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 13일- 출애굽기
출애굽기(XXVIII)
말씀: 출애굽기 10:1-20
요절: 출애굽기 10:11
28. 그리할 수 없나니
능력없이 말씀이 전파되는 곳은 어디서나 말씀의 본질적인 핵심을 상실합니다.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말씀에는 항상 긴박한 경고가 있고,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복과 은혜와 선물에 대해 말하지만 이는 믿고 순종하는 성도들의 경우로만 제한되는 것입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 믿지 않고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엄연한 심판의 소리요, 재앙의 높은 경고의 소리가 됩니다. 오늘날 강단에서 선포되는 복음에는 복음의 은사적인 요소로만 가득할 뿐 성령님께서 ‘의와 죄와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시고’, 그에 뒤따르는 엄중한 심판의 경고 소리가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단지 지적인 동의와 이해의 수준을 넘어서 생각의 변화, 마음의 변화, 의지와 변화를 동반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간과되고 있는 진리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변화의 능력이요, 실제적인 인식의 전환을 이루고, 가치관을 바꾸어 놓는다는 점입니다. 구원의 복음은 분명히 개개인의 생활 속에 실제적인 변화를 내포하게 됩니다. 말투가 바뀌고, 좋아하던 기호가 바뀌고, 생각이 바뀌고, 장래 희망이 바뀌고, 존경하던 인물이 바뀝니다. 죄에 대한 태도가 바뀌고, 술?담배?오락?잡지?소설?드라마?스포츠 등과 같은 나의 일상 생활의 한 부분을 이루던 것들에 대한 자세가 바뀝니다. 교회의 모임이나 성도들을 향한 자세가 달라지고, 기도와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생기고 영적 지식에 대한 욕구가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생명이 바뀌었기 때문에, 내 안에 새로운 주인이 들어왔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변화들인데, 이런 것들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전혀 없고, 인식의 전환조차 전혀 없이 오랫동안 교회를 다닐 때 설교는 종교적 이론이 되고,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게 됩니다. 이런 교인들은 교인일지 몰라도 참된 생명의 변화와 거듭남의 체험, 구원의 확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와 만남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들을 이해하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고, 성경 공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속하고 허황된 말장난을 즐기고, 농담을 즐기고, 세상과 육신과 죄의 정욕에 대한 갈망과 동정이 가득한 변호를 하는 자들을 볼 때 이들에게 선포된 말씀이 마음의 중심은 고사하고 한 구석에도 침투하지 못했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 생명의 씨앗을 뿌리시며, 그 말씀이 자라나서 자유함을 주시고,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주님은 복음의 능력, 말씀의 능력으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시며, 사람들을 실제로 자유롭게 만드십니다. 그런데 진리를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말로만 아는 것이지 능력의 체험으로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또한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를 드림은 너희가 우리에게서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들 안에서 효력 있게 일하느니라.](살전2:13). 말씀을 들을 때에 머리로 끄덕일 뿐만 아니라 마음 가운데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말씀의 능력을 매 순간 체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단지 이론이 아니라 삶의 변화와 열매를 수반하게 됩니다.
아무리 위대한 설교자가 이 앞에서 설교한다고 해서 여러분이 모두 성인 군자로 탈바꿈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 사도 바울이 서서 강론을 하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설교를 하신다 해도 듣는 이들이 마음 가운데 믿음으로 받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도, 변화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체험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히브리서 4:2, [우리뿐 아니라 그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되었으나 그 선포된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을 끼치지 못한 것은 그 말씀이 그것을 들은 자들 속에서 믿음과 결합되지 아니하였음이라.](히4:2). 현재 교회라고 이름하는 수많은 교회들, 성도들이라고 불리는 수많은 교인들이 매주 교회의 집회와 행사에 나가지만 그들은 여전히 개 같은 생활을 합니다. 가정에서는 여전히 남편에게 대드는 아내가 있고,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생활 방식이기 때문에 이런 생활 방식에 변화가 있을 것이란 기대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누구는 성질이 없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요, 주님의 뜻이란 것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통해 변화 받은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고 존경하고, 설교를 통해 변화를 받아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이런 모습이 복음에 대한 정상적인 성도의 반응입니다. 직장에서 돌아와 T.V를 보고, 잡담하고, 노는 것 외에 달리 시간을 쓰지 않던 사람이 성경을 보고, 기도를 하며 묵상과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이 정상적인 성도의 생활 방식입니다. 복음을 통해 이런 삶의 변화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이 금방, 쉽게 목격하고 놀랄만한 일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선한 행위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저희 아버지가 갑자기 성경을 읽기 시작하셨어요...저희 어머니가 갑자기 아버지한테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어요....이것이 간증입니다. 전에 어떤 노친이 교회에 왔습니다. 점심 시간에 잠깐 교제할 시간이 있어서 함께 이야기를 하다, “어떻게 이 교회를 알게 되셨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자신이 나이 들어 늦게 아이를 얻었는데 아들이 삐딱하게 크는 것 같아 늘 걱정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너무나 착실하고 순종적으로 변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했더니 이 교회를 나오고 나서부터 변했다는 것을 알고 자기도 금방 교회를 옮겼다고 했습니다. 아이는 건전한 교리를 공부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오류 없는 말씀으로 믿기 시작하면서 삶이 180도 변했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성경을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요, 내가 믿고 순종해야 할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기록된 한 마디 한 마디 말씀, 선포되는 매 설교가 다 권능 있는 말씀으로 다가오는 법입니다.
파라오는 구약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종 둘을 설교자로 계속 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들었고, 때마다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을 직접 체험했지만 그것이 그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안에는 어떤 선한 역사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란 걸출한 말씀의 전파자가 자신의 앞에서 말씀을 증거하고, 뒤따르는 증거를 통해 그 말을 확증해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았습니다.
