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 17일- 출애굽기
출애굽기(VII)
말씀: 출애굽기 3:7-12
요절: 출애굽기 3:10
07. 그런즉 이제 오라
하나님은 80세의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쓴 시편 90편에서 [우리의 햇수의 날들이 칠십 년이요, 강건하면 팔십 년이라도 그 햇수의 위력은 수고와 슬픔 뿐이니이다...](시90:10)라고 노래했던 사람입니다. 자신이 노래한 대로라면 모세의 나이 80은 한 쪽 발을 이미 관 위에 올려놓은 그런 때라 할 것입니다. 모진 것이 인생이요, 질긴 것이 운명이라고 모세의 운(運)도 여기서 다 했구나 할 정도의 그런 시기였습니다. 광야에서 40년간의 목자 생활은 실상 은둔 생활이요, 도피 생활이었습니다. 모세가 40년 전 이집트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살인자로 도망쳐 온 곳이 바로 이곳 미디안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결혼했고, 이곳에서 장인의 양을 치면서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이곳이 바로 주님의 거룩한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모세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5). 그리고, 언약의 하나님이란 사실을 기억하게 했습니다(6). 죽음을 두려워하여 파라오로부터 도망쳐 온 모세를 불러 다시 이집트로 가서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모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부활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다](6)라고 하심으로 부활의 주님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백성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7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았고 또 그들이 자기들의 작업 감독들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들었나니 이는 내가 그들의 고통을 알기 때문이니라.](7). 주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불꽃같은 눈동자로 이 땅에서 고통받는 자신의 백성들의 고통을 분명히 보셨습니다. 독재와 불의가 창궐하는 시대에 살던 고뇌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지금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라고 외칠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았고...”. 아브라함의 종으로서 아브라함의 아들을 임신한 하갈이 사라에게 학대를 당하자, 여주인의 눈을 피해 도망을 쳤습니다. 홀몸도 아닌 임신한 여자가 광야에서 도망을 가면 얼마나 갈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조차 눈여겨 보지 않는 이집트인 여종 하갈을 눈여겨 보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창세기 16:13, [하갈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주]의 이름을 가리켜, 나를 보시는 하나님, 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녀가 이르기를, 나도 여기에서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가? 하였음이더라.](창16:13). 하나님은 침묵하시지만 결코 눈을 감고 계시지 않으시며, 귀를 막고 계시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졸지도 않으십니다. 시편 121:4, [보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121:4). 하물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거듭난 자신의 자녀들을 잊으시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또 그들이 자기들의 작업 감독들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들었나니](7). 주님은 귀를 열어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아벨처럼 들에서 형 가인에게 돌에 맞아 죽는다 해도 주님은 땅에 흘러든 아벨의 피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성도의 부르짖음에 주님은 응답하십니다. 시편 18:6, [내가 고통 중에 [주]를 부르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분께서 자신의 /성/전에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니 내 부르짖음이 그분 앞에 이르되 그분의 귀에까지 이르렀도다.](시18:6). 산이나 강이나 바다, 아무도 없는 황량한 사막에서 조난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부르짖어도 메아리 쳐 돌아오고, 바람 소리에 묻혀 사라져 버리고 아무도 듣지 못할 때 절망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실제로 그런 예가 있습니다. 하갈입니다. 이삭이 태어나 찬밥 신세가 된 하갈과 그녀의 아들 이스마엘이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을 하다가 물이 떨어졌습니다. 지금처럼 셀룰러 폰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성 전화가 있는 시대도 아닙니다. 하늘에는 비행기가 날아 다니지도 않습니다. 지나가는 상인들이 있는 곳도 아닙니다. 하갈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우는 것이었습니다. 망망한 대해에서 표류해 보지 않는 사람이 바다에 대해 노래하고, 사막에서 쓰러져 보지 않는 사람이 사막에 대해 ‘거기로 가자’ 노래하지만, 사막에서 물이 떨어져 죽게된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그쪽으로 얼굴도 돌리기 싫을 것입니다. 창세기 21:15-16, [부대의 물이 다 떨어지니라. 이에 하갈이 그 아이를 떨기나무 아래 두고 화살이 미치는 거리만큼 떨어진 곳에 가서 그를 마주보며 앉았으니 이는 그녀가 이르기를,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였음이더라. 그녀가 그를 마주보며 앉아서 목소리를 높여 우니](창21:15-16). 하갈이야 어른이라고 마지막 통곡의 눈물이라도 흘리며 울었지만 이제 열살 먹은 아이 이스마엘은 헉헉대기도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누군가 그 모자(母子)의 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창세기 21:17, [하나님께서 그 아이의 음성을 들으시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너를 괴롭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이가 있는 곳에서 그의 음성을 들으셨음이니라.](창21:17). 주님은 약하디 약한 아이의 음성을 똑똑히 들으실 만큼 가까이 계셨습니다. 주님의 귀는 그들을 향해 열려 있었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관심과 애정이 있어야 들리는 것입니다. 이 시간도 주님은 우리의 기도와 찬양과 경배 뿐만 아니라 한 숨 쉬는 소리까지 다 듣고 계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그들의 고통을 알기 때문이니라.](7).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아십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면서 어느덧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졌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을 잘 아십니다. 