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 23일- 출애굽기
출애굽기(XXI)
말씀: 출애굽기 7:1-7
요절: 출애굽기 7:1
21. 파라오에게 신(神)이 되게 하셨은즉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첫째, 말씀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내가 주인 줄을 알리라”는 말씀대로 온 세상에 이 사실을 알리실 것입니다. “내가 주인 줄을 알리라”는 말씀은 에스겔서의 핵심입니다. 주님은 에스겔을 통해 무려 51번이나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에게도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주(LORD)란 사실을 알린다면 이 세상의 어떤 죄인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은 각 시대별로 자신을 알리는 방법을 달리 하셨습니다. 지금 교회 시대에 주님께서 이 세상에 자신을 알리는 방법은 복음 전파를 통해서입니다. 어느 날 이 세상에는 지금처럼 복음 전파가 아니라 재앙의 심판을 통해서 주님을 알리실 것입니다. 아무리 주님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란 사실을 입으로 고백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사야 45:23에 이르기를,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의로운 가운데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리니 모든 무릎이 내게 굴복하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사45:23) 하였고, 빌립보서 2:10-11,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들로 하여금 다 예수라는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또 모든 혀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10-11)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어떻게 주님을 알게 되느냐? 는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을 비롯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님의 신실한 언약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정상적이고 좋은 방법이비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 주님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반면 이집트 사람들과 파라오는 주님의 진노와 심판을 통해서 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말씀을 통해 주님을 알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할 때, 그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떨어집니다.
이곳 서양 속담에 “빛을 거부하면 번개가 되어 돌아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빛 되신 주님을 거부하면 그 머리에 번개와 같은 재앙의 심판이 떨어진다는 말씀입니다(7:5,17,14:4, 14:18 참조-심판).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타락했을 때 주님은 먼저 대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주시고 그 이후에는 심판을 보내셔서 주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 원리는 지금 저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성도들이 성경을 읽고 설교를 통해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징계와 심판을 보내실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모세와 아론은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지 못했습니다. 백성들은 더 힘들어졌고, 파라오는 더욱 완악해졌고, 모세는 절망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절망했습니다. [모세가 주 앞에서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파라오가 들으리이까? 나는 할례 받지 못한 입술을 지닌 자니이다, 하매](출6:12). 증거자로서 자신의 무능과 연약함을 주님 앞에 토로했습니다. 복음의 증거자들이요, 전파자들의 이런 무능력이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런 연약함으로 인한 자기 절망은 오히려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가시적인 열매가 없고, 주의 사역을 능력 있게 수행하지 못할 때면 이런 비참한 기분에 젖어듭니다.
저는 Jack Hyles 목사님이 매주 한번도 빠짐없이 주일 설교를 통해 죄인들을 거듭나게 했다는 갅으을 듣고 감사와 찬양을 드린 것이 아니라 한이 맺힌 적이 있습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왜 오는 사람도 잡지 못하는가? 왜 있는 사람도 간수하지 못하는가? 오히려 사람은 왜 머뭇거리는가? 이런 생각이 들 때면 한없이 초라해집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육신의 연약함은 약함’이 아닙니다. 연약함은 죄가 아닙니다. 연약함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연약함을 통해 더욱 주님을 신뢰하고, 의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1. 주님의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8:17에 [이것은 대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이르시되, 그가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도다, 하였느니라.](마8:17)고 증거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강점을 가지고 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받은 은사를 잘 활용하고 개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의 연약함을 집중적으로 파고들고 공격합니다. 칭찬과 인정에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돈에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명성과 명예에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자에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육신의 정욕과 탐심에 약한 사람들이요, 죄에 약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사도들의 모습과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모습이 얼마나 다른지 보십시오. 완전히 딴 사람의 모습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은 이전에 자주 쓰러졌던 시기심, 높아 지고자 하는 마음, 육신을 의지하다 쓰러진 모습 등이 완전히 변화되어 믿음과 능력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와 요한의 연약함을 완전히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연약함을 담당하신 주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통해 강해진다는 진리를 믿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7장부터 파라오 앞에선 모세의 모습은 1-6장까지 나오는 모세의 모습과 완전히 다른 딴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7:1에 있습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로 하여금 파라오에게 신(神)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출7:1). 파라오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모세, 힘없이 주저 않는 연약함에 휩싸이는 모세를 “파라오에게 신이 되게”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성령의 권능을 주심으로써 세상을 이기게 하신 주님의 은혜와 같은 것입니다. 세상의 관원들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 앞에서 조금도 흔들림 없이 죄를 지적하고 심판을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는 선배 순교자들의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스데반으로부터 시작된 순교의 역사는 죽임을 당할지언정 패배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바로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파라오를 병들게 하거나 뼈를 부러뜨려 모세에게 담력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세를 파라오보다 더 강하게 하심으로 그를 이기도록 하셨습니다.
