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 23일- 출애굽기
출애굽기(XXV)
말씀: 출애굽기 8:21-32
요절: 출애굽기 8:22-23
25. 구별을 두리니
어떤 설교자가 말하기를, ‘자신의 강점으로 일하라’고 설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성도들에게 받은바 은사를 잘 활용하라는 말을 젊은이들이 알아듣기 쉽게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들이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서 넘어지고 쓰러지고 처절하게 실패를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술을 마시거나 도박을 하거나 오락을 하는 것으로 유혹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저를 도저히 유혹하지 못합니다.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저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computer를 만졌지만 젊은이들이 그렇게 빠져들며 광분하는 오락, 게임에 빠져 본 적이 없습니다. 해 본 적도 없습니다. 제가 지독하게 오락이나 게임을 못하기 때문에 유혹 자체를 받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약한 것이 자신을 죽인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반대입니다. 모세는 온유의 대명사입니다. 하지만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최고 강점이던 온유함이 결여되어 망했습니다. 베드로는 담력과 용기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용기의 부족으로 주님을 저주하며 배반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나 세상에서나 그런 예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연약함, 부족함은 결코 흠이 아니며 그것들은 부끄러운 것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오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이 마음을 집중하고 오직 말씀에 온 마음을 다 쏟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출애굽기 8:21부터입니다. 이제 파라오는 세 가지 재앙을 겪었습니다. 세 번째 재앙을 통해 파라오의 술사들은 “이것은 하나님의 손가락이니이다”(8:19)라고 파라오에게 고백했지만, 파라오의 마음은 더욱 굳어졌습니다. 파라오는 자신의 강한 권세와 아집 때문에 무너졌습니다. 그가 힘이 약했기 때문에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보다 더 강한 힘을 지니신 하나님을 부인하고, 거절했기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8:20-32절은 네 번째 재앙입니다. 주님은 이집트 사람들에게 파리떼를 보내어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네 번째 재앙부터 주님은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구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분리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22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 내가 내 백성이 거하는 고센 땅을 분리시켜 그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이것은 너로 하여금 내가 땅 한가운데 있는 주인 줄 알게 하려 함이라.](22). 분리의 목적은 파라오로 하여금, 이집트로 하여금, 세상으로 하여금 주님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혼합, 통합, 하나됨을 주장하시는 분이 아니라 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십니다. 언어를 나누시고, 민족들을 나누십니다. 주님이 혼합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레위기 19:19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법규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켜 새끼를 낳게 하지 말고 네 밭에 씨를 섞어 뿌리지 말며 아마와 양털을 섞은 옷을 입지 말라.](레19:19). 반대로 사람들은 통합과 혼합을 외칩니다. 인종 통합, 종교 통합, 언어 통합, 경제 통합...계속 통합을 외치고 있습니다. 주님은 성도들에게 세상을 본받지 말라, 일치하지 말라, 동화되지 말라,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모두 부정적인 말씀입니다. 거룩이 무엇입니까? 분리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구분하시고 나누시고, 분리하신 것을 합하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분리된 삶을 살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주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23). 주님은 재앙을 내리시면서 구별을 두심으로 파라오에게 깨우쳐 주려 하십니다. 주님은 거룩히 구별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저는 크리스천들이 들을 수 있는 최대의 모욕이 “도대체 구별이 안 돼!”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구분이 안 된다면 그는 성도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말과 행실에서 구분이 되어야 합니다. 가치관에서 분명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레위기 20:7-8,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자신을 거룩히 구별하여 거룩할지니 이는 내가 주 너희 하나님이기 때문이니라. 너희는 내 법규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히 구별하는 주니라.](레20:7,8).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거룩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곧 너희가 거룩히 구별되는 것이라. 그런즉 너희는 음행을 멀리하고](살전4:3).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구별하십니까?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입니다. [바로 이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모든 사람을 위해 드려짐을 통해 우리가 거룩히 구별되었노라.](히10:10).
둘째, 하나님의 영을 통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별하셨습니다. [전에는 너희 가운데 이 같은 자들이 더러 있었으나 이제는 너희가 우리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씻김을 받고 거룩히 구별되어 의롭게 되었느니라.](고전6:11).
셋째,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그것이 거룩히 구별되기 때문이라.](딤전4:5).
주님은 이미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저와 여러분들의 책임입니다. 숯은 아무리 갈아도, 아무리 닦아도 숯입니다. 걸레는 빨아도 걸레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은 아무리 고상하게 칠을 하고, 꾸며도 더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죄인들에게 거룩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죄인들에게 주님의 피와 하나님의 성령, 말씀의 물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영은 거듭남을 통해 구별된 사람들에게 거룩함을 요구하십니다. 이미 거룩해진 사람들에게 거룩히 구별될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기 때문에 거룩한 삶을 영위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그 끝은 영존하는 생명이니라.](롬6:22).