10:1-2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파라오에게 들어가라. 이는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였음이니 이것은 그 앞에서 나의 이 표적들을 보여 주기 위함이며 또 너로 하여금 내가 이집트에서 행한 일들과 내가 그들 가운데서 행한 나의 표적들을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의 귀에 고하게 하려 함이라. 이로써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시니라.](1-2). 이제 주님은 여덟 번째 재앙을 준비하셨습니다. 이번 재앙의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산 교육을 시키시는데 있습니다. 이 표적들을 통해 모세는 히브리 백성들과 그 자손들, 후대에 걸쳐 이 일들을 전해 줌으로써, 이들이 주 하나님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 교훈을 주시고, 가르치십니다. 이집트에서 주님은 언약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죄에 대한 심판을 집행하시는 공의의 하나님, 구별하시는 하나님을 확실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속박과 압제 하에 있는 히브리인들을 구출하심으로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만천하에 알리셨습니다. 그러나 성경 기록과 교육이 없다면 이런 사실은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잊혀져 버리고, 먼 옛날의 전설이나 신화처럼 한낱 이야깃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이 행한 이 일은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것이지 단회적으로 한번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출애굽의 기사는 구약 성도들의 신앙과 삶, 역사를 결정할 것이며, 신약 성도들에게는 영적 교훈과 구원의 예표가 되며, 장차 대환란 때에 있을 일들에 대한 모형을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주님은 자녀 교육, 영적 유산에 대한 대물림에 대해서 매우 강조하셨습니다. 요엘 1:3,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들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말하며 그들의 자녀들은 다른 세대에게 말할 것이니라.](욜1:3).
신명기에서 모세는 반복적으로 이 사실을 되풀이했는데, 이는 출애굽에서 보여준 주님의 표적들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너는 스스로 조심하며 힘써 네 혼을 지키라. 두렵건대 네가 네 눈으로 본 일을 잊어버릴까 하노라. 두렵건대 네 평생 동안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날까 하노라. 오직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가르치라.](신4:9). 역사를 잊어버리면 미래가 없습니다.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일은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데도 큰 도움을 줍니다. [네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걸어갈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들을 말할 것이며](신6:7). 오늘날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신앙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란 생각을 가지고, 네 마음대로 해라는 식으로 방관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해야겠지만 자녀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의무입니다. 이것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이 일에 실패하여 말년에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예를 보셨을 것입니다. 아론은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대제사장이었지만 그의 아들 둘은 주께 이상한 불을 드리다가 불에 삼킴을 당했습니다. 사무엘은 위대한 주의 종이었지만 자녀 교육이 엉망이어서 백성들이 왕을 구하게 하는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길로 걷지 아니하니 모든 민족들과 같이 이제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재판하게 하소서, 하니라.](삼상8:5). 사무엘이 일생동안 들은 수치가운데 이보다 더한 모욕은 없을 것입니다. 다윗의 아들들 역시 솔로몬을 제외하고 모두 엉망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믿음은 뛰어났을지 몰라도 자녀 교육에 실패했습니다. [또 그것들을 너희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네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서 걸을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그것들에 관하여 말하고](신11:19). 아버지는 한 가정의 제사장입니다. 영적 권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또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의 말대로 ‘내가 클 때도 그랬는데 뭐, 상관없겠지!’ 직무유기요, 주님의 명령을 농담거리로 여기는 가증한 행위입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이 날 너희 가운데서 증거한 모든 말을 너희 마음에 두고 너희 자녀들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신32:46). 자녀를 가르쳐서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의 마음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자녀는 결코 나에게 순종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의 부모들은 대부분 자신이 해야 할 몫의 자녀 교육을 학교나 학원에 맡겨 버림으로써 죄를 짓습니다.
3-6절은 여덟 번 째 재앙이 선포되는 장면으로써 이집트 전역에 메뚜기들이 덮친 심판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되, 히브리 사람들의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서 네 자신을 낮추기를 거부하겠느냐? 내 백성을 가게 하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만일 네가 그리하지 아니하고 내 백성이 가는 것을 거부하면, 보라, 내가 내일 네 지경 안으로 메뚜기들을 가져오리니 그것들이 지면을 덮어서 사람이 땅을 볼 수 없을 것이니라. 메뚜기들이 네게 남아 있는 것 즉 우박을 피하고 남은 것을 먹으며 또 들에서 너를 위해 자라는 모든 나무를 먹을 것이며 또 네 집과 네 모든 신하의 집과 온 이집트 사람들의 집에 가득하리니 이것은 네 조상이나 네 조상의 조상이 땅에 있어 온 날로부터 이 날까지 보지 못하였던 것이리라, 하셨다, 하고 몸을 돌이켜 파라오를 떠나 밖으로 나가니라.](3-6). 주님은 파라오게 줄기차게 두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첫째, 내 앞에서 네 자신을 낮추어라. 둘째, 내 백성을 가게 하라. 하나님은 심판 전에 미리 말씀하시고, 하루의 말미를 주심으로써 항상 심판을 피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낮추면 주님이 용서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강제로 주저 앉혀 버리십니다.
주님은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자기를 낮추라고 말씀하십니다. 상대를 높여 주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어야 합니다. 아내들은 자기를 낮추어 남편 아래 있어야 합니다(엡5:22, 골3:18). 청년들은 자기를 낮추어 장로들 아래 있어야 합니다(벧전5:5). 성도들은 자신을 낮추어 사역자들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너희는 이러한 사람들과 또 우리와 함께 도우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너희 자신을 낮추어 복종하라.](고전16:16). 완악하고 목이 곧은 성도들은 순종과 복종이란 말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습니다. 침례교회는 만인대제사장 교리를 가지고 있는데, 무슨 순종과 복종이 있습니까? 우리는 다 형제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옳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낮추는 것을 거부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교권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너희를 다스리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너희 자신을 낮추어 복종하라. ..](히13:17a).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받는 방법 가운데 첫 번째 방법, 가장 좋은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한다면 저는 5초 내로 답해 줄 수 있습니다. 금식, 새벽 기도, 구제 헌금...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말 복을 받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성경에 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더 많은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 하시느니라.](약4:6). 이것이 바로 성경이 저와 여러분에게 더 많은 은혜를 얻도록 주님이 정해 놓으신 비결입니다. 은혜는 힘으로도 능력으로도 지혜로도 얻지 못합니다. 은혜를 얻는 길, 더 많이 얻는 길은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스스로 낮추어 남편에게 순종하고, 사역자들에게 순종하고, 서로 서로 복종하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길 때 은혜를 얻습니다. 그 때에 주님은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주}의 눈앞에서 너희 자신을 낮추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한 손 밑에서 스스로 겸손하라. 정하신 때가 되면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
스스로 낮추는 것은 마귀에 대한 영적 승리의 비결입니다. 성도들이 그토록 죄에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이기고 싶어하는 간절한 욕구가 있지만 정작 자신을 낮추는 일은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승리를 쟁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자기를 낮추는 데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서 도망하리라.](약4:7). 자기를 낮추지 않고 마귀를 대적한다면 그는 승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내 백성을 가게 하라.] 이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파라오에게 자기를 낮추어 복종할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어 순종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면 자기를 높여 불순종하는 것은 마귀의 영입니다. 마귀는 모든 교만한 자녀들을 다스리는 왕이기 때문입니다(욥41:34). 그러나 파라오는 주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함으로써 이집트 전역에는 우박 재앙에서 피해를 보지 않는 남은 것들을 모조리 먹어 치울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분께서 말씀하신즉 메뚜기와 쐐기벌레들이 오되 무수히 와서 그들의 땅에 있는 모든 채소를 먹고 그들의 토지에 있는 열매를 삼켰도다.](시105:34~35)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메뚜기들과 쐐기벌레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이집트의 모든 채소와 열매들을 삼켰습니다. 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이 주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순종하는데, 오직 죄인들만이 주의 말씀에 불순종합니다.
