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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어느 시대나 정복자들은 피정복자를 다루는 정책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상 단 한번도 유대인들을 우대하고, 그들을 보호해 주는 정복자들은 없었습니다. 선민 유대인들은 언제나 박해의 대상이었습니다. 요셉이 살아 있는 동안 잠깐 평안을 맛보기는 했지만 요셉이 죽은지 30년이 지나 가장 극심한 학대를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세상과 연합하거나 세상의 어떤 민족과 동맹을 통해서 평화를 추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위에 계신 하나님과의 화평을 통해서만 땅에서의 평화를 얻을 수 있으며, 하늘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써만 이 땅에서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설정이 틀어지면 이 땅에서의 어떤 방법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의 외교적 노력이나 경제적 번영이나 정치적 안정이나 어떤 것도 평화를 주지 못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그런 시도를 했던 역대 왕들은 모두 비참한 몰락을 맞았습니다. 구약 2000년, 신약 2000년의 역사를 통해 유대인들이 배워야 할 한 가지 교훈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만이 살 길”이란 점이었습니다. 지상에 이런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 단 한 민족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 하에서는 이 땅의 모든 민족이 대적하고, 전쟁을 선포해도 조금도 해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민족이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세상을 거부함으로써 세상에 빛이 되며, 세상과 철저히 분리됨으로써 점점 더 강성해지고, 번성하는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온 세계의 모든 민족들에게 증거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특수한 상황은 오늘날 신자들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거부하며, 세상과 분리되고, 세상을 못박고, 세상에 못 박힌 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살지 않을 때 우리는 평안이나 기쁨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거슬러 사는 것은 분명 박해와 모욕을 자초하는 길이지만 그것이 바로 거듭난 속 사람의 생명력을 더욱 살아나게 하는 길이며, 열매맺는 길입니다. 이런 삶은 소수의 특정한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만이 걷는 길이 아닙니다. 거듭난 성도라면 누구나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예를 온 몸으로 보여 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이집트 왕이 히브리 산파(産婆)들에게 말하더니 그 중 하나의 이름은 십브라요, 다른 하나의 이름은 부아더라. 그가 이르되, 너희가 히브리 여인들을 위하여 산파의 일을 행할 때에 해산대 위의 여인들을 살펴보아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릴지니라, 하였으나](15-16). 파라오는 인간으로서 생각할 수 없는 아주 끔찍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학대하면 학대할수록 번성하는 유대인들을 보고 그는 인종 청소를 결심한 것입니다. 파라오는 히브리 산파들에게 태어나는 아이들 가운데 남자 아이들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런 명령의 배후에는 살인자요, 거짓말쟁이인 마귀의 계획이 숨어 있었습니다. 여자의 씨를 통해 태어날 메시야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것입니다. 히브리 남자들을 제거함으로써 다윗은 물론이요,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까지 막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역사에는 눈에 보이는 역사와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가 있습니다. 파라오가 이스라엘의 남자 아이들을 죽이게 한 것은 보이는 역사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3:15에서부터 이어져 온 여자의 씨에 대한 원수 마귀의 적대감과 그를 사전에 제거하려는 계획은 보이지 않는 영적 역사입니다. 마귀는 수 차례에 걸쳐 메시야의 line을 끊으려는 집요한 시도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태어나셨을 때, 그는 헤롯을 통해 베들레헴과 그 주변 지역의 2살 아래의 모든 아이들을 죽임으로써(마2:16) 그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내던지더라. 용이 막 해산하려고 하는 그 여자 앞에 서서 여자의 아이가 태어나면 곧 삼키고자 하더라.](계12:4).

