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 02일- 출애굽기
출애굽기(XXII)
말씀: 출애굽기 7:8-14
요절: 출애굽기 7:10
22. 주께서 명령하신대로
우리는 영적 전쟁을 할 때 육신이 얼마나 무익하고 쓸모없는가?를 깊이 배우고 체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육신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무너질수록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들의 영적 일대기를 살펴볼 때 하나님 앞에서 육신을 처리하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과 시험을 당하고 패배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패배를 통한 승리, 죽음을 통한 생명, 십자가를 통한 부활과 같은 이런 간단한 성경의 원리는 신구약을 구별하지 않는 하나님의 영적 법칙이요, 우리가 반드시 익혀야 할 기본적인 진리입니다. 성도들이 즐길 수 있는 영적인 복의 정도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승리의 정도에 비례합니다. 하나님께 철저히 정복당하면 당할수록,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면 드릴수록, 깨어지면 깨어질수록 우리는 더 행복합니다. 육신의 힘은 언제나 영혼의 위협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던 십자가는 저와 여러분이 죽은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손실, 거절, 수치, 배척, 연약함등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었던 말인 동시에 저희들에게 붙은 말입니다. 죄인들을 구원해 주는 십자가는 죄인들을 먼저 죽음으로 이끄는 십자가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모세와 아론은 이제 파라오와 본격적인 영적 전투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10, 20절은 이들이 어떻게 전쟁을 치르며 승리하는가? 에 대해 한 마디로 요약해 주는 말이 있습니다. [주께서 명령하신대로 행하여](10,20). 이것이 처음이요, 이것이 마지막이며, 이것이 성도의 삶에 전부입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지혜가 뛰어난 사람은 지혜를 버려야 합니다. 힘이 넘치는 사람은 그 힘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그 돈이 아무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사람들은 ‘주께서 명령하신대로’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한 것들만 받으십니다. 주님은 살아 있는 양이 아니라 제단에서 피흘려 죽은 양을 받으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육신이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육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처리된 사람만 받으십니다. 온전한 순종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의 재능, 우리의 인격, 우리의 소유, 우리의 모든 것은 다 먼저 십자가를 통과해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혜로 하나님을 돕고 싶어하는 듯이 보입니다. 오늘날 죄인들은 교회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힘으로 교회를 먹여 살리고, 떠받들고 있는 듯이 생각합니다.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재물로 주님을 도와주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이미 정죄하시고 무용하다고 선언하신 육적인 것들에 너무 높은 평가를 매깁니다. 오늘날 강단에서 흔히 행해지는 설교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모세의 학문과 지혜를 주님이 사용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집트에서 배운 모세의 학문과 지혜가 쓸모 없어졌을 때 주님은 모세를 사용하셨습니다. 흔히 강단에서 주님은 사도 바울의 학문과 지혜를 주님이 사용하셨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배운 학문과 지혜를 손실로 여기고, 똥으로 여겼을 때 주님은 그를 들어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십자가에 처리함으로써 그것들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8-10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파라오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를 위해 기적을 보이라, 하거든 너는 아론에게 이르기를, 네 막대기를 가져다가 파라오 앞에 던지라, 하라. 그것이 뱀이 되리라, 하시니라.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에게 들어가 [주]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아론이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 앞에서 자기의 막대기를 던졌더니 뱀이 되니라.](8-10). 주님은 모세와 아론이 해야 할 일을 빈틈없이 일러 주셨습니다. 주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한 파라오는 기적을 행해 보라고 제안했습니다. 주님이 주신 첫 번째 표적은 모세의 손에 든 막대기를 뱀이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뱀 신을 숭배했습니다. 파라오의 머리 위에는 항상 뱀의 문형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모세의 손에 든 지팡이가 뱀이 된다는 것은 모세가 뱀을 마음대로 잡고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파라오와 이집트가 숭배하는 뱀이 실상 모세에게는 손에 든 지팡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뱀을 짓밟을 수도 있고,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뱀과 전갈을 밟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압할 권능을 주노니 어떤 방법으로도 너희를 해칠 것이 전혀 없으리라.](눅10:19).
