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2003년 4월 20일- 출애굽기        




출애굽기(XXIX)




말씀: 출애굽기 10:21-29

요절: 출애굽기 10:21




29. 어둠이 있게 하라




듣는 이의 마음이 믿음으로 결합되지 못할 때 아무리 무서운 불이 떨어지고, 천하를 뒤흔드는 이적의 역사가 연속된다 해도 그 사람의 본질을 전혀 바꿀 수 없다는 생생한 예를 보여준 인물이 이집트의 파라오입니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을 향한 인격적인 순복과 두려움을 갖고 있지 않는 한 하늘이나 땅에서나 저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서도 사람은 변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거듭나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아니라면 사람은 천년 만년을 살고 별 희귀한 경험을 다한다 해도 여전히 육신의 죄악을 벗을 수 없습니다. 말씀의 씨앗이 내 안에 떨어지고, 성령의 감화와 영적인 거듭남, 새 생명의 탄생이 없이는 육신은 영원히 육신일 뿐입니다.

구약을 대표하는 대표적인 대언자인 모세와 레위 지파의 최초의 제사장인 아론을 통해 주님은 이 세상 누구도 볼 수 없는 하나님의 권능과 신성과 위엄을 파라오에게 행해 보이셨지만 그는 여전히 마음을 완악하게 했습니다. 메뚜기들이 온 이집트를 덮어서 우박이 남겨둔 모든 나무와 풀을 먹어 치울 때 파라오는 급히 모세를 불러 ‘내가 주 너희 하나님과 너희에게 범죄하였으니’라며 자신의 죄를 시인했습니다.

매 앞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처럼 거듭되는 무서운 심판의 징계 앞에 파라오는 회개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재앙이 그치자마자 파라오의 마음은 다시 원상 복구되어 버렸습니다. 이는 낮에 햇빝을 받은 해변의 모래나 사막의 모래가 불덩이처럼 차갑지만 밤이 되면 차가와 지는 것처럼 우박이 떨어지고, 메뚜기가 덮는 동안에는 뭔가 변화의 조짐을 보이다가 우박이 사라지고, 메뚜기가 물러나면 어느덧 본래의 죄악된 본성으로 돌아와 버립니다. 이런 파라오의 모습은 오늘날 죄인들의 표상이기도 하거니와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파라오가 어떻게 이렇게 계속 끈질기게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며, 주님을 향해 범죄 하는지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파라오의 이런 죄는 우리 주변에서, 나 자신에게서도 자주 발견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의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을 보면 마치 범죄와 회개의 반복입니다. 사시기에 나오는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범죄하고 울부짖고, 사사를 통해 구원을 받으면 다시 범죄하기를 반복하는 그런 역사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화) 전에 저와 함께 신앙 생활을 하던 형제는 알게 모르게 은밀히 죄를 즐기는 생활을 잘 했습니다. 선교 센터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아무도 모르게 춤을 추러 가기도 하고, 여자 애들과 놀러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는 늘 양심의 가책을 받았지만 죄의 유혹이 올 때면 은밀히 행하는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어머니가 큰 화상을 입으셨습니다. 그러자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그는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노라고 골방의 기도실에서 몇 시간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런자 어머니의 화상은 기적적으로 잘 치유되었습니다. 가정은 다시 평온해졌습니다. 그는 다시 죄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그는 또 울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일은 2년 동안이나 계속 반복되었는데, 그는 제게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윤 형제, 이상하게도 나는 죄를 지으면 주님이 나를 치시지 않고, 꼭 가족을 치신다네. 그러다 보니 회개하고 죄짓고, 회개하고 죄짓는 생활이 반복되는데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나는 구원받은 것은 의심치 않는데, 만약 누가 죽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라며 걱정했습니다. 그는 왜 죄를 단절하지 못하고 반복했습니까? 주님의 징계는 그를 사랑한다는 강력한 표시였지만 그는 회개한 후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기를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반복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이 주시는 싸인을 본 후에 무릎을 꿇었다가 평안이 찾아 오면 ‘아, 내가 지은 죄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군!’ 하며 마음의 평안을 얻고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 버리지 않습니까? 저는 목회자이지만 이런 경험이 자주 있습니다.

