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2002년 12월 29일- 출애굽기        




출애굽기(XIII)




말씀: 출애굽기 4:13-19

요절: 출애굽기 4:19




13. 이집트로 돌아가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수구초심(首邱初心)’이라 하여 여우도 죽을 때는 고향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이나 마음은 다 비슷해서 떠나온 고향으로 금의환향(錦衣還鄕)하고 싶어합니다. 사정이 여의치 못해 병든 몸을 이끌고 가거나 죽은 시체가 되어 간다 할지라도 돌아갈 곳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그러나, 때로는 너무나 끔찍한 악몽으로 인해 돌아가고 싶지 않는 고향도 있습니다. 얼굴도 돌리고 싶지 않는 그런 곳이라면 돌아갈 용기를 내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초라한 모습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는 것은 체면과 명예를 중시하는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런 일일지도 모릅니다. 파라오를 꺽을 힘을 비축해서 군대를 이끌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단신으로, 늙은 노구를 이끌고 가야 하는 길이라면 더욱 망설여지는 일입니다. 모세가 먹고 자란 고향은 파라오의 궁전이었습니다. 그는 40년 동안 이곳에서 자랐고,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의 진정한 영적 고향은 약속의 땅 가나안이었지만 육신의 고향은 이집트였습니다. 그런 모세가 드디어 떠나온 이집트로 40년만에 귀향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세의 귀향은 파라오의 초청도 아니고, 금의환향하는 길도 아니고,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 이집트에서 신음하고 울부짖는 자기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인도자로서 가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세상으로 돌아가는 길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증거하고 전파하기 위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못다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라...”(마28:20)는 명령을 받고,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세상으로 갑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런즉 이제 오라. 내가 너를 파라오에게 보내리니 네가 내 백성 곧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리라.](출3:10)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는 기쁨과 설렘, 감사와 찬양 대신 두려움과 불신, 자기 연민과 집착으로 한없이 마음이 웅크려졌습니다. 철저하게 실패하고, 배척받은 곳,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파라오가 있는 이집트에 돌아가라는 주님의 말씀에 모세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다가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가 이르되, 오 내 {주}여, 원하건대 주께서 보내고자 하는 자의 손을 통해 보내소서, 하니](13). 모세는 다섯 번째 하나님의 사명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집요하게 주님의 뜻을 완곡하게, 직접적으로 거부한 하나님의 종은 모세 외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모세는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오 내 {주}여, 원하건대 주께서 보내고자 하는 자의 손을 통해 보내소서”였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표적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집트에 있는 히브리인들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서 있는 모세 자신이었습니다. 때로 사역자들은 자신이 돌보아야 할 양들보다 더 완고하고, 목이 곧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때로 교인들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완악합니다. 성도들은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들이 완악한 것을 탓하지만 사실 듣는 사람보다 더 완악한 자신을 잘 발견하지 못합니다. 모세는 계속해서 자기 백성들이 자신을 믿지 않을 것이라면 지레짐작했지만 백성들보다 자신이 더 믿지 않는 불신자란 사실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자기 생각과 자기 기준에 매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자기 예상에 맞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되면 마음에서 절로 거부 반응이 일어나고, 순종이 요구될 때면 반감이 들고, 변명과 핑계를 들이댑니다.

성경적 예를 몇가지 들어 보겠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전했던 니느웨의 거주민들보다 더 완악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은 요나의 전파로 회개하고 금식했습니다. 니느웨 백성은 요나의 짐작이나 예상과는 달리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될 때 너무나 겸손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보다 더 공의로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들의 죄악을 심판하지 않는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의로 심판하시고, 불을 내리시지 않는 것에 대해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자신을 죽여 달라고 기도했을 정도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보다 완악했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베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깨끗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조차도 더럽다고 거부했으며, 하나님이 일어나 잡아먹으라는 말씀에도 끝까지 더러운 것을 먹을 수 없다고 거부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리할 수 없나이다. 이는 내가 속되거나 부정한 것을 결코 먹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하매](행10:14). 사도 바울은 동족 이스라엘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성령께서 세 차례나 막으셨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에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슬피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결박 당하는 것뿐 아니라 죽는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노라, 하니](행21:13).

