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 26일- 출애굽기
출애굽기(XVII)
말씀: 출애굽기 5:4-31
요절: 출애굽기 5:22-23
17. 산산이 부서진 믿음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 앞에서 형편없는 초라한 증거를 함으로써 온전한 증거의 능력을 잃어 버렸습니다. 파라오는 모세와 아론 앞에서 ‘주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음성에 순종하여 이스라엘을 가게 하겠느냐?“(2)며 비아냥거렸습니다. 스스로 위대한 군주의 권위를 넘어 신(神)으로 추앙받던 고대 군주제에서 파라오가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 때 모세와 파라오는 다시 한번 제대로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을 증거해야 했지만 오히려 파라오의 이성과 감성에 호소했습니다. 3절은 만약 파라오가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명절을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실지 모르는데, 그렇게 되면 파라오에게 더 큰 손해가 아니냐? 는 일종의 타협책이었습니다. 파라오가 히브리인들을 종으로 계속 부려먹어야 하는데, 만약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의 진노로 역병이나 칼을 내려서 죽이시면 파라오가 더 손해일 테니 가도록 허락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흔히 성도들은 이런 식으로 복음을 증거할 때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두렵고, 껄끄러운 대상 앞에 설 때면 상대방의 이성과 감성에 호소하며 눈치껏 증거합니다. ”당신이 내 말을 믿으면 덕이면 덕이지 손해는 아닐 것이다“란 식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파라오에게 다가올 심판과 전쟁을 선포해야 하는데 오히려 원수 앞에서 주눅이 들어 할 말도 못하는 꼴이니 얼마나 한심한 노릇입니까?
4절을 보십시오. [이집트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의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느냐? 가서 너희의 무거운 짐이나 지라, 하고](4). 파라오는 모세와 아론이 백성들의 고된 노역을 쉬게 해 주고, 작업을 중단시키려는 잔꾀를 부린다고 판단했습니다. 증거된 하나님의 말씀은 파라오의 불신으로 인해 부메랑처럼 더 무거운 짐으로 돌아왔습니다. 파라오는 사흘 길을 오고가며 일주일의 휴식을 주느니 더 많은 일거리를 주어서 아예 딴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의 출현으로 머리 숙여 하나님께 경배했지만 현실은 더욱 암담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겪는 영적 현실입니다. 진리를 알았을 때, 성경 공부에 매진할 때, 헌신을 결단할 때 눈에 보이는 평안과 물질적인 복이 쏟아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결심을 한 후에는 여지없이 시련과 역경이 나에게, 아니면 집에, 아니면 교회에 찾아옵니다. 파라오는 적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백성들이 평안하게 주님을 경배하고 섬기도록 환경을 제공해 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묵묵히 일을 할 때 보다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움직임을 보였을 때 더 철저하게 공격받는 것이 영적 세계의 법칙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런 마귀의 공격에 속절없이 무너져 옛 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은 안타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파라오가 이르되, 보라, 이제 이 땅의 백성이 많거늘 너희가 그들을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쉬게 하는도다, 하고](5). 파라오는 모세와 아론을 통해 증거된 말을 농담 정도로도 여기지 않았습니다. 파라오 자신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역과 그들에게 부과된 세금이 무겁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마귀는 결코 사람들에게 잠시라도 쉼을 주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육신이란 죄의 몸을 입고 산다는 자체가 이미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것입니다. 힘이 좋은 사람들은 100Kg이 넘는 몸을 이끌고 다닙니다. 그 사람은 100Kg이 넘는 짐을 지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고후5:4).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의 몸이란 짐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것을 벗는 방법은 죽음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죄성이란 짐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죄는 혼에 무거운 짐입니다. 시편 38:4, [이는 내 불법들이 내 머리를 덮었음이오니 그것들이 무거운 짐 같으므로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 무겁나이다.](시38:4). 이 두 가지 짐은 오직 주님만이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시는 분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찬송387-. 무거운 짐을 나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간구할 때 불쌍히 여겨 날 구해줄 이 주 예수시니 오직 예수.>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마11:28)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는 “가서 너희 무거운 짐이나 지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 혼에 자유를 주시고 안식을 주십니다. 주님은 다시 오실 때 우리의 육신이란 짐도 벗겨 버리시고, 움직이기에 너무나 평안한, 죄성에 전혀 물들지 않는 몸을 새 옷으로 입혀 주실 것입니다.
다시 5절을 보십시오. [또 파라오가 이르되, 보라, 이제 이 땅의 백성이 많거늘 너희가 그들을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쉬게 하는도다, 하고](5). 당시에 히브리인들은 하나님께 그들의 고통을 고했고, 그들의 신음 소리는 하나님께 들린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40년 전에 이미 모세는 그들을 해방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으로 보아 백성들 사이에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의 언약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400 년의 종살이를 종결할 시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백성들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때 모세가 등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백성들은 믿었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시험을 치릅니다. 백성들의 믿음은 파라오에 의해 시험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차를 만들면 시승(試乘)을 합니다. 공장을 만들어도 시험 가동을 합니다. 시험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컴퓨터에 프로그램을 깔아도 시험해 봅니다. 과연 제대로 되었는지 시험하지 않고 품질 마크나 합격 마크를 찍을 수는 없습니다. 모세와 아론뿐만 아니라 70인의 장로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들은바 증거된 말씀에 대한 불같은 시험을 받아야 했습니다. 시험을 겪지 않는 믿음의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도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역시 시험을 받았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외없이 시험을 받습니다. 이 시험은 우리를 죄에 빠뜨리기 위한 미혹과 유혹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진실성과 사실 유무를 검증하는 과정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이냐? 지금 돌아가고 있는 환경이냐? 란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시험을 견디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그가 단련을 받은 뒤에 {주}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왕관을 받을 것임이라.](약1:12).
