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출애굽기(II)

02. 너희가 종살이를 아느냐?

말씀: 출애굽기 1:1-21
요절: 출애굽기 1:14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는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련과 역경을 딛고 우뚝 일어선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자력(自力)으로 일어 설 수 없을 때, 외부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빈곤의 악순환’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는 비단 경제적인 문제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죄의 굴레는 더 벗어날 수 없는 악순환”의 연속입니다. 빈곤의 악순환을 벗어나기 위해서 외부의 자본이 투입되는 것이 필요하듯이, 죄의 굴레를 벗어나는데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보혈의 능력이 내 안에 투입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성령의 능력이 내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저는 저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아니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경제적인 문제나 자신의 외모, 능력, 환경에 대해서는 일체의 만족하는 비결을 배우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주리고 목마른 불만족의 상태를 유지하기를 소망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허기지고, 목마른 사람이 되셔서 틈나는 대로 말씀을 읽고, 채움 받기를 갈망하십시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그렇게 주님을 찾고, 갈망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허기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대신 육신의 정욕을 채우지 못해 헐떡이며, 죄와 탐욕으로 눈빛이 단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종이 되어 보셨습니까? 죄의 노예로 고달픈 삶을 살아 보셨습니까? 만약 그런 경험이 없다면 자유의 소중함, 구원의 기쁨이 그리 클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에 앞서 그들을 400년간이나 종살이를 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종살이를 통해서 진정한 구원의 기쁨과 해방의 감격을 맛볼 수 있습니다. 가혹한 종살이를 통해서 구원자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들이 무엇 때문에 4대에 걸쳐 400년의 종살이를 하게 되었을까? 하나님은 왜 그런 환경을 만드셨을까?란 의문을 가집니다. 우리는 이 답을 얻기 위해서 먼저 창세기 15:13-16을 보아야 합니다. [그분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확실히 알지니 네 씨가 자기들의 땅이 아닌 곳에서 나그네가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이 사백 년 동안 네 씨를 괴롭히리라. 또한 내가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심판하리니 그 뒤에 그들이 큰 재물을 가지고 나오리라... 그들은 네 세대만에 여기로 다시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불법이 아직 충만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하시더니](창15:13-16).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이미 살고 있는 아모리 족속의 불법이 충만하지 않아서 심판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죄악과 불법이 충만해 질 때 그들을 심판하여, 그 땅에서 쫓아내고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실 것입니다. 아모리 족속의 불법이 가득찰 때까지 남은 시간은 4대에 걸친 400년이었습니다. 이 원리는 지금 신약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이 다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온전히 다 차지하려면 이방인들의 죄악이 가득 차야 합니다. 로마서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신비에 대해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곧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부분적으로 눈멀게 된다는 것이라.] 이방인들의 죄악이 가득 찰 때까지는 몇 대에 걸쳐 몇 년인지 구체적인 숫자로 계시되어 있지 않지만 거의 다 찰 때가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바울은 분명히 “이방인들의 충만히 이르기까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에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실 때 참고 기다리셨다가 그 죄악이 차면 엄하게 징계하십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은혜가 충만해야 할 성도가 주의 진노로 충만하다면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400년 동안이나 남의 땅에서 종살이를 하게 하신 것은 국가를 이룰만한 민족을 만드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 한 명을 부르셔서, 이삭, 야곱을 거쳐 12아들이 났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들의 수는 전쟁을 할 수 있는 남자(20세 이상)만 60만 3천 5백 5십 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인구 총수는 200만 명이 넘었을 것입니다. 이들에게 박해가 가해지지 않는다면 이들은 이집트 사람들과 동화되어 이스라엘이란 민족이 지상에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백성들과 전적으로 구별되는 거룩한 백성들을 만드셨습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을 세상 사람들과 전적으로 구별되는 거룩한 백성으로 자신의 소유로 삼으시고자 환란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을 주고, 그들을 번성케 하기 위해서는 이런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단지 이런 목적 때문에 죄도 없는 사람들을 이집트의 노예로 고생하게 만들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아버지 야곱이나 이삭,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장자 르우벤은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고, 유다는 며느리에게 씨를 주지 않으려고 했고,자신 또한 다말을 창녀인줄 알고 취했습니다. 그들은 형제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는다는 이유로 그를 살해하고자 했다가, 노예로 팔아 버렸고, 아버지에게는 짐승에게 물려 죽었다고 거짓말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살인자요, 간음자요, 거짓말쟁이들로서 마땅히 심판 받아야 했습니다. 그들이 뿌린 씨는 반드시 거두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극심한 이집트의 종살이입니다. 형제들은 요셉을 이방인에게 팔아버렸지만 요셉으로 인해 구원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어 죽여 버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행한 죄에 대한 용서와 회개없이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로마의 손에 예수 그리스도를 넘겨줌으로써 하나님은 로마 사람들의 손을 빌어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요셉을 이집트에 팔아 버린 그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며 심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신구약을 관통하는 ‘뿌린대로 거두는 하나님의 법칙’을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1을 보십시오. [이제 야곱과 함께 각각 자기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에 들어온 이스라엘 자손의 이름이 이러하니라.](1). 야곱의 전 가족이 속박의 땅으로 들어 왔습니다. 이름에 주목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새롭게 지어주신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아니라 육신의 이름 야곱(Jacob)이 쓰였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아버지 이스라엘이 아니라 아버지 야곱과 함께 속박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여기에 예외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버지 아담과 함께 하나님이 주신 에덴을 떠나 속박의 땅 세상으로 들어 왔습니다. 예외는 한 명도 없습니다. 약속의 땅을 떠나는 야곱은 하나님께서 다시 자신의 후손들을 취하셔서 이곳으로 데려다 주실 것을 믿고 소망하며 이집트로 갔습니다. 우리의 아버지 아담 역시 하나님께서 구속해 주실 것을 믿고 소망하며 에덴을 떠났습니다. 2-5절은 야곱의 열 두 아들의 이름입니다. 야곱의 허리에서 난 수만 해도 무려 70명이었습니다(출1:5,7; 신10:22; 행7:14참조). 6절을 보십시오.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세대가 다 죽었더라](6). 이로써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4대가 흘렀습니다. 요셉은 30세에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창41:46), 110세에 죽었습니다(창50:22, 26). 요셉은 두 아들을 낳았고, 손자, 증손자까지 보고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요셉이 살아 있을 동안은 어렵지 않게 살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약속의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다산하고 번성하게 불어나 번성하며 심히 강대하여 그 땅이 그들로 가득하게 되었더라.](7).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창12:2), 야곱에게 약속하신 대로 행하시고 계십니다. 창세기 46: 3, [그분께서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 곧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이집트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내가 거기에서 너로부터 큰 민족을 만들 것임이라.](창46:3). 하나님은 약속하신 말씀에 대해서 신실하십니다. 주님은 설령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 않는다 할지라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들을 행하시며 지키십니다. 70명에서 출발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산하고 번성하게 불어났습니다.

