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 30일- 출애굽기
출애굽기(XXVI)
말씀: 출애굽기 9:1-17
요절: 출애굽기 9:16
26. 이런 까닭으로 너를 일으켜 세웠나니
사람이든 사물이든 존재 목적이 있습니다. 그 존재 목적을 알고 살 때, 삶의 존재 의의를 느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결여되면 삶이 무기력해지고, 정도가 심하면 아무렇게나 살거나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아주 어릴 때부터 자신도 모르게 ‘나는 누구인가?’이런 의문을 던지면서 그 답을 얻고자 부단히 애를 씁니다. 그런데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으로 정하는 것과 하나님이 존재 이유를 말씀해 주시는 것과 큰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실존과 본질을 논하는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말하고 가르치는 바를 자신도 모른 채 살다가 죽습니다. 성경을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도 우리는 인생의 존재 이유와 목적, 존재 의의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의 존재 의의는 바로 주님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는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창조되었음이라.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왕좌들이나 통치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들이나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창조되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노라.](골1:16).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미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분명히 주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주님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이는 설령 마귀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지독한 범죄자요, 독재자라 해도 매 한 가지입니다. 모든 사물의 존재 목적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계4:11). [오 {주}여, 주는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하시오니 이는 주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음이요, 또 모든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려고 존재하며 창조되었음이니이다, 하더라.](계4:11). 하지만 모든 피조물이 그 창조 목적대로, 존재 이유대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에녹처럼 주님과 동행하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증거를 얻은 자가 있지만 주님의 진노를 하루하루 쌓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파라오의 존재 목적을 알려 주셨는데, 이 사건은 이 세상의 모든 악인들의 존재 이유이기도합니다. 물론 파라오 당사자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제 멋에 살다가 죽을 자였지만 주님은 모세를 통해 파라오의 존재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출9:16).
본문 말씀을 보겠습니다. 9:1-7절은 다섯 번째 재앙입니다. 주님은 심한 전염병으로 이집트를 치셨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파라오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들의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 백성을 가게 하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이는 만일 네가 그들이 가는 것을 거부하고 그들을 잡아 두면 보라, [주]의 손이 들에 있는 네 가축 곧 말과 나귀와 낙타와 소와 양들에게 임하여 매우 심한 전염병이 있을 것임이라.](1-3). 고대 사회에서 이런 가축들은 매우 중요한 재산이었습니다. 농경 사회에서 가축은 고기와 가죽, 털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엄청난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서 가족과 사회, 국가 경제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주님은 이집트인들의 가축들을 치심으로 이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광우병이나 구제역과 같은 질병으로 인해 수만 마리의 가축들을 도살하는 장면을 보셨을 것입니다. 어떤 지역에 콜레라가 발생하면 그 지역의 돼지들은 모두 죽습니다. 닭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본문에서 주님이 내리신 질병은 무엇인지 나와있지 않지만 심한 병이었고, 모두 죽었습니다(6).
