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2002년 10월 27일- 출애굽기




출애굽기(IV)




말씀: 출애굽기 2:1-15

요절: 출애굽기 1:17




04. 믿음으로 모세는







역사가들은 흔히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말합니다. 이 원리는 성경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암흑이 깊을수록, 절망과 탄식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질수록 구원의 빛은 더욱 강렬하게 빛나는 법입니다. 주님은 죄와 허물로 종노릇하며, 소망의 빛이 없을 때 구원자를 보내 주십니다. 400년간의 종살이를 통해 이스라엘의 민족적 위기가 극에 달했을 때 주님은 구원자 모세를 보내 주셨습니다. 말라기 대언자 이후 400년 동안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없어 흑암 가운데 있을 때 광야에서 외치는 침례인 요한의 음성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음을 선포했습니다. 중세 1500년이란 긴 암흑의 카톨릭의 지배하에 성경이 백성들로부터 가려지고, 왜곡되고, 교회가 사탄의 회당이 되었을 때 마틴 루터를 통해 종교 개혁이 일어나고 성경의 진리들이 찬란히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한 민족, 한 국가, 한 교회, 한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치고 힘들어 낙심될 때 주님은 구원의 빛을 보내십니다. 우리는 이런 소망을 통해 낙심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 본문의 제목을 ‘믿음으로 모세는’이라고 잡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출애굽기 2장에서 우리는 모세의 믿음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차라리 모세의 어머니의 믿음은 볼 수 있지만 모세의 믿음은 거의 찾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읽는 법을 한 가지 배워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성경 본문만 아니라 다른 성경을 참조해서 행간의 의미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능력이 없다면 성경 연구는 영원히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진리의 지식을 전혀 배울 수 없습니다. 오늘 출애굽기 2장을 읽을 때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할 곳은 사도행전 7장과 히브리서 11장입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비교해서 보고, 그 행간(行間)의 의미를 찾을 때 믿음의 사람, 이스라엘의 구원자 모세를 만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있습니다. 너무나 사람들의 이름이 많아서 누가 누군지 모를 지경입니다. 그러나, 그런 인물들 가운데 출생에서 죽음까지 일대기가 다 기록되어 있는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모세는 매우 극적인 일생을 살았습니다. '이집트의 박해를 받으며 종살이를 하는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공주의 아들로 왕궁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가난하게 태어났지만 마음껏 부를 누렸습니다. 그는 이집트의 지혜를 다 배웠지만 믿음으로 양육 받았습니다. 그는 도시 교육을 받았지만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죄의 낙을 즐길 수 있었지만 고난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파라오 앞에서 도망을 갔지만 하나님으로부터는 대사로 임명받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의 수여자였지만 은혜의 선구자였습니다. 그는 모압 땅의 산에서 죽었지만 변화산에서 주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의 죽음에는 한명도 지켜 보는 사람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Dr. I.M Haldeman).

