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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2003년 1월 19일- 출애굽기        




출애굽기(XVI)




말씀: 출애굽기 5:1-3

요절: 출애굽기 5:1-3




16. 위대한 증거자의 초라한 증언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증인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증거자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증인은 증거해야 할 때 침묵을 지키거나, 거짓을 말함으로 죄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가리켜 증거의 성막이라고 불렀습니다(레24:3). 언약궤를 증거궤라고 했고, 십계명을 적은 돌판을 증거판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의 말씀(사8:2,16,20), 율법을 증거의 법규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모든 일이 헛된 상상이나 근거없는 것들이 아니라 증거들로 가득차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성경은 바로 증거의 책입니다. [[주]의 율법은 완전하여 혼을 회심(回心)시키고 [주]의 증거는 확실하여 단순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시19:7). [그분의 증거들을 지키고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시119: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신실한 증인이셨습니다(계1:5). 침례인 요한의 사역 역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역이었습니다.

증거를 받은 사람들을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바 ‘믿음의 증거’를 지니고 있을 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을 때, 그 말씀을 받은 사람을 대언자의 직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신약의 모든 성도는 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요한복음 3:32-33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거하시되 그분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자가 없도다. 그분의 증거를 받아들인 자는 하나님께서 진실하심을 인(印)쳐서 확증하였느니라.](요3:32-33).

모세는 구약의 역사상 어느 누구보다도 위대한 주님의 증거자요, 증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위대한 증거자의 초라한 증언을 보게 됩니다.

모세와 아론은 장로들과 백성들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다 증거했고, 백성들은 그들의 말을 믿고, 듣고, 머리숙여 경배하였습니다. 이제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 앞으로 가서 주님이 명령하신 바 말씀을 증거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파라오 앞에서 해야 할 일을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 4:21에 있는 주님이 모세에게 준 이적들을 다 행해야 합니다. 둘째, 4:22절에서 주신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 뒤에 모세와 아론이 들어가서 파라오에게 고하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가게 하라,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위하여 명절을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하니](1).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 앞에 하나님을 대신한 증거자로 섰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해야 할 말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4:22절과 비교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은 내 아들 곧 나의 처음 난 자라’ 둘째, ‘내 아들을 가게 하여 나를 섬기게 하라.’ 셋째,  ‘그가 가는 것을 네가 거부하면, 보라, 내가 네 아들 곧 너의 처음 난 자를 죽이리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입에 말씀을 담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팔에 능력을 주셨고, 그 손에 하나님의 막대기를 잡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파라오 앞에 선 모세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임의로 더하고 빼고 변개시켜 버렸습니다. 증거는 직접 화법으로 들은 대로 정확하게 진술해야 합니다. 모세는 3가지 말씀 중에 한 가지만 전했고, 그나마 내용도 정확하지 않고 임의로 첨삭하고 말았습니다. 위대한 증거자의 초라한 증언이 되고 말았습니다.

모세는 파라오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마땅히 해야 할 말을 담대히 하지 못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앞에 섰던 히브리의 세 청년과는 달리 모세의 이집트의 공식 사역은 처참한 실패로 시작됩니다. 소심하고, 비겁하고, 초라한 증거자들이 담대함을 입고 주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더 많은 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죽이고자 모의할 때 한 마디도 하지 못했던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이 죽자 빌라도 앞에 설 수 있는 담대함을 얻었습니다(막15:43). 대제사장의 여종 앞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여 주님을 3번이나 부인하며 저주했던 베드로는 성령을 받은 후 예루살렘의 공회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을 얻었습니다(행4:13). 이들은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핍박을 받을 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제 그들의 위협을 보시옵고 또 주의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주의 말씀을 말하게 해 주시오며](행4:29). 주의 말씀을 증거하는 증인의 자세는 두려움이 아니라 담대함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이런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또 나를 위하여 /기도할 것/은 내게 말 할 기회를 허락하사 담대히 입을 열어 복음의 신비를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6:19).