[다음 날에 [주]께서 그 일을 행하시매 이집트의 가축은 다 죽었으나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니라.](6). 주님은 악인들이 의지하던 것들을 하나하나 다 쳐 나가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구별을 두셨습니다. 주님은 파리 재앙을 주실 때,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구별을 두셨듯이 가축들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도 마찬가지셨습니다. [또 [주]가 이스라엘의 가축과 이집트의 가축을 분리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에 속한 것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4). 이렇게 연속 두 번으로 사람과 가축들을 철저히 구별하심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파라오 같은 악인들은 자신의 종이나 백성이 죽는 것보다 자신의 재물이 날아가는 것을 더 싫어합니다. 전쟁이 나서 사람이 죽는 것보다 전쟁이 나서 경제가 붕괴되고, 그동안 쌓아 올린 부(富)의 상실을 더 두려워 합니다. 사람들이 경제를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그것이 무너지는 아픔이 큽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파라오가 신하들로부터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않았고, 이집트의 가축만 죽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얼마나 분노했겠습니까? [이에 파라오가 /사람을/ 보내어 본즉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였더라. 이에 파라오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 백성을 가게 하지 아니하니라.](7). 파라오는 모세의 말대로 된 것을 확인하고도 전혀 뉘우침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오기가 발동하고, 악이 받쳤습니다. 다섯 번째 재앙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영적 교훈은 매우 간단합니다. 가축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양식으로 주신 것입니다. 가축은 인간들의 다스림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집트의 가축을 치심으로 그들의 수고와 노동을 받지 않으신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거만한 눈빛과 교만한 마음과 사악한 자의 쟁기질은 죄니라.](잠21:4). 사악한 자들의 쟁기질, 즉 사악한 자들의 수고와 노력은 하나님께서 파멸의 대상으로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의 수고는 주님께서 다 받으시고, 그 행위의 수고에 대한 합당한 상급을 주십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세상과 세상의 모든 수고는 다 불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여섯 번째 재앙은 9:8-12절입니다. 앞선 두 번의 재앙(네 번째, 다섯 번째)은 사전에 경고를 한 후에 재앙이 임했지만 세 번째인 여섯 번째 심판은 사전 경고없이 바로 임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화로에서 재 두 움큼을 취하고 모세가 파라오의 눈앞에서 하늘을 향하여 뿌리라.](8). 주님은 파라오의 불순종을 보시고 곧 바로 더 강력한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들에 있는 이집트의 짐승이 죽었지만 이번에는 집에 있는 이집트의 짐승과 사람들에게 다 같이 물집을 내며 터지는 종기를 주셨습니다. 화로에서 재 두움큼을 취했는데 이 화로는 당시에 신들에게 분향하던 화로이며, 때로는 악의 신 타이푼(Typoon)에게 아이들을 인신 공양할 때 쓰는 화로였습니다. 악의 신에게 에게 인신 공양이 드려진 것은 이집트 땅에 임할 각종 재앙을 없애 달라는 기원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파라오의 눈 앞에서 그 화로의 재 두 움큼을 잡고 하늘을 향해 뿌리게 함으로써 그들이 기원하던 제사들이 얼마나 무용한 것이며, 악한 것인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바로 그들이 악을 막아 달라고 드렸던 화로의 재들이 지금은 자신들의 몸에 물집을 내며 터지는 종창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 재가 온 이집트 땅에서 작은 티끌이 되어 온 이집트 땅에서 사람과 짐승에게 물집을 내며 터지는 종기가 되리라, 하시매](9). 주님은 우리의 행위대로 그대로 갚으시는 의로운 하나님이십니다. 이 재앙을 통해 주님이 가르쳐 주신 것은 인간들의 종교 행위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10-11절, [그들이 화로의 재를 취해 파라오 앞에 서서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뿌리니 그것이 사람과 짐승에게 물집을 내며 터지는 종기가 되니라. 이 종기로 인하여 마술사들이 모세 앞에 서지 못하니 이는 종기가 마술사들과 온 이집트 사람들에게 생겼음이라.](10-11).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도 인간들의 종교를 모두 파괴하시고, 그 종교에 가담했던 모든 자들을 철저히 벌 주실 것입니다. 복을 빌고, 안녕을 빌고, 건강을 빌기 위해 드려졌던 그 희생물들이 자신들에게 화로 돌아올 것입니다.
