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2002년 12월 22일- 출애굽기        




출애굽기(XII)




말씀: 출애굽기 4:9-12

요절: 출애굽기 4:11




12. 누가 사람의 입을 만들었느냐?




주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 줄 두 가지의 표적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세 번에 걸쳐 믿음의 확신을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출애굽기 3:16에서, [그들이 네 음성에 귀를 기울이리니...](출3:16)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막대기의 표적을 행하게 하신 후에 4:5에서,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 조상들의 [주]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출4:5)고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품속에 넣은 손이 문둥병에 걸렸다가 다시 깨끗해지는 표적을 통해 [...나중 표적의 소리는 믿으리라.](출4:8)고 확신을 더 해 주셨습니다. 이 정도면 아무리 불신에 빠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정도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해 주고, 믿음을 심어 주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한 가지 표적을 더 주셨는데, 이 표적은 직접 행해 보도록 하지 않으시고 말씀으로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흔들리는 믿음에 단단한 3개의 못을 박으신 것입니다. 모세의 놀란 감성을 진정시키고 믿음으로 돌리기 위해 말씀을 주셨습니다. 모세의 이성을 깨뜨리기 위해 표적을 직접 행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모세의 의지적 결단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모세는 좀처럼 일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지막으로 표적을 일으킬 수 있는 한 가지 약속의 말씀을 더 주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만일 이 두 표적도 믿지 아니하며 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거든 너는 강물을 취하여 마른 땅에 부으라. 네가 강에서 취한 물이 마른 땅에서 피가 되리라.](9). 이 표적은 모세의 증거를 믿지 않고, 앞의 두 표적을 믿지 않을 경우에 행할 조건부적인 표적입니다. 그들이 모세의 증거를 받아들이고 믿는다면 세 번째 표적은 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 번째 주님이 주신 이 표적은 마지막 표적인 동시에 경고의 표적입니다. 물을 피로 바꾸는 일은 심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강물은 이집트 사람들이 젖줄이요, 생명이라고 생각하며 숭배하던 나일 강을 말합니다. 이 강물을 취하여 피로 바꾸어 버린다면 모두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심판자이심을 분명히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의 증거와 반복된 표적을 믿지 않을 때 주님은 마지막으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행하는 증거와 표적을 거부할 때 세상이 보게 될 마지막 표적은 바로 자신들의 머리 위에 불같이 임할 심판이요, 생명을 파멸로 이끌 죽음이란 경고입니다. 성경에서 물은 세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 육체적 생명을 일컫습니다. 물은 육체적 생명의 근원입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물에서 나왔습니다. 창세기 1:20,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물들은 생명이 있어서(가진-kjv) 움직이는 피조물(被造物)과 땅 위 하늘의 열린 궁창에 나는 날짐승을 풍성히 내라, 하시고](창1:20). 둘째, 물은 성령을 가리킵니다(요4:10,7:38). 셋째,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엡5:26). 물이 피로 변하는 이 표적은 당연히 말할 것도 없이 육체적 생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잠언 기자는 우리의 생명이 물에서 탄생한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우리는 모두 40주 동안 어머니의 양수 속에 있다가 나옵니다. 그래서 여자를 샘이라고 말합니다. 잠언 5:18에, [네 샘으로 하여금 복되게 하며 또 젊을 때 /취한/ 아내와 더불어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자식들은 샘에서 나온 샘들이 됩니다. 잠언 5:16에, [네 샘들이 널리 퍼지며 여러 거리에서 강물이 되게 하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일컬을 때 그들이 유다의 물들에서 나왔다고 말씀합니다. [오 야곱의 집이여, 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고 유다의 물들에서 나왔으며 ...](사48:1a). 우리는 이런 연관 구절들을 통해 물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육체적 탄생, 육신의 생명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물로 태어납니다. 물에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말씀의 증거와 표적의 소리를 통해 다시 한번 성령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3: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요3:3). 유대인들은 누구나 물에서 난다는 의미를 잘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 역시 물에서 태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었지만 다시 태어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또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고 그 의미를 밝혀 주셨습니다. 물에서 난 것은 육신에서 난 것입니다. 성령에서 난 것은 영입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요3:6). 우리 주님은 물과 피를 통해 오셨습니다. [이분은 물과 피로 오신 분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오신 것이 아니요, 물과 피로 오셨고 증거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니 그 까닭은 /성/령께서 진리이시기 때문이라.](요일5:6). 물로 오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셨다는 말이며, 피로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피를 지니셨다는 신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행20:38).