6-9절을 보십시오. [파라오가 바로 그 날 백성의 작업 감독들과 그들의 관원(官員)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다시 예전과 같이 벽돌을 만드는 데 필요한 짚을 백성에게 주지 말고 그들로 하여금 가서 스스로 줍게 하며 또 그들이 지금까지 만든 벽돌의 수효대로 그들에게 부과하고 거기서 조금도 줄이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 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리자, 하나니 그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일을 주고 그 일로 수고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헛된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하게 할지니라, 하였더라.](6-9). 파라오는 즉시 백성의 작업 감독관들과 그들의 관원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이 때 파라오 앞에서 떠난 뒤였을 것입니다. 영적 전투에서의 패배는 백성들에게 혹독한 시련으로 돌아왔습니다. 파라오에게 전한 주님의 말씀은 게으르므로 지른 소리가 되었고, 헛된 말(vain words)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되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헛된 말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되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명절을 지키고 희생물을 드린다는 말은 파라오에게 헛된 말이었듯이 오늘날 성경의 모든 말씀은 믿지 않는 죄인들에게 헛된 말이요, 배부른 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생명 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 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못에 던져진다고 경고합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믿지 않는 자는 영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소홀히 여기면 어찌 피할 수 있으리요?’(히2:3)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말들이 헛된 말로 들릴 때 임할 일은 심판밖에 없습니다.
증거된 말씀의 빛을 거부할 때 어둠은 더욱 깊어집니다. 진리로부터 돌아설 때 거짓의 역사는 더욱 강력해집니다. 얼음을 녹이는 햇빛이 땅을 더욱 굳게 만들 듯이 죄인의 마음을 녹이는 말씀의 빛이 죄인의 마음을 더욱 완악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가라’고 해야 할 파라오의 입에서 ‘그들로 하여금 헛된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하게 할지어다’란 말이 나왔습니다. 회개를 거부한 죄인들의 마음은 더욱 완악하고, 더욱 불경스럽게 됩니다.
모세와 아론이 증거한 진리의 말씀은 파라오에게 헛된 말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말로 하면 “쓸데없는 소리”란 말입니다. 이는 오늘날 근본 보수주의를 자부하는 교회들에서 킹제임스 성경을 영감받은 순수한 하나님의 보존된 말씀이라고 하면 나타내 보이는 반응입니다. 성경의 절대 권위, 무오류성에 대해 증거할 때 경건한체 하는 그리스도인들조차 ‘무슨 쓸데없는 소리...일개 번역본인데...오역은 피할 수 없는 것인데...’ 등등의 헛소리를 해댑니다. 그들은 우리의 증거가 헛소리이고 우리는 그들의 말이 헛소리입니다.
모세는 파라오 앞에선 첫 번째 증거를 통해 처절한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파라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의 칼을 들이대기는 고사하고 무기력하게 물러남으로써 백성들은 더욱 난처한 지경에 빠뜨린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10-14절을 보십시오. [백성의 작업 감독들과 그들의 관원들이 나아가서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파라오가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짚을 찾을 수 있는 곳으로 가서 주우라. 그러나 너희 일은 조금도 줄이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에 백성이 온 이집트 땅에 널리 흩어져 짚 대신에 곡초 그루터기를 거두니 작업 감독들이 그들을 재촉하여 이르되, 너희는 짚이 있을 때와 같이 너희 일 곧 너희의 당일 작업을 완수하라, 하며 파라오의 작업 감독들이 이스라엘 자손 위에 세운 자들 곧 그들의 관원들을 때리며 요구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 벽돌 만드는 작업을 예전과 같이 다 마치지 아니하였느냐? 하니라.](1-0-14). 파라오의 왕명은 지체없이 작업 현장으로 전달되었고, 백성들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전에는 짚이 주어진 상태에서 벽돌을 만들었는데, 이제는 짚을 찾아 주워서 벽돌을 이전처럼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파라오의 궁으로 들어간 모세와 아론에게 큰 기대를 걸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고생 끝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영적 세계의 법칙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 뒤에는 반드시 마귀의 역사가 있습니다. “마귀도 함께 왔더라”(Satan also came)란 말은 이 땅에 사는 성도들이 깊이 새겨두어야 할 영적 진리입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따르기로 결심하기 전까지 마귀는 그 사람을 공격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단 믿기로 결심할 때 마귀는 공격을 시작합니다. 성경 공부나 기도회라도 참석하겠다고 결심하면 그 공격은 더욱 거세어 질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 부흥의 역사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마귀의 대적 역시 그만큼 거세어 집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박해를 받습니다. 이는 마귀가 반드시 박해의 공격을 가한다는 말입니다.
