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 02일- 출애굽기
출애굽기(XVIII)
말씀: 출애굽기 6:1-13
요절: 출애굽기 6:7
18. 너희가 알리라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압니다. 하지만 시험과 실패, 시련의 연단 없이 주님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들은 머리 숙여 경배했습니다. 그러나 시련이 왔을 때, 파라오의 강력한 징계가 그들 위에 떨어졌을 때 그들이 아는 하나님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백성들은 곧 바로 불신에 빠졌습니다. 불신은 곧바로 자신들의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으로 이어졌습니다.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고 왔건만 파라오는 그들에게 더 무거운 짐을 지웠고, 이스라엘의 관원들은 모세와 아론을 배척했습니다. 모세는 주께로 돌아와 이 문제를 주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것입니다. [이는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께로 돌아가기 때문이라. 영광이 그분께 영원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롬11:36). 욥은 바로 이런 사실을 알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었습니다. 그의 기도를 요약하면 하나님은 왜 말씀을 하시고 나서 환경을 더 어렵게 만드시는가? 나는 왜 주님을 믿고 나서 일이 더 힘들어지는 것인가? 그런 것입니다.
엘리야를 잘 섬기던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과부에게 아들은 전부입니다. 과부는 즉시 불평했습니다. 엘리사의 기도로 아들을 얻었던 수넴 여인의 자식도 죽었습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를 찾아와 불평했습니다. 주님을 잘 섬기던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였던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이들도 주님께 여기 계셨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불평했습니다. 그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넘어집니다. 목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훌륭한 설교로 힘을 준 후에 몇 일 지나지 않아서 욕을 얻어먹습니다. 아멘, 할렐루야를 외치며 돌아간 형제들은 몇 일내로 노멘, 놀랠루야!를 외치는 일들이 터지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에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파라오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이는 강한 손으로 인해 파라오가 그들을 가게 할 것임이요, 강한 손으로 인해 그가 그들을 자기 땅에서 쫓아낼 것임이라, 하시고](1). 주님은 모세의 투덜거림과 원망에 대해 꾸중하지 않으시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파라오는 가게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주님은 파라오가 그들을 가게 만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을 쫓아내게 될 것입니다. 모세는 이제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주님 앞에 겸손히 고백하고, 이 모든 일이 전적으로 주님으로부터 비롯되고, 주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주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100% 순수한 것을 좋아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영광을 사람들과 나누어 갖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뭔가 썩이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만약 힘들고 어려울 때,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주님 이 일이 이루어진다면 이것은 전적으로 주님이 하신 일입니다. 주님만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께서만 이루신 일이라고 인정합니다.’ -예화) 저 빌딩을 내가 지었다(돌 나르던 인부). 이 교회를 내가 세웠다(어떤 집사)
주님은 모세에게 단정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파라오가 뭐라고 했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신 말씀을 이루십니다. 받은 바 말씀을 가지고 내가 기대하는 것, 내가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로 돌아가는 상황들을 이겨내는 것이 바로 믿음의 훈련이요, 연단입니다. 우리에게 시련이 주어지는 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만이 홀로 선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주시기 위함입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내가 기뻐하는 것을 이루며 내가 그 말을 보내어 /이루게 하려는/ 일에서 형통할 것임이라.](사55:11). 주의 말씀만이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반대와 계략과 권세가 부딪쳐도 주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붙들어 맬 수는 없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서리라, 하라.](사40:8). 하나님은 파라오를 통해 모세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시고자 하십니다. 우리 역시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환경과 믿음이 부딪힐 때, 말씀을 믿는 믿음이 바로 참된 믿음이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것입니다. 잠언 21:29,30 [사악한 자는 자기 얼굴을 굳게 하나 곧바른 자로 말하건대 그의 길은 그분께서 인도하시느니라. 어떤 지혜나 명철이나 계략으로도 주를 대적하지 못하느니라.](잠21:29-30).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외친 한 마디를 들어 보십시오. [이 복음으로 인하여 내가 행악자처럼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당하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느니라.](딤후2:9). 이것은 시련을 통해 배운 놀라운 진리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에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파라오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이는 강한 손으로 인해 파라오가 그들을 가게 할 것임이요, 강한 손으로 인해 그가 그들을 자기 땅에서 쫓아낼 것임이라, 하시고](1).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요히 인도해 내시지 않고 강한 능력의 손을 펼쳐서 모세로 하여금 주의 역사를 보게 하려 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종들에게 때로 이런 강력한 시청각 교육을 통해 믿음을 세워 주십니다. 