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 12일- 출애굽기
출애굽기(XV)
말씀: 출애굽기 4:30-31
요절: 출애굽기 4:31
15.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이집트로 돌아온 모세는 아론과 함께 하나님이 주신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과 백성들에게 말씀을 증거했고, 표적을 보여 주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백성들은 모세를 받아들였고, 머리 숙여 주님께 경배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신을 경배하는 무리들을 찾으십니다. 모세의 증거를 들은 장로들과 백성들은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참된 예배를 회복했습니다.
예배의 회복은 타락한 이 세상의 삶을 종결짓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변화된 삶을 사는 출발점입니다. 머리 숙여 주님을 경배한 것은 영적 생명이 살아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배야말로 영적 부흥의 시작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은 하나같이 주님을 경배하는 것을 삶의 기초로 삼았고,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습니다. 노아는 주께 제단을 쌓고 번제 헌물을 드렸습니다(창8:20).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일생은 주께 제단을 쌓는 일생이었습니다(창12:7,8, 13:4,18, 22:8). 이삭과 야곱 역시 주께 제단을 쌓음으로써 주님을 경배했습니다(창35:1,3). 야곱은 무너진 자신의 삶을 주께 제단을 쌓고 주를 경배함으로써 새롭게 회복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증거했다면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그들이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주님을 경배하는 삶을 살았고, 주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았듯이, 백성들 역시 그러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우상 숭배로 만연한 이스라엘을 회복하기 위해 무너진 제단을 보수하였듯이, 우리는 모두 영적 이기심과 세속에 물든 교회를 위해 참된 예배를 회복해야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참된 경배를 원하시며, 참된 경배자를 찾으십니다. [그러나 참되게 경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라.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경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이니라.](요4:23).
4:31에 백성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믿고...듣고...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4:31).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매 주일 나와서 찬송을 부르고, 설교를 듣고, 헌금을 내고, 교제를 하지만 영과 진리로 드리는 진정한 경배가 있는지는 의문스럽습니다. 교회마다 성가대의 찬양이 있고, 멋진 조명이 있고, 풍성한 먹을거리가 준비하지만 [...믿고...듣고...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4:31)가 되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는 헛된 예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속하신 첫 번째 이유는 주님을 경배하는 한 무리를 얻고자 하심이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 앞에 나가서 계속적으로 전하는 주님의 말씀은 ‘내 백성으로 하여금 가서 주께 경배 드리게 하라’였습니다. 주님을 경배하는 것은 우리 삶의 중심이요, 맨 첫 자리에 위치하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의 첫 조건은 하나님의 증거를 믿는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보내신 대언자들과 사도들과 전도자들을 통해서 선포되는 말씀을 믿는 것이 바로 예배의 선행 조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선포되는 주의 증거를 믿었습니다. 말씀을 믿지 않고 드리는 경배는 헛된 경배일 뿐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인격과 속성을 믿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보살피시고, 우리를 위해 일하시며, 지금도 감찰하시며, 은혜와 긍휼을 베푸신다는 선한 증거들을 믿기에 머리 숙여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창세기 1:1에서 증거된 주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일점 일획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주님의 말씀으로 증거를 믿는 믿음이 바로 경배의 첫 걸음이며, 선행 조건입니다.
믿음이 없는 경배는 헛된 경배입니다. 믿음으로 성도는 마음의 변화를 받아 주님을 경배합니다. 마음의 변화를 받지 않고 드리는 경배는 변장입니다. 변화냐? 변장이냐? 는 참이냐 거짓이냐의 차이입니다. 기록된 말씀, 성령의 증거를 믿는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종교 의식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주님을 경배한다고 했지만 주님은 그들의 경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들의 명령들을 교리로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명령들을 교리로 가르치니 내게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마15:9).
