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 10일- 출애굽기
출애굽기(VI)
말씀: 출애굽기 3:1-6
요절: 출애굽기 3:4
06. 모세야, 모세야
모세의 생애는 세 시기로 나뉘어집니다. 첫 40년을 그는 바로 궁전에서 파라오 공주의 아들로서, 왕자로 지냈습니다. 이때 그는 “말고 지혜에 능력이 있었던 시기”(출7:22)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자로 자처하며 나섰으나 백성들의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는 파라오의 눈을 피해 미디안으로 도망을 쳤는데, 거기서 제 2의 인생을 맞습니다. 두 번째는 미디안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는 목자로 40년을 보냈습니다. 이 때 모세는 “나는 말이 느리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3:10)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낮아지고 겸손해졌습니다. 세 번째는 여수룬의 통치자(신33:5)로 40년을 보냈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선포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제 두 번째 인생에서 세 번째로 넘어가는 과정의 사건을 기술한 것입니다.
때로 현실은 소설보다 훨씬 더 극적이고, 인간의 삶이 얼마나 변하기 쉬운 것인가를 모세만큼 잘 보여 준 예도 드물 것입니다. 이집트의 종살이를 하던 히브리인의 아들로 태어나 공주의 아들이 되었고, 이제 낯선 땅 미디안에서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고, 목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나이 80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원하지 않게 은퇴를 했고, 이제는 나이가 들어 은퇴를 해야 할 그런 나이였습니다.
3:1을 보십시오. [이제 모세가 자기 장인 곧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의 양떼를 치더니 그 떼를 사막의 뒤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곧 호렙에 이르매](1). 우리는 여기서 모세가 자기 양이 아니라 장인의 양떼를 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자기 소유가 없었습니다. 마치 야곱이 장인이자, 삼촌인 라반의 양떼를 쳤듯이, 모세 역시 40년을 일했지만 여전히 장인의 양떼를 치고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인생의 낙이 없는 그런 삶이었습니다. 양떼를 치는 일은 이집트에서 교육을 받은 모세에게는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목자란 직업은 이집트에서 가장 하층민들이나 하는 일이요, 가증스런 일로 여겼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고하기를, 주의 종들의 생업은 젊어서부터 지금까지 가축을 치는 것이온데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목자(牧者)가 다 가증한 자이오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거하게 되리이다, 하니라.](창46:34). 하나님은 모세에게 세상이 가장 싫어하는 일을 시키셨습니다. 이는 마치 사대부 집안의 자녀를 백정을 시키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이왕이면 전직(前職)을 살려서 미디안에서 천문학이나 수학,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하거나, 하다 못해 교수라도 되어 후진 양성이라도 하면 좋을 것 같지만, 모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팡이 하나를 잡고 양들을 몰고 다녔습니다. 목자의 생활은 결코 목가적이지 않습니다. 목자의 생활은 현대인들이 사진이나 영화에서 보듯이 낭만적인 생활이 아닙니다. 목자의 생활은 인고(忍苦)의 삶입니다. 야곱은 20년의 목자 생활을 하면서 [내가 이와 같았으니 곧 낮에는 갈증이 밤에는 서리가 나를 쇠약하게 하고 내 눈에서 잠이 떠났나이다.](창31:40)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노예 생활로 고생하는 40년 동안 모세 역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양들은 무식하면서도 고집이 셉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궁중 교육을 받은 사람보다 목자로서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더 좋아하십니다.
주님은 세상이 가증스러워 하는 그런 직종,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세우셨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일하는 직업이 무엇인가? 그것이 청소부이든, 일당 잡부이든, 페인트를 하든, 정원사를 하든, 기계를 만지든, 세상이 가증스럽게 여기는 일이라 할지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모세처럼 재능과 학식이 있었던 사람에게 양을 치는 일은 보잘 것 없는 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사용할 수 있는 한 사람으로 키우고 계셨습니다. 목자 생활을 통해 모세는 온유함과 끈기와 인내를 배웠습니다.
[이제 모세가 자기 장인 곧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의 양떼를 치더니 그 떼를 사막의 뒤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곧 호렙에 이르매](1).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언제 나타나셨습니까? 모세가 양을 치고 있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백수를 부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일하시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기드온은 타작을 할 때 주님이 부르셨습니다(삿6). 다윗 역시 들에서 아버지의 양떼를 돌볼 때 부름 받았습니다. 엘리사는 밭을 갈 때 부름 받았습니다(왕상19:19-21). 사도들은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그물을 손질할 때 부름 받았습니다(막1:16-20). 마태는 세관에서 세금을 거둘 때 부름을 받았습니다(마9:9). 하나님은 일하지 않는 사람을 부르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그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을 부름을 기다리며 놀고 있는 신학교 졸업생들이나 사역 준비생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정말 주님의 사역에로 부름을 기다리고 있다면 일을 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모세는 양떼를 몰고 사막의 뒤편으로 갔습니다. 광야는 하나님과 함께 대화하기 위한 좋은 장소입니다. 사막의 뒤편에는 아무 사람도 없습니다. 침례인 요한이 광야에 있었고, 사도 바울이 아라비아의 광야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홀로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고, 더 많은 교제를 갖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바쁜 도시 생활에서 하나님과 홀로 하는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함으로 영적인 힘이 고갈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세처럼 사막의 뒤편으로 가는 대신 골방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은밀한 가운데 계신 하나님과 경건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일상 가운데 가장 소중한 시간입니다. 새벽이든, 늦은 밤이든 홀로 주님과의 시간을 가지십시오.
모세가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는데, 이 산은 시내산을 말합니다(출17:6,33:6, 신1:2,19, 4:10...). 호렙은 시내산이 있는 산맥 전체를 일컫는데 성경에서는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시내산은 하나님의 산으로 불리는데 후에 엘리야가 여기서 주님을 만났고, 사도 바울 역시 여기서 복음의 신비를 계시 받았을 것입니다(갈1:17,4:25).