생각해 보십시오. 파라오가 두려워하고 섬기는 뱀을 모세는 손에 들고 지팡이로 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귀를 언제나 충분히 제압하시고, 자신의 뜻대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밀까불 듯이 까불었던 마귀, 욥을 쥐고 흔들었던 마귀지만 하나님은 그를 코에 낚시 바늘을 걸고, 턱을 꿸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욥41:2). 하나님은 새장 속의 새를 갖고 놀 듯이 마귀를 갖고 노실 수 있습니다(욥41:5).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지팡이를 던져 뱀을 만드심으로 이런 진리를 파라오에게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주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순종입니다. 주께 복을 받은 성도들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기 생각이나 자기 고집을 버리고 주의 명령대로 순종한 사람들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노아는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더라.](창6:22), [노아가 [주]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더라.](창7:5). 방주를 만드는 일이나 파라오 앞에서 지팡이를 던지는 일이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잔치 집의 빈 통에 물을 갖다 붓는 일이나 명령하신 대로 행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을 맛보고 동참하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선별적 순종은 불순종입니다. 자기 생각이 들어간 순종은 반역입니다. 출애굽 40년의 여정에서 모세가 한 가장 큰 실수는 바로 주께서 명령하신 대로에 자기 생각을 더한 일이었습니다. 민20:8 vs 11을 비교해 볼 것. [너는 막대기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집회를 함께 모으고 너희는 그들 앞에서 반석에게 말하라. 그리하면 그것이 자기 물을 내리니 너는 그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그들에게 주어 회중과 그들의 짐승으로 하여금 마시게 할지니라, 하시니](민20:8), vs [손을 들어 그 막대기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민20:11). 이것은 주님의 명령대로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사울 왕이 왜 망했습니까? 그는 선별적으로 순종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주님의 명령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자신이 나름대로 이해하고, 소화한 방식으로 실행한 사람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그런 사람이야말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고 말할지 몰라도 주님은 그런 그를 버리셨습니다. 사무엘상 15:18-24참조. 사울은 자신이 ‘주의 목소리에 순종했다고 주장합니다.’(삼상15:20). 그러나 주님은 그가 불순종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무엘과 사울의 시각이 얼마나 다른지 보십시오. 이것이 영적인 그리스도인과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차이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과 불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의 차이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자아는 십자가에 처리되기 전까지 이런 진리를 배우지 못합니다. 대부분은 사울과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면 당당히 외칩니다. [내가 [주]의 명령을 수행하였나이다,](삼상15:13).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참고 교본으로 생각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기록된 대로, 성경대로, 주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다 행하며 살 수 있는가?” 이것은 오늘날 현대 교회의 교인들의 머리와 마음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사고 방식입니다. 그래서 대충 말씀대로 행하고, 자기 이득을 다 챙기면서 사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이에 파라오도 지혜자들과 마법사들을 부르매 이때에 이집트의 마술사들도 자기 마술로 비슷하게 행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각각 자기 막대기를 던지매 그것들이 뱀이 되었음이라. 그러나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막대기들을 삼키니라.](11-12). 모세와 아론이 행한 기적을 본 파라오는 궁중의 지혜자들과 마법사들을 불렀습니다. 디모데후서 3:8에 따르면 이들의 이름은 얀네와 얌브레입니다. 하나님의 이적은 항상 완전한 말씀과 함께 증거됩니다. 반면 마귀의 표적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의 능력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마귀는 하늘에서 불을 내릴 수 있고, 큰 표적과 이적을 행할 수 있으며,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계13:4). 마귀는 주님 앞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한 번 보여 준 적이 있습니다. [또 마귀가 그분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순식간에 세상의 모든 왕국들을 보여 주며](눅4:5). 그는 순식간에(in a moment)에 세상의 모든 왕국들을 보여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교회와 성도들이 마귀의 미혹에 빠져들지 않도록 늘 깨어 있고, 기도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집트의 마술사들은 이런 능력들로 인해 신들로 추앙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출12:12, 18:11).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막대기들을 삼킨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파라오의 신이 되게 하신 약속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거부하고 반역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능력의 비슷함을 모조하여 인간을 기쁘게 함으로써, 죄인들의 마음을 안심시키고, 주님 두려워 하기를 막는 행위가 훨씬 악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의 빛을 거부한 죄인들에게 강한 미혹의 영을 보내시는데, 파라오 역시 그런 경우에 해당됩니다.
13절을 보십시오.[그분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므로 그가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았더라.](13).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은 죄인들의 마음이 주의 권능과 표적을 보고서도 더욱 완악해지는 경우입니다. 죄인들은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회개하기 보다 주님을 원망하고 저주합니다. 마태복음에는 불타는 용광로 속에 던져진 죄인들이 거기서 무엇을 하는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타는 용광로 속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통곡하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13:42,50). 요한 계시록에 예언된 대환란 때의 죄인들은 무엇을 하는지 보십시오. [또 자기의 아픔과 헌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모독하고 자기 행실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계16:11). [또 무게가 각각 일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에서 나와 사람들 위에 떨어지매 사람들이 그 우박의 재앙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모독하니 이는 그 재앙이 지극히 크기 때문이더라.](계16:21). 그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몸이 상하고, 아프고, 재앙으로 망할 때 마음은 더욱 완악해집니다.