2.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이는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친히 우리를 위하여 중보(仲步)하시기 때문이니라.](롬8:26). 전쟁을 하려면 적을 알아야 합니다. 약해 보이면 먹힙니다. 로마 사람들은 사자 우리에 사자들을 가두어 두고 몇 날이고 먹을 것을 주지 않고 그들이 서로 어떻게 피터지게 싸우는지 구경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자들이 몇 일을 굶으면서도 모두 점잔하게 있었습니다. 서로 물고 뜯고 싸울 줄 알았는데 모두 식욕을 초월한 듯 가만히 있었습니다. 몇 일이 지나자 그 중 한 마리가 쓰러졌습니다. 그 때 나머지 사자들이 몽땅 덤벼들어 그 한 마리를 해치워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자들의 우리에 개 한 마리를 집어 넣어도 사자들은 그 개를 잡아먹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개는 사자와 싸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잘 훈련되고 단련된 개라도 1:1로 싸워도 늑대나 멧돼지 한 마리 잡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왜 굶주린 사자들이 개를 잡아먹지 못합니까? 오히려 개를 보면 도망을 가는 경우가 있는데 개 뒤에 총을 든 사냥꾼이 있을 때입니다. 사자든 늑대든 자기보다 약한 개를 보고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개 뒤에 총을 들고 따라오는 사냥꾼이 무서워 도망하는 것입니다. 야수들에 비해 연약한 사냥개의 연약함을 돕는 능숙한 총잡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사냥꾼을 보지 못하고 개와 싸우는 야수들은 죽습니다. 하나님을 모지 못한 채 모세만 바라보고 싸움을 걸면 파라오는 죽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을 바라보고 의지할 때 연약함은 강함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왕인 파라오를 상대할 적수가 아닙니다.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파라오를 이깁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세상의 어떤 권세자나 강한 것이 와도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로 하여금 파라오에게 신(神)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1). 주님은 모세를 파라오에게 신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 심장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가 나에게 너를 서장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합시다.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장도 사장 나름입니다. 구멍가게 사장인지, 대기업의 사장인지 혼자 놀고 먹는 사장인지...사장도 격이 있습니다. 대장은 다 같은 대장이 아닙니다. 골목 대장에서 전군을 통수하는 대장이 있습니다. 모세에게 시골 구석의 촌부들 위에 군림하는 신이 아니라 대제국의 파라오에게 신이 되게 하셨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신으로 떠받들리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긴 하겠지만 별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도 각국에는 민족적인 영웅이 있고, 그들에게 신적인 존재로 떠받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원수들 앞에서 신으로 떠받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적그리스도를 예표하는 파라오를 누를 수 있는 신분과 지위에 오르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신분에 맞는 능력과 권세를 부여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연약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과 우리에게 권세를 부여해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십니다. 파라오 앞에 보내기 전에 모세에게 주신 권능을 세상에 그리스도의 대사로 보낸 저희들에게 주시지 않았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권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능을 내게 주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며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멘.](마28:18-20).
3.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함께 담당할 형제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도다.](롬15:1). 주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님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믿음의 형제들을 곁에 두심으로 함께 동역하고 함께 힘을 합쳐 믿음의 싸움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서로 짐을 나누어 짐으로써 연약한 자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모세도 혼자 다 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에게는 늘 함께 하는 아론이 있었습니다. 아론은 말이 둔한 모세의 입이 되어서 항상 필요한 말을 해 주었습니다. 교회는 한명의 걸출한 초능력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약하고 작지만 서로의 필요를 돌아보고 채워 줄 수 있는 동역자가 필요한 법입니다.
사도 바울은 선교 여행 때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늘 그를 돕는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전우라고 표현했습니다. 고린도후서 8:23, [디도에 대하여 누가 묻는다면 그는 나의 동반자요, 너희를 위한 동료 협력자요, 또 우리 형제들에 대하여 묻는다면 그들은 여러 교회의 사자(檳玆)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고후8:23, 빌2:23참조). 빌립보서 4:3의 클레멘트, 골로새서 4:7에 두기고, 데살로니가전서 3:2에 나오는 디모데, 빌레몬서 1:2의 압비아와 아깁보, 빌레몬서 1:24의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 트기 누가는 평생을 함께 다니며 그의 지치고 병든 몸을 돌보아 주었습니다(골4:14). 교회가 왜 필요합니까? 오늘날 교회를 나오지 않아도 복음 방송, 라디오, 인터넷 등을 통해서 설교를 들을 수있습니다. 하루에도 수 십편 들을 수 있습니다. 복음 신문이나 설교집, 책을 통해서 얼마든지 좋은 설교를 듣고 볼 수 있습니다. 헌금은 온라인으로 하고 싸이버 Church에 등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올수록 더욱 함께 모이는 일에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바로 동역자들과 함께 짐을 나누어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주님께서 “서로 하라”고 명한 일들을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뛰어난 목사 한 명의 설교로 유지되고 운영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서로 서로 은혜를 나누고 연약함을 담당하고, 격려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0:24을 보십시오. [](히10:24). 모세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동료가 필요합니다. 같은 믿음의 형제들을 통해서 우리는 강해집니다.
