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 24일- 출애굽기
출애굽기(VIII)
말씀: 출애굽기 3:13-15
요절: 출애굽기 3:14
08.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절대자 하나님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무신론자라해도 신(神)에 대해 생각이 미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존재한다면 하나님의 실체나 이름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인류의 많은 철학자들과 구도자들이 하나님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신(神)의 존재에 대해서도 누구하나 명쾌한 정의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피조물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정의하고 규명할 지혜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시는 범위 내에서 조명을 받아서 알 수 있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생각하는 마음을 주셨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전도서 3:11에 이르기를, [그분께서 모든 것을 만드시되 자신의 때에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 세상을 /생각하는/ 마음을 두셨으므로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 자가 아무도 없도다.](전3:11). 아무리 수행에 수행을 거듭해도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 가장 많은 지혜를 소유했고, 모르는 것이 없었던 사람 가운데 하나인 솔로몬이 안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모든 일은 알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불가능을 보았고, 인간의 한계를 보았습니다. 전도서 8:17. [이때에 내가 하나님의 모든 일을 눈여겨보고 해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음을 /알았나니/ 이는 사람이 수고하여 그것을 찾아내려 할지라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라. 또 참으로 지혜로운 자가 그것을 안다고 생각할지라도 능히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리로다.](전8:17). 이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이 평생 생각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도(道)를 깨친다고 산 속에서, 굴속에서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명쾌하게 규명지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처음 물었던 사람은 믿음의 조상 야곱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대답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야곱이 소원대로 야곱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창세기 33:29, [야곱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원하오니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소서, 하매 그가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그가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하므로](창33:29). 야곱은 이미 예전에 답을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창세기28:13에서 주님은 야곱의 꿈에 나타나셔서 자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또, 보라, [주]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주]니 곧 네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씨에게 주리니](창28:13). 다음으로 주님의 이름을 물었던 사람은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였습니다. 하지만 마노아 역시 답을 듣지 못하고 오히려 책망을 받았습니다. 사사기 13:17,18 [마노아가 또 [주]의 천사에게 이르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가 당신을 영화롭게 하리이다, 하니 [주]의 천사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네가 이같이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은밀(隱密)하니라,4) 하니라.](삿13:17-18; 각주 참조). 야곱이나 마노아는 하나님의 이름을 속 시원하게 좀 알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듣고, 안 이름이 아니라 뭔가 새로운 계시와 조명을 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육신을 입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갖고 있는 소원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이런 질문은 계속됩니다. [이에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나는/ 내가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한 바로 그 니라.](요8:25). 주님을 믿지 못했던 사람들은 주님을 보고 들으면서도, ‘네가 누구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답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답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약 이 시간 하나님이 현현(顯現)하셔서 우리 가운데 앉아 계시거나, 몇 일을 같이 먹고, 마시고, 살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여전히 우리는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불신의 질문은 믿음이 생길 때까지 어떤 답변과 체험도 만족스럽지 못한 법입니다. 후에 바울이 된 사울이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야곱이나 마노아, 모세처럼 물었습니다. 이 때 주님은 즉시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가 이르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가시채찍을 걷어차기가 네게 고생이라, 하시거늘](행9:5). 사울은 이 한 마디의 대답으로 충분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 이름을 묻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은 인류의 모든 사람들이 들어야 할 답변이며, 누구나 다 알아야 할 그런 진리입니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뵙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사명을 주실 때, 하나님께 대답할 이름을 주시도록 구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보소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느니라, 하면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그분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매](13). 모세는 하나님께서 파라오에게 가라고 하셨을 때 두려움에 질렸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12)는 약속에도 모세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사악한 불신이 겸손의 옷 아래에 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겸손이란 이름으로 불신을 포장하고 위장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겸손을 가장한 자기 비하를 하거나, 주님을 불신할 때 우리는 보통 자기를 방어하고 변명할 종교적 이유를 기가 막히게 만들어 냅니다. 사실 불완전하다는 것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최고의 은혜이며, 최대의 본분입니다. 그러므로 약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자랑거리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자신의 강하심을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나의 강한 능력이 약한 데서 완전해지기 때문이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모세는 자신의 불신에 대해서 종교적 변명을 쏟아내었습니다. 그는 처음에 ‘자신이 누구이기에’라며 거부했고(11), 이제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13) 하면서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질문할 때 하나님은 이미 모세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밝혀 주었습니다. 모세가 처음 불타는 떨기나무 가까이로 올 때에 주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먼저 밝히셨습니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6)고 계시하셨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집트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예상 질문을 핑계로 자신이 묻고 있는 것입니다. 불신은 계속해서 회의적인 질문을 낳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빌립은 주님께 이름이 아니라 더 큰 것을 요구했습니다. [빌립이 그분께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하니](요14:8). 그러나, 이것은 불신과 회의에 가득 찬 요구였습니다.