성도들 가운데 이런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때로 하나님보다 더 공의롭고, 하나님보다 더 깨끗하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이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 넘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나님보다 훨씬 더 사랑이 많기 때문에 모든 죄인들은 다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며, 결코 하나님은 죄인들을 지옥의 불 속에서 고통받게 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랑이 많은 종교인들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타종교를 용납하고 포용하는 것을 하나님의 확장된 뜻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이 넘치고, 더 의가 넘치고, 더 깨끗한 성도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도 아니며, 의도 아니고, 깨끗함도 아닙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과 표적을 받았지만 하나님보다 이집트의 파라오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잘 아는 것처럼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네 음성에 귀를 기울이리니...”(3:18)라고 말씀했는데, 모세는 “그들이..믿지 아니하리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모세는 결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믿지도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 내 {주}여, 원하건대 주께서 보내고자 하는 자의 손을 통해 보내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 자신의 지혜를 버리는 것이요, 나 자신의 눈에 옳게 보이는 것을 버리는 것이요,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 보다 나 자신을 더 잘 아시며, 파라오를 더 잘 아시며, 이집트의 백성들의 고통과 신음 소리를 더 잘 보시고 들으십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주]의 분노가 모세를 향해 /불같이/ 타올라 그분께서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을 잘하는 줄 내가 아노라. 보라, 또한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 속으로 기뻐하리라.](14). 드디어 모세의 불신과 완악함에 대해 주님은 분노하셨습니다. 모세라 할지라도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은 예외없는 법칙이었습니다. 모세라 할지라도 뒤로 물러가면 주님께서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이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뒤로 물러가면 내 혼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10:38)고 말씀하신대로 모세의 말과 행동에 크게 분노하셨습니다. 모세의 문제는 설득과 설명의 문제가 아니라 불신의 문제였습니다. 주님의 분노는 모세를 두렵게 했을 것입니다. 시편 90:11, [누가 주의 분노의 능력을 아나이까? 주의 진노는 주의 두려우심과 꼭 같으니이다.](시90:11)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모세를 향해 분노하셨지만 모세가 가장 걱정하는 ‘말 못하는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연약함과 두려움을 이겨낼 동역자를 주셨습니다. 아론은 평생토록 모세와 함께 하였으며, 모세의 대변자로서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동역자를 주심으로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은혜라 할 수 있습니다. 혼자서 모든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세의 불신의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아론은 모세에게 많은 걱정거리를 안겨 주었습니다. 백성들에게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 숭배를 하게 했고, 미리암과 더불어 모세를 대적하기도 했습니다. 모세가 믿음으로 나갔다면 이런 결과는 없었을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보다 육신을 의뢰하는 것은 도움보다 장애가 더 많이 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주]의 분노가 모세를 향해 /불같이/ 타올라 그분께서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을 잘하는 줄 내가 아노라. 보라, 또한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 속으로 기뻐하리라.](14). 주님은 모든 사람을 아십니다. 모세를 아실 뿐만 아니라 아론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각 사람이 가진 은사들을 아십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무엇을 잘 하는지 아십니다. 모세가 이집트로 내려 갈 때 아론은 모세를 만나러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한 편에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나 동일한 시간대에 동일하게 일하심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디오피아 내시가 마차에서 성경을 읽을 때 빌립에게 역사하셨습니다. 바울을 향해 빛을 주시며 말씀을 하신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바울을 불러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환상을 본 순간에 고넬료 역시 말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도와 줄 사람, 모세를 기뻐할 사람 아론을 소개해 주셨는데, 이는 우리의 연약한 모습이 너무나 잘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교회를 할 때도 하나님을 믿고 시작한다고 하지만 함께 할 유력한 사람이 있다면 더 든든해합니다. 선교지를 떠나면서 혼자 가는 것을 두려워 하지만 그곳에 자신을 도와 줄 몇 사람이 있다고 하면 마음 가운데 불안이 사라집니다. 이런 것은 사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믿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 혼자는 불안하지만 나를 만나러 오는 사람, 나를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해 준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이며, 간사함입니다. 사람들과 일이 틀어지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부족하면 사람을 찾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시고, 주님만을 의뢰하는 믿음을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말들을 줄지니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과 함께하여 네가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그가 백성을 향해 네 대변인이 될 것이며 그가 참으로 네게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을 대신하리라.](15-16). 이로써 모세의 혀가 둔한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의 입에 함께 하여 행할 일을 가르칠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모세는 개인적으로 말할 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공적으로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는데 약간 어려움을 겪었는데, 주님께서 할 말을 주신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불신의 결과로 주어진 조력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누가 사람의 입을 만들었느냐?”며 모세의 약점을 넉넉히 채워주셨지만 모세는 그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세의 입을 모세 자신이 더 이상 사용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론이란 다른 입을 주셨습니다. 모세의 불신에 대한 기도 응답이 바로 아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좋다. 네가 너의 입을 만들었는데, 믿지 못하겠다면 아론을 너의 입으로 주마.”라고 하신 것입니다. 7:1에서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로 하여금 파라오에게 신(神)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출7:1). 16절 말씀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책망이었습니다. 모세는 아론을 대변인으로 둔 덕분에 아론을 향해 기도해야 했습니다.