파라오의 작업 감독들은 이스라엘 자손 위에 세운 관원들을 때리며 정해준 작업량을 마치도록 요구했습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듯이 시련의 강도가 더 깊을수록 구원의 아침은 더욱 밝아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이런 시련의 풀무를 통과하게 하시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하나님의 특별한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도들 역시 주님의 특별한 보물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거저 줍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피로 값을 치르고 사셨습니다. 불꽃의 강도가 높을수록 더욱 순도 높은 보석을 정련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보석 가게에 들어가 보셨을 것입니다. 아름답고 빛나는 보석을 하얀 백지 위에 두는 주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좋은 보석은 반드시 검은 천이나 어두운 색의 천 위에 둡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시련의 풀무를 통해 구원의 은혜와 주님의 능력을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시련은 누구나 그 순간에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아들들에게 왜 고통을 주시는 것입니까? 성도들에게 왜 시련의 풀무를 주시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철학과 종교를 만들었지만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라면 파라오는 사회악이니 제거하고, 평등 사회를 건설하자고 대안을 제시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물음에 답을 줍니다. [내 마음을 쏟아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찾아보고 탐구하였나니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이 쓰라린 해산의 고통을 주사 그것으로 단련받게 하셨느니라.](전1:13). 전도서 3:10 참조할 것. 죄성을 타고난 인생은 고통을 통해서만 철이 들고, 깨달음을 얻고, 지혜로와지고, 성숙해집니다. 이스라엘이 그러하듯이 성도들 역시 환란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체험을, 체험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이로다”(롬5:3-4)고 고백한 것은 자신이 신앙 간증에서 우러나온 주님의 확실한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특별한 보물이요, 사랑받는 아들들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불완전하여 처음부터 성숙하고 완전한 신앙 인격을 갖추고, 원수 마귀를 다 이기고, 성령의 풍성한 열매를 맺지는 못합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마귀들이 주는 각종 시험들에 우리를 노출하심으로 부당하고, 불합리하고, 이해할 수 없는 모순적인 일들을 당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이를 통해 믿음은 성장하고, 연단되기 때문입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의 관원들이 가서 파라오에게 부르짖으며 이르되, 왕은 어찌하여 왕의 종들에게 이같이 대하시나이까? 그들이 종들에게 짚을 전혀 주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벽돌을 만들라 하나이다. 보소서, 종들이 매를 맞으오나 이 잘못은 왕의 백성에게 있나이다, 하니라.](15-16). 이것이 인간 본성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머리 숙여 경배한 것이 몇 일 전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주님께 부르짖기 보다 바로 파라오에게 달려가 부르짖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찾기 보다 눈에 보이는 해결책으로 달려가는 것이 적극적인 것 같고, 믿음있는 행동처럼 보이고, 그 자리에서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는 분들은 아직 영적인 사역의 초보 단계에도 들어서지 않는 분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방에 위기와 어려움이 나를 겹겹이 둘러쌀 때 난국을 타개하는 은밀한 능력의 비결은 골방 속으로 달려가 은밀히 보시는 주님 앞에 기도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기도의 능력에 대한 믿음과 체험이 없는 성도들은 일을 벌리고 나서 안될 때 최후의 수단으로 기도하지만, 믿음의 성도들은 먼저 기도한 후에 일을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관원들은 파라오에게 긍휼과 은혜를 기대했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순진한 생각입니다. 무한한 긍휼과 위로와 은혜의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파라오에게 불합리성을 따지며 동정을 기대하는 것은 터진 웅덩이에 물을 가두려는 행위나 다를 바 없습니다. 전에 사업을 하다 빚을 진 어떤 분이 은행 대출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자기가 아는 친척, 친구들을 다 찾아다니며 애원을 했습니다. 친척과 친구들의 동정과 연민, 은혜와 긍휼을 구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자 그 때서야 멍석을 하나 들고 삼각산으로 올라가서 몇 날 몇 일이나 기도를 시작했다는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보이는 육체를 신뢰하기를 더 좋아합니다.
불합리하고 억울하고 모순된 일이 닥쳐 파라오에게 달려갔던 이스라엘의 관원들을 보십시오. 마치 우리 자신들의 자화상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최후의 수단, 최후의 방책이 아닙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17-18절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르되, 너희가 게으르다. 너희가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주]께 희생물을 드리자, 하는도다. 그러므로 이제 가서 일하라. 이는 너희에게 짚은 전혀 주지 아니할지라도 너희가 바칠 벽돌 수효는 여전할 것임이니라.](17-18). 이스라엘 관원들은 파라오로부터 냉대를 받았습니다. 그 명령은 파라오로부터 나온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파라오는 오직 종교적인 이유 하나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박해했습니다. 이는 사회와 국가에 따로 범죄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박해하고 죽일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역사는 파라오의 행위를 반복적으로 되풀이해 왔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일이 닥칠 때 많은 시행착오와 실망, 냉대를 경험한 후에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누가복음 15:15에 나오는 탕자는 먼 나라에서 아버지의 가산을 다 탕진하고,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도 배를 채울 수 없게되었을 때에야 아버지를 기억했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한 여인은 많은 의원들에게 가산을 다 탕진하고, 여러 해 동안 고생한 후에야 주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찾지 않고 맨 나중에 찾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명예롭게 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런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파라오는 주님께 희생물을 드리러 가는 행위를 ‘너희가 게으르다. 너희가 게으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희생물을 드리는 것이 불신자들의 눈에는 정말 한가롭고 일하기 싫은 백수들의 짓거리로 보일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하며, 전혀 생산성이 없는 사회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파라오의 견해입니다. 주를 예배하는 일, 주일에 모여 경배 드리는 일은 생활의 어떤 일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지, 생업에 종사하는 일보다 우선 순위에 밀려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일요일에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만큼 한가로와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주일에 2-3번씩 교회 오는 것이 일하기 싫어서나 게을러서 하는 짓이 아닙니다.
-주일에 영업하는 분-- 예배를 드리고 오늘은 쉬시지요? --그것 다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에요.
-헌금을 안 하는 분 -- 최소한 십일조는 해야지요? -- 돈이 많으니까 그런 소리하지 먹고살기도 힘들어요.
이것은 모두 파라오가 모세와 아론,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는 견해와 동일한 시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했고, 죄를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물을 드리는 것을 게을러서 터져 나오는 소리라고 할 때 마음 가운데 분노해야 합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한번도 주님께 희생물을 드린 적이 없고 믿음의 전통을 세워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주께 희생물을 드린다고 할 때 파라오의 조롱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이 살아 있을 때부터 일년에 한번씩이든지, 몇 개월에 한번씩이라도 주님께 희생물을 드렸다면 이집트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고 그들의 요구에 수긍이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400년 동안 한번도 지내지 않던 희생제를 갑자기 드리겠다고 할 때 누가 그들의 믿음을 참으로 여기고 믿어 주겠습니까?