전에 저는 ‘제가 궁금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제게 이렇게 물으면 어떻게 답해야 하나요?’라며 자신이 믿지 못하는 내용들을 하나 하나 질문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아는 대로 대부분 답변을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질문한 사람은 대답을 거의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자신이 그 내용들을 믿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아는 방법은 정보와 지적 능력이 아니라 믿음과 마음입니다. 성경의 내용은 대부분 믿음으로 깨닫습니다. 믿을 때 깨달아집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깨닫나니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라.](히11:3). 성경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굳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늘 마음의 문제를 지적하셨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빵이 없으므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아직도 굳어 있느냐?](막8:17). 니고데모가 거듭남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믿음의 문제요, 마음의 문제였지 정보의 결여나 IQ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1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보소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느니라, 하면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그분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매](13). 모세 역시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던 것은 마음의 문제요,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백성들이 물으면 이미 아는대로, 들은대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대답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좀 더 확실한 것을 구했습니다. 자신이 믿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언하고, 증거할 수는 없습니다. 모세는 솔직히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할 만한 힘과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에 대해 증거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지금 호렙산에서 주님의 임재를 목격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자신의 이런 경험이 전혀 없는 백성들에게 증거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내 자신의 복음을 통해 구원받은 경험이 있지만, 전혀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고, 반대하는 세상 죄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모세의 믿음을 도우시고, 자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곧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스스로 계신 이]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느니라, 하라.](14). 하나님은 자신을 I AM이라고 계시하셨습니다. 백성들이 물으면 [‘I AM'’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느니라](14b)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I AM은 두 가지 의미의 문장입니다. AM을 완전 자동사로 보면, 그 자체로 완전한 문장이 되어서 “나는 존재한다”란 뜻이 됩니다. AM을 불완전 자동사로 보면, 보어를 필요로 하는 불완전한 문장이 되며, “나는....이다”란 뜻으로 아직 미완성의 계시입니다. 이 계시는 신약 성경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히 계시됩니다.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7차례에 걸쳐 미완성의 I AM에 대한 계시를 완성하셨습니다.
? 나는 생명의 빵이라(요6:35,41,48, 51)
? 나는 세상의 빛이라(요8:12, 9:15).
? 나는 양들의 문이라(요10:7,9).
? 나는 선한 목자라(요10:11,14).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요11:25).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14:6).
? 나는 참 포도나무요(요15:1,5).
주님은 자신이 I AM이란 사실을 밝히셨는데,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before Abraham was, I am./, 하시매]- (요8:58). 이 말에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 주님을 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 말의 의미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I AM이란 말에는 뒤에 무엇이나 다 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되십니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시편 3:3에서, [그러하오나, 오 주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이시니이다.](시3:3). 시편 89:26, [그가 내게 부르짖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반석이시니이다, 하리니](시89:26). 이 뿐이 아닙니다. 나의 힘이 되신 주여(시18:1)라고 노래했고, 나의 은신처요, 구원할 방벽이시고, 나의 힘이시고, 나의 능력이시고, 나를 돕는 이시오, 나의 견고한 거처요, 나의 소망이요, 나의 주,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나의 목자...등 끝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되시는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I AM THAT I AM(출3:14)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다시 1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곧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스스로 계신 이]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느니라, 하라.](14). I AM이신 하나님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성경은 주님이 ‘모든 것의 모든 것’(all in all)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는 그분의 몸이니 곧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이니라.](엡1:23).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목표요, 목적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5:28, [모든 것이 그분께 굴복 당할 때에는 아들도 모든 것을 자기 아래 두시는 분께 친히 복종하시리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려 하심이라.](고전15:28). 힘이 필요하면 힘되신 주님이 되실 것이며, 위로가 필요하면 위로자이신 주님이 되실 것이며, 무식하면 주님은 지혜가 되실 것이며, 의가 필요하면 하나님의 의가 되시며, 양식이 필요하면 양식이 되시고, 병이 들면 ‘치유자’(출15:26)가 되십니다. 주님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십니다.