이스라엘이 조상들의 하나님을 잊고, 이집트에서 우상을 숭배하며 섞여 살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불법을 용서하시고 이전에 언약을 주신대로 그들을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모세는 바로 주님께서 구원자로 택하신 그릇이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이집트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지역에 데려가려 하노라.](8). 여기서 주님은 자신이 직접 이 땅으로 내려오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약속의 땅으로 데려 가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건을 달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이 친히 하실 일을 선포하시고, 그대로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확증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실 때는 심판을 하시기 위해, 또는 구원하시기 위해 아니면, 두가지 다 하실 목적을 가지고 오십니다. 처음 주님이 이 땅에 내려오신 표현은 바벨탑 건축 때입니다. 창세기 11: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混雜)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창11:7). 주님은 심판하셨습니다. 다음에는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 위해 내려 오셨습니다. 반면에 지금 본문에서 주님은 이집트를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내려오십니다. 이는 주님의 초림, 주님의 재림 모두 동일합니다.
8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이집트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지역에 데려가려 하노라.](8). 이 말씀은 예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잘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이집트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보고, 듣고, 아셨듯이 이 땅에 죄와 사망의 속박 아래에 신음하는 인류의 고통을 다 보시고, 들으시고,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때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할 구원자를 보내셨듯이, 때가 차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내가 내려가서”란 말씀은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한지 1500년 후에 주님은 이 땅에 다시 내려 오셨습니다. 주님이 오신 목적이 이스라엘의 구원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이었던 것처럼, 성육신의 목적은 죄로부터 구원하여 저 하늘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속박의 땅, 고통과 울부짖음의 땅 이집트에서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은 죄와 사망, 세상과 육신의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명, 부활의 권능 아래로 인도하시는 것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주님이 직접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는 정말 기뻤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보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이르고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괴롭게 학대하는 것도 내가 보았나니 그런즉 이제 오라. 내가 너를 파라오에게 보내리니 네가 내 백성 곧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리라.](9-10). 모세는 하나님이 직접 내려 오셔서 한다고 들었는데,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project’의 총 책임자로 모세를 임명하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팔짱 끼고 있고, 주님이 다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세를 통해서, 모세와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혼자서 하실 수 있습니다. 천사를 보내어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예외적인 경우를 일반화시키려는 실수를 자주 범합니다. 주님의 일하시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방법은 사람을 택하셔서, 그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바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란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9,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농사요, 하나님의 건물이기 때문이라](고전3:9). 고린도후서 6:1, [우리가 그분과 함께 일하는 일꾼으로서 너희에게도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
[그런즉 이제(now) 오라. 내가 너를 파라오에게 보내리니 네가 내 백성 곧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리라.](10). 이는 모세에게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임에 틀림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모세의 심정을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도 흔히 겪는 일입니다. 정치가들이나 사업가들은 흔히 거창한 목표와 비전을 제시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 다음에는 그 일을 모두 국민들이나 사원들에게 떠 넘겨 버립니다. 여러분은 어릴 때 아버지나 형의 심부름을 다닌 적이 있을 겁니다. ‘내가 해 줄게, 내가 사줄게’ 해 놓고는 정작 내게 그 일을 하라고 시키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겁니다. 전에 추운 겨울에 따뜻한 방안에 누워 있는데, “이럴 때 아이스크림을 먹었으면 좋겠다”고 하자, “저도요”...“내가 돈 줄테니 네가 사와라”...??!! 쉬운 일, 즐거운 일, 뭔가 돌아오는 것이 많은 일이면 누구나 기꺼이 동참하고 싶어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아서 방언을 하고, 신유로 많은 병자들을 고쳐줌으로 교회에서나 밖에서나 칭찬과 영광을 받는다면 누구라도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의 결과가 복음을 전하고, 수치와 모욕을 감당하는 것이라면 기도하다가도 중단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존경받는 사도 바울의 모습, 병자들을 고치고, 성경을 기록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풍성히 받은 그런 모습만을 바라보고 바울처럼 살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가 얼마나 많이 맞고, 터지고,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어떻게 죽었는지 안다면 결코 바울처럼 살고 싶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울처럼 살기를 갈망하고, 그분처럼 지혜와 계시가 풍성하기를 기도하고 구한다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대환영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처럼 살기를 갈망하고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너무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가 바울처럼, 예수님 처럼 살겠다고 할 때 마음 속에는 바울이나 예수님이 받았던 수치와 모욕, 고난과 죽음이 아닌 영광과 존경을 탐내는 더러운 동기와 목적 때문이란 것을 아십니다.
