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 16일- 출애굽기
출애굽기(XX)
말씀: 출애굽기 6:9-30
요절: 출애굽기 6:29
20. 파라오에게 다 고하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불신에 빠져 불평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파라오를 향해 두 마디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는 주라. 내가 하리라(I am, I will)]. [나는 주라. 내가 하리라(I am, I will)]는 말씀은 모세가 승리할 있는 필요 충분 조건입니다. 주님이 절망과 실의에 빠진 성도를 돕는 방법은 첫째, 자신의 이름을 알게 하시고, 계시하십니다. I am the LORD.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기억하면 문제가 크게 보이지 않습니다. 둘째,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게 합니다(성경의 기록된 말씀). 주님께서 성도들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두신 언약의 말씀들을 주십니다. 이것들을 붙들게 하심으로 마음 가운데 확신과 위로를 주십니다. 셋째,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I will-성경의 예언의 말씀). 주님은 “내가 ...하리라” 약속하심으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이 때 우리에겐 믿음과 더불어 인내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 일관되게 계시된 주님의 일하시는 방법이며, 성도들을 돕는 방법입니다.
많은 경우에 성경의 위대한 가르침, 주님의 위대한 선포는 전하는 사람들이나 듣는 사람들의 불신과 냉소로 인해 그 능력과 권위와 위엄이 형편없이 떨어지고 맙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라면 그것은 주님의 임재 앞에서 듣는 말씀과 동일한 권위와 능력이 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열광하고 흥분하고 슬퍼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을 보면 과연 살아 있구나란 생각이 절로 듭니다. 하지만 그들이 강단 앞에만 오면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눈물이 없고, 흥분이 없고, 감동이 없고, 슬픔이 없다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까? 산 사람입니까? 불신은 우리의 영적 감정을 0(zero)로 만들어 버립니다. 불신은 우리의 귀를 막기 때문에 말씀에 반응하지 못합니다. 불신은 우리의 입을 막기 때문에 우리를 벙어리로 만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아있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기에 파라오의 권세 앞에서 풀이 죽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즉시 증거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나 영의 고통과 잔인한 속박으로 인하여 그들이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9). 주님은 1-8절의 말씀들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누구이신지 계시해 주셨고, 언약을 기억하시며, 내가 하리라를 무려 7차례나 반복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말씀이 증거되어도 듣지 않고 믿지 않는데는 아무런 능력도 효력도 없습니다.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단 한 명의 회심자도 얻지 못했고, 단 한 명도 영적 부흥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설교자와 설교의 능력이 모든 것을 결판 짓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죄인들은 자신들의 죄가 제거된 후에야 말씀이 귀에 들어올 것 같습니다. 영의 고통과 속박이 풀리면 모세의 말을 들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듣고 믿어야 영의 고통과 잔인한 속박이 풀립니다. 증거의 말씀을 듣고 믿을 때 죄는 해결됩니다. 사람들은 흔히 문제가 해결되면 주의 말씀을 잘 믿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귀는 끊임없이 문제들을 일으킵니다. 가정 문제, 학교 문제, 직장 문제, 자녀 문제....끝이 없습니다. 한 가지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며, 어디선가 또 한 가지 문제가 터집니다. 이때 주님은 자신의 종들을 보내 말씀을 증거 하지만 사람들의 귀에 그 말씀은 도무지 들리지 않습니다. 교회에 와서 앉아 있어도 몸만 있을 뿐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교인 중의 99% 이상은 월요일이 되면 어제들은 설교 제목이나 본문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죄와 속박에 메여 주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면 될수록, 고통이 있으면 있을수록, 잔인한 속박이 나를 옭아 메면 멜수록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겠다고 결심하십시오. 그리고 주의 약속의 말씀을 펼치고,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제시하신 문제 해결의 방법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나 영의 고통과 잔인한 속박으로 인하여 그들이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9).