예화) 전에 제가 군대에 있을 때 한번도 주일 예배를 가지 않던 사병이 부대에서 가장 바쁜 사역이 있는 날 ‘교회에 가겠다’고 하며 종교 외출증을 끊어 달라고 했습니다. 행정반에서는 당연히 파라오처럼 말했습니다. ‘이 녀석이 일하기 싫으니까 교회로 도망가려고...’ 그는 정말 예수를 믿는 사병이었지만 평소에 신앙 생활을 하는 모습이 아무에게도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믿는다고 해도 믿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관원들 앞에서 [너희가 게으르다. 너희가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주]께 희생물을 드리자, 하는도다. 그러므로 이제 가서 일하라.]고 외치는 파라오의 말에는 너희가 언제부터 믿었다고 그 따위 소리하느냐? 너희가 언제부터 주께 희생물을 드리러 갔느냐? 는 냉소와 조롱이 잔뜩 베어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 울어야 합니다. 그동안 주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고, 경배하지 못한 삶을 산 지난날에 대해 통회하고 울어야 합니다. 주님과 새로운 관계성을 정립하고, 바른 예배를 드리는데 필수적인 선결 요건은 철저한 과거 청산입니다. 은혜가 임한 다는 것은 회개의 눈물이 흐르는데서 시작됩니다.
19-21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관원들이, 너희가 날마다 작업하여 만드는 벽돌에서 조금도 줄일 수 없느니라, 함을 듣고 자기들이 악한 상황에 빠진 줄을 깨달으니라. 그들이 파라오를 떠나 나올 때에 길에 서 있는 모세와 아론을 만나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파라오의 눈과 그의 신하들의 눈에서 우리의 향기를 몹시 싫어하는 것으로 만들고 또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주]께서 너희를 보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19-21). 이스라엘 자손들의 관원들은 주님 앞으로 달려 가 엎드리는 대신 자신들의 구원자가 될 사람들과 다투었습니다. 모세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파라오가 더욱 완악해 질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주의 종들에게 세상의 냉대와 박해보다 더 힘든 일은 믿음의 형제들로부터 받는 비난과 오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의 첫 시험에서 여지없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죽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파라오의 완악함에 대해서 이미 모세를 통해 증거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이 현실로 닥쳤을 때 그들은 마음을 닫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잘 믿어 보겠다고 들뜬 기분으로 기도하고 찬양한 후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음날 터진 여러 가지 힘든 일들로 간밤의 기억이 모두 사라진 사람들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파라오를 만나고 나오면서 전에 모세와 아론의 증거를 듣고, 표적을 보며 머리 숙여 경배했던 일은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6:9에 보면 [모세가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나 영의 고통과 잔인한 속박으로 인하여 그들이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6:9)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과 표적을 통해 믿었던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잘 보여 주는 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리들의 신앙 고백을 액면 그대로 믿고 흥분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시련을 거치고, 지속적인 양육없이는 세상의 파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전에 어떤 목사님은 부흥회나 성경 강연회를 한번 인도하고 나면 흥분과 감격의 간증을 쏟아내곤 하셨습니다. 자신이 설교하고 강의한 교회는 완전히 뒤집어졌고, 킹제임스 성경으로 인한 믿음이 굳세어지고, 사람들은 새로운 믿음과 생명으로 가득 찼다는 감격적인 간증을 하시곤 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면 참 놀라운 일이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 교회를 방문해 확인해 보니 실제로 간증한 내용의 100분의 1은 고사하고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멘 소리 몇 번, 식사 대접 몇 번, 은혜받았다는 성도들의 공치사 몇번에 이 순진한 목사님은 완전히 들뜨고 말았던 것입니다. 믿음은 그렇게 성숙되지 않습니다. 주님과 나와의 인격적인 만남, 삶 가운데서의 지속적인 영적 교제와 체험을 통한 인격적 성숙없이 어느날 갑자기 솟아난 믿음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마는 법입니다.
이제 모세는 파라오보다 더 난적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 이끌고 가야할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주]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이같이 악하게 다루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이는 내가 파라오에게 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때부터 그가 이 백성에게 악을 행하기 때문이요, 또한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전혀 구해 주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니이다, 하니라.](23-24). 파라오가 모세를 향해 “어찌하여...”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모세가 하나님을 향해 “어찌하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바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관원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 모세의 질문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주님은 이미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란 말은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사역자들의 입에서 흔히 나오는 불평입니다. 주님 자신조차도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라고 기도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환경에 맞추어서 약간씩 말을 바꾸어, 주여 어찌하여 나를...하셨나이까?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파라오에게 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때부터...” 영적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은 내가 입을 열어 주님을 증거할 때부터입니다. 증인의 삶을 살기 시작할 때부터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로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때부터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과 마귀의 능력을 받은 마귀의 사람들과 한 판 전쟁이 벌어집니다. 모세는 이제 이론이 아닌 실전에서 영적 전투 경험을 쌓아 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종을 돌보시고, 이미 하신 말씀들을 신실하게 이루어 나가실 것입니다. 우리의 실패는 주님 앞에 엎드릴 때 승리로 바뀌어 질 것입니다. 파라오는 반복적으로 실패를 거듭하다, 실패를 통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채 점점 완악해지다가 종국에는 목숨을 잃지만 모세와 아론은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고, 믿음을 배워 점점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모세와 같이 믿음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때로는 증거의 능력을 잃어 버리고, 때로는 파라오에게 조롱을 당하고, 그로 인해 시련이 닥치고, 형제들로부터 오해와 멸시를 받지만 그 때마다 주께 돌아와서 엎드려 아룀으로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주님은 결코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모든 일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십니다.