메뚜기는 주님의 큰 군대입니다. 이집트에서 보여준 메뚜기 떼의 재앙은 주의 날에 다시 한번 있을 것입니다. 요엘서 2:11을 보십시오. [[주]께서 자신의 군대 앞에서 친히 목소리를 내시리니 이는 그분의 진영이 심히 크며 자신의 말씀을 집행하시는 이가 강하시기 때문이라. [주]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려우니 누가 그 날을 견디어 내리요?](욜2:11). 여기서 말한 주님의 큰 군대는 다름 아닌 메뚜기들입니다. [내가 전에 너희 가운데로 보낸바 나의 큰 군대 곧 메뚜기와 자벌레와 쐐기벌레와 송충이가 먹은 햇수를 너희에게 되돌려 주리니](욜2:25). 이 메뚜기들의 정체는 요한 계시록 9장에 나옵니다. 대환란 때 메뚜기들의 출현을 보게 되는데 이들은 초자연적인 동물들입니다. [또 메뚜기들이 연기 속에서 나와 땅 위로 올라오매 그것들이 땅에 있는 전갈들의 권능과 같은 권능을 받았더라.](계9:3). [그 메뚜기들의 모양은 전투를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고 그것들의 머리에는 금과 같은 왕관이 있으며 그것들의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계9:7). 주님은 마귀를 자신의 종으로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계시록 9장에 나오는 메뚜기들은 땅속에서 올라오고, 그들의 왕은 적그리스도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파라오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에게 올무가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가게 하여 [주] 그들의 하나님을 섬기게 하소서. 왕께서는 이집트가 멸망한 줄을 아직도 알지 못하시나이까? 하고](7). 파라오의 신하들은 메뚜기 재앙이 닥치면 이집트는 완전히 멸망할 것이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파라오에게 협상하도록 설득했습니다. 신하들은 거듭되는 재앙에 질려 버렸습니다.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습니다. 파라오의 신하들의 이런 변화는 회심이나 회개는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 가운데 참된 변화가 있었거나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두려움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한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것은 외적, 물리적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말씀을 받아 들임으로써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당장 닥칠 위험에서 피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속히 이런 재앙이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 하나님을 믿고 싶거나,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모세와 아론을 파라오에게 다시 데려오니 파라오가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주] 너희 하나님을 섬기라. 그런데 갈 자는 누구냐? 하니](8). 파라오는 신하들의 간청에 따라 모세와 아론을 다시 데려와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파라오의 입에서 드디어 ‘가서 주 너희 하나님을 섬기라’는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갈 자는 누구냐?’라고 물었습니다. 파라오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습니다. 누가 갈 것인가? 아무리 힘든 곳이라도 400년을 넘게 살아온 곳을 떠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고레스 왕이 유대인들에게 귀환 명령을 내리자 본국으로 돌아간 사람은 극소수였습니다. “그런데 갈 자는 누구냐?”는 파라오의 말에는 “너희가 무슨 믿음이 그렇게 좋아서 광야로 다 갈 것인가? 가려는 사람만 가라.” 그런 얕잡아 보는 경멸과 조롱이 썩여 있었습니다.
전에 저는 군대에 있을 때 종교의 자유에 따라 누구든지 주일에는 교회나 성당, 불당에 갈 수 있도록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고참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라, 그런데 갈 자는 누구냐?’라고 하자 서로 눈치만 보는 병사들이 수두룩했습니다. 잠시 후에 소대장이 들어와서 ‘그런데 갈 자는 누구냐?’ 다시 한번 묻자, 고참이 ‘저희 소대에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끝이었습니다.