헤롯의 정책은 드러난 역사이지만 그 이면에는 헤롯을 통해 메시야를 죽이고자 하는 마귀의 계략이 숨어 있었습니다. 곧 이어서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전 꼭대기로 데려가 그를 뛰어내려 자살을 하도록 유혹했습니다(마4:6). 거기에서도 실패하자 사람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낭떨어지로 밀어서 죽이도록 했습니다(눅4:29). 마귀는 사람들을 충동해서 예수님께 돌을 던져 죽이려고 시도하기도 했습니다(요8:59). 강한 폭풍과 파도를 보내어 예수님을 물에 빠뜨려 죽이려고 시도하기도 했습니다(막4:37-39). 결국 마귀는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빌라도, 성난 군중들을 동원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철저히 여자의 씨에 대한 적대감과 그를 제거하려는 마귀의 음모와 계획이었음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귀가 알지 못했던 것은, 알았다면 믿지 못했거나, 믿었다면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것은 여자의 씨, 약속된 메시야의 죽음은 바로 사망(죽음)을 죽이는 것이란 사실이었습니다. 마귀는 “죽음의 권세”를 지닌 자입니다. 죽음의 권능은 마귀가 가진 최고의 권능이요, 최고의 힘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무엇이든지 다 죽는다는 것은 다 마귀의 권능아래 있다는 증거이며, 그가 가진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말해 줍니다.

생명의 창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임으로써 그는 자신이 가진 죽음의 권능을 최고도로 발휘했습니다. 마귀는 죽이지 못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피조물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마귀를 멸하셨습니다. 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살과 피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에 참여하셨으니 이것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또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 내려 하심이라.](히2:14-15). 골리앗이 다윗에게 자신의 칼에 자신이 목이 끊어졌듯이 마귀는 자신이 가진 죽음의 권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임으로 ‘죽음’을 사망에 쳐해 버렸습니다.

힘없는 민초요, 일개 산파로서 이런 왕명을 받았을 때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은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17절입니다.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집트 왕이 명한 대로 하지 아니하고 사내아이들을 살려 주니라.](17). 산파들은 사내 아이들을 죽이라는 파라오의 명령보다 생명의 창시자이신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십브라’와 ‘부아’란 산파들은 평범한 일개 여인의 몸이지만 하나님을 두려워 함으로써 세상 누구도 거역하지 못하는 왕의 악한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이 여인들은 여느 믿음의 영웅들 못지않는, 비교를 불허하는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들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주를 두려워 하면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주님을 두려워할 때 우리는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명히 압니다. [[주]의 두려우심은 깨끗하여 영원토록 지속되고 [주]의 판단들은 진실하고 다 의로우니](시19:9).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잠언 8:13에 그 정의가 내려져 있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곧 악을 미워하는 것이니라.](잠8:13). 산파 십브라와 부아는 주를 두려워했기에 차마 악을 행하라는 파라오의 명령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잠언 16:6, [긍휼과 진리로 불법이 정결하게 되며 [주]를 두려워함으로 사람들이 악을 떠나느니라.고 말합니다.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집트 왕이 명한 대로 하지 아니하고 사내아이들을 살려 주니라.](17). 주님을 두려워하는 2명의 산파로 인해 파라오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두려워 하는 평범한 아녀자들의 믿음이 마귀의 계략을 무위로 돌렸습니다. 잠언 21:30에 [어떤 지혜나 명철이나 계략으로도 [주]를 대적하지 못하느니라.](잠21:30). 세상을 거슬러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이 말씀은 얼마나 큰 힘과 위로를 줍니까? 누구라도 하나님을 두려워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자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십니다. 주를 두려워할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 성경에서 주를 두려워할 때 얻게 되는 성도의 유익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에서 주님을 두려워함에 관한 설교가 사라지고, 성도들 역시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풍조가 만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히브리 산파들이 지녔던 이런 실제적인 ‘두려움’을 지니지 못한다면 삶 가운데서 악은 결단코 피할 수 없으며, 결코 우리를 향해 눌러 오는 세상의 조류를 거부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당한 명령, 비성경적인 죄악에 대해 NO라고 할 수 없는 사람은 이미 성경대로 믿는 성도의 대열에서 백만 마일 이상 떨어진 사람입니다. 주님은 마땅히 두려워하심을 받아야 할 분이십니다. 특히 이런 집회에서는 더욱 주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시편 89:7 [하나님은 성도들의 집회에서 크게 두려워할 분이시오며 그분 주위에 있는 모든 자가 존경할 분이시니이다.](시89:7).

