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2003년 1월 05일- 출애굽기        


출애굽기(XIV)

말씀: 출애굽기 4:20-31
요절: 출애굽기 4:30,31




14. 제 3의 인생




사람들은 일생동안 몇번의 위기와 몇번의 결정적인 기회를 맞는다고 합니다. 저는 인생을 오래 살아 보지 않아서 그런 것들을 말할 수 없지만 성경의 위인들 가운데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수 저편에서의 삶과 순례자로서의 삶의 분명한 구분이 있습니다. 순례의 길에서 이삭을 낳기 전과 낳은 후의 삶은 분명한 구분이 있습니다. 야곱의 인생 역시 세 부분으로 뚜렷이 구분이 됩니다. 요셉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모세의 인생 역시 그렇습니다. 이들은 모두 마지막 인생을 불꽃처럼 타오르는 믿음의 삶을 살았으며, 절정의 인생을 맞았습니다. 말년이 유년기나 청년기보다 못한 사람은 비참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말년, 이삭의 말년, 야곱의 말년, 요셉의 말년은 모두 주님을 믿는 믿음의 진수가 무엇인지를 보여 준 삶이었습니다. 반면 제사장 엘리의 말년은 비참했습니다. 그는 자식들이 죽고, 언약궤가 빼앗기고, 집안이 망하는 것을 보고 들으면서 죽었습니다. 솔로몬의 말년도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상 숭배로 인해 마음이 어두워지고, 다윗 왕국이 금이 가도록 심판의 매를 맞았습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성숙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말년의 믿음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부단한 훈련과 연단, 시련을 통해서 자아가 죽고, 믿음이 성장한 결과입니다. 

보통 첫 인생은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입니다. 
두 번째 인생은 하나님을 알고, 믿되 육신적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인생의 주도권을 자신이 쥐고 사는 삶입니다. 

세 번째 인생은 영적으로 헌신된 삶을 사는 인생입니다. 삶의 모든 것을 주님의 주권과 뜻 아래 맡기고 순종하는 삶입니다. -제 3의 인생.

모세는 40년을 공주의 딸로서 하나님없이 살았습니다. 그후 40년을 광야의 목자로서 육신적으로 살았습니다. 마지막 40년을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영적으로 헌신된 제3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오늘은 드디어 제 3의 인생을 살기 위해 첫 발을 내딛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지금까지는 자의반, 타의반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모세가 파라오의 궁전에 산 것도, 미디안의 광야에 산 것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내 몰린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해서 믿음으로 걷는 걸음입니다. 진정한 인생의 길이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며, 주님은 여기서부터 우리 인생의 날 수를 세십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자기 아내와 아들들을 데려다가 나귀에 태우고 이집트 땅으로 돌아갔으며 하나님의 막대기를 자기 손에 잡았더라.](20). 드디어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족들을 나귀에 태우고 이집트 땅으로 갑니다. 복수의 활극을 펼치는 것도 아니고, 개선 장군처럼 당당하게 파라오의 사면 복권으록 가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대사(大使)로서 파송되어 가는 길입니다. 모세의 손에는 ‘하나님의 막대기’가 잡혀 있었습니다.