[[주]께서 또 아론에게 분노하사 그를 멸하려 하셨으므로 내가 그때에도 아론을 위하여 기도하고](신9:20). 말이 느리고, 혀가 둔한 덕에 아론을 의지했던 모세는 후에 아론을 의지하지 않고 직접 말했습니다. 그는 말을 하는데 아론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한 말을 직접 들어보십시오. 신명기 32:1-4, [오 하늘들이여, 너희는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오 땅이여, 내 입의 말들을 들을지어다. 내 가르침은 내리는 비요, 내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내리는 가는 비요, 풀밭에 내리는 소나기로다. 내가 [주]의 이름을 널리 알리리니 너희는 우리 하나님께서 위대하시다 할지어다. 그분은 반석이시요 그분의 일은 완전하니 이는 그분의 길이 다 공의롭기 때문이라. 그분은 진실하고 불법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의로우시고 진실하시도다.](신32:1-4). 모세는 말이 느리거나 혀가 둔한 데서 벗어나, 하늘과 땅을 향해서 선포할 수 있었고, 백성들을 향해 자신의 가르침을 거침없이 선포했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했다면 처음부터 아론의 조력은 애당초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너는 이 막대기를 네 손에 잡고 이것으로 표적들을 행할지니라.](17). 이로써 불타는 떨기나무 사이에서 오랫동안 주님과 나누었던 대화는 끝이 났습니다. 떨기나무에 붙었던 불은 꺼졌습니다. 모세는 우두커니 지팡이를 잡고 서 있었을 것입니다. 언제나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던 막대기는 주님의 표적을 행하는 막대기가 되었습니다. 이 막대기는 하나님의 막대기였습니다(4:20). 이 막대기는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목자의 막대기이며, 파라오를 치는 심판의 막대기였습니다. 주님께서 모세의 손에 칼이나 창을 집어 주시지 않으시고 막대기를 통해 일을 하게 하신 데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막대기는 주님 자신을 나타냅니다. 이사야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막대기가 나며 그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자랄 것이요,](사11:1). 주님이 바로 막대기입니다. 모세가 막대기를 잡은 것은 곧 하나님을 굳게 잡았음을 의미합니다. 이 막대기로 땅을 치고 사악한 자를 죽였습니다. [오직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의롭게 재판하고 땅의 온유한 자를 위하여 공평하게 꾸짖으며 자기 입의 막대기로 땅을 치고 자기 입술의 호흡으로 사악한 자를 죽일 것이며](사11:4). 모세가 하나님의 막대기를 들고 표적을 행했듯이 주님 역시 막대기를 잡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나무 막대기가 아니 쇠막대기를 잡으시는데, 이는 통치 수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세 번에 걸쳐 철장(鐵杖-쇠막대기)을 들고 다스리는 주님의 모습이 나옵니다(계2:27, 12:5, 19:15).