파라오는 자신이 당하는 손해, 이집트가 입는 막심한 경제적인 피해로 인해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군주였을지 몰라도 자신의 죄로 인해서는 단 한 줄의 눈물도 흘려 본 적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징계를 받을 때 자신이 입는 건강상의 손해, 경제적인 어려움, 가족이 겪는 여러 가지 손실들로 인해서 두려워하고, 눈물을 흘리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습니다. 그렇게 흘리는 눈물은 파라오가 하는 회개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 눈물, 그런 회개는 상황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순간 아침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는 그런 회개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오래참으시고, 긍휼을 풍성하게 베푸시지만 그 정도를 넘어섰을 때는 그 버림받은 마음대로 내 버려 두십니다. 지금까지 8가지 심판과 달리 아홉 번째의 심판은 누구의 생명을 빼앗거나, 재산상의 피해를 주는 등의 심판이 아니라 온 이집트에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흑암을 주셨습니다. 이는 ‘내가 세상을 버리노라’하는 주님의 선포입니다. 이제 이후로는 멸망의 심판 외에 달리 없습니다. 주님께서 관심하지 않으시고 흑암을 주실 때 그 다음에 있는 심판은 완전한 멸망입니다. 파라오는 이러다가 괜찮아지겠지, 모세와 아론을 이길 수 있겠지, 끝까지 갈 때까지 가보면 무슨 수가 생기겠지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번 정하신 일을 포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주님은 교만한 자의 목을 꺽어 놓으시기 전에 자신의 손을 결코 거두어 들이시지 않습니다. 세상은 이런 어둠이 임하기 전에 돌이켜야 합니다. [[주] 너희 하나님께서 어둠을 일으키시기 전에, 너희 발이 어두운 산들에 걸려 넘어지기 전에, 너희가 빛을 찾을 때에 그분께서 그 빛을 사망의 그늘로 변하게 하사 짙은 어둠으로 만드시기 전에 /너희는/ 그분께 영광을 돌릴지어다.](렘13:16). 여기서 주님은 계속해서 “...하기 전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어둠의 심판이 임한 이후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숨이 넘어간 후에, 지옥에 간 후에 멀리 눈을 들어 아브라함에게 소리쳤던 부자처럼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들을 때 “...한 후에”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돈을 좀 번 후에, 나이가 든 후에, 이 문제가 해결된 후에, 아이들이 큰 후에....자꾸 “후에”를 외치지만 주님은 “...전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스바냐 2:1-3을 보십시오. [오 원치 않는 민족아, 너희는 함께 모일지어다. 참으로 함께 모일지어다. 칙령이 나가기 전, 그 날이 겨같이 사라지기 전, [주]의 맹렬한 분노가 너희에게 이르기 전, [주]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지금까지 주의 공의를 행한 땅의 모든 온유한 자들아, 너희는 [주]를 찾으며 의를 구하고 온유를 구하라. 너희가 혹시 [주]의 분노의 날에 숨겨지리라.](습2:1-3). 주님은 무려 4번에 걸쳐 “...하기 전에” 돌이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불이 떨어지기 전에 롯은 탈출해야 했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닫히기 전에 그들은 회개하고 방주에 올라야 했습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 복음을 믿고,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파라오는 항상 일이 터진 후에 모세를 불렀고,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그는 실패했습니다. 그가 만약 일이 터지기 전에 그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면 모든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집트에 내린 아홉번째 재앙으로 깊은 어둠의 심판입니다. 이번에는 앞의 두 번의 경고를 주었으므로 경고없이 곧바로 집행되는 재앙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내밀어서 이집트 땅 위에 어둠이 있게 하되 /감촉으로/ 느낄 수 있는 어둠이 있게 하라, 하시니](21).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어둠을 창조하시는 분이시란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어둠은 자연스런 자연 현상이 아니라 주님의 창조 행위였습니다. 주님은 빛도 창조하셨고, 어둠도 창조하셨습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만들고 재앙도 창조하나니 나 [주]가 이 모든 일을 행하느니라.](사45:7). 주님은 이집트에 어둠의 심판을 통해 앞으로 있을 흑암의 심판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교회가 휴거되고 이 땅에 대환란의 날에 이런 어둠이 이 땅에 다시 임하게 될 것입니다. 아모스 5:18,20절에 주의 날에 있을 어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주]의 날을 사모하는 너희여! 그 날이 너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주]의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니](암5:18). [[주]의 날은 빛이 없는 어둠이 아니겠느냐? 너무 어두우므로 그 날에는 밝음이 없지 아니하겠느냐?](암5:20). 대환란 때 이 세상에 있게될 어둠에 대한 예표가 바로 아홉 번째 재앙이었습니다. 이전에 있었던 것이 앞으로 있게 될 진리를 예표하고, 현재 우리의 삶에 교훈을 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성경을 봅시다.