너무나 슬픈 일은 명색이 성도란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비교의 대상이 되고, 오히려 그들보다 못하다는 비아냥을 듣는 것입니다.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은 성도가 개가 토한 것에 다시 드러눕듯이 이전 생활로 돌아가 죄 가운데 빠져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별하셔서 우리를 통해 세상이 주님을 알기를 원하셨지만, 세상과 너무나 똑같은 형상과 똑같은 냄새, 똑같은 맛을 냄으로써 주님은 세상에 자신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을 잃어 버렸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10원짜리 동전과 100원짜리 동전은 크기가 비슷합니다. 하나는 구리 빛이고, 하나는 백색의 은빛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때가 묻었는지 색깔만 보고는 구별이 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일본 여행을 했던 어떤 분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의 500원짜리 동전과 일본의 500엔짜리 동전은 크기와 무게가 거의 같습니다. 이 두 동전에 때가 묻으면 구별이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자판기에 넣어서 물건을 사기도 하고, 가게에서 같이 섞어서 주기도 한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쌍과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는 멋진 예라고 생각됩니다. 때를 벗겨내지 않으면 구별이 가지 않습니다. 마치 오늘날 죄에 빠져 있는 성도들의 모습은 차마 신자라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회사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Mr. 김은 교회를 다니면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지 않아요? 어째 하는 짓이 교회 안 다니는 사람보다 못해요?”라고 충고하자, “아니, 과장님. 교회 다닌다고 사람이 다 그렇게 살아야 되는 줄 아세요. 교회 다녀도 다 똑 같아요. 신자도 사람이에요. 왜 그러세요?” 라고 도리어 화를 내고 따지고 들었습니다. 세상은 신자들이 자신들과 연합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신자들의 타락과 연합을 역겨워 합니다. 그런데 실족한 성도들은 이성을 잃어버린 채 세상을 굳게 붙들고 놓아 주려 하지 않습니다.
아예 검은 벼루라면 아무리 갈아도 검은 먹물이 나오겠지만 주님의 피로 씻음 받은 성도라면 조금만씻어 내어도 금방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 약속들을 가졌은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완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 주님께서 이미 우리를 구별하셨습니다.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것입니다. 주님이 토기장이라면 우리는 그릇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그릇을 깨끗하게 해야 하는데 이것은 단번에 받은 구원과 달리 삶 속에서 점진적인 성화의 과정입니다. 두 구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하게 쓰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되리라.](딤후2:21).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주님은 이집트에 다양한 파리들을 보내셨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그와 같이 행하시니 극심한 파리 떼가 파라오의 집과 그 신하들의 집과 온 이집트 땅에 이르렀고 파리 떼로 인하여 그 땅이 부패하게 되었더라.](24). 파리들이 들끓으면 전염병이 돕니다. 파리들은 그냥 날아다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먹어 치웁니다. 메뚜기처럼 많이 먹는 것은 아니지만 음식물이나 짐승들에게 새까맣게 붙으면 치명타를 입힐 수 있습니다. 어떤 파리들은 피를 뽑아 먹기도 합니다. 현재 알려진 파리의 종류는 약 4000 종류입니다. 보건학적으로 문제시 되고 있는 ‘과’는 집파리과(Muscidae), 검정파리과(Calliphoridae), 쉬파리과(Sarcophagidae), 그리고 체제파리과(Glossinidae)와 양파리과(Oesteridae)이며 체체파리의 경우 수면병을 전파시키며, 척추동물의 피를 빨아 먹습니다. 양파리과에 속하는 파리의 유충은 양과 같은 건축의 내부에 기생하여 문제시되고 있습니다. 시편 78:45절에 따르면 주님은 파리들이 많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종류였고, 이 파리들이 많은 것을 먹어 치웠음을 보여 줍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신즉 여러 종류의 파리가 오며 그들의 온 지역에 이들이 왔도다.](시105:31). 사람들이 파리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피를 빨아 먹힌다면 차라리 죽느니만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죽는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지옥에도 여전히 뜨거운 불 가운데 사는 벌레들이 죽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파라오는 파리들에게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모세와 아론을 불러 말했습니다. [파라오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리라, 하니](25). 그러나 이 말은 파라오의 얕은 꾀에 불과합니다. 그는 허락하는 척하면서 결코 그들을 가게 하지 않았습니다. 파라오는 타협책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타협을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은 순종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파라오의 타협을 통해 성도들을 향한 마귀의 계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성도를 향한 마귀의 타협은 이렇습니다.
첫째, 가서 하나님을 섬기라. 단 이 땅에서, 너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라. 세상을 버리지 말고, 세상과 친구가 되라. 세상과 함께 하라(약4:1-4).
둘째, 세상을 떠나라. 그러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출8:28). 신자가 되더라도 너무 광신자는 되지 말라. 믿더라도 술, 담배 다 끊고 친구들 안 만나고 그런 짓은 하지 말라. 교회는 나가더라도 T.V, 라디오, 신문, 잡지, 영화관에서 발길을 돌리지 말라.
셋째, 정녕 세상을 떠나야 한다면 완전히 떠나지는 말고 어린 것들은 남겨 두라. 너희들만 가라(10:11).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교회에 데려가서 세뇌 시키는 것은 좋지 않다. 그들이 커서 스스로 결정하도록 자유를 주라. 애들이 설교를 어찌 이해하겠는가? 그냥 여기서 놀게 두라.