믿음은 삶의 체험을 통해 배워질 때 진정한 믿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계획하셨다면 악한 성격의 파라오가 아니라 민주적이고 평화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을 파라오로 세워서 모세가 한 마디만 하면 축복하며 보내 줄 수 있도록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모세와 아론이 만난 파라오는 역대 어떤 파라오보다 완악하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히브리인들을 압제하는 파라오였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악하고 악한 왕을 파라오로 세우심으로 자신의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가장 극적인 승부는 강한 상대를 대상으로 역전승 하는 것입니다. 명승부를 벌이려면 승자뿐만 아니라 패자도 좋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대제국 이집트의 악한 파라오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셔야 온 민족들에게 주의 두려우심과 능력을 드러내시지, 오랑캐 잡놈들같은 부족들에게서 건져낸다면 누가 주님의 위엄과 영광을 찬양하겠습니까?
주님께서 신자들에게 어려움을 주시고, 피눈물이 쏟아지는 환경에 두시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더 깊이 인식하고 새기도록 하고, 더욱 전적으로 신뢰하도록 하기 위함임을 기억하십시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이 밝게 빛난다는 원칙은 우리의 삶에서 주님이 주시는 역사 방법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주]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자 하나님의 이름으로는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느니라.](2-3). 이 구절은 많은 신자들과 믿음이 없는 신학자들의 머리를 텅 비게 만든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칭 신자들을 말씀에 걸려 넘어지게 하시기 위해 성경 곳곳에 장치해 둔 덫이라고 생각됩니다. 전능자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로힘입니다. 여호와는 사랑과 구원의 주란 의미로 언약의 하나님을 나타내는 칭호입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란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창13:4). 이삭 역시 여호와를 알고 불렀습니다(창26:25).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창32:9,10). 엘로힘은 주로 God로 번역되고 여호와는 주로 LORD로 번역되었습니다. 엘로힘은 전능자, 창조자란 타이틀이며, 여호와는 구속주, 주(主)란 타이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주]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자 하나님의 이름으로는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느니라.](2-3)고 하신 말씀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 말씀은 매우 간단하게 풀 수 있습니다. 주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약을 맺었지만 그 약속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 안에서 죽었으며 약속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멀리서 그 약속들을 보고 확신하며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또 땅에서는 자기들이 나그네요, 순례자라 고백하였으니](히11: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약속을 받지 못했기에 그들의 머리 속에는 그 약속을 능히 이루실 전능자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이 있었습니다. 이제 모세를 통해 그 약속을 이루심으로 모세를 비롯한 후대들은 그 약속의 하나님 여호와를 목격하고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조상들에게 준 약속들을 어떻게 이루는지 직접 보고, 친히 증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결코 보지 못하고, 겪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약속의 말씀을 친히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이들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매일의 순간 순간에 기록된 약속의 말씀들을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루시는 신실한 하나님을 계시받고 조명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여호와 주(LORD) 하나님이십니다. [(또 약속하신 분께서 신실하시니)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흔들림 없이 굳게 잡고](히10:23).
4절입니다. [또 내가 그들과 내 언약을 맺어 가나안 땅 곧 그들이 나그네로 지내던바 그들의 순례의 땅을 주기로 하였으며](4). 여호와 하나님은 이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란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전능자로서의 능력과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란 두 가지를 깊이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만약 파라오가 계속 이스라엘을 종살이 시킨다면 어떻게 조상들에게 준 언약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400년 전에 족장들과 맺은 언약을 상기시키시는 것은 그 약속을 성취하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두려움과 불신 가운데 있는 모세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셨으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 약속은 조건부 약속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약속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옵션을 걸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약속은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무조건적인 약속입니다. 성령의 보증 역시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무조건적인 약속입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 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와 영존하는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바 확실한 긍휼이니라.](사55:3). 이 약속은 신약 성도들인 저희들에게 동일한 약속입니다. 사도행전 13:34을 볼 것.