10-11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들어가서 이집트 왕 파라오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그의 땅에서 내보내어 가게 하라고 말하라, 하시니](10-11). 주님은 파라오에게 들어가서 증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전처럼 말씀을 다 빼먹고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위엄있게, 담대하게 증거해야 합니다.
말씀을 증거하는 것은 영적인 힘을 회복하는 지름길입니다. 주님은 먹을 것이 없고, 목이 말라 지치셨을 때 말씀을 증거하심으로 힘을 얻으셨습니다.
* 요한복음 4:6과 32을 비교해 보라. 주님은 지치셨다(4:6)---말씀을 전하셨다--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느니라(4:32-34).
말씀을 증거하는 것은 영적 교제(친교)를 회복하는 지름길입니다.
* 솔로몬의 아가 5:8(그녀는 주님이 어디 있는지 몰랐다. 친교를 잃어버림)--주님을 증거했다(10-16)--6:2(주님을 곧바로 찾았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지 않는다고 해서 일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이집트의 왕 파라오에게 가서 말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영적으로 살아날 수 있는 길입니다. 모세가 영적인 양식을 얻고, 주님과의 친교를 확고히 하는 길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지치고 힘든 일이 있다면 말씀을 증거해 보십시오. 전도지를 들고 나가서 복음을 전해 보십시오. 사람들을 붙들고 예수님을 증거해 보십시오. [너는 말씀을 선포하라. 때에 맞든지 맞지 아니하든지 항상 예비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딤후4:2). 저와 여러분은 말씀을 선포해야 하고, 책망해야 하고, 꾸짖어야 하고, 권면해야 합니다. 모세가 파라오에게 인정을 구하고, 동정과 연민을 구할 필요가 없듯이 우리는 죄인들에게 복음을 믿어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을 책망하며 꾸짖으며 권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결코 가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하는 진리의 말씀은 권위있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주]라. 너는 내가 네게 이르는 바를 이집트 왕 파라오에게 다 고하라, 하시니](29). 주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명하셨습니다. 모세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하나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선포해야 합니다. 사도들은 이 점에서 준비된 일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위협을 당하고, 맞으며너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보고 들은 것들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기 때문이라, 하매](행4:20). 이것이 곧 증인의 자세입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이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처음부터 자신보다 신분이나 지위가 훨씬 높은 사람에게 증거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모세 역시 처음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는 내가 지금까지 회피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너희에게 밝히 말하였음이라.](행20:27). 오늘날 교회의 모든 목회자들은 성경을 부지런히 공부해서 남김없이 전해 주고자 하는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리라는 굳은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마음 가운데 말씀을 남겨두고 어떤 것은 전하고, 어떤 것은 숨기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는/ [주]의 집 뜰에 서서 [주]의 집에서 경배하려고 오는 유다의 모든 도시들에게 내가 네게 명령하여 그들에게 전하라 한 모든 말을 전하되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렘26:2). 많은 교회들에서 매주 몇 차례씩 모임이 있고, 설교와 성경 공부가 있지만 성경의 극히 일부만 반복적으로 설교되고, 가르쳐 질 뿐 어떤 부분은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요한 계시록이나 소선지서, 에스겔, 예레미야, 이사야, 레위기 등은 거의 설교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주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입니다.
왜 주의 말씀을 다 전하지 못하고 극히 일부만 전하는 것입니까? 첫째는 그들 자신이 주님 말씀을 다 듣지 못하고,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저와 여러분이 말씀을 전하기 전에 제대로 들어야 합니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성장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자세히, 더 정확하게, 더 풍성하게 말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에스겔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파자로 보내기에 앞서 에스겔 자신을 훈련시키셨습니다. [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네게 이를 나의 모든 말을 네 마음 속에 받고 네 귀로 들으라.](겔3:10). 에스겔 3:3 참조. 증거자가 되기 위한 필수 요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귀히 여기고, 그 말씀을 기쁨으로 여기고, 양식으로 취하는 것입니다. (렘15:6, 계10:9참조)
예레미야 15:16-[오 [주] 만군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말씀들을 발견하고 먹으매 주의 말씀이 내게 기쁨과 마음의 즐거움이 되었사오니 이는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기 때문이니이다.], [내가 그 천사에게 나아가 이르되, 그 작은 책을 내게 주소서, 한즉 그가 내게 이르되, 이것을 가져다가 먹으라. 이것이 네 배는 쓰게 할 것이나 네 입에서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계10:9).