마음의 완악함은 치유할 수 없는 병입니다. 흔히 본문의 13절은 로마서 9:18절과 함께 예정론자들이 하나님의 주권과 특별 은총을 강조할 때 자주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그런즉 그분께서 긍휼을 베풀고자 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완악하게 하고자 하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9:18). 이 구절들은 파라오의 죄와 심판에 대한 변명으로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 저희들에게 경고와 훈계로써 주어진 말씀입니다. 주님이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기 전에 파라오가 자신의 마음을 완악하게 함으로서 주님의 진노를 쌓아 올렸습니다. [다만 네가 네 완악함과 뉘우치지 아니하는 마음에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닥칠 진노를 네게 쌓아 올리는도다.](롬2:5). 주님은 파라오의 완악함과 뉘우치지 않는 마음에 따라 심판하셨던 것처럼 누구라도 복음을 거부하고, 마음을 완악하게 한다면 주의 진노를 쌓을 뿐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죄의 속임수로 완악해 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도들 간에 말씀을 통한 영적 교제가 필요합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서로 날마다 권면하여 너희 중에 하나라도 죄의 속임수를 통하여 완악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3:13). 파라오는 곁에 얀네와 얌브레와 같은 마술사들로 인해 더욱 완악해졌습니다. 곁에 요셉을 두었던 파라오나 곁에 다니엘을 두었던 느부갓네살이나 다리오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누구와 교제하는가? 누구와 날마다 대화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마음도 크게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들은 일주일에 최소한 두 번 이상 만남과 모임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이 세상의 죄악의 조류는 그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일주일에 5일 이상 불신자들과 부딪히며 사는데 그 나마 교회의 집회와 모임마저 빠져 버린다면 죄의 속임수를 이기는 일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리 영적이라 해도 재물의 속임수, 죄의 속임수, 모든 불의의 속임수, 사람의 속임수를 다 헤쳐 나가기는 어렵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불신으로 완악해 질 수 있습니다. [그 뒤에 열한 /제자/가 음식 앞에 앉았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것과 마음이 완악(頑惡)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일어난 뒤에 자기를 본 자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아니하였음이더라.](막16:14). 파라오가 완악해 진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습니다. 불신은 아무리 성품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마음을 완악하게 만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히3:8,15, 4:7).
지금 이 시간 설교가 귀에 들리지 않고, 마음에 받아 들여지지 않고, 교회의 모임이 점점 멀어지고, 성경이 읽히지 않고, 기도가 게을러지고, 입을 열어 전도를 한 적이 없고, 어리석은 생각이 나를 사로잡고, 앞날이 걱정되고, 기타 등등...이런 일들이 있을 때 이 시간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고 회개해야 합니다. 예배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영적인 적신호입니다. 교회 가는 것이 피곤하고 힘들고 귀찮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은 완악해진 상태입니다. 성경 공부하는 시간은 빠져도 된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이미 파라오의 마음과 동일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성도들은 지금 부흥이 필요한 때입니다. 예레미야 4:3, [[주]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너희의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지 말라.](렘4:3).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일은 우리의 책임이요,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로 거두며 너희의 묵은 땅을 부술지니 이는 지금이 곧 [주]를 찾을 때이기 때문이라. 마침내 그분께서 오사 의를 비같이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10:12). 죄인들에게 복음이 필요한 것과 같이 성도들에게는 부훙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부흥이 필요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파라오의 마음이 완악하여 백성이 가는 것을 거부하는도다.](14). 모세와 아론이 일으키는 표적을 통해서 파라오는 아무 것도 배운 것이나 깨달은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표적을 보면 다 믿을 것 같지만 실제로 표적은 아무에게도 믿음을 주지 못합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만 옵니다. 표적은 복음 전파의 보조 수단이지 그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오랫동안 머물며 {주} 안에서 담대하게 말하매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이적을 행하게 하사 은혜의 말씀에 증거를 주시니라.](행14:3).
