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2002년 12월 15일- 출애굽기        




출애굽기(XI)




말씀: 출애굽기 4:6-8

요절: 출애굽기 4:8




11. 표적의 소리




주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 않을 때를 대비해서 세 가지 표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첫 번째 표적은 막대기를 뱀이 되게 했다가 다시 막대기가 되게 하는 표적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주님은 모세에게 여러 가지 영적 진리들을 조명해 주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첫 번째 표적에 담긴 주님의 일곱가지 영적 교리적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첫 번째 표적을 믿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서 준비해둔 두 번째 표적입니다. 표적에는 언제나 영적 의미가 있고,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께서 또 이르시되, 이제 네 손을 네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 보니, 보라, 그의 손에 나병이 생겨 눈같이 되니라.](6). 하나님은 먼저 모세가 잡고 있는 막대기를 통해 표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막대기를 잡고 있는 손은 막대기 보다 더 중요합니다. 막대기를 잡은 손보다 그 손을 움직이는 마음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막대기를 잡은 손과 가슴에 대한 조명을 두 번째 표적으로 주셨습니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손은 능력의 상징입니다. 손은 일을 하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자신의 손으로 사용하시며, 능력있는 일들을 이집트에서 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손은 주님 앞에서 사용될 수 없는 나병이 생긴 손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처리받지 않은 인간의 육신은 아무런 유익도 없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요6:63). 40년 전에 모세는 이 손으로 이집트 사람을 때려죽인 살인자의 손이었습니다. 40년 전에 모세는 이 손으로 동족 히브리 사람들의 싸움을 말리며 구원자로자처했던 손이었습니다. 모세가 손을 품에 넣었을 때 그의 손이 나병이 생겨 눈같이 되었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어떠함을 보여 줍니다. 품은 바로 가슴, 마음(heart)이 있는 곳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들어가든, 거기에서 나오는 것들을 모두 부패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사람의 마음은 너무나 부패하여 거기에서 나오는 것들은 아무 쓸모가 없고, 거기에 닿기만 해도 소용이 없어집니다. 예레미야 17:9에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심히 사악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렘17:9)라고 말한 그대로입니다. 모세의 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저와 여러분의 손은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하지 않는 손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은 무엇이나 부패시키는 것이요, 거짓되고 사악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기 에 앞서 이런 육신적 모습을 정확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 보다 앞서 일을 하려고 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또 이르시되, 이제 네 손을 네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 보니, 보라, 그의 손에 나병이 생겨 눈같이 되니라.](6). 나병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나 전 세계 어느 나라 사람들에게도 천형(天刑)으로 알려진 병입니다. 나병은 자각 증세가 없습니다. 그래서 병자가 스스로 자신이 병에 걸렸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는 죄인들이 자신이 죄를 지어도 죄에 대한 자각 증세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병은 잠복 기간이 충분히 지난 다음에 드러나는 병입니다. 마찬가지로 죄는 충분히 시간이 지난 다음에 죄의 결과 즉 사망이 옵니다. 나병은 인간의 능력으로 치유가 불가능한 병입니다. 마찬가지로 죄는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레위기 13,14장에는 무려 두 장에 걸쳐 나병에 대한 처리법에 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지금까지 자신의 손이, 자신의 품이 ‘치유할 수 없는 나병 환자와 같은 상태임’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몸은 죄로 인해 병들었고, 주님의 은혜가 없다면 그것을 바로 보지도 못하는 영적 맹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주]께서 또 이르시되, 이제 네 손을 네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 보니, 보라, 그의 손에 나병이 생겨 눈같이 되니라.](6). 주님께서 이 표적을 주신 또 하나의 영적 의미는 모세를 겸손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막대기의 표적을 통해 주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맛보았습니다. 자신의 손에 무엇이나 할 수 있는 막대기가 있다해도 그 막대기를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막대기는 몸 밖에 있지만 마음은 몸 안에 있습니다. 마음과 막대기를 잇는 연결 고리가 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손과 품의 실체를 분명하게 조명해 주심으로써 모세는 막대기를 잡은 자신의 손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주신 은사를 통해 주어진 능력과 지혜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자칫하면 주님의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고 교만해져서 마귀의 올무에 빠지는 것이 우리의 타고난 성품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막대기의 표적을 통해 마귀와 전갈, 독사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면, 손이 나병으로 변하는 표적을 통해서 겸손을 가르치신 것은 너무나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많은 은사와 여러 계시가 넘침으로 말미암아 분량 이상으로 높임을 받지 않도록 육체를 연약하게 하셨습니다(고후12:7)5). 주님은 모세에게 동일한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많고 많은 표적 중에 내 자신의 손이 품 속에 넣었을 때 나병이 된 것은 얼마나 끔찍한 표적이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할 수 있는 주님의 큰 은혜라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5, 4:7을 보겠습니다. [이는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으로 생각할 만큼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요, 오직 우리의 능력이 하나님에게서 나기 때문이니라.](고후3:5). [그러나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가졌나니 이것은 뛰어난 권능이 하나님에게서 나며 우리에게서 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후4:7). 우리는 어떤 선한 것도 우리 안에서 난 것이 아님을 스스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다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주님이 주신 선물이요, 은혜란 사실을 알고 감사와 찬양을 돌릴 때 가장 정상적인 신앙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습니다.