넷째, 모두 떠나야 한다면 너희 소유는 남겨 두고 가라(10:24). 완전히 단절하지는 말자. 몸이 떠나도 마음은 이곳에 있도록 하라.
파라오의 타협에 대한 모세의 반응은 단호했습니다. [모세가 이르되, 그리함이 합당치 아니하니 이는 우리가 이집트 사람들이 가증(可憎)히 여기는 것을 주 우리 하나님께 희생물로 드릴 것임이니이다. 보소서, 우리가 이집트 사람들 앞에서 그들이 가증히 여기는 것을 희생물로 드리면 그들이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주 우리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리되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행하려 하나이다, 하매](26-27). 모세는 파라오의 말이 합당치 아니하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행하려 하나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이집트 땅에서 히브리인들이 주께 희생물을 드리는데 양은 이집트 사람들이 가증히 여기는 동물이었습니다. 또 히브리인들은 송아지를 잡아서 경배를 드릴 것인데, 송아지는 이집트 사람들이 숭배하는 경배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모세는 ‘그리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말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쥬피터가 양 안에 숨어 있고, 아폴로가 닭 안에 숨어 있고, 다이아나는 고양이 안에, 쥬피터의 아내 주노(Juno)는 염소 안에 숨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비너는 생선, 머큐리(Hermes-운변의 신)는 새 안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동물을 숭배하다 보니 짐승들을 전혀 숭배하지 않는 히브리인들과는 당연히 부딪힐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과 우리는 생각하는 코드(code)가 다르고, 공통 분모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세는 아직 무엇을 어떻게 희생물로 드려야 하는지 잘 몰랐다는 점입니다. [주 우리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리되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행하려 하나이다,](27b). 주님은 아직 모세에게 희생물에 대한 계시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희생물의 종류나 양에 대해서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몰랐지만 분명하게 아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생각이나 전통이나 세상 방식이 아니라 주님이 명령하시는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구할 때, 주님께 헌신할 때 앞으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순종할 때 주님은 한 가지씩 해야 할 일을 조명해 주십니다. 내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 주님은 그에 맞는 계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기본 원리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인도하실 때도 그러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부름을 받았지만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순례의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믿음의 길은 늘 그러합니다. 모세는 출애굽의 영웅이었지만 그의 비결은 오직 주님이 명령을 주시는대로 행하겠다는 올바른 신앙 자세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파라오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가게 하리니 너희가 광야에서 주 너희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하매](28). 파라오는 첫 번째 제안이 실패로 돌아가자 두 번째 제안을 했습니다.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거기에 한 마디 더했습니다.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이 말은 영적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 들으면 파라오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인정한 혁명적인 사건처럼 들립니다. 파라오의 경건한 한 마디의 말은 앞에 자신이 한 말을 충분히 희석시킬 수 있는 노련한 정치인의 화술(話術)이요, 뛰어난 외교적 수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신약 성경에 이와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6:16-18, [](행16:16-18). 점치는 영에 사로잡힌 여자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보통 사람들이 전혀 알아 보지 못하는 안목과 신자들도 외치지 않는 말을 외쳤습니다. 이때 바울과 그 일행이 “이런 훌륭한 믿음의 여인이 있다니!”하며 감탄을 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근심하며 몸을 돌이켜 꾸짖으며 그 영을 몰아내었습니다.
파라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모세에게 타협을 제시한 후에 자신이 마치 영적인 것에 관심이라도 있는 것처럼 ‘나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크리스찬을 회유할 때 교회나 하나님을 들먹이는 꼴과 비슷합니다. 교회도 안 다니는 사람들이 입에는 하나님, 주, 선교란 말이 입에 붙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업원의 월급을 떼어 먹는 사장님의 입에서 ‘한 푼이라도 아껴서 교회에 구제헌금하고 선교 헌 금한다’는 말에 감동한 형제는 절대 끝까지 따질 수 없습니다. 제때 정확하게 월급을 주는 것이 선교 헌금하는 것보다 더 정확한 하나님의 뜻이란 사실을 지적해 주어야 하는데, 종업원 입자에서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파라오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가게 하리니 너희가 광야에서 주 너희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하매](28). 파라오는 모세의 요구를 다 들어 준 것처럼 말하면서 거기에 자기의 요구를 내 밀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뭔가를 더하거나 빼는 일은 간교한 타협입니다. 파라오의 요구를 단 한 가지라도 들어주면 그는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것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죄와는 멀면 멀수록 좋습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희생물을 드리려면 사악하고 불경스런 사람들과 철저히 구분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포기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의 벽돌 가마와 고기 가마 사이에서 주의 절기를 지킬 수는 없습니다. 