주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야말로 영적 삶의 원리이며, 승리의 원동력이며, 예배의 기초입니다. 마음의 변화를 받아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삶의 변화를 주도할 수 있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가? 주위 환경에 순응하여 세상에 일치하는 삶을 사는가?는 바로 참된 경배를 드리는 자인가? 아닌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참된 경배의 의미를 알고, 제대로 주님을 경배하는 성도들만이 살아 있는 성도요, 깨어 있는 성도입니다. 헛되이 경배하는 자들이 아무리 열심히,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주님을 외치고, 행사를 마련해서 바쁘게 움직여도 거기에는 영적 생명이 없습니다. 존 스토는 박사는 “회중 예배든 개인 예배든 그리스도인이 드리는 예배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성경 말씀에 지성적으로 올바르게 반응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믿는 믿음에 따른 합당한 반응으로써 주님께 경배해야 합니다. 이런 경배의 경험은 삶에서의 실제적인 사역으로 드러납니다. 참된 경배는 영적 경험을 통해 열매를 맺고, 자신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칩니다. 가장 훌륭한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드린 예배의 결과가 나의 삶을 통해 몸으로 드러날 때입니다. 참된 경배는 주님을 경배한 이후에 능력있는 삶으로 드러납니다. 주님께 자신의 몸을 산제물로 드린 성도는 그 몸을 결코 더럽고, 열매없는 어둠의 일에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든 문제는 참된 예배의 결여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개교회마다 예배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매 주일, 수요일, 금요일 등 여러 가지 예배 프로그램을 마련합니다. 그러나, 예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의 장소나 멋진 설교나 찬양이나 간증, 성도의 교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경배하기 모였다면 먼저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 함께 모였다면 먼저 우리의 믿음, 나의 믿는 바를 고백함으로 경배는 시작됩니다.
참된 예배를 회복하라! 이것은 오늘날 교회를 향한 선지자들의 외침입니다. 참된 예배를 회복하라. 참된 예배를 회복하라. 교회의 갱신 프로그램, 교회의 영적 프로그램이 아무리 많아도 참된 예배의 회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영적인 복은 참된 예배의 부산물이기 때문입니다.
4:31에 백성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백성이 믿으며 또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아오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펴보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출4:31). 참된 경배는 말씀의 선포를 듣는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모세와 모세의 말을 받은 아론의 선포를 통해 백성들은 머리 숙여 경배했습니다. 경배는 선포된 말씀에 대한 우리의 내적인 반응입니다. 믿는 마음을 지닌 백성들은 말씀을 결코 흘려듣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의 종들이 선포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참된 경배자와 헛되이 경배하는 타락한 백성들의 차이는 말씀을 듣는 자세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는 백성들의 자세는 믿는 마음이었습니다. 대언자 에스겔의 선포를 듣는 백성들은 위선과 가식이었습니다. [그들이 백성이 오는 것같이 네게 오며 내 백성같이 네 앞에 앉아 네 말들을 들으나 그것들을 행하려 하지는 아니하나니 이는 그들이 자기 입으로는 많은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자기의 탐욕을 따르기 때문이니라.](겔33:31).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던 예레미야 역시 그것을 토로했습니다. [참으로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를 내리고 참으로 그들이 자라서 열매를 맺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속 중심은 머나이다.](렘12:2). 우리는 살아있는 예배, 참된 경배의 현장을 보려면 설교 현장에서 말씀을 듣는 성도들의 반응을 보면 됩니다.
설교를 경청하며 메모도 하고, 표시도 하지만 아무런 놀라움이 없다면 머리 숙여 경배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한 마디에도 눈물이 나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새롭고 놀라운 진리가 아니라 이전부터 늘 선포되어온 말씀이지만 놀랍고 신기하고, 경이롭게 받아들여진다면 그는 분명 참된 경배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 이런 말씀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해야 합니다.
지식의 홍수 속에서, 정보의 바다 속에서 어지간한 설교에는 반응이 오지 않는 이런 현실을 볼 때, 저는 복이 아닌 저주를 느낍니다. 설교자는 선포가 아니라 설명하는데 정신이 없고, 성도는 놀람과 경탄,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대신 뭔가 새로운 것을 찾는데 정신이 없다면 그것은 주님을 경배하는 시간이 아니라 ‘성경 비평, 설교 비평’ 시간이 될 뿐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경이감이 무지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예를들어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나 물건들을 볼 때 우리는 놀라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이감은 무지가 아니라 참된 지식에서 나옵니다. 과학적 신학적 사실은 머리를 채우지만 진리는 경건한 사람의 마음을 채우고, 불타오르게 합니다.
선포되는 말씀에 대한 우리의 합당한 반응은 경배의 선행조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 동안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듣고,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고통을 보셨으며, 언약을 기억하셨다는 소식은 그들을 놀랍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들을 때 백성들은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백성들은 표적을 보고 놀란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은 표적이나 이적으로 인해 고개를 숙인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아오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펴보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했습니다. 예배는 주님의 약속, 주님의 은혜, 주님의 신실하심 등 주님의 어떠하심의 선포를 통해 우리의 마음이 가득 채워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참으로 놀라운 신학적 지식의 소유자였지만 그는 결코 경이로움의 신비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우리가 모두 지식 본위의 성경 공부, 설명 위주의 설교에서 찬양과 놀라움, 경이로움으로 나가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의 예배는 훨씬 더 풍요로와 질 것입니다. 참된 경배를 위해서, 영적 예배를 위해서 우리는 모두 주님의 말씀을 듣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아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그것이 무감각하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 눈물을 흘릴 일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 역시 피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역전의 용사요, 위대한 왕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순수한 감각, 감성을 유지한 사람이었습니다. 시편 9:8에서 그는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깊이 생각하시오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찾아오시나이까?](시8:4). [[주]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주시나이까!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나이까!](시144:3). 우리는 주님의 이름 중 하나가 놀라움(Wonderful)이란 사실을 압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성경 기록은 모두 놀라운 주님의 경이로움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완악한 마음은 이런 글을 읽고, 들으면서 어떻게 반응합니까?