다시 1절을 보십시오. [그 뒤에 모세와 아론이 들어가서 파라오에게 고하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가게 하라,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위하여 명절을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하니](1).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증거의 능력이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셨지, 메시지를 전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사상을 전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words-단어)을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증거는 우리의 몫이고, 나머지는 주님이 몫입니다. 주의 말씀은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주의 말씀은 헛되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는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와 거기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움이 돋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씨뿌리는 자에게 씨를 주고 먹는 자에게 빵을 주는 것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내가 기뻐하는 것을 이루며 내가 그 말을 보내어 /이루게 하려는/ 일에서 형통할 것임이라.](사55:10-11). 파라오가 모세를 통해 전해지는 주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은 불신과 불순종에 대해 심판을 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파라오 앞에선 모세는 영적 기상이 넘치고, 원수를 압도하는 장군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두려움에 떨며 상대의 눈치를 보는 고양이 앞에서 쥐와 같은 모습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사람은 듣는 사람의 기분을 맞추어 가며,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며 전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의 세련되고, 교양이 넘치고, 예의바르고, 인격이 성숙한(?) 교회들은 상대방의 기분을 고려해서, 마음 상하지 않게 전하는 것을 영적이요, 경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의 타락한 교회들에서는 때와 기회를 잘 포착해서 지혜롭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들이 뻔뻔하고 마음이 뻣뻣한 자손들이기 때문이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하라. 그들이 듣고자 하든지 아니하든지 그들 가운데 지금까지 한 대언자가 있었음을 그들이 알지니 (이는 그들이 반역하는 집이기 때문이니라.)  사람의 아들아, 비록 찔레와 가시가 너와 함께하며 네가 전갈들 가운데 거할지라도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비록 반역하는 집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들의 모습에 놀라지 말지어다. 그들은 심히 반역하는 자들이니 그런즉 그들이 듣고자 하든지 아니하든지 너는 내 말들을 전할지니라.](겔2:4-7). 주님은 에스겔에게 백성들의 반응을 살펴 가며, 그들이 화를 내지 않을 때에, 집에 불러다 정중하게 식사를 대접하며 부탁하듯이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식으로 복음을 전한 예는 없습니다. 어떤 대언자도 차를 대접하며, 구걸하듯이 주의 말씀을 전파하지 않았습니다. 대언자들은 듣고자 하든지 아니하든지 전했으며, 그 결과 그들은 심한 박해와 조롱과 모욕과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시도 때도 없이 전해야 합니다. 주님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in season and out of season) 말씀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딤후4:2). 시도 때도 없이 하는 것은 무식해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언제나 말씀을 선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먹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는다면 몸은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비만에 걸리거나 병이 들거나, 녹이 슬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전하지 않는 성도들은 영적 비만에 걸리고 각종 질병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증거의 능력을 잃은 성도는 살아있는 성도가 아닙니다. 증거를 하고자 하는 의욕이 없는 성도는 자신의 영적 생명을 고갈시키는 성도입니다. 매주 설교를 듣지만 전혀 입 밖으로 내지 않는 성도는 숨을 들이쉬기만 하고 내 쉬지는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입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주의 복음을 증거하지 않는 성도는 어떻게 듣는지 주의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대한 열정이 없는 사람은 무엇을 들었는지 자신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 안에 있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는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이든지, 먼 옛날에 들은 이야기라도 몇 분만 마주 앉아 있으면 다 입 밖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나의 입을 막는 위협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씀의 선포가 없다는 것은 내가 귀기울여 들은 말씀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다시 1절을 보십시오. [그 뒤에 모세와 아론이 들어가서 파라오에게 고하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가게 하라,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위하여 명절을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하니](1). 모세와 아론을 파라오 앞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예고없이 파라오를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심판에 앞서 기회를 주십니다.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노아를 의의 전파자로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자신의 종들을 보내는데 게으르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모세와 아론의 증거가 완벽하지 못했지만 주님은 계속해서 자신의 뜻을 증거하게 하셨고, 경고를 주셨습니다. 증거자의 의무 중 하나는 다가올 심판에 대한 증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멸망과 심판, 다가올 지옥의 심판에 대해 미리 증거하도록 보냄을 받았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파라오가 이르되, [주]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음성에 순종하여 이스라엘을 가게 하겠느냐? 나는 [주]를 알지 못하며 이스라엘도 가게 하지 아니하리라, 하매](2). 모세와 아론의 증거를 들은 파라오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강력한 경고의 말씀이 사라진 증거를 받은 파라오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파라오의 영적 지식은 헤롯이나 로마의 네로 황제보다 못했습니다. 욥의 증언에 따르면 사악한 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능자가 무엇이기에 우리가 그분을 섬겨야 하리이까? 우리가 그분께 기도한들 무슨 유익을 얻겠나이까? 하는구나.](욥21:15). 주가 누구이기에... 전능자가 무엇이기에...이것은 타락한 인간이 주님의 증거를 배척하는 완악한 모습입니다. 오늘날 불신자들은 증거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이런 식으로 배척합니다. 주님은 먼저 파라오에게 한 가지를 요구하셨습니다. ‘내 백성을 가게 하라.’ 주님은 죄인들을 향해 먼저 한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회개하라. 복음을 믿으라.’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만물의 주(主)이십니다. 주님은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누구에게나 명령하십니다. [이같이 무지(無知)하던 때에는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셨으나 이제는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 명령하셨으니](행17:30). 주님은 죄인들에게 구걸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저 하늘의 구름을 명하셔서 비를 내리시고, 번개를 명하시며, 이 땅의 자연 만물의 모든 것을 다 명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명령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창조는 주님의 명령대로 이루어진 사역입니다. 주님은 파라오에게 명령하십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을 가게 하라.’ 주님은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명령하십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믿는 자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창조주이신 주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반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들어보십시오.  [그분의 명령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을 주신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라.](요일3:23).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그분의 명령대로 걷는 것이요, 명령은 이것이니 곧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 안에서 걸으라 하는 것이라.](요이1:6).