4. 우리의 연약함은 주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디도에 대하여 누가 묻는다면 그는 나의 동반자요, 너희를 위한 동료 협력자요, 또 우리 형제들에 대하여 묻는다면 그들은 여러 교회의 사자(檳玆)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고후12:9). 사람은 누구나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서 완전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을 향해서 달려갈 뿐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해 주님게서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약함을 해결받으면 주님을 더 잘 섬길 수 있고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의 강한 능력이 약한데서 완전해진다고”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모세가 수퍼맨 정도의 강한 능력자라면 하나님의 강한 능력은 그만큼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재다능하고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강한 능력이 완전해 질 수 없습니다. 40년 동안 이집트에서 학문을 배우고 능했지만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살았더니 이집트 말을 많이 잊어 버렸습니다. 이는 한국을 떠난 지 40년이 지나 미국인들과만 살던 노인이 한국말을 잘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일차적으로 언어적 문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집트 말과 히브리 말 둘 다에 장애를 느꼈는지 모릅니다. 이곳 미국에 사는 한국인 2세들이 영어도 한국어도 잘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영어도 한국어도 잘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말을 잘 못했습니다. 그는 최소한 4-5개국어 이상을 능통하게 하는 사람이었지만 말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바울 스스로 자신이 말재주에 뛰어나지 않음을 인정했습니다. [](고후11:6). 그는 이것을 약점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사역에 걸림돌로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솔직히 복음전도자나 설교자는 말쟁이라고 불리는 현실에서 말을 잘못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말솜씨는 교인들에게 무시 받을 정도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함께할 때는 약하고 그의 말도 형편없다, 하기 때문이라.](고후10:10). 이 말은 당신의 설교를 들으면 잠이 온다, 재미없다는 차원을 넘어서는 모욕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세라면 “나는 할례 받지 못한 입술을 가진 자이온데...”하며 절망해야 할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은 다 말을 잘 하고 싶어 합니다. 반대자들을 한 마디로 제압하고 싶어 하고, 그들이 반박할 수 없도록 논리정연하게 성경을 펼치고 싶어 하고 나의 몇 마디에 그냥 껌뻑 넘어갈 수 있도록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 보면 이것이야말로 주님의 은혜입니다. 말의 지혜로 한다면 십자가의 능력이 무효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침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요, 복음을 선포하라고 보내셨음이라. 이것을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효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1:17).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일진대, 십자가 그 자체가 복음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권능일진대 사람들은 자신들의 뛰어난 말로 그 능력을 모두 없애 버리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구령의 열매가 많았던 것은 뛰어난 지식과 그 지식에서 나오는 해박한 달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눌한 말솜씨, 형편없다는 평을 받은 말로 인해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배우고 얻었던 지식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지식의 많음이 오히려 자신이 영적인 것을 얻는데 손실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모든 것을 확실히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라.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8). 그는 말 못하는 것을 은혜로 알았습니다. 고전2:1,2:4,13을 참조할 것.
그렇다면 오늘날 교인들이 생각하는 지식이 없어서, 말을 잘 못해서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는 핑계는 더 이상 주님 앞에 내 놓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연약함을 자랑해야 합니다. 파라오에게 신이 되게 하시고, 아론을 대언자게 되게 하셨던 주님께서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의 연약함을 다 채워주시고 완전하게 해 주심을 믿고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게 명령한 모든 것을 너는 말하고 또 네 형 아론은 파라오에게 말하여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 자손을 자기 땅에서 보내게 할지니라.](2). 모세는 이전과 같이 말씀을 증거 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다 주께서 하신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자신이 말씀을 가려가면서 전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전에 군대에서 소대장에게 복음을 전하던 사병이 있었습니다. 한참 복음을 전하는데 그 소대장이 그런데 내가 왜 그것을 믿어야 하지? 라고 말하자 열심히 전하던 사병의 얼굴이 벌개졌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으면 좋은 이유만을 말했습니다. 그는 차마 “소대장님은 사악한 죄인이고, 이대로 살다 죽으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학생이 자기 교수에게, 신하가 왕에게, 부하가 상관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당신은 사악하고 더러운 죄인입니다. 복음을 믿지 않으면 영원히 불타는 지옥에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하는게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빼고 전할 수는 없습니다.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할 것이 두려워서, 대화가 단절될 것이 두려워서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는 다면 주님의 대사라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모든 것을 너는 말하고...” 이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증거의 능력, 말씀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하는 이유는 완전한 말씀에 물을 타서 전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더하거나 빼서 전하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내가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頑鄂)하게 하고 또 나의 표적과 나의 이적을 이집트 땅에 많이 내리라.](3). 이 구절은 성경을 왜곡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악용되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선하심을 멸시하는 죄인들은 모든 죄를 하나님에게 전가하고 파라오에게 면죄부를 주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파라오는 믿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그를 완악하게 했기 때문에 믿지 못했을 것이라고 강변합니다. 구원 예정론을 주장하는 자들도 이 구절에 이르면, “하나님의 은총 없이 주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사악한 교리입니다. 주님께서 파라오를 완악하게 하신 것은 파라오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만히 행했기 때문에 얻어진 결과이지 하나님이 원인 제공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교만한 자들은 심판하시기 위해 더욱 완악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엄중한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죄인들의 마음을 속이실 수 있습니다(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셨다-아합 왕). 하나님은 악인들을 불꽃 가운데서 벌주시기 위해 거짓을 믿게 하실 수 있습니다(살후2).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한 미혹을 보내사 거짓말을 믿게 하시리니](살후2:11). 주님은 타락한 죄인들을 버려두심으로 그들이 스스로 더러워지고, 더럽혀지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롬1:24,26,28 참조).