마귀는 결코 그냥 물러서지 않습니다. 죄인들은 망하더라도 뒷맛을 남겨 놓습니다. 회개를 하더라도 깨끗하게 다 하지 않습니다. 불신자들이 성도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뒷맛을 남겨 둠으로써 뒤통수를 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롱 당하지 않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이르되, 우리가 반드시 [주]를 위해 명절을 지킬 것이므로 우리가 가되 우리의 젊은이와 늙은이와 아들딸과 양떼와 소떼와 함께 가겠나이다, 하매](9). 모세는 남녀노소는 무론하고 제물에 쓸 양떼와 소 떼를 모두 데리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파라오의 말에 정확하게 대답했습니다. 파라오가 아무리 막아도 소용이 없는 일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 고백입니다. 모세는 파라오의 은근한 위협이나 계략에 전혀 밀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간다. 모두 다 간다”였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이런 환경이 안되면 그 환경을 떠나야 합니다. 가끔은 주일에도 나와서 일하라는 직장의 요구로 많은 교인들이 예배를 빠집니다. 회사의 요구가 없는데도 눈치가 보여서 알아서 빠지기도 합니다. 친목회나 야유회, M.T 때문에 빠지는 꼴같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파라오가 모세에게 물을 때 모세는 주저없이 준비된 대답을 했듯이, 우리는 언제 누가 어디서 물어도 동일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파라오가 그들에게 이르되, [주]가 너희와 함께할지니 그리하면 내가 너희와 너희의 어린것들을 보내리라. /너희는/ 조심하라. 이는 너희 앞에 악이 있기 때문이니라. 그리할 수 없나니 이제 너희 남자들만 가서 [주]를 섬기라. 이는 너희의 구하는 바가 그것이기 때문이라, 하므로 그들이 파라오의 눈앞에서 쫓겨나니라.](10-11). 파라오는 좋은 말을 해주는 듯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딴지를 걸고 있습니다. 너희와 너희 어린 것들을 보내리라고 해 놓고는 중간에 장황한 이유를 댄 다음 ‘그리할 수 없나니 이제 너희 남자들만 가서 주를 섬기라’고 합니다. 파라오 자신은 너희와 너희 어린 것들을 다 보내주고 싶지만 아이들이 광야에서 삼일간 어떻게 여행할 것이며, 위험이 많지 않겠느냐? 안전을 생각해라. 이런 것들입니다. 그는 모세를 위해 주는 척하고, 아이들을 위해 주는 척합니다. ‘너희는 조심하라. 이는 너희 앞에 악이 있기 때문이니라’ 이 말은 광야로 가서 희생제를 드리는 일에 위험이 많다는 말입니다. 파라오는 이런 안전과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착하고 선한 양심으로 인해 아이들은 보내 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할 수 없나니...]란 말은 아이를 보호하라. 아이들을 사랑하라는 U.N 아동 보호소의 구호같습니다. 아이들을 나일강에 던져 죽게 한 파라오가 어찌 아이들을 생각하여 주께 명절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파라오는 아이들을 부모와 단절시키려 합니다. 하나님은 부모들에게 아이들을 가르치라고 합니다. 파라오는 믿음이 전수되는 것을 막습니다. 파라오는 주를 섬기는 일을 모세와 기성 세대의 남자들로 한정함으로써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의 신앙을 지우고자 합니다. [그리할 수 없나니] 이는 불신자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를 믿어야지. 그렇게 되면 돈을 언제 벌어... “그리할 수 없나니”, 술을 못 마시면 사회 생활은 어떻게 해...“그리할 수 없나니”. [그리할 수 없나니] 이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이 헌신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젊은 자매들이 처녀 때에 ‘외모를 취하지 말고 같은 믿음의 형제와 결혼해야지’라고 결단합니다. 막상 결혼 할 때가 되면 “그리할 수 없나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수없이 선하고 의로운 결단을 쏟아내는 형제들이 막상 그것을 실천해야 할 때가 오면 ‘그리할 수 없나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아니라 파라오의 마음입니다.
12-15절은 말씀하신 대로 이집트 땅에 메뚜기들로 인한 심판이 집행되었습니다. 메뚜기들은 우박이 남겨놓은 땅의 모든 채소를 먹어 치웠습니다. 이 재앙이 얼마나 참혹하였는지 보십시오. [이는 메뚜기들이 온 지면을 덮으매 땅이 어둡게 되었음이라. 또 그것들이 우박이 남겨 놓은 밭의 채소와 나무 열매를 다 먹었으므로 이집트 온 땅에 있는 나무나 들의 채소 중에서 푸른 것은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15). 파라오 신하들의 우려는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조금만 현명했으면 피할 수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미련한 사람은 심판을 당하기 전에는 결코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떨지 않습니다.
오늘날 죄인들을 보십시오. 당신의 혼이 영원히 지옥에서 불타는 고통을 당한다고 아무리 경고해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옥에 막상 떨어지기 전까지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큰 소리를 칩니다. 지옥에서 간절히 외치던 어느 부자의 후회는 이미 늦은 것입니다(눅16).
16-17절을 보십시오. [이에 파라오가 모세와 아론을 급히 불러서 이르되, 내가 [주] 너희 하나님과 너희에게 범죄하였으니 그런즉 이제 원하건대 내 죄를 이번에 한 번만 /더/(x) 용서하고 [주] 너희 하나님께 간구하여 이 죽음만은 내게서 떠나게 하라, 하므로](16-17). 메뚜기들이 닥치자 파라오는 다급해졌습니다. 파라오는 어느 때보다 강도높게 죄를 시인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이전과 달리 ‘너희 하나님과 너희에게 범죄하였으니’라고 죄를 인정했습니다. ‘내 죄를...’하며 개인적이 죄까지도 시인했습니다. 거의 완벽해 보이는 회개입니다. 하지만 주의깊게 성경을 보는 독자라면 파라오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only-를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에 지은 나의 이 죄만(my sin only this one)](17) 용서해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죄란 전 생애에 걸쳐 하나님께 대한 불신과 반역에 대한 전인격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파라오는 이번에 행한 자신의 죄만 용서해 주기를 구함으로써 여전히 죄에 대한 회개를 하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메뚜기 재앙으로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 죽음만은 내게서 떠나게 하라’고 간구했던 것입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이 죽음이 아니라 둘째 사망입니다. 한 번 죽는 죽음에서 피하는 것으로 영혼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구사일생’이란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죽을 뻔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인데, 매우 흥미진진했습니다. 사고로부터 구출되고, 아슬아슬한 순간 그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그런 이야기들인데,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살아난 이야기들로, 모두 현재 실제 인물들의 실화를 재구성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험에서 살아났다고 영혼이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듣고 구원받는 것이야말로 정말 진정한 구사일생(九死一生)의 이야기입니다.
18-20절을 보십시오. [그가 파라오를 떠나 밖으로 나가서 [주]께 간구하매 [주]께서 강한 서풍을 불게 하사 메뚜기들을 가져다가 홍해에 몰아 넣으시니 이집트 온 지역에 메뚜기가 하나도 남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주]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가게 하지 아니하였더라.](18-20). 위기가 지나가자 파라오는 다시 마음이 완악해졌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참된 변화를 겪지 못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에게 회개한 죄가 다시 반복된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회개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말씀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와 나의 죄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을 갖고, 죄라는데 동의는 하지만 주님 앞에서 처리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대충 알아서 처리한 것일 때, 같은 문제가 계속 반복됩니다. 파라오에게 같은 문제가 계속 반복되는 이유와 동일한 이유입니다. 죄를 시인했지만 버리지 않았습니다. 용서를 구했지만 그것은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뿐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는 이유로 미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를 해결하시는 능력이 십자가의 피일진대 죄에게 종노릇하며, 죄 문제에서 자유를 얻지 못하고 승리하지 못한다면 그 얼마나 비참하고 한심한 노릇입니까?