피부병은 가렵고, 고통스런 것인 동시에 몸을 더럽히고, 추하게 만듭니다. 특히 신경성 피부병은 신경을 타고 전신을 타고 돌기 때문에 그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피부병은 보는 사람도 부담스럽습니다. 대부분 전염성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접근하지도 못합니다. 이집트에 내려진 이 피부병의 이름은 그 학명이 ‘이집트의 종기’입니다. [[주]께서 이집트의 종기와 치질과 딱지와 가려움으로 너를 치시리니 네가 낫지 아니할 것이며](신28:27). 이 병은 주님이 치유해주지 않으시면 낫지 않는 불치병입니다. 이 종기는 계시록 16:1-3절에 첫 번째 천사가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을 쏟아 부을 때 생기는 병의 모형입니다. [첫째 /천사/가 가서 자기 대접을 땅에 쏟아 부으매 짐승의 표를 가진 사람들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한 자들에게 악취가 나며 몹시 아픈 헌데가 생기더라.](계16:2). 사람은 참으로 고통에 약합니다. 자신의 손톱 밑에 있는 작은 가시 하나가 심장병이나 간암을 앓는 환자의 고통보다 크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그런데 온 몸에 종기가 터지고 심한 가려움으로 헌데가 생긴다면 그 괴로움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았더라.](12). 10-11절 말씀을 볼 때 파라오는 종기가 걸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파라오는 더욱 완악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회개하기를 거부한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삶의 방향, 생각의 방향이 얼마나 빨리 달리는가 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빨리 달리더라도 방향이 잘못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한 때 전도서에 [내가 돌이켜 해 아래에서 보니 경주가 빠른 자들에게 돌아가지 아니하고...](전9:11a)란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방향을 말씀한 것입니다. 파라오는 지금 배교의 길을 달렸고, 그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굳게 정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더욱 그를 완악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출발점으로 삼고, 주님이 세우신 푯대를 향해 달리는 삶이 아니라면 아무리 빠른 경주자라도 느리게 걸어가는 올바른 성도를 이길 수 없습니다. 바른 길에 섰을 때, 주님은 은혜를 주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그러나 잘못된 길에 섰을 때 주님은 죄인들의 마음을 더욱 완악하게 하십니다.
9:18-35은 일곱 번째 재앙입니다. 일곱 번째 재앙은 우박이었습니다. 주님은 다시 사전에 무슨 재앙을 언제 어떻게 내릴 것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13-17절은 완악한 파라오를 향한 주님의 책망의 음성입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찍 일어나 파라오 앞에 서서 그에게 말하기를, 히브리 사람들의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 백성을 가게 하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13). 주님은 파라오에게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파라오는 간청을 하는 줄로 생각을 했든지 자신이 거부할 수도 있고, 묵살할 수도 있고, 무시해도 상관없다고 여겼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주] 하나님”이 전능하신 주요, 하나님이란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다스리는 이집트 땅에서 400년 씩(정확하게는 430년)이나 종살이를 하는1) 노예 백성들의 신을 대단하게 여길 왕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가능하면 어떤 이유와 명분을 대서라도, 힘으로라도 꼭 붙들어 두어야 할 사람들을 순순히 내어 줄 리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재앙은 필수적이었습니다. [이는 내가 이번에는 나의 모든 재앙을 네 마음과 네 신하들과 네 백성에게로 보내어 너로 하여금 온 땅에 나 같은 이가 없음을 알게 할 것임이라.](14). 주님은 남은 4 가지 재앙을 통해 끝장을 보실 것입니다. 심판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너로 하여금 온 땅에 나 같은 이가 없음을 알게 할 것임이라”(14b). 이것이 바로 주님이 내리신 재앙의 목적입니다. 완악한 죄인들이 주님을 아는데는 이렇게 값비싼 대가가 지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결과는 단지 불신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재앙으로 닥쳐오는 법입니다. 우리는 오늘을 살면서 이런 교훈을 마음 가운데 늘 새기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절대로 ‘그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주님을 알고, 믿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복인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이제 내가 내 손을 내밀어 역병으로 너와 네 백성을 치리니 네가 땅에서 끊어지리라.](15). 역병에 대한 경고는 이미 모세가 파라오를 처음 만났을 때 했던 것입니다. 죽음 다음으로 두려운 것이 질병입니다. 성경에서 질병은 출애굽기에서 이집트와 관련되어 처음 등장하는 말입니다. 창세기에는 질병이나 역병에 관한 기사가 전혀 없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하고 반역하면 이집트에 내린 질병을 그대로 이스라엘에 내리게 하실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또한 그분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이집트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붙게 하실 것이며](신28:60). 그러나 순종하면 그들은 어떤 병에도 걸리지 않게 됩니다. [이르시되, 네가 [주] 네 하나님의 음성에 부지런히 귀를 기울이고 내 눈앞에서 옳은 것을 행하며 내 명령들을 귀담아 들으며 내 모든 법규를 지키면 내가 이집트 사람들에게 내린 이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치유하는 [주]이기 때문이라, 하시니라.](출15:26). 오늘날 우리는 건강에 유난히 신경을 많이 씁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법이 바로 주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파라오와 이집트에 역병으로 치시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서는 ‘치유하시는 주님’이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바로 이런 까닭으로 너를 일으켜 세웠나니 /이것은/ 곧 네 안에서 내 권능을 보이고 내 이름을 온 땅에 밝히 드러내려 함이니라.](16). 주님은 파라오의 존재 목적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파라오가 왜 파라오가 되었는지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파라오는 자신이 잘 나서 왕위를 이어받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주님은 어떤 목적과 이유로 파라오를 일으켜 세웠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권세는 주님으로부터 나옵니다(롬13:1-8). 독재자나 포악한 왕, 잔인한 군주 역시 주님으로부터 세움을 받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대신 그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데모를 합니다.