에를 들어, 예수님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기도 하시지만 우리는 그 지혜를 잘못 사용할 수도 있고, 잊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의 지혜가 되신다면 나는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의를 주시지만 나는 그 의를 더럽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의 의가 되신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그 의는 영원하며, 변질될 수 없습니다. 나의 구원이 영원히 안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거룩을 요구하시며, “내가 거룩한 것같이 너희도 거룩하라” 하실 때 우리는 때때로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의 거룩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나의 모든 더러움은 하나님 앞에서 깨끗이 씻겨집니다. 주님은 나를 구속해 주실 뿐만 아니라 나의 구속이 되셨습니다. 이 속에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기입해 보십시오. 주님은 나의 생명의 빵이 되십니다. 나의 반석이 되십니다. 나의 산성이 되십니다. 나의 구원이 되시며, 나의 친구가 되시며, ....무엇이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과거의 십자가 사건에만 한정한다면 나는 결코 풍요로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신약에서 자신을 I AM으로 계시하심으로써 자신이 구약의 “주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히셨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충분히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셨습니다.
다시 1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곧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스스로 계신 이]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느니라, 하라.](14). 이는 하나님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히 동일한 분이란 사실을 말해 줍니다. 주님은 시제의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히브리서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히브리서 1:12, [주께서 의복처럼 그것들을 접으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동일하시고 주의 연대(年代)는 끊어지지 아니하리이다, 하시되](히1:12). 성경에 주 하나님의 이름이 수없이 많이 있지만 대부분의 이름은 인간과의 관계성에서 맺어진 이름입니다. 반면 ‘I AM THAT I AM’이란 이름은 순수한 하나님 자신의 계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탐구를 통해 그분을 알아낼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 주며, 후에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을 알려 주는 단초가 될 뿐입니다. I AM이란 이름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호기심과 질문들을 한 마디로 충족시켜 주며, 더 이상의 질문을 억제하는 이름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누구도 감히 ‘I AM THAT I AM’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대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10,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15:10). /But by the grace of God I am what I am: and his grace which was bestowed upon me was not in vain; but I laboured more abundantly than they all: yet not I, but the grace of God which was with me. 우리는 I AM이신 주님의 은혜로 I am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의 혼은 영원히 잃어버린 채 불타는 지옥에서 벌레처럼 퇴화하고 말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너희 조상들의 [주]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라. 이것이 영원토록 나의 이름이요, 이것이 모든 세대를 향한 나의 기념물이니라.](15). 하나님은 모세에게 한 가지 더 일러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미 앞에서 가르쳐 준 말씀이요, 모세도 알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친근하고, 익숙한 이름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영원토록 자신의 이름으로 삼으셨고, 모든 세대를 향한 기념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부활의 하나님이십니다. 조상들은 이 땅에서 죽었지만 주님은 그들이 살아있음을 말해 주심으로, 부활의 산 소망을 분명히 심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부활을 부인하며, 시비 거는 사두개인들을 향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0:37,38 [이제 죽은 자들이 일어난다는 것은 모세도 떨기나무에서 친히 {주}를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부르며 보여 준 바 있나니 이는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 그분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느니라, 하시니라](눅20:37-38).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을 최고의 경전이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구절이 부활에 관한 말씀인지도 몰랐습니다. 백성들 역시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마22:33). [그러나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하여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니라,하셨으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시니 무리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의 가르침에 깜짝 놀라더라.](마22:31-33).