출애굽기(XVII)
말씀: 출애굽기 5:4-31
요절: 출애굽기 5:22-23
17. 산산이 부서진 믿음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 앞에서 형편없는 초라한 증거를 함으로써 온전한 증거의 능력을 잃어 버렸습니다. 파라오는 모세와 아론 앞에서 ‘주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음성에 순종하여 이스라엘을 가게 하겠느냐?“(2)며 비아냥거렸습니다. 스스로 위대한 군주의 권위를 넘어 신(神)으로 추앙받던 고대 군주제에서 파라오가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 때 모세와 파라오는 다시 한번 제대로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을 증거해야 했지만 오히려 파라오의 이성과 감성에 호소했습니다. 3절은 만약 파라오가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명절을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실지 모르는데, 그렇게 되면 파라오에게 더 큰 손해가 아니냐? 는 일종의 타협책이었습니다. 파라오가 히브리인들을 종으로 계속 부려먹어야 하는데, 만약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의 진노로 역병이나 칼을 내려서 죽이시면 파라오가 더 손해일 테니 가도록 허락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흔히 성도들은 이런 식으로 복음을 증거할 때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두렵고, 껄끄러운 대상 앞에 설 때면 상대방의 이성과 감성에 호소하며 눈치껏 증거합니다. ”당신이 내 말을 믿으면 덕이면 덕이지 손해는 아닐 것이다“란 식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파라오에게 다가올 심판과 전쟁을 선포해야 하는데 오히려 원수 앞에서 주눅이 들어 할 말도 못하는 꼴이니 얼마나 한심한 노릇입니까?
4절을 보십시오. [이집트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의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느냐? 가서 너희의 무거운 짐이나 지라, 하고](4). 파라오는 모세와 아론이 백성들의 고된 노역을 쉬게 해 주고, 작업을 중단시키려는 잔꾀를 부린다고 판단했습니다. 증거된 하나님의 말씀은 파라오의 불신으로 인해 부메랑처럼 더 무거운 짐으로 돌아왔습니다. 파라오는 사흘 길을 오고가며 일주일의 휴식을 주느니 더 많은 일거리를 주어서 아예 딴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의 출현으로 머리 숙여 하나님께 경배했지만 현실은 더욱 암담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겪는 영적 현실입니다. 진리를 알았을 때, 성경 공부에 매진할 때, 헌신을 결단할 때 눈에 보이는 평안과 물질적인 복이 쏟아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결심을 한 후에는 여지없이 시련과 역경이 나에게, 아니면 집에, 아니면 교회에 찾아옵니다. 파라오는 적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백성들이 평안하게 주님을 경배하고 섬기도록 환경을 제공해 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묵묵히 일을 할 때 보다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움직임을 보였을 때 더 철저하게 공격받는 것이 영적 세계의 법칙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런 마귀의 공격에 속절없이 무너져 옛 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은 안타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파라오가 이르되, 보라, 이제 이 땅의 백성이 많거늘 너희가 그들을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쉬게 하는도다, 하고](5). 파라오는 모세와 아론을 통해 증거된 말을 농담 정도로도 여기지 않았습니다. 파라오 자신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역과 그들에게 부과된 세금이 무겁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마귀는 결코 사람들에게 잠시라도 쉼을 주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육신이란 죄의 몸을 입고 산다는 자체가 이미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것입니다. 힘이 좋은 사람들은 100Kg이 넘는 몸을 이끌고 다닙니다. 그 사람은 100Kg이 넘는 짐을 지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고후5:4).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의 몸이란 짐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것을 벗는 방법은 죽음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죄성이란 짐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죄는 혼에 무거운 짐입니다. 시편 38:4, [이는 내 불법들이 내 머리를 덮었음이오니 그것들이 무거운 짐 같으므로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 무겁나이다.](시38:4). 이 두 가지 짐은 오직 주님만이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시는 분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찬송387-. 무거운 짐을 나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간구할 때 불쌍히 여겨 날 구해줄 이 주 예수시니 오직 예수.>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마11:28)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는 “가서 너희 무거운 짐이나 지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 혼에 자유를 주시고 안식을 주십니다. 주님은 다시 오실 때 우리의 육신이란 짐도 벗겨 버리시고, 움직이기에 너무나 평안한, 죄성에 전혀 물들지 않는 몸을 새 옷으로 입혀 주실 것입니다.
다시 5절을 보십시오. [또 파라오가 이르되, 보라, 이제 이 땅의 백성이 많거늘 너희가 그들을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쉬게 하는도다, 하고](5). 당시에 히브리인들은 하나님께 그들의 고통을 고했고, 그들의 신음 소리는 하나님께 들린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40년 전에 이미 모세는 그들을 해방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으로 보아 백성들 사이에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의 언약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400 년의 종살이를 종결할 시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백성들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때 모세가 등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백성들은 믿었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시험을 치릅니다. 백성들의 믿음은 파라오에 의해 시험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차를 만들면 시승(試乘)을 합니다. 공장을 만들어도 시험 가동을 합니다. 시험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컴퓨터에 프로그램을 깔아도 시험해 봅니다. 과연 제대로 되었는지 시험하지 않고 품질 마크나 합격 마크를 찍을 수는 없습니다. 모세와 아론뿐만 아니라 70인의 장로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들은바 증거된 말씀에 대한 불같은 시험을 받아야 했습니다. 시험을 겪지 않는 믿음의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도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역시 시험을 받았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외없이 시험을 받습니다. 이 시험은 우리를 죄에 빠뜨리기 위한 미혹과 유혹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진실성과 사실 유무를 검증하는 과정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이냐? 지금 돌아가고 있는 환경이냐? 란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시험을 견디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그가 단련을 받은 뒤에 {주}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왕관을 받을 것임이라.](약1:12).