하나님은 파라오가 주의 말씀을 계속 거부하자 본격적으로 재앙의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말씀을 통해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심판을 통해 주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파라오가 아무리 고집이 세고 완악해도 주님을 이기거나 주님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10:13절에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서 네 자신을 낮추기를 거부하겠느냐?](출10: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끝까지 하려면 해 보라는 주님의 도전입니다. 얼마든지 버텨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이런 고집을 피우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면 다시는 교회를 안 간다느니, 다시는 성경을 안 본다느니, 다시는 기도를 안 한다느니 별 소리를 다 해댑니다. 마치 어린애가 자기가 잘못해 놓고 부모에게 금식을 선포하거나 입을 닫고 무언의 시위를 하며 협박하는 꼴입니다. 마음 약한 엄마들은 그런 꼼수를 알면서도 넘어가기도 하고 저 주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완악한 성도들과 죄인들의 어떤 요구나 협박, 꼼수에도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타협에 응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순종을 원하시지 협상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속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임이라.](갈6:7). 불순종에는 순종 외에 달리 대안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순종을 대체할 수 있는 선행이나 의로운 행위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은 그것을 순종하기 전까지 절대로 마음의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을 꺾기 위해서 선교사를 지원하거나, FULL TIME 사역을 지원하거나, 가진 재산을 다 바치거나, 이런 저런 봉사 활동을 하거나, 그 무엇을 해도 순종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성경 읽기를 명하시면 성경을 읽어야 하고, 전도를 명하시면 전도를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자신의 뜻을 계시해 주시면 거기에 순종해야지 불순종한 후에 다른 무엇으로 그것을 보충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 부르심을 거절하고 자신이 생각했던, 자신의 뜻대로 삶을 살아갑니다. 그들은 단지 교회 생활 잘 하는 것 이상으로는 주님의 뜻을 행하려 하지 않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 않지만 실생활을 들여다보면 주님은 내 삶의 목적과 중심이 아니라 주변의 언저리에 머물며 나의 성공과 성취를 도와주는 도구로 전락해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는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나는 주님의 뜻을 이루는 종이 아니라 주님이 나의 뜻을 이루어 주는 강력한 후원자’로 만들어 두고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기도의 형식으로 내가 지시해 둔 사항들, 내가 미리 부탁해 둔 많은 것들을 차질없이 수행해야 하는 비서관처럼 되어 있습니다. 어느덧 나는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주님은 나의 종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는 주께서 명령하신대로 행하는 모세와 주께서 명령하신 것을 거뷰한 파라오를 통해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님을 주님의 위치와 지위에 두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마땅히 나의 주인으로, 만유의 주로 섬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은 모든 일에서 온전히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고 공부한다고 하면서 ‘자기 사랑, 자기 연민, 자기 추구, 자기 신뢰, 자기 의, 자기 발전, 자기 방어, 자기 만족’ 등 모두 자기(자아)가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경건한 종교심과 육신의 열심을 자극할 수 있지만 결코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시간 저희 안에 두신 성령을 통해 우리의 육신을 온전히 십자가에 못박고, 자아를 처리하도록 촉구하십니다. 주님은 무엇이든지 주의 명령대로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그 앞에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기를 거부하는 성도들은 종교적인 만족과 자기 열심을 헌신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교수대나 전기 의자에 앉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듯이 십자가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십자가를 미화하여 그 길이 황금과 꽃이 깔린 길로 생각을 하는 듯 하지만 십자가의 길은 고난과 반발, 손실의 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고 요구하십니다. 여기에 무슨 기쁨과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다만 드린 후에 얻어지는 열매를 통해서 기쁨을 얻겠지만 드리기 전에는 고뇌와 번민으로 가득 차게 마련입니다. 드린 후에는 간증이 있겠지만 드리기 전에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비장한 결심과 단호한 의지가 필요한 법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행동에 따라 주님을 기쁘시게도, 슬프시게도, 잠잠하게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근심시킬 수 있고, 슬프시게 할 수 있고, 소멸시킬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순종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영적인 승리도 맛볼 수 없으며, 주님은 우리를 통해 조금의 영광도 받으실 수 없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완전한 순종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부터 이집트와 파라오는 주의 두려우심을 접했습니다. 주의 능력을 접했습니다. 주님은 모세의 능력과 모세의 지혜를 필요로 하신 것이 아니라 모세의 믿음과 순종이 필요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영적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싸움은 단순히 세상적인 태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영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파라오라는 한 개인, 한 인간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파라오를 움직이는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주님 앞에 순복하는 성도가 아니라면 누가 마귀를 대적하여 싸울 수 있겠습니까?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수동적인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강력한 능동적인 활동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성경이 정의하는 사랑은 바로 이것입니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그분의 명령대로 걷는 것이요, 명령은 이것이니 곧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 안에서 걸으라 하는 것이라.](요이1:6).