?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을, 이삭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야곱은 성령 하나님을 예표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독생자 이삭에게 다 물려주었습니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 주시는 것과 일치합니다. 아들 이삭은 아버지로부터 신부를 얻었고, 아버지에게 죽기까지 순종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얻고,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과 같습니다. 야곱은 일생동안 징계와 훈련을 통해 육신을 처리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들만 열둘이나 되는 가장 많은 태의 열매를 얻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다투고 싸웠으나 환도뼈를 맞고 절뚝거리며, 이스라엘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는 성령을 통해 육신이 징계를 받고, 처리될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이삭과 달리 야곱은 험악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후에 고백하기를, [야곱이 파라오에게 이르되, 내 순례 길의 연수의 날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삶의 햇수의 날이 얼마 못되고 험악하였으며 내 조상들이 순례하던 때에 그들이 누린 삶의 햇수의 날에 미치지 못하나이다, 하고](창47:9).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는 야곱과 같은 일생을 살게 됩니다.
?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복을 주시고, 그들의 후손에게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조상들이 거하던 땅을 유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 이삭과 야곱을 통해 그 약속을 더욱 굳게 하셨습니다.
?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의로운 삶을 살았거나 공로가 있어서 주님의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우상 숭배의 고향에서 우상 숭배자의 아들로 태어나 자식 하나 없이 살던 별볼일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제 모세가 두려워하고 걱정했던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넘치도록 분명하게 자기 계시를 해 주셨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말을 담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두 가지로 계시 해 주셨습니다. 첫째는 ‘스스로 있는 자’(I AM)이고, 둘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본질과 실체를 정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I AM이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저와 여러분의 영원한 구원자이시며, 신랑이시고, 친구이시며, 맏형이시고, 주인이시고, 대장이시며,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공급자이시며, 우리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심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주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고, 지각의 눈을 열어 주심으로 주님을 알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다 같이 모세에게 계시 해 주신 I AM의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출애굽기(VIII)
말씀: 출애굽기 3:13-15
요절: 출애굽기 3:14
08.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절대자 하나님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무신론자라해도 신(神)에 대해 생각이 미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존재한다면 하나님의 실체나 이름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인류의 많은 철학자들과 구도자들이 하나님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신(神)의 존재에 대해서도 누구하나 명쾌한 정의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피조물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정의하고 규명할 지혜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시는 범위 내에서 조명을 받아서 알 수 있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생각하는 마음을 주셨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전도서 3:11에 이르기를, [그분께서 모든 것을 만드시되 자신의 때에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 세상을 /생각하는/ 마음을 두셨으므로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 자가 아무도 없도다.](전3:11). 아무리 수행에 수행을 거듭해도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 가장 많은 지혜를 소유했고, 모르는 것이 없었던 사람 가운데 하나인 솔로몬이 안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모든 일은 알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불가능을 보았고, 인간의 한계를 보았습니다. 전도서 8:17. [이때에 내가 하나님의 모든 일을 눈여겨보고 해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음을 /알았나니/ 이는 사람이 수고하여 그것을 찾아내려 할지라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라. 또 참으로 지혜로운 자가 그것을 안다고 생각할지라도 능히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리로다.](전8:17). 이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이 평생 생각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도(道)를 깨친다고 산 속에서, 굴속에서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명쾌하게 규명지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처음 물었던 사람은 믿음의 조상 야곱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대답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야곱이 소원대로 야곱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창세기 33:29, [야곱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원하오니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소서, 하매 그가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그가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하므로](창33:29). 야곱은 이미 예전에 답을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창세기28:13에서 주님은 야곱의 꿈에 나타나셔서 자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또, 보라, [주]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주]니 곧 네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씨에게 주리니](창28:13). 다음으로 주님의 이름을 물었던 사람은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였습니다. 하지만 마노아 역시 답을 듣지 못하고 오히려 책망을 받았습니다. 사사기 13:17,18 [마노아가 또 [주]의 천사에게 이르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가 당신을 영화롭게 하리이다, 하니 [주]의 천사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네가 이같이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은밀(隱密)하니라,4) 하니라.](삿13:17-18; 각주 참조). 야곱이나 마노아는 하나님의 이름을 속 시원하게 좀 알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듣고, 안 이름이 아니라 뭔가 새로운 계시와 조명을 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육신을 입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갖고 있는 소원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이런 질문은 계속됩니다. [이에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나는/ 내가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한 바로 그 니라.](요8:25). 