모세의 인생은 소설보다 더 극적이어서 때로 현실을 능가하는 소설은 없다는 말을 실감나게 합니다. 모세가 태어날 무렵 파라오는 이스라엘 학대 정책의 연이은 실패를 맛보고 있었던 터라 모세의 생명은 더욱 위험했습니다. 산파들을 통해 이스라엘 남자아이들을 죽이는데 실패하자 파라오는 자기의 온 백성에게 명하여 이스라엘 집에 아들이 태어나면 그를 강에 던져 죽이게 했습니다(1:22). 출산을 앞둔 임산부들과 그 가정의 고통을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는 이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레위의 집의 한 남자가 가서 레위의 딸을 취해 아내로 삼으니라.](1). 모세의 아버지와 모세의 어머니는 레위 지파로서 매우 가까운 친족이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아므라와 요게벳입니다. 이는 6:20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남자 아이들을 죽여 대를 끊어 놓으려는 파라오의 정책으로 인해 결혼도 부담스러운 그런 시대였습니다. 설령 결혼했다 해도 임신이 기쁨이 될 수 없었습니다. 아이를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아므라와 요게벳의 첫째 아이는 딸 미리암이었습니다. 그나마 딸이 다행인 시대입니다. 둘째를 가졌는데 모세의 형 아론입니다. 3살 터울로 모세를 가졌습니다. 아론에 이어 모세의 출생은 이 집안에 큰 걱정거리요, 복 덩어리가 아니라 화(禍)덩어리일 수 있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2-3절입니다. [이 여인이 수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가 준수(俊秀)한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로 만든 궤를 가져다가 진흙과 역청으로 바르고 아이를 거기 담아 강가의 부들 사이에 두니](2-3). 임신한 것도 출산한 것도 모두 믿음의 행위입니다. 비밀리에 출산하고, 비밀리에 키웠음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목숨을 건 행위였습니다. 오늘날 중국에는 인구 억제 정책으로 공무원들은 한 가정에 한 명 이상의 아이를 갖지 못하게 법으로 강력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만약 둘째를 낳으면 직장에서 해고됩니다. 그리고, 각종 사회적 불이익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 불이익 때문에 많은 부모들이 유산을 하거나, 사산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파라오는 그 정도의 정책이 아니라 사내아이는 강에 던져 죽이라는 것입니다. 3개월이 지나 아이를 숨길 수 없게 되자 모세의 부모는 모험처럼 보이는 믿음의 결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의 본문은 주어가 ‘이 여인’(요게벳)으로 모세의 어머니의 믿음과 결단의 행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는 아버지의 믿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모세가 태어났는데 그가 심히 아름다우므로 자기 아버지 집에서 석 달을 양육받다가](행7:20). 히브리서에는 아버지, 어머니 모두의 믿음의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23, [믿음으로 모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났을 때에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니 이는 아이가 잘생긴 것을 그들이 보고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음이라.](히11:23). 믿음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만 생기는 것입니다(롬10:17). 이들은 하나님과의 깊은 친교가 있었고, 주님의 말씀을 공급받는 사람들이었음을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약속한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이대로 끝내 멸망하고, 이집트에서 다 죽게 될 것이란 절망 가운데 있었을지라도 이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 주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들은 모세가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될 것이라 사실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 대해 이들에게 계시를 주셨음이 틀림없습니다. 후에 모세가 형제들을 돌보려는 마음을 가졌고, 자신이 그들의 구원자라고 생각했던 것을 볼 때, 어머니로부터 그런 교육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11).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써만 옵니다. 모세를 석 달 동안 숨기고, 갈대에 만든 궤에 담아 강가의 부들 사이에 두는 일은 바로 주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의 결과였습니다. 그들은 단지 주님의 지시에 순종했습니다. 행여나 여러분 가운데 ‘모세의 출중한 용모’로 인해 모세의 부모가 모세를 숨겼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없기 바랍니다. 모세의 부모가 천우신조(天佑神助)의 마음으로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아이를 강물에 둔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부모는 느낌이나 감정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동했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자식에 대한 애정을 거스르고, 부모로서의 타고난 감정을 믿음으로 이겨내고, 순종하기 힘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동일한 믿음을 가진 부부, 같은 믿음을 가진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물 좋은 부인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돈많은 아버지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래봐야 이집트의 종살이에 불과합니다. 아므람과 요게벳은 같은 믿음으로 진리의 지식에 따라 살았습니다. 베드로전서3:7, [남편들아, 이와 같이 너희도 지식에 따라 아내와 동거하고 그녀를 더 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받을 자로 여기고 존중하라. 그리하여야 너희 기도가 방해를 받지 아니하리라](벧전3:7).