6-9절을 보십시오. [파라오가 바로 그 날 백성의 작업 감독들과 그들의 관원(官員)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다시 예전과 같이 벽돌을 만드는 데 필요한 짚을 백성에게 주지 말고 그들로 하여금 가서 스스로 줍게 하며 또 그들이 지금까지 만든 벽돌의 수효대로 그들에게 부과하고 거기서 조금도 줄이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 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리자, 하나니 그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일을 주고 그 일로 수고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헛된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하게 할지니라, 하였더라.](6-9). 파라오는 즉시 백성의 작업 감독관들과 그들의 관원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이 때 파라오 앞에서 떠난 뒤였을 것입니다. 영적 전투에서의 패배는 백성들에게 혹독한 시련으로 돌아왔습니다. 파라오에게 전한 주님의 말씀은 게으르므로 지른 소리가 되었고, 헛된 말(vain words)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되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헛된 말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되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명절을 지키고 희생물을 드린다는 말은 파라오에게 헛된 말이었듯이 오늘날 성경의 모든 말씀은 믿지 않는 죄인들에게 헛된 말이요, 배부른 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생명 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 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못에 던져진다고 경고합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믿지 않는 자는 영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소홀히 여기면 어찌 피할 수 있으리요?’(히2:3)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말들이 헛된 말로 들릴 때 임할 일은 심판밖에 없습니다.
증거된 말씀의 빛을 거부할 때 어둠은 더욱 깊어집니다. 진리로부터 돌아설 때 거짓의 역사는 더욱 강력해집니다. 얼음을 녹이는 햇빛이 땅을 더욱 굳게 만들 듯이 죄인의 마음을 녹이는 말씀의 빛이 죄인의 마음을 더욱 완악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가라’고 해야 할 파라오의 입에서 ‘그들로 하여금 헛된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하게 할지어다’란 말이 나왔습니다. 회개를 거부한 죄인들의 마음은 더욱 완악하고, 더욱 불경스럽게 됩니다.
모세와 아론이 증거한 진리의 말씀은 파라오에게 헛된 말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말로 하면 “쓸데없는 소리”란 말입니다. 이는 오늘날 근본 보수주의를 자부하는 교회들에서 킹제임스 성경을 영감받은 순수한 하나님의 보존된 말씀이라고 하면 나타내 보이는 반응입니다. 성경의 절대 권위, 무오류성에 대해 증거할 때 경건한체 하는 그리스도인들조차 ‘무슨 쓸데없는 소리...일개 번역본인데...오역은 피할 수 없는 것인데...’ 등등의 헛소리를 해댑니다. 그들은 우리의 증거가 헛소리이고 우리는 그들의 말이 헛소리입니다.
모세는 파라오 앞에선 첫 번째 증거를 통해 처절한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파라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의 칼을 들이대기는 고사하고 무기력하게 물러남으로써 백성들은 더욱 난처한 지경에 빠뜨린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10-14절을 보십시오. [백성의 작업 감독들과 그들의 관원들이 나아가서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파라오가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짚을 찾을 수 있는 곳으로 가서 주우라. 그러나 너희 일은 조금도 줄이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에 백성이 온 이집트 땅에 널리 흩어져 짚 대신에 곡초 그루터기를 거두니 작업 감독들이 그들을 재촉하여 이르되, 너희는 짚이 있을 때와 같이 너희 일 곧 너희의 당일 작업을 완수하라, 하며 파라오의 작업 감독들이 이스라엘 자손 위에 세운 자들 곧 그들의 관원들을 때리며 요구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 벽돌 만드는 작업을 예전과 같이 다 마치지 아니하였느냐? 하니라.](1-0-14). 파라오의 왕명은 지체없이 작업 현장으로 전달되었고, 백성들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전에는 짚이 주어진 상태에서 벽돌을 만들었는데, 이제는 짚을 찾아 주워서 벽돌을 이전처럼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파라오의 궁으로 들어간 모세와 아론에게 큰 기대를 걸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고생 끝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영적 세계의 법칙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 뒤에는 반드시 마귀의 역사가 있습니다. “마귀도 함께 왔더라”(Satan also came)란 말은 이 땅에 사는 성도들이 깊이 새겨두어야 할 영적 진리입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따르기로 결심하기 전까지 마귀는 그 사람을 공격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단 믿기로 결심할 때 마귀는 공격을 시작합니다. 성경 공부나 기도회라도 참석하겠다고 결심하면 그 공격은 더욱 거세어 질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 부흥의 역사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마귀의 대적 역시 그만큼 거세어 집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박해를 받습니다. 이는 마귀가 반드시 박해의 공격을 가한다는 말입니다.