[[주]께서 또 이르시되, 이제 네 손을 네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 보니, 보라, 그의 손에 나병이 생겨 눈같이 되니라.](6). 이 표적이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영적 의미는 이집트에 살고 있는 히브리인들의 상태입니다. 모세는 히브리인입니다. 그는 지금 히브리인들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이집트에 살고 있는 히브리인들의 영적 상태는 이집트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더러워졌고, 깨끗해 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혹독한 종살이를 통해서, 핍박을 통해서 외적인 징계는 받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훈련과 심판으로 개혁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마음에서부터 변화가 있어야만 진정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모세의 손이 품에 들어갔을 때 가슴에 나병이 생긴 것이 아니라 거기에 닿은 손에 나병이 생겼다는 사실을 볼 때,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5:17-20, [무엇이든지 입 안에 들어가는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그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이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행, 도둑질, 거짓증거, 신성 모독이기 때문이니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거니와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15:17-20).

나병이 걸린 손은 밖으로 드러나 있지만 나병이 걸린 마음(심장)은 품 속에 있어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나병 걸린 손은 나병이 걸린 마음을 해결하지 않고는 결코 치유 될 수 없습니다.

[[주]께서 또 이르시되, 이제 네 손을 네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 보니, 보라, 그의 손에 나병이 생겨 눈같이 되니라.](6). 이 표적을 통해 우리는 구속사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구원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기도 합니다. 모세는 정상이었다가 나병 환자가 되었다가 다시 정상이 되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죄가 전혀 없으시고(히4:15), 죄를 전혀 짓지 않으셨고(벧전5:21), 죄를 알지도 못하셨지만(고후5:21),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습니다(고후5:21). 주님은 세상의 모든 죄를 온 몸에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24에 이르기를,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지셨으니 이것은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벧전2:24). 이 때 주님의 모습이 어떠했을 것 같습니까? 인류의 죄를 다 감당하신 채 저주받은 바 되신 주님의 모습을 시편 기자는 이렇게 대언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오니 사람들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멸시거리이니이다.](시22:6). 구약의 율법은 나병 환자를 진영 밖으로 내쫓습니다(레13:46). 주님 역시 진영 밖으로 내 몰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은 세 시간 동안 하나님과 분리되어 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구속 사역을 완수하심으로 다시 완전해지셨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이르시되,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꺼내어 보니, 보라, 그것이 다시 그의 다른 살처럼 되었더라. 그들이 네 말을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표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여도 나중 표적의 소리는 믿으리라.](7-8). 주님은 나병이 들린 손을 깨끗하게 하심으로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삼으셨습니다. 모세의 손은 이전의 손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품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손은 하나님의 은혜로 깨끗해진 손입니다. 이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전과 같아 보여도 이미 십자가의 피를 통해 죄의 병기에서 의의 병기로 바뀌어졌습니다. 나병이 걸린 손을 깨끗하게 하는 능력은 죄를 깨끗하게 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보여 주는 표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도구없이 다시 품속에 손을 넣음으로써 손이 깨끗하게 회복하게 하셨는데, 이는 주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치시는 전능한 능력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병자를 고치시고, 죄인을 고치시는 치유자이십니다. 다시 품에 넣었을 때, 모세의 품은 이전의 품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손을 고치시기 전에 이미 그의 품속에 있는 마음을 먼저 고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손에 나병이 들게 하신 것과 고치시는 것에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파라오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지시는데 전혀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다시 7절을 보겠습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꺼내어 보니, 보라, 그것이 다시 그의 다른 살처럼 되었더라.](7). 주님은 이 표적을 통해 개인의 죄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보여 주셨습니다. 병을 숨긴다고 해결되지 않듯이 죄는 숨긴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나병이 걸린 손은 주님 앞에 보여지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할 때만 해결됩니다. 죄인들이 자신의 죄를 부인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보고, 전능하신 주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올 때, 너무나 간단히 죄를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시 품속에 손을 넣도록 하셨는데, 이는 마귀를 멸하시는 주님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품속에서 나온 손이 나병에 걸렸는데, 다시 품속에 넣었더니 정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죽음을 통해 생명을 얻는 부활의 진리입니다. 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살과 피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에 참여하셨으니 이것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히2:14).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는 그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새 생명을 얻습니다. 막대기를 통한 첫 번째 표적이 마귀를 일들을 멸하는(요일3:8)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예표라면, 품 속에 들어갔다 나온 이 두 번째 표적은 우리의 죄들을 제거하는(요일3:5) 주님의 사역을 예표하는 표적입니다.