하나님의 지혜는 놀랍습니다. 아이들을 강에 던지는 것은 파라오의 명령입니다. 아므람과 요게벳은 모세를 죽음의 강으로 데려 갔습니다. 모세는 산에서 발견되거나 동굴에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강물에서 히브리 사내아이를 건졌다면 이는 누가 보아도 문제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모세는 죽음의 강 위에 있었지만 궤 안에 있음으로 인해 안전했습니다. 궤는 노아의 방주를 생각나게 합니다. 궤란 단어는 언약궤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죽음의 강에서 건짐을 받는 모세를 통해 우리는 사망의 강에서 구원받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의 누이가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보려고 멀리 서 있더라.](4). 미리암은 동생 모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기 위해 멀리 서서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버려진 것 같지만 그를 눈동자처럼 지키고 돌보는 눈과 손길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믿는 신자는 내버려진 것 같고, 비참해 보일 때 하나님은 우리와 가장 가까이에 계십니다.

5-9절을 보십시오. [¶ 파라오의 딸이 강에서 목욕하러 내려오고 그녀의 시녀들은 강가를 거닐 때에 그녀가 부들 사이에서 그 궤를 보고 자기 시녀를 보내어 가져오게 하니라. 그녀가 그 궤를 열고 아이를 보니, 보라, 아기가 울더라. 이에 그녀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들 가운데 하나로다, 하니 그의 누이가 파라오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하매 파라오의 딸이 그녀에게 이르되, 가라, 하거늘 이 소녀가 가서 그 아이의 어머니를 불러오니라. 파라오의 딸이 그녀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네 삯을 주리라, 하니 그 여인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니라.](5-9). 파라오의 딸이 강에서 목욕하러 내려 온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모든 일은 다 주님을 위해 존재하며, 주님을 위해 일어납니다. 히브리서 2:10, [자신을 위하여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며 또 자신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신 그분께서](히2:10a). 파라오의 딸 역시 주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다 통제하실 수 있고, 뜻대로 주관하실 수 있습니다. 파라오의 딸은 강에 던져진 아이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미리암은 공주에게 유모를 추천했는데 바로 모세의 친(親) 어머니였습니다. 모든 일은 완벽하게 한치의 오차없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혜롭게 다루기 위해 갖은 악한 정책을 다 입안하고, 실행했지만 바로 자신의 왕궁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양육받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알 수 없었습니다.