물이 피가 되는 표적을 보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물이 피가 되는 표적을 보기 전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주]께 아뢰되, 오 내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하지 못한 자니이다. 지금까지도 그러하였고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이후에도 그러하오니 나는 말이 느리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하니](10). 하나님이 세 번에 걸쳐 믿음의 확신을 주시고, 세 번에 걸쳐 표적을 주셨지만 모세의 대답은 이전과 마찬가지로(3:11,13, 4:1) 할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모세는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등 누구도 결코 누리지 못한 주님과의 생생한 대화와 함께 하리라는 약속, 표적을 행했지만 그는 여전히 주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화답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첫 번째 표적을 통해서 마귀를 이기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주님은 두 번째 표적을 통해서 품속의 마음이 얼마나 더럽고 타락했는지 그 죄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는 모세가 해야 할 일이 이집트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귀의 권세로부터 구출해 내고, 죄로 더럽혀진 그들의 마음을 믿음으로 돌이켜야 함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 번째 표적을 통해서 이 둘을 거부할 때는 심판이 임한다는 엄중한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이 말에 능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주님의 부르심을 거부했습니다.

모세의 문제는 자기 집착(3:11), 파라오와 백성들에 대한 두려움(3:13), 불신(4:1), 마지막으로는 교만(4:10)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어눌한 말솜씨 때문에 주님이 주신 사역을 할 수 없다고 변명했습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모세처럼 능란한 설교, 해박한 지식, 사람을 울리는 화술,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말솜씨야말로 주의 종들이 갖추어야 할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전도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고민은 말을 잘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세뿐만 아니라 신약의 가장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 역시 말을 잘 못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로부터 말을 잘 못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16, [내가 비록 말에는 서투를지 모르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오직 우리는 너희 가운데서 모든 일로 온전히 드러났느니라](고후11:16). 바울은 자신이 배우고 익힌 세상 지혜로는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 사람입니다. 모세는 잃어버린 지혜와 말솜씨를 아쉬워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것이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고린도전서 2: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밝히 말할 때에 말이나 지혜의 뛰어난 것으로 하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결심하였음이라.](고전2:1-2). 육체의 지혜, 세상의 지혜, 좋은 말, 빼어난 말 솜씨는 성경에서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6:18, [이는 이 같은 자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 배만 섬기며 좋은 말과 빼어난 말솜씨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속이기 때문이니라.](롬16:18). 그렇다면 모세의 자기 변명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을 가장한 교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님, 저는 능력이 없어서 못하겠습니다. 주님, 저는 지혜가 없어서 못하겠습니다. 주님, 저는 말을 잘 못해서 못하겠습니다.”라는 이런 핑계는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과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하는데 내가 능력이 없어 못하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하는 교만한 마음의 표현입니다. 모세의 지혜와 능력을 주님이 빌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능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말솜씨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순종과 헌신이 필요한 분이십니다.

10절을 다시 보십시오. [모세가 [주]께 아뢰되, 오 내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하지 못한 자니이다. 지금까지도 그러하였고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이후에도 그러하오니 나는 말이 느리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하니](10). 모세는 지금 주님께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본래 말에 능하지 못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선천적으로 벙어리가 된 것도 아니고, 말을 더듬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배움이 짧아서 말을 못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아예 주님의 부르심을 피하기 위해서, “나는 본래 말에 능하지 못한 자니이다.”라고 말해 버린 것입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본래 나를 그렇게 만드셨습니다’라는 항의와 다를 바 없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러하였고,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그러하오니...”(10)란 말은 앞으로도 달라 질 것은 없지 않습니까? 란 강한 불신입니다. 말이 느리고 혀가 둔해서 못한다는 것이 변명이 된다면 목소리가 나빠서 사역을 못하겠다는 사람이나 기분 나빠서 못 해 먹겠다는 말이나 다 핑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말이 느리고 혀가 둔한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저는 한 때 노래를 못하기 때문에 사역을 못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목사는 찬송가를 인도할 때가 많은데 저는 정말 노래를 못합니다. 음정도 박자도 잘 틀립니다. 그래서, 늘 기도 제목 가운데 하나가 찬양을 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찬양을 잘하게 되면 사역을 잘합니까? 노래 못하는 것보다 약간 더 편할 뿐입니다. 사람마다 하나님 앞에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약점은 주님의 은혜로 상쇄되고도 남습니다.