출애굽기(XXVIII)
말씀: 출애굽기 10:1-20
요절: 출애굽기 10:11
28. 그리할 수 없나니
능력없이 말씀이 전파되는 곳은 어디서나 말씀의 본질적인 핵심을 상실합니다.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말씀에는 항상 긴박한 경고가 있고,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복과 은혜와 선물에 대해 말하지만 이는 믿고 순종하는 성도들의 경우로만 제한되는 것입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 믿지 않고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엄연한 심판의 소리요, 재앙의 높은 경고의 소리가 됩니다. 오늘날 강단에서 선포되는 복음에는 복음의 은사적인 요소로만 가득할 뿐 성령님께서 ‘의와 죄와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시고’, 그에 뒤따르는 엄중한 심판의 경고 소리가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단지 지적인 동의와 이해의 수준을 넘어서 생각의 변화, 마음의 변화, 의지와 변화를 동반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간과되고 있는 진리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변화의 능력이요, 실제적인 인식의 전환을 이루고, 가치관을 바꾸어 놓는다는 점입니다. 구원의 복음은 분명히 개개인의 생활 속에 실제적인 변화를 내포하게 됩니다. 말투가 바뀌고, 좋아하던 기호가 바뀌고, 생각이 바뀌고, 장래 희망이 바뀌고, 존경하던 인물이 바뀝니다. 죄에 대한 태도가 바뀌고, 술?담배?오락?잡지?소설?드라마?스포츠 등과 같은 나의 일상 생활의 한 부분을 이루던 것들에 대한 자세가 바뀝니다. 교회의 모임이나 성도들을 향한 자세가 달라지고, 기도와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생기고 영적 지식에 대한 욕구가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생명이 바뀌었기 때문에, 내 안에 새로운 주인이 들어왔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변화들인데, 이런 것들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전혀 없고, 인식의 전환조차 전혀 없이 오랫동안 교회를 다닐 때 설교는 종교적 이론이 되고,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게 됩니다. 이런 교인들은 교인일지 몰라도 참된 생명의 변화와 거듭남의 체험, 구원의 확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와 만남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들을 이해하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고, 성경 공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속하고 허황된 말장난을 즐기고, 농담을 즐기고, 세상과 육신과 죄의 정욕에 대한 갈망과 동정이 가득한 변호를 하는 자들을 볼 때 이들에게 선포된 말씀이 마음의 중심은 고사하고 한 구석에도 침투하지 못했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 생명의 씨앗을 뿌리시며, 그 말씀이 자라나서 자유함을 주시고,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주님은 복음의 능력, 말씀의 능력으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시며, 사람들을 실제로 자유롭게 만드십니다. 그런데 진리를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말로만 아는 것이지 능력의 체험으로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또한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를 드림은 너희가 우리에게서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들 안에서 효력 있게 일하느니라.](살전2:13). 말씀을 들을 때에 머리로 끄덕일 뿐만 아니라 마음 가운데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말씀의 능력을 매 순간 체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단지 이론이 아니라 삶의 변화와 열매를 수반하게 됩니다.
아무리 위대한 설교자가 이 앞에서 설교한다고 해서 여러분이 모두 성인 군자로 탈바꿈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 사도 바울이 서서 강론을 하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설교를 하신다 해도 듣는 이들이 마음 가운데 믿음으로 받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도, 변화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체험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히브리서 4:2, [우리뿐 아니라 그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되었으나 그 선포된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을 끼치지 못한 것은 그 말씀이 그것을 들은 자들 속에서 믿음과 결합되지 아니하였음이라.](히4:2). 현재 교회라고 이름하는 수많은 교회들, 성도들이라고 불리는 수많은 교인들이 매주 교회의 집회와 행사에 나가지만 그들은 여전히 개 같은 생활을 합니다. 가정에서는 여전히 남편에게 대드는 아내가 있고,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생활 방식이기 때문에 이런 생활 방식에 변화가 있을 것이란 기대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누구는 성질이 없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요, 주님의 뜻이란 것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통해 변화 받은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고 존경하고, 설교를 통해 변화를 받아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이런 모습이 복음에 대한 정상적인 성도의 반응입니다. 직장에서 돌아와 T.V를 보고, 잡담하고, 노는 것 외에 달리 시간을 쓰지 않던 사람이 성경을 보고, 기도를 하며 묵상과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이 정상적인 성도의 생활 방식입니다. 복음을 통해 이런 삶의 변화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이 금방, 쉽게 목격하고 놀랄만한 일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선한 행위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저희 아버지가 갑자기 성경을 읽기 시작하셨어요...저희 어머니가 갑자기 아버지한테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어요....이것이 간증입니다. 전에 어떤 노친이 교회에 왔습니다. 점심 시간에 잠깐 교제할 시간이 있어서 함께 이야기를 하다, “어떻게 이 교회를 알게 되셨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자신이 나이 들어 늦게 아이를 얻었는데 아들이 삐딱하게 크는 것 같아 늘 걱정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너무나 착실하고 순종적으로 변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했더니 이 교회를 나오고 나서부터 변했다는 것을 알고 자기도 금방 교회를 옮겼다고 했습니다. 아이는 건전한 교리를 공부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오류 없는 말씀으로 믿기 시작하면서 삶이 180도 변했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성경을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요, 내가 믿고 순종해야 할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기록된 한 마디 한 마디 말씀, 선포되는 매 설교가 다 권능 있는 말씀으로 다가오는 법입니다.
파라오는 구약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종 둘을 설교자로 계속 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들었고, 때마다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을 직접 체험했지만 그것이 그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안에는 어떤 선한 역사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란 걸출한 말씀의 전파자가 자신의 앞에서 말씀을 증거하고, 뒤따르는 증거를 통해 그 말을 확증해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았습니다.
