이시고 자신의 권능을 알게 하시고자 하심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노를 보이시고 자신의 권능을 알게 하고자 하사 파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들에게 심히 오래 참으심으로 인내하시고](롬9:22). 이집트의 첫 번째 난 것들은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다 죽였는데, 첫 번째 것은 나머지 남은 모든 것의 본보기인 것입니다. 이집트는 모두 다 죽은 것이나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 심판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동일한 경고를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 하나님은 히브리 백성들이 두려움에 속에서 지켜본 역병과 갖가지 재앙들을 이스라엘 위에 임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모스 4:10, [내가 이집트에서 행한 대로 너희 가운데 역병을 보내었고 칼로 너희의 젊은이들을 죽였으며 너희의 말들을 빼앗아 갔고 너희 진영의 고약한 냄새로 하여금 너희 코를 찌르게 하였느니라. 그런데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주]가 말하노라.](암4:10). 이스라엘은 그들이 본 재앙들이 자신들 안에서 일어날 때 자신들의 범법과 죄악을 깨닫고 주님께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집트에서 행한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갖게 하는 학습 효과가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성경을 통해 이런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많이 겪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밤 자정에 이집트에서 주님을 만나는 일은 누구나 다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아모스 대언자는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러므로, 오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이와 같이 행하리라. 오 이스라엘아,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할 것인즉 /너는/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할지니라.](암4:12). 주님은 어느날 우리를 방문하실 것입니다. 빛 가운데서 걷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무서운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주님이 언제 우리를 찾아 오시는가? 함께 성경을 찾아 봅시다. 주님께서 이집트를 찾아 오시는 것은 요셉이 죽을 때 예언한 대로입니다. 창세기 50:24,25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사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여기에서 내 뼈를 가지고 올라갈지니라, 하라, 하였더라.](창50:24-25). 요셉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15:14에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언약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자기 민족의 미래를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이집트로 부른 자기 형제들과 후손들 앞에서 이집트를 나갈 것이라고 예언하며 죽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박의 땅 이집트에서 품을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요, 믿음의 근거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히브리인들과 같이 이 세상에서 허무한 것에 굴복하며, 종노릇하며 고된 삶을 살아갑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 역시 썩어짐의 속박에서 벗어날 그 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찾아 오시리니’란 재림의 소망으로 살고 있습니다. 주의 재림은 믿는 자들에게는 해방의 날이요, 세상에는 재앙의 날입니다. 주님은 이미 2000년 전에 자기 백성들에게 한번 찾아 오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이 임하매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큰 대언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났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더라.](눅7:16). 그러나 자기 백성들은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잠시 후면 주님은 다시 자신의 백성들을 찾아오실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 우리를 찾아오십니까? 미리 약속하신 말씀대로 입니다. 창세기 21:1,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찾아오셨고 또 [주]께서 이르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니](창21:1). 주님이 사라를 찾아오셨을 때 사라는 이삭을 임신했습니다. 각 개인의 필요를 채워 주시기 위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기 위해, 우리 안에 선한 약속을 이루어 주시기 위해 주님은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그 때 주님은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사라를 찾아 오시고, 아브라함을 찾아오시듯이 우리 개개인을 찾아오십니다. 시편 8:4에 이르기를,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깊이 생각하시오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찾아오시나이까?]라고 노래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오늘 밤 자정에 이스라엘 한 가운데로 들어가리라 말씀하셨는데, 신자들 역시 한 밤 중에 주님을 맞습니다. 시편17:3에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셨나이다. 