들은 말씀이 있고, 전할 말씀이 있다면 이제 주께서 모세에게 명한대로 ‘다 전해야 합니다.’ 전할 말씀이 있는데도 전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겔3:18,20; 33:6,8참조). 그 예로 우리는 요나를 들 수 있습니다. 요나는 전해야 할 말씀이 있음에도 전해야 할 민족이 자기 민족의 원수 국가인 앗시리아란 이유로 전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에 대한 대가는 삼일 밤 삼일 낮 동안 지옥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의 저주와 심판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침묵하거나, 말씀을 상대방의 기분에 맞추어 가며 전하거나, 자신의 입맛대로 전한다면 주의 일을 속임수로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죄에 대한 지적, 죄인이 받을 형벌, 믿지 않을 때 가게될 지옥 등에 대해서 절대 빼 버리면 안됩니다. 긍정적이고, 좋은 이야기만을 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나는 [주]라. 너는 내가 네게 이르는 바를 이집트 왕 파라오에게 다 고하라](29) 명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러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을 증거하십시오. 다 전하십시오. 복음 전파는 삶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전파는 인격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통해 감동을 받아 교회에 온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행동이 자신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곧 바로 실망하고 떠나 버릴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사도 바울의 경건과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있는 것같이 우리가 전하는 사람들의 믿음 역시 주의 말씀과 예수님 위에 두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입으로 말씀을 증거해야 합니다. [[주]의 일을 속임수로 행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억제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받을 것이로다.](렘48:10)
12-1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주] 앞에서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파라오가 들으리이까? 나는 할례 받지 못한 입술을 지닌 자니이다, 하매 [주]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시고 또 그들에게 이스라엘 자손과 이집트 왕 파라오에게 대한 명령을 주시고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시니라.나는 할례 받지 못한 입술을 지닌 자니이다, 하매 [주]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시고 또 그들에게 이스라엘 자손과 이집트 왕 파라오에게 대한 명령을 주시고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시니라.](12-13). 모세는 주님 앞에서 매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답변을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도 듣지 않는데 어찌 파라오가 듣겠습니까?”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모세와 같은 논리로 무장한다면 아무에게도 복음을 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의 가족도 내 말을 듣지 않는데....나의 친구들도 내 말을 듣지 않는데...나의 친척들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이란 식으로 나간다면 여러분은 누구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상대방이 내 말을 믿게 하는데 목표를 두고 전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나 사도들 역시 자신들이 전하는 말을 다 믿게 하지 못했습니다. 역사상 어떤 위대한 대언자들도 자신들이 증거하는 말을 다 믿게 하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 에스겔은 증거의 사역을 했을 뿐 믿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명 설교는 단 한 명의 회심자도 얻지 못한 채 돌맹이만 날아왔습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한 설교는 반박과 조롱만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표적을 동반한 설교를 하셨음에도 사람들은 다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모친과 요셉, 형제, 자매들이 다 믿은 것은 아닙니다. 형제, 자매들은 공생애 사역 당시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전하라, 증거하라, 선포하라]고 명하셨지 우리에게 [믿게 하라]고 명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믿게 하는 것은 우리의 역할이나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은 갖가지 논리와 지혜로 말씀 증거의 사역을 방해합니다. 마귀는 육신에 두려움과 불신을 심어 줍니다.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파라오가 들으리이까?] 란 말에 결코 속지 마십시오.