우리의 예배는 화답이 있어야 하며, 합당한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에스라가 [주] 곧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매 온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머리를 숙여 얼굴을 땅에 대고 [주]께 경배하였느니라.](느8:6). 에스라의 설교에 반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렬하고 뜨거운 반응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합당하게 반응하십시오. 아멘으로 화답하십시오. 이것은 참된 경배입니다.
4:31에 백성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백성이 믿으며 또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아오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펴보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출4:31). 예배의 또 한가지 중요한 요소는 모임입니다.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이 있는 곳에 함께 모였습니다. 주님은 성도들의 모임을 매우 중요시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일수록 모임은 점점 힘들어집니다. 너무나 바쁘고, 모임보다 간편한 여러 가지 대체 수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인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배를 위한 교회의 집회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배를 드리러 모인다는 것은 곧 증거하기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모세가 연 이스라엘 백성들의 첫 집회는 이제 온 세상에 이 세상의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이집트와 온 민족에게 증거하는 첫 단추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을 경배한다는 사실은 세상에 주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을 경배한다는 것은 바로 세상에 주님을 경배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전도를 통해서 주님을 증거하지만 교회는 건물이 서있고, 모임이 있는 자체만으로 세상에 주님을 증거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교회의 간판을 보고, 그리로 출입하는 사람들을 보고, 모여드는 사람들을 볼 때 이미 그들은 교회의 증거를 받게 됩니다.
경배는 주님에 대한 증거, 세상에 대한 증거, 교회에 대한 증거라는 세 가지 측면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다시 오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증거는 세상이 악하다는 사실과 우리는 주님의 피로 세상과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증거란 것은 우리가 모두 주의 피로 맺어진 한 형제들이며, 서로 덕을 세우며 믿음을 격려하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공동체란 사실을 서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경배를 위해 함께 모인 모임 자체가 서로 다른 형제들의 identity를 확인해 주는 것이며, 우리의 믿음과 뜻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4:31에 백성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백성이 믿으며 또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아오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펴보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출4:31).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께 드린 경배는 이제 영적 전쟁의 시작입니다. 예배는 영적 전쟁에 대한 선전포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경배를 원하듯이 마귀 역시 경배 받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광야의 시험에서 사탄이 예수님께 자신에게 경배하라고 제안하는 장면을 우리는 봅니다(마4:19). 마귀는 성도들이 영적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파괴함으로써 성도들을 패배시킵니다. 예배에 실패한 성도는 모든 것에 다 실패한 성도입니다. 마귀는 앞으로도 자신을 높여 모든 사람들의 경배를 받고자 할 것입니다. [그는 대적하는 자요, 하나님이라 불리거나 혹은 경배를 받는 모든 것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로서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살후2:4).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곧 마귀를 대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땅에서 머리숙여 주께 경배했다는 사실은 마귀를 대적하고, 승리를 쟁취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배하는 성도는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성도입니다. 예배하는 교회는 반드시 전투하는 교회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참된 경배,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영적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경배함으로써 시작된 세상과의 전쟁은 주님이 다시 오셔서 마귀를 멸하실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 역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도록 부름받은 영적 군대입니다. 교회는 주님을 예배하는 군대입니다. 전쟁의 승패는 예배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는 왕과 제사장, 백성들이 주님께 대한 바른 예배를 드렸는가?에 좌우되었습니다. 성막에서 신실한 사역이 이루어질 때 전쟁에서의 승리는 보장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했을 때는 그들의 군사력이나 경제력이나 외교력의 부재가 아니라 언제나 영적 예배의 타락과 결핍에 기인했습니다. 역대기하 20장은 예배와 전쟁의 함수 관계가 가장 잘 드러나 있습니다.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이 유다를 치러 올라왔을 때 왕이었던 여호사밧은 어떻게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회중들을 모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역대기하 20:3-9,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몸을 [주]께로 향해 간구하고 온 유다에 두루 금식을 선포하매 유다가 [주]께 도우심을 구하려 하여 함께 모이고 유다의 모든 도시에서 나와 [주]를 찾더라. ¶ 여호사밧이 [주]의 집의 새 뜰 앞에서 유다와 예루살렘 회중 가운데 서서 이르되, 오 [주]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교도들의 모든 왕국을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능과 능력이 있사오매 능히 막을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아니하나이까? 