주님을 믿지 못했던 사람들은 주님을 보고 들으면서도, ‘네가 누구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답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답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약 이 시간 하나님이 현현(顯現)하셔서 우리 가운데 앉아 계시거나, 몇 일을 같이 먹고, 마시고, 살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여전히 우리는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불신의 질문은 믿음이 생길 때까지 어떤 답변과 체험도 만족스럽지 못한 법입니다. 후에 바울이 된 사울이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야곱이나 마노아, 모세처럼 물었습니다. 이 때 주님은 즉시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가 이르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가시채찍을 걷어차기가 네게 고생이라, 하시거늘](행9:5). 사울은 이 한 마디의 대답으로 충분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 이름을 묻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은 인류의 모든 사람들이 들어야 할 답변이며, 누구나 다 알아야 할 그런 진리입니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뵙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사명을 주실 때, 하나님께 대답할 이름을 주시도록 구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보소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느니라, 하면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그분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매](13). 모세는 하나님께서 파라오에게 가라고 하셨을 때 두려움에 질렸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12)는 약속에도 모세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사악한 불신이 겸손의 옷 아래에 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겸손이란 이름으로 불신을 포장하고 위장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겸손을 가장한 자기 비하를 하거나, 주님을 불신할 때 우리는 보통 자기를 방어하고 변명할 종교적 이유를 기가 막히게 만들어 냅니다. 사실 불완전하다는 것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최고의 은혜이며, 최대의 본분입니다. 그러므로 약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자랑거리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자신의 강하심을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나의 강한 능력이 약한 데서 완전해지기 때문이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모세는 자신의 불신에 대해서 종교적 변명을 쏟아내었습니다. 그는 처음에 ‘자신이 누구이기에’라며 거부했고(11), 이제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13) 하면서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질문할 때 하나님은 이미 모세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밝혀 주었습니다. 모세가 처음 불타는 떨기나무 가까이로 올 때에 주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먼저 밝히셨습니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6)고 계시하셨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집트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예상 질문을 핑계로 자신이 묻고 있는 것입니다. 불신은 계속해서 회의적인 질문을 낳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빌립은 주님께 이름이 아니라 더 큰 것을 요구했습니다. [빌립이 그분께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하니](요14:8). 그러나, 이것은 불신과 회의에 가득 찬 요구였습니다.
전에 저는 ‘제가 궁금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제게 이렇게 물으면 어떻게 답해야 하나요?’라며 자신이 믿지 못하는 내용들을 하나 하나 질문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아는 대로 대부분 답변을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질문한 사람은 대답을 거의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자신이 그 내용들을 믿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아는 방법은 정보와 지적 능력이 아니라 믿음과 마음입니다. 성경의 내용은 대부분 믿음으로 깨닫습니다. 믿을 때 깨달아집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깨닫나니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라.](히11:3). 성경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굳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늘 마음의 문제를 지적하셨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빵이 없으므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아직도 굳어 있느냐?](막8:17). 니고데모가 거듭남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믿음의 문제요, 마음의 문제였지 정보의 결여나 IQ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1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보소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느니라, 하면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그분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매](13). 모세 역시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던 것은 마음의 문제요,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백성들이 물으면 이미 아는대로, 들은대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대답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좀 더 확실한 것을 구했습니다. 자신이 믿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언하고, 증거할 수는 없습니다. 모세는 솔직히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할 만한 힘과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에 대해 증거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지금 호렙산에서 주님의 임재를 목격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자신의 이런 경험이 전혀 없는 백성들에게 증거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내 자신의 복음을 통해 구원받은 경험이 있지만, 전혀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고, 반대하는 세상 죄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모세의 믿음을 도우시고, 자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곧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스스로 계신 이]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느니라, 하라.](14). 하나님은 자신을 I AM이라고 계시하셨습니다. 백성들이 물으면 [‘I AM'’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느니라](14b)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I AM은 두 가지 의미의 문장입니다. AM을 완전 자동사로 보면, 그 자체로 완전한 문장이 되어서 “나는 존재한다”란 뜻이 됩니다. AM을 불완전 자동사로 보면, 보어를 필요로 하는 불완전한 문장이 되며, “나는....이다”란 뜻으로 아직 미완성의 계시입니다. 이 계시는 신약 성경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히 계시됩니다.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7차례에 걸쳐 미완성의 I AM에 대한 계시를 완성하셨습니다.