왜 주님은 파라오를 일으켜 세우셨습니까? 오늘날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는 사람들로부터 도전을 받는 크리스천 청년들은 성경을 통해 분명한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왜 주님은 히틀러를 세우셨을까요? 왜 주님은 후세인을 세우시고, 김정일을 세우셨을까요?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요, 목사였던 본회퍼는 2차 대전중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했다가 발각돼 2년동안의 감옥생활 후 종전되기 직전 교수형으로 숨졌습니다. 독일의 부흥이 히틀러를 통해 완전히 말살되어 버렸기에 그의 마음은 더욱 비참했습니다. 신앙과 행동의 일치를 강조하던 그는 히틀러를 적그리스도로 보고 저항의 깃발을 들었습니다. 히틀러는 독실한 캐톨릭 교도였기에 독일의 교회를 ‘제국 교회’로 통합하여 자기 밑에 두었습니다. 이 때 일부 목사들은 ‘긴급 목사 동맹’을 결성하고 ‘고백 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이 때 본회퍼는 미국 뉴욕 소재 유니언 신학교에 초청 교수로 있었다가(1939년 7월) 히틀러 치하로 들어갔습니다. 전쟁이 나면 그곳을 떠나고 싶어하는 목사들과 달리 그는 본국을 향해 돌아갔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그의 귀국을 말렸지만, 미국과 독일 성도들에게 ??조국의 위기에 동포들과 함께 지내지 않는다면 전후 독일 기독교 재건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는 편지를 남겼습니다. 그가 독일에 가자마자 2개월 후 전쟁이 터졌고, 1943년 4월5일 비밀경찰 게슈타포가 본회퍼를 체포되었습니다. 1945년 4월9일 이른 아침 본회퍼는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다음과 같은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교수대로 끌려나갔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삶의 시작입니다”. 이런 그의 행동과 그가 남긴 옥중 서신은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의 저항 정신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가 남긴 말 중에 “만일 어떤 미친 운전사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인도 위로 차를 몰아 질주한다면 목사인 내 임무는 희생자들의 장례나 치러주고 가족들을 위로하는 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자동차에 올라타서 그 미친 운전사로부터 핸들을 빼앗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행동을 촉구하는 설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우리 성도들을 더욱 깨어 있게 합니다. “나는 히틀러를 죽이려고만 했지 그를 위해 기도해 보지는 않았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조국 교회와 이곳 미국에는 전쟁으로 인해, 여러 가지 이유로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크리스찬들은 어떤 경우에도 그런 행동에 가담해서는 안됩니다. 본 회퍼 목사는 위대한 신학자요, 행동하는 양심이었지만 그는 성경에서 보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파라오를 세웠듯이 히틀러를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이 세움을 받은 목적은 범죄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경건한 백성 위에 악한 지도자를 주시지 않습니다. 범죄한 백성들 위에 사악한 지도자를 주시는 것입니다. [또 내가 이집트 사람들을 잔인한 군주의 손에 넘겨주리니 포악한 왕이 그들을 다스리리라. {주} 곧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사19:4). 한국 사람들은 왜 이리도 지도자 복이 없는가? 하면서 한탄을 합니다. 그 전에 먼저 자신들의 무지와 어리석음, 범죄를 자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마지막 날 온 세상이 배교할 때 온 세상의 통치자로 주님은 적그리스도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민족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느부갓네살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보라, 내가 /사람을/ 보내어 북쪽의 모든 족속과 내 종 바빌론 왕 느부갓레살을 취하고 그들을 데려다가 이 땅과 그 거주민들과 주위의 이 모든 민족들을 치게 하고 그들을 진멸하여 그들로 하여금 놀랄 일과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며 영원한 폐허가 되게 하리라. [주]가 말하노라.](렘25:9). 