주께서 밤에 나를 찾아오시고 나를 살피셨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작정하고 내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에덴의 동산에 있는 범죄한 아담과 이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녁 서늘할 때 주님이 그들을 찾으셨을 때 그들은 무화과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후 범죄한 가인에게 주님이 찾아 오셨을 때 가인 역시 주님 앞에 시치미를 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영적으로 적용해서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오늘 품은 분들을 모두 내어버리고, 하루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자백하는 그런 경건의 시간을 가짐으로 주님을 만나기를 예비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한 밤에 나를 찾아 오셔서 내가 낮에 행한 모든 죄악들을 생각나게 하시고, 찔림을 주실 때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고 그냥 잠을 청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잠자리에 들기 전에 주님 앞에 깨끗하게 회개하고, 주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한 후에 하루를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은 우리를 돌보시기 위함입니다. 욥은 고백하기를, [생명과 은총을 내게 베푸시고 주의 돌보심(thy visitation)으로 내 영을 보존하셨나이다.](욥10:12)라고 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죄를 범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주님이 오셔서 물으실 때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욥기 31:14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일어나실 때에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그분께서 돌아보실 때에(visiteth) 내가 무어라 대답하겠느냐?](욥31:14). 우리의 영은 매일 매순간 내주하시는 성령의 방문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보시고, 우리는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의 재앙은 세상에는 심판이지만 성도들에게는 주님을 찾게 하기 위한 징계의 수단입니다. 이사야 26:16, [[주]여, 그들이 고난 중에 주를 찾았사오며(visited) 주의 징계가 자기들 위에 임할 때에 그들이 /주께/ 기도하였나이다.](사26:16). 우리는 이런 하루하루의 영적 여정을 통해 믿음의 성장을 이루고, 주님 앞에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성화되어 가야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영적 성장을 포기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나태한 신앙 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나태함과 게으름으로 인해 예배가 방해받고, 경건 생활이 위협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무릎을 꿇고 죄를 회개하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배와 기도 모임, 성경 공부 시간이 얼마나 찬밥 신세가 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모든 일들 가운데 삶의 가장 높은 우선 순위를 차지해야 마땅한데 모든 일들 가운데 맨 뒤로 밀려 버렸습니다.
어떤 신자가 목사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성경대로 믿는 교회가 200 마일 이내에 없는데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간단합니다. 이사하십시오.’ 저는 직장 업무상 예배를 드리기가 매우 어려운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간단합니다. 그만 두시고 다른 직업을 잡으십시오.
생각해 보십시오. 왜 하나님께서 이집트 한 가운데로 내려 오셨습니까? 예배하는 한 백성을 취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모든 생업보다도 한 분 주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말씀을 지키는 일을 더 소중히 여기고, 가치 있게 여기는 한 백성을 취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께서 왜 세상 가운데 교회를 두셨습니까? 하나님 한 분을 의지하고 그분의 이름을 믿고 경배하는 삶을 사는 무리들을 세상에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생존 경쟁을 벌이는 사람들 앞에 전혀 다른 가치관, 다른 생활 방식을 사는 무리를 통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 세상에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정을 영위하기 위해 직장을 갖습니다. 자신의 자아 실현을 위해서 공부합니다. 무엇인가를 위해서 돈을 법니다. 세상 사람들의 생활 공간은 학교, 직장을 양대 축으로 가정 생활을 영위합니다. 반면 성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를 기준으로 직장을 잡고, 학교를 선택하고, 가정을 잡습니다. 삶의 축이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우리는 더 나은 영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삽니다. 이 차이를 뒤범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치관이 전도된 많은 성도들이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돌이키고 회개하는 대신 신학적 변명으로 자신을 가려 버리고, 합리화하는데 비상한 재주를 발휘합니다. 교회의 예배 시간만이 예배가 아니고 삶 가운데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예배지! 이런 식입니다. 아니면 우리는 율법주의를 단호히 배격한다! 이런 식의 둘러대기를 합니다.
주님은 오늘 이 시간 우리를 방문하십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 계시고,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지금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 이 예배를 받으시고 계십니다. 이런 주의 임재 의식이 여러분의 마음가운데 없다면 여러분의 예배는 헛된 예배입니다. 우리 속담에 곡을 하면서 누가 죽었는지도 모르고 슬피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의 임재에 대한 의식이 없는 예배는 상가집에서 자신이 왜 우는지, 잔치 집에서 자신이 왜 밥먹는지 모르면서 신나게 떠들고 웃는 사람과 매 한 가지입니다. 남의 잔치집에서 분위기도 띄우고, 기분도 내고, 잔뜩 배불리 먹고 돌아와서 오늘 누가 생일이었지, 누구 회갑이었지....란 식으로 교회에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들으면서 ‘예배를 받으시는 예배의 주체자’를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예배 시간에 늦는 것은 예배를 받으시는 주님에 대한 결례이며, 모독입니다. 그렇다면 예배 시간에 조는 것은 잔치 집에서 우는 것이나 상가 집에 웃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행동입니다.
