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 03일- 출애굽기
출애굽기(V)
말씀: 출애굽기 2:16-25
요절: 출애굽기 2:24
05. 언약을 기억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 말씀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불가능이 없으시고, 어려운 것이 없으신 분이시지만 결코 한 가지 하실 수 없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언약을 깨뜨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언약을 신뢰하고, 그 언약을 주의 깊게 살피고,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흔히 성경을 읽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더 관심을 가지게 될 때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모세보다 모세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더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모세가 주인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공이시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40년간 파라오의 왕궁에서 공주의 아들로 모든 영화를 다 누렸고 이집트의 모든 교육을 다 받았습니다. 그는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사도행전 7:22, [모세가 이집트 사람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능력이 있었느니라.](행7:22).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세상에서 받은 교육과 사람들로부터 배운 지혜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배워야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얻어야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부인하고 믿음으로 일하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육신의 타고난 성품과 세상의 지혜를 포기하고, 성령의 능력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모세는 나이 40이 되었을 때, 이제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일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동족을 학대하는 이집트인을 죽임으로써 말이 아닌 몸으로 자신의 굳은 의지를 나타내 보였습니다. 이집트의 왕자로서 이집트 사람을 죽인 것은 이집트인과 완전히 결별하고, 히브리인으로 살겠다는 피보다 강한 맹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사도행전 7:25, [이는 자기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 손을 통하여 그들을 구원해 주시고자 하심을 깨달을 줄로 그가 생각하였음이라.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더라.](행7:25). 이 말씀에 따르면 모세는 백성들이 모세 자신의 손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시고자 하심을 깨달을 줄로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기름부으신 사실을 알아주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구원자란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랬기에 믿음으로 모든 것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세의 믿음이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허무하게 깨졌는지 성경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백성들은 그를 구원자는 고사하고 치리자나 재판관으로도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what we do)에 대한 관심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what we are)에 더 관심이 많으십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배척을 받고 광야로 도망을 갔습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이제 미디안의 제사장에게 딸 일곱이 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자기 아버지의 양떼에게 먹이려 하는데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아내니라. 그러나 모세가 일어나서 그들을 도와 그들의 양떼에게 물을 먹이니라.](16-17). 미디안은 시내산이 있는 이집트의 동쪽 광야 지역입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첩 그두라 사이에서 난 후손들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모세를 세상과 분리시키셨습니다. 세상에서 버림을 받고, 세상을 버릴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원한 것은 아니지만 사실 이집트에서 모세의 생명은 죽은 것과 같습니다. 파라오가 그의 생명을 찾았고, 정치적 생명이나, 육신의 생명은 이미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불러 내셨고, 분리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버리고, 옛 습관을 버리고, 사고 방식을 버리고, 비판하는 영을 버리고, 우리의 수치와 실패와 육신에 속한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자신이 왕이 되어 스스로 살아왔던 옛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장하도록 맡겨야 합니다. 옛 사람에 속한 모든 것을 갈보리의 십자가에 묻어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나가야 합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공공의 적이요, 지명 수배된 신세가 되어 멀리 미디안으로 도망갔습니다. 일국의 왕자에서 도망자가 된 것입니다. ‘모세는 미디안에서 쉴 곳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비록 궁정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르우엘의 딸이 양 무리에게 물을 먹이려 하는 것을 기꺼이 도와주었습니다. 이는 모세의 천성적인 성품을 잘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모세는 공의를 행하기를 좋아했고, 그가 힘이 닿는 한 모든 사람이 해야할 바인, 상처입은 사람을 보았을 때 도와주기를 좋아했고, 선을 행하기를 좋아했다.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와 함께 하는 곳 어디서건 우리는 유용한 사람이 되기를 희망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없을 때라도 우리는 그렇게 해야하며, 우리는 기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을 행해야 합니다.’(Matthew Henry).
[이제 미디안의 제사장에게 딸 일곱이 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자기 아버지의 양떼에게 먹이려 하는데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아내니라. 그러나 모세가 일어나서 그들을 도와 그들의 양떼에게 물을 먹이니라.](16-17). 도망자로서 모세가 한 첫 번째 일은 힘없는 사람을 돕는 일이었습니다. 모세는 힘없는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이집트의 왕자에서 벗어나 처음 한 일이 힘없는 여자들을 도와 양떼에게 물을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되 특히 믿음의 가족들에게 할지니라.](갈6:10).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하신 말씀을 듣게 됩니다. [오직 너희 중에 가장 큰 자는 너희 종이 될 것이요,](마23:11).