파라오는 모세를 속일 수는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거짓 협상, 기만은 하나님께 통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파라오처럼 허위로 회개하고, 거짓되어 굴복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영혼에 치명적인 속임수를 가하는 것이며, 영적 자살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직하게 보여도, 거기에 숨겨진 죄를 남겨 두는 사람들, 그 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그들은 죄를 버린다고 하면서도 멀리 보내지 않습니다. 그는 심판과 징계를 통해 정신이 번쩍 들면 악한 습관, 나쁜 친구들을 멀리 하지만 항상 다시 부를 수 있는 거리에 두려고 합니다. 성도들이 죄를 이기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지를 미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워하지 않기 때문에 싸울 이유도 없고, 죽여 버릴 이유도 없습니다. 단순한 죄들을 삼가려 하고, 그치려 하고, 파하는 정도에서 타협을 시도하고 공존하려 합니다. 어느 정도는 죄를 멀리하지만 영원히 떠나 보내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죄를 멀리하고, 십자가를 참아내며 그리스도를 따르려 하는 마음을 먹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정확한 영적 상태는 지금 파라오의 마음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나를 위해 기도를 부탁하지만 너무 멀리는 가지 말아다오”입니다. 나의 삶에 즐거움이 너무 빼앗기지 않고, 나의 삶에 피해와 큰 희생이 동반되지 않는 그런 구원, 그런 신앙 생활을 하고 싶어 합니다. 적당하게 육신적인고, 적당하게 영적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점점 더 위선적이고 종교적이고,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채 모양만 유지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이르되, 보소서, 내가 왕을 떠나 나가서 주께 간구하리니 내일 파리 떼가 파라오와 파라오의 신하들과 파라오의 백성에게서 떠나려니와 파라오께서는 더 이상 속임수로 행하지 마시며 이 백성을 가지 못하게 하여 주께 희생물을 드리지 못하게 하지 마소서, 하고](29). 전에 파라오는 내일 개구리를 내 보내 달라고 했지만 이번에는 모세가 알아서 ‘내일’ 파리 떼를 몰아 내 주겠다고 합니다. 개구리와 하룻밤만 더 지내기를 원했던 파라오는 이제 파리 떼와 하룻 밤을 더 지내야 했습니다. 이것은 불신과 회의주의에 빠진 파라오를 향해 주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모세가 이번에도 파라오에게 ‘언제?’라고 물었다면 ‘지금 당장’, ‘오늘’이라고 대답하고 싶겠지만 하나님은 그런 기회조차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타협안을 내놓은 대가를 주님은 그대로 갚아 주셨습니다.
모세는 파라오의 잔꾀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파라오에게 더 이상 속임수로 행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잔꾀를 잘 부립니다. 그런데 성도들 역시 이런 버릇이 좀처럼 고쳐지지 않아서 하나님 앞에 잔꾀를 뿌리는 때가 많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말로는 공개적으로 믿음으로 행한다고 하면서 뒤에서 따로 행해지는 잔꾀, 술수, 얄팍한 꼼수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것들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많은 성도들은 설교를 들으면서도 자기 마음을 속입니다. 자기를 속이면 마음이 평안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속임은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결코 trouble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자신을 속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렘42:20).
바울 사도는 간절히 권면했습니다. [속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임이라.](갈6:7). 파라오처럼 속임수를 행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속임을 당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롱당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순복하십시오. 타협책을 제시하지 마십시오. 때로 잔머리를 굴리는 사람들은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일거양득, 일석이조를 노리는 사람들은 세상에서는 지혜로운 자이지만 그만큼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에서는 절대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흔히 간증이라고 하는 많은 자랑들을 들어 보면 세상에서도 영광을 얻고, 교회에서도 영광을 얻는 그런 내용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자신을 속이는 간증이며, 성도들을 속이는 간증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포기하든지, 영적인 것을 포기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하지 않고 둘 다 성공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며, 성경적인 가르침도 아닙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것처럼 보이려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니](고전3:18). 여러분의 육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들을 버리고 포기하는 아픔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승리했다는 말은 완전히 거짓말입니다.
어떤 분이 성경을 공부한 뒤로 자신이 좋아하던 것을 대부분 포기하고 버렸는데, 난을 치는 한 가지만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시간이 많이 남이 남아 난을 돌보고 가꾸는 시간이 전보다 몇 배나 많아졌습니다. 이는 T.V를 안 보니까 저녁 시간이 여유로와 아무데나 돌아다니기가 너무 좋다는 말이나 같습니다. 친구와 당구를 안치니 T.V를 많이 보게 되더라...그런 식입니다. 이런 사람이 “주님 저는 다 버렸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을 다 버렸습니다. 제가 가볍게 생각하는 한 가지 취미 생활만 빼고는 다 버렸습니다.”라고 할 때 주님은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1:22).
30-32절은 계속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네 번째 재앙을 통해서 여러 가지 영적 진리들을 배웠습니다. 파라오의 재앙과 고통의 원인을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원인은 죄였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한 마음이었습니다. 우리가 받는 고통 역시 대부분은 죄에 기인합니다. 사람들은 일어나는 현상을 원인으로 자주 오해를 합니다. 세상이 겪는 대부분의 고통은 참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이는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재앙을 통해서 ‘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려’ 하셨습니다. 이집트와 주의 백성들을 구별하신 것은 결국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리려는데 있었습니다.