? 하나님께서 부정함에 내어 주신다(롬1:24).
? 하나님께서 그들을 수치스런 애정에 내어 주신다(롬1:26).
?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림 받은 생각에 내어 주신다(롬1:28).
오늘날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이런 면에 대해서는 거의 설교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을 질투도, 분노도 할 줄 모르는 이상한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모독하고 배척하는 죄인들을 향해서도 늘 싱글벙글 웃거나 잔잔한 미소를 뿜는 이상한 신으로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몇 차례 모세가 전한 설교에 귀를 기울지 않고 하나님을 모독한 파라오를 향해 주님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심으로 심판과 재앙의 가속도를 붙이셨습니다.
파라오가 왜 마음이 완악해졌는가?에 대해서는 시편 105:24-25절에 나와 있습니다. [](시105:24-25). 파라오는 말씀을 통해 주님을 믿고, 말씀을 통해 주님을 알아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기회를 거부하고 ‘주가 누구기에...나는 주를 알지 못하며...’(출5:2)라고 주님을 모독하던 그에게 하나님은 제2, 제3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많은 주석가들과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파라오의 죄를 하나님께 떠 넘기려는 무지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4-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파라오가 너희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이집트 위에 얹고 큰 심판들을 통해 내 군대 곧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리라. 내가 내 손을 이집트 위에 내밀어 이스라엘 자손을 그들 가운데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비로소 이집트 사람들이 내가 주인 줄을 알리라, 하시니](4-5). 하나님은 이집트를 향해, 파라오를 향해 전쟁을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은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왜 주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했는지 잘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파라오가 너희 말을 듣지 아니할터인즉’- 이것이 바로 심판의 근거이며, 재앙의 원인입니다. 모든 죄인들이 지옥에서 심판의 형벌을 받는 것은 그들이 죄인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주의 종을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서 주를 알게 하시지만 그것이 되지 않을 때 심판을 통해 주님을 알게 하십니다. 이제 파라오와 이집트는 주의 은혜로운 말씀이 아니라 큰 심판을 통해 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곧 이어 이집트에 내릴 10가지 재앙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모세와 아론이 주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그들이 파라오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더라.](6-7). 모세는 5장 첫 부분에서처럼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7:1에서 주님이 “보라, 내가 너로 하여금 파라오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이란 말씀을 온전히 받았습니다. 그는 전에처럼 파라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말씀을 약화시키거나 물을 타지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고 죄인들에게 믿어달라고 구걸하거나 사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선포하면 됩니다. 믿게 하거나 이해시키려고 애를 쓸 필요도 없습니다. 받은 말씀을 선포하면 됩니다. 십자가의 신학, 피의 대속 원리 등 신학적 접근을 통해서 죄인들의 지성과 이성에 호소하지 마십시오. 복음이 하나님의 권능이요, 십자가만으로 충분합니다. 태어나서 파라오에게 죽을 뻔했던 모세가 80년이 지나 파라오에게 신이 되어 그에게 심판을 선포하는 모세를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주님은 나이 80이 된 모세와 83세의 아론이란 몸도 마음도 늙은 두 노인을 자신의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노인하면 떠오르는 말이 약함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에 잡힌 이 두 노인은 젊은이들의 강함보다 훨씬 더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연약한 사람들을 부르셔서 가장 강한 파라오의 신이 되게 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육신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자신을 보게 하십니다. “보라(see). 너로 하여금 파라오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내가 네게 명령한 모든 것을 너는 말하고...(7:1-2). 파라오는 수많은 신들을 섬겼지만 신들 중의 신이신 주 하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제 파라오는 노예 백성이요, 80세의 노인인 모세를 자신이 섬기던 뱀 신이나 개구리 신이나 태양 신보다 훨씬 더 무서워하게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XXI)
말씀: 출애굽기 7:1-7
요절: 출애굽기 7:1
21. 파라오에게 신(神)이 되게 하셨은즉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첫째, 말씀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내가 주인 줄을 알리라”는 말씀대로 온 세상에 이 사실을 알리실 것입니다. “내가 주인 줄을 알리라”는 말씀은 에스겔서의 핵심입니다. 주님은 에스겔을 통해 무려 51번이나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에게도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주(LORD)란 사실을 알린다면 이 세상의 어떤 죄인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은 각 시대별로 자신을 알리는 방법을 달리 하셨습니다. 지금 교회 시대에 주님께서 이 세상에 자신을 알리는 방법은 복음 전파를 통해서입니다. 어느 날 이 세상에는 지금처럼 복음 전파가 아니라 재앙의 심판을 통해서 주님을 알리실 것입니다. 아무리 주님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란 사실을 입으로 고백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사야 45:23에 이르기를,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의로운 가운데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리니 모든 무릎이 내게 굴복하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사45:23) 하였고, 빌립보서 2:10-11,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들로 하여금 다 예수라는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또 모든 혀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10-11)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어떻게 주님을 알게 되느냐? 