10:1-2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파라오에게 들어가라. 이는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였음이니 이것은 그 앞에서 나의 이 표적들을 보여 주기 위함이며 또 너로 하여금 내가 이집트에서 행한 일들과 내가 그들 가운데서 행한 나의 표적들을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의 귀에 고하게 하려 함이라. 이로써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시니라.](1-2). 이제 주님은 여덟 번째 재앙을 준비하셨습니다. 이번 재앙의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산 교육을 시키시는데 있습니다. 이 표적들을 통해 모세는 히브리 백성들과 그 자손들, 후대에 걸쳐 이 일들을 전해 줌으로써, 이들이 주 하나님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 교훈을 주시고, 가르치십니다. 이집트에서 주님은 언약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죄에 대한 심판을 집행하시는 공의의 하나님, 구별하시는 하나님을 확실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속박과 압제 하에 있는 히브리인들을 구출하심으로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만천하에 알리셨습니다. 그러나 성경 기록과 교육이 없다면 이런 사실은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잊혀져 버리고, 먼 옛날의 전설이나 신화처럼 한낱 이야깃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이 행한 이 일은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것이지 단회적으로 한번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출애굽의 기사는 구약 성도들의 신앙과 삶, 역사를 결정할 것이며, 신약 성도들에게는 영적 교훈과 구원의 예표가 되며, 장차 대환란 때에 있을 일들에 대한 모형을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주님은 자녀 교육, 영적 유산에 대한 대물림에 대해서 매우 강조하셨습니다. 요엘 1:3,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들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말하며 그들의 자녀들은 다른 세대에게 말할 것이니라.](욜1:3).
신명기에서 모세는 반복적으로 이 사실을 되풀이했는데, 이는 출애굽에서 보여준 주님의 표적들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너는 스스로 조심하며 힘써 네 혼을 지키라. 두렵건대 네가 네 눈으로 본 일을 잊어버릴까 하노라. 두렵건대 네 평생 동안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날까 하노라. 오직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가르치라.](신4:9). 역사를 잊어버리면 미래가 없습니다.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일은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데도 큰 도움을 줍니다. [네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걸어갈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들을 말할 것이며](신6:7). 오늘날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신앙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란 생각을 가지고, 네 마음대로 해라는 식으로 방관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해야겠지만 자녀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의무입니다. 이것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이 일에 실패하여 말년에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예를 보셨을 것입니다. 아론은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대제사장이었지만 그의 아들 둘은 주께 이상한 불을 드리다가 불에 삼킴을 당했습니다. 사무엘은 위대한 주의 종이었지만 자녀 교육이 엉망이어서 백성들이 왕을 구하게 하는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길로 걷지 아니하니 모든 민족들과 같이 이제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재판하게 하소서, 하니라.](삼상8:5). 사무엘이 일생동안 들은 수치가운데 이보다 더한 모욕은 없을 것입니다. 다윗의 아들들 역시 솔로몬을 제외하고 모두 엉망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믿음은 뛰어났을지 몰라도 자녀 교육에 실패했습니다. [또 그것들을 너희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네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서 걸을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그것들에 관하여 말하고](신11:19). 아버지는 한 가정의 제사장입니다. 영적 권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또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의 말대로 ‘내가 클 때도 그랬는데 뭐, 상관없겠지!’ 직무유기요, 주님의 명령을 농담거리로 여기는 가증한 행위입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이 날 너희 가운데서 증거한 모든 말을 너희 마음에 두고 너희 자녀들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신32:46). 자녀를 가르쳐서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의 마음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자녀는 결코 나에게 순종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의 부모들은 대부분 자신이 해야 할 몫의 자녀 교육을 학교나 학원에 맡겨 버림으로써 죄를 짓습니다.
3-6절은 여덟 번 째 재앙이 선포되는 장면으로써 이집트 전역에 메뚜기들이 덮친 심판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되, 히브리 사람들의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서 네 자신을 낮추기를 거부하겠느냐? 내 백성을 가게 하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만일 네가 그리하지 아니하고 내 백성이 가는 것을 거부하면, 보라, 내가 내일 네 지경 안으로 메뚜기들을 가져오리니 그것들이 지면을 덮어서 사람이 땅을 볼 수 없을 것이니라. 메뚜기들이 네게 남아 있는 것 즉 우박을 피하고 남은 것을 먹으며 또 들에서 너를 위해 자라는 모든 나무를 먹을 것이며 또 네 집과 네 모든 신하의 집과 온 이집트 사람들의 집에 가득하리니 이것은 네 조상이나 네 조상의 조상이 땅에 있어 온 날로부터 이 날까지 보지 못하였던 것이리라, 하셨다, 하고 몸을 돌이켜 파라오를 떠나 밖으로 나가니라.](3-6). 주님은 파라오게 줄기차게 두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첫째, 내 앞에서 네 자신을 낮추어라. 둘째, 내 백성을 가게 하라. 하나님은 심판 전에 미리 말씀하시고, 하루의 말미를 주심으로써 항상 심판을 피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낮추면 주님이 용서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강제로 주저 앉혀 버리십니다.
주님은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자기를 낮추라고 말씀하십니다. 상대를 높여 주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어야 합니다. 아내들은 자기를 낮추어 남편 아래 있어야 합니다(엡5:22, 골3:18). 청년들은 자기를 낮추어 장로들 아래 있어야 합니다(벧전5:5). 성도들은 자신을 낮추어 사역자들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너희는 이러한 사람들과 또 우리와 함께 도우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너희 자신을 낮추어 복종하라.](고전16:16). 완악하고 목이 곧은 성도들은 순종과 복종이란 말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습니다. 침례교회는 만인대제사장 교리를 가지고 있는데, 무슨 순종과 복종이 있습니까? 우리는 다 형제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옳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낮추는 것을 거부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교권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너희를 다스리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너희 자신을 낮추어 복종하라. ..](히13:17a).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받는 방법 가운데 첫 번째 방법, 가장 좋은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한다면 저는 5초 내로 답해 줄 수 있습니다. 금식, 새벽 기도, 구제 헌금...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말 복을 받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성경에 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더 많은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 하시느니라.](약4:6). 이것이 바로 성경이 저와 여러분에게 더 많은 은혜를 얻도록 주님이 정해 놓으신 비결입니다. 은혜는 힘으로도 능력으로도 지혜로도 얻지 못합니다. 은혜를 얻는 길, 더 많이 얻는 길은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스스로 낮추어 남편에게 순종하고, 사역자들에게 순종하고, 서로 서로 복종하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길 때 은혜를 얻습니다. 그 때에 주님은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주}의 눈앞에서 너희 자신을 낮추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한 손 밑에서 스스로 겸손하라. 정하신 때가 되면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
스스로 낮추는 것은 마귀에 대한 영적 승리의 비결입니다. 성도들이 그토록 죄에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이기고 싶어하는 간절한 욕구가 있지만 정작 자신을 낮추는 일은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승리를 쟁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자기를 낮추는 데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서 도망하리라.](약4:7). 자기를 낮추지 않고 마귀를 대적한다면 그는 승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내 백성을 가게 하라.] 이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파라오에게 자기를 낮추어 복종할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어 순종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면 자기를 높여 불순종하는 것은 마귀의 영입니다. 마귀는 모든 교만한 자녀들을 다스리는 왕이기 때문입니다(욥41:34). 그러나 파라오는 주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함으로써 이집트 전역에는 우박 재앙에서 피해를 보지 않는 남은 것들을 모조리 먹어 치울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분께서 말씀하신즉 메뚜기와 쐐기벌레들이 오되 무수히 와서 그들의 땅에 있는 모든 채소를 먹고 그들의 토지에 있는 열매를 삼켰도다.](시105:34~35)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메뚜기들과 쐐기벌레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이집트의 모든 채소와 열매들을 삼켰습니다. 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이 주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순종하는데, 오직 죄인들만이 주의 말씀에 불순종합니다.