누가 말하기를, 우리가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거룩하고 구별된 자로서 그에 합당한 삶을 살 때, 주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에 하나님을 알리실 것입니다. 이것이 부름 받은 성도들, 교회의 일차적인 목적입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출애굽기(XXV)
말씀: 출애굽기 8:21-32
요절: 출애굽기 8:22-23
25. 구별을 두리니
어떤 설교자가 말하기를, ‘자신의 강점으로 일하라’고 설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성도들에게 받은바 은사를 잘 활용하라는 말을 젊은이들이 알아듣기 쉽게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들이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서 넘어지고 쓰러지고 처절하게 실패를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술을 마시거나 도박을 하거나 오락을 하는 것으로 유혹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저를 도저히 유혹하지 못합니다.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저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computer를 만졌지만 젊은이들이 그렇게 빠져들며 광분하는 오락, 게임에 빠져 본 적이 없습니다. 해 본 적도 없습니다. 제가 지독하게 오락이나 게임을 못하기 때문에 유혹 자체를 받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약한 것이 자신을 죽인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반대입니다. 모세는 온유의 대명사입니다. 하지만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최고 강점이던 온유함이 결여되어 망했습니다. 베드로는 담력과 용기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용기의 부족으로 주님을 저주하며 배반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나 세상에서나 그런 예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연약함, 부족함은 결코 흠이 아니며 그것들은 부끄러운 것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오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이 마음을 집중하고 오직 말씀에 온 마음을 다 쏟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출애굽기 8:21부터입니다. 이제 파라오는 세 가지 재앙을 겪었습니다. 세 번째 재앙을 통해 파라오의 술사들은 “이것은 하나님의 손가락이니이다”(8:19)라고 파라오에게 고백했지만, 파라오의 마음은 더욱 굳어졌습니다. 파라오는 자신의 강한 권세와 아집 때문에 무너졌습니다. 그가 힘이 약했기 때문에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보다 더 강한 힘을 지니신 하나님을 부인하고, 거절했기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8:20-32절은 네 번째 재앙입니다. 주님은 이집트 사람들에게 파리떼를 보내어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네 번째 재앙부터 주님은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구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분리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22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 내가 내 백성이 거하는 고센 땅을 분리시켜 그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이것은 너로 하여금 내가 땅 한가운데 있는 주인 줄 알게 하려 함이라.](22). 분리의 목적은 파라오로 하여금, 이집트로 하여금, 세상으로 하여금 주님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혼합, 통합, 하나됨을 주장하시는 분이 아니라 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십니다. 언어를 나누시고, 민족들을 나누십니다. 주님이 혼합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레위기 19:19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법규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켜 새끼를 낳게 하지 말고 네 밭에 씨를 섞어 뿌리지 말며 아마와 양털을 섞은 옷을 입지 말라.](레19:19). 반대로 사람들은 통합과 혼합을 외칩니다. 인종 통합, 종교 통합, 언어 통합, 경제 통합...계속 통합을 외치고 있습니다. 주님은 성도들에게 세상을 본받지 말라, 일치하지 말라, 동화되지 말라,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모두 부정적인 말씀입니다. 거룩이 무엇입니까? 분리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구분하시고 나누시고, 분리하신 것을 합하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분리된 삶을 살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주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23). 주님은 재앙을 내리시면서 구별을 두심으로 파라오에게 깨우쳐 주려 하십니다. 주님은 거룩히 구별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저는 크리스천들이 들을 수 있는 최대의 모욕이 “도대체 구별이 안 돼!”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구분이 안 된다면 그는 성도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말과 행실에서 구분이 되어야 합니다. 가치관에서 분명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레위기 20:7-8,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자신을 거룩히 구별하여 거룩할지니 이는 내가 주 너희 하나님이기 때문이니라. 너희는 내 법규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히 구별하는 주니라.](레20:7,8).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거룩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곧 너희가 거룩히 구별되는 것이라. 그런즉 너희는 음행을 멀리하고](살전4:3).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구별하십니까?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입니다. [바로 이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모든 사람을 위해 드려짐을 통해 우리가 거룩히 구별되었노라.](히10:10).
둘째, 하나님의 영을 통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별하셨습니다. [전에는 너희 가운데 이 같은 자들이 더러 있었으나 이제는 너희가 우리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씻김을 받고 거룩히 구별되어 의롭게 되었느니라.](고전6:11).
셋째,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그것이 거룩히 구별되기 때문이라.](딤전4:5).
주님은 이미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저와 여러분들의 책임입니다. 숯은 아무리 갈아도, 아무리 닦아도 숯입니다. 걸레는 빨아도 걸레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은 아무리 고상하게 칠을 하고, 꾸며도 더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죄인들에게 거룩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죄인들에게 주님의 피와 하나님의 성령, 말씀의 물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영은 거듭남을 통해 구별된 사람들에게 거룩함을 요구하십니다. 이미 거룩해진 사람들에게 거룩히 구별될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기 때문에 거룩한 삶을 영위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그 끝은 영존하는 생명이니라.](롬6:22).