주는 우리의 하나님 곧 전에 이 땅의 거주민들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이 땅을 주의 벗 아브라함의 씨에게 영원히 주신 분이 아니니이까? 그들이 이 땅에 거하여 그 안에 주의 이름을 위하여 한 성소를 건축하고 이르기를, 만일 칼이나 심판이나 역병이나 기근 같은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집에 있으니) 우리가 이 집 앞과 주의 눈앞에 서서 우리의 고통 중에 [주]께 부르짖은즉 주께서 들으시고 도우시리라, 하였나이다.](대하20:3-9). 그 결과 그들은 적들의 자중지란으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올바른 경배는 영적 승리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전리품을 취해 예루살렘에 돌아와 다시 한번 주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믿고,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는 예배의 생활없이 승리의 생활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참된 예배가 무너질 때 종교는 융성하고 진리는 급격히 쇠약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배교와 심판으로 끝이 나고 맙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깨어 있어야 하며,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취함으로써 전쟁을 수행해야 합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구원의 투구를 씀으로서 나의 생각을 지켜 주시도록 기도하고, 의의 흉배로 나의 마음(가슴)을 지켜 주시도록 구하고, 진리의 허리 띠로 나의 행동을 제어하고, 화평의 신을 신고 의의 길을 걸어 다녀야 합니다. 능력없이 단지 무장만 한 것이 아니라 악한 자의 모든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믿음의 방패와 이길 수 있는 말씀의 칼을 잡습니다.
주님을 경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 주님이 나를 위해 흘리신 보혈과 대속의 죽음을 받아 들이고, 나를 위해 일어나신 부활의 사실을 그대로 믿음으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현재 나에게 그대로 적용시키며 머리 숙여 경배하는 것입니다. 경배란 바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는 것이며, 주를 위해 나의 몸을 의의 병기로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군인의 생명은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것이 군인입니다. 경배란 바로 주의 명령을 나의 생명보다 더 사랑하고 지키는 것을 주님과 교회와 세상에 보여 주는 신성한 행위입니다.
초대 교회는 예배하는 교회였습니다.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에만 전무했다는 사실(행6:4)을 기억해 보십시오. 아무리 규모가 크고, 많은 교인이 있는 교회라 할지라도 예배하는 교회, 예배 드리는 교회가 되지 못한다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요한 계시록을 통해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과 용을 경배하는 자들의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종교 전쟁이라고 치부할지 모르지만 예배는 분명 전쟁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때로부터 예배는 전쟁이었습니다. 아벨이 죽은 것은 참된 경배를 어떻게 드리는가?에 대한 문제로 야기된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누구에게 경배해야 하는가?란 문제로 죽임을 당할 뻔했습니다. 욥에 대한 사탄의 공격 역시 예배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4:31에 백성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백성이 믿으며 또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아오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펴보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출4:31). 경배는 우리의 기도 생활을 풍성하게 해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께 머리 숙여 경배함으로써 주님과 교제의 통로가 열렸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동시에 자신들의 필요를 주님께 아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의 기도는 주님이 들으십니다. 요한복음 9:31,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말은 듣지 아니하시나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사람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이제 우리가 아나이다.](요9:31).
저는 오늘 성도들이 모두 하나님을 경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참된 경배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믿음에서 시작하여 기록된 모든 말씀을 믿음으로 시작됩니다.
참된 경배는 말씀을 들음으로써 시작됩니다.
참된 경배는 영과 진리로써 드려져야 합니다.
참된 경배는 증거가 있습니다. 참된 경배는 마음의 변화를 통해 몸이 드려지고, 몸으로 드러나는 결과가 있습니다.
참된 경배는 전투하는 영적 전쟁을 수행합니다.
참된 경배는 기도의 응답을 보장해 줍니다.
오늘날 성도들과 교회들은 너무나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예배의 반복에 빠져들어 있기에 만약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두어 가 버리신다고 해도 별 차이를 전혀 느끼지 못한 채 그대로 흘러 갈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 이곳에 계신 모든 형제, 자매님들은 지금 바로 지금 이 시간에 주님께 머리 숙여 경배드리는 참된 경배자가 될 것을 결단해야 합니다. 예배자가 아니면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예배자 아니면 승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배자가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예배자가 아니면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배자가 아니면 세상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잠깐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출애굽기(XV)
말씀: 출애굽기 4:30-31
요절: 출애굽기 4:31
15.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이집트로 돌아온 모세는 아론과 함께 하나님이 주신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과 백성들에게 말씀을 증거했고, 표적을 보여 주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백성들은 모세를 받아들였고, 머리 숙여 주님께 경배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신을 경배하는 무리들을 찾으십니다. 모세의 증거를 들은 장로들과 백성들은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참된 예배를 회복했습니다.