현재 저와 여러분들 역시 영존하는 언약에 매여 있습니다. [이제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이끌어 내신 화평의 하나님께서 영존하는 언약의 피를 통하여 모든 선한 일에서 너희를 완전하게 하사 자신의 뜻을 행하게 하시고 자신의 눈앞에서 매우 기쁜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너희 안에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분께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히13:20-21).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이 맺으신 언약은 영존하는 언약의 피를 통해 우리를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족장들과 맺은 언약의 결과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상속으로 주는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맺은 피의 언약은(히7:22) 우리에게 유업의 상속을 주는 것입니다(벧전1:4).
5절입니다. [또한 이집트 사람들이 노예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이 신음하는 것을 내가 듣고 내 언약을 기억하였노라.](5). 주님은 모세가 말해 주지 않아도 이미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하는 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주님은 성도들의 고통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시고, 그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들의 눈에서 흘리는 눈물을 자신의 책에 기록해 두십니다. [내가 떠도는 것을 주께서 세시오니 내 눈물들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그 눈물들이 주의 책에 있지 아니하나이까?](시56:8).
주님은 동정심이 많으신 분이십니다(약5:11). 하나님은 절대자로서 모든 것을 초월한 존재로서 슬픔도 기쁨도 없는 무감각하고, 무정하신 존재가 아니라 감정과 의지와 지성을 갖춘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며,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멍에를 함께 메시며, 우리가 던지는 짐을 지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약함을 다 느끼십니다. [이는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이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라.](히4:15).
주님은 파라오가 이스라엘을 향해 더 무거운 짐을 지우고, 더 많은 신음과 눈물을 흘리게 할 때, 능력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가만 놔 두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실 때는 이유와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6-8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주]라. 내가 이집트 사람들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속박에서 너희를 자유롭게 하고 또 편 팔과 큰 심판들로 너희를 구속(救贖)하며 너희를 취하여 내게 한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에게 하나님이 되리니 내가 [주] 너희 하나님 곧 이집트 사람들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자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유산으로 삼게 하리라. 나는 [주]라, 하셨다, 하라.](6-8). 여기서 주님은 무려 일곱 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I will이란 말에 모두 밑줄을 그어 보십시오. 주님은 일곱 번의 “I will” 앞뒤로 “나는 주라”고 못을 박으셨습니다.
주님은 이런 일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내가 [주] 너희 하나님 ...줄을 너희가 알리라.](7)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아는데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중세의 성자로 추앙받던 아씨시의 성프란체스코의 평생의 기도 제목은 ‘주여, 당신은 누구시니이까?’였다고 합니다. 주님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를 알고, 다음은 파라오가 주를 알고, 온 세상이 주를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7:5,17, 10:2, 11:7, 14:18, 16:12, 29:46을 볼 것.
우리의 소원은 주를 아는 것, 주를 더 잘 아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를 잊어버리고, 주를 알지 못할 때 주님은 강력한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그것은 전쟁, 포로, 약탈, 역병, 기근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시련과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주님은 심지어 주를 알게 하시기 위해 사랑하는 우리의 자녀들이나 배우자들을 죽여 버리시기도 하십니다. 주님이 사람을 죽이십니까? 예, 죽여 버리십니다. [또 내가 사망으로 그녀의 자녀들을 죽이리니 그리하면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속 중심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리라. 또 내가 너희 행위에 따라 너희 각 사람에게 주리라.](계2:23). 주님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여 버리심으로 온 교회에 주의 두려우심을 알게 하셨듯이, 시련과 어려움을 통해 주님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잊고 범죄할 때 주님은 우리를 깨우십니다.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거부할 때 빛은 번개가 되고, 은혜는 심판이 됩니다. 아모스 9:2-4, [그들이 /땅을/ 파고 지옥으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서 그들을 붙잡을 것이요, 그들이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그들을 끌어내릴 것이며 그들이 갈멜 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그들을 찾아내어 끄집어 낼 것이요, 그들이 내 눈앞에서 떠나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뱀에게 명령하여 그들을 물게 할 것이요, 그들이 자기 원수들 앞에서 포로가 되어 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칼에게 명령하여 그들을 죽이게 하리라. 내가 내 눈을 그들 위에 두어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암9:2-4).