[그런즉 이제(now) 오라. 내가 너를 파라오에게 보내리니 네가 내 백성 곧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리라.](10). 주님은 모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하실 일에 모세를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았습니다. 그는 이미 4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거부하고, 배척했던 아픈 기억이 있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고집이 세고, 권위에 불순종하고, 완악하고 반역을 잘 하는 민족인지 직접 겪어 본 사람입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파라오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습니다. 파라오의 성품이 얼마나 잔혹하며, 이스라엘 백성과 자신을 향해 적대적인지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전에 이미 파라오를 피해 이곳 미디안까지 도망을 온 1급 죄수의 신분이었습니다. 40년이 지났다고 하지만 그는 여전히 두려웠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고 말씀한 후 곧 이어 [그런즉 이제(now) 오라. 내가 너를 파라오에게 보내리니 네가 내 백성 곧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리라.](10)고 말씀하시니 얼마나 두렵고 놀랐겠습니까? 하나님은 왜 이렇게 다 늙어 버린 모세에게 이 일을 하라고 부르셨고, 맡기셨습니까? 하나님은 약한 것들을 들어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 일을 맡긴 것은 모세가 탁월한 능력과 지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모세야말로 이집트의 궁중에서 배운 인간의 지혜와 학문, 왕자로서 누린 세상의 권력이 아무 것도 아니란 사실을 가장 깊이 깨달았고, 직접 체험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약했기 때문에, 자신의 약함과 어리석음을 지난 40년간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의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는 힘도 없습니다. 권세도 없습니다. 함께 일할만한 동료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일꾼을 뽑으시는 것은 바로 이런 약함과 천함이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신 것을 보라.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고 강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고귀한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1:26). 내가 약하고 어리석고, 아무 것도 아니란 사실을 깊이 자각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사역에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파라오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니](11). 주님의 부르심과 사명에 모세의 답변은 “내가 누구이기에...”입니다. 이것은 일련 불신처럼 보이지만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한 반응입니다. 세월이 모세에게 가르쳐 준 것은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란 사실’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단지 ‘먼지’에 지나지 않는 자란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지금 기억하고 바라보아야 할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모세는 겸손을 배웠지만 동시에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배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택하신 것은 자신이 바로 아무 쓸모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7-29,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시며 하나님께서 있는 것들을 쓸모 없게 하시려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시고 참으로 없는 것들을 택하셨나니 이것은 어떤 육체도 하나님의 눈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29).
사람들은 기분 나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 저를 택하셨습니까? 라고 물었는데, 음...세상에서 보니 너보다 못난 놈이 별로 없더구나.” “하나님, 무엇 때문에 저를 택하셨습니까?” “내가 보니 네가 제일 약하고 어리석고 천하고 멸시받았기 때문이란다...” 이것이 주님의 대답입니다. 이런 주님의 대답에 기분이 나쁜 사람은 아직 사역을 위해 부름 받기에는 너무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pride가 너무 강합니다. 이것이 깨지면 삶의 의욕을 잃어버립니다. 몇 년 전 제 친구 하나가 어떤 자매에게 사귀자고 propose를 했는데, 거절당했습니다. 이 친구가 얼마나 성경적이었던지, 그 자매를 택한 이유가 ‘교회에서 결혼 안한 자매들 중에 제일 못나 보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너를 택한 이유는 네가 못났기 때문이야!’라고 한다면 열받지 않을 사람이 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이유로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다시 11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파라오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니](11). 모세는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일을 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을 통해서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그러나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가졌나니 이것은 뛰어난 권능이 하나님에게서 나며 우리에게서 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후4:7).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계 선교를 명하실 때,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능”(마28:19)이 바로 주님 자신에게 있음을 먼저 가르치셨습니다. 모세는 겸손함을 가졌지만 이 순간에 믿음은 갖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자원해서 종교를 가질 때, 자신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주님의 일을 할 때 정말로 열심히 합니다. 육신의 열정은 불같이 타오릅니다. 모세 역시 40년 전에 주님을 위해, 자기 백성을 위해 그렇게 일하기로 결단하고, 헌신한 적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자원할 때는 얼마든지 주를 위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 모세는 그 길이 어렵거나 험난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학교를 가고, 선교사나 목사를 자원합니다.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선교사나 목사로 부를 때에는 어떻게 하든지 회피하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9장을 보십시오. [그들이 길을 갈 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내가 주를 따르리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되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거늘 그가 이르되, {주}여, 먼저 내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葬事)지내게 허락하옵소서,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게 하고 오직 너는 가서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라, 하시니라.