18-21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자기 아버지 르우엘에게 이르렀을 때에 그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하니 그들이 이르되, 이집트 사람 하나가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 내고 또 우리를 위하여 물을 충분히 길어 양떼에게 먹였나이다, 하매 그가 자기 딸들에게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내버려 두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빵을 먹게 하라, 하였더라. 모세가 그 사람과 함께 거하는 것을 만족스럽게 여기매 그가 자기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니라.](18-21). 하나님은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자가 되기에 앞서 먼저 목자로서 훈련을 받도록 예비하셨습니다. 그리고, 미디안 제사장의 양들을 먹이고, 건져내고, 돌보는 일을 통해 한가지씩 교육을 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양떼들입니다. 시편 100:3, [[주] 그분께서 하나님이심을 너희는 알지어다. 그분은 우리를 만드신 이시요, 우리는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니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요, 그분의 풀밭에 /거하는/ 양이로다.](시100:3). 신약에서 주님은 주로 어부들을 제자로 선택하셨는데 반해 구약에서 주님은 주로 목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미디안의 제사장 르우엘은 모세를 받아들였고, 딸 십보라를 주어 사위로 삼았습니다. 르우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의 친구란 뜻입니다. 3:1에서 그의 이름은 ‘이드로’라고 나오는데 이는 제사장으로서의 타이틀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모세는 자기 민족에게 배척을 받았으나 이방인들에게 영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 가운데서 아내를 얻음으로써 이방인 교회를 신부로 얻는 모습을 잘 예표해 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그 사람과 함께 거하는 것을 만족스럽게 여기매](21). 모세는 과거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잊어야 할 것들을 빨리 잊을 줄 알았습니다. 옛날의 성공이나 실패가 현재의 삶을 좌지우지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모세는 처음에 이들에게 히브리 사람이 아니라 이집트 사람으로 보였습니다(19). 그만큼 그는 이집트에 철저히 동화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금방 현실에 적응하고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했던 것처럼 만족할 때나 궁핍할 때나 자족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경건의 비결입니다. 사람들은 환경이 약간만 나빠져도 불평과 원망으로 시간을 보냅니다. 우리는 오늘 자신이 있는 곳에서, 자신의 처지에서 주님을 섬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때 주님은 주님이 원하시는 곳에 우리를 두실 것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그녀가 모세에게 아들을 낳으매 그가 그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가 말하기를,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노라, 하였음이라.](22). 모세는 십보라와 사이에서 아들을 하나 얻었는데, 아들의 이름 속에 자신의 처지와 심정을 그대로 새겨 두었습니다. 장남의 이름이 게르솜인데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란 뜻입니다. 후에 아들을 하나 더 낳았습니다. 둘째의 이름은 ‘엘리에셀’로 지었는데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파라오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셨다’(4:20, 18:2-3)는 뜻입니다. 이렇게 모세는 미디안에서 결혼하여 자식을 놓고 목자로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삶의 햇수가 장장 40년이었습니다. 모세가 이런 생활을 하는 동안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은 계속되었습니다. 아이들을 죽이는 일은 멈추었지만 노예 생활은 여전히 고달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광야의 생활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회심한 후 아라비아에서 3년간 광야 생활을 하였습니다(갈1:16-17). 엘리야 역시 사역 도중에 광야를 다녀왔습니다. 침례 요한은 아예 광야에서 생활했습니다. 주님 역시 광야에서의 40일의 금식 생활이 있었습니다. 이는 광야에서 홀로 주님을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데려가셔서 우리가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을 가르치신 후에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여러분에게 메마른 광야 생활이 무엇입니까? 건강의 위기? 경제적 위기? 평탄하지 않는 결혼 생활? 보금자리가 없는 외로움? 모세의 가족은 지금도 이집트에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친구, 친지들 역시 다 이집트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시간은 점점 흘러갑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이집트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노예 생활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노예 생활로 인하여 부르짖는 그들의 소리가 올라와 하나님께 이르니라.](23). 모세의 생명을 찾던 파라오는 죽었습니다. 1-2장에서 우리는 이미 이스라엘 사람들의 비참한 상황을 보았습니다. 파라오는 무거운 짐을 주어 괴롭게 했고,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했고, 고된 노예 생활로 삶을 괴롭게 했으며, 남자 아이들을 죽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이한 것은 이 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울부짖었다는 기사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죽은 이후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은 완전한 배교요, 세상과의 동화였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광야로 보내셔서 훈련을 시키는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련의 풀무에서 하나님을 찾고, 믿음을 회복하도록 연단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무엇을 했는지 분명하게 증언했습니다. [¶ 그러므로 이제 [주]를 두려워하며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그분을 섬길지니라. 너희 조상들이 강 저편과 이집트에서 섬기던 다른 신들을 제거하고 너희는 [주]를 섬기라.](수24:14).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에서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파라오의 괴롭힘은 하나님의 분노의 표시오, 징계의 손길이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에스겔 20:5-8, [¶ 또 /너는/ 그들에게 이르되,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전에 내가 이스라엘을 택하고 야곱의 집 씨를 향하여 내 손을 들어올리며 이집트 땅에서 그들에게 나 자신을 알려 주었고 그 날에 내가 그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어올리며 이르기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라, 하였노라. 또 그 날에 내가 그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어올리고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며 또 내가 그들을 위하여 찾아 놓은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모든 땅 중의 영광이 되는 곳에 이르게 하리라, 하였으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 각 사람은 자기 눈의 가증한 것들을 버리고 이집트의 우상들로 말미암아 너희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니라, 하였노라. 그러나 그들이 내게 반역하여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각 사람이 자기 눈의 가증한 것들을 버리지 아니하고 이집트의 우상들을 버리지도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이집트 땅 한가운데서 그들에게 내 격노를 쏟으며 그들에게 내 분노를 다 이루리라, 하였노라.](겔20:5-8).