메뚜기는 주님의 큰 군대입니다. 이집트에서 보여준 메뚜기 떼의 재앙은 주의 날에 다시 한번 있을 것입니다. 요엘서 2:11을 보십시오. [[주]께서 자신의 군대 앞에서 친히 목소리를 내시리니 이는 그분의 진영이 심히 크며 자신의 말씀을 집행하시는 이가 강하시기 때문이라. [주]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려우니 누가 그 날을 견디어 내리요?](욜2:11). 여기서 말한 주님의 큰 군대는 다름 아닌 메뚜기들입니다. [내가 전에 너희 가운데로 보낸바 나의 큰 군대 곧 메뚜기와 자벌레와 쐐기벌레와 송충이가 먹은 햇수를 너희에게 되돌려 주리니](욜2:25). 이 메뚜기들의 정체는 요한 계시록 9장에 나옵니다. 대환란 때 메뚜기들의 출현을 보게 되는데 이들은 초자연적인 동물들입니다. [또 메뚜기들이 연기 속에서 나와 땅 위로 올라오매 그것들이 땅에 있는 전갈들의 권능과 같은 권능을 받았더라.](계9:3). [그 메뚜기들의 모양은 전투를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고 그것들의 머리에는 금과 같은 왕관이 있으며 그것들의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계9:7). 주님은 마귀를 자신의 종으로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계시록 9장에 나오는 메뚜기들은 땅속에서 올라오고, 그들의 왕은 적그리스도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파라오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에게 올무가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가게 하여 [주] 그들의 하나님을 섬기게 하소서. 왕께서는 이집트가 멸망한 줄을 아직도 알지 못하시나이까? 하고](7). 파라오의 신하들은 메뚜기 재앙이 닥치면 이집트는 완전히 멸망할 것이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파라오에게 협상하도록 설득했습니다. 신하들은 거듭되는 재앙에 질려 버렸습니다.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습니다. 파라오의 신하들의 이런 변화는 회심이나 회개는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 가운데 참된 변화가 있었거나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두려움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한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것은 외적, 물리적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말씀을 받아 들임으로써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당장 닥칠 위험에서 피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속히 이런 재앙이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 하나님을 믿고 싶거나,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모세와 아론을 파라오에게 다시 데려오니 파라오가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주] 너희 하나님을 섬기라. 그런데 갈 자는 누구냐? 하니](8). 파라오는 신하들의 간청에 따라 모세와 아론을 다시 데려와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파라오의 입에서 드디어 ‘가서 주 너희 하나님을 섬기라’는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갈 자는 누구냐?’라고 물었습니다. 파라오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습니다. 누가 갈 것인가? 아무리 힘든 곳이라도 400년을 넘게 살아온 곳을 떠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고레스 왕이 유대인들에게 귀환 명령을 내리자 본국으로 돌아간 사람은 극소수였습니다. “그런데 갈 자는 누구냐?”는 파라오의 말에는 “너희가 무슨 믿음이 그렇게 좋아서 광야로 다 갈 것인가? 가려는 사람만 가라.” 그런 얕잡아 보는 경멸과 조롱이 썩여 있었습니다.
전에 저는 군대에 있을 때 종교의 자유에 따라 누구든지 주일에는 교회나 성당, 불당에 갈 수 있도록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고참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라, 그런데 갈 자는 누구냐?’라고 하자 서로 눈치만 보는 병사들이 수두룩했습니다. 잠시 후에 소대장이 들어와서 ‘그런데 갈 자는 누구냐?’ 다시 한번 묻자, 고참이 ‘저희 소대에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끝이었습니다.