모세는 주님 앞에 [나는 할례 받지 못한 입술을 지닌 자니이다,]라고 고백했는데, 이 역시 불필요한 말입니다. 이것은 자기 변명입니다. ‘나는 말을 잘 못합니다.’ ‘나는 신학을 전공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지혜가 부족한 자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변명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가장 많이 하는 자기 변명은 ‘저는 인격이 성숙하지 못한 자입니다.’ ‘저는 성경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것은 결코 복음 증거를 막는 장애물이나 변명이 될 수 없습니다. 마귀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거짓말합니다. ‘말로 전하지 말고 삶으로 증거해라’ 이것은 매우 그럴듯하지만 성경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복음은 말로 전하는 것이지 삶으로 전할 수 없습니다. 저는 성경 어디에서도 모세의 인격이나 모세의 삶에 감동을 받아 하나님을 믿었다는 증거를 본적이 없습니다. 저는 성경 어디에서도 사도들의 인격과 삶에 감동을 받아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한 예를 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통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죄를 자백하게 하고, 예수를 믿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목사의 삶을 통해, 장로의 삶을 통해, 집사의 삶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서만 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자신들을 스스로 자책하며, 자기를 못난 놈으로, 믿음없는 자로, 열매가 없고, 행함이 없는 자로 보기 때문에 전도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주님의 말씀은 전파되어야 하고 증거되어야 합니다. 완벽주의를 지향하지 마십시오. 나의 못난 입술, 나의 부족한 지혜, 부족한 언변, 부족한 간증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덮어 주시고 오직 주의 말씀의 능력,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증거하는 것이 바로 올바른 자세입니다.
전도를 중단하는 것은 죄입니다. 전도를 중단하는 것은 나에게 화(禍)가 미칩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라. 만일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아니하면 참으로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고전9:16). 마약 중독으로 감옥에 들어간 목사님이 감옥에서 엄청난 복음의 열매를 거둔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으로 감옥에 들어간 성도가 감옥에서 기도와 말씀에 전념함으로써 성령 충만해져서 죄수들을 상대로 복음을 증거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든지 출소하자마자 죄수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이들이 만약 자신의 연약함과 죄를 바라보았다면 어떻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 교회 성도들은 모두 복음 전도에 최선을 다하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모세와 같은 합리적인 이유를 거두어들이십시오. 자신의 처지를 둘러보고 변명을 하지 마십시오. 나는 주의 명령에 순종하여 전하고, 증거할 뿐입니다.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을 보고 욕해서는 안됩니다. ‘자기는 저렇게 살면서 복음을 전하다고 하니 주님이 욕먹는다...’ 이런 식으로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복음을 전하지 않는 나 자신을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14-25절은 족보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르우벤의 아들’(14), ‘시므온의 아들들’(15), ‘레위의 아들’(16)이라고 해서 세 명만이 나옵니다. 나머지 9명은 나오지 않습니다. 주님은 출생의 순서가 아니라 출애굽 역사에 택함을 받은 사람들만 쓰셨습니다. 창세기 49:5-7에 따르면 시므온과 레위 지파는 저주 아래 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의 역사에서 이들은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웁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 레위 지파였습니다. 레위는 야곱의 세 번째 아들이었는데, 주님은 레위 지파의 모세를 대언자로, 아론을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그들의 군대대로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라 하신 [주]의 말씀을 받은 자는 이 아론과 모세요, 또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기 위해 이집트 왕 파라오에게 말한 자도 이 모세와 아론이었더라.](26-27).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유다 지파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데, 이는 출애굽의 역사가 완전한 구원의 역사가 아님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대언자는 레위 지파가 아니라 유다 지파에서 나옵니다. 왕도 유다 지파에서 나옵니다. 대제사장 역시 유다 지파에서 나옵니다. 이는 출애굽을 통해 신약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28-30절은 앞에 나온 말씀의 반복입니다. 10-12절의 반복입니다.