주님의 막대기는 성도들을 위로하는 막대기입니다. 시편 23:4, [내가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참으로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위로하시나이다.](시23:4). 주님은 불법을 범하는 성도들을 징계할 때 막대기를 드십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막대기로 사용하십니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만일 그가 불법을 범하면 내가 사람들의 막대기와 사람들의 자녀들의 채찍으로 벌을 줄 것이로되](삼하7:14). 이스라엘을 징계하실 때 주님은 주변 국가들을 사용하셨는데 그들을 주님은 자신의 막대기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바빌론은 도끼(렘51:20), 앗시리아는 주님의 분노의 막대기였습니다. [오 내 분노의 막대기 아시리아 사람이여, 그들의 손에 있는 지팡이는 내 격노니라.](사10:5).

18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자기 장인 이드로에게 돌아가 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나로 하여금 이집트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 돌아가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보게 하소서, 하니 이드로가 모세에게, 평안히 가라, 하니라.](18). 모세는 결국 미디안을 떠나 이집트로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장인 이드로에게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만약 여기서 이드로가 붙잡았더라면 모세는 이것을 핑계로 한번 더 주저앉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계시된 후에는 혈과 육에 의논할 필요도 없고, 허락을 얻을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말씀과 사명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자신의 굳은 결심을 보여 주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바울 사도는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후에 이렇게 했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이교도들 가운데 선포하시려고 그 아들을 내 안에 계시하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즉시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갈1:16). 하나님의 뜻을 알기 전에는 신중하게 뜻을 구해야 하지만 뜻을 안 후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는 망설임도 필요 없고, 다른 일 뒤로 연기하는 일도 필요 없습니다. 곧 바로 믿음으로 순종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모세는 장인 이드로에게 하나님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받은 말씀과 사명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장인의 집에 살면서 믿음의 선한 영향력이나 간증있는 삶을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결코 말씀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자식들에게 할례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도망자로서 자포자기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믿음의 삶을 살지 않았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자기 가족들, 친지들, 친구들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야곱을 통해 이런 진리를 한번 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삼촌 라반의 집에서 일만 열심히 한 돌쇠였지 믿음을 구사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도망치듯이 밤에 가족들과 양떼를 이끌고 야반 도주를 감행했는데, 삼촌과 그의 가족들에게 ‘벧엘에서 아버지의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창28:11-14)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증거하지 못했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도주하는 것을 시리아 사람 라반에게 알리지 아니하고 몰래 떠났더라.](창31:20).

평소에 우리의 삶이 본이 되고, 빛이 되고, 소금이 되지 못한다면 결정적인 순간에 증거할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집트로 돌아가라. 이는 네 생명을 찾던 자들이 다 죽었음이니라, 하시니](19). 주님은 모세에게 다시 한번 말씀하셨습니다. “이집트로 돌아가라.” 거기에는 구원해야 할 가족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구원해야 할 형제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싸워 이겨야 할 파라오가 있습니다. 모세의 생명을 찾던 자들이 다 죽은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찾던 자들 역시 다 죽었습니다. [이르되, 일어나 어린아이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라. 어린아이의 생명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니](마2:20). 주님은 모세의 발걸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이집트로 돌아가라”는 주님의 명령은 모세에게 주어진 유일무이한 명령입니다. 세상의 모형인 이집트는 하나님의 백성이 결코 다시 돌아가서는 안될 곳입니다. 출애굽의 여정 때 불신에 빠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찌하여 [주]가 우리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가? 우리의 아내와 자녀가 탈취물이 되리니 우리가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하고 이에 서로 이르되, 우리가 대장 한 명을 세우고 이집트로 돌아가자, 하매](민14:3-4).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공개적인 반역입니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나 같은 말이며, 배교의 결정판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이후로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 하셨음이라.](신17:16b). 이것은 일관적인 성경의 명령입니다. 아브라함은 기근으로 인해 양식을 얻으려고 이집트로 갔다가 큰 화를 당할 뻔했습니다. 이삭 역시 그러했습니다. [[주]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이집트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말해 주는 땅에 거하라.](창26: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해 주신 약속의 땅이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원히 거해야 할 곳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거해야 할 처소입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들처럼 버림받아 시드나니 사람들이 그것들을 모아 불 속에 던져 태우느니라.](요15:6).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꾸준히 거해야 합니다. 이것은 제자가 되는 길이요, 참된 자유를 얻는 길입니다. 요한복음 8:31, [이에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되리니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주님은 세상으로 내려가지 말고, 세상으로 돌아가지 말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리 안에 거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범죄하며 그리스도의 교리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이 없는 자며 그리스도의 교리 안에 거하는 자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는 자니라.](요이9).