1.  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지식의 시작이며, 지혜의 시작입니다. 잠언 1:7,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거늘 어리석은 자들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1:7).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요, 거룩한 것들을 아는 것이 명철이니](잠9:10). 지식과 지혜는 주를 두려워함으로 시작됩니다. 고로 주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지식과 지혜의 입문 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것입니다. 20세기의 선지자로 불렸더 A.W Tozer 목사님이 말한대로 ‘시작이 없으면 끝도 중간도 없습니다.’ 옳은 것에 Yes, 틀린 것에 No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지식이며, 지혜입니다. 정의와 결부되지 않는 지식과 지혜는 계략이요, 모략에 불과합니다. 이 점에서 히브리 산파들은 참된 지식과 지혜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머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었으며, 위기의 순간에 결연한 행동으로 나타나는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 한 믿음의 결과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히브리 산파들과 달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사람들을 더 두려워 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조차도 사람을 두려워함으로써 마귀의 올무에 빠져 세 번이나 주를 부인하고, 저주하며 맹세까지 했습니다.

2. 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기도 생활에 능력을 줍니다. 주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여러분이 위기에 처할 때, 멸망과 패망의 순간에, 정말 위기의 때에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육체로 계시는 동안 그의 기도 응답 비결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임을 밝혀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육체로 거하는 동안에 자기를 죽음으로부터 능히 구원하실 분에게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고 또 친히 두려워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들어 주셨느니라.](히5:7).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기도 응답의 필수 요소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 점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요령을 터득하고자 애를 쓰지만 정작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솔로몬을 말하기를, [그때에 그들이 나를 부를 터이나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그들이 아침 일찍 나를 찾을 터이나 그래도 그들이 나를 발견하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지식을 미워하고 [주] 두려워하기를 택하지 아니하며](잠1:28, 29).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흔히 사람들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때, “얼마나 사람이 우습게 보였으며, 얼마나 사람을 업신여겼으면!” 하며 불쾌해 합니다.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성도들을 향해, “너희가 얼마나 내가 우습게 보였으면 내 말을 흘려 버리고, 무시하느냐?”고 책망하십니다. 내 말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에게 내가 무엇을 해 줄 수 있습니까? 이는 기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3. 주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당연히 악을 떠나며, 악을 미워합니다. [네 눈으로 보기에 지혜롭게 되지 말지어다. [주]를 두려워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잠3:7), [긍휼과 진리로 불법이 정결하게 되며 [주]를 두려워함으로 사람들이 악을 떠나느니라.](잠16:6), [[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곧 악을 미워하는 것이니라.](잠8:13). 우리는 히브리 산파들을 통해서 이 진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파라오의 악한 명령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죽음이 내게 돌아온다 하더라도 주님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을 떠날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혼(魂)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혼과 몸을 능히 지옥에서 멸하시는 분을 두려워하라.](마10:28). 우리는여기서 국가 명령이나 이 세상의 법이 하나님의 법과 어긋날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법에 순종하되 하나님의 법을 불순종하게 하는 모든 법에 대해 No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반정부 투쟁이나 반국가 시위를 벌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법이 상위법이며,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세상이 주는 모든 불이익과 박해는 그대로 감수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하나님은 더욱 많은 상급을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4. 주를 두려워하면 지상에서 얻는 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장수입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사람의/ 날들을 길게 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햇수는 짧게 되느니라.](잠10:27). 인간의 장수 비결을 단지 스포츠 과학이나 의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훨씬 더 과학적입니다. 실제로 미국의 갤럽 조사 발표에 따르면 불신자보다는 신자가 더 오래 살며, 평신도보다는 목회자들의 수명이 길고, 캐톨릭 사제보다는 개신교 목사들의 수명이 훨씬 길다는 통계가 있었습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는 사람보다 훨씬 더 오래 삽니다.