출애굽기(XX)
말씀: 출애굽기 6:9-30
요절: 출애굽기 6:29
20. 파라오에게 다 고하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불신에 빠져 불평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파라오를 향해 두 마디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는 주라. 내가 하리라(I am, I will)]. [나는 주라. 내가 하리라(I am, I will)]는 말씀은 모세가 승리할 있는 필요 충분 조건입니다. 주님이 절망과 실의에 빠진 성도를 돕는 방법은 첫째, 자신의 이름을 알게 하시고, 계시하십니다. I am the LORD.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기억하면 문제가 크게 보이지 않습니다. 둘째,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게 합니다(성경의 기록된 말씀). 주님께서 성도들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두신 언약의 말씀들을 주십니다. 이것들을 붙들게 하심으로 마음 가운데 확신과 위로를 주십니다. 셋째,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I will-성경의 예언의 말씀). 주님은 “내가 ...하리라” 약속하심으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이 때 우리에겐 믿음과 더불어 인내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 일관되게 계시된 주님의 일하시는 방법이며, 성도들을 돕는 방법입니다.
많은 경우에 성경의 위대한 가르침, 주님의 위대한 선포는 전하는 사람들이나 듣는 사람들의 불신과 냉소로 인해 그 능력과 권위와 위엄이 형편없이 떨어지고 맙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라면 그것은 주님의 임재 앞에서 듣는 말씀과 동일한 권위와 능력이 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열광하고 흥분하고 슬퍼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을 보면 과연 살아 있구나란 생각이 절로 듭니다. 하지만 그들이 강단 앞에만 오면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눈물이 없고, 흥분이 없고, 감동이 없고, 슬픔이 없다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까? 산 사람입니까? 불신은 우리의 영적 감정을 0(zero)로 만들어 버립니다. 불신은 우리의 귀를 막기 때문에 말씀에 반응하지 못합니다. 불신은 우리의 입을 막기 때문에 우리를 벙어리로 만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아있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기에 파라오의 권세 앞에서 풀이 죽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즉시 증거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나 영의 고통과 잔인한 속박으로 인하여 그들이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9). 주님은 1-8절의 말씀들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누구이신지 계시해 주셨고, 언약을 기억하시며, 내가 하리라를 무려 7차례나 반복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말씀이 증거되어도 듣지 않고 믿지 않는데는 아무런 능력도 효력도 없습니다.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단 한 명의 회심자도 얻지 못했고, 단 한 명도 영적 부흥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설교자와 설교의 능력이 모든 것을 결판 짓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죄인들은 자신들의 죄가 제거된 후에야 말씀이 귀에 들어올 것 같습니다. 영의 고통과 속박이 풀리면 모세의 말을 들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듣고 믿어야 영의 고통과 잔인한 속박이 풀립니다. 증거의 말씀을 듣고 믿을 때 죄는 해결됩니다. 사람들은 흔히 문제가 해결되면 주의 말씀을 잘 믿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귀는 끊임없이 문제들을 일으킵니다. 가정 문제, 학교 문제, 직장 문제, 자녀 문제....끝이 없습니다. 한 가지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며, 어디선가 또 한 가지 문제가 터집니다. 이때 주님은 자신의 종들을 보내 말씀을 증거 하지만 사람들의 귀에 그 말씀은 도무지 들리지 않습니다. 교회에 와서 앉아 있어도 몸만 있을 뿐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교인 중의 99% 이상은 월요일이 되면 어제들은 설교 제목이나 본문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죄와 속박에 메여 주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면 될수록, 고통이 있으면 있을수록, 잔인한 속박이 나를 옭아 메면 멜수록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겠다고 결심하십시오. 그리고 주의 약속의 말씀을 펼치고,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제시하신 문제 해결의 방법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나 영의 고통과 잔인한 속박으로 인하여 그들이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9).