2,3절을 보십시오. [[주]의 천사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속에서 그에게 나타나니라. 그가 보니, 보라,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떨기나무가 소멸되지 아니하므로 모세가 이르되, 이제 내가 옆으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가, 하였더라.](2-3). 모세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이집트의 궁전에서 마술사들이 마술과 이적을 행하는 것을 많이 보고자란 모세였지만 이것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불을 붙이지도 않았는데 타고 있는 떨기나무를 보았던 것입니다. 특이하게도 떨기나무는 불에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옆으로 가서 이 광경을 보고자 하였습니다. 여기서 주의 천사는 주님을 말합니다(4,6,13,14). 신명기 33:16에 정확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땅의 귀한 것과 땅의 충만한 것과 떨기나무 속에 거하시던 이의 선하신 뜻으로 인하여 복이 요셉의 머리에 곧 자기 형제들로부터 구별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신33:16). 이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보여진 첫 번째 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올리브 나무 등 다양한 나무로 묘사되어 있는데, 그 민족적 역사는 단연 ‘불타는 떨기나무’로 상징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늘 불꽃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하심이 그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박해와 시련 가운데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교회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교회는 박해로 인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불신과 배교로 인해 약화될지언정 박해와 고난으로 인해 쓰러지지는 않습니다. 순교자들의 피가 흐르면 흐를수록 교회는 더 성장했으며, 성도들의 신앙은 더 순수해졌습니다. 이는 불타는 떨기나무 속에 주님이 계셨던 것처럼 우리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약화된 것이 박해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배교로 인한 것임을 입증해 줍니다. 박해와 고난은 결코 믿음을 약화시킬 수 없습니다. 떨기나무의 불꽃은 아무리 강해도 떨기 나무를 소멸시키지 않습니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고 있습니다. 떨기나무는 바로 노예 생활로 신음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떨기나무는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상 보아야 할 것은 떨기나무가 아니라 그 속에 계신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한 불타는 떨기나무는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불 가운데 있는 한 그루의 떨기나무였습니다. 이집트는 불타는 용광로였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4:20, [그러나 [주]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 용광로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사 이 날의 너희와 같이 자신을 위하여 상속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신4:20). 파라오는 불의 강도를 점점 높였지만 그럴수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점 번성해졌습니다. 용광로의 불꽃은 결코 이스라엘 백성들을 태울 수 없었습니다. 이는 앞으로 대환란 때 적그리스도가 결코 이스라엘을 소멸시킬 수 없음을 보여 주는 예이기도 합니다. 바빌론에서 포로로 잡혀간 히브리의 세 청년은 문자 그대로 용광로에 던짐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겁게 한 그 불꽃이 그들의 머리카락 하나 태우지 못했던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불타는 떨기 나무 곁에 서 계신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계셨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주님은 자기 백성들과 성도의 고난 속에 함께 게십니다. 이사야 63:8,9에 말하기를, [이는 그분께서 말씀하시되, 참으로 그들은 내 백성이요,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그들의 모든 고난 속에서 친히 고난 당하시고 자기 눈앞에 있는 천사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며 친히 사랑하고 동정하사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의 모든 날에 그들을 품으시며 이끄셨음이라.](사63:8-9).
생각해 보십시오. 떨기나무는 그다지 보기에 화려하거나 쭉쭉 뻗은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은 보기 좋은 나무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런 떨기나무에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주목받는 로마의 제국이 아닌 로마의 변망이요, 가장 별볼일 없는 민족인 유대민족에서 나신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이 세상의 위대하고 존경받는 사람들 속에 자신을 계시하지 아니하시고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을 들어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말씀을 주시고, 사명을 주십니다. 우리는 모두 사막에서 자라난 떨기나무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그 속에 계심같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탁월한 신학자들을 통해서 성경을 계시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무릎꿇고 기도하는 보잘 것 없는 성도들을 통해 말씀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다음은 유명한 복음 전도자였던 아이언사이드가 겪었던 실화 한편입니다.
실화) 프레이저씨의 천막에 이르자 헤리는 자기를 소개하고 가벼운 인삿말을 나눈 후 노인에게 자기는 복음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데 힘쓰고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아 그렇소?" 늙은 하나님의 종이 말했습니다. "잠시 여기 앉아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 함께 얘기해 봅시다". 그런 다음 그는 다 낡아 헤어진 그의 성경을 펼치고는 한 동안, 기력이 거의 쇠진해질 때까지 여기 저기를 들춰가며 하나님의 보배로운 말씀의 진리를 하나씩 하나씩 열심히 제시해 보였습니다. 그의 성경 해설이 너무도 쉽고 흥미진진했으므로 젊은 아이언사이드는 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감동 속에 이들 진리들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젊은 설교자의 빰을 타고 눈물이 흘러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노인께서는 어디서 이런 교훈들을 얻으셨는지요?" 헤리가 물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진리들을 알려줄 책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제게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노인께서는 이들 진리들을 신학교에서 배우셨는지요?"
헤리는 프레이저씨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을 그는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난 이 진리들을 아일랜드 북부의 한 작은 시골 농가의 진흙 마룻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배웠소. 거기서 내 앞에 펼쳐진 이 성경을 가지고 나는 한 번에 수시간씩 무릎을 꿇고는 하나님의 성령께 내 영혼에 그리스도를 계시해 주시고 내 심령에 말씀을 비춰주시기를 간구했소. 그분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성경 학교나 신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그 진흙 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있는 나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오" -[아이언사이드의 생애] 중에서(전도출판사)
[[주]의 천사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속에서 그에게 나타나니라. 그가 보니, 보라,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떨기나무가 소멸되지 아니하므로 모세가 이르되, 이제 내가 옆으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가, 하였더라.](2-3). 모세는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않는가? 답을 얻고자 곁으로 다가섰습니다. 이 불은 그냥 불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불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심이니라](히12:29)고 말씀합니다.
? 이 불은 백성들의 길을 비쳐 주사 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는 빛입니다. [또 그들을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인도하사 그들이 가야 할 길에 빛을 주셨사오며](느9:12).