출애굽기(XXII)
말씀: 출애굽기 7:8-14
요절: 출애굽기 7:10
22. 주께서 명령하신대로
우리는 영적 전쟁을 할 때 육신이 얼마나 무익하고 쓸모없는가?를 깊이 배우고 체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육신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무너질수록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들의 영적 일대기를 살펴볼 때 하나님 앞에서 육신을 처리하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과 시험을 당하고 패배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패배를 통한 승리, 죽음을 통한 생명, 십자가를 통한 부활과 같은 이런 간단한 성경의 원리는 신구약을 구별하지 않는 하나님의 영적 법칙이요, 우리가 반드시 익혀야 할 기본적인 진리입니다. 성도들이 즐길 수 있는 영적인 복의 정도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승리의 정도에 비례합니다. 하나님께 철저히 정복당하면 당할수록,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면 드릴수록, 깨어지면 깨어질수록 우리는 더 행복합니다. 육신의 힘은 언제나 영혼의 위협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던 십자가는 저와 여러분이 죽은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손실, 거절, 수치, 배척, 연약함등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었던 말인 동시에 저희들에게 붙은 말입니다. 죄인들을 구원해 주는 십자가는 죄인들을 먼저 죽음으로 이끄는 십자가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모세와 아론은 이제 파라오와 본격적인 영적 전투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10, 20절은 이들이 어떻게 전쟁을 치르며 승리하는가? 에 대해 한 마디로 요약해 주는 말이 있습니다. [주께서 명령하신대로 행하여](10,20). 이것이 처음이요, 이것이 마지막이며, 이것이 성도의 삶에 전부입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지혜가 뛰어난 사람은 지혜를 버려야 합니다. 힘이 넘치는 사람은 그 힘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그 돈이 아무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사람들은 ‘주께서 명령하신대로’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한 것들만 받으십니다. 주님은 살아 있는 양이 아니라 제단에서 피흘려 죽은 양을 받으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육신이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육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처리된 사람만 받으십니다. 온전한 순종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의 재능, 우리의 인격, 우리의 소유, 우리의 모든 것은 다 먼저 십자가를 통과해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혜로 하나님을 돕고 싶어하는 듯이 보입니다. 오늘날 죄인들은 교회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힘으로 교회를 먹여 살리고, 떠받들고 있는 듯이 생각합니다.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재물로 주님을 도와주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이미 정죄하시고 무용하다고 선언하신 육적인 것들에 너무 높은 평가를 매깁니다. 오늘날 강단에서 흔히 행해지는 설교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모세의 학문과 지혜를 주님이 사용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집트에서 배운 모세의 학문과 지혜가 쓸모 없어졌을 때 주님은 모세를 사용하셨습니다. 흔히 강단에서 주님은 사도 바울의 학문과 지혜를 주님이 사용하셨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배운 학문과 지혜를 손실로 여기고, 똥으로 여겼을 때 주님은 그를 들어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십자가에 처리함으로써 그것들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8-10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파라오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를 위해 기적을 보이라, 하거든 너는 아론에게 이르기를, 네 막대기를 가져다가 파라오 앞에 던지라, 하라. 그것이 뱀이 되리라, 하시니라.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에게 들어가 [주]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아론이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 앞에서 자기의 막대기를 던졌더니 뱀이 되니라.](8-10). 주님은 모세와 아론이 해야 할 일을 빈틈없이 일러 주셨습니다. 주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한 파라오는 기적을 행해 보라고 제안했습니다. 주님이 주신 첫 번째 표적은 모세의 손에 든 막대기를 뱀이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뱀 신을 숭배했습니다. 파라오의 머리 위에는 항상 뱀의 문형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모세의 손에 든 지팡이가 뱀이 된다는 것은 모세가 뱀을 마음대로 잡고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파라오와 이집트가 숭배하는 뱀이 실상 모세에게는 손에 든 지팡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뱀을 짓밟을 수도 있고,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뱀과 전갈을 밟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압할 권능을 주노니 어떤 방법으로도 너희를 해칠 것이 전혀 없으리라.](눅10:19).