예배의 회복은 타락한 이 세상의 삶을 종결짓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변화된 삶을 사는 출발점입니다. 머리 숙여 주님을 경배한 것은 영적 생명이 살아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배야말로 영적 부흥의 시작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은 하나같이 주님을 경배하는 것을 삶의 기초로 삼았고,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습니다. 노아는 주께 제단을 쌓고 번제 헌물을 드렸습니다(창8:20).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일생은 주께 제단을 쌓는 일생이었습니다(창12:7,8, 13:4,18, 22:8). 이삭과 야곱 역시 주께 제단을 쌓음으로써 주님을 경배했습니다(창35:1,3). 야곱은 무너진 자신의 삶을 주께 제단을 쌓고 주를 경배함으로써 새롭게 회복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증거했다면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그들이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주님을 경배하는 삶을 살았고, 주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았듯이, 백성들 역시 그러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우상 숭배로 만연한 이스라엘을 회복하기 위해 무너진 제단을 보수하였듯이, 우리는 모두 영적 이기심과 세속에 물든 교회를 위해 참된 예배를 회복해야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참된 경배를 원하시며, 참된 경배자를 찾으십니다. [그러나 참되게 경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라.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경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이니라.](요4:23).
4:31에 백성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믿고...듣고...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4:31).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매 주일 나와서 찬송을 부르고, 설교를 듣고, 헌금을 내고, 교제를 하지만 영과 진리로 드리는 진정한 경배가 있는지는 의문스럽습니다. 교회마다 성가대의 찬양이 있고, 멋진 조명이 있고, 풍성한 먹을거리가 준비하지만 [...믿고...듣고...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4:31)가 되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는 헛된 예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속하신 첫 번째 이유는 주님을 경배하는 한 무리를 얻고자 하심이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 앞에 나가서 계속적으로 전하는 주님의 말씀은 ‘내 백성으로 하여금 가서 주께 경배 드리게 하라’였습니다. 주님을 경배하는 것은 우리 삶의 중심이요, 맨 첫 자리에 위치하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의 첫 조건은 하나님의 증거를 믿는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보내신 대언자들과 사도들과 전도자들을 통해서 선포되는 말씀을 믿는 것이 바로 예배의 선행 조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선포되는 주의 증거를 믿었습니다. 말씀을 믿지 않고 드리는 경배는 헛된 경배일 뿐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인격과 속성을 믿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보살피시고, 우리를 위해 일하시며, 지금도 감찰하시며, 은혜와 긍휼을 베푸신다는 선한 증거들을 믿기에 머리 숙여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창세기 1:1에서 증거된 주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일점 일획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주님의 말씀으로 증거를 믿는 믿음이 바로 경배의 첫 걸음이며, 선행 조건입니다.
믿음이 없는 경배는 헛된 경배입니다. 믿음으로 성도는 마음의 변화를 받아 주님을 경배합니다. 마음의 변화를 받지 않고 드리는 경배는 변장입니다. 변화냐? 변장이냐? 는 참이냐 거짓이냐의 차이입니다. 기록된 말씀, 성령의 증거를 믿는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종교 의식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주님을 경배한다고 했지만 주님은 그들의 경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들의 명령들을 교리로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명령들을 교리로 가르치니 내게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마15:9).