? 이 불은 성도들의 삶을 정결하게 하는 불입니다. 하나님의 불은 불신자들에게는 소멸하는 불이지만 신자들에게 단련하는 불입니다. 베드로전서 1:7, [이것은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단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훨씬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으로 드러나게 하려 함이니라.](벧전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삼킬 것 같은 불같은 시련과 시험이 있다면 우리의 믿음이 단련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기뻐하십시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에 어떤 불도 우리를 소멸할 수 없습니다. 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이상하게 여긴 것같이, 사람들은 약하지만 넘어지지 아니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는 성도들의 이런 모습을 볼 때, 이상하게 여기고 놀라게 됩니다.
? 이 불은 죄인들을 불태우는 지옥의 불입니다. [거기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9:44,46,48). 주님은 소돔과 고모라에 불을 내려 심판하심으로 앞으로 있을 심판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말라기 4:1, [이는, 보라, 화덕같이 불태우는 날이 임하기 때문이니 참으로 교만한 자와 악하게 행하는 자가 다 지푸라기가 되리라. 그 날이 임하여 그들을 불태우고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하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말4:1).
? 이 불은 주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불입니다(출13:21, 19:18,신4:24).
이와 같이 불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를 상징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정결케 하시고 시험하시려 하는 고난과 시련을 의미합니다. 떨기나무는 열매를 맺기 보다 가시를 맺는 나무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열매를 맺기 보다 가시를 주로 가시를 내었던 민족입니다. 그들은 늘 징계와 심판을 받았습니다. 식물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떨기나무의 가시는 본래 가시가 아니라 양분과 물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해 자라지 못한 가지라고 합니다. 좋은 환경에서 잘 자라면 가시가 아니라 가지가 되고 잎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장차 열매를 가장 많이 맺는 민족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과 같습니다. 베드로전서 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단련하려고 오는 불 같은 시련에 관하여는 마치 이상한 일이 너희에게 일어난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벧전4:12). 떨기나무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그 나무는 금방 한 줌의 재로 변했을 것입니다.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수없이 망해 가는 나라들 중의 하나처럼 이스라엘은 역사에 흔적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성도들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교회는 100년도 지나지 않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가 보려고 옆으로 가는 것을 [주]께서 보시고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거늘](4). 주님은 모세를 두 번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이렇게 부르신 것은 주님의 어법(語法)입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야곱을 부르실 때, 사울을 부르실 때, 사무엘을 부르실 때, 마르다를 부르실 때, 시몬 베드로를 부르실 때 모두 이런 식으로 두 번씩 부르셨습니다. 모세는 주님의 부르심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신의 종들을 이렇게 부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계급이나 직급, 소속이나 별명을 부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우리를 저 하늘로 불러 올리실 때도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잊어가고 있을 무렵 하나님은 모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마치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을 부르듯이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찾고, 부르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모세를 찾아오시고, 부르셨습니다.
? 주님은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불러 구원시키러 오셨습니다. 거기에 응답한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너희도 그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니라.](롬1:6)
? 주님은 우리를 사명으로 부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뭔가 일을 하도록 부르셨습니다. 이 부르심을 ‘높은 부르심’(high calling)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노라.](빌3:14). 부르심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영원한 생명을 붙들라. 이것을 위하여 너 역시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들 앞에서 선한 고백을 하였도다.](딤전6:12).
? 주님은 우리를 회개하도록 부르십니다. 범죄한 아담을 찾아 오셔서,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부르셨듯이 성도가 죄를 범하였을 때 주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오직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우라. 이는 내가 의로운 자를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음이라, 하시니라.](마9:13). [오직 이스라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가 종일토록 손을 내밀어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백성을 향하게 하였노라, 하였느니라.](롬10:21).
? 주님은 우리를 영광으로 부르십니다. 머지 않아 주님은 ‘이리로 올라 오라’ 부르실 것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불러 줄 때 여러분은 삶의 의미를 찾을 것입니다. 누가 나를 불러 줍니까? 여러분을 불러 주는 대상에 따라 존재의미와 가치가 다르게 느껴 질 것입니다. 왕의 부르심을 기다리는 신하, 사장의 부르심을 기다리는 샐러리맨들, 시상식에서 나의 이름을 불러 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멀리서 누군가 나를 불러 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조선시대 최고의 문재(文才)로 불리는 송강 정철은 귀양을 가서 사미인곡, 속미인곡과 같은 걸작을 많이 남겼는데 그 내용은 모두 임금인 선조가 다시 자신을 불러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내용입니다. 어떤 때는 달갑지 않는 부름도 있을 것입니다. 군대로 오라는 국가의 부름, 경찰서로 출두하라는 고지서, 법원으로 오라는 판사의 부름은 그리 달갑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저 위의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하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 곧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아,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히3:1)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모세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이사야 대언자처럼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또 내가 {주}의 음성을 들으니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 하시니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라.](사6:8). 우리가 주님이 부르실 때, “내가 여기있나이다”라고 답변한다면 주님 역시 우리가 찾고 부를 때 “내가 여기 있다”고 답변하십니다. 이사야 58:9, [그때에 네가 부르면 [주]께서 응답하시겠고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내가 여기 있다, 하시리라. ...](사58:9a).
5절을 보겠습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여기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 주님께서 신발을 벗게 하신 또 한번의 예는 여호수아 5:15에 나옵니다. 이 두 곳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서실 곳이기 때문입니다(슥14:1-10). 주님은 시내산에서 출발하여 왕의 대로(King's highway)를 따라 올리브 산으로 가십니다. 거룩한 곳에서 신발을 벗는 것은 동양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관습입니다. 우리는 신발을 신고 방에 들어가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민족입니다. 신발을 신고 신전(神殿)에 들어가는 동양 종교는 없습니다. 신발을 벗는 것은 존경과 경의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회교도들은 모스크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습니다. 불교도들은 불당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습니다.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들어가야 할 그곳이 지금 서 있는 곳보다 거룩하거나 깨끗하기 때문입니다. 신발을 벗는 지점은 그 안과 밖이 확연히 경계가 되는 지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한 것은 그곳이 바로 모세의 인생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확연한 경계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신발을 벗음으로서 이전의 80년 인생을 마감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발을 벗는 행위는 이스라엘의 관습으로서 ‘모든 것을 확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룻4:7)3). 하나님은 이 자리에서 모세와 무엇인가를 확정하셨습니다.