는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을 비롯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님의 신실한 언약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정상적이고 좋은 방법이비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 주님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반면 이집트 사람들과 파라오는 주님의 진노와 심판을 통해서 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말씀을 통해 주님을 알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할 때, 그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떨어집니다.
이곳 서양 속담에 “빛을 거부하면 번개가 되어 돌아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빛 되신 주님을 거부하면 그 머리에 번개와 같은 재앙의 심판이 떨어진다는 말씀입니다(7:5,17,14:4, 14:18 참조-심판).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타락했을 때 주님은 먼저 대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주시고 그 이후에는 심판을 보내셔서 주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 원리는 지금 저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성도들이 성경을 읽고 설교를 통해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징계와 심판을 보내실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모세와 아론은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지 못했습니다. 백성들은 더 힘들어졌고, 파라오는 더욱 완악해졌고, 모세는 절망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절망했습니다. [모세가 주 앞에서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파라오가 들으리이까? 나는 할례 받지 못한 입술을 지닌 자니이다, 하매](출6:12). 증거자로서 자신의 무능과 연약함을 주님 앞에 토로했습니다. 복음의 증거자들이요, 전파자들의 이런 무능력이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런 연약함으로 인한 자기 절망은 오히려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가시적인 열매가 없고, 주의 사역을 능력 있게 수행하지 못할 때면 이런 비참한 기분에 젖어듭니다.
저는 Jack Hyles 목사님이 매주 한번도 빠짐없이 주일 설교를 통해 죄인들을 거듭나게 했다는 갅으을 듣고 감사와 찬양을 드린 것이 아니라 한이 맺힌 적이 있습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왜 오는 사람도 잡지 못하는가? 왜 있는 사람도 간수하지 못하는가? 오히려 사람은 왜 머뭇거리는가? 이런 생각이 들 때면 한없이 초라해집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육신의 연약함은 약함’이 아닙니다. 연약함은 죄가 아닙니다. 연약함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연약함을 통해 더욱 주님을 신뢰하고, 의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1. 주님의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8:17에 [이것은 대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이르시되, 그가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도다, 하였느니라.](마8:17)고 증거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강점을 가지고 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받은 은사를 잘 활용하고 개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의 연약함을 집중적으로 파고들고 공격합니다. 칭찬과 인정에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돈에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명성과 명예에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자에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육신의 정욕과 탐심에 약한 사람들이요, 죄에 약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사도들의 모습과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모습이 얼마나 다른지 보십시오. 완전히 딴 사람의 모습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은 이전에 자주 쓰러졌던 시기심, 높아 지고자 하는 마음, 육신을 의지하다 쓰러진 모습 등이 완전히 변화되어 믿음과 능력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와 요한의 연약함을 완전히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연약함을 담당하신 주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통해 강해진다는 진리를 믿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7장부터 파라오 앞에선 모세의 모습은 1-6장까지 나오는 모세의 모습과 완전히 다른 딴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7:1에 있습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로 하여금 파라오에게 신(神)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출7:1). 파라오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모세, 힘없이 주저 않는 연약함에 휩싸이는 모세를 “파라오에게 신이 되게”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성령의 권능을 주심으로써 세상을 이기게 하신 주님의 은혜와 같은 것입니다. 세상의 관원들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 앞에서 조금도 흔들림 없이 죄를 지적하고 심판을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는 선배 순교자들의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스데반으로부터 시작된 순교의 역사는 죽임을 당할지언정 패배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바로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파라오를 병들게 하거나 뼈를 부러뜨려 모세에게 담력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세를 파라오보다 더 강하게 하심으로 그를 이기도록 하셨습니다.