“주님이 오늘 밤 이집트 한 가운데로 들어가리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동일하게 [이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그들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니라](마18:20)하셨습니다. 지금 주님은 이곳 말씀 침례 교회 2층 집회실에 방문하고 계십니다. 이곳에 우리가 모두 해산 한 후에 주님이 무엇 때문에 빈 공간에 와 계시겠습니까? 주님은 이곳에 설교를 듣기 위해,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 각 처에서 어렵고 힘들지만 먼 길을 오신 여러분의 면면들을 다 보십니다. 성도들이 함께 드리는 예배에는 항상 주의 방문과 임재를 의식하며 감사하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출애굽기(XXXI)
말씀: 출애굽기 11:3-6
요절: 출애굽기 11:4
31. 내가 이집트 한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직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집트 사람들의 금, 은, 보석을 빌리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의 관계성을 보여 주는 일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지만 세상밖에 사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들이나 강탈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전혀 함께하지도 말라 함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반드시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하리라.](고전5:10).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빌린 돈으로 성막을 세우고, 각 지파별로 경제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으로부터 물질을 빌리고, 세상은 이스라엘로부터 영적인 것을 받습니다. 이런 관계는 이 세상이 끝나는 그날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이집트는 사실 히브리인 요셉과 요셉의 하나님으로 인해 7년 기근이란 대재앙을 무사히 넘겼습니다. 그들은 히브리인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400년 이상 그들을 종살이를 시켰습니다. 이집트는 이집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 히브리인들의 수고와 노력으로 엄청난 경제적 혜택을 누렸습니다. 이는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은 세상 속에 있는 교회로 인해 많은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철저히 분리되어야 하지만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주님은 영적인 것에 참여한 이방인들을 통해 물질로 섬김받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그 일로 인하여 그들이 기뻐하였거니와 또한 그들은 저들에게 빚진 자들이니 이는 만일 이방인들이 저들의 영적인 것에 참여하였거든 육신의 것으로 저들을 섬기는 것도 그들의 마땅한 본분이기 때문이라.](롬15:27).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요셉 이후로 이집트에 어떤 영적인 것도 뿌리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취해가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빌려 가라’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인 것을 뿌리면 이집트인들이 히브리인들에게 갚아야 합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영적인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둔다 해도 이것이 대단한 일이겠느냐?](고전9:11)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집트와 히브리인들의 관계는 영육간에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 육신적으로만 주종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0가지 재앙을 통해 이제 주종 관계는 해제되었고, 뒤바뀌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거나 강탈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가져가라고 하지 않고, 빌리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빌리게 하셨으므로 언젠가 하나님께서 돌려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거역할 때, 주님은 이들이 빌려 온 것을 돌려주실 것입니다.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이므로 주님께서 소유를 자신의 뜻대로 얼마든지 옮겨 주실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진 모든 재산은 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것도 강탈하거나 도둑질하거나 그냥 가져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다만 빌려 갈 뿐입니다. 교회가 들림받을 때 교회의 모든 재산은 세상에 남게 되고, 세상은 교회의 동산과 부동산을 모조로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빌린 것을 모두 갚고도 남게 될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집트 사람들의 눈앞에서 백성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이집트 땅에서 그 사람 모세를 파라오의 신하들의 눈앞과 그 백성의 눈앞에서 매우 위대한 자가 되게 하셨더라.](3). 일반적으로 극심한 재앙을 당하고,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입게되면 사람들의 마음은 극도록 악해지고, 민심은 흉흉하게 됩니다. 역사를 통해 볼 때 나라의 큰 자연 재해가 일어나도 그 나라의 소수 민족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죽입니다. 일본의 관동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일본인들은 재일 한인들의 소행이라고 덮어 씌워 죽였습니다. 유럽의 흑사병이나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이 났을 때, 유대인들은 많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지금 이집트 백성들은 히브리인들을 죽이거나 감금하거나 해야 할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 사람들의 눈앞에서 백성에게 은총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출3:21, 12:36).