이곳 남가주(southern California)에 멕시칸들이 불어나는 것보다 더 번창했습니다. 얼마나 불어났는지 고센 땅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촌이 건설된 것 뿐만 아니라 이곳이 이집트 땅인지 이스라엘 땅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주님은 [내가 거기에서 너로부터 큰 민족을 만들 것임이라] 하신 말씀의 성취입니다. 70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로 온지 약 100년이 지나 이렇게 놀랍도록 불어났다는 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게서 복을 주셔서 이스라엘 여자들은 불임 여성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신명기 7:14에 [네가 모든 백성들보다 더 많이 복을 받을 받아 너희 가운데 남자와 여자와 너희 가축의 수컷과 암컷에 수태하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며](신7:14)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약속을 지키십니다. 주님은 신실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믿지 아니하여도 그분은 항상 신실하시니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느니라.](딤후2:13).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을 주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은혜의 시대를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보다 훨씬 더 크고 귀한 약속들을 받았습니다. 베드로후서 1:4, [곧 주께서 이것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사 너희로 하여금 이 약속들을 힘입어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셨느니라.](벧후1:4).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붙들 때 승리와 복을 얻었듯이,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약속들을 붙들 때 더 큰 승리와 영적인 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주의 약속의 말씀들을 붙드십시오. 그 말씀 위에서 안식하십시오. 주님은 항상 신실하십니다.