모세가 믿음으로 순종하는데까지 결코 쉽지 않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모세는 ‘주님께 나는 능력이 없습니다’(3:11), ‘나는 전할 말이 없습니다’(3:13), ‘나는 권위가 없습니다’(4:1). ‘나는 말을 잘 하지 못합니다’(4:10). ‘나는 그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4:13)며 계속해서 핑계와 변명으로 일관했지만 주님은 그 때마다 말씀을 주셨고, 믿음을 도우셨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모세처럼 주님 앞에서 이렇게 부르심을 변명한다면 주님은 성경을 통해 답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 저는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면 빌립보서 4:13을 펴 보아라 하실 것입니다.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우리는 우리의 능력으로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 말씀의 능력으로 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 ‘저는 전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면 고린도전서 15:3,4을 펴 보아라 하실 것입니다. [이는 나 역시 전해 받은 것을 무엇보다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니 그것은 곧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성경대로 셋째 날에 다시 일어나시고](고전15:3-4). 우리가 전할 말은 우리가 지어내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해 받은 옛 복음을 전하면 됩니다.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고민되면 내가 듣고, 배운 말을 전하면 됩니다. ‘저는 권위가 없습니다.’ ‘아무도 제 말을 듣지 않고 믿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주님은 마태복음 28:18-20을 펴 보이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능을 내게 주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며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멘.](마28:19-20). ‘저는 말을 잘 못합니다.’ ‘목소리가 좋지 않습니다.’ ‘조리있게 말하지 못합니다’ 라고 핑계를 대면 고린도전서 4:20을 펴 보이실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왕국이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권능에 있기 때문이라.](고전4:20). ‘저는 마음 가운데 그런 일을 하고 싶은 소원이 없습니다.’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한다면 주님은 빌립보서 2:13을 펴 보이실 것입니다. [이는 너희 안에서 일하시며 자기가 참으로 기뻐하는 것을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빌2:13).

모세의 손에 하나님의 막대기를 주셨듯이 우리에겐 하나님의 말씀을 손에 주셨습니다. 양날 선 칼로서 베지 못할 것이 없는 칼입니다. 능력의 칼이요, 성령의 칼입니다. 주님 앞에 헌신하려고 결단을 해도 도무지 망설여지는 분들은 지금 이 시간 마음을 정하시기 바랍니다. 헌신하기 전까지의 성도의 삶은 제 2의 인생입니다. 육신과 성령이 다투는 인생이며, 나의 자아와 주님이 다투는 인생입니다. 잠깐의 승리도 맛보고, 놀라운 은혜의 간증도 있겠지만 그것은 결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뜻이 아닙니다. 나의 의지를 주님께 굴복시키고, 나의 몸을 주님께서 쓰시도록 내어 드리신다면 성령 충만을 경험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화평을 맛볼 것입니다. 오늘날 구원받은 성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주님 앞에서 나의 모든 문제를 내려놓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육신적인 죄를 회개하는 것보다 더 급히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바로 하나님께 완전히 자신을 드리지 못한 어중간한 신앙입니다.

저는 구원받기 전에 몇번이나 전도자를 만났습니다. 저는 복음을 거부했지만 만약 내가 믿는다면 미치도록 믿던가? 아니면 안 믿든가? 이지 미적지근하게 믿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1987년 5월 어느 주일에 구원받은 후에 저는 미치도록 믿었습니다. 새벽 기도는 물론이고 매일 전도했습니다. 8Km 밖에 있는 교회를 4:30에 일어나서 달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한 헌신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주님 앞에 자신을 완전히 드리는 것이 겁났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내가 전혀 원하시지 않는 것을 시키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특히 목회자로 부르셨을 때 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결국 돌고 돌아 10년이 지나 목회자가 되었는데 저는 그 때 세 번이나 미루었습니다. 첫 번째 거절했던 이유는 주님 저는 인격이 성숙하지 못합니다. 목사는 곧 인격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두 번째 거절했던 이유는 주님 저는 세대주의 신학, 몇몇 사람들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아서 성경보다 그들의 신학을 가르칠 것 같습니다. 세 번째 거절했던 이유는 주님 저는 능력이 없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 받은 경험도 없고, 소위 말하는 제 2의 회심, 능렵을 받은 경험이 없습니다. 그런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때마다 말씀으로 대답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때 곧바로 인천으로 내려가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다시 20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자기 아내와 아들들을 데려다가 나귀에 태우고 이집트 땅으로 돌아갔으며 하나님의 막대기를 자기 손에 잡았더라.](20). 우리는 여기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일하시는 선하신 손길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모세의 발길을 가볍게 해 주셨습니다. 이집트에는 이미 모세를 죽이려고 찾던 자들은 다 죽고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셨고, 모세의 형 아론을 마중 나오도록 준비시킨 것입니다. 주님은 모세보다 앞서서 일하고 계십니다. 믿음으로 순종할 때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일하시고, 우리보다 앞서 일하십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집트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그 이적들을 파라오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頑惡)하게 할 것인즉 그가 백성을 가게 하지 아니하리니](21). 주님은 모세에게 이집트에 돌아가서 해야 할 사역을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먼저 할 일은 파라오 앞에서 하나님이 준 표적들을 다 행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육신의 힘으로 정복하려다 실패한 일을 반드시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파라오는 모세가 넘어야 할 벽입니다. 모세는 이전에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일을 하다 파라오에게 큰 시련을 당했습니다. 마치 엘리야가 이세벨을 피해 도망하듯이,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가고, 라반을 피해 야반 도주하였듯이, 모세는 그렇게 도망친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경험은 그냥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성도들에게 도전 정신을 주십니다. 에서를 피해 도망갔다,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어 돌아오던 야곱에게 처음 들이닥친 위협이 무엇이었습니까? 에서가 사백명을 데리고 오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창32:6). 야곱이 에서를 극복해야 하듯이, 모세는 파라오를 극복하고 승리해야 합니다. 주님은 성도들이 믿음으로 도전하고 승리하도록 환경을 조성하십니다. 마음속의 두려움은 믿음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이것은 묻어 둔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두려움을 가진 군사는 이미 전쟁에서 지고 들어가는 군사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 하는지, 무엇을 껄끄러워 하는지 잘 아십니다. 그리고, 거기에 도전하게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이전에 패배했던 것, 두려웠던 것들에 승리를 주십니다.