이런 예는 요셉이 보디발에게 은총을 입게 하신 것이나 간수에게 은총을 입게 한 예에서도 잘 볼 수 있습니다(창39:21). 느헤미야가 왕 앞에서 은총을 입었고(느2:5), 에스더 역시 보는 사람들의 눈에 은총을 입.었습니다(에2:15).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의 완악한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오히려 은혜를 입게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히브리 백성들과 이집트 백성간의 내전이 불가피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출애굽하기도 전에 엄청난 피를 흘리는 전쟁을 치러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총을 얻는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잠언 3:3-4, [긍휼과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들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의 눈앞에서 은총과 큰 명철(明哲)을 얻으리라.](잠3:3-4).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답게 살 때, 성경적으로 바르게 행할 때, 하나님은 복을 주시고, 은총을 입게 해 주십니다.
사실 이집트인들의 눈에 히브리인들은 양떼를 치는 하층민이며, 가증한 사람들이었습니다(창46:34). 뿐만 아니라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은 그들은 철저히 심판하시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총을 입게 했다는 사실은 주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달리 설명하거나 이해할 방법이 없습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인정을 받고 은총을 얻는다면 주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해서 주어진 선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셉, 다니엘, 느헤미야, 에스더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방인들에게 은총을 입은 것은 타협의 산물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 중심적인 믿음을 확고히 했을 때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성도들에게 박해와 고난을 주십니다. 다만 특별한 필요를 위해서 은총을 입게 하시는데, 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동시에 인정을 받는 일은 현대 기도교인들이 미치도록 갈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로마서 14:18, [이러한 것들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며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느니라.](롬14:18). 여기서 이러한 것들이란 의와 화평과 희락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일 잘한다, 공부 잘한다, 돈 잘번다 이런 것으로 인정받아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철저히 성경적일 때 세상 사람들로부터 신실한 기독교인, 믿을만한 기독교인이란 소리를 들어야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선배 그리스도인 형제는 대구 경북대를 졸업해서 고려 증권에 입사했습니다. 주일이면 서울에 와서 예배를 드렸는데, 덕분에 회사의 어떤 모임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토요일 오후면 서울행 기차를 탔습니다. 당시에는 한국에 증권 열풍이 전국을 강타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신실했습니다. 덕분에 동료들에게는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고객이 그 친구에게 거액을 예탁했습니다. 이유는 정말 제대로된 그리스도인으로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직장 상사도 중요한 기밀 사항이나 어려운 일들은 모두 그 친구에게만 맡겼는데,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직장 상사에게 은총을 입었는데, ‘누구든지 교회를 다니려면 저 사람(김칠복)처럼 믿든지, 아니면 아예 교회 다닌다고 이야기도 하지 말라’고 선포했습니다. 직장 신우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개망신을 당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 때 당연히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며, 사람들에게도 그 신앙을 인정받습니다. 우리는 주의 눈 앞에서나 사람들의 눈 앞에서도 정직하게 행할 때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눈앞에서 뿐 아니라 사람들의 눈앞에서도 정직한 일들을 예비하려 함이라.](고후8:21).
주님이 행하신 또 한 가지 일은 모세를 위대한 지도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다시 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집트 사람들의 눈앞에서 백성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이집트 땅에서 그 사람 모세를 파라오의 신하들의 눈앞과 그 백성의 눈앞에서 매우 위대한 자가 되게 하셨더라.](3). 40년 전에 모세는 스스로 위대한 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로부터는 배척을 받고, 파라오로부터는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모세를 위대하게 보아주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지금 모세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만을 의지했을 때 주님은 그를 높여 주셨습니다. 이는 신약 성경에 [{주}의 눈앞에서 너희 자신을 낮추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한 손 밑에서 스스로 겸손하라. 정하신 때가 되면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는 말씀대로 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위대한 자라고 인정한 사람은 침례인 요한이었습니다. 요한은 주의 눈앞에서 자신을 철저히 낮추었던 사람입니다. [그분은 반드시 흥하여야 하겠으나 나는 반드시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3:30). 뿐만 아닙니다. [곧 내 뒤에 오시지만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라.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푸는 것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요1:27)하며 철저히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침례인 요한을 일컬어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가 낳은 사람들 가운데 침례자 요한보다 더 큰 자가 일어나지 아니하였도다....](마11:11a)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정신은 자신을 자랑하고,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의 영에서 나온 정신입니다. 각 시대별로, 각 나라의 독재자들을 보십시오. 언론을 통해서, 사상 교육을 통해서 끝없이 자기를 높이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을 높인 자들의 결말은 비참하게 나락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모세는 스스로 자신을 높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기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서 우상화 정책을 펼 필요도 없었습니다. 