8절입니다. [이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이집트를 다스리더니](8). 여기서 새 왕(new king)은 이집트 왕조의 후대 왕이 아니라 다른 왕조의 왕이었습니다. 스데반은 말하기를, [마침내 요셉을 알지 못하는 다른 왕이 일어나매](행7:18)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다른”(another)란 말은 국적이 다른 왕이란 말입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려면 이사야 52:4을 보아야 합니다. [또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전에 내 백성이 이집트로 내려가 거기에 머물렀고 그 아시리아 사람이 까닭없이 그들을 학대하였도다.](사52:4). 이집트 왕조의 왕이 아니었기 때문에 요셉이 죽은지 채 30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앗시리아 사람은 마지막 날에 유대인들을 핍박하는 적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오늘날 성도들 역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할 수있습니다. 전에는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해 주던 상사나 동료들이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이 상사로 동료로 올 수 있습니다. 나를 모르는 사람, 나의 신앙을 모르는 새로운 사람이 나를 다스리는 위치에 올 때 우리는 박해와 모욕을 각오해야 합니다.

9절입니다. [그가 자기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백성 곧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9). 여기서 주목하실 것은 그 백성(the people)이 아니라 자기 백성(his people)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앗시리아인 왕은 지배 계층으로 있는 앗시리아 백성들에게 말한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수나 세력이 벌써 본토 이집트 사람 다음으로 많았음을 말해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앗시리아 백성보다 더 많다는 의미입니다. 22절에서 파라오는 ‘자기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앗시리아 출신의 파라오는 만약 전쟁이 났을 경우 유대인들이 본토 이집트인들과 연합하여 자신들을 대적할 것을 매우 걱정하고 두려워 했습니다.

10절, [자, 우리가 이들을 지혜롭게 다루자. 두렵건대 이들이 번성하고 또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원수들과 연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였더라.](10). 파라오는 이스라엘을 선하게 대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선택하신 백성이며, 이들에게 잘 대해 주어야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적하는 것은 단지 그들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며, 그들을 핍박하는 것은 하나님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리니 네 안에서 땅의 모든 가족이 복을 받으리라, 하셨더라](창12:2)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이 약속은 신, 구약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지금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들을 대적하는 행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예는 복음서나 서신서에 자주 등장하는 진리입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혜롭게 다루자라고 말했지만 스데반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 이 왕이 우리 친족들을 교활하게 다루고...](행7:19). 세상 사람들의 지혜는 바로 교활과 같은 말입니다. 모세는 파라오가 말한 지혜를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이집트 사람들이 우리를 악하게 취급하고 우리를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힘든 노예 일을 시키므로](신26:6). 파라오가 말한 지혜롭게는 바로 “악하게”와 동의어입니다.