에스겔서의 핵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주]인줄을 알리라]입니다. 이 말이 무려 60회가 넘게 나옵니다. 주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들의 기본적으로 깔린 의도와 목적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알게 하는데 있습니다. 참고로 몇 구절만 보겠습니다. 겔5:13,6:7,10, 13, 14, 7:4, 9,27. 11:10,12,...
우리가 아무리 신앙 생활을 잘 한다 해도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그러한 분이시란 것을 직접 확인하는 삶입니다. 육체의 남은 때는 나의 꿈과 야망을 이루기 위해 주님의 힘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우리를 통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내가 파라오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시는 일들을 보며, 우리에게 주신 약속들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굳게 서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을 알아야 합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들은 등에 매를 맞으면서도 주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매사에 주님을 인정하고 주님을 의식하고, 신뢰한다면 주님을 아는 영적 지식은 점점 깊어 갈 것입니다.
주를 아는 것은 영생입니다. 주를 아는 것은 계속해서 주님의 은혜를 받는 길입니다. 시편 36:10을 보십시오. [오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仁慈)를 계속해서 /베푸시며/ 마음이 올바른 자들에게 주의 의(義)를 계속해서 /베푸소서/.](시36:10).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1. 여러분은 주님을 아십니까? 나를 구원하시고, 피를 흘리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2. 나에게 주어진 고통과 시련은 주를 위한 것이다.
3. 적이 강하면 강할수록, 일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주님의 영광은 더욱 빛난다. 주님께서 완악한 파라오를 통해 주님의 능력을 더욱 크게 드러내셨다. 우리는 파라오의 완악함을 보지 말고 주님의 전능하심을 보아야 한다.
4. 주님은 전능자이시며,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다. 우리는 영존하는 피의 언약 아래 있다.
5. 주님은 약속하셨다. 무조건적 언약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출애굽기(XVIII)
말씀: 출애굽기 6:1-13
요절: 출애굽기 6:7
18. 너희가 알리라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압니다. 하지만 시험과 실패, 시련의 연단 없이 주님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들은 머리 숙여 경배했습니다. 그러나 시련이 왔을 때, 파라오의 강력한 징계가 그들 위에 떨어졌을 때 그들이 아는 하나님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백성들은 곧 바로 불신에 빠졌습니다. 불신은 곧바로 자신들의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으로 이어졌습니다.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고 왔건만 파라오는 그들에게 더 무거운 짐을 지웠고, 이스라엘의 관원들은 모세와 아론을 배척했습니다. 모세는 주께로 돌아와 이 문제를 주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것입니다. [이는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께로 돌아가기 때문이라. 영광이 그분께 영원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롬11:36). 욥은 바로 이런 사실을 알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었습니다. 그의 기도를 요약하면 하나님은 왜 말씀을 하시고 나서 환경을 더 어렵게 만드시는가? 나는 왜 주님을 믿고 나서 일이 더 힘들어지는 것인가? 그런 것입니다.