주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야말로 영적 삶의 원리이며, 승리의 원동력이며, 예배의 기초입니다. 마음의 변화를 받아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삶의 변화를 주도할 수 있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가? 주위 환경에 순응하여 세상에 일치하는 삶을 사는가?는 바로 참된 경배를 드리는 자인가? 아닌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참된 경배의 의미를 알고, 제대로 주님을 경배하는 성도들만이 살아 있는 성도요, 깨어 있는 성도입니다. 헛되이 경배하는 자들이 아무리 열심히,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주님을 외치고, 행사를 마련해서 바쁘게 움직여도 거기에는 영적 생명이 없습니다. 존 스토는 박사는 “회중 예배든 개인 예배든 그리스도인이 드리는 예배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성경 말씀에 지성적으로 올바르게 반응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믿는 믿음에 따른 합당한 반응으로써 주님께 경배해야 합니다. 이런 경배의 경험은 삶에서의 실제적인 사역으로 드러납니다. 참된 경배는 영적 경험을 통해 열매를 맺고, 자신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칩니다. 가장 훌륭한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드린 예배의 결과가 나의 삶을 통해 몸으로 드러날 때입니다. 참된 경배는 주님을 경배한 이후에 능력있는 삶으로 드러납니다. 주님께 자신의 몸을 산제물로 드린 성도는 그 몸을 결코 더럽고, 열매없는 어둠의 일에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든 문제는 참된 예배의 결여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개교회마다 예배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매 주일, 수요일, 금요일 등 여러 가지 예배 프로그램을 마련합니다. 그러나, 예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의 장소나 멋진 설교나 찬양이나 간증, 성도의 교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경배하기 모였다면 먼저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 함께 모였다면 먼저 우리의 믿음, 나의 믿는 바를 고백함으로 경배는 시작됩니다.
참된 예배를 회복하라! 이것은 오늘날 교회를 향한 선지자들의 외침입니다. 참된 예배를 회복하라. 참된 예배를 회복하라. 교회의 갱신 프로그램, 교회의 영적 프로그램이 아무리 많아도 참된 예배의 회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영적인 복은 참된 예배의 부산물이기 때문입니다.
4:31에 백성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백성이 믿으며 또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아오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펴보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출4:31). 참된 경배는 말씀의 선포를 듣는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모세와 모세의 말을 받은 아론의 선포를 통해 백성들은 머리 숙여 경배했습니다. 경배는 선포된 말씀에 대한 우리의 내적인 반응입니다. 믿는 마음을 지닌 백성들은 말씀을 결코 흘려듣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의 종들이 선포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참된 경배자와 헛되이 경배하는 타락한 백성들의 차이는 말씀을 듣는 자세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는 백성들의 자세는 믿는 마음이었습니다. 대언자 에스겔의 선포를 듣는 백성들은 위선과 가식이었습니다. [그들이 백성이 오는 것같이 네게 오며 내 백성같이 네 앞에 앉아 네 말들을 들으나 그것들을 행하려 하지는 아니하나니 이는 그들이 자기 입으로는 많은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자기의 탐욕을 따르기 때문이니라.](겔33:31).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던 예레미야 역시 그것을 토로했습니다. [참으로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를 내리고 참으로 그들이 자라서 열매를 맺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속 중심은 머나이다.](렘12:2). 우리는 살아있는 예배, 참된 경배의 현장을 보려면 설교 현장에서 말씀을 듣는 성도들의 반응을 보면 됩니다.
설교를 경청하며 메모도 하고, 표시도 하지만 아무런 놀라움이 없다면 머리 숙여 경배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한 마디에도 눈물이 나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새롭고 놀라운 진리가 아니라 이전부터 늘 선포되어온 말씀이지만 놀랍고 신기하고, 경이롭게 받아들여진다면 그는 분명 참된 경배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 이런 말씀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해야 합니다.
지식의 홍수 속에서, 정보의 바다 속에서 어지간한 설교에는 반응이 오지 않는 이런 현실을 볼 때, 저는 복이 아닌 저주를 느낍니다. 설교자는 선포가 아니라 설명하는데 정신이 없고, 성도는 놀람과 경탄,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대신 뭔가 새로운 것을 찾는데 정신이 없다면 그것은 주님을 경배하는 시간이 아니라 ‘성경 비평, 설교 비평’ 시간이 될 뿐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경이감이 무지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예를들어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나 물건들을 볼 때 우리는 놀라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이감은 무지가 아니라 참된 지식에서 나옵니다. 과학적 신학적 사실은 머리를 채우지만 진리는 경건한 사람의 마음을 채우고, 불타오르게 합니다.
선포되는 말씀에 대한 우리의 합당한 반응은 경배의 선행조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 동안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듣고,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고통을 보셨으며, 언약을 기억하셨다는 소식은 그들을 놀랍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들을 때 백성들은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백성들은 표적을 보고 놀란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은 표적이나 이적으로 인해 고개를 숙인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아오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펴보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했습니다. 예배는 주님의 약속, 주님의 은혜, 주님의 신실하심 등 주님의 어떠하심의 선포를 통해 우리의 마음이 가득 채워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참으로 놀라운 신학적 지식의 소유자였지만 그는 결코 경이로움의 신비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우리가 모두 지식 본위의 성경 공부, 설명 위주의 설교에서 찬양과 놀라움, 경이로움으로 나가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의 예배는 훨씬 더 풍요로와 질 것입니다. 참된 경배를 위해서, 영적 예배를 위해서 우리는 모두 주님의 말씀을 듣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아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그것이 무감각하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 눈물을 흘릴 일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 역시 피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역전의 용사요, 위대한 왕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순수한 감각, 감성을 유지한 사람이었습니다. 시편 9:8에서 그는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깊이 생각하시오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찾아오시나이까?](시8:4). [[주]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주시나이까!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나이까!](시144:3). 우리는 주님의 이름 중 하나가 놀라움(Wonderful)이란 사실을 압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성경 기록은 모두 놀라운 주님의 경이로움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완악한 마음은 이런 글을 읽고, 들으면서 어떻게 반응합니까?