모세가 미디안에 40년 동안 장인의 양들을 돌보는 동안 이스라엘 벡성들은 우상들이 자신들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드디어 하나님께 탄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먼저 주님을 찾기 보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이리 저리 다 해보고, 실패한 후에야 주님을 찾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비벼댈 언덕이라도 있으면 먼저 그리로 달려갑니다. 아무리 해도 안되면 그 때 주님을 찾는데, 주님은 그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자처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받을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분명히 아셨습니다. 인간의 악함에 비해 하나님은 얼마나 신실하십니까?
24,25절을 보십시오. [이에 하나님께서 그들이 신음하는 것을 듣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시니라.](24-25). 하나님은 먼저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들의 신음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신음을 들으시고, 눈물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눈물의 기도는 강력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이 언약은 창세기 15:3-4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그분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확실히 알지니 네 씨가 자기들의 땅이 아닌 곳에서 나그네가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이 사백 년 동안 네 씨를 괴롭히리라. 또한 내가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심판하리니 그 뒤에 그들이 큰 재물을 가지고 나오리라.](창15:3-4). 주님은 약속대로 이집트를 심판하시고, 그들을 거기서 나오게 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고난을 통해 믿음을 회복하고, 살아계신 하나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이 주는 유익입니다. 주님은 고난을 허락하셔서 우리의 끝을 보게 하십니다. 한계 상황까지 가게 하심으로써 하나님 한 분 외에 구원자가 없으며, 나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길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하심으로 주를 찾게 하십니다. 여러분이 이집트의 이스라엘과 같이 완악하지 말고, 먼저 스스로 낮추어 주님을 찾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았고 또 그들이 자기들의 작업 감독들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들었나니 이는 내가 그들의 고통을 알기 때문이니라.](출3:7). 주님은 바라보십니다. 주님은 들으십니다. 주님은 아십니다. 주님은 관심을 가지십니다. 이는 우리가 바로 언약의 백성이요, 하나님이 언약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과의 언약도 지키지 못해 깨 버리지만, 하나님은 누구와 맺은 언약도 깨뜨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맺은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셨듯이,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기억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언약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믿음을 가질 수 있고, 믿음에 따른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시 24,25절을 보십시오. [이에 하나님께서 그들이 신음하는 것을 듣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시니라.](24-25). 사람들은 상대방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이쪽에서도 언약은 자동으로 파기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다 할지라도 주님은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믿지 아니하여도 그분은 항상 신실하시니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느니라.](딤후2:13)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며 주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기억하셨습니다. 오늘날 배교한 성도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입으로만 주님을 고백하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사 성도들을 끝까지 기억하시고, 지키십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맺은 새 언약을 항상 기억하시고, 자기 자녀들을 바라보고, 관심을 가지십니다. 시편 89:30-34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그의 자녀들이 내 법을 버리고 내 법도 안에서 걷지 아니하며 내 법규들을 깨뜨리고 내 명령들을 지키지 아니하면 그때에 내가 막대기로 그들의 범죄한 것을 벌하며 채찍으로 그들의 불법을 벌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완전히 거두지는 아니하고 나의 신실함도 없어지게 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깨뜨리거나 내 입술에서 나간 것을 변개하지 아니하리로다.](시89:30-34). 성도들은 주님의 언약을 깨뜨릴 수 있지만 주님은 언약을 깨뜨리지도, 변개하지도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주님이 주신 언약 안에서, 안식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만 신뢰하면 그만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들이 신음하는 것을 듣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시니라.](24-25). 설령 범죄했다 할지라도 언약에 기초해서 용서를 구하고, 긍휼을 베풀어주시도록 기도하면 됩니다. 이스라엘은 지난 400년 동안 하나님을 잊고, 우상을 숭배하며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언약은 그대로 유효합니다. 예레미야는 그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레미야 14:21,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몹시 싫어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왕좌를 욕되게 하지 마옵소서. 우리와 맺은 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깨뜨리지 마옵소서.](렘14:21). 