모든 권세와 권위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교회의 목회자 역시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낮추면 하나님이 높여 주십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파라오와 이집트 백성들 눈에 매우 위대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인생 역전!이라고 합니다. 파라오의 눈을 피해 달아났던 도망자 모세가 파라오 앞에 신(神)이 되었습니다. 노예 민족의 출신인 한 늙은 노인이 제국의 파라오와 그 신한들 앞에서 위대한 자가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을 믿을 때 보잘 것 없는 인생은 위대한 인생으로 변합니다. 한국의 연세대를 가면 연대가 자랑하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용재 백낙준 선생입니다. 이분은 목사요, 사학자요, 교육자요, 교육 행정가요, 정치인이며, 사상가로서 한국 기독교계가 낳은 불세출의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아버지는 천자문 정도만 아는 사람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무당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교회 선교사에게 맡겼습니다. 이 때 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지혜를 주셨는데 미국 미시간 주 파아크(Park) 대학 학부과정부터 프린스턴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고, 동양 3국의 語文과 英語로 된 서적은 읽을 수 있고, 불어, 희랍어, 히브리어까지 읽었고 동양 고전은 거의 다 외워버렸습니다. 그는 생애 2만권의 장서를 읽은 지식인이며 90세에도 이백, 두보, 도연명의 시는 다 외우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지식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그 삶이 철저한 신앙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어서 존경을 받습니다. 백 낙준 선생은 무당의 아들에서 위대한 민족의 스승으로 존경받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백범 김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출생은 너무나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는 관상이 좋지 않다는 관상쟁이의 말에 따라 관상보다는 심상을 좋게 하자! 마음먹고, 늘 마음 가운데 좋은 뜻을 품기를 노력했습니다. 백범이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예수 그리스도를 품었을 때 누구도 그의 인상이 좋지 않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백정의 아들이 아니라 민족의 스승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노예의 아들에서 파라오의 신이 되기까지 모세의 인생을 인도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에게 동일한 인생을 주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이대로 인생이 끝난다면 저 하늘에서 그 보상이 더욱 클 것입니다.
4-6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파라오에게/ 이르되,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정이 될 즈음에 내가 이집트 한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이집트 땅의 처음 난 것은 왕좌에 앉은 파라오의 처음 난 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처음 난 자까지 다 죽을 것이요, 짐승의 처음 난 것도 다 죽을 것이니라. 온 이집트 땅에 큰 부르짖음이 있으리니 그와 같은 것이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으리라.](4-6). 주님께서 이집트 한 가운데 자정이 될 즈음에 이집트 한 가운데 들어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께서 이집트를 방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것은 이집트 백성들에게는 죽음의 심판이, 히브리인들에게는 구원의 은혜가 임하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난 것, 처음 난자를 치신 것은 모두를 치셨다는 예표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신약 성도들 가운데 첫 열매가 부활함으로써 믿는 자들이 모두 부활한다는 믿음과 소망이 되는 것처럼, 이집트의 처음 난자의 죽음은 나머지 이집트 사람들 전부의 죽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왜 주님이 죄없는 아이들을 죽이는가? 의문을 갖기도 하는데, 이는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의 사내 아이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한 유아 살해의 죄를 묻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로마서 9:22에 나오는대로 자신의 진노를 보이시고 자신의 권능을 알게 하시고자 하심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노를 보이시고 자신의 권능을 알게 하고자 하사 파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들에게 심히 오래 참으심으로 인내하시고](롬9:22). 이집트의 첫 번째 난 것들은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다 죽였는데, 첫 번째 것은 나머지 남은 모든 것의 본보기인 것입니다. 이집트는 모두 다 죽은 것이나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 심판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동일한 경고를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 하나님은 히브리 백성들이 두려움에 속에서 지켜본 역병과 갖가지 재앙들을 이스라엘 위에 임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모스 4:10, [내가 이집트에서 행한 대로 너희 가운데 역병을 보내었고 칼로 너희의 젊은이들을 죽였으며 너희의 말들을 빼앗아 갔고 너희 진영의 고약한 냄새로 하여금 너희 코를 찌르게 하였느니라. 그런데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주]가 말하노라.](암4:10). 이스라엘은 그들이 본 재앙들이 자신들 안에서 일어날 때 자신들의 범법과 죄악을 깨닫고 주님께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집트에서 행한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갖게 하는 학습 효과가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성경을 통해 이런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많이 겪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밤 자정에 이집트에서 주님을 만나는 일은 누구나 다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아모스 대언자는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러므로, 오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이와 같이 행하리라. 