생각해 보십시오. 파라오가 두려워하고 섬기는 뱀을 모세는 손에 들고 지팡이로 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귀를 언제나 충분히 제압하시고, 자신의 뜻대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밀까불 듯이 까불었던 마귀, 욥을 쥐고 흔들었던 마귀지만 하나님은 그를 코에 낚시 바늘을 걸고, 턱을 꿸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욥41:2). 하나님은 새장 속의 새를 갖고 놀 듯이 마귀를 갖고 노실 수 있습니다(욥41:5).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지팡이를 던져 뱀을 만드심으로 이런 진리를 파라오에게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주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순종입니다. 주께 복을 받은 성도들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기 생각이나 자기 고집을 버리고 주의 명령대로 순종한 사람들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노아는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더라.](창6:22), [노아가 [주]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더라.](창7:5). 방주를 만드는 일이나 파라오 앞에서 지팡이를 던지는 일이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잔치 집의 빈 통에 물을 갖다 붓는 일이나 명령하신 대로 행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을 맛보고 동참하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선별적 순종은 불순종입니다. 자기 생각이 들어간 순종은 반역입니다. 출애굽 40년의 여정에서 모세가 한 가장 큰 실수는 바로 주께서 명령하신 대로에 자기 생각을 더한 일이었습니다. 민20:8 vs 11을 비교해 볼 것. [너는 막대기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집회를 함께 모으고 너희는 그들 앞에서 반석에게 말하라. 그리하면 그것이 자기 물을 내리니 너는 그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그들에게 주어 회중과 그들의 짐승으로 하여금 마시게 할지니라, 하시니](민20:8), vs [손을 들어 그 막대기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민20:11). 이것은 주님의 명령대로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사울 왕이 왜 망했습니까? 그는 선별적으로 순종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주님의 명령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자신이 나름대로 이해하고, 소화한 방식으로 실행한 사람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그런 사람이야말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고 말할지 몰라도 주님은 그런 그를 버리셨습니다. 사무엘상 15:18-24참조. 사울은 자신이 ‘주의 목소리에 순종했다고 주장합니다.’(삼상15:20). 그러나 주님은 그가 불순종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무엘과 사울의 시각이 얼마나 다른지 보십시오. 이것이 영적인 그리스도인과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차이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과 불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의 차이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자아는 십자가에 처리되기 전까지 이런 진리를 배우지 못합니다. 대부분은 사울과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면 당당히 외칩니다. [내가 [주]의 명령을 수행하였나이다,](삼상15:13).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참고 교본으로 생각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기록된 대로, 성경대로, 주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다 행하며 살 수 있는가?” 이것은 오늘날 현대 교회의 교인들의 머리와 마음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사고 방식입니다. 그래서 대충 말씀대로 행하고, 자기 이득을 다 챙기면서 사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이에 파라오도 지혜자들과 마법사들을 부르매 이때에 이집트의 마술사들도 자기 마술로 비슷하게 행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각각 자기 막대기를 던지매 그것들이 뱀이 되었음이라. 그러나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막대기들을 삼키니라.](11-12). 모세와 아론이 행한 기적을 본 파라오는 궁중의 지혜자들과 마법사들을 불렀습니다. 디모데후서 3:8에 따르면 이들의 이름은 얀네와 얌브레입니다. 하나님의 이적은 항상 완전한 말씀과 함께 증거됩니다. 반면 마귀의 표적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의 능력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마귀는 하늘에서 불을 내릴 수 있고, 큰 표적과 이적을 행할 수 있으며,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계13:4). 마귀는 주님 앞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한 번 보여 준 적이 있습니다. [또 마귀가 그분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순식간에 세상의 모든 왕국들을 보여 주며](눅4:5). 그는 순식간에(in a moment)에 세상의 모든 왕국들을 보여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교회와 성도들이 마귀의 미혹에 빠져들지 않도록 늘 깨어 있고, 기도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집트의 마술사들은 이런 능력들로 인해 신들로 추앙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출12:12, 18:11).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막대기들을 삼킨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파라오의 신이 되게 하신 약속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거부하고 반역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능력의 비슷함을 모조하여 인간을 기쁘게 함으로써, 죄인들의 마음을 안심시키고, 주님 두려워 하기를 막는 행위가 훨씬 악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의 빛을 거부한 죄인들에게 강한 미혹의 영을 보내시는데, 파라오 역시 그런 경우에 해당됩니다.
13절을 보십시오.[그분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므로 그가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았더라.](13).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은 죄인들의 마음이 주의 권능과 표적을 보고서도 더욱 완악해지는 경우입니다. 죄인들은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회개하기 보다 주님을 원망하고 저주합니다. 마태복음에는 불타는 용광로 속에 던져진 죄인들이 거기서 무엇을 하는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타는 용광로 속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통곡하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13:42,50). 요한 계시록에 예언된 대환란 때의 죄인들은 무엇을 하는지 보십시오. [또 자기의 아픔과 헌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모독하고 자기 행실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계16:11). [또 무게가 각각 일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에서 나와 사람들 위에 떨어지매 사람들이 그 우박의 재앙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모독하니 이는 그 재앙이 지극히 크기 때문이더라.](계16:21). 그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몸이 상하고, 아프고, 재앙으로 망할 때 마음은 더욱 완악해집니다.