22절을 보십시오. [ 너는 파라오에게 이르기를,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은 내 아들 곧 나의 처음 난 자라, 하시느니라.](22). 능력의 표적을 보인 후에는 증거할 말씀을 주셨습니다. 모세 이전에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창6:4, 욥1:6-10,38:7).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요1:12). 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택함받았습니다. 하나님으로 태어난 민족은 이스라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이집트의 노예 백성인 이스라엘을 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심으로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가게 하여 나를 섬기게 하라. 그가 가는 것을 네가 거부하면, 보라, 내가 네 아들 곧 너의 처음 난 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23). 이것은 엄청난 경고입니다. 파라오를 향해 당당히 종살이하는 백성들의 해방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거절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했던 것과 동일한 재앙을 내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들의 특권인 영적 권세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받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설교자, 전도자는 바로 주님의 대리인이요, 주님의 전권 대사입니다. 모세는 파라오 앞에서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도록 보냄받았습니다. 파라오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5:2에 보면 파라오가 “주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음성에 순종하여 이스라엘을 가게 하겠느냐? 나는 주를 알지 못하며 이스라엘도 가게 하지 아니하리라”(5:2)고 말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자들과 통치자들 가운데 주님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는 기회가 되면 그런 사람들 앞에서도 주님을 증거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란 책을 썼던 ‘안이숙’ 자매란 분이 있습니다. 이곳 LA에서 남편과 함께 사역을 하다 얼마 전에 돌아가셨는데, 그분은 일본 국회와 천황 앞에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자신을 실패한 순교자로 평생 마음의 짐을 지고 살았지만 그분의 책은 우리들이 가져야 할 산 믿음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순교자 박관준 장로를 따라 일본 제국의회가 열리는 의사당에 들어가 일본의 신사 참배 강요 및 기독교 탄압을 규탄하였습니다. 박관준 장로는 동경 의사당에서 유인물을 뿌리며 ??하나님의 대사명??을 수행하기로 계획하셨고, 선박 표와 기차 표도 없이 일본으로 무사히 갔습니다. 박관준 장로의 기독교 입문은 참으로 기이한 경험이었는데, 그는 원래 평북 영변의 부호의 외동 아들 출신으로 유교와 불교를 숭상하고 거기에다가 부잣집 아들들이 그러하듯 주색잡기 등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렇듯 세속의 갈등과 방황 가운데 있다가 1905년 어느날 서재에서 책을 읽다가 갑자기 공중에서 들려온 한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절벽 유위면 혈벽입(絶壁 唯危면 血壁立)하라!?? 곧 절벽과 같은 위험한 삶인 방탕한 생활을 버리고 십자가의 종교인 혈벽으로 돌아서라는 음성인 것을 알았습니다. 익히 그는 미국인 선교사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후 그의 인생은 1백80십도 전환되었습니다. 그후 그는 다시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고 1939년에는 일본 의사당에서 폭탄 선언서를 던지기까지 했습니다. 이들은 죽을 줄 알면서도 그 길을 갔습니다.