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먼저 가서 내 집에 있는 가족들에게 작별을 고하게 하옵소서,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9:57-62). 스스로 정한 길은 어려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신 길은 분명 어려워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께서 어디로 가든지 주를 따르리이다’라고 자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길이 어떤 길인지 말씀해 주셨을 때, 그것을 들은 다른 사람들은 주님의 초청을 받았지만 따르지 못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모세의 겸손함을 배우는 동시에 주님의 부르심에 확신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사명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주저하거나, 뒤로 물러나지 마십시오. 성도들은 예외없이 전도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디모데전서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영원한 생명을 붙들라. 이것을 위하여 너 역시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들 앞에서 선한 고백을 하였도다.](딤전6:12). 이 부르심을 거절하지 마십시오. 부르심에는 상이 있습니다(빌3:14). 저와 여러분은 모두 예외없이 주님을 따르도록 고난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는 참으로 너희가 이것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니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남기사 너희로 하여금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벧전2:21). 저희 교회 성도들은 특별히 잘 행하고 고난을 받도록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교회 생활, 신앙 생활이 여느 교회처럼 실제적인 생활의 도움을 받을 만한 것이 거의 없습니다. 만약 이 교회가 순수한 말씀에 목숨을 거는 성도들의 모임이 아니라면 우리 교회의 부흥은 다른 교회의 약화를 가져오는 그런 결과를 낳는 자리 이동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곳 교포 사회는 어느 한 교회가 부흥을 하면 그 주위의 많은 교회들의 성도가 줄어들고, 약화됩니다. 이는 구령을 통한 복음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따른 부흥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는 어느덧 장사하는 집이 되었고, 친목회나 클럽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권면한대로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2:22). 이 길은 분명 힘들고 어렵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말씀[킹제임스 성경]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힘들고 지칠 때, ‘내가 누구기에...우리가 무엇이기에...’라며 하소연할 수 있습니다. 사역을 포기할 수도 있고, 이렇게 신앙 생활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교회 생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겸손을 가장한 자기 비하는 결코 믿음이 아닙니다. 겸손을 배웠으면 믿음도 함께 배워야 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하리라. 네가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낸 뒤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그 일이 내가 너를 보낸 증표(證票)가 되리라.](12). 주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화 함께 하리라.” 주님은 모세 혼자 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가십니다. 모세가 있는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모세와 대화하고 있는 이 곳, 불타는 떨기나무가 있는 이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이 약속은 모세의 남은 인생 40년동안 신실하게 지켜졌습니다. 후에 주님은 ‘모세와 함께 하던 것 같이’란 말이 주님의 약속의 증표처럼 사용될 정도로 모세와 철저히 동행하셨습니다.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정복 전쟁의 임무를 주셨을 때 주님은 [내가 모세와 함께하던 것같이 너와 함께하리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수1:5)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이 약속은 오늘날 성도들에게 여전히 유효합니다. 주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영원히 함께 거하도록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분께서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거하게 하시리니 곧 진리의 영이시라. 세상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나니 이는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아나니 이는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속에 계실 것임이라.](요14:16-17). 이 시간도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파라오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완악한 백성들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길 거리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 복음을 전하는 것도 힘들고, 그들의 혼을 이겨오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들에게 바른 말씀과 교리를 가르치는 일은 더욱 힘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약속에 근거해서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운 세상 지혜로 단 한명도 회심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단 한 명도 이 교회에 앉혀 놓을 수 없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는 약속으로 인해 힘을 얻어야 합니다.
이 시간 주님은 성경을 통해 주님의 계획과 하실 일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앞으로 하실 일에 대해서도 우리는 듣고 배웠습니다.
이 시간 주님은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그런즉 이제 오라,...](10a). 주님은 여러분을 제자로 부르시고, 사명을 주십니다. 전도자로 부르시고, 고난으로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이 응답할 차례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1. 주님은 보시고, 들으시고 아십니다.
2. 주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한 일꾼입니다.
3. 주님은 부르십니다. ‘그런즉 이제 오라’(10).