로랜스형제라 불리는 니콜라스 헤르만의 열망은 늘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그는 "영적인 생활은 하나에서 열까지 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연습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가장 거룩하고 가장 필요한 연습은 곧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는 기술도 필요하지 않고 지식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오직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 어떤 것들보다도 하나님만을 사랑하고자 하는 그분께만 드려진 마음이라 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로버트 모건이란 사람은 "시련을 당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은 시련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복이다. 지독한 시련의 순간에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보다 더 달콤한 것은 세상에 없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그곳을 알지 못했지만 그곳이 자신의 신발을 벗어야 하는 거룩한 땅인 곳을 알았습니다. 마치 야곱이 돌 베개를 베고 자던 벧엘의 체험과 동일한 것입니다(창28:16). 모세는 주님의 임재 앞에서 신발을 벗음으로써 80년의 세월에 이정표를 세운 것입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여기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것은 하나님 앞에서 주종 관계를 분명히 하시기 위함입니다. 신발은 땅과 직접 접하고 있는 유일한 신체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우리는 가볍게 보이고 거만해 보이고 그분의 봉사에는 걸맞지 않는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진지한 기다림과 준비됨으로 하나님 가까이 가야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신발을 벗기시고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대신 화평의 복음의 신발을 신게 하셨습니다. [화평의 복음을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엡6:15). 주님은 우리의 신발뿐만 아니라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합니다. [이전의 행실에 관하여는 너희가 속이는 것으로 가득한 욕심들에 따라 부패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4:22). 어둠의 행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행위를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2). 히브리서 12:21,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떨쳐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히12:21).
6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자기 얼굴을 숨기니 이는 그가 하나님 뵙기를 두려워하였음이더라.](6). 여기서 시제를 주의하십시오. 하나님은 '나는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이었다'라고 하시지 않고, '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죽어 무덤 속에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모세에게 부활의 믿음을 심어 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 말씀을 통해 문자적인 부활을 분명히 알고 믿었습니다. 이는 모세가 파라오 앞에서 죽음을 두려워함으로 이집트에서 도망쳐 지금까지 40년의 도망자 생활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사역자로 임명하시기 전에, 죽음의 땅 이집트로 다시 보내기 전에 ‘사망의 두려움’을 이기는 ‘부활의 믿음, 부활의 권능, 부활의 주님’으로서 만나 주신 것입니다. 부활 신앙이 없다면 도저히 다시 파라오 앞으로 갈 수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는 오늘날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믿음이기도 합니다. 부활의 믿음이 없이 죄와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않고,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이 구절을 인용해서 설명하셨습니다. [죽은 자들이 일어나는 일에 관하여는 너희가 모세의 책에서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속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다, 하신 말씀을 읽지 못하였느냐?](막12:26). 만약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 주님은 절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었느니라(과거형)”고 말씀하셔야지, “...이니라”(현재형)으로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죽고 없다면, 어찌 아브라함의 하나님일 수 있겠습니까? 한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다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라고 말씀하심으로 아브라함의 혼이 살아 있으며, 몸이 부활한다는 사실에 대해 분명하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라고 말씀하심으로 아브라함과 한 약속이 여전히 유효함을 말해 줍니다. “나는 이삭의 하나님이요”라고 말씀하심으로 이삭을 통한 주님의 약속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야곱의 하나님이요”라고 하심으로 야곱의 약속이 지금, 바로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미 죽어 버린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의 약속을 지키시는 것이 아니라, 사자(死者)와의 언약이 아니라 ‘산 자’와의 언약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약속은 한 쪽이 죽어 버리면 더 이상 유효할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약속의 신실함을 볼 수 없습니다.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부활한다면 그는 자신에게 약속하신 약속들이 모두 이행되고, 지켜졌는지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다”라고 하심으로 이 모든 사실을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택하셔서 씨에 대한 약속을 주신 하나님으로서 주권자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 이삭의 하나님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시는 구속하시는 하나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 야곱의 하나님이란 오래 참으시고, 결코 버리지 않으시며, 우리에게 주신 모든 약속들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성령 하나님을 말합니다.
떨기나무의 불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모세는 얼굴을 숨기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엘리야 역시 세미한 음성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뵈었을 때 자기 외투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모세가 자기 얼굴을 숨기니 이는 그가 하나님 뵙기를 두려워하였음이더라.](6). 이것은 하나님의 위엄과 두려움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산 위에 머무르거나 성전 위에 머무를 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히 그 앞에 서지 못했습니다. 직통 계시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사실 죽고 싶어 환장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나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듯이 그런 방식으로 말씀하신다면 여러 사람이 죽어 나갔을 것입니다. 신명기 5:26, [육신을 가진 자가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처럼 살아 남은 자가 누구니이까?](신5:26).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는 감사와 찬양을 돌려 드려야 합니다.
오늘날 은사를 추구하고, 표적을 구하는 악하고 음란한 교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하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대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시고, 기록하심으로 거기에 동등한 권위와 위엄을 주십니다.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의 입에서 직접 발하는 말씀의 권위와 동등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두려워하고, 주님의 말씀에 두려워 떨 때 주님의 돌보심과 보살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모세와 같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님의 임재를 체험한 경험이 전혀 없다면 이 시간 주님의 임재를 구하십시오.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주님 앞에서 신발을 벗으십시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지금 바로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명에 앞서 부활의 신앙을 소유하십시오. 사명에 앞서 부활의 신앙을 소유하십시오. 말씀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면 주님 역시 ‘나는 여기있다’ 하십니다.