세상에서는 약한 자는 감히 강한 자의 언약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 언약을 파기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너무 쉽게 깨뜨리곤 하였습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 헌신과 결단, 믿음의 고백들을 너무 쉽게 깨뜨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돌이켜 언약에 신실하신 주님을 믿고, 주님께서 약속하신대로 해 주실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피를 근거로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공로를 근거로 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기록된 말씀들을 펴서 주님의 긍휼과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나의 의(義)가 아닌 주님의 의(義)를 근거로 우리는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러하셨듯이, 언약을 기억하사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보시고, 관심을 가지시는 동정심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들이 신음하는 것을 듣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시니라.](24-25). 주님이 듣고, 기억하사, 바라보고, 관심을 가지신 것은 주님이 동정심이 많으신 은혜로운 성품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주님이 얼마나 동정심이 많은 분이신지 찬양했습니다. 시편 86:15, [그러하오나, 오 {주}여, 주는 동정심이 많으시며 은혜로우시며 오래 참으시며 긍휼과 진리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시86:15). 시편 145:8, [[주]는 은혜로우시며 동정심이 많으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긍휼이 크시도다.](시145:8). 주님은 눈물이 없는 법치주의자가 아니십니다. 주님의 법은 너무나 엄하면서도 거기에는 따스한 마음과 연민과 동정심과 은혜와 긍휼이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의 고통을 보신 주님은 동정심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시편 78:38절에, [그러나 그분은 동정심이 많으시므로 그들의 불법을 용서하시어 그들을 멸하지 아니하셨고 참으로 여러 번 자신의 분노를 돌이키시며 자신의 진노를 다 내지 아니하셨으니](시78:38). 모세가 아무리 동족을 향해 피끓는 애정과 용솟음치는 연민을 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비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식들과 가족들에 대해 갖는 사랑과 연민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만 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화) 내가 너만 못하겠느냐? - 어린 아이를 돌보는 부모는 아이가 조금만 기척을 해도 달려갑니다. 전에 저는 아이를 재워두고 혼자 컴퓨터로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눈과 손은 책에 있는데 귀는 아이의 숨소리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아이가 약간 뒤척이는 소리에 얼른 달려가서 아이를 안았습니다. 그때 제 머리 속을 관통하는 한 마디 음성이 이었습니다. “내가 너만 못하겠느냐?” 저는 그때 아이를 통해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를 가장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게 하셨으니 [주]는 은혜로우시며 동정심이 많으시도다.](시111:4). 야고보 사도 역시, [{주}는 지극히 동정심이 많으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시니라.](약5:11b)고 말씀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들이 신음하는 것을 듣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시니라.](24-25). 이 세상에서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 약속이 10년, 20년 지나면 흐지부지하게 되고 맙니다. 전에 영국은 제국주의 시절 중국을 침략해서 홍콩을 100년간 사용할 수 있는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만약 중국이 충분히 힘이 있었다면 그 조약이 유지될 수 있었겠습니까? 어쨋든 100년이 지난 후에 약속대로 영국은 그 땅을 중국에 반환했습니다. 그것은 국가간의 계약이 잘 지켜진 대표적인 예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40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기억하시고, 지키십니다. 주님은 1000년, 2000년이 지난 약속도 지금 갓 약속한 것처럼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언약의 신실함, 변개 할 수 없음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33:20-21,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만일 너희가 낮에 대한 내 언약과 밤에 대한 내 언약을 깨뜨려 낮과 밤이 그들의 때에 있지 아니하게 할 수 있을진대 내 종 다윗과 맺은 내 언약도 깨뜨려 그의 왕좌에 /앉아/ 통치할 아들이 그에게 없게 할 수 있겠으며 또 나를 섬기는 자들인 레위 사람 제사장들에게도 그리할 수 있으리라.](렘33:20-21). 만약 사람들이 낮과 밤의 언약을 깨뜨리지 못하는 한, 주님의 언약도 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들이 신음하는 것을 듣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시니라.](24-25). 사람은 누구나 약속을 지킬 능력이 있는 사람, 신뢰가 가는 사람과 언약을 맺지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 사람과 언약을 맺지는 않습니다. 설령 맺었다 하더라도 한 두 번 언약을 깨뜨리고,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신용을 잃게 되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시로 언약을 깨뜨리고,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사람과 다시 언약을 맺을 수 있겠습니까? 언약을 무효화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한쪽에서 언약을 파기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다시 언약을 세우시고, 그 언약을 지키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도록 하십니다. 에스겔 16:59-60,62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맹세를 멸시하고 언약을 어겼은즉 나도 네가 행한 대로 너를 다루리라. ¶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어렸을 때에 너와 맺은 언약을 내가 기억하고 너를 위하여 영존하는 언약을 세우리라.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워 너로 하여금 내가 [주]인 줄을 알게 하리니](겔16:59-60,6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언약을 주심을 감사하고 찬양합시다. 저희들이 무지하고 연약함에 쌓여 범죄할지라도 언약에 신실하신 주님을 기억하고 영광을 돌립시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한다. -세상에서 배운 지혜와 육신의 능력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자격 요건이 아니다.
2.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보다 먼저 우리가 어떤 사림이 되느냐에 더 관심을 기울이신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전에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한다.
3. 하나님께 택함 받았다고 백성들에게 택함받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백성들에게 배척을 받는다.
4. 누구나 광야의 생활은 필요하다. 이 시간을 주님을 아는 시간으로 활용하라.
5. 고난은 주님을 찾게 하며 기도하게 한다. 이스라엘은 오랜 고난을 통해 주님을 찾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무엇을 했는가?