마귀는 결코 그냥 물러서지 않습니다. 죄인들은 망하더라도 뒷맛을 남겨 놓습니다. 회개를 하더라도 깨끗하게 다 하지 않습니다. 불신자들이 성도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뒷맛을 남겨 둠으로써 뒤통수를 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롱 당하지 않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이르되, 우리가 반드시 [주]를 위해 명절을 지킬 것이므로 우리가 가되 우리의 젊은이와 늙은이와 아들딸과 양떼와 소떼와 함께 가겠나이다, 하매](9). 모세는 남녀노소는 무론하고 제물에 쓸 양떼와 소 떼를 모두 데리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파라오의 말에 정확하게 대답했습니다. 파라오가 아무리 막아도 소용이 없는 일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 고백입니다. 모세는 파라오의 은근한 위협이나 계략에 전혀 밀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간다. 모두 다 간다”였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이런 환경이 안되면 그 환경을 떠나야 합니다. 가끔은 주일에도 나와서 일하라는 직장의 요구로 많은 교인들이 예배를 빠집니다. 회사의 요구가 없는데도 눈치가 보여서 알아서 빠지기도 합니다. 친목회나 야유회, M.T 때문에 빠지는 꼴같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파라오가 모세에게 물을 때 모세는 주저없이 준비된 대답을 했듯이, 우리는 언제 누가 어디서 물어도 동일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파라오가 그들에게 이르되, [주]가 너희와 함께할지니 그리하면 내가 너희와 너희의 어린것들을 보내리라. /너희는/ 조심하라. 이는 너희 앞에 악이 있기 때문이니라. 그리할 수 없나니 이제 너희 남자들만 가서 [주]를 섬기라. 이는 너희의 구하는 바가 그것이기 때문이라, 하므로 그들이 파라오의 눈앞에서 쫓겨나니라.](10-11). 파라오는 좋은 말을 해주는 듯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딴지를 걸고 있습니다. 너희와 너희 어린 것들을 보내리라고 해 놓고는 중간에 장황한 이유를 댄 다음 ‘그리할 수 없나니 이제 너희 남자들만 가서 주를 섬기라’고 합니다. 파라오 자신은 너희와 너희 어린 것들을 다 보내주고 싶지만 아이들이 광야에서 삼일간 어떻게 여행할 것이며, 위험이 많지 않겠느냐? 안전을 생각해라. 이런 것들입니다. 그는 모세를 위해 주는 척하고, 아이들을 위해 주는 척합니다. ‘너희는 조심하라. 이는 너희 앞에 악이 있기 때문이니라’ 이 말은 광야로 가서 희생제를 드리는 일에 위험이 많다는 말입니다. 파라오는 이런 안전과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착하고 선한 양심으로 인해 아이들은 보내 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할 수 없나니...]란 말은 아이를 보호하라. 아이들을 사랑하라는 U.N 아동 보호소의 구호같습니다. 아이들을 나일강에 던져 죽게 한 파라오가 어찌 아이들을 생각하여 주께 명절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파라오는 아이들을 부모와 단절시키려 합니다. 하나님은 부모들에게 아이들을 가르치라고 합니다. 파라오는 믿음이 전수되는 것을 막습니다. 파라오는 주를 섬기는 일을 모세와 기성 세대의 남자들로 한정함으로써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의 신앙을 지우고자 합니다. [그리할 수 없나니] 이는 불신자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를 믿어야지. 그렇게 되면 돈을 언제 벌어... “그리할 수 없나니”, 술을 못 마시면 사회 생활은 어떻게 해...“그리할 수 없나니”. [그리할 수 없나니] 이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이 헌신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젊은 자매들이 처녀 때에 ‘외모를 취하지 말고 같은 믿음의 형제와 결혼해야지’라고 결단합니다. 막상 결혼 할 때가 되면 “그리할 수 없나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수없이 선하고 의로운 결단을 쏟아내는 형제들이 막상 그것을 실천해야 할 때가 오면 ‘그리할 수 없나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아니라 파라오의 마음입니다.
12-15절은 말씀하신 대로 이집트 땅에 메뚜기들로 인한 심판이 집행되었습니다. 메뚜기들은 우박이 남겨놓은 땅의 모든 채소를 먹어 치웠습니다. 이 재앙이 얼마나 참혹하였는지 보십시오. [이는 메뚜기들이 온 지면을 덮으매 땅이 어둡게 되었음이라. 또 그것들이 우박이 남겨 놓은 밭의 채소와 나무 열매를 다 먹었으므로 이집트 온 땅에 있는 나무나 들의 채소 중에서 푸른 것은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15). 파라오 신하들의 우려는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조금만 현명했으면 피할 수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미련한 사람은 심판을 당하기 전에는 결코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떨지 않습니다.
오늘날 죄인들을 보십시오. 당신의 혼이 영원히 지옥에서 불타는 고통을 당한다고 아무리 경고해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옥에 막상 떨어지기 전까지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큰 소리를 칩니다. 지옥에서 간절히 외치던 어느 부자의 후회는 이미 늦은 것입니다(눅16).
16-17절을 보십시오. [이에 파라오가 모세와 아론을 급히 불러서 이르되, 내가 [주] 너희 하나님과 너희에게 범죄하였으니 그런즉 이제 원하건대 내 죄를 이번에 한 번만 /더/(x) 용서하고 [주] 너희 하나님께 간구하여 이 죽음만은 내게서 떠나게 하라, 하므로](16-17). 메뚜기들이 닥치자 파라오는 다급해졌습니다. 파라오는 어느 때보다 강도높게 죄를 시인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이전과 달리 ‘너희 하나님과 너희에게 범죄하였으니’라고 죄를 인정했습니다. ‘내 죄를...’하며 개인적이 죄까지도 시인했습니다. 거의 완벽해 보이는 회개입니다. 하지만 주의깊게 성경을 보는 독자라면 파라오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only-를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에 지은 나의 이 죄만(my sin only this one)](17) 용서해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죄란 전 생애에 걸쳐 하나님께 대한 불신과 반역에 대한 전인격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파라오는 이번에 행한 자신의 죄만 용서해 주기를 구함으로써 여전히 죄에 대한 회개를 하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메뚜기 재앙으로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 죽음만은 내게서 떠나게 하라’고 간구했던 것입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이 죽음이 아니라 둘째 사망입니다. 한 번 죽는 죽음에서 피하는 것으로 영혼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구사일생’이란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죽을 뻔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인데, 매우 흥미진진했습니다. 사고로부터 구출되고, 아슬아슬한 순간 그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그런 이야기들인데,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살아난 이야기들로, 모두 현재 실제 인물들의 실화를 재구성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험에서 살아났다고 영혼이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듣고 구원받는 것이야말로 정말 진정한 구사일생(九死一生)의 이야기입니다.
18-20절을 보십시오. [그가 파라오를 떠나 밖으로 나가서 [주]께 간구하매 [주]께서 강한 서풍을 불게 하사 메뚜기들을 가져다가 홍해에 몰아 넣으시니 이집트 온 지역에 메뚜기가 하나도 남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주]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가게 하지 아니하였더라.](18-20). 위기가 지나가자 파라오는 다시 마음이 완악해졌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참된 변화를 겪지 못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에게 회개한 죄가 다시 반복된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회개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말씀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와 나의 죄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을 갖고, 죄라는데 동의는 하지만 주님 앞에서 처리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대충 알아서 처리한 것일 때, 같은 문제가 계속 반복됩니다. 파라오에게 같은 문제가 계속 반복되는 이유와 동일한 이유입니다. 죄를 시인했지만 버리지 않았습니다. 용서를 구했지만 그것은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뿐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는 이유로 미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를 해결하시는 능력이 십자가의 피일진대 죄에게 종노릇하며, 죄 문제에서 자유를 얻지 못하고 승리하지 못한다면 그 얼마나 비참하고 한심한 노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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