주님의 사역은 단순함과 진실함,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것이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행할 때에 단순함과 하나님께서 주신 진실함으로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였으며 또한 너희를 향하여는 더욱더 그리하였노니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요 또 우리 양심이 증거하는 바라.](고후1:12).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는 원래 말을 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세가 이집트 사람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능력이 있었느니라.](행7:22). 그러나 모세는 이제 40년 동안 광야에서 양을 치면서 이 때 배운 말과 지혜는 다 잃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썩어도 준치라는 말을 하지만 당사자인 모세는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배운 지혜와 말로는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기 안에 뭔가 비장의 무기, 신뢰할만한 무엇이 있어야 사역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무너지고 하나님을 신뢰하면 문제가 없지만 자기가 무너지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절망밖에 남지 않습니다. 자기가 무너지고, 뭔가 된 줄로 알았던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거기서 멈추면 하나님 앞에서 절망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빛을 받고, 자신의 죄성을 깊이 본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지만 거기서 중단하면 사람은 한없이 무기력해지고 미쳐 버립니다. 우리는 자신을 본 후에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죄성을 본 후에는 그것을 덮어 주는 족한 은혜를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무능을 본 후에는 주님의 전능하심을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본 후에는 주님을 통해 강함을 맛보아야 합니다. 육신의 쓰라림을 체험했다면 성령의 열매를 맛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그 면전에서도 불평과 불만을 털어 놓는 신자가 되고 맙니다. 가장 은혜로운 시간이 가장 비참한 시간이 됩니다. 눈을 들어 예수를 바라 볼 때, 약함은 강함이 되고, 어리석음은 지혜가 되며, 불평은 감사가 되고, 불만족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는 찬양이 됩니다. 모세는 주님 앞에서 한없이 초라한 자신을 보았지만, 이제 눈을 들어 주님을 보아야 할 때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만들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자나 귀먹은 자나 보는 자나 눈먼 자를 만들었느냐? 나 [주]가 아니냐?](11). 주님은 모세를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이 말씀은 주님 자신에게 매우 불리한 진술처럼 들립니다. 주님께서 사람의 입을 만드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벙어리와 귀머거리와 눈먼 자는 누가 만드신 것입니까? 주님이십니다. 신체의 장애는 저주의 결과나 범죄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겠지만 선천적 장애자는 주님이 모태에서부터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제자들은 선천성 맹인을 두고 주님 앞에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에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시매 그분의 제자들이 여쭈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누가 범죄하였기에 이 사람이 눈먼 자로 태어났나이까? 이 사람이니이까, 그의 부모이니이까? 하니](요9:1-2). 제자들은 아마 모세에게 말한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거나 들었더라도 믿지 못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나 범죄하지 아니하였으며 다만 /이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9:3). 물론 죄의 결과로 병이 올 수 있고, 신체의 장애가 올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마귀의 역사로 벙어리가 될 수 있고, 귀머거리가 될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마9:32,12:22,눅11:14). 이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주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정상인 사람들이 쉽게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당사자들이 받아들이기에 결코 쉽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벙어리로 만드시고, 귀먹은 자와 눈먼 자를 만드셨다는 것은 주님이 친히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예화) 어떤 무신론자가 장애인 학교에서 자신의 종교관을 아이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귀머거리에 벙어리였고 수화와 칠판에 글자로 서로 대화했습니다. 그런데 강의가 전혀 씨가 먹혀 들지 않았습니다. 선생은 아이들이 성경 구절로 대답하는데 잔뜩 화가 나서 이성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이 많으신 분이요, 전능하신 분이라면 어떻게 너희들을 지금 이 모양으로 벙어리와 귀머거리가 되도록 하실 수 있는가?” 그러자 10살 먹은 귀머거리 소녀가 웃으면서 선생님의 질문을 충분히 이해하겠다며 칠판 앞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그녀는 칠판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과연 그러하옵나이다. 아버지여, 그리하심이 아버지 보시기에 좋았나이다.](마11:26).

11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만들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자나 귀먹은 자나 보는 자나 눈먼 자를 만들었느냐? 나 [주]가 아니냐?](11). 모세는 말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질 정도로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막대기가 변하고, 손이 나병이 걸렸다고 나음을 입었지만 자신의 입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40년 동안 이집트에서 나가 있었다면 이집트의 말을 거의 잊었거나 한다고 해도 매우 둔 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주로써 모두 책임지십니다. 완전무결한 것은 주님의 솜씨이며, 불완전한 것도 주님의 솜씨입니다. 주님은 법을 주신 분이십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이나 열역학 제일,이 법칙이나, 질량 보존의 법칙이나 유전자의 법칙 역시 주님이 주신 법입니다. 이사야 33:22, [이는 [주]가 우리의 심판자시요, [주]가 우리에게 법을 주시는 이시요, [주]가 우리의 왕이시니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 [율법을 주시는 이가 하나이시니 그분께서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네가 누구이기에 남을 판단하느냐?](약4:12). 우리는 모태로부터 유전적 요인으로 인해 선천적인 장애로 태어난 사람들에 대해서 조금도 편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우리를 지으신 분이나 그들을 지으신 분은 동일합니다.