6.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출애굽기(V)
말씀: 출애굽기 2:16-25
요절: 출애굽기 2:24
05. 언약을 기억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 말씀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불가능이 없으시고, 어려운 것이 없으신 분이시지만 결코 한 가지 하실 수 없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언약을 깨뜨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언약을 신뢰하고, 그 언약을 주의 깊게 살피고,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흔히 성경을 읽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더 관심을 가지게 될 때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모세보다 모세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더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모세가 주인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공이시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40년간 파라오의 왕궁에서 공주의 아들로 모든 영화를 다 누렸고 이집트의 모든 교육을 다 받았습니다. 그는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사도행전 7:22, [모세가 이집트 사람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능력이 있었느니라.](행7:22).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세상에서 받은 교육과 사람들로부터 배운 지혜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배워야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얻어야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부인하고 믿음으로 일하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육신의 타고난 성품과 세상의 지혜를 포기하고, 성령의 능력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모세는 나이 40이 되었을 때, 이제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일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동족을 학대하는 이집트인을 죽임으로써 말이 아닌 몸으로 자신의 굳은 의지를 나타내 보였습니다. 이집트의 왕자로서 이집트 사람을 죽인 것은 이집트인과 완전히 결별하고, 히브리인으로 살겠다는 피보다 강한 맹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사도행전 7:25, [이는 자기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 손을 통하여 그들을 구원해 주시고자 하심을 깨달을 줄로 그가 생각하였음이라.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더라.](행7:25). 이 말씀에 따르면 모세는 백성들이 모세 자신의 손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시고자 하심을 깨달을 줄로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기름부으신 사실을 알아주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구원자란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랬기에 믿음으로 모든 것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세의 믿음이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허무하게 깨졌는지 성경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백성들은 그를 구원자는 고사하고 치리자나 재판관으로도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what we do)에 대한 관심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what we are)에 더 관심이 많으십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배척을 받고 광야로 도망을 갔습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이제 미디안의 제사장에게 딸 일곱이 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자기 아버지의 양떼에게 먹이려 하는데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아내니라. 그러나 모세가 일어나서 그들을 도와 그들의 양떼에게 물을 먹이니라.](16-17). 미디안은 시내산이 있는 이집트의 동쪽 광야 지역입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첩 그두라 사이에서 난 후손들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모세를 세상과 분리시키셨습니다. 세상에서 버림을 받고, 세상을 버릴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원한 것은 아니지만 사실 이집트에서 모세의 생명은 죽은 것과 같습니다. 파라오가 그의 생명을 찾았고, 정치적 생명이나, 육신의 생명은 이미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불러 내셨고, 분리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버리고, 옛 습관을 버리고, 사고 방식을 버리고, 비판하는 영을 버리고, 우리의 수치와 실패와 육신에 속한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자신이 왕이 되어 스스로 살아왔던 옛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장하도록 맡겨야 합니다. 옛 사람에 속한 모든 것을 갈보리의 십자가에 묻어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나가야 합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공공의 적이요, 지명 수배된 신세가 되어 멀리 미디안으로 도망갔습니다. 일국의 왕자에서 도망자가 된 것입니다. ‘모세는 미디안에서 쉴 곳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비록 궁정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르우엘의 딸이 양 무리에게 물을 먹이려 하는 것을 기꺼이 도와주었습니다. 이는 모세의 천성적인 성품을 잘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모세는 공의를 행하기를 좋아했고, 그가 힘이 닿는 한 모든 사람이 해야할 바인, 상처입은 사람을 보았을 때 도와주기를 좋아했고, 선을 행하기를 좋아했다.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와 함께 하는 곳 어디서건 우리는 유용한 사람이 되기를 희망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없을 때라도 우리는 그렇게 해야하며, 우리는 기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을 행해야 합니다.’(Matthew Henry).
[이제 미디안의 제사장에게 딸 일곱이 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자기 아버지의 양떼에게 먹이려 하는데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아내니라. 그러나 모세가 일어나서 그들을 도와 그들의 양떼에게 물을 먹이니라.](16-17). 도망자로서 모세가 한 첫 번째 일은 힘없는 사람을 돕는 일이었습니다. 모세는 힘없는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이집트의 왕자에서 벗어나 처음 한 일이 힘없는 여자들을 도와 양떼에게 물을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되 특히 믿음의 가족들에게 할지니라.](갈6:10).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하신 말씀을 듣게 됩니다. [오직 너희 중에 가장 큰 자는 너희 종이 될 것이요,](마23:11).