너무나 슬픈 일은 명색이 성도란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비교의 대상이 되고, 오히려 그들보다 못하다는 비아냥을 듣는 것입니다.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은 성도가 개가 토한 것에 다시 드러눕듯이 이전 생활로 돌아가 죄 가운데 빠져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별하셔서 우리를 통해 세상이 주님을 알기를 원하셨지만, 세상과 너무나 똑같은 형상과 똑같은 냄새, 똑같은 맛을 냄으로써 주님은 세상에 자신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을 잃어 버렸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10원짜리 동전과 100원짜리 동전은 크기가 비슷합니다. 하나는 구리 빛이고, 하나는 백색의 은빛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때가 묻었는지 색깔만 보고는 구별이 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일본 여행을 했던 어떤 분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의 500원짜리 동전과 일본의 500엔짜리 동전은 크기와 무게가 거의 같습니다. 이 두 동전에 때가 묻으면 구별이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자판기에 넣어서 물건을 사기도 하고, 가게에서 같이 섞어서 주기도 한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쌍과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는 멋진 예라고 생각됩니다. 때를 벗겨내지 않으면 구별이 가지 않습니다. 마치 오늘날 죄에 빠져 있는 성도들의 모습은 차마 신자라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회사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Mr. 김은 교회를 다니면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지 않아요? 어째 하는 짓이 교회 안 다니는 사람보다 못해요?”라고 충고하자, “아니, 과장님. 교회 다닌다고 사람이 다 그렇게 살아야 되는 줄 아세요. 교회 다녀도 다 똑 같아요. 신자도 사람이에요. 왜 그러세요?” 라고 도리어 화를 내고 따지고 들었습니다. 세상은 신자들이 자신들과 연합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신자들의 타락과 연합을 역겨워 합니다. 그런데 실족한 성도들은 이성을 잃어버린 채 세상을 굳게 붙들고 놓아 주려 하지 않습니다.
아예 검은 벼루라면 아무리 갈아도 검은 먹물이 나오겠지만 주님의 피로 씻음 받은 성도라면 조금만씻어 내어도 금방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 약속들을 가졌은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완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 주님께서 이미 우리를 구별하셨습니다.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것입니다. 주님이 토기장이라면 우리는 그릇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그릇을 깨끗하게 해야 하는데 이것은 단번에 받은 구원과 달리 삶 속에서 점진적인 성화의 과정입니다. 두 구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하게 쓰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되리라.](딤후2:21).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주님은 이집트에 다양한 파리들을 보내셨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그와 같이 행하시니 극심한 파리 떼가 파라오의 집과 그 신하들의 집과 온 이집트 땅에 이르렀고 파리 떼로 인하여 그 땅이 부패하게 되었더라.](24). 파리들이 들끓으면 전염병이 돕니다. 파리들은 그냥 날아다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먹어 치웁니다. 메뚜기처럼 많이 먹는 것은 아니지만 음식물이나 짐승들에게 새까맣게 붙으면 치명타를 입힐 수 있습니다. 어떤 파리들은 피를 뽑아 먹기도 합니다. 현재 알려진 파리의 종류는 약 4000 종류입니다. 보건학적으로 문제시 되고 있는 ‘과’는 집파리과(Muscidae), 검정파리과(Calliphoridae), 쉬파리과(Sarcophagidae), 그리고 체제파리과(Glossinidae)와 양파리과(Oesteridae)이며 체체파리의 경우 수면병을 전파시키며, 척추동물의 피를 빨아 먹습니다. 양파리과에 속하는 파리의 유충은 양과 같은 건축의 내부에 기생하여 문제시되고 있습니다. 시편 78:45절에 따르면 주님은 파리들이 많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종류였고, 이 파리들이 많은 것을 먹어 치웠음을 보여 줍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신즉 여러 종류의 파리가 오며 그들의 온 지역에 이들이 왔도다.](시105:31). 사람들이 파리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피를 빨아 먹힌다면 차라리 죽느니만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죽는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지옥에도 여전히 뜨거운 불 가운데 사는 벌레들이 죽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파라오는 파리들에게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모세와 아론을 불러 말했습니다. [파라오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리라, 하니](25). 그러나 이 말은 파라오의 얕은 꾀에 불과합니다. 그는 허락하는 척하면서 결코 그들을 가게 하지 않았습니다. 파라오는 타협책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타협을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은 순종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파라오의 타협을 통해 성도들을 향한 마귀의 계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성도를 향한 마귀의 타협은 이렇습니다.
첫째, 가서 하나님을 섬기라. 단 이 땅에서, 너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라. 세상을 버리지 말고, 세상과 친구가 되라. 세상과 함께 하라(약4:1-4).
둘째, 세상을 떠나라. 그러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출8:28). 신자가 되더라도 너무 광신자는 되지 말라. 믿더라도 술, 담배 다 끊고 친구들 안 만나고 그런 짓은 하지 말라. 교회는 나가더라도 T.V, 라디오, 신문, 잡지, 영화관에서 발길을 돌리지 말라.
셋째, 정녕 세상을 떠나야 한다면 완전히 떠나지는 말고 어린 것들은 남겨 두라. 너희들만 가라(10:11).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교회에 데려가서 세뇌 시키는 것은 좋지 않다. 그들이 커서 스스로 결정하도록 자유를 주라. 애들이 설교를 어찌 이해하겠는가? 그냥 여기서 놀게 두라.