출애굽기(VI)
말씀: 출애굽기 3:1-6
요절: 출애굽기 3:4
06. 모세야, 모세야
모세의 생애는 세 시기로 나뉘어집니다. 첫 40년을 그는 바로 궁전에서 파라오 공주의 아들로서, 왕자로 지냈습니다. 이때 그는 “말고 지혜에 능력이 있었던 시기”(출7:22)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자로 자처하며 나섰으나 백성들의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는 파라오의 눈을 피해 미디안으로 도망을 쳤는데, 거기서 제 2의 인생을 맞습니다. 두 번째는 미디안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는 목자로 40년을 보냈습니다. 이 때 모세는 “나는 말이 느리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3:10)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낮아지고 겸손해졌습니다. 세 번째는 여수룬의 통치자(신33:5)로 40년을 보냈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선포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제 두 번째 인생에서 세 번째로 넘어가는 과정의 사건을 기술한 것입니다.
때로 현실은 소설보다 훨씬 더 극적이고, 인간의 삶이 얼마나 변하기 쉬운 것인가를 모세만큼 잘 보여 준 예도 드물 것입니다. 이집트의 종살이를 하던 히브리인의 아들로 태어나 공주의 아들이 되었고, 이제 낯선 땅 미디안에서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고, 목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나이 80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원하지 않게 은퇴를 했고, 이제는 나이가 들어 은퇴를 해야 할 그런 나이였습니다.
3:1을 보십시오. [이제 모세가 자기 장인 곧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의 양떼를 치더니 그 떼를 사막의 뒤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곧 호렙에 이르매](1). 우리는 여기서 모세가 자기 양이 아니라 장인의 양떼를 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자기 소유가 없었습니다. 마치 야곱이 장인이자, 삼촌인 라반의 양떼를 쳤듯이, 모세 역시 40년을 일했지만 여전히 장인의 양떼를 치고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인생의 낙이 없는 그런 삶이었습니다. 양떼를 치는 일은 이집트에서 교육을 받은 모세에게는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목자란 직업은 이집트에서 가장 하층민들이나 하는 일이요, 가증스런 일로 여겼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고하기를, 주의 종들의 생업은 젊어서부터 지금까지 가축을 치는 것이온데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목자(牧者)가 다 가증한 자이오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거하게 되리이다, 하니라.](창46:34). 하나님은 모세에게 세상이 가장 싫어하는 일을 시키셨습니다. 이는 마치 사대부 집안의 자녀를 백정을 시키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이왕이면 전직(前職)을 살려서 미디안에서 천문학이나 수학,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하거나, 하다 못해 교수라도 되어 후진 양성이라도 하면 좋을 것 같지만, 모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팡이 하나를 잡고 양들을 몰고 다녔습니다. 목자의 생활은 결코 목가적이지 않습니다. 목자의 생활은 현대인들이 사진이나 영화에서 보듯이 낭만적인 생활이 아닙니다. 목자의 생활은 인고(忍苦)의 삶입니다. 야곱은 20년의 목자 생활을 하면서 [내가 이와 같았으니 곧 낮에는 갈증이 밤에는 서리가 나를 쇠약하게 하고 내 눈에서 잠이 떠났나이다.](창31:40)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노예 생활로 고생하는 40년 동안 모세 역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양들은 무식하면서도 고집이 셉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궁중 교육을 받은 사람보다 목자로서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더 좋아하십니다.
주님은 세상이 가증스러워 하는 그런 직종,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세우셨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일하는 직업이 무엇인가? 그것이 청소부이든, 일당 잡부이든, 페인트를 하든, 정원사를 하든, 기계를 만지든, 세상이 가증스럽게 여기는 일이라 할지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모세처럼 재능과 학식이 있었던 사람에게 양을 치는 일은 보잘 것 없는 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사용할 수 있는 한 사람으로 키우고 계셨습니다. 목자 생활을 통해 모세는 온유함과 끈기와 인내를 배웠습니다.
[이제 모세가 자기 장인 곧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의 양떼를 치더니 그 떼를 사막의 뒤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곧 호렙에 이르매](1).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언제 나타나셨습니까? 모세가 양을 치고 있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백수를 부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일하시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기드온은 타작을 할 때 주님이 부르셨습니다(삿6). 다윗 역시 들에서 아버지의 양떼를 돌볼 때 부름 받았습니다. 엘리사는 밭을 갈 때 부름 받았습니다(왕상19:19-21). 사도들은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그물을 손질할 때 부름 받았습니다(막1:16-20). 마태는 세관에서 세금을 거둘 때 부름을 받았습니다(마9:9). 하나님은 일하지 않는 사람을 부르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그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을 부름을 기다리며 놀고 있는 신학교 졸업생들이나 사역 준비생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정말 주님의 사역에로 부름을 기다리고 있다면 일을 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모세는 양떼를 몰고 사막의 뒤편으로 갔습니다. 광야는 하나님과 함께 대화하기 위한 좋은 장소입니다. 사막의 뒤편에는 아무 사람도 없습니다. 침례인 요한이 광야에 있었고, 사도 바울이 아라비아의 광야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홀로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고, 더 많은 교제를 갖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바쁜 도시 생활에서 하나님과 홀로 하는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함으로 영적인 힘이 고갈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세처럼 사막의 뒤편으로 가는 대신 골방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은밀한 가운데 계신 하나님과 경건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일상 가운데 가장 소중한 시간입니다. 새벽이든, 늦은 밤이든 홀로 주님과의 시간을 가지십시오.
모세가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는데, 이 산은 시내산을 말합니다(출17:6,33:6, 신1:2,19, 4:10...). 호렙은 시내산이 있는 산맥 전체를 일컫는데 성경에서는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시내산은 하나님의 산으로 불리는데 후에 엘리야가 여기서 주님을 만났고, 사도 바울 역시 여기서 복음의 신비를 계시 받았을 것입니다(갈1:17,4:25).