18-21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자기 아버지 르우엘에게 이르렀을 때에 그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하니 그들이 이르되, 이집트 사람 하나가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 내고 또 우리를 위하여 물을 충분히 길어 양떼에게 먹였나이다, 하매 그가 자기 딸들에게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내버려 두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빵을 먹게 하라, 하였더라. 모세가 그 사람과 함께 거하는 것을 만족스럽게 여기매 그가 자기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니라.](18-21). 하나님은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자가 되기에 앞서 먼저 목자로서 훈련을 받도록 예비하셨습니다. 그리고, 미디안 제사장의 양들을 먹이고, 건져내고, 돌보는 일을 통해 한가지씩 교육을 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양떼들입니다. 시편 100:3, [[주] 그분께서 하나님이심을 너희는 알지어다. 그분은 우리를 만드신 이시요, 우리는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니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요, 그분의 풀밭에 /거하는/ 양이로다.](시100:3). 신약에서 주님은 주로 어부들을 제자로 선택하셨는데 반해 구약에서 주님은 주로 목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미디안의 제사장 르우엘은 모세를 받아들였고, 딸 십보라를 주어 사위로 삼았습니다. 르우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의 친구란 뜻입니다. 3:1에서 그의 이름은 ‘이드로’라고 나오는데 이는 제사장으로서의 타이틀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모세는 자기 민족에게 배척을 받았으나 이방인들에게 영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 가운데서 아내를 얻음으로써 이방인 교회를 신부로 얻는 모습을 잘 예표해 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그 사람과 함께 거하는 것을 만족스럽게 여기매](21). 모세는 과거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잊어야 할 것들을 빨리 잊을 줄 알았습니다. 옛날의 성공이나 실패가 현재의 삶을 좌지우지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모세는 처음에 이들에게 히브리 사람이 아니라 이집트 사람으로 보였습니다(19). 그만큼 그는 이집트에 철저히 동화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금방 현실에 적응하고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했던 것처럼 만족할 때나 궁핍할 때나 자족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경건의 비결입니다. 사람들은 환경이 약간만 나빠져도 불평과 원망으로 시간을 보냅니다. 우리는 오늘 자신이 있는 곳에서, 자신의 처지에서 주님을 섬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때 주님은 주님이 원하시는 곳에 우리를 두실 것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그녀가 모세에게 아들을 낳으매 그가 그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가 말하기를,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노라, 하였음이라.](22). 모세는 십보라와 사이에서 아들을 하나 얻었는데, 아들의 이름 속에 자신의 처지와 심정을 그대로 새겨 두었습니다. 장남의 이름이 게르솜인데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란 뜻입니다. 후에 아들을 하나 더 낳았습니다. 둘째의 이름은 ‘엘리에셀’로 지었는데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파라오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셨다’(4:20, 18:2-3)는 뜻입니다. 이렇게 모세는 미디안에서 결혼하여 자식을 놓고 목자로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삶의 햇수가 장장 40년이었습니다. 모세가 이런 생활을 하는 동안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은 계속되었습니다. 아이들을 죽이는 일은 멈추었지만 노예 생활은 여전히 고달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광야의 생활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회심한 후 아라비아에서 3년간 광야 생활을 하였습니다(갈1:16-17). 엘리야 역시 사역 도중에 광야를 다녀왔습니다. 침례 요한은 아예 광야에서 생활했습니다. 주님 역시 광야에서의 40일의 금식 생활이 있었습니다. 이는 광야에서 홀로 주님을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데려가셔서 우리가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을 가르치신 후에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여러분에게 메마른 광야 생활이 무엇입니까? 건강의 위기? 경제적 위기? 평탄하지 않는 결혼 생활? 보금자리가 없는 외로움? 모세의 가족은 지금도 이집트에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친구, 친지들 역시 다 이집트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시간은 점점 흘러갑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이집트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노예 생활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노예 생활로 인하여 부르짖는 그들의 소리가 올라와 하나님께 이르니라.](23). 모세의 생명을 찾던 파라오는 죽었습니다. 1-2장에서 우리는 이미 이스라엘 사람들의 비참한 상황을 보았습니다. 파라오는 무거운 짐을 주어 괴롭게 했고,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했고, 고된 노예 생활로 삶을 괴롭게 했으며, 남자 아이들을 죽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이한 것은 이 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울부짖었다는 기사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죽은 이후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은 완전한 배교요, 세상과의 동화였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광야로 보내셔서 훈련을 시키는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련의 풀무에서 하나님을 찾고, 믿음을 회복하도록 연단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무엇을 했는지 분명하게 증언했습니다. [¶ 그러므로 이제 [주]를 두려워하며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그분을 섬길지니라. 너희 조상들이 강 저편과 이집트에서 섬기던 다른 신들을 제거하고 너희는 [주]를 섬기라.](수24:14).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에서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파라오의 괴롭힘은 하나님의 분노의 표시오, 징계의 손길이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에스겔 20:5-8, [¶ 또 /너는/ 그들에게 이르되,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전에 내가 이스라엘을 택하고 야곱의 집 씨를 향하여 내 손을 들어올리며 이집트 땅에서 그들에게 나 자신을 알려 주었고 그 날에 내가 그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어올리며 이르기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라, 하였노라. 또 그 날에 내가 그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어올리고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며 또 내가 그들을 위하여 찾아 놓은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모든 땅 중의 영광이 되는 곳에 이르게 하리라, 하였으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 각 사람은 자기 눈의 가증한 것들을 버리고 이집트의 우상들로 말미암아 너희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니라, 하였노라. 그러나 그들이 내게 반역하여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각 사람이 자기 눈의 가증한 것들을 버리지 아니하고 이집트의 우상들을 버리지도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이집트 땅 한가운데서 그들에게 내 격노를 쏟으며 그들에게 내 분노를 다 이루리라, 하였노라.](겔20:5-8).