2.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이는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친히 우리를 위하여 중보(仲步)하시기 때문이니라.](롬8:26). 전쟁을 하려면 적을 알아야 합니다. 약해 보이면 먹힙니다. 로마 사람들은 사자 우리에 사자들을 가두어 두고 몇 날이고 먹을 것을 주지 않고 그들이 서로 어떻게 피터지게 싸우는지 구경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자들이 몇 일을 굶으면서도 모두 점잔하게 있었습니다. 서로 물고 뜯고 싸울 줄 알았는데 모두 식욕을 초월한 듯 가만히 있었습니다. 몇 일이 지나자 그 중 한 마리가 쓰러졌습니다. 그 때 나머지 사자들이 몽땅 덤벼들어 그 한 마리를 해치워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자들의 우리에 개 한 마리를 집어 넣어도 사자들은 그 개를 잡아먹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개는 사자와 싸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잘 훈련되고 단련된 개라도 1:1로 싸워도 늑대나 멧돼지 한 마리 잡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왜 굶주린 사자들이 개를 잡아먹지 못합니까? 오히려 개를 보면 도망을 가는 경우가 있는데 개 뒤에 총을 든 사냥꾼이 있을 때입니다. 사자든 늑대든 자기보다 약한 개를 보고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개 뒤에 총을 들고 따라오는 사냥꾼이 무서워 도망하는 것입니다. 야수들에 비해 연약한 사냥개의 연약함을 돕는 능숙한 총잡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사냥꾼을 보지 못하고 개와 싸우는 야수들은 죽습니다. 하나님을 모지 못한 채 모세만 바라보고 싸움을 걸면 파라오는 죽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을 바라보고 의지할 때 연약함은 강함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왕인 파라오를 상대할 적수가 아닙니다.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파라오를 이깁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세상의 어떤 권세자나 강한 것이 와도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로 하여금 파라오에게 신(神)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1). 주님은 모세를 파라오에게 신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 심장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가 나에게 너를 서장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합시다.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장도 사장 나름입니다. 구멍가게 사장인지, 대기업의 사장인지 혼자 놀고 먹는 사장인지...사장도 격이 있습니다. 대장은 다 같은 대장이 아닙니다. 골목 대장에서 전군을 통수하는 대장이 있습니다. 모세에게 시골 구석의 촌부들 위에 군림하는 신이 아니라 대제국의 파라오에게 신이 되게 하셨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신으로 떠받들리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긴 하겠지만 별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도 각국에는 민족적인 영웅이 있고, 그들에게 신적인 존재로 떠받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원수들 앞에서 신으로 떠받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적그리스도를 예표하는 파라오를 누를 수 있는 신분과 지위에 오르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신분에 맞는 능력과 권세를 부여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연약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과 우리에게 권세를 부여해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십니다. 파라오 앞에 보내기 전에 모세에게 주신 권능을 세상에 그리스도의 대사로 보낸 저희들에게 주시지 않았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권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능을 내게 주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며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멘.](마28:18-20).
3.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함께 담당할 형제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도다.](롬15:1). 주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님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믿음의 형제들을 곁에 두심으로 함께 동역하고 함께 힘을 합쳐 믿음의 싸움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서로 짐을 나누어 짐으로써 연약한 자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모세도 혼자 다 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에게는 늘 함께 하는 아론이 있었습니다. 아론은 말이 둔한 모세의 입이 되어서 항상 필요한 말을 해 주었습니다. 교회는 한명의 걸출한 초능력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약하고 작지만 서로의 필요를 돌아보고 채워 줄 수 있는 동역자가 필요한 법입니다.
사도 바울은 선교 여행 때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늘 그를 돕는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전우라고 표현했습니다. 고린도후서 8:23, [디도에 대하여 누가 묻는다면 그는 나의 동반자요, 너희를 위한 동료 협력자요, 또 우리 형제들에 대하여 묻는다면 그들은 여러 교회의 사자(檳玆)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고후8:23, 빌2:23참조). 빌립보서 4:3의 클레멘트, 골로새서 4:7에 두기고, 데살로니가전서 3:2에 나오는 디모데, 빌레몬서 1:2의 압비아와 아깁보, 빌레몬서 1:24의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 트기 누가는 평생을 함께 다니며 그의 지치고 병든 몸을 돌보아 주었습니다(골4:14). 교회가 왜 필요합니까? 오늘날 교회를 나오지 않아도 복음 방송, 라디오, 인터넷 등을 통해서 설교를 들을 수있습니다. 하루에도 수 십편 들을 수 있습니다. 복음 신문이나 설교집, 책을 통해서 얼마든지 좋은 설교를 듣고 볼 수 있습니다. 헌금은 온라인으로 하고 싸이버 Church에 등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올수록 더욱 함께 모이는 일에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바로 동역자들과 함께 짐을 나누어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주님께서 “서로 하라”고 명한 일들을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뛰어난 목사 한 명의 설교로 유지되고 운영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서로 서로 은혜를 나누고 연약함을 담당하고, 격려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0:24을 보십시오. [](히10:24). 모세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동료가 필요합니다. 같은 믿음의 형제들을 통해서 우리는 강해집니다.