우리의 예배는 화답이 있어야 하며, 합당한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에스라가 [주] 곧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매 온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머리를 숙여 얼굴을 땅에 대고 [주]께 경배하였느니라.](느8:6). 에스라의 설교에 반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렬하고 뜨거운 반응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합당하게 반응하십시오. 아멘으로 화답하십시오. 이것은 참된 경배입니다.
4:31에 백성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백성이 믿으며 또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아오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펴보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출4:31). 예배의 또 한가지 중요한 요소는 모임입니다.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이 있는 곳에 함께 모였습니다. 주님은 성도들의 모임을 매우 중요시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일수록 모임은 점점 힘들어집니다. 너무나 바쁘고, 모임보다 간편한 여러 가지 대체 수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인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배를 위한 교회의 집회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배를 드리러 모인다는 것은 곧 증거하기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모세가 연 이스라엘 백성들의 첫 집회는 이제 온 세상에 이 세상의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이집트와 온 민족에게 증거하는 첫 단추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을 경배한다는 사실은 세상에 주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을 경배한다는 것은 바로 세상에 주님을 경배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전도를 통해서 주님을 증거하지만 교회는 건물이 서있고, 모임이 있는 자체만으로 세상에 주님을 증거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교회의 간판을 보고, 그리로 출입하는 사람들을 보고, 모여드는 사람들을 볼 때 이미 그들은 교회의 증거를 받게 됩니다.
경배는 주님에 대한 증거, 세상에 대한 증거, 교회에 대한 증거라는 세 가지 측면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다시 오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증거는 세상이 악하다는 사실과 우리는 주님의 피로 세상과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증거란 것은 우리가 모두 주의 피로 맺어진 한 형제들이며, 서로 덕을 세우며 믿음을 격려하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공동체란 사실을 서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경배를 위해 함께 모인 모임 자체가 서로 다른 형제들의 identity를 확인해 주는 것이며, 우리의 믿음과 뜻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4:31에 백성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백성이 믿으며 또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아오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펴보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출4:31).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께 드린 경배는 이제 영적 전쟁의 시작입니다. 예배는 영적 전쟁에 대한 선전포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경배를 원하듯이 마귀 역시 경배 받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광야의 시험에서 사탄이 예수님께 자신에게 경배하라고 제안하는 장면을 우리는 봅니다(마4:19). 마귀는 성도들이 영적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파괴함으로써 성도들을 패배시킵니다. 예배에 실패한 성도는 모든 것에 다 실패한 성도입니다. 마귀는 앞으로도 자신을 높여 모든 사람들의 경배를 받고자 할 것입니다. [그는 대적하는 자요, 하나님이라 불리거나 혹은 경배를 받는 모든 것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로서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살후2:4).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곧 마귀를 대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땅에서 머리숙여 주께 경배했다는 사실은 마귀를 대적하고, 승리를 쟁취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배하는 성도는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성도입니다. 예배하는 교회는 반드시 전투하는 교회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참된 경배,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영적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경배함으로써 시작된 세상과의 전쟁은 주님이 다시 오셔서 마귀를 멸하실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 역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도록 부름받은 영적 군대입니다. 교회는 주님을 예배하는 군대입니다. 전쟁의 승패는 예배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는 왕과 제사장, 백성들이 주님께 대한 바른 예배를 드렸는가?에 좌우되었습니다. 성막에서 신실한 사역이 이루어질 때 전쟁에서의 승리는 보장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했을 때는 그들의 군사력이나 경제력이나 외교력의 부재가 아니라 언제나 영적 예배의 타락과 결핍에 기인했습니다. 역대기하 20장은 예배와 전쟁의 함수 관계가 가장 잘 드러나 있습니다.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이 유다를 치러 올라왔을 때 왕이었던 여호사밧은 어떻게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회중들을 모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역대기하 20:3-9,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몸을 [주]께로 향해 간구하고 온 유다에 두루 금식을 선포하매 유다가 [주]께 도우심을 구하려 하여 함께 모이고 유다의 모든 도시에서 나와 [주]를 찾더라. ¶ 여호사밧이 [주]의 집의 새 뜰 앞에서 유다와 예루살렘 회중 가운데 서서 이르되, 오 [주]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교도들의 모든 왕국을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능과 능력이 있사오매 능히 막을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아니하나이까? 