지혜가 무엇입니까? 주님을 두려워하는 지혜의 시작입니다(잠9:10). 악을 미워하는 것이 지혜입니다(잠8:13). 파라오는 이런 지혜가 아닌 다른 지혜를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활한 것을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악을 지혜라고 믿습니다. 죄를 지혜라고 자랑합니다.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교활하게 다루는 지혜는 땅에 속한 것이며, 마귀적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3:14-17,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며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에 속한 것이요, 관능(官能)적인 것이요, 마귀에게 속한 것이니 이는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기 때문이라.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순수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부드럽고 대하기 쉬우며 긍휼과 선한 열매로 가득하고 차별과 위선이 없나니](약3:14-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혜를 추구하되 위로부터 난 지혜, 하나님의 지혜를 얻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 공부를 하면 할수록 싸움과 다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잘못된 성경 공부입니다. 교회 생활을 하면 할수록 분란이 있고, 시기가 있고, 다툼이 있고, 자랑을 늘어놓는 것 역시 마귀의 지혜일 뿐입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리를 거슬러 그들을 탄압할 정책을 입안하면서 ‘지혜로운 결정’이라고 믿었습니다. 성도들은 지혜인지, 교활인지, 악한 것인지 구분도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죄악을 지혜라고 합리화해서는 더더욱 안될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들이 작업 감독들을 이스라엘 자손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주어 괴롭게 하더니 그들이 파라오를 위하여 국고 도시 곧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니라](11). 본격적인 이스라엘 탄압 작전이 국가 정책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파라오의 악함을 강조한 말만은 아닙니다. 이 결정의 이면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각성과 징계의 손길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완전히 동화되어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저물어 가는 이집트의 이스라엘을 깨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선한 손길이 바로 파라오의 박해였습니다. 마귀는 때로 훌륭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요, 징계의 손길입니다. 이집트 땅에 이주해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은 급속도로 약화되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믿음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점점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떨어집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야곱은 이삭의 믿음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요셉을 제외한 야곱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믿음의 먼발치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12 아들의 아들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손자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파라오의 이스라엘 백성 노예 정책이 시작되고,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공역을 맡겼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파라오의 이런 학대 정책은 비단 그 때문만이 아니라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전 세계에 광범위하게 자행되어 왔습니다. 이 정책은 앞으로 적그리스도의 통치하에서 다시 한번 전 세계적으로 시행될 것입니다. 파라오의 이런 정책은 교회를 향한 마귀의 정책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세상에서 편하게 살 것을 보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기쁨과 평안과 감사하는 마음을 주셨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땀과 고통과 눈물로 주님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눈물과 금식과 고통이 없이 주님을 섬겼던 주의 대언자(선지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라고 기근이 들지 않았습니까? 그들에게 박해가 없었습니까? 사도들이 즐비한 교회였지만 여느 교회보다 힘든 교회였으며, 여느 교회보다 핍박이 많았던 교회였습니다. 오늘날 축복신학, 성공 신학, 은사주의 교회들의 외침은 성경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별천지의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이라고 해서 늘 웃으며 주님을 섬겼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눈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이 땅에서 눈물과 고통없이 주님을 섬길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세상과 타협하거나 세상과 동화되거나 세상과 일치하거나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때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당연히 고통의 시련입니다. 파라오가 이스라엘을 박해했듯이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합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 가운데 살면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요한복음 15:18,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는 줄 너희가 아느니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 것을 사랑할 것이라.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며 도리어 내가 세상에서 너희를 택하였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 하느니라.](요15:18-19). 오늘날 성도들과 교회가 생명력을 잃어가고 영적인 능력이 사라지고 대신 온갖 비리와 죄가 독버섯처럼 피어나는 것은 바로 고통과 눈물이라는 신앙의 노정을 포기하고 십자가의 길 대신 성공과 축복이라는 세상의 대로를 걷기 때문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그들이 더욱 번성하고 증가하므로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인하여 근심하며](12). 특이한 현상은 학대를 받을수록 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번성하고 증가합니다. 성경은 이러 역설의 진리로 가득한 책입니다. 한 알의 밀 알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자기 생명을 버리는 자는 얻습니다. 십자가를 지면 부활의 영광을 맛봅니다. 누구든지 높아지고자 하면 낮아져 섬겨야 합니다. 자기를 낮추면 높아집니다. 고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영광의 비중은 점점 커집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큽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됩니다. 성경의 이런 진리는 세상과는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거슬러, 세상과는 정반대의 길로 살도록 정해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런 역설의 진리를 마음 가운데 깊이 새겨 세상과 반대의 길을 걷기를 결단해야 합니다. paradox의 진리!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그들이 더욱 번성하고 증가하므로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인하여 근심하며](12). 파라오는 지혜롭게 처리한다는 것이 오히려 근심을 쌓는 일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더욱 번성하고, 세상과 분리되고, 그들의 혼은 하나님을 부르짖게 되며, 세상을 미워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계획은 아무리 좋아도 형통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파라오의 계략들을 무효로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33:10, [[주]께서 이교도들의 계획을 무산시키시며 만백성의 계략들을 무효로 만드시는도다.](시33:10). 사람의 계획은 주님의 뜻 안에 세워질 때만 유효합니다. 잠언 19:21, [사람의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을지라도 오직 [주]의 뜻만이 서리라.](잠19:21).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하고 계획을 세운다 하더라도 주님의 허락하심이 없다면 그것은 헛된 계략에 불과합니다. 파라오의 이스라엘 학대 정책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그들이 더욱 번성하고 증가하므로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인하여 근심하며](12). 하나님 앞에서는 마귀라 해도 자신의 계획대로 다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욥기에서 우리는 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 앞에서 욥의 입에서 하나님을 저주가 나올 수 있게 할 수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이렇게만 하면 욥은 주의 면전에서 주를 저주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두 번이나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마귀는 욥을 철저히 학대하고, 자신의 계획대로 모든 일을 수행했지만 욥의 입에서는 찬양과 감사가 나왔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도들을 향해서는 마귀는 자신의 뜻을 수행해도 그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살아 있는 예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그 가운데서 이루시고 계십니다. [[주]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분의 마음의 생각들은 모든 세대에 이르리로다.](사33:11). 파라오는 “우리가 ... 지혜롭게 다루자”라고 말했지만 그 지혜는 어리석은 지혜였습니다. 주님은 세상 지혜를 어리석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3:19,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하나님께는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이요, 또 기록된바, 그분께서 지혜로운 자들을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신다, 하였고], 고린도전서 1:19, [기록된바,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무너뜨리고 분별 있는 자들의 명철(明哲)을 쓸모 없게 만들리라, 하였으니](고전1:19).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그들이 더욱 번성하고 증가하므로] (12). 이 말씀은 초기 교회사에서도 그대로 입증된 진리입니다. 기독교는 태평성대에 부흥한 것이 아니라 박해의 시기에 부흥했습니다. 순교자의 피가 흐르면 흐를수록 그 수는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 번성하고 증가했습니다. 로마의 10차례 대박해는 기독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만들었습니다. 한국의 근대 초기 기독교 박해는 한국을 세계적인 기독교 성장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오히려 박해의 위협이 사라짐으로써 기독교는 급격히 변질되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있습니다. 박해의 순간에는 어떤 이단도, 은사주의자들도 발붙이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과 복음의 순수한 은혜, 말씀의 힘만이 성도들을 지켜 주기 때문입니다. 박해의 불꽃이 거세면 거셀수록 성도의 신앙은 순결해지고, 그 불꽃만큼이나 뜨거워집니다. 우리 개인의 영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대와 조롱과 박해가 나에게 닥칠 때 나의 신앙은 점점 더 하나님을 향해 순수해지고 뜨거워집니다. 박해는 세상과의 자연스런 분리를 가져옵니다. 고통과 핍박은 하나님의 말씀을 찾게 합니다. 포로 수용소에 갇힌 크리스천 죄수들은 절대 은사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절대 방언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갈구합니다. 다윗도 이런 자신의 체험을 기록하기를,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길을 잃었사오나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시편 119:75,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하오니 이로써 내가 주의 법규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5).