10-11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들어가서 이집트 왕 파라오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그의 땅에서 내보내어 가게 하라고 말하라, 하시니](10-11). 주님은 파라오에게 들어가서 증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전처럼 말씀을 다 빼먹고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위엄있게, 담대하게 증거해야 합니다.
말씀을 증거하는 것은 영적인 힘을 회복하는 지름길입니다. 주님은 먹을 것이 없고, 목이 말라 지치셨을 때 말씀을 증거하심으로 힘을 얻으셨습니다.
* 요한복음 4:6과 32을 비교해 보라. 주님은 지치셨다(4:6)---말씀을 전하셨다--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느니라(4:32-34).
말씀을 증거하는 것은 영적 교제(친교)를 회복하는 지름길입니다.
* 솔로몬의 아가 5:8(그녀는 주님이 어디 있는지 몰랐다. 친교를 잃어버림)--주님을 증거했다(10-16)--6:2(주님을 곧바로 찾았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지 않는다고 해서 일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이집트의 왕 파라오에게 가서 말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영적으로 살아날 수 있는 길입니다. 모세가 영적인 양식을 얻고, 주님과의 친교를 확고히 하는 길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지치고 힘든 일이 있다면 말씀을 증거해 보십시오. 전도지를 들고 나가서 복음을 전해 보십시오. 사람들을 붙들고 예수님을 증거해 보십시오. [너는 말씀을 선포하라. 때에 맞든지 맞지 아니하든지 항상 예비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딤후4:2). 저와 여러분은 말씀을 선포해야 하고, 책망해야 하고, 꾸짖어야 하고, 권면해야 합니다. 모세가 파라오에게 인정을 구하고, 동정과 연민을 구할 필요가 없듯이 우리는 죄인들에게 복음을 믿어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을 책망하며 꾸짖으며 권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결코 가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하는 진리의 말씀은 권위있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주]라. 너는 내가 네게 이르는 바를 이집트 왕 파라오에게 다 고하라, 하시니](29). 주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명하셨습니다. 모세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하나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선포해야 합니다. 사도들은 이 점에서 준비된 일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위협을 당하고, 맞으며너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보고 들은 것들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기 때문이라, 하매](행4:20). 이것이 곧 증인의 자세입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이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처음부터 자신보다 신분이나 지위가 훨씬 높은 사람에게 증거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모세 역시 처음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는 내가 지금까지 회피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너희에게 밝히 말하였음이라.](행20:27). 오늘날 교회의 모든 목회자들은 성경을 부지런히 공부해서 남김없이 전해 주고자 하는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리라는 굳은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마음 가운데 말씀을 남겨두고 어떤 것은 전하고, 어떤 것은 숨기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는/ [주]의 집 뜰에 서서 [주]의 집에서 경배하려고 오는 유다의 모든 도시들에게 내가 네게 명령하여 그들에게 전하라 한 모든 말을 전하되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렘26:2). 많은 교회들에서 매주 몇 차례씩 모임이 있고, 설교와 성경 공부가 있지만 성경의 극히 일부만 반복적으로 설교되고, 가르쳐 질 뿐 어떤 부분은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요한 계시록이나 소선지서, 에스겔, 예레미야, 이사야, 레위기 등은 거의 설교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주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입니다.
왜 주의 말씀을 다 전하지 못하고 극히 일부만 전하는 것입니까? 첫째는 그들 자신이 주님 말씀을 다 듣지 못하고,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저와 여러분이 말씀을 전하기 전에 제대로 들어야 합니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성장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자세히, 더 정확하게, 더 풍성하게 말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에스겔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파자로 보내기에 앞서 에스겔 자신을 훈련시키셨습니다. [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네게 이를 나의 모든 말을 네 마음 속에 받고 네 귀로 들으라.](겔3:10). 에스겔 3:3 참조. 증거자가 되기 위한 필수 요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귀히 여기고, 그 말씀을 기쁨으로 여기고, 양식으로 취하는 것입니다. (렘15:6, 계10:9참조)
예레미야 15:16-[오 [주] 만군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말씀들을 발견하고 먹으매 주의 말씀이 내게 기쁨과 마음의 즐거움이 되었사오니 이는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기 때문이니이다.], [내가 그 천사에게 나아가 이르되, 그 작은 책을 내게 주소서, 한즉 그가 내게 이르되, 이것을 가져다가 먹으라. 이것이 네 배는 쓰게 할 것이나 네 입에서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계10:9).