불신자들에게는 아무리 가벼운 명령이라도 무거운 것이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아무리 무거운 명령이라도 가벼운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전령들입니다. 주님의 명령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주님의 명령은 영생입니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존(永存)하는 생명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내가 말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말하는 것이라, 하시니라.](요12:50).

우리가 주님의 명령들을 지킬 때 우리가 구하는 것을 다 받게 됩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그분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고 그분의 눈앞에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행하기 때문이라.](요일3:22). 하나님의 명령은 모두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명령은 더 이상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자식을 잘 키우고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면 그 명령을 부담스러워 할 어머니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명령은 수 백번이라도 O.K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명령은 짐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았고, 주님을 깊이 사랑했던 사도 요한의 증거를 들어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줄 아나니이는 우리가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라. 그분의 명령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니](요일5:2-3).

2절을 보십시오. [파라오가 이르되, [주]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음성에 순종하여 이스라엘을 가게 하겠느냐? 나는 [주]를 알지 못하며 이스라엘도 가게 하지 아니하리라, 하매](2). 오늘날 우리는 파라오 앞에 선 모세와 아론 마냥 교만하고 완악한 죄인들을 상대해야 합니다. 성경을 신화나 우화로 아는 현대인들, 죄를 죄로 알지 않는 사람들에게 죄인임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들의 반응은 모두 파라오와 한치의 차이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죄인들의 영적 지각력과 파라오의 영적 지각력은 조금도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파라오가 “나는 주를 알지 못하노라”고 오만했던 것처럼 오늘날 죄인들은 결코 복음에 순종하려 하지 않습니다. “나는 주를 알지 못하노라”고 외치는 파라오 같은 무리들을 향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증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타오르는 불로 징벌하시리니](살후1:8).