모세는 어머니를 통해 젖을 먹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신앙 교육 또한 철저히 받았음에 틀림없습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디모데가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손에서 말씀을 배웠던 것처럼, 모세 역시 어머니를 통해 조상들의 하나님과 민족의 소망에 대해서 듣고 배움으로써 세상의 지위와 영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지식에게 세상의 누구보다도 위대한 교사이며,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한국의 부모들이 자식 교육에 대해 광적일 정도로 집착하면서도 정작 교육에 대해 전혀 무지한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같이 책을 읽고, 선한 양심을 길러주고, 바른 판단력을 같도록 돌보아 주는 일은 완전히 도외시한 채 공부만 하라고 다그치거나, 좋은 학교만 찾아서 보내려고 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함께 기도하고, 성경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아이들의 마음 속에 믿음을 자라게 할 생각은 거의 하지 못합니다. 아이들과 집에서 같이 기도해 본 적도 없고, 같이 성경을 읽어 본 적도 없고, 같이 믿음의 대화를 나누어 본 적도 없는데 영적으로 바로 양육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입니다. 본을 보이는 것보다 더 훌륭한 교육은 없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이 아이가 자라매 그녀가 그를 파라오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녀의 아들이 되니라. 그녀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고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 속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10). 모세는 공주의 아들이 됨으로 왕자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모세는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위치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단지 공주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왕의 양자로 입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욥기 5:12-13절 말씀 대로입니다. [하나님은 간교한 자들의 계략을 실패로 돌리사 그들의 손으로 하여금 그들이 경영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게 하시며 지혜로운 자들로 하여금 자기 간계에 빠지게 하시고 거역하는 자들의 계략을 무너뜨리시므로](욥5:12-13). 파라오의 계략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파라오의 정책은 하나도 성공한 것이 없었습니다. 파라오의 딸은 아이의 이름을 모세라고 지었는데, 그 뜻은 “물속에 건지다”입니다. 10절과 11절 사이에는 사도행전 7:22절이 들어있습니다. [모세가 이집트 사람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능력이 있었느니라.](행7:22). 모세는 왕궁에서 모든 정규 교육을 다 받았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수학, 천문학, 건축술이 매우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교육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들은 조상들의 하나님의 약속이 마음 가운데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장성(長成)하여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의 무거운 짐을 보더니 어떤 이집트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들 가운데 하나를 치는 것을 보매](11). 이 때 모세의 나이 40세였습니다. 스데반은 말하기를, [그의 나이가 정확히 사십이 되매 그의 마음에 자기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들더니](행7:23). 모세는 민족을 위해서 뭔가를 할 생각을 했고, 자기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 볼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출세를 위해서라면, 신분 상승을 위해서라면 부모 형제를 버리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정반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런 행동과 결단 역시 단순한 애국심에 기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 역시 믿음으로 행했습니다. 히브리서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나이가 들었을 때에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기를 거절하고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택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그가 /주께서/ 보상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음이라.](히11:24-26). 첫째, 모세는 믿음으로 거절했습니다. 파라오의 딸의 아들로서, 왕의 양자로서 그는 자신의 지위와 권세, 모든 기득권을 포기했습니다. 그가 이런 결정을 한 것은 나이 어려 세상 물정을 모를 때 한 것이 아닙니다. 나이 40에 내린 결정입니다. 그는 자신이 내린 결정이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바꿀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거절하고”- 이 말은 모세가 많은 것들을 누릴 수 있고, 받을 수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그에게는 여러 가지 제안도 있었습니다. 부와 권세에 대한 제안은 떨치기 힘든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모세가 왕이라도 되는 날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좋은 정책을 펼 수도 있고, 그들의 노역도 가볍게 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모세는 거절했습니다. ‘믿음으로’란 말은 ‘말씀 때문에’란 말과 동의어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작은 호의나 뇌물도 거절하지 못해 죄의 늪에 빠져듭니다. 세상 사람들의 사소한 제안에도 No라고 거절하지 못함으로써 성도로서의 간증을 다 잃어버립니다. 신문에는 장관직을 거절한 사람의 이야기도 있고, 총리직을 거절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간혹 나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절한 대가를 지불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거절한 것이 아닙니다. 반면 모세는 믿음으로 거절했습니다.

둘째, 믿음으로 모세는 선택했습니다.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택하였으며]  모세는 어쩔 수 없이 정치적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선택했습니다. 이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우리 주님 역시 이 땅에 태어나셨을 때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 아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선택의 문제에서 무너집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선택을 할 수 있게 되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사야 7:14, [그가 버터와 꿀을 먹음으로 악을 거절하며 선을 택할 줄 알게 되리니](사7:14). 버터와 꿀은 성령과 말씀을 예표합니다. 모세는 40년간의 왕궁 생활을 통해 그것은 ‘잠시 동안의 죄의 쾌락들’에 불과함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는 인생의 참된 가치는 그런 편안하고 사치스런 왕궁의 왕자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이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성령과 말씀의 조명없이는 절대 할 수 없는 선택입니다. 영적 성장없이는 도저히 내릴 수 없는 선택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거절하고 무엇을 선택했습니까? 몇 푼의 돈 때문에, 직장 때문에, 학교 때문에, 아이들 때문에, 또는 다른 핑계들을 만들어서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의 초기에는 좋은 것, 선한 것을 택할 줄 알아야 하지만 좀더 시간이 지나면 ‘더 좋은 것을 선택’하고, 좀 더 성숙하면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좋은 것은 그분을 얻기 위해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부활의 권능을 알고, 부르심의 상을 좇아 날마다 자신을 십자가에 온전히 처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악을 거절하고 선을 택할 줄 알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의의 말씀들로 감각들을 단련하여 선악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히5:14). 하나님은 여러분이 좀 더 좋은 것을 선택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이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기를 원하십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셋째, 모세는 믿음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치욕2)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무엇이 참된 가치가 있는가? 어느 것이 더 가치있는가?에 대한 모세의 평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치욕이냐? 이집트의 보화냐? 모세는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esteem). 그는 자신이 이집트의 왕자인 것보다 히브리 백성인 것을 선택했는데, 이는 히브리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치욕이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이라는 것은 믿음의 보상을 바라보는 성숙한 신앙을 엿보게 합니다.