2,3절을 보십시오. [[주]의 천사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속에서 그에게 나타나니라. 그가 보니, 보라,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떨기나무가 소멸되지 아니하므로 모세가 이르되, 이제 내가 옆으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가, 하였더라.](2-3). 모세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이집트의 궁전에서 마술사들이 마술과 이적을 행하는 것을 많이 보고자란 모세였지만 이것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불을 붙이지도 않았는데 타고 있는 떨기나무를 보았던 것입니다. 특이하게도 떨기나무는 불에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옆으로 가서 이 광경을 보고자 하였습니다. 여기서 주의 천사는 주님을 말합니다(4,6,13,14). 신명기 33:16에 정확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땅의 귀한 것과 땅의 충만한 것과 떨기나무 속에 거하시던 이의 선하신 뜻으로 인하여 복이 요셉의 머리에 곧 자기 형제들로부터 구별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신33:16). 이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보여진 첫 번째 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올리브 나무 등 다양한 나무로 묘사되어 있는데, 그 민족적 역사는 단연 ‘불타는 떨기나무’로 상징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늘 불꽃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하심이 그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박해와 시련 가운데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교회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교회는 박해로 인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불신과 배교로 인해 약화될지언정 박해와 고난으로 인해 쓰러지지는 않습니다. 순교자들의 피가 흐르면 흐를수록 교회는 더 성장했으며, 성도들의 신앙은 더 순수해졌습니다. 이는 불타는 떨기나무 속에 주님이 계셨던 것처럼 우리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약화된 것이 박해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배교로 인한 것임을 입증해 줍니다. 박해와 고난은 결코 믿음을 약화시킬 수 없습니다. 떨기나무의 불꽃은 아무리 강해도 떨기 나무를 소멸시키지 않습니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고 있습니다. 떨기나무는 바로 노예 생활로 신음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떨기나무는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상 보아야 할 것은 떨기나무가 아니라 그 속에 계신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한 불타는 떨기나무는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불 가운데 있는 한 그루의 떨기나무였습니다. 이집트는 불타는 용광로였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4:20, [그러나 [주]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 용광로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사 이 날의 너희와 같이 자신을 위하여 상속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신4:20). 파라오는 불의 강도를 점점 높였지만 그럴수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점 번성해졌습니다. 용광로의 불꽃은 결코 이스라엘 백성들을 태울 수 없었습니다. 이는 앞으로 대환란 때 적그리스도가 결코 이스라엘을 소멸시킬 수 없음을 보여 주는 예이기도 합니다. 바빌론에서 포로로 잡혀간 히브리의 세 청년은 문자 그대로 용광로에 던짐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겁게 한 그 불꽃이 그들의 머리카락 하나 태우지 못했던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불타는 떨기 나무 곁에 서 계신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계셨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주님은 자기 백성들과 성도의 고난 속에 함께 게십니다. 이사야 63:8,9에 말하기를, [이는 그분께서 말씀하시되, 참으로 그들은 내 백성이요,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그들의 모든 고난 속에서 친히 고난 당하시고 자기 눈앞에 있는 천사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며 친히 사랑하고 동정하사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의 모든 날에 그들을 품으시며 이끄셨음이라.](사63:8-9).
생각해 보십시오. 떨기나무는 그다지 보기에 화려하거나 쭉쭉 뻗은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은 보기 좋은 나무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런 떨기나무에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주목받는 로마의 제국이 아닌 로마의 변망이요, 가장 별볼일 없는 민족인 유대민족에서 나신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이 세상의 위대하고 존경받는 사람들 속에 자신을 계시하지 아니하시고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을 들어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말씀을 주시고, 사명을 주십니다. 우리는 모두 사막에서 자라난 떨기나무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그 속에 계심같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탁월한 신학자들을 통해서 성경을 계시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무릎꿇고 기도하는 보잘 것 없는 성도들을 통해 말씀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다음은 유명한 복음 전도자였던 아이언사이드가 겪었던 실화 한편입니다.
실화) 프레이저씨의 천막에 이르자 헤리는 자기를 소개하고 가벼운 인삿말을 나눈 후 노인에게 자기는 복음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데 힘쓰고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아 그렇소?" 늙은 하나님의 종이 말했습니다. "잠시 여기 앉아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 함께 얘기해 봅시다". 그런 다음 그는 다 낡아 헤어진 그의 성경을 펼치고는 한 동안, 기력이 거의 쇠진해질 때까지 여기 저기를 들춰가며 하나님의 보배로운 말씀의 진리를 하나씩 하나씩 열심히 제시해 보였습니다. 그의 성경 해설이 너무도 쉽고 흥미진진했으므로 젊은 아이언사이드는 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감동 속에 이들 진리들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젊은 설교자의 빰을 타고 눈물이 흘러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노인께서는 어디서 이런 교훈들을 얻으셨는지요?" 헤리가 물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진리들을 알려줄 책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제게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노인께서는 이들 진리들을 신학교에서 배우셨는지요?"
헤리는 프레이저씨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을 그는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난 이 진리들을 아일랜드 북부의 한 작은 시골 농가의 진흙 마룻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배웠소. 거기서 내 앞에 펼쳐진 이 성경을 가지고 나는 한 번에 수시간씩 무릎을 꿇고는 하나님의 성령께 내 영혼에 그리스도를 계시해 주시고 내 심령에 말씀을 비춰주시기를 간구했소. 그분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성경 학교나 신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그 진흙 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있는 나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오" -[아이언사이드의 생애] 중에서(전도출판사)
[[주]의 천사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속에서 그에게 나타나니라. 그가 보니, 보라,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떨기나무가 소멸되지 아니하므로 모세가 이르되, 이제 내가 옆으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가, 하였더라.](2-3). 모세는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않는가? 답을 얻고자 곁으로 다가섰습니다. 이 불은 그냥 불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불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심이니라](히12:29)고 말씀합니다.
? 이 불은 백성들의 길을 비쳐 주사 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는 빛입니다. [또 그들을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인도하사 그들이 가야 할 길에 빛을 주셨사오며](느9:12).