13-14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더 엄격히 섬기게 하고 고된 노예생활로 그들의 삶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는 일과 벽돌 굽는 일과 들에서의 온갖 섬기는 일이라.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섬기게 한 일들이 다 가혹하였더라.](13-14). 탄압은 점점 거세어졌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한계 상황에서 우리는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혹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들 수 있는 깃발이 있습니다. 목숨을 걸어도 조금도 아깝지 않는 진리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땅에서 고통으로 신음하고 부르짖을 때 그 고통 소리는 하늘의 하나님께 올라갑니다. [.... 이스라엘 자손은 노예 생활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노예 생활로 인하여 부르짖는 그들의 소리가 올라와 하나님께 이르니라.](출2:23).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죄로 고통받아 죽어 가는 혼들의 탄식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무신론자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어떤 불신자들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구원받았지만 죄로 인해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는 형제들의 신음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옥고를 치르는 형제들, 몸이 아파 병원에 있는 형제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혼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몸의 고통은 누구나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굶고 헐벗고, 주리고, 아프고...이런 것들은 몸의 고통입니다. 히브리서 13:3, [결박 중에 있는 자들을 기억하되 그들과 함께 결박당한 것같이 기억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역경 당하는 자들을 기억하라.](히13:3).

이집트에서 총리가 된 요셉의 초청으로 가족 이민을 왔던 야곱의 일가족들은 크게 번성하였지만 노예로 전락되었습니다. 삶은 괴롭고, 일들은 다 가혹했습니다. 이는 죄로 인해 세상을 살아가는 죄인들의 모습이나, 죄로 인해 육신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나, 세상 아래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습이나 매 한 가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런 어려움은 영광스런 승리의 전주곡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고통은 절망과 허무 그 자체입니다. 신앙이 없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이런 모든 고통과 학대, 극심한 박해는 새로운 신앙의 꽃을 피우는 밑거름이요, 자양분이 됩니다.

여러분은 종살이를 아십니까? 우리 중에는 아무도 그런 경험을 해 보신 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살기 좋은 세상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신앙으로 인한 박해도 없습니다. 고로 믿음의 단련도 없습니다. 어느덧 우리의 속 사람은 생기를 잃고 있습니다. 마치 여름날에 늘어진 엿가락처럼 축 늘어진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음을 다 잡을 때입니다. 세상을 거슬러 벌떡 일어나 일을 해야 할 때입니다. 세상을 못박고, 나도 세상에 못 박힌 삶을 살 것을 결단해야 합니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고통은 나의 신앙을 순수하게 하는 용광로와 같습니다. 세상의 박해는 나의 믿음을 강하게 키워주는 자양분입니다. 고난받는 일은 말씀을 배우게 하고 지키게 하는 귀한 보약과 같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첫째, 주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둘째, 학대할수록 번성한다- 역설의 진리

셋째, 세상 지혜는 교활하고 악하다.

넷째, 고난은 믿음의 성장에 자양분이다.

다섯째, 노예의 해방은 구출자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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