모세가 미디안에 40년 동안 장인의 양들을 돌보는 동안 이스라엘 벡성들은 우상들이 자신들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드디어 하나님께 탄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먼저 주님을 찾기 보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이리 저리 다 해보고, 실패한 후에야 주님을 찾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비벼댈 언덕이라도 있으면 먼저 그리로 달려갑니다. 아무리 해도 안되면 그 때 주님을 찾는데, 주님은 그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자처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받을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분명히 아셨습니다. 인간의 악함에 비해 하나님은 얼마나 신실하십니까?
24,25절을 보십시오. [이에 하나님께서 그들이 신음하는 것을 듣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시니라.](24-25). 하나님은 먼저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들의 신음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신음을 들으시고, 눈물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눈물의 기도는 강력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이 언약은 창세기 15:3-4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그분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확실히 알지니 네 씨가 자기들의 땅이 아닌 곳에서 나그네가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이 사백 년 동안 네 씨를 괴롭히리라. 또한 내가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심판하리니 그 뒤에 그들이 큰 재물을 가지고 나오리라.](창15:3-4). 주님은 약속대로 이집트를 심판하시고, 그들을 거기서 나오게 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고난을 통해 믿음을 회복하고, 살아계신 하나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이 주는 유익입니다. 주님은 고난을 허락하셔서 우리의 끝을 보게 하십니다. 한계 상황까지 가게 하심으로써 하나님 한 분 외에 구원자가 없으며, 나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길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하심으로 주를 찾게 하십니다. 여러분이 이집트의 이스라엘과 같이 완악하지 말고, 먼저 스스로 낮추어 주님을 찾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았고 또 그들이 자기들의 작업 감독들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들었나니 이는 내가 그들의 고통을 알기 때문이니라.](출3:7). 주님은 바라보십니다. 주님은 들으십니다. 주님은 아십니다. 주님은 관심을 가지십니다. 이는 우리가 바로 언약의 백성이요, 하나님이 언약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과의 언약도 지키지 못해 깨 버리지만, 하나님은 누구와 맺은 언약도 깨뜨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맺은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셨듯이,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기억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언약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믿음을 가질 수 있고, 믿음에 따른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시 24,25절을 보십시오. [이에 하나님께서 그들이 신음하는 것을 듣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시니라.](24-25). 사람들은 상대방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이쪽에서도 언약은 자동으로 파기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다 할지라도 주님은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믿지 아니하여도 그분은 항상 신실하시니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느니라.](딤후2:13)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며 주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기억하셨습니다. 오늘날 배교한 성도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입으로만 주님을 고백하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사 성도들을 끝까지 기억하시고, 지키십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맺은 새 언약을 항상 기억하시고, 자기 자녀들을 바라보고, 관심을 가지십니다. 시편 89:30-34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그의 자녀들이 내 법을 버리고 내 법도 안에서 걷지 아니하며 내 법규들을 깨뜨리고 내 명령들을 지키지 아니하면 그때에 내가 막대기로 그들의 범죄한 것을 벌하며 채찍으로 그들의 불법을 벌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완전히 거두지는 아니하고 나의 신실함도 없어지게 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깨뜨리거나 내 입술에서 나간 것을 변개하지 아니하리로다.](시89:30-34). 성도들은 주님의 언약을 깨뜨릴 수 있지만 주님은 언약을 깨뜨리지도, 변개하지도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주님이 주신 언약 안에서, 안식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만 신뢰하면 그만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들이 신음하는 것을 듣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시니라.](24-25). 설령 범죄했다 할지라도 언약에 기초해서 용서를 구하고, 긍휼을 베풀어주시도록 기도하면 됩니다. 이스라엘은 지난 400년 동안 하나님을 잊고, 우상을 숭배하며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언약은 그대로 유효합니다. 예레미야는 그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레미야 14:21,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몹시 싫어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왕좌를 욕되게 하지 마옵소서. 우리와 맺은 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깨뜨리지 마옵소서.](렘14:21). 세상에서는 약한 자는 감히 강한 자의 언약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 언약을 파기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너무 쉽게 깨뜨리곤 하였습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 헌신과 결단, 믿음의 고백들을 너무 쉽게 깨뜨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돌이켜 언약에 신실하신 주님을 믿고, 주님께서 약속하신대로 해 주실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피를 근거로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공로를 근거로 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기록된 말씀들을 펴서 주님의 긍휼과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나의 의(義)가 아닌 주님의 의(義)를 근거로 우리는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러하셨듯이, 언약을 기억하사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보시고, 관심을 가지시는 동정심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들이 신음하는 것을 듣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시니라.](24-25). 