출애굽의 재앙들은 모두 마지막 날 대환란 때 있을 재앙들의 예표입니다. 이 흑암의 재앙 역시 계시록에 등장합니다. 계시록 16:10을 보십시오. [다섯째 천사가 자기 대접을 짐승의 자리 위에 쏟아 부으매 그의 왕국이 어둠으로 가득하고 사람들이 아픔으로 인하여 자기 혀를 깨물며](계16:10). 과학자들은 앞으로 태양이 약 50억년 정도 빛을 내다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대환란 때 주님의 심판을 통해 그런 과학적 이론이 얼마나 쓸모없는 가설인지 처절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어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셨는데, 이는 이집트의 파라오와 온 세상이 태양신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의 태양신은 “라”(Ra)라고 불렸는데, 파라오 할 때 "phra"가 바로 태양이란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둠을 통해 그들이 숭배하는 태양이 태양신 라의 작품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지으신 피조물인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이 내리신 재앙에는 이집트인들이 의지하고 숭배하던 우상들의 무력함을 차례대로 보여 주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모세에게 이집트 땅위에 어둠이 있게 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버리시듯 이집트를 버리셨다는 의미입니다. 빛 되신 주님께서 물러가심으로 온 세상은 어둠에 처하게 됩니다. 삼일 동안 어둠이 임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세시간 동안 어둠이 온 세상에 임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주님은 세상을 버리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시고 죄가 되셨기에(고후5:21),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하나님은 고개를 돌리셨습니다(합1:13). 이 때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란 절규를 쏟아내셨던 것입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자기 손을 내밀매 캄캄한 어둠이 사흘 동안 온 이집트 땅에 있으므로 사람들이 사흘 동안 서로를 보지 못하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아무도 없으되 온 이스라엘 자손이 거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22-23). 흑암의 재앙은 무서운 재앙이었습니다. 너무나 어두워서 서로를 보지 못했고,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재앙은 3일 동안 계속되어 이집트인들은 한번에 여섯 밤을 보내었습니다. 모든 이집트인들은 마치 깊은 지하 감옥에 있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면 어둠 속에서 한없이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는 점일 것입니다.

만약 지금의 세상에서 며칠간 전기가 두절되고, T.V나 전화가 불통되고 방안에만 몇일 갇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두려움 가운데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인가? 과연 심판은 다가 오는가? 등 별별 생각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어둠의 재앙은 이들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는 재앙이기도했습니다. 이들이 정말 깊이 깨닫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죄인들은 어둠 속에서 더욱 악을 행할 뿐입니다.