오늘날로 하면 전범으로 몰려 죽어 마땅한 느부갓레살을 주님은 내 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주님이 민족들의 죄를 심판할 주님의 도구로서 도끼의 역할을 했습니다(렘51:20). 열혈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폭탄 테러를 하든지 자살 특공대를 조직해서라도 그를 죽이는 것이 애국, 애족인 것 같지만 주님은 예레미야 대언자를 통해 아무 저항도 하지 말고 순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심판인 줄 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식있는 젊은 크리스찬들이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일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명분없는 전쟁을 일으켰다는 비난을 하는 것을 보고 듣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주님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시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바로 이런 까닭으로 너를 일으켜 세웠나니 /이것은/ 곧 네 안에서 내 권능을 보이고 내 이름을 온 땅에 밝히 드러내려 함이니라.](16). 주님이 파라오를 제거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헤롯을 제거하실 때 간단하게 벌레를 먹게 하심으로 즉사(卽死) 시킨 예도 있습니다. 부하들의 반란으로 암살된 왕들도 부지기수입니다. 주님은 악한 영들을 보내셔서 아비멜렉(기드온의 아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는 떨어지는 맷돌에 맞아 머리가 깨어져 죽었습니다. 주님이 출애굽을 하는데 힘드실 일이나 걸리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재앙을 통해 하실 일이 있었습니다. 파라오를 일으켜 세우신 목적은 [... 곧 네 안에서 내 권능을 보이고 내 이름을 온 땅에 밝히 드러내려 함이니라.](16)는 말씀대로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단지 몇 몇 사람들에게만 이름이 알려지고 계시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식구 몇 명, 그의 종들 정도나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이삭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 부족들이 희미하게 이삭의 하나님에 대해 알았고, 야곱의 때에도 그의 식구 70명과 그 외에 몇 명 정도만이 하나님을 알았을 뿐입니다. 400년 동안 이집트의 노예 생활을 통해 이스라엘은 그 수에서는 능히 한 국가를 이룰 정도가 되었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완전히 잊혀져 가고 있었습니다. 이 때 이집트가 그 동안 행한 악행을 징벌하시고 심판하시는 과정을 통해 온 세상에 하나님의 권능과 이름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의도와 목적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성도들은 독재자들을 향해, 불의를 대적해서 끝없이 자살 폭탄이나 테러를 감행해야 할 것입니다.
출애굽의 과정을 통해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주변 모든 지역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다 알게 되었고, 간담이 녹아 났습니다. 이런 심판은 악인들에게 재앙이었지만 그 중에 몇몇에게는 명백한 구원의 기회가 제공되기도 했습니다. 여리고의 창녀 라합과 같이 하나님의 권능을 통해 하나님을 안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일들에 관하여 들을 때에 곧 마음이 녹았고 또 너희로 인하여 어떤 사람에게도 더 이상 용기가 남아 있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 너희 하나님 곧 그분께서 위로 하늘에서와 아래로 땅에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니라.](수2:11). 이것은 대환란 때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표를 받고, 배교하겠지만 몇몇 사람들은 구원을 얻는 기회가 제공될 것입니다.