4. 우리의 연약함은 주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디도에 대하여 누가 묻는다면 그는 나의 동반자요, 너희를 위한 동료 협력자요, 또 우리 형제들에 대하여 묻는다면 그들은 여러 교회의 사자(檳玆)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고후12:9). 사람은 누구나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서 완전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을 향해서 달려갈 뿐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해 주님게서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약함을 해결받으면 주님을 더 잘 섬길 수 있고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의 강한 능력이 약한데서 완전해진다고”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모세가 수퍼맨 정도의 강한 능력자라면 하나님의 강한 능력은 그만큼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재다능하고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강한 능력이 완전해 질 수 없습니다. 40년 동안 이집트에서 학문을 배우고 능했지만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살았더니 이집트 말을 많이 잊어 버렸습니다. 이는 한국을 떠난 지 40년이 지나 미국인들과만 살던 노인이 한국말을 잘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일차적으로 언어적 문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집트 말과 히브리 말 둘 다에 장애를 느꼈는지 모릅니다. 이곳 미국에 사는 한국인 2세들이 영어도 한국어도 잘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영어도 한국어도 잘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말을 잘 못했습니다. 그는 최소한 4-5개국어 이상을 능통하게 하는 사람이었지만 말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바울 스스로 자신이 말재주에 뛰어나지 않음을 인정했습니다. [](고후11:6). 그는 이것을 약점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사역에 걸림돌로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솔직히 복음전도자나 설교자는 말쟁이라고 불리는 현실에서 말을 잘못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말솜씨는 교인들에게 무시 받을 정도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함께할 때는 약하고 그의 말도 형편없다, 하기 때문이라.](고후10:10). 이 말은 당신의 설교를 들으면 잠이 온다, 재미없다는 차원을 넘어서는 모욕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세라면 “나는 할례 받지 못한 입술을 가진 자이온데...”하며 절망해야 할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은 다 말을 잘 하고 싶어 합니다. 반대자들을 한 마디로 제압하고 싶어 하고, 그들이 반박할 수 없도록 논리정연하게 성경을 펼치고 싶어 하고 나의 몇 마디에 그냥 껌뻑 넘어갈 수 있도록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 보면 이것이야말로 주님의 은혜입니다. 말의 지혜로 한다면 십자가의 능력이 무효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침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요, 복음을 선포하라고 보내셨음이라. 이것을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효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1:17).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일진대, 십자가 그 자체가 복음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권능일진대 사람들은 자신들의 뛰어난 말로 그 능력을 모두 없애 버리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구령의 열매가 많았던 것은 뛰어난 지식과 그 지식에서 나오는 해박한 달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눌한 말솜씨, 형편없다는 평을 받은 말로 인해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배우고 얻었던 지식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지식의 많음이 오히려 자신이 영적인 것을 얻는데 손실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모든 것을 확실히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라.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8). 그는 말 못하는 것을 은혜로 알았습니다. 고전2:1,2:4,13을 참조할 것.
그렇다면 오늘날 교인들이 생각하는 지식이 없어서, 말을 잘 못해서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는 핑계는 더 이상 주님 앞에 내 놓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연약함을 자랑해야 합니다. 파라오에게 신이 되게 하시고, 아론을 대언자게 되게 하셨던 주님께서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의 연약함을 다 채워주시고 완전하게 해 주심을 믿고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게 명령한 모든 것을 너는 말하고 또 네 형 아론은 파라오에게 말하여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 자손을 자기 땅에서 보내게 할지니라.](2). 모세는 이전과 같이 말씀을 증거 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다 주께서 하신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자신이 말씀을 가려가면서 전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전에 군대에서 소대장에게 복음을 전하던 사병이 있었습니다. 한참 복음을 전하는데 그 소대장이 그런데 내가 왜 그것을 믿어야 하지? 라고 말하자 열심히 전하던 사병의 얼굴이 벌개졌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으면 좋은 이유만을 말했습니다. 그는 차마 “소대장님은 사악한 죄인이고, 이대로 살다 죽으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학생이 자기 교수에게, 신하가 왕에게, 부하가 상관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당신은 사악하고 더러운 죄인입니다. 복음을 믿지 않으면 영원히 불타는 지옥에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하는게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빼고 전할 수는 없습니다.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할 것이 두려워서, 대화가 단절될 것이 두려워서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는 다면 주님의 대사라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모든 것을 너는 말하고...” 이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증거의 능력, 말씀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하는 이유는 완전한 말씀에 물을 타서 전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더하거나 빼서 전하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내가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頑鄂)하게 하고 또 나의 표적과 나의 이적을 이집트 땅에 많이 내리라.](3). 이 구절은 성경을 왜곡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악용되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선하심을 멸시하는 죄인들은 모든 죄를 하나님에게 전가하고 파라오에게 면죄부를 주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파라오는 믿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그를 완악하게 했기 때문에 믿지 못했을 것이라고 강변합니다. 구원 예정론을 주장하는 자들도 이 구절에 이르면, “하나님의 은총 없이 주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사악한 교리입니다. 주님께서 파라오를 완악하게 하신 것은 파라오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만히 행했기 때문에 얻어진 결과이지 하나님이 원인 제공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교만한 자들은 심판하시기 위해 더욱 완악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엄중한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죄인들의 마음을 속이실 수 있습니다(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셨다-아합 왕). 하나님은 악인들을 불꽃 가운데서 벌주시기 위해 거짓을 믿게 하실 수 있습니다(살후2).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한 미혹을 보내사 거짓말을 믿게 하시리니](살후2:11). 주님은 타락한 죄인들을 버려두심으로 그들이 스스로 더러워지고, 더럽혀지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롬1:24,26,28 참조).