어둠은 영적인 속박입니다. 삼일 동안 지상에 임한 어둠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면 죄로 인해 형벌을 받는 영원한 지옥의 어둠과 고통은 얼마나 더 클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캄캄한 어둠을 보내셨을 때, 이집트 사람들은 서로를 보지 못했습니다. 어둠은 서로를 돌아보지 못하게 합니다. 어둠 가운데 거하는 사람들은 자신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보지 못하고, 이웃도 보지 못합니다. 어둠 속에 있으면 일어나지 못합니다. 이집트인들은 아무도 자신의 처소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잠언 기자가 말하기를, [사악한 자들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들은 심지어 어디에 걸려 넘어지는지도 알지 못하느니라.](잠4:19)고 했습니다.

삼일간의 어둠의 재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만약 누구라도 이스라엘이 거하는 고센 땅에 갔다면 그는 어둠 대신 빛 가운데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만약 이집트인들이라 해도 문설주와 문 인방에 양의 피가 묻어 있는 집 안에 있었다면 그는 안전했을 것입니다. 어디에 거하는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이 지리적으로 공간적으로 주님이 주신 약속의 땅 안에 거해야 하듯이, 신약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 한 그는 버림받을 수 밖에 없으며, 그는 어둠 가운데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늦기 전에 구원의 주,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오십시오. 그렇다면 구원을 얻을 것이며, 더 이상 어둠 가운데 거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둠의 재앙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에는 빛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철저히 구별하셨습니다. 어둠이 있는 파라오의 궁전과 빛이 있는 이스라엘의 오두막 가운데 우리는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겠습니까? 어둠 가운데서 권세를 잡은 파라오를 원하십니까? 노예 백성이지만 빛 가운데 거하는 히브리 백성이 좋습니까? 시편 기자는 이 심판을 가리켜 [그분께서 어둠을 보내사 그곳을 어둡게 하셨으니 그들이 그분의 말씀에 거역하지 아니하였도다.](시105:28)라고 노래했습니다. 이집트는 어둠을 밝힐 빛이 없었고, 이스라엘은 어둠이 임할 수 없는 빛이 있었습니다. 이런 분명한 대조는 많은 진리를 선사해 줍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이며, 빛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둠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빛입니다. [이는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기 때문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걸으라.](엡5:8). 어떻게 빛을 비출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빛에게 명령하사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셨기 때문이니라.](고후4:6).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주하던 고센 땅 역시 이집트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빛이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 가운데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곳에는 진리의 빛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생명의 빛이 있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에 빛을 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이것은 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다.](요12:46). 지금 영적인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주님 앞으로 나아오면 빛을 얻습니다. 주님은 선천성 맹인을 고쳐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시매](요8::12). 세상 사람들은 다 영적 맹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둠 속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물리적인 빛이 밤낮으로 세상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영적인 빛, 생명의 빛이 있다는 사실은 전혀 인식조차 못합니다. 주님은 공생애 사역 동안 행하신 모든 이적과 말씀을 통해 이런 영적인 원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육신적인 몸이 있다면 영적인 몸이 있습니다. 육신의 생명이 있고, 영적인 생명이 있습니다. 육신의 빵이 있고, 영적인 빵이 있습니다. 육신이 마셔야 할 물이 있고, 영적인 생수가 있습니다. 이 땅에 군대가 있듯이 영적인 군대가 있습니다. 말과 기병이 있듯이 보이지 않는 불 말과 기병이 있습니다. 물리적인 빛이 있듯이 영적인 빛이 있습니다. 물리적인 힘이 있듯이 영적인 힘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나타나 보이는 모든 현상의 이면에는 영적인 실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육체만 알고 영적인 것을 모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만 보고 정말 중요한 실체를 모릅니다. 무릇 성도란 영적인 실체를 통해 눈에 보이는 현상들을 이겨내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집트 땅에 물리적인 어둠을 삼일간 주심으로 그들의 영적 상태, 내면 상태 역시 그러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표적과 기사들은 신약의 영적인 진리들을 보여 주는 예표들이며, 신약의 모든 영적 원리들은 새하늘과 새 땅에서 문자적으로 이루어질 것들의 예표가 됩니다.