? 나는 생명의 빵이라(요6:35,41,48, 51)
? 나는 세상의 빛이라(요8:12, 9:15).
? 나는 양들의 문이라(요10:7,9).
? 나는 선한 목자라(요10:11,14).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요11:25).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14:6).
? 나는 참 포도나무요(요15:1,5).
주님은 자신이 I AM이란 사실을 밝히셨는데,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before Abraham was, I am./, 하시매]- (요8:58). 이 말에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 주님을 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 말의 의미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I AM이란 말에는 뒤에 무엇이나 다 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되십니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시편 3:3에서, [그러하오나, 오 주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이시니이다.](시3:3). 시편 89:26, [그가 내게 부르짖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반석이시니이다, 하리니](시89:26). 이 뿐이 아닙니다. 나의 힘이 되신 주여(시18:1)라고 노래했고, 나의 은신처요, 구원할 방벽이시고, 나의 힘이시고, 나의 능력이시고, 나를 돕는 이시오, 나의 견고한 거처요, 나의 소망이요, 나의 주,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나의 목자...등 끝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되시는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I AM THAT I AM(출3:14)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다시 1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곧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스스로 계신 이]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느니라, 하라.](14). I AM이신 하나님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성경은 주님이 ‘모든 것의 모든 것’(all in all)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는 그분의 몸이니 곧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이니라.](엡1:23).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목표요, 목적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5:28, [모든 것이 그분께 굴복 당할 때에는 아들도 모든 것을 자기 아래 두시는 분께 친히 복종하시리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려 하심이라.](고전15:28). 힘이 필요하면 힘되신 주님이 되실 것이며, 위로가 필요하면 위로자이신 주님이 되실 것이며, 무식하면 주님은 지혜가 되실 것이며, 의가 필요하면 하나님의 의가 되시며, 양식이 필요하면 양식이 되시고, 병이 들면 ‘치유자’(출15:26)가 되십니다. 주님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십니다.
에를 들어, 예수님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기도 하시지만 우리는 그 지혜를 잘못 사용할 수도 있고, 잊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의 지혜가 되신다면 나는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의를 주시지만 나는 그 의를 더럽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의 의가 되신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그 의는 영원하며, 변질될 수 없습니다. 나의 구원이 영원히 안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거룩을 요구하시며, “내가 거룩한 것같이 너희도 거룩하라” 하실 때 우리는 때때로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의 거룩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나의 모든 더러움은 하나님 앞에서 깨끗이 씻겨집니다. 주님은 나를 구속해 주실 뿐만 아니라 나의 구속이 되셨습니다. 이 속에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기입해 보십시오. 주님은 나의 생명의 빵이 되십니다. 나의 반석이 되십니다. 나의 산성이 되십니다. 나의 구원이 되시며, 나의 친구가 되시며, ....무엇이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과거의 십자가 사건에만 한정한다면 나는 결코 풍요로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신약에서 자신을 I AM으로 계시하심으로써 자신이 구약의 “주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히셨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충분히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셨습니다.