엘리야를 잘 섬기던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과부에게 아들은 전부입니다. 과부는 즉시 불평했습니다. 엘리사의 기도로 아들을 얻었던 수넴 여인의 자식도 죽었습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를 찾아와 불평했습니다. 주님을 잘 섬기던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였던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이들도 주님께 여기 계셨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불평했습니다. 그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넘어집니다. 목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훌륭한 설교로 힘을 준 후에 몇 일 지나지 않아서 욕을 얻어먹습니다. 아멘, 할렐루야를 외치며 돌아간 형제들은 몇 일내로 노멘, 놀랠루야!를 외치는 일들이 터지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에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파라오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이는 강한 손으로 인해 파라오가 그들을 가게 할 것임이요, 강한 손으로 인해 그가 그들을 자기 땅에서 쫓아낼 것임이라, 하시고](1). 주님은 모세의 투덜거림과 원망에 대해 꾸중하지 않으시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파라오는 가게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주님은 파라오가 그들을 가게 만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을 쫓아내게 될 것입니다. 모세는 이제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주님 앞에 겸손히 고백하고, 이 모든 일이 전적으로 주님으로부터 비롯되고, 주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주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100% 순수한 것을 좋아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영광을 사람들과 나누어 갖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뭔가 썩이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만약 힘들고 어려울 때,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주님 이 일이 이루어진다면 이것은 전적으로 주님이 하신 일입니다. 주님만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께서만 이루신 일이라고 인정합니다.’ -예화) 저 빌딩을 내가 지었다(돌 나르던 인부). 이 교회를 내가 세웠다(어떤 집사)
주님은 모세에게 단정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파라오가 뭐라고 했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신 말씀을 이루십니다. 받은 바 말씀을 가지고 내가 기대하는 것, 내가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로 돌아가는 상황들을 이겨내는 것이 바로 믿음의 훈련이요, 연단입니다. 우리에게 시련이 주어지는 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만이 홀로 선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주시기 위함입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내가 기뻐하는 것을 이루며 내가 그 말을 보내어 /이루게 하려는/ 일에서 형통할 것임이라.](사55:11). 주의 말씀만이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반대와 계략과 권세가 부딪쳐도 주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붙들어 맬 수는 없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서리라, 하라.](사40:8). 하나님은 파라오를 통해 모세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시고자 하십니다. 우리 역시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환경과 믿음이 부딪힐 때, 말씀을 믿는 믿음이 바로 참된 믿음이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것입니다. 잠언 21:29,30 [사악한 자는 자기 얼굴을 굳게 하나 곧바른 자로 말하건대 그의 길은 그분께서 인도하시느니라. 어떤 지혜나 명철이나 계략으로도 주를 대적하지 못하느니라.](잠21:29-30).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외친 한 마디를 들어 보십시오. [이 복음으로 인하여 내가 행악자처럼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당하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느니라.](딤후2:9). 이것은 시련을 통해 배운 놀라운 진리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에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파라오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이는 강한 손으로 인해 파라오가 그들을 가게 할 것임이요, 강한 손으로 인해 그가 그들을 자기 땅에서 쫓아낼 것임이라, 하시고](1).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요히 인도해 내시지 않고 강한 능력의 손을 펼쳐서 모세로 하여금 주의 역사를 보게 하려 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종들에게 때로 이런 강력한 시청각 교육을 통해 믿음을 세워 주십니다. 믿음은 삶의 체험을 통해 배워질 때 진정한 믿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계획하셨다면 악한 성격의 파라오가 아니라 민주적이고 평화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을 파라오로 세워서 모세가 한 마디만 하면 축복하며 보내 줄 수 있도록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모세와 아론이 만난 파라오는 역대 어떤 파라오보다 완악하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히브리인들을 압제하는 파라오였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악하고 악한 왕을 파라오로 세우심으로 자신의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가장 극적인 승부는 강한 상대를 대상으로 역전승 하는 것입니다. 명승부를 벌이려면 승자뿐만 아니라 패자도 좋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대제국 이집트의 악한 파라오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셔야 온 민족들에게 주의 두려우심과 능력을 드러내시지, 오랑캐 잡놈들같은 부족들에게서 건져낸다면 누가 주님의 위엄과 영광을 찬양하겠습니까?