파라오의 작업 감독들은 이스라엘 자손 위에 세운 관원들을 때리며 정해준 작업량을 마치도록 요구했습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듯이 시련의 강도가 더 깊을수록 구원의 아침은 더욱 밝아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이런 시련의 풀무를 통과하게 하시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하나님의 특별한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도들 역시 주님의 특별한 보물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거저 줍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피로 값을 치르고 사셨습니다. 불꽃의 강도가 높을수록 더욱 순도 높은 보석을 정련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보석 가게에 들어가 보셨을 것입니다. 아름답고 빛나는 보석을 하얀 백지 위에 두는 주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좋은 보석은 반드시 검은 천이나 어두운 색의 천 위에 둡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시련의 풀무를 통해 구원의 은혜와 주님의 능력을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시련은 누구나 그 순간에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아들들에게 왜 고통을 주시는 것입니까? 성도들에게 왜 시련의 풀무를 주시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철학과 종교를 만들었지만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라면 파라오는 사회악이니 제거하고, 평등 사회를 건설하자고 대안을 제시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물음에 답을 줍니다. [내 마음을 쏟아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찾아보고 탐구하였나니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이 쓰라린 해산의 고통을 주사 그것으로 단련받게 하셨느니라.](전1:13). 전도서 3:10 참조할 것. 죄성을 타고난 인생은 고통을 통해서만 철이 들고, 깨달음을 얻고, 지혜로와지고, 성숙해집니다. 이스라엘이 그러하듯이 성도들 역시 환란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체험을, 체험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이로다”(롬5:3-4)고 고백한 것은 자신이 신앙 간증에서 우러나온 주님의 확실한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특별한 보물이요, 사랑받는 아들들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불완전하여 처음부터 성숙하고 완전한 신앙 인격을 갖추고, 원수 마귀를 다 이기고, 성령의 풍성한 열매를 맺지는 못합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마귀들이 주는 각종 시험들에 우리를 노출하심으로 부당하고, 불합리하고, 이해할 수 없는 모순적인 일들을 당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이를 통해 믿음은 성장하고, 연단되기 때문입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의 관원들이 가서 파라오에게 부르짖으며 이르되, 왕은 어찌하여 왕의 종들에게 이같이 대하시나이까? 그들이 종들에게 짚을 전혀 주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벽돌을 만들라 하나이다. 보소서, 종들이 매를 맞으오나 이 잘못은 왕의 백성에게 있나이다, 하니라.](15-16). 이것이 인간 본성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머리 숙여 경배한 것이 몇 일 전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주님께 부르짖기 보다 바로 파라오에게 달려가 부르짖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찾기 보다 눈에 보이는 해결책으로 달려가는 것이 적극적인 것 같고, 믿음있는 행동처럼 보이고, 그 자리에서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는 분들은 아직 영적인 사역의 초보 단계에도 들어서지 않는 분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방에 위기와 어려움이 나를 겹겹이 둘러쌀 때 난국을 타개하는 은밀한 능력의 비결은 골방 속으로 달려가 은밀히 보시는 주님 앞에 기도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기도의 능력에 대한 믿음과 체험이 없는 성도들은 일을 벌리고 나서 안될 때 최후의 수단으로 기도하지만, 믿음의 성도들은 먼저 기도한 후에 일을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관원들은 파라오에게 긍휼과 은혜를 기대했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순진한 생각입니다. 무한한 긍휼과 위로와 은혜의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파라오에게 불합리성을 따지며 동정을 기대하는 것은 터진 웅덩이에 물을 가두려는 행위나 다를 바 없습니다. 전에 사업을 하다 빚을 진 어떤 분이 은행 대출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자기가 아는 친척, 친구들을 다 찾아다니며 애원을 했습니다. 친척과 친구들의 동정과 연민, 은혜와 긍휼을 구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자 그 때서야 멍석을 하나 들고 삼각산으로 올라가서 몇 날 몇 일이나 기도를 시작했다는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보이는 육체를 신뢰하기를 더 좋아합니다.
불합리하고 억울하고 모순된 일이 닥쳐 파라오에게 달려갔던 이스라엘의 관원들을 보십시오. 마치 우리 자신들의 자화상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최후의 수단, 최후의 방책이 아닙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17-18절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르되, 너희가 게으르다. 너희가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주]께 희생물을 드리자, 하는도다. 그러므로 이제 가서 일하라. 이는 너희에게 짚은 전혀 주지 아니할지라도 너희가 바칠 벽돌 수효는 여전할 것임이니라.](17-18). 이스라엘 관원들은 파라오로부터 냉대를 받았습니다. 그 명령은 파라오로부터 나온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파라오는 오직 종교적인 이유 하나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박해했습니다. 이는 사회와 국가에 따로 범죄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박해하고 죽일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역사는 파라오의 행위를 반복적으로 되풀이해 왔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일이 닥칠 때 많은 시행착오와 실망, 냉대를 경험한 후에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누가복음 15:15에 나오는 탕자는 먼 나라에서 아버지의 가산을 다 탕진하고,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도 배를 채울 수 없게되었을 때에야 아버지를 기억했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한 여인은 많은 의원들에게 가산을 다 탕진하고, 여러 해 동안 고생한 후에야 주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찾지 않고 맨 나중에 찾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명예롭게 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런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파라오는 주님께 희생물을 드리러 가는 행위를 ‘너희가 게으르다. 너희가 게으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희생물을 드리는 것이 불신자들의 눈에는 정말 한가롭고 일하기 싫은 백수들의 짓거리로 보일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하며, 전혀 생산성이 없는 사회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파라오의 견해입니다. 주를 예배하는 일, 주일에 모여 경배 드리는 일은 생활의 어떤 일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지, 생업에 종사하는 일보다 우선 순위에 밀려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일요일에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만큼 한가로와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주일에 2-3번씩 교회 오는 것이 일하기 싫어서나 게을러서 하는 짓이 아닙니다.
-주일에 영업하는 분-- 예배를 드리고 오늘은 쉬시지요? --그것 다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에요.
-헌금을 안 하는 분 -- 최소한 십일조는 해야지요? -- 돈이 많으니까 그런 소리하지 먹고살기도 힘들어요.
이것은 모두 파라오가 모세와 아론,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는 견해와 동일한 시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했고, 죄를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물을 드리는 것을 게을러서 터져 나오는 소리라고 할 때 마음 가운데 분노해야 합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한번도 주님께 희생물을 드린 적이 없고 믿음의 전통을 세워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주께 희생물을 드린다고 할 때 파라오의 조롱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이 살아 있을 때부터 일년에 한번씩이든지, 몇 개월에 한번씩이라도 주님께 희생물을 드렸다면 이집트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고 그들의 요구에 수긍이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400년 동안 한번도 지내지 않던 희생제를 갑자기 드리겠다고 할 때 누가 그들의 믿음을 참으로 여기고 믿어 주겠습니까?