우리는 참으로 믿음이 없는 패역하고 완악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신의 세대를 향해 믿음에 순종케 하는 직분을 맡았습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합니까?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旺盛)하여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제사장들의 큰 무리도 이 믿음에 순종하니라.](행6:7).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에 전무(행6:4)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해졌습니다. 여기서 부흥의 법칙은 어떤 요령이나 방법을 강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도록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활 관용어가 되고, 언어의 일부가 되고, 격언으로 통용되는 영어권 사회와 불교와 유교 용어가 생활어로 사용되는 동양권의 사람들은 결코 선교 열매가 같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정치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드라마에서 본 연속극 이야기로 가득 매워진 성도들이 있는 교회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받은 영적 조명, 삶에서 승리한 간증이 있고, 감사가 넘치는 성도들이 있는 교회는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파라오를 믿음에 순종케 하고 싶다면 기도아 말씀에 전무하고, 말씀이 왕성해 지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직을 받아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그 믿음에 순종하게 하나니](롬1:5). 내가 먼저 주님의 부르심의 은혜에 순종할 때 이 땅에 있는 파라오 부류들을 믿음에 순종하게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파라오와의 1회전에서 제대로된 펀치 한 대 못 먹이고 도리어 카운터 펀치를 맞은 이유 중의 하나는 그의 반복적인 불순종에 기인한 것입니다. 은혜의 부르심에 대한 모세의 반복적인 거절과 불순종은 영적 능력의 결핍으로 드러났습니다. 바울 사도는 단번에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은혜와 사도직을 받아 소아시아 전 지역을 돌았고, 스페인 지역까지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에게 순종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반역하는 예를 볼 때, 우리 자신이 마땅히 순종해야 할 하나님께 불순종하지 않았는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나의 권위 아래 있어야 할 부인과 자녀들, 종업원들, 후배들이 나에게 덤벼들거나 반역할 때, 나는 하나님과 말씀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았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권위, 말씀의 권위에 철저히 순복한 사람만이 파라오 같은 부류의 죄인들을 믿음에 순종케 할 경건의 능력을 소유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이제는 밝히 드러났으며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대언자들의 성경 기록들을 통하여 믿음에 순종하게 하려고 모든 민족들에게 알려지게 된 신비의 계시에 따라 권능으로 /너희를 굳게 세우실 분/](롬16:26). 사람들은 돈으로, 힘으로, 군대로 누를 수 있고, 순종하게 만들 수 있지만 그런 것들로 믿음에 순종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자선 사업이나 학교, 병원, 고아원 등을 운영함으로써 사람들을 믿음에 순종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처구니없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파라오와 같은 죄인들을 믿음에 순종케 하는 한 가지 방법은 ‘성경 기록을 통하여’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능란한 말솜씨와 학식으로 상대를 압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학 교수라 할지라도 배운 것이 전혀 없는 촌부를 믿음에 순종케 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에 순종케 하는 사역은 ‘성경 기록들을 통하여’ 가능합니다.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를 대적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주님의 말씀’에 신실한 것입니다. 2/3가 날아가버린 말씀은 파라오의 마음에 아무런 위험도 경고도 줄 수 없었습니다. 마귀는 무디어진 칼 날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 사람들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셨은즉 원하건대 우리로 하여금 사흘 길쯤 사막으로 가서 [주] 우리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리게 하소서. 두렵건대 [주]께서 우리 위에 역병이나 칼을 내리실까 하나이다, 하니](3).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의 단호한 거부에 직면하자 간절히 애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무기대신 자신들의 무기를 가지고 파라오를 상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에게 사정을 했습니다. 모세는 파라오가 허락하지 않을 경우 자신들 위에 역병이나 칼이 내릴까 두려우니 우리를 살려달라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이는 파라오에게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을 전해 준 것이 아니라 파라오가 아니면 우리가 심판을 받는다는 반대의 메시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마치 당신이 안 믿으면 제가 죽을지도 모릅니다 라는 말과 같습니다.

모세는 주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보라, 내가 네 아들 곧 너의 처음 난 자를 죽이리라](4:23)고 엄중히 경고해야 했습니다. 모세는 1절에서 주님을 위하여 명절을 지키러 간다고 말했다가 3절에서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리고 간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위한 명절은 기쁨의 날입니다.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희생물을 드려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이집트에서 죄 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희생을 드림으로써 죄사함의 기쁨과 용서의 자유, 긍휼과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주의 명절은 언제나 희생물을 드림으로써 시작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기뻐할 수 있는 은혜를 얻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1. 위대한 증거자들의 초라한 증언.

2. 담대하게 증거하자.

3. 말씀에 가감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증거하자.

4. 증거는 경고를 포함한다.  듣든지 아니듣든지,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5. 파라오를 순종케 하자.- 믿음에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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