주님께서 신자들에게 어려움을 주시고, 피눈물이 쏟아지는 환경에 두시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더 깊이 인식하고 새기도록 하고, 더욱 전적으로 신뢰하도록 하기 위함임을 기억하십시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이 밝게 빛난다는 원칙은 우리의 삶에서 주님이 주시는 역사 방법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주]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자 하나님의 이름으로는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느니라.](2-3). 이 구절은 많은 신자들과 믿음이 없는 신학자들의 머리를 텅 비게 만든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칭 신자들을 말씀에 걸려 넘어지게 하시기 위해 성경 곳곳에 장치해 둔 덫이라고 생각됩니다. 전능자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로힘입니다. 여호와는 사랑과 구원의 주란 의미로 언약의 하나님을 나타내는 칭호입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란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창13:4). 이삭 역시 여호와를 알고 불렀습니다(창26:25).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창32:9,10). 엘로힘은 주로 God로 번역되고 여호와는 주로 LORD로 번역되었습니다. 엘로힘은 전능자, 창조자란 타이틀이며, 여호와는 구속주, 주(主)란 타이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주]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자 하나님의 이름으로는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느니라.](2-3)고 하신 말씀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 말씀은 매우 간단하게 풀 수 있습니다. 주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약을 맺었지만 그 약속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 안에서 죽었으며 약속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멀리서 그 약속들을 보고 확신하며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또 땅에서는 자기들이 나그네요, 순례자라 고백하였으니](히11: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약속을 받지 못했기에 그들의 머리 속에는 그 약속을 능히 이루실 전능자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이 있었습니다. 이제 모세를 통해 그 약속을 이루심으로 모세를 비롯한 후대들은 그 약속의 하나님 여호와를 목격하고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조상들에게 준 약속들을 어떻게 이루는지 직접 보고, 친히 증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결코 보지 못하고, 겪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약속의 말씀을 친히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이들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매일의 순간 순간에 기록된 약속의 말씀들을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루시는 신실한 하나님을 계시받고 조명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여호와 주(LORD) 하나님이십니다. [(또 약속하신 분께서 신실하시니)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흔들림 없이 굳게 잡고](히10:23).
4절입니다. [또 내가 그들과 내 언약을 맺어 가나안 땅 곧 그들이 나그네로 지내던바 그들의 순례의 땅을 주기로 하였으며](4). 여호와 하나님은 이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란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전능자로서의 능력과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란 두 가지를 깊이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만약 파라오가 계속 이스라엘을 종살이 시킨다면 어떻게 조상들에게 준 언약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400년 전에 족장들과 맺은 언약을 상기시키시는 것은 그 약속을 성취하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두려움과 불신 가운데 있는 모세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셨으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 약속은 조건부 약속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약속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옵션을 걸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약속은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무조건적인 약속입니다. 성령의 보증 역시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무조건적인 약속입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 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와 영존하는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바 확실한 긍휼이니라.](사55:3). 이 약속은 신약 성도들인 저희들에게 동일한 약속입니다. 사도행전 13:34을 볼 것.
현재 저와 여러분들 역시 영존하는 언약에 매여 있습니다. [이제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이끌어 내신 화평의 하나님께서 영존하는 언약의 피를 통하여 모든 선한 일에서 너희를 완전하게 하사 자신의 뜻을 행하게 하시고 자신의 눈앞에서 매우 기쁜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너희 안에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분께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히13:20-21).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이 맺으신 언약은 영존하는 언약의 피를 통해 우리를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족장들과 맺은 언약의 결과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상속으로 주는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맺은 피의 언약은(히7:22) 우리에게 유업의 상속을 주는 것입니다(벧전1:4).
5절입니다. [또한 이집트 사람들이 노예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이 신음하는 것을 내가 듣고 내 언약을 기억하였노라.](5). 주님은 모세가 말해 주지 않아도 이미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하는 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주님은 성도들의 고통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시고, 그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들의 눈에서 흘리는 눈물을 자신의 책에 기록해 두십니다. [내가 떠도는 것을 주께서 세시오니 내 눈물들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그 눈물들이 주의 책에 있지 아니하나이까?](시56:8).
주님은 동정심이 많으신 분이십니다(약5:11). 하나님은 절대자로서 모든 것을 초월한 존재로서 슬픔도 기쁨도 없는 무감각하고, 무정하신 존재가 아니라 감정과 의지와 지성을 갖춘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며,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멍에를 함께 메시며, 우리가 던지는 짐을 지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약함을 다 느끼십니다. [이는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이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라.](히4:15).
주님은 파라오가 이스라엘을 향해 더 무거운 짐을 지우고, 더 많은 신음과 눈물을 흘리게 할 때, 능력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가만 놔 두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실 때는 이유와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6-8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주]라. 내가 이집트 사람들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속박에서 너희를 자유롭게 하고 또 편 팔과 큰 심판들로 너희를 구속(救贖)하며 너희를 취하여 내게 한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에게 하나님이 되리니 내가 [주] 너희 하나님 곧 이집트 사람들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자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유산으로 삼게 하리라. 나는 [주]라, 하셨다, 하라.](6-8). 여기서 주님은 무려 일곱 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I will이란 말에 모두 밑줄을 그어 보십시오. 주님은 일곱 번의 “I will” 앞뒤로 “나는 주라”고 못을 박으셨습니다.
