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2003년 3월 16일- 출애굽기        




출애굽기(XXIV)




말씀: 출애굽기 7:14-8:20

요절: 출애굽기 8:19




24. 이것은 주님의 손가락이니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나 설교를 들을 때, 이 사건들이 모두 역사적 사실이요, 우리의 교훈과 훈계를 위해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대부분의 내용은 신화나 우화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모세와 아론이 역사적 인물이듯이 파라오의 술사들인 얀네와 얌브레 역시 역사적 인물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이적과 기사, 주의 행하신 일들을 보고, 듣고, 읽으면서도 전혀 깨닫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시편 106편은 출애굽의 기사를 한편의 서사시로 읊은 위대한 명시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이 행하신 이적들을 깨닫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주의 이적들을 깨닫지 못하였으며 주의 풍성한 긍휼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바다에서 곧 홍해에서 그분을 격노하게 하였나이다.](시106:7).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나를 위해서 아니면 반대로 내가 누구를 위해서 열심히 선을 베풀고, 은혜를 베풀고, 일을 해 주었는데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깨닫지 못한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주의 이적들과 기사를 밝히 드러내고 선포해야 할 민족이 오히려 그것들을 잊어 버렸다면 어떻게 증거의 능력을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위해 베푸신 주의 이적들, 나를 향해 베푸신 주의 풍성한 긍휼을 기억하지’ 않고 삶을 불평하고, 비관하고, 감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주님을 격노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하나님께 희생물로 드리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안에서 걸으라.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향기로운 헌물과 희생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5:2). 이것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10가지 재앙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이적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파라오의 강한 속박으로 인해 울부짖고 신음하던 이스라엘은 이제 파라오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강하신 권능의 역사를 한 가지씩 보게 되었습니다.

첫째, 물이 피로 변하는 이적의 역사입니다(14-20). 물은 생명의 원천입니다. 주님은 물들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물들은 생명이 있어서 움직이는 피조물(被造物)과 땅 위 하늘의 열린 궁창에 나는 날짐승을 풍성히 내라, 하시고](창1:20). 인체의 70%는 물이란 사실을 제외하고도 사람이 물이 없으면 잠시라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는 생명을 가진 생물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의 삼대 요소를 물, 공기, 온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인 물을 피로 바꾸심으로 심판을 시작하셨습니다. 물은 육신의 출생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요3:5). 그래서 성경은 아내를 샘이라고 표현합니다(잠5:18). [네 샘으로 하여금 복되게 하며 또 젊을 때 /취한/ 아내와 더불어 기뻐하라](잠5:18). 성경은 처음부터(창1:2) 끝까지(계22:17-생명수) 물이 나옵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물은 말씀을 나타내거나 성령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말씀의 물로 씻는다(엡5:26)는 표현이나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요7:38)이 나옵니다.

많은 물이라고 하면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17:1과 15절을 비교해 보십시오.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의 하나가 와서 내게 이야기하며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들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내가 네게 보여 주리라.](계17:1). 여기서 물은 누구인지 성경이 스스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15절, [또 그가 내게 이르되, 네가 본 물들 곧 음녀가 앉아 있는 물들은 백성들과 무리들과 민족들과 언어들이니라.](계17:15).

물을 피로 바꾸시는 일은 인간의 생명과 직결된 심판입니다. 물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물의 근원을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를 돌리는 대신 물을 숭배했습니다. 특히 이집트 사람들은 나일강을 신성한 생명수라고 숭배했습니다. 경배의 대상은 물이 아니라 물의 근원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계시록 14:7에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 이는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들을 만드신 분께 경배하라, 하더라.](계14:7).

생명의 근원인 물이 피로 변한 것은 죄의 결과요, 심판의 결과입니다. 주님은 모세를 통해 이집트의 물들을 치신 것같이 대환란 때 물들의 근원을 치셔서 피로 만드실 것입니다. [셋째 천사가 자기 대접을 강들과 물들의 근원들 위에 쏟아 부으매 그것들이 피가 되더라.](계16:4).