지금 주님께서 모세에게 주시고자 하신 말씀은 모세의 말 못하는 문제는 주님의 명을 수행하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하여 네가 무슨 말을 할지 가르치리라.](12).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가시고, 함께 있으며, 모세의 입과 함께 하여 말을 가르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3:10에서 주님은 모세에게 “그런즉 이제 오라”(출3:10)고 명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그런즉 이제 가라”(4:12)고 명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초청에 음성에 귀를 기울여 주님께로 와서 구원을 받고, 쉼을 얻고, 성령을 받고, 은혜를 얻은 다음에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라”(마28:20)는 사명을 받아 세상 끝까지 모든 피조물에게 가야 합니다. 주님의 초청에 음성을 받아 온 사람은 누구라도 주님으로부터 다시 가라는 보내심이 있게 마련입니다.

주님은 명령과 함께 명령을 수행할 힘을 주시고, 동시에 능히 그것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함께 하십니다. 보십시오. 주님은 모세에게 웅변이나 수사학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신학교에서 설교학 시간에 교수들은 발성법을 가르치고,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음성 고저 장단을 가르칩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how to speak)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무엇을 말해야 할지”(what thou shalt say)를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의 관심 역시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보다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D.L 무디는 설교할 때에 말을 너무나 자주 틀려서 듣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한번의 설교에서 200번 이상 실수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무디는 해야 할 말을 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그를 축복하셨고 사용하셨습니다. 쟌 번연은 어떻게 말하는가?에 대해서는 무지했지만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정통했습니다. 그는 진리를 말했습니다. 우리는 입 밖으로만 아니라 마음 속으로도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곧바르게 걸으며 의를 행하며 자기 마음 속으로 진리를 말하며](시15:2)라고 노래했습니다. 잠언 8:7에, [이는 내 입이 진리를 말할 것임이니 사악함은 내 입술이 가증히 여기는 것이로다.]고 했고, 스가야 8:16에는 [너희가 행할 일들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각각 자기 이웃에게 진리를 말하고 너희 성문들에서 진리와 화평의 재판을 집행하며]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4:25에는 [그런즉 거짓말을 버리고 각각 자기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肢體)이기 때문이니라.](엡4:25). 물론 아름다운 음성으로 설득력 있게 말하는 것이 찢어지는 음색을 내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듣기 좋은 음성이요, 달변이라도 그것이 거짓이라면 주께 가증한 것이요, 마귀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모두 성경에 정통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해야 할 말을 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우리는 말이 느리고 입술이 둔하다 해도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담대히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어떻게가 아니라 무엇을 말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에베소서 6:19,20 [또 나를 위하여 /기도할 것/은 내게 말 할 기회를 허락하사 담대히 입을 열어 복음의 신비를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결박당한 대사(大使)가 된 것은 나로 하여금 결박 중에서도 마땅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엡6:19-20).

다시 12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하여 네가 무슨 말을 할지 가르치리라.](12). 주님은 우리 입가 함께 하셔서 해야 할 말을 가르쳐 주십니다. 가서 가르칩니다. 학교는 배우러 오는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돈을 받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교회는 가서 가르칩니다. 무료로 가르칩니다. 우리가 가지 않으면 아무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마28:20).  “가서...가르치고” 이것이 바로 선교의 원리입니다.

믿음으로 순종한다면 여러분은 주님이 여러분의 입과 함께 하며, 무슨 말을 할지 가르쳐 주시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성경 곳곳에 우리에게 진리를 증거할 수 있는 말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학식 있는 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하여금 피곤한 자에게 때에 맞는 말을 할 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일깨우시되 나의 귀를 일깨우사 학식 있는 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는도다.](사50:4).

예레미야 대언자는 말을 잘 못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 입에 주님의 말을 주셨습니다. [[주]께서 자신의 손을 내미사 내 입에 대시며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들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1:9). 에스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에스겔 33:22, [이제 그 도피한 자가 이르기 전날 저녁에 [주]의 손이 내 위에 임하여 내 입을 여시더니 마침내 그가 아침에 내게 이르렀더라. 내 입이 열렸으므로 내가 다시는 말 못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였노라.](겔33:22). 신약 성경에서도 이런 말씀은 많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1:15, [이는 너희의 모든 대적들이 능히 반박하거나 대항하지 못할 입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줄 것임이라.](눅21:15). 문제는 입이나 혀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요, 믿음이요, 순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고자 한다면 거절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면 주저하지 마십시오.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헌신의 핑계로 삼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모두 주님의 초청의 음성에 순종해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가라, 가르치라”는 명령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입을 열어서 진리를 말하게 하시고, 복음의 신비를 말하게 하시고, 해야 할 말을 할 수 있도록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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