주님이 듣고, 기억하사, 바라보고, 관심을 가지신 것은 주님이 동정심이 많으신 은혜로운 성품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주님이 얼마나 동정심이 많은 분이신지 찬양했습니다. 시편 86:15, [그러하오나, 오 {주}여, 주는 동정심이 많으시며 은혜로우시며 오래 참으시며 긍휼과 진리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시86:15). 시편 145:8, [[주]는 은혜로우시며 동정심이 많으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긍휼이 크시도다.](시145:8). 주님은 눈물이 없는 법치주의자가 아니십니다. 주님의 법은 너무나 엄하면서도 거기에는 따스한 마음과 연민과 동정심과 은혜와 긍휼이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의 고통을 보신 주님은 동정심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시편 78:38절에, [그러나 그분은 동정심이 많으시므로 그들의 불법을 용서하시어 그들을 멸하지 아니하셨고 참으로 여러 번 자신의 분노를 돌이키시며 자신의 진노를 다 내지 아니하셨으니](시78:38). 모세가 아무리 동족을 향해 피끓는 애정과 용솟음치는 연민을 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비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식들과 가족들에 대해 갖는 사랑과 연민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만 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화) 내가 너만 못하겠느냐? - 어린 아이를 돌보는 부모는 아이가 조금만 기척을 해도 달려갑니다. 전에 저는 아이를 재워두고 혼자 컴퓨터로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눈과 손은 책에 있는데 귀는 아이의 숨소리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아이가 약간 뒤척이는 소리에 얼른 달려가서 아이를 안았습니다. 그때 제 머리 속을 관통하는 한 마디 음성이 이었습니다. “내가 너만 못하겠느냐?” 저는 그때 아이를 통해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를 가장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게 하셨으니 [주]는 은혜로우시며 동정심이 많으시도다.](시111:4). 야고보 사도 역시, [{주}는 지극히 동정심이 많으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시니라.](약5:11b)고 말씀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들이 신음하는 것을 듣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시니라.](24-25). 이 세상에서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 약속이 10년, 20년 지나면 흐지부지하게 되고 맙니다. 전에 영국은 제국주의 시절 중국을 침략해서 홍콩을 100년간 사용할 수 있는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만약 중국이 충분히 힘이 있었다면 그 조약이 유지될 수 있었겠습니까? 어쨋든 100년이 지난 후에 약속대로 영국은 그 땅을 중국에 반환했습니다. 그것은 국가간의 계약이 잘 지켜진 대표적인 예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40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기억하시고, 지키십니다. 주님은 1000년, 2000년이 지난 약속도 지금 갓 약속한 것처럼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언약의 신실함, 변개 할 수 없음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33:20-21,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만일 너희가 낮에 대한 내 언약과 밤에 대한 내 언약을 깨뜨려 낮과 밤이 그들의 때에 있지 아니하게 할 수 있을진대 내 종 다윗과 맺은 내 언약도 깨뜨려 그의 왕좌에 /앉아/ 통치할 아들이 그에게 없게 할 수 있겠으며 또 나를 섬기는 자들인 레위 사람 제사장들에게도 그리할 수 있으리라.](렘33:20-21). 만약 사람들이 낮과 밤의 언약을 깨뜨리지 못하는 한, 주님의 언약도 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들이 신음하는 것을 듣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시니라.](24-25). 사람은 누구나 약속을 지킬 능력이 있는 사람, 신뢰가 가는 사람과 언약을 맺지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 사람과 언약을 맺지는 않습니다. 설령 맺었다 하더라도 한 두 번 언약을 깨뜨리고,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신용을 잃게 되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시로 언약을 깨뜨리고,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사람과 다시 언약을 맺을 수 있겠습니까? 언약을 무효화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한쪽에서 언약을 파기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다시 언약을 세우시고, 그 언약을 지키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도록 하십니다. 에스겔 16:59-60,62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맹세를 멸시하고 언약을 어겼은즉 나도 네가 행한 대로 너를 다루리라. ¶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어렸을 때에 너와 맺은 언약을 내가 기억하고 너를 위하여 영존하는 언약을 세우리라.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워 너로 하여금 내가 [주]인 줄을 알게 하리니](겔16:59-60,6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언약을 주심을 감사하고 찬양합시다. 저희들이 무지하고 연약함에 쌓여 범죄할지라도 언약에 신실하신 주님을 기억하고 영광을 돌립시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한다. -세상에서 배운 지혜와 육신의 능력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자격 요건이 아니다.
2.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보다 먼저 우리가 어떤 사림이 되느냐에 더 관심을 기울이신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전에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한다.
3. 하나님께 택함 받았다고 백성들에게 택함받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백성들에게 배척을 받는다.
4. 누구나 광야의 생활은 필요하다. 이 시간을 주님을 아는 시간으로 활용하라.
5. 고난은 주님을 찾게 하며 기도하게 한다. 이스라엘은 오랜 고난을 통해 주님을 찾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무엇을 했는가?
6.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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