우리는 이 이적을 영적으로 적용해 볼 때, 생명을 주던 말씀의 물이 심판의 물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은 믿는 자에게는 영생을 줍니다. 말씀은 믿는 자에게 값없는 구원을 줍니다. 그러나 말씀을 거부할 때 그 말씀으로 인해 세상은 심판을 받습니다. 세대적으로 이 이적을 적용해 볼 때, 구약의 율법 하에서 주어진 말씀은 정죄와 심판의 직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율법의 기능은 첫째,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분의 눈앞에서 의롭게 될 육체가 없나니 이는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기(the knowledge of truth) 때문이니라.](롬3:20). 둘째,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 선생의 역할입니다.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訓育) 선생이었으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라.](갈3:24).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이 이적은 이집트와 파라오에게 죄를 깨닫게 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들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인도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집트의 마술사들이 덩달아 동일한 이적을 내었기 때문입니다(22). 파라오는 이 일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23). 죄인들은 자신들에게 임하는 재앙의 심판을 가볍게 여기고 무시하다 결국에는 갑작스럽게 망하는 법입니다. 24절에 따르면 지하수는 그대로 보존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땅을 파서 그 물을 먹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파라오는 이 일주일간 무슨 생각을 하며 지냈는지 우리는 알 수없습니다. 다만 충분히 생각하고, 충분히 회개할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흘려 보냈다는 사실을 다음 재앙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둘째, 개구리 재앙입니다. 8:1-15절입니다. 주님은 이집트가 가장 숭배했던 나일강을 피로 변하게 하심으로 그들의 잘못된 믿음과 우상에 대해 징벌하셨습니다. 이제 그 강에서 개구리가 나옴으로써 다시 한번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개구리는 Hassol(여신)이란 여신 숭배의 기념물이었습니다. 개구리들은 이집트의 온 집안 구석구석까지 들어갔습니다. 침실과 침상 위와 화덕과 빵 반죽 그릇에까지 개구리들이 점령했습니다(3). 개구리는 불결한 짐승입니다.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부정한 영 셋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대언자의 입에서 나오니](계16:13). 성령이 비둘기 같은 순결한 영이라면 마귀의 영은 개구리 같은 부정한(unclean) 영입니다. 이는 마귀의 활동이 온갖 더러움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개구리는 육지와 습지를 가리지 않고 거합니다. 악령들 역시 그렇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마술사들도 자기 마술을 써서 이와 같이 행하여 이집트 땅에 개구리를 내었더라.](7). 마술사들은 개구리를 몰아내거나 막거나, 활동하지 못하게 죽이지 못했습니다. 다만 더 많이 만들었습니다. 이는 이 세상의 신인 마귀가 하는 일과 동일합니다. 마귀는 악을 근절하거나 죄를 막지 못합니다. 악의 진행을 단절시킬 수도 없습니다. 마귀가 할 수 있는 일은 죄 위에 죄를, 악에다 악을 더하는 일 뿐입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파라오에게 이르되, 내게 영광이 있나이다. 내가 왕과 왕의 신하들과 왕의 백성을 위하여 어느 때에 간구하여 왕과 왕의 집에서 이 개구리들을 멸하고 그것들이 강에만 있게 하리이까? 하니 그가 이르되, 내일이니라, 하매 모세가 이르되, 왕의 말씀대로 될지니 왕께서 [주]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없음을 아시리이다.](9,10). 모세는 파라오에게 어느 때에 개구리들을 멸하고 몰아내어 드리리이까? 물었는데, 파라오는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보통 사람같은 ‘지금, 오늘, 당장’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파라오는 ‘내일이니라’(10)고 말했습니다. 개구리와 하룻밤만 더 있고 싶어합니다. 죄인들은 죄 가운데서 고통을 받으면서도 지금, 오늘이 아니라 내일을 찾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해결책을 받아 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분께서 이르시되, 받을 만한 때에 내가 네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하셨음이니, 보라, 지금이 받아 주시는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죄인들에게 내일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내일이 오면 그는 다시 내일을 외칠 것이고, 또 내일을 외치다가 결국 죽습니다. 세상 어떤 사람도 내일을 살 수없고, 내일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오늘 살다 오늘 죽습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개구리와 하룻밤만 더 잠을 자려한 파라오처럼 죄와 차마 헤어지기 싫어하는 영혼들은 내일을 찾습니다. 솔로몬이 말하기를, [너는 내일을 자랑하지 말라. 이는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라.](잠27:1).

1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잠시 /재앙이/ 연기된 것을 볼 때에 파라오가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았더라.](15). 파라오는 주의 은혜로 쏟아지던 재앙이 잠시 연기되었을 때 자신의 마음을 회심하지 않고 오히려 안심하였습니다. 이는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의 마음이 지닌 공통적인 문제입니다. 믿는 성도들 가운데도 이런 분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환난과 고통, 괴로움 속에서는 기도하고, 고민하고, 울부짖다가 어느덧 그것이 지나가면 자신의 신앙과 삶을 돌아보는 성찰을 통해 믿음의 성장과 성숙을 이루는 대신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 잊어버립니다. 파라오와 같이 잠시 연기된 재앙을 완전히, 영원히 피한 것처럼 살아갑니다. 주님께서 주신 자기 성찰과 회개의 기회를 무시하고, 육신의 정욕을 채우는 기회로 삼아 버립니다. 우리는 파라오와 같은 죄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하여 육신에게 기회를 주지 말라.](롬13:14). [형제들아, 너희가 부르심을 받아 자유하게 되었으니 오직 자유를 육신의 기회로 쓰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라.](갈5:13).