8절입니다. [그들이 네 말을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표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여도 나중 표적의 소리는 믿으리라.].(8).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시면서 3중의 안전 장치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모세는 계속해서 이집트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첫째, 이스라엘은 모세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의 비극입니다. 이로써 이들은 믿음으로 시작된 민족이 아니라 표적으로 시작된 민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22, [이는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추구하나](고전1:22). 말씀을 믿는다면 표적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불신이 표적을 부릅니다. 모세가 3:18에서, [그들이 네 음성에 귀를 기울이리니...]란 주님의 말씀을 믿고 일어섰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표적 대신 믿음이, 율법대신 은혜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불신과 표적을 통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믿지 않으려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은 큰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들에 대해, [이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아니하는도다.](요4:48).

둘째, 처음 표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모세는 이스라엘의 장로들가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모든 표적을 다 행했습니다(4:30). 그때 백성들이 믿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분명하게 새겨야 합니다. 주님은 먼저 말씀을 주시고, 다음에 표적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표적은 주님이 주신 말씀과 정확히 일치해야 하며, 그 말씀을 확증하고 믿음의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만 표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대언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이적(異蹟)을 보여 할 수만 있으면 그 택하신 자들까지도 속일 것임이라.](마24:24). 적그리스도는 표적을 일으키며 옵니다. [저 사악한 자가 오는 것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권능과 표적과 거짓 이적과](살후2:9). 주님과 주님의 종들이 일으키는 표적은 기록된 말씀과 일치하며, 기록된 말씀에 대한 믿음을 확증하고, 강하게 하는데 있지만 마귀와 악령이 일으키는 표적은 주님의 말씀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능력을 무너뜨리는데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전한 말을 믿지 않고, 막대기의 표적을 믿지 못할 때, 품 속에 넣은 손이 나병이 걸렸다가 다시 회복되는 이 표적은 믿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이집트에 얼마나 많은 거짓 이적들과 표적들이 마술사들에 의해 행해졌는지 말해 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파라오의 궁전에 있던 얀네와 얌브레는 막대기로 뱀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 표적만으로 미흡했던 것입니다. 믿음이 어린 성도들은 방언의 표적을 성령의 은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방언은 이교도들의 타 종교에 다 있는 현상이란 사실을 안다면 그것만으로 성령의 은사라고 주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육신적인 성도들은 신유(병고침)야 말로 성령의 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표적 역시 무당들에게도 흔히 있는 일입니다. 축사(마귀를 몰아냄)를 주님의 능력이요, 임재라고 믿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주술사(엑소시스트)들에게 자주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표적만으로 주님의 능력과 성령의 은사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세계, 특히 마귀에 대해 무지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초자연적인 현상, 인간의 능력 이상의 일을 다 주님의 역사라고 단정하고 맙니다. ‘빛을 보았다. 접신했다’는 간증들이 모두 주님의 은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너무나 많이 있는 현상이며, 이교도들 가운데서 발견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주님의 말씀과 그들이 행하는 표적과 더불어 세상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는 표적을 통해서만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표적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병 환자가 순간적으로 낳는 일은 어느 종교나 어느 신유 은사자들에게서도 발견되지 않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만약 나병 환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일으키고,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증거가 성경과 일치된다면 우리는 그를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하늘에서 불을 내린다 해도 전혀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8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네 말을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표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여도 나중 표적의 소리는 믿으리라.].(8). 하나님은 모세의 계속되는 불신을 통해 이스라엘의 완악함과 불신을 접하고 계십니다.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음성을 직접 듣고 있는 모세조차 주님의 말씀을 믿고, 즉각적인 순종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이 마당에 이집트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의 한 마디 말에 믿지 못할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주님이 모세에게 준 표적에는 소리가 있습니다. 