4. 내가 아닌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5.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출애굽기(VII)
말씀: 출애굽기 3:7-12
요절: 출애굽기 3:10
07. 그런즉 이제 오라
하나님은 80세의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쓴 시편 90편에서 [우리의 햇수의 날들이 칠십 년이요, 강건하면 팔십 년이라도 그 햇수의 위력은 수고와 슬픔 뿐이니이다...](시90:10)라고 노래했던 사람입니다. 자신이 노래한 대로라면 모세의 나이 80은 한 쪽 발을 이미 관 위에 올려놓은 그런 때라 할 것입니다. 모진 것이 인생이요, 질긴 것이 운명이라고 모세의 운(運)도 여기서 다 했구나 할 정도의 그런 시기였습니다. 광야에서 40년간의 목자 생활은 실상 은둔 생활이요, 도피 생활이었습니다. 모세가 40년 전 이집트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살인자로 도망쳐 온 곳이 바로 이곳 미디안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결혼했고, 이곳에서 장인의 양을 치면서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이곳이 바로 주님의 거룩한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모세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5). 그리고, 언약의 하나님이란 사실을 기억하게 했습니다(6). 죽음을 두려워하여 파라오로부터 도망쳐 온 모세를 불러 다시 이집트로 가서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모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부활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다](6)라고 하심으로 부활의 주님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백성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7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았고 또 그들이 자기들의 작업 감독들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들었나니 이는 내가 그들의 고통을 알기 때문이니라.](7). 주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불꽃같은 눈동자로 이 땅에서 고통받는 자신의 백성들의 고통을 분명히 보셨습니다. 독재와 불의가 창궐하는 시대에 살던 고뇌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지금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라고 외칠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았고...”. 아브라함의 종으로서 아브라함의 아들을 임신한 하갈이 사라에게 학대를 당하자, 여주인의 눈을 피해 도망을 쳤습니다. 홀몸도 아닌 임신한 여자가 광야에서 도망을 가면 얼마나 갈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조차 눈여겨 보지 않는 이집트인 여종 하갈을 눈여겨 보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창세기 16:13, [하갈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주]의 이름을 가리켜, 나를 보시는 하나님, 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녀가 이르기를, 나도 여기에서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가? 하였음이더라.](창16:13). 하나님은 침묵하시지만 결코 눈을 감고 계시지 않으시며, 귀를 막고 계시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졸지도 않으십니다. 시편 121:4, [보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121:4). 하물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거듭난 자신의 자녀들을 잊으시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또 그들이 자기들의 작업 감독들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들었나니](7). 주님은 귀를 열어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아벨처럼 들에서 형 가인에게 돌에 맞아 죽는다 해도 주님은 땅에 흘러든 아벨의 피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성도의 부르짖음에 주님은 응답하십니다. 시편 18:6, [내가 고통 중에 [주]를 부르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분께서 자신의 /성/전에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니 내 부르짖음이 그분 앞에 이르되 그분의 귀에까지 이르렀도다.](시18:6). 산이나 강이나 바다, 아무도 없는 황량한 사막에서 조난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부르짖어도 메아리 쳐 돌아오고, 바람 소리에 묻혀 사라져 버리고 아무도 듣지 못할 때 절망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실제로 그런 예가 있습니다. 하갈입니다. 이삭이 태어나 찬밥 신세가 된 하갈과 그녀의 아들 이스마엘이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을 하다가 물이 떨어졌습니다. 지금처럼 셀룰러 폰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성 전화가 있는 시대도 아닙니다. 하늘에는 비행기가 날아 다니지도 않습니다. 지나가는 상인들이 있는 곳도 아닙니다. 하갈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우는 것이었습니다. 망망한 대해에서 표류해 보지 않는 사람이 바다에 대해 노래하고, 사막에서 쓰러져 보지 않는 사람이 사막에 대해 ‘거기로 가자’ 노래하지만, 사막에서 물이 떨어져 죽게된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그쪽으로 얼굴도 돌리기 싫을 것입니다. 창세기 21:15-16, [부대의 물이 다 떨어지니라. 이에 하갈이 그 아이를 떨기나무 아래 두고 화살이 미치는 거리만큼 떨어진 곳에 가서 그를 마주보며 앉았으니 이는 그녀가 이르기를,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였음이더라. 그녀가 그를 마주보며 앉아서 목소리를 높여 우니](창21:15-16). 하갈이야 어른이라고 마지막 통곡의 눈물이라도 흘리며 울었지만 이제 열살 먹은 아이 이스마엘은 헉헉대기도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누군가 그 모자(母子)의 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창세기 21:17, [하나님께서 그 아이의 음성을 들으시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너를 괴롭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이가 있는 곳에서 그의 음성을 들으셨음이니라.](창21:17). 주님은 약하디 약한 아이의 음성을 똑똑히 들으실 만큼 가까이 계셨습니다. 주님의 귀는 그들을 향해 열려 있었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관심과 애정이 있어야 들리는 것입니다. 이 시간도 주님은 우리의 기도와 찬양과 경배 뿐만 아니라 한 숨 쉬는 소리까지 다 듣고 계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그들의 고통을 알기 때문이니라.](7).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아십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면서 어느덧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졌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을 잘 아십니다. 