오 이스라엘아,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할 것인즉 /너는/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할지니라.](암4:12). 주님은 어느날 우리를 방문하실 것입니다. 빛 가운데서 걷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무서운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주님이 언제 우리를 찾아 오시는가? 함께 성경을 찾아 봅시다. 주님께서 이집트를 찾아 오시는 것은 요셉이 죽을 때 예언한 대로입니다. 창세기 50:24,25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사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여기에서 내 뼈를 가지고 올라갈지니라, 하라, 하였더라.](창50:24-25). 요셉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15:14에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언약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자기 민족의 미래를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이집트로 부른 자기 형제들과 후손들 앞에서 이집트를 나갈 것이라고 예언하며 죽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박의 땅 이집트에서 품을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요, 믿음의 근거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히브리인들과 같이 이 세상에서 허무한 것에 굴복하며, 종노릇하며 고된 삶을 살아갑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 역시 썩어짐의 속박에서 벗어날 그 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찾아 오시리니’란 재림의 소망으로 살고 있습니다. 주의 재림은 믿는 자들에게는 해방의 날이요, 세상에는 재앙의 날입니다. 주님은 이미 2000년 전에 자기 백성들에게 한번 찾아 오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이 임하매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큰 대언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났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더라.](눅7:16). 그러나 자기 백성들은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잠시 후면 주님은 다시 자신의 백성들을 찾아오실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 우리를 찾아오십니까? 미리 약속하신 말씀대로 입니다. 창세기 21:1,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찾아오셨고 또 [주]께서 이르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니](창21:1). 주님이 사라를 찾아오셨을 때 사라는 이삭을 임신했습니다. 각 개인의 필요를 채워 주시기 위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기 위해, 우리 안에 선한 약속을 이루어 주시기 위해 주님은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그 때 주님은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사라를 찾아 오시고, 아브라함을 찾아오시듯이 우리 개개인을 찾아오십니다. 시편 8:4에 이르기를,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깊이 생각하시오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찾아오시나이까?]라고 노래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오늘 밤 자정에 이스라엘 한 가운데로 들어가리라 말씀하셨는데, 신자들 역시 한 밤 중에 주님을 맞습니다. 시편17:3에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셨나이다. 주께서 밤에 나를 찾아오시고 나를 살피셨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작정하고 내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에덴의 동산에 있는 범죄한 아담과 이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녁 서늘할 때 주님이 그들을 찾으셨을 때 그들은 무화과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후 범죄한 가인에게 주님이 찾아 오셨을 때 가인 역시 주님 앞에 시치미를 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영적으로 적용해서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오늘 품은 분들을 모두 내어버리고, 하루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자백하는 그런 경건의 시간을 가짐으로 주님을 만나기를 예비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한 밤에 나를 찾아 오셔서 내가 낮에 행한 모든 죄악들을 생각나게 하시고, 찔림을 주실 때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고 그냥 잠을 청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잠자리에 들기 전에 주님 앞에 깨끗하게 회개하고, 주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한 후에 하루를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은 우리를 돌보시기 위함입니다. 욥은 고백하기를, [생명과 은총을 내게 베푸시고 주의 돌보심(thy visitation)으로 내 영을 보존하셨나이다.](욥10:12)라고 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죄를 범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주님이 오셔서 물으실 때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욥기 31:14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일어나실 때에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그분께서 돌아보실 때에(visiteth) 내가 무어라 대답하겠느냐?](욥31:14). 우리의 영은 매일 매순간 내주하시는 성령의 방문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보시고, 우리는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의 재앙은 세상에는 심판이지만 성도들에게는 주님을 찾게 하기 위한 징계의 수단입니다. 이사야 26:16, [[주]여, 그들이 고난 중에 주를 찾았사오며(visited) 주의 징계가 자기들 위에 임할 때에 그들이 /주께/ 기도하였나이다.](사26:16). 우리는 이런 하루하루의 영적 여정을 통해 믿음의 성장을 이루고, 주님 앞에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성화되어 가야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영적 성장을 포기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나태한 신앙 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나태함과 게으름으로 인해 예배가 방해받고, 경건 생활이 위협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무릎을 꿇고 죄를 회개하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배와 기도 모임, 성경 공부 시간이 얼마나 찬밥 신세가 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모든 일들 가운데 삶의 가장 높은 우선 순위를 차지해야 마땅한데 모든 일들 가운데 맨 뒤로 밀려 버렸습니다.