다시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바로 이런 까닭으로 너를 일으켜 세웠나니2) /이것은/ 곧 네 안에서 내 권능을 보이고 내 이름을 온 땅에 밝히 드러내려 함이니라.](16). 구원 예정론에 빠진 일부 장로 교회 성도들은 이런 구절들을 대할 때면 매우 당황해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파라오를 멸하기로 세우셨구나! 하나님께서 누구는 구원하기로 정하셨구나! 이렇게 판단하고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확신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딤전2:4)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좀 더 정확한 본문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파라오를 사용하신데는 그를 심판하려는 목적보다는 그렇게 완악한 죄인을 향해서도 무려 10번에 걸친 오래 참으심을 보여 주는데 있습니다. 이미 파라오는 범죄로 가득 차서 파멸하기로 정한 그릇이었다 할지라도 주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노를 보이시고 자신의 권능을 알게 하고자 하사 파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들에게 심히 오래 참으심으로 인내하시고](롬9:22). 주님은 지금도 벌써 심판해도 몇 번을 더 심판해야 마땅한 죄인들을 향해서도 오래 참으심으로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계십니다.
파라오나 느부갓네살이나 앗시리아의 왕이나 유대의 악한 역대 왕들이나 근대사와 현대사의 사악한 통치자들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의 사악함보다 주님의 오래 참으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드러나지 않았을 뿐 그들 못잖은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보여준 주님의 오래참으심이 저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기에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입었던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디신 것이 아니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벧후3:15). 파라오보다 몇 백배는 의롭다고 생각하는 많은 불경건한 현대판 바리새인들이 파라오를 빨리 심판하지 않으셔서 죄없는 민중들의 경제 생활을 파탄에 빠뜨린다고 분개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들은 정말 위선의 극치를 달리는 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목적으로 파라오를 들어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쓰임 받는다는 자체가 영광은 아닙니다. 주의 사역에는 악인들도 얼마든지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돈을 벌 목적으로 출판사를 세워 성경을 인쇄하고, 복음 서적을 출간한다 해도 주님은 그를 들어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릇된 목적으로 신학원이나 신학교를 만들어 돈을 번다해도 주님은 그 기관을 통해 훌륭한 복음 전도자를 양성해 내실 수 있습니다. 은사란 주님께서 특수한 목적을 위해서 특정한 재능을 부여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 인격이나 열매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성도다운 삶을 사는데는 은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주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은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은사를 자랑하는 성도들 앞에서 자기는 더 많은 은사를 소유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의 고백을 보십시오.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하게 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 자신이 버림을 받을까 염려함이로다.](고전9:27).
17절을 보십시오. [네가 여전히 내 백성을 대적하여 네 자신을 높이고 그들을 가게 하지 아니하려느냐?](17). 파라오의 죄악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파라오는 반복적인 이적과 모세와 아론을 통해 전해지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자신을 높였습니다. 교만은 파멸이외에 치료책이 없습니다. 주님은 전대 미문의 우박 재앙을 내리시기 전에 그를 엄중히 책망하셨습니다. 이런 경고를 통해 뉘우침이 없다면 주님이 그를 위해 하실 수 있는 것이라곤 심판 밖에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책망을 거부하는 자는 주님을 도리어 책망하는 자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파라오는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자기 뜻대로 행하는 고집을 부렸는데, 이런 행위는 주를 책망하는 자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 태어난 자든지 타국인이든지 조금이라도 자기 뜻대로 행하면 [주]를 책망하는 자가 되나니 그 혼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니라.](민15:30). 이 말씀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두려운 경고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우리의 죄를 대신 감당하신 주님의 십자가를 향해 나아갑시다. 우리를 향해 오래 참으신 주님께 죄를 자백하고, 새롭게 은혜를 덧입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주의 뜻대로 살기를 거부하고 세상과 타협하고, 적당히 육신적으로 살며 은밀한 죄 가운데 사는 성도들은 깊이 있는 회개를 통해 주님과의 친교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파라오에게 [내가 바로 이런 까닭으로 너를 일으켜 세웠나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까닭으로 일으켜 세워졌습니까?
첫째, 우리는 복음 전파를 위해 일으켜 세워졌습니다. [이는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령하셨음이니 곧 이르시되, 내가 너를 이방인들의 빛으로 세웠나니 이것은 너로 하여금 땅 끝까지 이르러 구원을 이루게 하려 함이라, 하셨느니라, 하니](행13:47).
둘째, 우리는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세움심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호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느니라.](빌1:2).