우리는 파라오 앞에서, 관원들 앞에서, 직장 상사 앞에서, 선생님 앞에서, 그 누구 앞에서라도 주님을 증거하고, 거부하면 영원한 지옥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선포해야 합니다. 주님은 성도들이 두려움에 떨며, 움츠려 드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 한 분외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먼저 실전적인 믿음, 체험적인 믿음을 소유하도록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니 사람이 내게 무엇을 행하든지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하노라.](히13:6).

24절입니다. [[주]께서 길 곁 여관에서 그를 만나 그를 죽이려 하시므로](24). 믿음의 길, 순례의 길을 떠나는데 있어서 우리는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성찰하는 일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증거하러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대로 이스라엘은 430년의 종살이를 한 후 4대만에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언약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언약은 ‘할례의 언약’입니다. 창세기 17:11-14, [너희 가운데 사내아이는 다 할례를 받을지니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네 뒤를 이을 네 씨 사이의 언약 곧 너희가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 대대로 모든 사내아이는 집에서 태어난 자든지 또는 네 씨에서 난 자가 아니라 타국인에게서 돈으로 산 자든지 /다/ 난 지 팔 일이 되면 너희 가운데서 할례를 받을지니라. 네 집에서 태어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그리하여야 내 언약이 너희 육체에 있어 영존하는 언약이 되리라. 할례를 받지 아니한 사내아이 곧 그 포피의 살을 베어 내지 아니한 혼(魂)은 자기 백성에게서 끊어지리니 이는 그가 내 언약을 범하였음이니라.](창17:11-14). 모세는 자식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미디안 땅에 살다 보니 언약에서 제외된 것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사명을 받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만난 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기억하사, 언약대로 행하시려고 하는데, 그 언약의 표시인 할례를 주지 않은 채 이집트로 갔을 때 주님은 그를 죽이려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은 무시되거나, 취소될 수 없습니다.

24절입니다. [[주]께서 길 곁 여관에서 그를 만나 그를 죽이려 하시므로](24).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모세보다 앞서 이집트로 가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발람이 떠날 때 앞에 주의 천사가 서 있었듯이 모세의 가는 길에 주님이 계셨고 모세를 만나셨습니다. 여호수아가 길 갈에 진을 쳤을 때, 이미 거기에는 주의 군대 대장이 칼을 들고 서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가는 길에는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주님이 먼저 가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은 막연한 약속이 아니라 지금 현재도 단 한순간도 멈춤없이 지속적으로 성취되고 있는 약속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만나 우리를 죽이겨 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늘 자신을 성찰하며, 죄를 버리고, 주의 의를 덧입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십보라가 예리한 돌을 취하여 자기 아들의 포피(包皮)를 베어 그의 발 앞에 던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흘리는 남편이로다, 하니](25). 아내 십보라는 기도하거나, 비명을 지르는 대신 신속하게 예리한 돌을 취해 게르솜의 포피를 잘라 할례를 행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할례를 행하지 못한 문제가 아내 십보라의 반대 때문이었다는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십보라는 남편 모세의 위기를 본 순간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이 순간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금방 알았고, 지체없이 실천함으로써 위기를 벗어났습니다. 모세가 아닌 십보라가 할례를 준 것을 통해 모세는 손하나 꼼짝 할 수 없을만큼 무기력했거나,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십보라는 모세를 ‘피흘리는 남편’이라고 했는데, 이는 피를 흘리게 하는 남편, 사람을 죽게 하는 남편이란 의미로서 할례로 인해 죽을 뻔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26절입니다. [이에 그분께서 그를 가게 하시니라. 그때에 그녀가, 당신은 피 흘리는 남편이로다,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26). 아들의 할례를 행한 후 주님은 모세를 놓아 주셨습니다. 모세는 이 일로 아내와 아들을 다시 장인 이드로의 집으로 돌려 보냅니다(18:2). 하나님은 십보라가 아닌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던 것은 집안의 머리는 남편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날 크리스천 가정의 남편들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엄숙하게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남편은 아내와 자식들을 다스려야 합니다. 아내가 사사건건 성경적인 자녀 교육을 방해한다 할지라도 주님은 그 책임을 아내가 아닌 남편에게 물으십니다. 비록 피 흘리는 남편이란 비난을 받더라도 아들의 할례 문제는 제 때에 정확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소박한 이유 때문에 성경적인 삶을 포기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또 하나의 교훈은 공적인 사역에 앞서, 주님은 먼저 가정의 위계 질서와 영적 질서를 잡으신다는 점입니다. 모세가 십보라를 순종하도록 하고, 자식들을 완전히 다스리지 못한 상태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적 능력의 통로로 쓰임받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책임 아래 있는 가정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는 디모데전서 3장에서 감독의 다양한 자격 요건을 보게 됩니다. 그 중 한 가지는 [자기 집을 잘 다스려서 자기 자녀들로 하여금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 것이며](딤전3:4)입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남자가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으리요?)](딤전3:5).