다시 1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곧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스스로 계신 이]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느니라, 하라.](14). 이는 하나님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히 동일한 분이란 사실을 말해 줍니다. 주님은 시제의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히브리서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히브리서 1:12, [주께서 의복처럼 그것들을 접으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동일하시고 주의 연대(年代)는 끊어지지 아니하리이다, 하시되](히1:12). 성경에 주 하나님의 이름이 수없이 많이 있지만 대부분의 이름은 인간과의 관계성에서 맺어진 이름입니다. 반면 ‘I AM THAT I AM’이란 이름은 순수한 하나님 자신의 계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탐구를 통해 그분을 알아낼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 주며, 후에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을 알려 주는 단초가 될 뿐입니다. I AM이란 이름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호기심과 질문들을 한 마디로 충족시켜 주며, 더 이상의 질문을 억제하는 이름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누구도 감히 ‘I AM THAT I AM’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대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10,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15:10). /But by the grace of God I am what I am: and his grace which was bestowed upon me was not in vain; but I laboured more abundantly than they all: yet not I, but the grace of God which was with me. 우리는 I AM이신 주님의 은혜로 I am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의 혼은 영원히 잃어버린 채 불타는 지옥에서 벌레처럼 퇴화하고 말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너희 조상들의 [주]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라. 이것이 영원토록 나의 이름이요, 이것이 모든 세대를 향한 나의 기념물이니라.](15). 하나님은 모세에게 한 가지 더 일러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미 앞에서 가르쳐 준 말씀이요, 모세도 알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친근하고, 익숙한 이름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영원토록 자신의 이름으로 삼으셨고, 모든 세대를 향한 기념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부활의 하나님이십니다. 조상들은 이 땅에서 죽었지만 주님은 그들이 살아있음을 말해 주심으로, 부활의 산 소망을 분명히 심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부활을 부인하며, 시비 거는 사두개인들을 향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0:37,38 [이제 죽은 자들이 일어난다는 것은 모세도 떨기나무에서 친히 {주}를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부르며 보여 준 바 있나니 이는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 그분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느니라, 하시니라](눅20:37-38).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을 최고의 경전이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구절이 부활에 관한 말씀인지도 몰랐습니다. 백성들 역시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마22:33). [그러나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하여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니라,하셨으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시니 무리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의 가르침에 깜짝 놀라더라.](마22:31-33).
?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을, 이삭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야곱은 성령 하나님을 예표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독생자 이삭에게 다 물려주었습니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 주시는 것과 일치합니다. 아들 이삭은 아버지로부터 신부를 얻었고, 아버지에게 죽기까지 순종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얻고,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과 같습니다. 야곱은 일생동안 징계와 훈련을 통해 육신을 처리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들만 열둘이나 되는 가장 많은 태의 열매를 얻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다투고 싸웠으나 환도뼈를 맞고 절뚝거리며, 이스라엘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는 성령을 통해 육신이 징계를 받고, 처리될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이삭과 달리 야곱은 험악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후에 고백하기를, [야곱이 파라오에게 이르되, 내 순례 길의 연수의 날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삶의 햇수의 날이 얼마 못되고 험악하였으며 내 조상들이 순례하던 때에 그들이 누린 삶의 햇수의 날에 미치지 못하나이다, 하고](창47:9).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는 야곱과 같은 일생을 살게 됩니다.
?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복을 주시고, 그들의 후손에게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조상들이 거하던 땅을 유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 이삭과 야곱을 통해 그 약속을 더욱 굳게 하셨습니다.
?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의로운 삶을 살았거나 공로가 있어서 주님의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우상 숭배의 고향에서 우상 숭배자의 아들로 태어나 자식 하나 없이 살던 별볼일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제 모세가 두려워하고 걱정했던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넘치도록 분명하게 자기 계시를 해 주셨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말을 담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두 가지로 계시 해 주셨습니다. 첫째는 ‘스스로 있는 자’(I AM)이고, 둘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본질과 실체를 정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I AM이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저와 여러분의 영원한 구원자이시며, 신랑이시고, 친구이시며, 맏형이시고, 주인이시고, 대장이시며,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공급자이시며, 우리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심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주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고, 지각의 눈을 열어 주심으로 주님을 알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다 같이 모세에게 계시 해 주신 I AM의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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