넷째, 모두 떠나야 한다면 너희 소유는 남겨 두고 가라(10:24). 완전히 단절하지는 말자. 몸이 떠나도 마음은 이곳에 있도록 하라.
파라오의 타협에 대한 모세의 반응은 단호했습니다. [모세가 이르되, 그리함이 합당치 아니하니 이는 우리가 이집트 사람들이 가증(可憎)히 여기는 것을 주 우리 하나님께 희생물로 드릴 것임이니이다. 보소서, 우리가 이집트 사람들 앞에서 그들이 가증히 여기는 것을 희생물로 드리면 그들이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주 우리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리되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행하려 하나이다, 하매](26-27). 모세는 파라오의 말이 합당치 아니하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행하려 하나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이집트 땅에서 히브리인들이 주께 희생물을 드리는데 양은 이집트 사람들이 가증히 여기는 동물이었습니다. 또 히브리인들은 송아지를 잡아서 경배를 드릴 것인데, 송아지는 이집트 사람들이 숭배하는 경배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모세는 ‘그리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말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쥬피터가 양 안에 숨어 있고, 아폴로가 닭 안에 숨어 있고, 다이아나는 고양이 안에, 쥬피터의 아내 주노(Juno)는 염소 안에 숨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비너는 생선, 머큐리(Hermes-운변의 신)는 새 안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동물을 숭배하다 보니 짐승들을 전혀 숭배하지 않는 히브리인들과는 당연히 부딪힐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과 우리는 생각하는 코드(code)가 다르고, 공통 분모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세는 아직 무엇을 어떻게 희생물로 드려야 하는지 잘 몰랐다는 점입니다. [주 우리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리되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행하려 하나이다,](27b). 주님은 아직 모세에게 희생물에 대한 계시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희생물의 종류나 양에 대해서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몰랐지만 분명하게 아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생각이나 전통이나 세상 방식이 아니라 주님이 명령하시는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구할 때, 주님께 헌신할 때 앞으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순종할 때 주님은 한 가지씩 해야 할 일을 조명해 주십니다. 내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 주님은 그에 맞는 계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기본 원리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인도하실 때도 그러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부름을 받았지만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순례의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믿음의 길은 늘 그러합니다. 모세는 출애굽의 영웅이었지만 그의 비결은 오직 주님이 명령을 주시는대로 행하겠다는 올바른 신앙 자세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파라오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가게 하리니 너희가 광야에서 주 너희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하매](28). 파라오는 첫 번째 제안이 실패로 돌아가자 두 번째 제안을 했습니다.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거기에 한 마디 더했습니다.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이 말은 영적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 들으면 파라오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인정한 혁명적인 사건처럼 들립니다. 파라오의 경건한 한 마디의 말은 앞에 자신이 한 말을 충분히 희석시킬 수 있는 노련한 정치인의 화술(話術)이요, 뛰어난 외교적 수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신약 성경에 이와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6:16-18, [](행16:16-18). 점치는 영에 사로잡힌 여자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보통 사람들이 전혀 알아 보지 못하는 안목과 신자들도 외치지 않는 말을 외쳤습니다. 이때 바울과 그 일행이 “이런 훌륭한 믿음의 여인이 있다니!”하며 감탄을 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근심하며 몸을 돌이켜 꾸짖으며 그 영을 몰아내었습니다.
파라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모세에게 타협을 제시한 후에 자신이 마치 영적인 것에 관심이라도 있는 것처럼 ‘나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크리스찬을 회유할 때 교회나 하나님을 들먹이는 꼴과 비슷합니다. 교회도 안 다니는 사람들이 입에는 하나님, 주, 선교란 말이 입에 붙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업원의 월급을 떼어 먹는 사장님의 입에서 ‘한 푼이라도 아껴서 교회에 구제헌금하고 선교 헌 금한다’는 말에 감동한 형제는 절대 끝까지 따질 수 없습니다. 제때 정확하게 월급을 주는 것이 선교 헌금하는 것보다 더 정확한 하나님의 뜻이란 사실을 지적해 주어야 하는데, 종업원 입자에서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파라오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가게 하리니 너희가 광야에서 주 너희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하매](28). 파라오는 모세의 요구를 다 들어 준 것처럼 말하면서 거기에 자기의 요구를 내 밀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뭔가를 더하거나 빼는 일은 간교한 타협입니다. 파라오의 요구를 단 한 가지라도 들어주면 그는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것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죄와는 멀면 멀수록 좋습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희생물을 드리려면 사악하고 불경스런 사람들과 철저히 구분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포기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의 벽돌 가마와 고기 가마 사이에서 주의 절기를 지킬 수는 없습니다. 파라오는 모세를 속일 수는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거짓 협상, 기만은 하나님께 통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파라오처럼 허위로 회개하고, 거짓되어 굴복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영혼에 치명적인 속임수를 가하는 것이며, 영적 자살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직하게 보여도, 거기에 숨겨진 죄를 남겨 두는 사람들, 그 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그들은 죄를 버린다고 하면서도 멀리 보내지 않습니다. 