예화) 전에 제가 군대에 있을 때 한번도 주일 예배를 가지 않던 사병이 부대에서 가장 바쁜 사역이 있는 날 ‘교회에 가겠다’고 하며 종교 외출증을 끊어 달라고 했습니다. 행정반에서는 당연히 파라오처럼 말했습니다. ‘이 녀석이 일하기 싫으니까 교회로 도망가려고...’ 그는 정말 예수를 믿는 사병이었지만 평소에 신앙 생활을 하는 모습이 아무에게도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믿는다고 해도 믿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관원들 앞에서 [너희가 게으르다. 너희가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주]께 희생물을 드리자, 하는도다. 그러므로 이제 가서 일하라.]고 외치는 파라오의 말에는 너희가 언제부터 믿었다고 그 따위 소리하느냐? 너희가 언제부터 주께 희생물을 드리러 갔느냐? 는 냉소와 조롱이 잔뜩 베어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 울어야 합니다. 그동안 주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고, 경배하지 못한 삶을 산 지난날에 대해 통회하고 울어야 합니다. 주님과 새로운 관계성을 정립하고, 바른 예배를 드리는데 필수적인 선결 요건은 철저한 과거 청산입니다. 은혜가 임한 다는 것은 회개의 눈물이 흐르는데서 시작됩니다.
19-21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관원들이, 너희가 날마다 작업하여 만드는 벽돌에서 조금도 줄일 수 없느니라, 함을 듣고 자기들이 악한 상황에 빠진 줄을 깨달으니라. 그들이 파라오를 떠나 나올 때에 길에 서 있는 모세와 아론을 만나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파라오의 눈과 그의 신하들의 눈에서 우리의 향기를 몹시 싫어하는 것으로 만들고 또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주]께서 너희를 보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19-21). 이스라엘 자손들의 관원들은 주님 앞으로 달려 가 엎드리는 대신 자신들의 구원자가 될 사람들과 다투었습니다. 모세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파라오가 더욱 완악해 질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주의 종들에게 세상의 냉대와 박해보다 더 힘든 일은 믿음의 형제들로부터 받는 비난과 오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의 첫 시험에서 여지없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죽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파라오의 완악함에 대해서 이미 모세를 통해 증거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이 현실로 닥쳤을 때 그들은 마음을 닫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잘 믿어 보겠다고 들뜬 기분으로 기도하고 찬양한 후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음날 터진 여러 가지 힘든 일들로 간밤의 기억이 모두 사라진 사람들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파라오를 만나고 나오면서 전에 모세와 아론의 증거를 듣고, 표적을 보며 머리 숙여 경배했던 일은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6:9에 보면 [모세가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나 영의 고통과 잔인한 속박으로 인하여 그들이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6:9)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과 표적을 통해 믿었던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잘 보여 주는 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리들의 신앙 고백을 액면 그대로 믿고 흥분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시련을 거치고, 지속적인 양육없이는 세상의 파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전에 어떤 목사님은 부흥회나 성경 강연회를 한번 인도하고 나면 흥분과 감격의 간증을 쏟아내곤 하셨습니다. 자신이 설교하고 강의한 교회는 완전히 뒤집어졌고, 킹제임스 성경으로 인한 믿음이 굳세어지고, 사람들은 새로운 믿음과 생명으로 가득 찼다는 감격적인 간증을 하시곤 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면 참 놀라운 일이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 교회를 방문해 확인해 보니 실제로 간증한 내용의 100분의 1은 고사하고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멘 소리 몇 번, 식사 대접 몇 번, 은혜받았다는 성도들의 공치사 몇번에 이 순진한 목사님은 완전히 들뜨고 말았던 것입니다. 믿음은 그렇게 성숙되지 않습니다. 주님과 나와의 인격적인 만남, 삶 가운데서의 지속적인 영적 교제와 체험을 통한 인격적 성숙없이 어느날 갑자기 솟아난 믿음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마는 법입니다.
이제 모세는 파라오보다 더 난적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 이끌고 가야할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주]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이같이 악하게 다루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이는 내가 파라오에게 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때부터 그가 이 백성에게 악을 행하기 때문이요, 또한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전혀 구해 주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니이다, 하니라.](23-24). 파라오가 모세를 향해 “어찌하여...”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모세가 하나님을 향해 “어찌하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바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관원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 모세의 질문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주님은 이미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란 말은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사역자들의 입에서 흔히 나오는 불평입니다. 주님 자신조차도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라고 기도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환경에 맞추어서 약간씩 말을 바꾸어, 주여 어찌하여 나를...하셨나이까?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파라오에게 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때부터...” 영적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은 내가 입을 열어 주님을 증거할 때부터입니다. 증인의 삶을 살기 시작할 때부터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로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때부터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과 마귀의 능력을 받은 마귀의 사람들과 한 판 전쟁이 벌어집니다. 모세는 이제 이론이 아닌 실전에서 영적 전투 경험을 쌓아 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종을 돌보시고, 이미 하신 말씀들을 신실하게 이루어 나가실 것입니다. 우리의 실패는 주님 앞에 엎드릴 때 승리로 바뀌어 질 것입니다. 파라오는 반복적으로 실패를 거듭하다, 실패를 통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채 점점 완악해지다가 종국에는 목숨을 잃지만 모세와 아론은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고, 믿음을 배워 점점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모세와 같이 믿음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때로는 증거의 능력을 잃어 버리고, 때로는 파라오에게 조롱을 당하고, 그로 인해 시련이 닥치고, 형제들로부터 오해와 멸시를 받지만 그 때마다 주께 돌아와서 엎드려 아룀으로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주님은 결코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모든 일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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