들은 말씀이 있고, 전할 말씀이 있다면 이제 주께서 모세에게 명한대로 ‘다 전해야 합니다.’ 전할 말씀이 있는데도 전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겔3:18,20; 33:6,8참조). 그 예로 우리는 요나를 들 수 있습니다. 요나는 전해야 할 말씀이 있음에도 전해야 할 민족이 자기 민족의 원수 국가인 앗시리아란 이유로 전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에 대한 대가는 삼일 밤 삼일 낮 동안 지옥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의 저주와 심판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침묵하거나, 말씀을 상대방의 기분에 맞추어 가며 전하거나, 자신의 입맛대로 전한다면 주의 일을 속임수로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죄에 대한 지적, 죄인이 받을 형벌, 믿지 않을 때 가게될 지옥 등에 대해서 절대 빼 버리면 안됩니다. 긍정적이고, 좋은 이야기만을 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나는 [주]라. 너는 내가 네게 이르는 바를 이집트 왕 파라오에게 다 고하라](29) 명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러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을 증거하십시오. 다 전하십시오. 복음 전파는 삶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전파는 인격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통해 감동을 받아 교회에 온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행동이 자신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곧 바로 실망하고 떠나 버릴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사도 바울의 경건과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있는 것같이 우리가 전하는 사람들의 믿음 역시 주의 말씀과 예수님 위에 두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입으로 말씀을 증거해야 합니다. [[주]의 일을 속임수로 행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억제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받을 것이로다.](렘48:10)
12-1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주] 앞에서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파라오가 들으리이까? 나는 할례 받지 못한 입술을 지닌 자니이다, 하매 [주]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시고 또 그들에게 이스라엘 자손과 이집트 왕 파라오에게 대한 명령을 주시고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시니라.나는 할례 받지 못한 입술을 지닌 자니이다, 하매 [주]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시고 또 그들에게 이스라엘 자손과 이집트 왕 파라오에게 대한 명령을 주시고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시니라.](12-13). 모세는 주님 앞에서 매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답변을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도 듣지 않는데 어찌 파라오가 듣겠습니까?”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모세와 같은 논리로 무장한다면 아무에게도 복음을 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의 가족도 내 말을 듣지 않는데....나의 친구들도 내 말을 듣지 않는데...나의 친척들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이란 식으로 나간다면 여러분은 누구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상대방이 내 말을 믿게 하는데 목표를 두고 전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나 사도들 역시 자신들이 전하는 말을 다 믿게 하지 못했습니다. 역사상 어떤 위대한 대언자들도 자신들이 증거하는 말을 다 믿게 하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 에스겔은 증거의 사역을 했을 뿐 믿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명 설교는 단 한 명의 회심자도 얻지 못한 채 돌맹이만 날아왔습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한 설교는 반박과 조롱만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표적을 동반한 설교를 하셨음에도 사람들은 다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모친과 요셉, 형제, 자매들이 다 믿은 것은 아닙니다. 형제, 자매들은 공생애 사역 당시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전하라, 증거하라, 선포하라]고 명하셨지 우리에게 [믿게 하라]고 명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믿게 하는 것은 우리의 역할이나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은 갖가지 논리와 지혜로 말씀 증거의 사역을 방해합니다. 마귀는 육신에 두려움과 불신을 심어 줍니다.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파라오가 들으리이까?] 란 말에 결코 속지 마십시오.