5. 주를 두려워하면 큰 확신을 얻게 됩니다. [[주]를 두려워하면 강한 확신이 있나니 그분의 자녀들에게는 피난처가 있으리라.](잠14:26). 믿음의 큰 확신은 주님을 두려워 할 때 자동적으로 따라 오게 됩니다. 성도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 확신이 없는 경우는 주로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첫 번째요, 믿음의 근거가 되는 말씀에 대한 지식의 부족이 두 번째입니다. 우리는 히브리 산파들이 의심과 불신 가운데 순종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분명 강한 확신 가운데 파라오의 명령을 거부하고 사내 아이들을 살렸습니다. 우리는 이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6. 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생명의 원천입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사망의 올무들에서 벗어나게 하는 생명 샘이니라.](잠14:27). 잠언은 생명 샘에 대해 조명을 주는 몇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본문에 나온 것처럼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생명 샘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죽음의 길로 달려가며 생명을 구합니다. 진정으로 사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한 것처럼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잠14:12, 16:25).

7. 주를 두려워하는 것, 지혜로운 자의 법, 의로운 자의 입은 생명 샘입니다. [지혜로운 자의 법은 사망의 올무들에서 벗어나게 하는 생명 샘이니라.](잠13:14). [의로운 자의 입은 생명 샘이로되 폭력이 사악한 자의 입을 덮느니라.](잠10:11). 히브리의 산파들은 주를 두려워했기에 많은 생명을 살려 주는 생명 샘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생명 샘의 근원이십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주님은 그 배에 생수의 샘을 주사,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십니다.

8. 주를 두려워하면 만족을 줍니다. 주를 두려워하면 부족함이 없습니다. [오 [주]의 성도들아, 너희는 그분을 두려워하라. 이는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로다. 젊은 사자들은 부족하여 굶주릴지라도 [주]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 34:9-10). 주를 두려워함은 기도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주님으로부터 공급받은 가장 좋은 방법이 됩니다. 실제로 히브리 산파들에게 주님이 주신 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었고, 그들의 믿음이 후대에 이렇게 언급되며 설교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당대에도 주님의 복을 받아 그들의 가정이 바로 섰습니다(21).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을 두려워 했기 때문에 얻어진 결과였습니다.

9. 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생명으로 이끕니다. [[주]를 두려워함이 생명에 이르게 하나니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는 흡족히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리라.](잠19:23). 이미 앞에서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생명 샘이란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면 사람들에게 죽을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순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마귀와 세상이 아무리 나를 대적해도 죽지 않습니다. 지금 성경이 말하는 것은 일반적인 진리입니다. 특수한 상황에서 주님은 많은 주의 대언자들 가운데 하나같이 죽음을 허락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주님을 두려워함으로써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되고, 좋은 것을 가장한 세상의 모든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게 됩니다. 만약 아담과 이브가 주를 두려워했다면 그들은 결코 재앙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삼손이 주님을 두려워했더라면, 롯이 주님을 두려워 했더라면 그들의 인생은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히브리 산파들은 주님을 두려워함으로 파라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흡족하게 지냈고, 재앙을 당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10. 주를 두려워함으로 부와 명예, 생명을 얻습니다. [겸손히 행하고 [주]를 두려워하면 재물과 명예와 생명이 오느니라.](잠22:4). 성경은 말합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진정한 축복입니다. [비록 죄인이 백 번 악을 행하고 그의 날들이 길게 된다 할지라도 내가 확실히 아노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 곧 그분 앞에서 두려워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전8: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조국의 교회들에서, 이 땅의 많은 교회들에서 축복의 비결을 설교하고 있지만 진정한 축복의 비결이 바로 주님을 두려워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두려워함으로서 우리는 지혜와 지식을 얻을 수 있고, 장수를 누릴 수 있고, 생명 샘을 지니게 되고, 기도가 응답되고, 큰 확신을 가지게 되며,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을 있으며, 흡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않고, 재물과 명예가 따라오며, 다 잘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오중 축복이 아니라 10중 축복이 넘는 복이라 할 것입니다.