이스라엘이 조상들의 하나님을 잊고, 이집트에서 우상을 숭배하며 섞여 살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불법을 용서하시고 이전에 언약을 주신대로 그들을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모세는 바로 주님께서 구원자로 택하신 그릇이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이집트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지역에 데려가려 하노라.](8). 여기서 주님은 자신이 직접 이 땅으로 내려오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약속의 땅으로 데려 가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건을 달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이 친히 하실 일을 선포하시고, 그대로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확증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실 때는 심판을 하시기 위해, 또는 구원하시기 위해 아니면, 두가지 다 하실 목적을 가지고 오십니다. 처음 주님이 이 땅에 내려오신 표현은 바벨탑 건축 때입니다. 창세기 11: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混雜)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창11:7). 주님은 심판하셨습니다. 다음에는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 위해 내려 오셨습니다. 반면에 지금 본문에서 주님은 이집트를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내려오십니다. 이는 주님의 초림, 주님의 재림 모두 동일합니다.
8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이집트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지역에 데려가려 하노라.](8). 이 말씀은 예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잘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이집트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보고, 듣고, 아셨듯이 이 땅에 죄와 사망의 속박 아래에 신음하는 인류의 고통을 다 보시고, 들으시고,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때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할 구원자를 보내셨듯이, 때가 차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내가 내려가서”란 말씀은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한지 1500년 후에 주님은 이 땅에 다시 내려 오셨습니다. 주님이 오신 목적이 이스라엘의 구원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이었던 것처럼, 성육신의 목적은 죄로부터 구원하여 저 하늘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속박의 땅, 고통과 울부짖음의 땅 이집트에서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은 죄와 사망, 세상과 육신의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명, 부활의 권능 아래로 인도하시는 것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주님이 직접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는 정말 기뻤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보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이르고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괴롭게 학대하는 것도 내가 보았나니 그런즉 이제 오라. 내가 너를 파라오에게 보내리니 네가 내 백성 곧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리라.](9-10). 모세는 하나님이 직접 내려 오셔서 한다고 들었는데,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project’의 총 책임자로 모세를 임명하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팔짱 끼고 있고, 주님이 다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세를 통해서, 모세와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혼자서 하실 수 있습니다. 천사를 보내어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예외적인 경우를 일반화시키려는 실수를 자주 범합니다. 주님의 일하시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방법은 사람을 택하셔서, 그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바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란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9,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농사요, 하나님의 건물이기 때문이라](고전3:9). 고린도후서 6:1, [우리가 그분과 함께 일하는 일꾼으로서 너희에게도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
[그런즉 이제(now) 오라. 내가 너를 파라오에게 보내리니 네가 내 백성 곧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리라.](10). 이는 모세에게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임에 틀림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모세의 심정을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도 흔히 겪는 일입니다. 정치가들이나 사업가들은 흔히 거창한 목표와 비전을 제시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 다음에는 그 일을 모두 국민들이나 사원들에게 떠 넘겨 버립니다. 여러분은 어릴 때 아버지나 형의 심부름을 다닌 적이 있을 겁니다. ‘내가 해 줄게, 내가 사줄게’ 해 놓고는 정작 내게 그 일을 하라고 시키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겁니다. 전에 추운 겨울에 따뜻한 방안에 누워 있는데, “이럴 때 아이스크림을 먹었으면 좋겠다”고 하자, “저도요”...“내가 돈 줄테니 네가 사와라”...??!! 쉬운 일, 즐거운 일, 뭔가 돌아오는 것이 많은 일이면 누구나 기꺼이 동참하고 싶어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아서 방언을 하고, 신유로 많은 병자들을 고쳐줌으로 교회에서나 밖에서나 칭찬과 영광을 받는다면 누구라도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의 결과가 복음을 전하고, 수치와 모욕을 감당하는 것이라면 기도하다가도 중단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존경받는 사도 바울의 모습, 병자들을 고치고, 성경을 기록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풍성히 받은 그런 모습만을 바라보고 바울처럼 살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가 얼마나 많이 맞고, 터지고,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어떻게 죽었는지 안다면 결코 바울처럼 살고 싶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울처럼 살기를 갈망하고, 그분처럼 지혜와 계시가 풍성하기를 기도하고 구한다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대환영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처럼 살기를 갈망하고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너무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가 바울처럼, 예수님 처럼 살겠다고 할 때 마음 속에는 바울이나 예수님이 받았던 수치와 모욕, 고난과 죽음이 아닌 영광과 존경을 탐내는 더러운 동기와 목적 때문이란 것을 아십니다.