? 하나님께서 부정함에 내어 주신다(롬1:24).
? 하나님께서 그들을 수치스런 애정에 내어 주신다(롬1:26).
?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림 받은 생각에 내어 주신다(롬1:28).
오늘날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이런 면에 대해서는 거의 설교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을 질투도, 분노도 할 줄 모르는 이상한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모독하고 배척하는 죄인들을 향해서도 늘 싱글벙글 웃거나 잔잔한 미소를 뿜는 이상한 신으로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몇 차례 모세가 전한 설교에 귀를 기울지 않고 하나님을 모독한 파라오를 향해 주님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심으로 심판과 재앙의 가속도를 붙이셨습니다.
파라오가 왜 마음이 완악해졌는가?에 대해서는 시편 105:24-25절에 나와 있습니다. [](시105:24-25). 파라오는 말씀을 통해 주님을 믿고, 말씀을 통해 주님을 알아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기회를 거부하고 ‘주가 누구기에...나는 주를 알지 못하며...’(출5:2)라고 주님을 모독하던 그에게 하나님은 제2, 제3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많은 주석가들과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파라오의 죄를 하나님께 떠 넘기려는 무지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4-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파라오가 너희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이집트 위에 얹고 큰 심판들을 통해 내 군대 곧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리라. 내가 내 손을 이집트 위에 내밀어 이스라엘 자손을 그들 가운데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비로소 이집트 사람들이 내가 주인 줄을 알리라, 하시니](4-5). 하나님은 이집트를 향해, 파라오를 향해 전쟁을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은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왜 주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했는지 잘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파라오가 너희 말을 듣지 아니할터인즉’- 이것이 바로 심판의 근거이며, 재앙의 원인입니다. 모든 죄인들이 지옥에서 심판의 형벌을 받는 것은 그들이 죄인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주의 종을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서 주를 알게 하시지만 그것이 되지 않을 때 심판을 통해 주님을 알게 하십니다. 이제 파라오와 이집트는 주의 은혜로운 말씀이 아니라 큰 심판을 통해 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곧 이어 이집트에 내릴 10가지 재앙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모세와 아론이 주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그들이 파라오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더라.](6-7). 모세는 5장 첫 부분에서처럼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7:1에서 주님이 “보라, 내가 너로 하여금 파라오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이란 말씀을 온전히 받았습니다. 그는 전에처럼 파라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말씀을 약화시키거나 물을 타지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고 죄인들에게 믿어달라고 구걸하거나 사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선포하면 됩니다. 믿게 하거나 이해시키려고 애를 쓸 필요도 없습니다. 받은 말씀을 선포하면 됩니다. 십자가의 신학, 피의 대속 원리 등 신학적 접근을 통해서 죄인들의 지성과 이성에 호소하지 마십시오. 복음이 하나님의 권능이요, 십자가만으로 충분합니다. 태어나서 파라오에게 죽을 뻔했던 모세가 80년이 지나 파라오에게 신이 되어 그에게 심판을 선포하는 모세를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주님은 나이 80이 된 모세와 83세의 아론이란 몸도 마음도 늙은 두 노인을 자신의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노인하면 떠오르는 말이 약함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에 잡힌 이 두 노인은 젊은이들의 강함보다 훨씬 더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연약한 사람들을 부르셔서 가장 강한 파라오의 신이 되게 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육신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자신을 보게 하십니다. “보라(see). 너로 하여금 파라오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내가 네게 명령한 모든 것을 너는 말하고...(7:1-2). 파라오는 수많은 신들을 섬겼지만 신들 중의 신이신 주 하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제 파라오는 노예 백성이요, 80세의 노인인 모세를 자신이 섬기던 뱀 신이나 개구리 신이나 태양 신보다 훨씬 더 무서워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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