어떤 성도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환란을 당하자 주님 앞에 서원 기도를 하며 메달립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면 자신이 한 기도를 다 잊어버립니다. 어떤 분들은 죄의 찔림이 오면 회개를 하지 않고 고민을 하거나 갈등을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덧 마음이 평안해지면 회개하려는 마음이 다 사라지고, 잊어버리고 맙니다. 성도들이 가장 자주 속는 것 가운데 하나는 죄와의 갈등을 죄와의 전쟁으로 잘못 아는 것입니다. 죄와 갈등하던 성도가 평안을 얻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고, 은혜가 내 마음을 다스리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죄에게 항복하는 것입니다. 자포 자기 하면 분명히 평안이 옵니다. 죄수들은 감방 안에서는 평안합니다. 개는 묶인 줄의 범위 내에서만 움직일 때는 평안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죄와 갈등하다가, 죄와 싸우다가 포기하면 평안을 누립니다. 이것은 참된 평안이 아닙니다. 이것은 거짓 평안이며, 육신에게 기회를 준 것입니다. 전쟁터를 누비던 군사가 포로로 잡혀서 수용소에 들어가면 잠시는 평안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동안입니다. 포로가 되어서 너무 편하다! 이렇게 말하는 바보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많은 성도들은 이런 삶을 승리한 신앙 생활이라고 공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잠시 심판이 연기된 것을 이제 완전한 평화가 찾아 왔다고 하는 것이나, 죽음을 앞둔 포로가 전선(戰線)에서 보다는 안전하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바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의 성도들은 죄의 포로가 되어서, 마귀의 올무에 걸린 채, 육신의 정욕대로 살면서 평안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어떻게 분별해야 합니까? 마음에 찔림이 오고, 양심의 가책이 오고, 어떤 갈등들을 겪을 때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주시는 승리를 맛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찾아온 모든 평안은 다 거짓입니다. 몸부림치며 죄와 싸운적도 없고, 금식과 눈물로 통회한 적도 없고,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그 말씀의 빛과 인도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평안이 찾아왔다면 그는 타협한 것이며, 죄에게 속은 것이며, 마귀에게 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 생활을 하면서 경험적으로 그런 사실을 수없이 반복해서 겪었을 것입니다. 그런 평안은 잠시 후에 닥칠 재앙과 심판을 잊게 해 주는 마약과도 같은 것입니다. 파라오는 첫 번째 재앙을 당한 후 일주일, 두 번째 재앙을 당한 후 잠시 동안 평안을 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끝까지 싸워서 승리를 쟁취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겨야 하며, 성령의 칼을 사용해서 싸워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치고 낙담한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였노라.](히12:4).

세 번째 재앙은 땅의 티끌을 이로 만드는 재앙이었습니다. 8:16-19절입니다. 이 재앙은 앞의 두 재앙과는 달리 아무런 사전 경고없이 임했습니다. 이것을 갑작스런 패망이라고 합니다. 심판은 결코 졸지 않습니다. 주님은 땅의 티끌(dust)로 모든 동물들을 종류대로 다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모세의 지팡이로 단순히 땅을 내려치시기만 해도 무엇이든지 만드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을 낳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에서 있었던 창조 행위와 동일한 것입니다. 마귀는 생명을 낳을 수도 있고, 짐승에게 생명을 불어넣을 수도 있지만 창조는 할 수 없습니다. 이 재앙은 이집트 사람들의 몸에 달라붙는 재앙이었습니다. 옷과 몸, 머리에 이가 득실거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집트의 제사장들은 거의 매일 목욕을 하고 면도를 했으며, 삼일마다 머리를 깎았습니다. 옷 역시 정결하게 입었습니다. 이들은 불결하게 신전의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몸과 옷과 머리 속에 이가 득실거림으로 자신들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동물들에게도 이가 득실거렸는데 이런 동물들은 신전의 희생 제물로 드릴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아담이 범죄로 땅을 저주하신 사실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론을 통해 모세의 지팡이로 저주받은 땅을 치셨는데, 이가 나왔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셔서 이 땅을 고쳐 주시기 전까지 이 땅에 어떤 소망도 둘 수 없습니다.