사람들은 물리적인 어둠을 밝히기 위해 전력을 생산하고 불을 밝힙니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를 켜지 않고 밤에 운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방안의 전구를 켜지 않고 책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영적인 어둠을 밝히기 위해 무엇을 합니까? 빛이 비추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요한 복음1:5, [이 빛이 어둠 속에 비치되 어둠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더라.](요1:5). 전도자를 보내 깨닫도록 가르쳐 주면 반감을 드러내며, 싫어합니다. 이유는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런 경우는 암실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짧은 순간 등을 제외하고 일상 생활에서는 매우 드문 상황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라고 합니다. 자연인들은 물리적인 어둠보다는 물리적인 빛을 더 사랑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빛보다는 영적인 어둠을 더 사랑합니다. 물리적인 햇빛이나 달빛, 별빛이나 조명등은 자신들의 내면을 밝혀 주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외적인 행동과 얼굴 모양, 표정, 옷 매무새 등은 밝혀 주지만 그 안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악함이 들어 있는지는 전혀 비추어 주지 못합니다. 반면 생명의 빛은 외모는 밝히지 않는데 어둠 속에 들어 있는 마음 속 깊은 것들까지 다 드러내 보여 줍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간음, 살인, 도둑질, 탐욕, 우상 숭배, 탐심과 같은 모든 악한 것들을 백일하게 드러내 줍니다. 그래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빛을 거부한 사람들에게 이제 잠시 후면 이집트에서 행한 것과 같은 흑암의 재앙이 온 세상에 닥칠 것입니다. 그들은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어둠을 맞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물리적인 흑암의 날이 오기 전에 영적인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들의 눈을 열어 주어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 함이요, 또 그들로 하여금 죄들의 용서를 받고 내 안에 있는 믿음으로 거룩히 구별된 사람들 가운데서 상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더이다.](행26:18). 우리는 육신의 눈을 고쳐 주는 안과의사보다 훨씬 더 영광스런 직분을 맡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눈병을 고쳐 줄 능력은 없지만 영적인 눈을 열어 주어서 하나님을 보게 하고, 영적인 것들을 보게 하는 빛을 줄 수 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파라오가 모세를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주]를 섬기되 오직 너희의 양떼와 소떼는 두고 너희의 어린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하니](24). 다급해진 파라오가 모세를 불러 다시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이미 지난 번에 세 차례에 걸쳐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결렬되었던 지라 이번에는 파라오가 대폭 양보해서 어린 것들을 데리고 가되 ‘너희의 양떼와 소 떼는 두고 가라’고 했습니다. 이집트는 그동안 계속된 재앙으로 인해 양떼와 소떼가 거의 다 죽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양떼와 소떼는 하나도 상하거나 죽지 않았습니다. 파라오는 정치인으로서 보낼 때는 보내더라도 재물은 빼앗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양떼와 소떼를 두고 가면 그들은 멀리 가지 못하고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소돔에 두고 온 물건이 생각나 뒤를 돌아본 롯의 아내를 생각해 보십시오.  파라오의 이런 타협책은 세상이 성도들에게, 교회에 제시하는 타협책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서 다음 시간에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25-6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이르되, 왕은 반드시 우리에게 희생물과 태울 헌물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 우리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리게 해야 할 터인즉 우리의 가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발굽 하나라도 뒤에 남겨 둘 수 없나이다. 이는 우리가 반드시 그 중에서 취해 [주] 우리 하나님을 섬겨야 하기 때문이니이다. /그런데/ 우리가 거기에 이르기 전에는 반드시 어떤 것으로 [주]를 섬겨야 할지 알지 못하나이다, 하더라.](25-26). 모세는 파라오에게 ‘반드시’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마귀의 타협은 언제나 죄로 드러날 뿐 아니라 자신과 온 민족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이 하나님과 흥정하는 일은 흔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타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자주 이상한 제안을 내놓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롱당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속는 것은 자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주님 더 이상은 저도 물러 설 수 없습니다. 이것이 마지노선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대로 그분의 뜻하시는 바대로 전적으로 순종해야 할 대상이지 협상의 테이블로 끌어 낼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욕망이 추구하는 선까지 은혜를 베푸시도록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모세는 가축은 물론이려니와 발굽 하나라도 뒤에 남겨 둘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주님이 보호하시고, 지켜 주신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자녀, 우리에게 있는 소유 모두가 다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사역에 헌신해야 합니다. 나의 것이 주님의 것이란 청지기적 자세로 인해 우리는 파라오의 입에 소떼와 양떼를 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파라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마다 그 재앙을 풀기 위해 얼마나 자주 모세를 찾았습니까? 하지만 한번도 모세의 말에 순종해 본 적이 없습니다. 파라오는 아직도 모세를 예전의 모세로, 자신의 수하로 생각할지 몰라도 모세는 이미 하나님의 종이요, 파라오의 종이 아니었습니다.