19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집트로 돌아가라. 이는 네 생명을 찾던 자들이 다 죽었음이니라, 하시니](19). 모세의 할 일은 이집트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집트의 친구가 되거나, 이집트를 위해 무엇인가 일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집트의 정치, 제도, 사회, 교육, 언론을 개혁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모세가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집트로 돌아가라.”는 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대사로 임명받은 것임을 말해줍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파라오를 향해 주님이 하신 말씀을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구원받았지만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일을 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의 대사들입니다. 고린도후서 5:20, [그런즉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한 대사(大使)가 되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너희에게 간청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해하라.](고후5:20).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대사를 통해서 간청하시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합니다. 모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집트로 돌아가면 존귀와 명예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집트로 돌아가면 수치와 모욕과 위협이 기다립니다. 그리스도의 대사들이 이 땅에서 얻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은 이 땅에서 결박당한 대사가 되어서도 할 말을 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내가 결박당한 대사(大使)가 된 것은 나로 하여금 결박 중에서도 마땅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엡6:20).

하나님은 출애굽이란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데 단 한 명을 보냈습니다. 주님은 많은 사람을 떼거리로 보낸 것이 아니라 늙은 모세 한 명이었습니다. 역사의 전환을 이루는데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한 명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한 명을 부르셨습니다. 종교 개혁을 하는데 주님은 마틴 루터 한 명을 부르셨습니다. 미국의 대 각성 운동을 주도하는데 주님은 데이빗 브레이너드 한 명을 부르셨습니다. 그의 뜨거운 기도와 선교 열정은 쟌 웨슬레, 헨리 마틴, 데이빗 리빙스턴을 거쳐 조나단 웨드워즈에게로 이어져 미국의 영적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곳 미국의 한인 사회를 영적으로 복음화 하는데, 잠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깨우는데 역시 한 명이면 족합니다. 우리가 바로 그 한 명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곳 작은 교회에서 틈이 나면 기도하고, 틈이 나면 말씀의 칼을 갈며 자신을 무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이 능통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능력이나 지혜가 출중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의 보냄을 받은 대사라면 우리는 우리를 임명한 임명권자의 명령을 수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소환하는 명령을 받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일터로 돌아가라. 학교로 돌아 가라. 네가 속한 커뮤너티로 돌아가라.’ 명하십니다. 주님은 거기로 우리를 파송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주님의 대사로서 임무를 성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요약합니다.

* 불신은 핑계와 변명으로 불순종을 낳는다. 자기 생각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자.

* 하나님보다 더 지혜롭거나, 더 의롭거나, 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지 말자.

* 불신의 결과로 얻은 조력자는 장애물이 된다.

* 하나님의 명령없이 적진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하나님의 약속없이 우리는 우리의 처소를 떠날 수 없다. 이집트로 가기 전에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받아야 한다.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기 전에 먼저 마귀들을 제어할 능력과 권세를 주셨다(마10). 주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기 전,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을 주셨다.

* 오순절에 성령을 받기 전에 그들은 선교 현장으로 가지 않았다. 주님은 약속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가만히 기다리라고 명하셨다. 우리는 주님보다 앞서 나가서는 안된다.

* 모세는 40년 동안 이집트로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약속을 받았다. 사명을 받았다. 그러면 가야 한다.  

* 하나님은 한 사람을 통해서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 주님 앞에 쓰임받는 한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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