주는 우리의 하나님 곧 전에 이 땅의 거주민들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이 땅을 주의 벗 아브라함의 씨에게 영원히 주신 분이 아니니이까? 그들이 이 땅에 거하여 그 안에 주의 이름을 위하여 한 성소를 건축하고 이르기를, 만일 칼이나 심판이나 역병이나 기근 같은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집에 있으니) 우리가 이 집 앞과 주의 눈앞에 서서 우리의 고통 중에 [주]께 부르짖은즉 주께서 들으시고 도우시리라, 하였나이다.](대하20:3-9). 그 결과 그들은 적들의 자중지란으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올바른 경배는 영적 승리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전리품을 취해 예루살렘에 돌아와 다시 한번 주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믿고,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는 예배의 생활없이 승리의 생활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참된 예배가 무너질 때 종교는 융성하고 진리는 급격히 쇠약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배교와 심판으로 끝이 나고 맙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깨어 있어야 하며,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취함으로써 전쟁을 수행해야 합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구원의 투구를 씀으로서 나의 생각을 지켜 주시도록 기도하고, 의의 흉배로 나의 마음(가슴)을 지켜 주시도록 구하고, 진리의 허리 띠로 나의 행동을 제어하고, 화평의 신을 신고 의의 길을 걸어 다녀야 합니다. 능력없이 단지 무장만 한 것이 아니라 악한 자의 모든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믿음의 방패와 이길 수 있는 말씀의 칼을 잡습니다.
주님을 경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 주님이 나를 위해 흘리신 보혈과 대속의 죽음을 받아 들이고, 나를 위해 일어나신 부활의 사실을 그대로 믿음으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현재 나에게 그대로 적용시키며 머리 숙여 경배하는 것입니다. 경배란 바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는 것이며, 주를 위해 나의 몸을 의의 병기로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군인의 생명은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것이 군인입니다. 경배란 바로 주의 명령을 나의 생명보다 더 사랑하고 지키는 것을 주님과 교회와 세상에 보여 주는 신성한 행위입니다.
초대 교회는 예배하는 교회였습니다.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에만 전무했다는 사실(행6:4)을 기억해 보십시오. 아무리 규모가 크고, 많은 교인이 있는 교회라 할지라도 예배하는 교회, 예배 드리는 교회가 되지 못한다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요한 계시록을 통해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과 용을 경배하는 자들의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종교 전쟁이라고 치부할지 모르지만 예배는 분명 전쟁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때로부터 예배는 전쟁이었습니다. 아벨이 죽은 것은 참된 경배를 어떻게 드리는가?에 대한 문제로 야기된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누구에게 경배해야 하는가?란 문제로 죽임을 당할 뻔했습니다. 욥에 대한 사탄의 공격 역시 예배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4:31에 백성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백성이 믿으며 또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아오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펴보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출4:31). 경배는 우리의 기도 생활을 풍성하게 해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께 머리 숙여 경배함으로써 주님과 교제의 통로가 열렸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동시에 자신들의 필요를 주님께 아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의 기도는 주님이 들으십니다. 요한복음 9:31,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말은 듣지 아니하시나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사람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이제 우리가 아나이다.](요9:31).
저는 오늘 성도들이 모두 하나님을 경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참된 경배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믿음에서 시작하여 기록된 모든 말씀을 믿음으로 시작됩니다.
참된 경배는 말씀을 들음으로써 시작됩니다.
참된 경배는 영과 진리로써 드려져야 합니다.
참된 경배는 증거가 있습니다. 참된 경배는 마음의 변화를 통해 몸이 드려지고, 몸으로 드러나는 결과가 있습니다.
참된 경배는 전투하는 영적 전쟁을 수행합니다.
참된 경배는 기도의 응답을 보장해 줍니다.
오늘날 성도들과 교회들은 너무나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예배의 반복에 빠져들어 있기에 만약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두어 가 버리신다고 해도 별 차이를 전혀 느끼지 못한 채 그대로 흘러 갈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 이곳에 계신 모든 형제, 자매님들은 지금 바로 지금 이 시간에 주님께 머리 숙여 경배드리는 참된 경배자가 될 것을 결단해야 합니다. 예배자가 아니면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예배자 아니면 승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배자가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예배자가 아니면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배자가 아니면 세상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잠깐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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