주님은 이런 일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내가 [주] 너희 하나님 ...줄을 너희가 알리라.](7)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아는데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중세의 성자로 추앙받던 아씨시의 성프란체스코의 평생의 기도 제목은 ‘주여, 당신은 누구시니이까?’였다고 합니다. 주님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를 알고, 다음은 파라오가 주를 알고, 온 세상이 주를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7:5,17, 10:2, 11:7, 14:18, 16:12, 29:46을 볼 것.
우리의 소원은 주를 아는 것, 주를 더 잘 아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를 잊어버리고, 주를 알지 못할 때 주님은 강력한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그것은 전쟁, 포로, 약탈, 역병, 기근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시련과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주님은 심지어 주를 알게 하시기 위해 사랑하는 우리의 자녀들이나 배우자들을 죽여 버리시기도 하십니다. 주님이 사람을 죽이십니까? 예, 죽여 버리십니다. [또 내가 사망으로 그녀의 자녀들을 죽이리니 그리하면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속 중심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리라. 또 내가 너희 행위에 따라 너희 각 사람에게 주리라.](계2:23). 주님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여 버리심으로 온 교회에 주의 두려우심을 알게 하셨듯이, 시련과 어려움을 통해 주님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잊고 범죄할 때 주님은 우리를 깨우십니다.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거부할 때 빛은 번개가 되고, 은혜는 심판이 됩니다. 아모스 9:2-4, [그들이 /땅을/ 파고 지옥으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서 그들을 붙잡을 것이요, 그들이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그들을 끌어내릴 것이며 그들이 갈멜 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그들을 찾아내어 끄집어 낼 것이요, 그들이 내 눈앞에서 떠나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뱀에게 명령하여 그들을 물게 할 것이요, 그들이 자기 원수들 앞에서 포로가 되어 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칼에게 명령하여 그들을 죽이게 하리라. 내가 내 눈을 그들 위에 두어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암9:2-4).
에스겔서의 핵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주]인줄을 알리라]입니다. 이 말이 무려 60회가 넘게 나옵니다. 주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들의 기본적으로 깔린 의도와 목적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알게 하는데 있습니다. 참고로 몇 구절만 보겠습니다. 겔5:13,6:7,10, 13, 14, 7:4, 9,27. 11:10,12,...
우리가 아무리 신앙 생활을 잘 한다 해도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그러한 분이시란 것을 직접 확인하는 삶입니다. 육체의 남은 때는 나의 꿈과 야망을 이루기 위해 주님의 힘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우리를 통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내가 파라오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시는 일들을 보며, 우리에게 주신 약속들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굳게 서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을 알아야 합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들은 등에 매를 맞으면서도 주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매사에 주님을 인정하고 주님을 의식하고, 신뢰한다면 주님을 아는 영적 지식은 점점 깊어 갈 것입니다.
주를 아는 것은 영생입니다. 주를 아는 것은 계속해서 주님의 은혜를 받는 길입니다. 시편 36:10을 보십시오. [오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仁慈)를 계속해서 /베푸시며/ 마음이 올바른 자들에게 주의 의(義)를 계속해서 /베푸소서/.](시36:10).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1. 여러분은 주님을 아십니까? 나를 구원하시고, 피를 흘리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2. 나에게 주어진 고통과 시련은 주를 위한 것이다.
3. 적이 강하면 강할수록, 일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주님의 영광은 더욱 빛난다. 주님께서 완악한 파라오를 통해 주님의 능력을 더욱 크게 드러내셨다. 우리는 파라오의 완악함을 보지 말고 주님의 전능하심을 보아야 한다.
4. 주님은 전능자이시며,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다. 우리는 영존하는 피의 언약 아래 있다.
5. 주님은 약속하셨다. 무조건적 언약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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