? 이 불은 성도들의 삶을 정결하게 하는 불입니다. 하나님의 불은 불신자들에게는 소멸하는 불이지만 신자들에게 단련하는 불입니다. 베드로전서 1:7, [이것은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단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훨씬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으로 드러나게 하려 함이니라.](벧전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삼킬 것 같은 불같은 시련과 시험이 있다면 우리의 믿음이 단련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기뻐하십시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에 어떤 불도 우리를 소멸할 수 없습니다. 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이상하게 여긴 것같이, 사람들은 약하지만 넘어지지 아니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는 성도들의 이런 모습을 볼 때, 이상하게 여기고 놀라게 됩니다.
? 이 불은 죄인들을 불태우는 지옥의 불입니다. [거기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9:44,46,48). 주님은 소돔과 고모라에 불을 내려 심판하심으로 앞으로 있을 심판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말라기 4:1, [이는, 보라, 화덕같이 불태우는 날이 임하기 때문이니 참으로 교만한 자와 악하게 행하는 자가 다 지푸라기가 되리라. 그 날이 임하여 그들을 불태우고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하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말4:1).
? 이 불은 주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불입니다(출13:21, 19:18,신4:24).
이와 같이 불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를 상징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정결케 하시고 시험하시려 하는 고난과 시련을 의미합니다. 떨기나무는 열매를 맺기 보다 가시를 맺는 나무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열매를 맺기 보다 가시를 주로 가시를 내었던 민족입니다. 그들은 늘 징계와 심판을 받았습니다. 식물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떨기나무의 가시는 본래 가시가 아니라 양분과 물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해 자라지 못한 가지라고 합니다. 좋은 환경에서 잘 자라면 가시가 아니라 가지가 되고 잎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장차 열매를 가장 많이 맺는 민족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과 같습니다. 베드로전서 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단련하려고 오는 불 같은 시련에 관하여는 마치 이상한 일이 너희에게 일어난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벧전4:12). 떨기나무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그 나무는 금방 한 줌의 재로 변했을 것입니다.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수없이 망해 가는 나라들 중의 하나처럼 이스라엘은 역사에 흔적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성도들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교회는 100년도 지나지 않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가 보려고 옆으로 가는 것을 [주]께서 보시고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거늘](4). 주님은 모세를 두 번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이렇게 부르신 것은 주님의 어법(語法)입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야곱을 부르실 때, 사울을 부르실 때, 사무엘을 부르실 때, 마르다를 부르실 때, 시몬 베드로를 부르실 때 모두 이런 식으로 두 번씩 부르셨습니다. 모세는 주님의 부르심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신의 종들을 이렇게 부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계급이나 직급, 소속이나 별명을 부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우리를 저 하늘로 불러 올리실 때도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잊어가고 있을 무렵 하나님은 모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마치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을 부르듯이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찾고, 부르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모세를 찾아오시고, 부르셨습니다.
? 주님은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불러 구원시키러 오셨습니다. 거기에 응답한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너희도 그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니라.](롬1:6)
? 주님은 우리를 사명으로 부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뭔가 일을 하도록 부르셨습니다. 이 부르심을 ‘높은 부르심’(high calling)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노라.](빌3:14). 부르심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영원한 생명을 붙들라. 이것을 위하여 너 역시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들 앞에서 선한 고백을 하였도다.](딤전6:12).
? 주님은 우리를 회개하도록 부르십니다. 범죄한 아담을 찾아 오셔서,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부르셨듯이 성도가 죄를 범하였을 때 주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오직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우라. 이는 내가 의로운 자를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음이라, 하시니라.](마9:13). [오직 이스라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가 종일토록 손을 내밀어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백성을 향하게 하였노라, 하였느니라.](롬10:21).
? 주님은 우리를 영광으로 부르십니다. 머지 않아 주님은 ‘이리로 올라 오라’ 부르실 것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불러 줄 때 여러분은 삶의 의미를 찾을 것입니다. 누가 나를 불러 줍니까? 여러분을 불러 주는 대상에 따라 존재의미와 가치가 다르게 느껴 질 것입니다. 왕의 부르심을 기다리는 신하, 사장의 부르심을 기다리는 샐러리맨들, 시상식에서 나의 이름을 불러 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멀리서 누군가 나를 불러 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조선시대 최고의 문재(文才)로 불리는 송강 정철은 귀양을 가서 사미인곡, 속미인곡과 같은 걸작을 많이 남겼는데 그 내용은 모두 임금인 선조가 다시 자신을 불러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내용입니다. 어떤 때는 달갑지 않는 부름도 있을 것입니다. 군대로 오라는 국가의 부름, 경찰서로 출두하라는 고지서, 법원으로 오라는 판사의 부름은 그리 달갑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저 위의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하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 곧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아,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히3:1)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모세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이사야 대언자처럼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또 내가 {주}의 음성을 들으니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 하시니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라.](사6:8). 우리가 주님이 부르실 때, “내가 여기있나이다”라고 답변한다면 주님 역시 우리가 찾고 부를 때 “내가 여기 있다”고 답변하십니다. 이사야 58:9, [그때에 네가 부르면 [주]께서 응답하시겠고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내가 여기 있다, 하시리라. ...](사58:9a).
5절을 보겠습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여기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 주님께서 신발을 벗게 하신 또 한번의 예는 여호수아 5:15에 나옵니다. 이 두 곳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서실 곳이기 때문입니다(슥14:1-10). 주님은 시내산에서 출발하여 왕의 대로(King's highway)를 따라 올리브 산으로 가십니다. 거룩한 곳에서 신발을 벗는 것은 동양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관습입니다. 우리는 신발을 신고 방에 들어가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민족입니다. 신발을 신고 신전(神殿)에 들어가는 동양 종교는 없습니다. 신발을 벗는 것은 존경과 경의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회교도들은 모스크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습니다. 불교도들은 불당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습니다.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들어가야 할 그곳이 지금 서 있는 곳보다 거룩하거나 깨끗하기 때문입니다. 신발을 벗는 지점은 그 안과 밖이 확연히 경계가 되는 지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한 것은 그곳이 바로 모세의 인생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확연한 경계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신발을 벗음으로서 이전의 80년 인생을 마감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발을 벗는 행위는 이스라엘의 관습으로서 ‘모든 것을 확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룻4:7)3). 하나님은 이 자리에서 모세와 무엇인가를 확정하셨습니다.