[그런즉 이제(now) 오라. 내가 너를 파라오에게 보내리니 네가 내 백성 곧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리라.](10). 주님은 모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하실 일에 모세를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았습니다. 그는 이미 4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거부하고, 배척했던 아픈 기억이 있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고집이 세고, 권위에 불순종하고, 완악하고 반역을 잘 하는 민족인지 직접 겪어 본 사람입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파라오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습니다. 파라오의 성품이 얼마나 잔혹하며, 이스라엘 백성과 자신을 향해 적대적인지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전에 이미 파라오를 피해 이곳 미디안까지 도망을 온 1급 죄수의 신분이었습니다. 40년이 지났다고 하지만 그는 여전히 두려웠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고 말씀한 후 곧 이어 [그런즉 이제(now) 오라. 내가 너를 파라오에게 보내리니 네가 내 백성 곧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리라.](10)고 말씀하시니 얼마나 두렵고 놀랐겠습니까? 하나님은 왜 이렇게 다 늙어 버린 모세에게 이 일을 하라고 부르셨고, 맡기셨습니까? 하나님은 약한 것들을 들어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 일을 맡긴 것은 모세가 탁월한 능력과 지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모세야말로 이집트의 궁중에서 배운 인간의 지혜와 학문, 왕자로서 누린 세상의 권력이 아무 것도 아니란 사실을 가장 깊이 깨달았고, 직접 체험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약했기 때문에, 자신의 약함과 어리석음을 지난 40년간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의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는 힘도 없습니다. 권세도 없습니다. 함께 일할만한 동료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일꾼을 뽑으시는 것은 바로 이런 약함과 천함이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신 것을 보라.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고 강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고귀한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1:26). 내가 약하고 어리석고, 아무 것도 아니란 사실을 깊이 자각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사역에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파라오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니](11). 주님의 부르심과 사명에 모세의 답변은 “내가 누구이기에...”입니다. 이것은 일련 불신처럼 보이지만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한 반응입니다. 세월이 모세에게 가르쳐 준 것은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란 사실’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단지 ‘먼지’에 지나지 않는 자란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지금 기억하고 바라보아야 할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모세는 겸손을 배웠지만 동시에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배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택하신 것은 자신이 바로 아무 쓸모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7-29,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시며 하나님께서 있는 것들을 쓸모 없게 하시려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시고 참으로 없는 것들을 택하셨나니 이것은 어떤 육체도 하나님의 눈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29).
사람들은 기분 나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 저를 택하셨습니까? 라고 물었는데, 음...세상에서 보니 너보다 못난 놈이 별로 없더구나.” “하나님, 무엇 때문에 저를 택하셨습니까?” “내가 보니 네가 제일 약하고 어리석고 천하고 멸시받았기 때문이란다...” 이것이 주님의 대답입니다. 이런 주님의 대답에 기분이 나쁜 사람은 아직 사역을 위해 부름 받기에는 너무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pride가 너무 강합니다. 이것이 깨지면 삶의 의욕을 잃어버립니다. 몇 년 전 제 친구 하나가 어떤 자매에게 사귀자고 propose를 했는데, 거절당했습니다. 이 친구가 얼마나 성경적이었던지, 그 자매를 택한 이유가 ‘교회에서 결혼 안한 자매들 중에 제일 못나 보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너를 택한 이유는 네가 못났기 때문이야!’라고 한다면 열받지 않을 사람이 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이유로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다시 11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파라오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니](11). 모세는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일을 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을 통해서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그러나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가졌나니 이것은 뛰어난 권능이 하나님에게서 나며 우리에게서 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후4:7).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계 선교를 명하실 때,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능”(마28:19)이 바로 주님 자신에게 있음을 먼저 가르치셨습니다. 모세는 겸손함을 가졌지만 이 순간에 믿음은 갖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자원해서 종교를 가질 때, 자신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주님의 일을 할 때 정말로 열심히 합니다. 육신의 열정은 불같이 타오릅니다. 모세 역시 40년 전에 주님을 위해, 자기 백성을 위해 그렇게 일하기로 결단하고, 헌신한 적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자원할 때는 얼마든지 주를 위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 모세는 그 길이 어렵거나 험난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학교를 가고, 선교사나 목사를 자원합니다.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선교사나 목사로 부를 때에는 어떻게 하든지 회피하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9장을 보십시오. [그들이 길을 갈 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내가 주를 따르리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되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거늘 그가 이르되, {주}여, 먼저 내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葬事)지내게 허락하옵소서,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게 하고 오직 너는 가서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라, 하시니라.