말씀을 유의해서 보시면 ‘처음 표적의 소리, 나중 표적의 소리’(voice)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표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표적을 듣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표적은 보여 주는 표적이 아니라 들려주는 표적이란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표적을 통해 눈이 아닌 귀를 기울여야 하며,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표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표적을 듣습니다. 주님은 자신과 사도들이 행하신 표적들을 성경에 기록하시고, 그것을 듣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주님의 탄생을 표적으로 주셨습니다.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한 표적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보라, 처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천사들은 들판에 있는 목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며 [너희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 되리라, 하매](눅2:12)라고 증거했습니다. 성경을 조금이라도 아는 유대인이라면 이 말을 금방 알아 들을 것입니다. 아기는 결혼한 부부라면 누구나 낳은 평범한 일이지 표적이 아닙니다. 지금도 전 세계에는 1초에 4.1명이 태어나고 있습니다(World population prospect 1988년 조사). 그런데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가 표적이라고 한다면 그 아이는 바로 이사야 7:14에 예언된 주인공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목동들처럼 이 표적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표적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다음에 우리에게 주신 표적은 주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입니다. 요한복음 12:32-3,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어떤 죽음으로 죽을 것인지 표적으로 보여 주신 것이라.](요12:32-3). 주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표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에 흉악범들은 모두 법대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 어떻게 표적이 될 수 있습니까? 성경을 아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바로 대속의 죽음이요, 예언된 죽음이요, 부활을 위한 죽음이요, 마귀를 멸하는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십자가 아래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목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표적을 본 것입니까? 그들은 눈이 있어도 그 표적을 보지 못했습니다. 마가복음 15:29에는, [지나가던 자들이 자기 머리를 흔들고 예수님께 욕하며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 자여,](막15:29)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그토록 표적을 구하고, 원했던 사람들이지만 막상 주어진 표적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27:36, [그들이 거기에 앉아 그분을 지켜보고](36)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십자가에 무관심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겉옷을 제비뽑아 누가 가지는가에 더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9:25에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그분의 이모요, 글로바의 아내인 마리아와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서 있더라.](요19:25). 이들은 십자가에 연민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표적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아무도 이 표적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증언을 통해서, 전도자의 목소리를 통해서, 증인들의 신실한 증거를 통해 이 표적의 소리를 듣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모두 엄청난 표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경과 신약 교회는 주님이 주신 표적입니다. 히브리서 9:8, [이로써 성령님께서 표적으로 보여 주신 것은 첫째 성막이 서 있는 동안에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아직 드러나지 아니하였다 하는 것이라.](히9:8).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막는 휘장을 갈라 버리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자신이 새롭고 산 길이 되셔서 누구든지 믿는 자들을 하늘의 지성소로 바로 들어 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 길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곧 자기의 육체를 통해 거룩히 구분하신 것이니라.](히10:20)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님께서 보여 주신 표적입니다. 신약 성경의 모든 기록은 이 사실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거하시는 몸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주님이 주신 표적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표적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주님께서 저희를 복주셔서 주님의 모든 말씀과 표적의 소리를 듣고 믿는데 부족함이 없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들이 만약 이 두 표적에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이 때를 대비해 한 가지 표적을 더 준비해 두셨습니다. 이것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