로랜스형제라 불리는 니콜라스 헤르만의 열망은 늘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그는 "영적인 생활은 하나에서 열까지 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연습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가장 거룩하고 가장 필요한 연습은 곧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는 기술도 필요하지 않고 지식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오직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 어떤 것들보다도 하나님만을 사랑하고자 하는 그분께만 드려진 마음이라 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로버트 모건이란 사람은 "시련을 당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은 시련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복이다. 지독한 시련의 순간에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보다 더 달콤한 것은 세상에 없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그곳을 알지 못했지만 그곳이 자신의 신발을 벗어야 하는 거룩한 땅인 곳을 알았습니다. 마치 야곱이 돌 베개를 베고 자던 벧엘의 체험과 동일한 것입니다(창28:16). 모세는 주님의 임재 앞에서 신발을 벗음으로써 80년의 세월에 이정표를 세운 것입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여기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것은 하나님 앞에서 주종 관계를 분명히 하시기 위함입니다. 신발은 땅과 직접 접하고 있는 유일한 신체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우리는 가볍게 보이고 거만해 보이고 그분의 봉사에는 걸맞지 않는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진지한 기다림과 준비됨으로 하나님 가까이 가야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신발을 벗기시고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대신 화평의 복음의 신발을 신게 하셨습니다. [화평의 복음을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엡6:15). 주님은 우리의 신발뿐만 아니라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합니다. [이전의 행실에 관하여는 너희가 속이는 것으로 가득한 욕심들에 따라 부패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4:22). 어둠의 행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행위를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2). 히브리서 12:21,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떨쳐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히12:21).
6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자기 얼굴을 숨기니 이는 그가 하나님 뵙기를 두려워하였음이더라.](6). 여기서 시제를 주의하십시오. 하나님은 '나는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이었다'라고 하시지 않고, '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죽어 무덤 속에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모세에게 부활의 믿음을 심어 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 말씀을 통해 문자적인 부활을 분명히 알고 믿었습니다. 이는 모세가 파라오 앞에서 죽음을 두려워함으로 이집트에서 도망쳐 지금까지 40년의 도망자 생활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사역자로 임명하시기 전에, 죽음의 땅 이집트로 다시 보내기 전에 ‘사망의 두려움’을 이기는 ‘부활의 믿음, 부활의 권능, 부활의 주님’으로서 만나 주신 것입니다. 부활 신앙이 없다면 도저히 다시 파라오 앞으로 갈 수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는 오늘날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믿음이기도 합니다. 부활의 믿음이 없이 죄와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않고,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이 구절을 인용해서 설명하셨습니다. [죽은 자들이 일어나는 일에 관하여는 너희가 모세의 책에서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속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다, 하신 말씀을 읽지 못하였느냐?](막12:26). 만약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 주님은 절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었느니라(과거형)”고 말씀하셔야지, “...이니라”(현재형)으로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죽고 없다면, 어찌 아브라함의 하나님일 수 있겠습니까? 한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다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라고 말씀하심으로 아브라함의 혼이 살아 있으며, 몸이 부활한다는 사실에 대해 분명하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라고 말씀하심으로 아브라함과 한 약속이 여전히 유효함을 말해 줍니다. “나는 이삭의 하나님이요”라고 말씀하심으로 이삭을 통한 주님의 약속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야곱의 하나님이요”라고 하심으로 야곱의 약속이 지금, 바로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미 죽어 버린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의 약속을 지키시는 것이 아니라, 사자(死者)와의 언약이 아니라 ‘산 자’와의 언약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약속은 한 쪽이 죽어 버리면 더 이상 유효할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약속의 신실함을 볼 수 없습니다.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부활한다면 그는 자신에게 약속하신 약속들이 모두 이행되고, 지켜졌는지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다”라고 하심으로 이 모든 사실을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택하셔서 씨에 대한 약속을 주신 하나님으로서 주권자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 이삭의 하나님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시는 구속하시는 하나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 야곱의 하나님이란 오래 참으시고, 결코 버리지 않으시며, 우리에게 주신 모든 약속들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성령 하나님을 말합니다.
떨기나무의 불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모세는 얼굴을 숨기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엘리야 역시 세미한 음성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뵈었을 때 자기 외투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모세가 자기 얼굴을 숨기니 이는 그가 하나님 뵙기를 두려워하였음이더라.](6). 이것은 하나님의 위엄과 두려움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산 위에 머무르거나 성전 위에 머무를 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히 그 앞에 서지 못했습니다. 직통 계시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사실 죽고 싶어 환장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나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듯이 그런 방식으로 말씀하신다면 여러 사람이 죽어 나갔을 것입니다. 신명기 5:26, [육신을 가진 자가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처럼 살아 남은 자가 누구니이까?](신5:26).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는 감사와 찬양을 돌려 드려야 합니다.
오늘날 은사를 추구하고, 표적을 구하는 악하고 음란한 교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하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대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시고, 기록하심으로 거기에 동등한 권위와 위엄을 주십니다.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의 입에서 직접 발하는 말씀의 권위와 동등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두려워하고, 주님의 말씀에 두려워 떨 때 주님의 돌보심과 보살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모세와 같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님의 임재를 체험한 경험이 전혀 없다면 이 시간 주님의 임재를 구하십시오.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주님 앞에서 신발을 벗으십시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지금 바로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명에 앞서 부활의 신앙을 소유하십시오. 사명에 앞서 부활의 신앙을 소유하십시오. 말씀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면 주님 역시 ‘나는 여기있다’ 하십니다.
'권별 강해 > 출애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0) | 2005.04.06 |
---|---|
그런즉 이제 오라 (0) | 2005.04.06 |
언약을 기억하신 하나님 (1) | 2005.04.06 |
믿음으로 모세는 (0) | 2005.04.06 |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0) | 2005.0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