모세는 주님 앞에 [나는 할례 받지 못한 입술을 지닌 자니이다,]라고 고백했는데, 이 역시 불필요한 말입니다. 이것은 자기 변명입니다. ‘나는 말을 잘 못합니다.’ ‘나는 신학을 전공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지혜가 부족한 자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변명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가장 많이 하는 자기 변명은 ‘저는 인격이 성숙하지 못한 자입니다.’ ‘저는 성경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것은 결코 복음 증거를 막는 장애물이나 변명이 될 수 없습니다. 마귀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거짓말합니다. ‘말로 전하지 말고 삶으로 증거해라’ 이것은 매우 그럴듯하지만 성경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복음은 말로 전하는 것이지 삶으로 전할 수 없습니다. 저는 성경 어디에서도 모세의 인격이나 모세의 삶에 감동을 받아 하나님을 믿었다는 증거를 본적이 없습니다. 저는 성경 어디에서도 사도들의 인격과 삶에 감동을 받아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한 예를 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통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죄를 자백하게 하고, 예수를 믿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목사의 삶을 통해, 장로의 삶을 통해, 집사의 삶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서만 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자신들을 스스로 자책하며, 자기를 못난 놈으로, 믿음없는 자로, 열매가 없고, 행함이 없는 자로 보기 때문에 전도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주님의 말씀은 전파되어야 하고 증거되어야 합니다. 완벽주의를 지향하지 마십시오. 나의 못난 입술, 나의 부족한 지혜, 부족한 언변, 부족한 간증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덮어 주시고 오직 주의 말씀의 능력,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증거하는 것이 바로 올바른 자세입니다.
전도를 중단하는 것은 죄입니다. 전도를 중단하는 것은 나에게 화(禍)가 미칩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라. 만일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아니하면 참으로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고전9:16). 마약 중독으로 감옥에 들어간 목사님이 감옥에서 엄청난 복음의 열매를 거둔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으로 감옥에 들어간 성도가 감옥에서 기도와 말씀에 전념함으로써 성령 충만해져서 죄수들을 상대로 복음을 증거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든지 출소하자마자 죄수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이들이 만약 자신의 연약함과 죄를 바라보았다면 어떻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 교회 성도들은 모두 복음 전도에 최선을 다하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모세와 같은 합리적인 이유를 거두어들이십시오. 자신의 처지를 둘러보고 변명을 하지 마십시오. 나는 주의 명령에 순종하여 전하고, 증거할 뿐입니다.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을 보고 욕해서는 안됩니다. ‘자기는 저렇게 살면서 복음을 전하다고 하니 주님이 욕먹는다...’ 이런 식으로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복음을 전하지 않는 나 자신을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14-25절은 족보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르우벤의 아들’(14), ‘시므온의 아들들’(15), ‘레위의 아들’(16)이라고 해서 세 명만이 나옵니다. 나머지 9명은 나오지 않습니다. 주님은 출생의 순서가 아니라 출애굽 역사에 택함을 받은 사람들만 쓰셨습니다. 창세기 49:5-7에 따르면 시므온과 레위 지파는 저주 아래 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의 역사에서 이들은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웁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 레위 지파였습니다. 레위는 야곱의 세 번째 아들이었는데, 주님은 레위 지파의 모세를 대언자로, 아론을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그들의 군대대로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라 하신 [주]의 말씀을 받은 자는 이 아론과 모세요, 또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기 위해 이집트 왕 파라오에게 말한 자도 이 모세와 아론이었더라.](26-27).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유다 지파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데, 이는 출애굽의 역사가 완전한 구원의 역사가 아님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대언자는 레위 지파가 아니라 유다 지파에서 나옵니다. 왕도 유다 지파에서 나옵니다. 대제사장 역시 유다 지파에서 나옵니다. 이는 출애굽을 통해 신약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28-30절은 앞에 나온 말씀의 반복입니다. 10-12절의 반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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