그는 심판과 징계를 통해 정신이 번쩍 들면 악한 습관, 나쁜 친구들을 멀리 하지만 항상 다시 부를 수 있는 거리에 두려고 합니다. 성도들이 죄를 이기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지를 미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워하지 않기 때문에 싸울 이유도 없고, 죽여 버릴 이유도 없습니다. 단순한 죄들을 삼가려 하고, 그치려 하고, 파하는 정도에서 타협을 시도하고 공존하려 합니다. 어느 정도는 죄를 멀리하지만 영원히 떠나 보내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죄를 멀리하고, 십자가를 참아내며 그리스도를 따르려 하는 마음을 먹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정확한 영적 상태는 지금 파라오의 마음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나를 위해 기도를 부탁하지만 너무 멀리는 가지 말아다오”입니다. 나의 삶에 즐거움이 너무 빼앗기지 않고, 나의 삶에 피해와 큰 희생이 동반되지 않는 그런 구원, 그런 신앙 생활을 하고 싶어 합니다. 적당하게 육신적인고, 적당하게 영적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점점 더 위선적이고 종교적이고,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채 모양만 유지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이르되, 보소서, 내가 왕을 떠나 나가서 주께 간구하리니 내일 파리 떼가 파라오와 파라오의 신하들과 파라오의 백성에게서 떠나려니와 파라오께서는 더 이상 속임수로 행하지 마시며 이 백성을 가지 못하게 하여 주께 희생물을 드리지 못하게 하지 마소서, 하고](29). 전에 파라오는 내일 개구리를 내 보내 달라고 했지만 이번에는 모세가 알아서 ‘내일’ 파리 떼를 몰아 내 주겠다고 합니다. 개구리와 하룻밤만 더 지내기를 원했던 파라오는 이제 파리 떼와 하룻 밤을 더 지내야 했습니다. 이것은 불신과 회의주의에 빠진 파라오를 향해 주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모세가 이번에도 파라오에게 ‘언제?’라고 물었다면 ‘지금 당장’, ‘오늘’이라고 대답하고 싶겠지만 하나님은 그런 기회조차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타협안을 내놓은 대가를 주님은 그대로 갚아 주셨습니다.
모세는 파라오의 잔꾀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파라오에게 더 이상 속임수로 행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잔꾀를 잘 부립니다. 그런데 성도들 역시 이런 버릇이 좀처럼 고쳐지지 않아서 하나님 앞에 잔꾀를 뿌리는 때가 많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말로는 공개적으로 믿음으로 행한다고 하면서 뒤에서 따로 행해지는 잔꾀, 술수, 얄팍한 꼼수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것들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많은 성도들은 설교를 들으면서도 자기 마음을 속입니다. 자기를 속이면 마음이 평안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속임은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결코 trouble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자신을 속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렘42:20).
바울 사도는 간절히 권면했습니다. [속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임이라.](갈6:7). 파라오처럼 속임수를 행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속임을 당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롱당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순복하십시오. 타협책을 제시하지 마십시오. 때로 잔머리를 굴리는 사람들은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일거양득, 일석이조를 노리는 사람들은 세상에서는 지혜로운 자이지만 그만큼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에서는 절대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흔히 간증이라고 하는 많은 자랑들을 들어 보면 세상에서도 영광을 얻고, 교회에서도 영광을 얻는 그런 내용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자신을 속이는 간증이며, 성도들을 속이는 간증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포기하든지, 영적인 것을 포기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하지 않고 둘 다 성공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며, 성경적인 가르침도 아닙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것처럼 보이려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니](고전3:18). 여러분의 육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들을 버리고 포기하는 아픔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승리했다는 말은 완전히 거짓말입니다.
어떤 분이 성경을 공부한 뒤로 자신이 좋아하던 것을 대부분 포기하고 버렸는데, 난을 치는 한 가지만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시간이 많이 남이 남아 난을 돌보고 가꾸는 시간이 전보다 몇 배나 많아졌습니다. 이는 T.V를 안 보니까 저녁 시간이 여유로와 아무데나 돌아다니기가 너무 좋다는 말이나 같습니다. 친구와 당구를 안치니 T.V를 많이 보게 되더라...그런 식입니다. 이런 사람이 “주님 저는 다 버렸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을 다 버렸습니다. 제가 가볍게 생각하는 한 가지 취미 생활만 빼고는 다 버렸습니다.”라고 할 때 주님은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1:22).
30-32절은 계속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네 번째 재앙을 통해서 여러 가지 영적 진리들을 배웠습니다. 파라오의 재앙과 고통의 원인을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원인은 죄였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한 마음이었습니다. 우리가 받는 고통 역시 대부분은 죄에 기인합니다. 사람들은 일어나는 현상을 원인으로 자주 오해를 합니다. 세상이 겪는 대부분의 고통은 참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이는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재앙을 통해서 ‘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려’ 하셨습니다. 이집트와 주의 백성들을 구별하신 것은 결국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리려는데 있었습니다.
누가 말하기를, 우리가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거룩하고 구별된 자로서 그에 합당한 삶을 살 때, 주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에 하나님을 알리실 것입니다. 이것이 부름 받은 성도들, 교회의 일차적인 목적입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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