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먼저 가서 내 집에 있는 가족들에게 작별을 고하게 하옵소서,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9:57-62). 스스로 정한 길은 어려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신 길은 분명 어려워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께서 어디로 가든지 주를 따르리이다’라고 자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길이 어떤 길인지 말씀해 주셨을 때, 그것을 들은 다른 사람들은 주님의 초청을 받았지만 따르지 못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모세의 겸손함을 배우는 동시에 주님의 부르심에 확신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사명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주저하거나, 뒤로 물러나지 마십시오. 성도들은 예외없이 전도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디모데전서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영원한 생명을 붙들라. 이것을 위하여 너 역시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들 앞에서 선한 고백을 하였도다.](딤전6:12). 이 부르심을 거절하지 마십시오. 부르심에는 상이 있습니다(빌3:14). 저와 여러분은 모두 예외없이 주님을 따르도록 고난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는 참으로 너희가 이것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니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남기사 너희로 하여금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벧전2:21). 저희 교회 성도들은 특별히 잘 행하고 고난을 받도록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교회 생활, 신앙 생활이 여느 교회처럼 실제적인 생활의 도움을 받을 만한 것이 거의 없습니다. 만약 이 교회가 순수한 말씀에 목숨을 거는 성도들의 모임이 아니라면 우리 교회의 부흥은 다른 교회의 약화를 가져오는 그런 결과를 낳는 자리 이동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곳 교포 사회는 어느 한 교회가 부흥을 하면 그 주위의 많은 교회들의 성도가 줄어들고, 약화됩니다. 이는 구령을 통한 복음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따른 부흥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는 어느덧 장사하는 집이 되었고, 친목회나 클럽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권면한대로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2:22). 이 길은 분명 힘들고 어렵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말씀[킹제임스 성경]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힘들고 지칠 때, ‘내가 누구기에...우리가 무엇이기에...’라며 하소연할 수 있습니다. 사역을 포기할 수도 있고, 이렇게 신앙 생활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교회 생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겸손을 가장한 자기 비하는 결코 믿음이 아닙니다. 겸손을 배웠으면 믿음도 함께 배워야 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하리라. 네가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낸 뒤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그 일이 내가 너를 보낸 증표(證票)가 되리라.](12). 주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화 함께 하리라.” 주님은 모세 혼자 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가십니다. 모세가 있는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모세와 대화하고 있는 이 곳, 불타는 떨기나무가 있는 이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이 약속은 모세의 남은 인생 40년동안 신실하게 지켜졌습니다. 후에 주님은 ‘모세와 함께 하던 것 같이’란 말이 주님의 약속의 증표처럼 사용될 정도로 모세와 철저히 동행하셨습니다.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정복 전쟁의 임무를 주셨을 때 주님은 [내가 모세와 함께하던 것같이 너와 함께하리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수1:5)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이 약속은 오늘날 성도들에게 여전히 유효합니다. 주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영원히 함께 거하도록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분께서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거하게 하시리니 곧 진리의 영이시라. 세상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나니 이는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아나니 이는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속에 계실 것임이라.](요14:16-17). 이 시간도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파라오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완악한 백성들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길 거리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 복음을 전하는 것도 힘들고, 그들의 혼을 이겨오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들에게 바른 말씀과 교리를 가르치는 일은 더욱 힘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약속에 근거해서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운 세상 지혜로 단 한명도 회심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단 한 명도 이 교회에 앉혀 놓을 수 없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는 약속으로 인해 힘을 얻어야 합니다.
이 시간 주님은 성경을 통해 주님의 계획과 하실 일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앞으로 하실 일에 대해서도 우리는 듣고 배웠습니다.
이 시간 주님은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그런즉 이제 오라,...](10a). 주님은 여러분을 제자로 부르시고, 사명을 주십니다. 전도자로 부르시고, 고난으로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이 응답할 차례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1. 주님은 보시고, 들으시고 아십니다.
2. 주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한 일꾼입니다.
3. 주님은 부르십니다. ‘그런즉 이제 오라’(10).
4. 내가 아닌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5.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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