11. 주님은 주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들을 위해 선한 것들을 쌓아 두셨습니다. [오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위하여 주께서 쌓아 두신 주의 선하심 곧 사람들의 아들들 앞에서 주를 신뢰하는 자들을 위하여 베푸신 그 선하심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시31:19).

12.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은혜를 베푸시고, 돌보시며, 불쌍히 여기십니다.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것같이 [주]께서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나니](시103:13). 그래서, 더 많은 은혜를 베푸시며, 돌보시는 것입니다. [[주]가 말하노라. 오직 가난하고 영으로 통회하며 내 말에 떠는 자는 내가 보살피느니라.](사66:2). 주님은 히브리의 산파들에게 선을 베푸셨으며, 불쌍히 여기셨고, 보살피셨습니다.

13. 무엇보다도 주님은 그 산파들을 통해 기쁨을 취하셨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의 금, 은, 보화에 즐거워하시는 분이십니까? 아니면 큰 교회 건물에 즐거워하시는 분이십니까? 주님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악을 행하지 않고 파라오의 명을 거부한 히브리 산파들 같은 그런 사람들을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주]는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들과 자신의 긍휼에 소망을 두는 자들을 즐거워하시는도다.](시147:11).

우리는 여기서 성경을 깊이 있게 보는 안목을 길러야 합니다. 여자의 씨를 말살하기 위해 마귀는 세상의 절대 권력자인 파라오를 사용했습니다. 파라오는 마귀가 내민 비장의 카드였다면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씨를 보호하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약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산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강하고, 지혜롭고, 지위가 높은 자들을 택하셔서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약하고, 어리석고, 천해 보이는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파라오와 같은 부류가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히브리 산파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18,19절을 보십시오. [이에 이집트 왕이 산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사내아이들을 살려 주었느냐? 하니 산파들이 파라오에게 이르되,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들 같지 아니하고 활기가 넘쳐서 산파들이 자기에게 오기도 전에 해산하나이다, 하매](18,19). 산파들은 파라오의 질문에 지혜롭게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일견 거짓말처럼 보이지만 산파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습니다. 실제로 히브리 여인들은 아이를 낳는데 산파의 도움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언약대로 씨들을 번성케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산파들을 선하게 대우하시니 백성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게 되었더라.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가정을 세워 주셨더라.](20-21). 파라오의 학대 정책이 실패로 돌아 간 후, 산파를 통한 유아 살해 계획도 실패로 끝나고 오히려 히브리 백성은 그 수가 늘어나고 강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두려워 한 사람들을 어떻게 복주시는가?에 대한 실례를 바로 보여 주셨습니다. 뿌린대로 거두리라는 법칙이 그대로 성취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성도들이 행한 의로운 행실에 대해 잊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보상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는 것과 또 그분께서 자신을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니라.](히11:6).

여기서 하나님께서 가정을 세워 주셨다는 말은 사무엘하 7:11, 열왕기상 2:24절 말씀으로 비추어 볼 때, 산파들에게 남편들을 주고, 자식들을 많이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자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삼상2:30).

22절을 보십시오. [이에 파라오가 자기의 온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강에 던지고 딸은 살려 주라, 하였더라.](22). 파라오는 이제 백성들에게 명령하여 히브리 여인들이 낳는 사내 아이를 강에 던지라고 명령했습니다. 파라오는 계속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히브리 사내 아이들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습니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이 일은 전적으로 마귀가 기획하고 실행하는 마귀의 작품입니다. 그러나, 히브리 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사내 아이들은 다 죽지 않았습니다. 악한 일에 대한 징계가 속히 집행되지 않으므로 파라오 같은 악인들이 계속해서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자신이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데 쏟아 붓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들은 어느날 갑자기 멸망할 것이며, 죄 가운데 죽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파라오의 이런 광적인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가 상상도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이집트 땅에 태어나게 하셨고, 자라나게 하셨습니다. 이 내용은 2장에 자세히 나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 한 두 히브리 산파의 믿음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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