우리는 작은 것에서부터 신실하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집에서 남편에게 반말하고, 막말하고, 욕하고, 무시하고, 깔아 뭉개는 아내가 주님의 다른 명령에는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자매가 형제들을 섬기고, 지역 교회를 섬기고, 세계 선교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겠습니까? 아내를 사랑할 줄 모르는 남편이 지역 교회에서 직분을 맡고, 성경 교사가 될 수 있습니까? 성경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생활의 문제입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형제와 형제, 말 버릇, 행동, 습관 이런 것들이 모두 성경적으로 교정되고, 바로 잡혀야 합니다. 십보라는 모세와 더 이상 동행하지 못하고 처가집으로 돌아가 18:2에서 장인과 함께 다시 모세에게 돌아 옵니다.

27-8절입니다. [[주]께서 아론에게 이르시되, 광야에 가서 모세를 맞으라, 하시매 그가 가서 하나님의 산에서 모세를 만나 그에게 입을 맞추니 모세가 자기를 보내신 [주]의 모든 말씀과 또 그분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표적을 아론에게 고하니라.](27-28). 하나님은 모세를 마중 나올 사람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아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광야에 가서 모세를 맞았습니다. 모세는 아론에게 주의 모든 말씀과 모든 표적들을 다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론이 아니라 파라오에게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셨는데, 모세는 엉뚱하게도 형에게 다 보여 주고 말았습니다.  

29-31절을 보십시오. [모세와 아론이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함께 모으고 아론이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백성의 눈앞에서 표적들을 행하니 백성이 믿으며 또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아오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펴보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29). 주님은 장로들을 모아 말씀을 전하면 믿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사실을 믿지 못해 표적이 동원되고, 아론이 동원되었습니다. 이들은 주의 말씀대로 믿었기 때문에 세 번째 표적은 행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로써 이집트에서 출애굽을 향한 모세의 첫 번째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제 머리 숙여 경배해야 하는가? 주님의 인도함을 받을 때(창24:48), 주님이 우리를 찾아 오시고 살피실 때(출4:31), 심판에서 우리를 구속하실 때(출12:27),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송할 때(느8:6)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우려했던 여러 가지 일들, 하나님 앞에서 불가 사유를 내었던 모든 일들이 막상 순종해서 해 보았을 때 모두 기우였음이 밝혀졌습니다. 40년 전에 백성들로부터 받은 배척의 아픔이 이제 승리의 기쁨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런 모세의 행적은 우리 주님의 출현을 예표합니다. 주님은 처음에 자기 백성들에게 배척을 받으시지만 두 번째 오실 때에 영접받으실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주님의 다시 오심에 관한 소식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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