18,19절은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마술사들이 자기 마술로 이와 같이 행하여 이를 내려 하였으나 하지 못하였더라. 그러므로 사람과 짐승에게 이가 있었더라. 마술사들이 파라오에게 이르되, 이것은 하나님의 손가락이니이다, 하나 파라오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았더라.](18-19). 세 번째 이적은 마술사들이 흉내낼 수 없었습니다. 마귀는 모방의 천재입니다. 모든 면에서 주님을 따라하지만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마술사들은 파라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손가락이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은 창조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주의 하늘들 곧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작품과 주께서 규정하신 달과 별들을 내가 깊이 생각하오니](시8:3). 이집트의 궁중 마술사들이었던 얀네와 얌브레는 세 번째 이적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 이적은 이들은 다신주의에서 유일신 신앙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최소한 이시스, 오리시스, 라, 호러스, 셉, 넛, 비엘세붑과 같은 신들이 창조주가 아니란 사실은 분명하게 알았으며, 하나님은 그들 신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의 소유자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은 율법을 기록하신 손가락이며(출31:8), 연회에서 주님의 기명을 가져다가 하나님을 모독하던 벨사살 왕의 궁정 벽에 심판을 기록하신 손가락이며(단5:5), 간음하던 여인을 현장에 잡아와 예수님을 시험한 원수들을 물리친 손가락입니다(요8).

우리는 주님께서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내쫓으심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우리 마음속에 임하게 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내쫓는 것이면 분명히 하나님의 왕국이 너희에게 임한 것이니라.](눅11:20).

주님의 손가락은 창조하시는 손가락이며, 말씀을 기록하시는 손가락이며, 마귀를 내어쫓는 전쟁하는 손가락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싸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주]를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 내 손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며 내 손가락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는도다.](시144:1).

“이것은 하나님의 손가락이니이다.” 이것은 비록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술사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하나님께 합당한 반응입니다. 주님은 장차 다시 오실 때 모든 원수들의 입에서 이런 고백을 받으실 것입니다. 마귀 역시 자기 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고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 까닭은 기록된바,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굴복하겠고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하였기 때문이니라.](롬14:11). [또 모든 혀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11).

주님은 영광스런 승리를 쟁취하십니다. 주님은 모세와 아론을 통해 얀네와 얌브레를 통해 역사하는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하는 일꾼들을 통해 마귀의 사역자들을 깨뜨리시고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파라오 앞에서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얀네와 얌브레가 자꾸 똑 같이 따라했습니다. 지팡이를 뱀으로 바꾸는 일, 물을 피로 바꾸는 일, 강에서 개구리를 내는 일에서 자꾸 딴지를 걸어 왔습니다. 이것은 마귀가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방해하는 가장 전형적인 수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들의 행위는 ‘너희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나만이 가진 독보적인 능력인 줄 알았는데,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더 자연스럽게 그런 일을 행할 때 신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불신에 빠지거나 낙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누구는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했다고 간증하는데, 그것을 듣던 사람이 ‘나는 노력해서 했다’고 한다면 힘이 빠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는 기도하지 않아도 그런 일은 할 수 있어!, 아니 더 잘 할 수 있어!’라고 할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면에서 전적으로 독특한 능력을 소유한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능력을 세상 사람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한 것과 육신의 능력으로 한 것은 같아 보여도 전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것이 사업이든, 학업이든, 교회 사역이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복을 주시고, 은혜를 통해서 이룬 결과와 나의 피땀으로 이룬 결과는 사람들이 볼 때는 같아도 그 원천, 근원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모양이 같은 그릇이라도 재질이 다르고 용도가 다르고, 가치가 다르듯이 주님의 손길과 세상의 손길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얀네와 얌브레가 강하고 위대할수록 모세와 아론은 더욱 강하고 위대해질 것이며, 그들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은 더욱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어려운 일, 힘든 일을 당할 때 감사해야 합니다. 적의 성장이 곧 나의 성장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실체를 인정해야 합니다. 마귀의 지혜와 간교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마귀의 사역자들, 세상에 속한 자들의 지혜와 능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적의 실체를 무시한다고 내가 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하는 대신 우리는 철저히 주님 앞에 무릎꿇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드러나게 되고, 원수들의 입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손가락이니이다.’ 고백하는 승리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했습니다. 파라오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에게 경고와 훈계를 주었습니다. 이것이 참된 승리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승리자의 인생을 살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법과 얄팍한 술수가 판을 치는 지금의 세대에서 교회와 성도들마저 그런 부류의 사람들로 전락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으로 가장하고, 자신의 육신의 힘과 지혜를 주의 은혜와 능력으로 가장해서는 안됩니다. 교회에는 세상보다 더 얄팍한 위선과 가식이 판을 칩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손길을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