넷째, 모세는 주님의 보상을 믿었습니다. 모세는 이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거절했고, 믿음으로 선택했고, 믿음으로 평가했으며, 믿음으로 보상을 바랐습니다. [이는 그가 /주께서/ 보상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음이라.](히11:26). 여기서 우리는 행동의 동기와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실 상급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것들이 아니라 영원한 것들, 저 하늘의 보화에 애착을 두고, 관심을 두십시오. * 상을 향해 달려가는 바울. 믿음의 경주, 절제. 영광의 왕관...

11-12절을 보십시오. [¶ 모세가 장성(長成)하여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의 무거운 짐을 보더니 어떤 이집트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들 가운데 하나를 치는 것을 보매 그가 이쪽 저쪽을 살펴보다가 사람이 없음을 보고는 그 이집트 사람을 죽이고 그를 모래 속에 감추니라.](11-12). 모세는 드디어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그는 이집트인이 자기 동족을 치는 것을 보고 의분이 일어나 그를 쳐죽이고 모래 속에 암매장해 버렸습니다. 그는 스스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신하여 이집트를 대항했습니다. 모세는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될 것이라는 소명과 믿음이 있었지만 처음부터 일이 틀어졌습니다. 자신의 이런 행동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존경과 일치단결을 이끌어낸 영웅적인 행동으로 인식된 것이 아니라 배척받았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행동을 잘 보십시오. “보더니... 보매... 살펴보다가” 행동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본 것으로 행했습니다. 눈에 보는 대로 행동하는 것만큼 영적 생활을 방해하는 것도 드물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후5:7). 하나님의 일을 육신으로 이룰 수는 없습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다음 날 그가 다시 나가니, 보라, 히브리 사람 둘이 서로 싸우므로 그가 잘못한 자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네 동료를 치느냐? 하매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통치자와 재판관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이집트 사람을 죽인 것같이 나도 죽이려 하느냐? 하니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분명히 이 일이 탄로났도다, 하니라.](13-14). 모세를 향한 백성들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구원하고자 했던 동료 형제들로부터 배척을 받았습니다.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 역시 처음에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주님 역시 처음에는 배척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아무도 모르게 한 일이라고 한 일이 이미 만인이 다 아는 비밀이 되고 말았습니다. 모세는 처음에 하나님의 눈이 아니라 사람의 눈을 피해 한 일이기에 두려움에 사로 잡혔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이때에 파라오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았으나 모세는 파라오의 얼굴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거하며 우물 옆에 앉았더라.](15). 이제 다시 방랑길에 올랐습니다. 모세는 도망자 신세였습니다. 이제 미디안 땅에서 40년을 보냅니다. 모세의 야심찬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그는 비참한 패배의 맛을 보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가 믿음으로 이집트를 버렸다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그는 왕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이집트를 버렸으니 이는 그가 보이지 아니하시는 이를 보는 것같이 하여 견디어 냈기 때문이며](히11:27). 모세는 이집트를 두 번 떠났는데 한번은 출애굽기 2:15에서, 한번은 훗날 이스라엘 백성을 모두 데리고 떠났습니다. 히브리서 11:27에서 말하는 사건은 출애굽의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전에 이집트에서 도망자로 떠난 모세를 사용하셔서 이집트를 버리고 떠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승리를 주시는 주님의 능력이요,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패하고 도망쳤던 일들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바로 그 일에 대해 승리케 해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첫째, 모세의 부모의 믿음입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믿음. 감정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했다.

둘째, 모세의 믿음입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거절하고 선택하고 평가하고, 주님의 보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셋째, 주님은 모세의 일시적 패배를 영구한 승리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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