마음의 완악함은 치유할 수 없는 병입니다. 흔히 본문의 13절은 로마서 9:18절과 함께 예정론자들이 하나님의 주권과 특별 은총을 강조할 때 자주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그런즉 그분께서 긍휼을 베풀고자 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완악하게 하고자 하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9:18). 이 구절들은 파라오의 죄와 심판에 대한 변명으로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 저희들에게 경고와 훈계로써 주어진 말씀입니다. 주님이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기 전에 파라오가 자신의 마음을 완악하게 함으로서 주님의 진노를 쌓아 올렸습니다. [다만 네가 네 완악함과 뉘우치지 아니하는 마음에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닥칠 진노를 네게 쌓아 올리는도다.](롬2:5). 주님은 파라오의 완악함과 뉘우치지 않는 마음에 따라 심판하셨던 것처럼 누구라도 복음을 거부하고, 마음을 완악하게 한다면 주의 진노를 쌓을 뿐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죄의 속임수로 완악해 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도들 간에 말씀을 통한 영적 교제가 필요합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서로 날마다 권면하여 너희 중에 하나라도 죄의 속임수를 통하여 완악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3:13). 파라오는 곁에 얀네와 얌브레와 같은 마술사들로 인해 더욱 완악해졌습니다. 곁에 요셉을 두었던 파라오나 곁에 다니엘을 두었던 느부갓네살이나 다리오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누구와 교제하는가? 누구와 날마다 대화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마음도 크게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들은 일주일에 최소한 두 번 이상 만남과 모임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이 세상의 죄악의 조류는 그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일주일에 5일 이상 불신자들과 부딪히며 사는데 그 나마 교회의 집회와 모임마저 빠져 버린다면 죄의 속임수를 이기는 일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리 영적이라 해도 재물의 속임수, 죄의 속임수, 모든 불의의 속임수, 사람의 속임수를 다 헤쳐 나가기는 어렵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불신으로 완악해 질 수 있습니다. [그 뒤에 열한 /제자/가 음식 앞에 앉았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것과 마음이 완악(頑惡)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일어난 뒤에 자기를 본 자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아니하였음이더라.](막16:14). 파라오가 완악해 진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습니다. 불신은 아무리 성품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마음을 완악하게 만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히3:8,15, 4:7).
지금 이 시간 설교가 귀에 들리지 않고, 마음에 받아 들여지지 않고, 교회의 모임이 점점 멀어지고, 성경이 읽히지 않고, 기도가 게을러지고, 입을 열어 전도를 한 적이 없고, 어리석은 생각이 나를 사로잡고, 앞날이 걱정되고, 기타 등등...이런 일들이 있을 때 이 시간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고 회개해야 합니다. 예배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영적인 적신호입니다. 교회 가는 것이 피곤하고 힘들고 귀찮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은 완악해진 상태입니다. 성경 공부하는 시간은 빠져도 된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이미 파라오의 마음과 동일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성도들은 지금 부흥이 필요한 때입니다. 예레미야 4:3, [[주]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너희의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지 말라.](렘4:3).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일은 우리의 책임이요,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로 거두며 너희의 묵은 땅을 부술지니 이는 지금이 곧 [주]를 찾을 때이기 때문이라. 마침내 그분께서 오사 의를 비같이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10:12). 죄인들에게 복음이 필요한 것과 같이 성도들에게는 부훙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부흥이 필요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파라오의 마음이 완악하여 백성이 가는 것을 거부하는도다.](14). 모세와 아론이 일으키는 표적을 통해서 파라오는 아무 것도 배운 것이나 깨달은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표적을 보면 다 믿을 것 같지만 실제로 표적은 아무에게도 믿음을 주지 못합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만 옵니다. 표적은 복음 전파의 보조 수단이지 그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오랫동안 머물며 {주} 안에서 담대하게 말하매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이적을 행하게 하사 은혜의 말씀에 증거를 주시니라.](행14:3).