셋째, 우리는 박해를 받도록 세움을 받았습니다. [아무도 이런 박해로 인해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런 박해를 받도록 세우심을 받은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아느니라.](살전3:3). 저는 목자와 교사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이방인들의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받았느니라.](딤후1:11). 이런 까닭에 내가 너를 일으켜 세웠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 깊이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XXVI)
말씀: 출애굽기 9:1-17
요절: 출애굽기 9:16
26. 이런 까닭으로 너를 일으켜 세웠나니
사람이든 사물이든 존재 목적이 있습니다. 그 존재 목적을 알고 살 때, 삶의 존재 의의를 느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결여되면 삶이 무기력해지고, 정도가 심하면 아무렇게나 살거나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아주 어릴 때부터 자신도 모르게 ‘나는 누구인가?’이런 의문을 던지면서 그 답을 얻고자 부단히 애를 씁니다. 그런데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으로 정하는 것과 하나님이 존재 이유를 말씀해 주시는 것과 큰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실존과 본질을 논하는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말하고 가르치는 바를 자신도 모른 채 살다가 죽습니다. 성경을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도 우리는 인생의 존재 이유와 목적, 존재 의의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의 존재 의의는 바로 주님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는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창조되었음이라.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왕좌들이나 통치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들이나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창조되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노라.](골1:16).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미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분명히 주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주님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이는 설령 마귀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지독한 범죄자요, 독재자라 해도 매 한 가지입니다. 모든 사물의 존재 목적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계4:11). [오 {주}여, 주는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하시오니 이는 주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음이요, 또 모든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려고 존재하며 창조되었음이니이다, 하더라.](계4:11). 하지만 모든 피조물이 그 창조 목적대로, 존재 이유대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에녹처럼 주님과 동행하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증거를 얻은 자가 있지만 주님의 진노를 하루하루 쌓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파라오의 존재 목적을 알려 주셨는데, 이 사건은 이 세상의 모든 악인들의 존재 이유이기도합니다. 물론 파라오 당사자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제 멋에 살다가 죽을 자였지만 주님은 모세를 통해 파라오의 존재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출9:16).
본문 말씀을 보겠습니다. 9:1-7절은 다섯 번째 재앙입니다. 주님은 심한 전염병으로 이집트를 치셨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파라오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들의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 백성을 가게 하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이는 만일 네가 그들이 가는 것을 거부하고 그들을 잡아 두면 보라, [주]의 손이 들에 있는 네 가축 곧 말과 나귀와 낙타와 소와 양들에게 임하여 매우 심한 전염병이 있을 것임이라.](1-3). 고대 사회에서 이런 가축들은 매우 중요한 재산이었습니다. 농경 사회에서 가축은 고기와 가죽, 털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엄청난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서 가족과 사회, 국가 경제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주님은 이집트인들의 가축들을 치심으로 이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광우병이나 구제역과 같은 질병으로 인해 수만 마리의 가축들을 도살하는 장면을 보셨을 것입니다. 어떤 지역에 콜레라가 발생하면 그 지역의 돼지들은 모두 죽습니다. 닭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본문에서 주님이 내리신 질병은 무엇인지 나와있지 않지만 심한 병이었고, 모두 죽었습니다(6).