어떤 신자가 목사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성경대로 믿는 교회가 200 마일 이내에 없는데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간단합니다. 이사하십시오.’ 저는 직장 업무상 예배를 드리기가 매우 어려운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간단합니다. 그만 두시고 다른 직업을 잡으십시오.
생각해 보십시오. 왜 하나님께서 이집트 한 가운데로 내려 오셨습니까? 예배하는 한 백성을 취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모든 생업보다도 한 분 주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말씀을 지키는 일을 더 소중히 여기고, 가치 있게 여기는 한 백성을 취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께서 왜 세상 가운데 교회를 두셨습니까? 하나님 한 분을 의지하고 그분의 이름을 믿고 경배하는 삶을 사는 무리들을 세상에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생존 경쟁을 벌이는 사람들 앞에 전혀 다른 가치관, 다른 생활 방식을 사는 무리를 통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 세상에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정을 영위하기 위해 직장을 갖습니다. 자신의 자아 실현을 위해서 공부합니다. 무엇인가를 위해서 돈을 법니다. 세상 사람들의 생활 공간은 학교, 직장을 양대 축으로 가정 생활을 영위합니다. 반면 성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를 기준으로 직장을 잡고, 학교를 선택하고, 가정을 잡습니다. 삶의 축이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우리는 더 나은 영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삽니다. 이 차이를 뒤범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치관이 전도된 많은 성도들이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돌이키고 회개하는 대신 신학적 변명으로 자신을 가려 버리고, 합리화하는데 비상한 재주를 발휘합니다. 교회의 예배 시간만이 예배가 아니고 삶 가운데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예배지! 이런 식입니다. 아니면 우리는 율법주의를 단호히 배격한다! 이런 식의 둘러대기를 합니다.
주님은 오늘 이 시간 우리를 방문하십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 계시고,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지금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 이 예배를 받으시고 계십니다. 이런 주의 임재 의식이 여러분의 마음가운데 없다면 여러분의 예배는 헛된 예배입니다. 우리 속담에 곡을 하면서 누가 죽었는지도 모르고 슬피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의 임재에 대한 의식이 없는 예배는 상가집에서 자신이 왜 우는지, 잔치 집에서 자신이 왜 밥먹는지 모르면서 신나게 떠들고 웃는 사람과 매 한 가지입니다. 남의 잔치집에서 분위기도 띄우고, 기분도 내고, 잔뜩 배불리 먹고 돌아와서 오늘 누가 생일이었지, 누구 회갑이었지....란 식으로 교회에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들으면서 ‘예배를 받으시는 예배의 주체자’를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예배 시간에 늦는 것은 예배를 받으시는 주님에 대한 결례이며, 모독입니다. 그렇다면 예배 시간에 조는 것은 잔치 집에서 우는 것이나 상가 집에 웃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행동입니다.
“주님이 오늘 밤 이집트 한 가운데로 들어가리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동일하게 [이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그들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니라](마18:20)하셨습니다. 지금 주님은 이곳 말씀 침례 교회 2층 집회실에 방문하고 계십니다. 이곳에 우리가 모두 해산 한 후에 주님이 무엇 때문에 빈 공간에 와 계시겠습니까? 주님은 이곳에 설교를 듣기 위해,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 각 처에서 어렵고 힘들지만 먼 길을 오신 여러분의 면면들을 다 보십니다. 성도들이 함께 드리는 예배에는 항상 주의 방문과 임재를 의식하며 감사하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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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 선언 (0) | 2005.04.07 |
금은 보석을 빌리게 하라 (0) | 2005.04.07 |
어둠이 있게 하라 (0) | 2005.04.07 |
그리할 수 없나니 (0) | 2005.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