27-29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주]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니 그가 그들을 가게 하지 아니하고 모세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떠나고 스스로 조심하여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말라. 이는 네가 내 얼굴을 보는 날에 죽을 것임이라, 하매 모세가 이르되, 잘 말씀하셨나이다. 내가 다시는 왕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리이다, 하니라.](27-29). 파라오는 다시 마음이 완악해졌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것은 회개해야 할 때에 얕은 꾀를 부리고, 하나님을 우롱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속이려는 자들은 자신의 마음이 속임을 당하며, 그 마음은 더욱 굳어지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마음 속을 살피시고, 그 마음에 있는대로 응답해 주시는 보응의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18:25-27절에 이르기를,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는 주께서 주의 긍휼을 보이시고 곧바른 자에게는 주의 곧바르심을 보이시며 순수한 자에게는 주의 순수하심을 보이시고 거역하는 자3)에게는 주의 적대(敵對)하심을 보이시리니 주께서 고난받는 백성은 구원하시나 교만한 눈빛은 낮추시리이다.](시18:25-27). 파라오가 주를 거역했을 때, 주의 종 모세를 통해 주는 말씀에 대해 삐딱했을 때, 주님은 그에게 주의 적대하심을 보이셨습니다.

흔히 교회를 다니지만 파라오와 동질의 마음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주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사실에 분개하고, 이해못할 처사로 흥분하지만 누구라 할지라도 주님앞에 삐딱하게 굴 때 주님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며, 더욱 진노의 형벌을 받기에 합당한 상태로 만들어 버리십니다.

파라오는 모세를 위협했습니다. 다음 번에 볼 때는 죽여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이 때 모세가 무엇이라고합니까? [모세가 이르되, 잘 말씀하셨나이다. 내가 다시는 왕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리이다, 하니라.] 예전의 모세가 아닙니다. 파라오를 두려워하고, 그 앞에서 주눅이 들고, 겁을 먹었던 예전의 모세의 모습은 다 사라지고, 마귀를 대적하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성령의 검을 취한 장수의 모습입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들었지만 모세는 점점 하나님의 사람다운 면모를 갖추어 나갔고, 파라오는 더욱더 마귀적인 본성을 드러내기만 했습니다. 우리는 모세의 영적 성장을 보고 있습니다.

주님은 어둠 가운데 있는 이 땅을 향해 ‘빛이 있으라’ 명하심으로 창조를 시작하셨습니다. 이제 그 동일한 주님께서 모세에게 손을 들어 “어둠이 있게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세상을 버리시는 주님의 심판입니다. 지금 2000년 교회 시대에 주님은 창조 때와 동일하게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어 주심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고 계십니다(요1:9). 우리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는 자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진리의 빛, 생명의 빛을 증거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