하나님은 파라오가 주의 말씀을 계속 거부하자 본격적으로 재앙의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말씀을 통해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심판을 통해 주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파라오가 아무리 고집이 세고 완악해도 주님을 이기거나 주님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10:13절에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서 네 자신을 낮추기를 거부하겠느냐?](출10: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끝까지 하려면 해 보라는 주님의 도전입니다. 얼마든지 버텨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이런 고집을 피우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면 다시는 교회를 안 간다느니, 다시는 성경을 안 본다느니, 다시는 기도를 안 한다느니 별 소리를 다 해댑니다. 마치 어린애가 자기가 잘못해 놓고 부모에게 금식을 선포하거나 입을 닫고 무언의 시위를 하며 협박하는 꼴입니다. 마음 약한 엄마들은 그런 꼼수를 알면서도 넘어가기도 하고 저 주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완악한 성도들과 죄인들의 어떤 요구나 협박, 꼼수에도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타협에 응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순종을 원하시지 협상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속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임이라.](갈6:7). 불순종에는 순종 외에 달리 대안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순종을 대체할 수 있는 선행이나 의로운 행위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은 그것을 순종하기 전까지 절대로 마음의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을 꺾기 위해서 선교사를 지원하거나, FULL TIME 사역을 지원하거나, 가진 재산을 다 바치거나, 이런 저런 봉사 활동을 하거나, 그 무엇을 해도 순종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성경 읽기를 명하시면 성경을 읽어야 하고, 전도를 명하시면 전도를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자신의 뜻을 계시해 주시면 거기에 순종해야지 불순종한 후에 다른 무엇으로 그것을 보충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 부르심을 거절하고 자신이 생각했던, 자신의 뜻대로 삶을 살아갑니다. 그들은 단지 교회 생활 잘 하는 것 이상으로는 주님의 뜻을 행하려 하지 않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 않지만 실생활을 들여다보면 주님은 내 삶의 목적과 중심이 아니라 주변의 언저리에 머물며 나의 성공과 성취를 도와주는 도구로 전락해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는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나는 주님의 뜻을 이루는 종이 아니라 주님이 나의 뜻을 이루어 주는 강력한 후원자’로 만들어 두고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기도의 형식으로 내가 지시해 둔 사항들, 내가 미리 부탁해 둔 많은 것들을 차질없이 수행해야 하는 비서관처럼 되어 있습니다. 어느덧 나는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주님은 나의 종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는 주께서 명령하신대로 행하는 모세와 주께서 명령하신 것을 거뷰한 파라오를 통해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님을 주님의 위치와 지위에 두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마땅히 나의 주인으로, 만유의 주로 섬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은 모든 일에서 온전히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고 공부한다고 하면서 ‘자기 사랑, 자기 연민, 자기 추구, 자기 신뢰, 자기 의, 자기 발전, 자기 방어, 자기 만족’ 등 모두 자기(자아)가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경건한 종교심과 육신의 열심을 자극할 수 있지만 결코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시간 저희 안에 두신 성령을 통해 우리의 육신을 온전히 십자가에 못박고, 자아를 처리하도록 촉구하십니다. 주님은 무엇이든지 주의 명령대로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그 앞에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기를 거부하는 성도들은 종교적인 만족과 자기 열심을 헌신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교수대나 전기 의자에 앉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듯이 십자가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십자가를 미화하여 그 길이 황금과 꽃이 깔린 길로 생각을 하는 듯 하지만 십자가의 길은 고난과 반발, 손실의 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고 요구하십니다. 여기에 무슨 기쁨과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다만 드린 후에 얻어지는 열매를 통해서 기쁨을 얻겠지만 드리기 전에는 고뇌와 번민으로 가득 차게 마련입니다. 드린 후에는 간증이 있겠지만 드리기 전에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비장한 결심과 단호한 의지가 필요한 법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행동에 따라 주님을 기쁘시게도, 슬프시게도, 잠잠하게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근심시킬 수 있고, 슬프시게 할 수 있고, 소멸시킬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순종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영적인 승리도 맛볼 수 없으며, 주님은 우리를 통해 조금의 영광도 받으실 수 없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완전한 순종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부터 이집트와 파라오는 주의 두려우심을 접했습니다. 주의 능력을 접했습니다. 주님은 모세의 능력과 모세의 지혜를 필요로 하신 것이 아니라 모세의 믿음과 순종이 필요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영적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싸움은 단순히 세상적인 태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영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파라오라는 한 개인, 한 인간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파라오를 움직이는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주님 앞에 순복하는 성도가 아니라면 누가 마귀를 대적하여 싸울 수 있겠습니까?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수동적인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강력한 능동적인 활동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성경이 정의하는 사랑은 바로 이것입니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그분의 명령대로 걷는 것이요, 명령은 이것이니 곧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 안에서 걸으라 하는 것이라.](요이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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