[다음 날에 [주]께서 그 일을 행하시매 이집트의 가축은 다 죽었으나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니라.](6). 주님은 악인들이 의지하던 것들을 하나하나 다 쳐 나가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구별을 두셨습니다. 주님은 파리 재앙을 주실 때,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구별을 두셨듯이 가축들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도 마찬가지셨습니다. [또 [주]가 이스라엘의 가축과 이집트의 가축을 분리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에 속한 것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4). 이렇게 연속 두 번으로 사람과 가축들을 철저히 구별하심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파라오 같은 악인들은 자신의 종이나 백성이 죽는 것보다 자신의 재물이 날아가는 것을 더 싫어합니다. 전쟁이 나서 사람이 죽는 것보다 전쟁이 나서 경제가 붕괴되고, 그동안 쌓아 올린 부(富)의 상실을 더 두려워 합니다. 사람들이 경제를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그것이 무너지는 아픔이 큽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파라오가 신하들로부터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않았고, 이집트의 가축만 죽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얼마나 분노했겠습니까? [이에 파라오가 /사람을/ 보내어 본즉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였더라. 이에 파라오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 백성을 가게 하지 아니하니라.](7). 파라오는 모세의 말대로 된 것을 확인하고도 전혀 뉘우침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오기가 발동하고, 악이 받쳤습니다. 다섯 번째 재앙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영적 교훈은 매우 간단합니다. 가축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양식으로 주신 것입니다. 가축은 인간들의 다스림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집트의 가축을 치심으로 그들의 수고와 노동을 받지 않으신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거만한 눈빛과 교만한 마음과 사악한 자의 쟁기질은 죄니라.](잠21:4). 사악한 자들의 쟁기질, 즉 사악한 자들의 수고와 노력은 하나님께서 파멸의 대상으로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의 수고는 주님께서 다 받으시고, 그 행위의 수고에 대한 합당한 상급을 주십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세상과 세상의 모든 수고는 다 불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여섯 번째 재앙은 9:8-12절입니다. 앞선 두 번의 재앙(네 번째, 다섯 번째)은 사전에 경고를 한 후에 재앙이 임했지만 세 번째인 여섯 번째 심판은 사전 경고없이 바로 임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화로에서 재 두 움큼을 취하고 모세가 파라오의 눈앞에서 하늘을 향하여 뿌리라.](8). 주님은 파라오의 불순종을 보시고 곧 바로 더 강력한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들에 있는 이집트의 짐승이 죽었지만 이번에는 집에 있는 이집트의 짐승과 사람들에게 다 같이 물집을 내며 터지는 종기를 주셨습니다. 화로에서 재 두움큼을 취했는데 이 화로는 당시에 신들에게 분향하던 화로이며, 때로는 악의 신 타이푼(Typoon)에게 아이들을 인신 공양할 때 쓰는 화로였습니다. 악의 신에게 에게 인신 공양이 드려진 것은 이집트 땅에 임할 각종 재앙을 없애 달라는 기원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파라오의 눈 앞에서 그 화로의 재 두 움큼을 잡고 하늘을 향해 뿌리게 함으로써 그들이 기원하던 제사들이 얼마나 무용한 것이며, 악한 것인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바로 그들이 악을 막아 달라고 드렸던 화로의 재들이 지금은 자신들의 몸에 물집을 내며 터지는 종창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 재가 온 이집트 땅에서 작은 티끌이 되어 온 이집트 땅에서 사람과 짐승에게 물집을 내며 터지는 종기가 되리라, 하시매](9). 주님은 우리의 행위대로 그대로 갚으시는 의로운 하나님이십니다. 이 재앙을 통해 주님이 가르쳐 주신 것은 인간들의 종교 행위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10-11절, [그들이 화로의 재를 취해 파라오 앞에 서서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뿌리니 그것이 사람과 짐승에게 물집을 내며 터지는 종기가 되니라. 이 종기로 인하여 마술사들이 모세 앞에 서지 못하니 이는 종기가 마술사들과 온 이집트 사람들에게 생겼음이라.](10-11).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도 인간들의 종교를 모두 파괴하시고, 그 종교에 가담했던 모든 자들을 철저히 벌 주실 것입니다. 복을 빌고, 안녕을 빌고, 건강을 빌기 위해 드려졌던 그 희생물들이 자신들에게 화로 돌아올 것입니다.
피부병은 가렵고, 고통스런 것인 동시에 몸을 더럽히고, 추하게 만듭니다. 특히 신경성 피부병은 신경을 타고 전신을 타고 돌기 때문에 그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피부병은 보는 사람도 부담스럽습니다. 대부분 전염성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접근하지도 못합니다. 이집트에 내려진 이 피부병의 이름은 그 학명이 ‘이집트의 종기’입니다. [[주]께서 이집트의 종기와 치질과 딱지와 가려움으로 너를 치시리니 네가 낫지 아니할 것이며](신28:27). 이 병은 주님이 치유해주지 않으시면 낫지 않는 불치병입니다. 이 종기는 계시록 16:1-3절에 첫 번째 천사가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을 쏟아 부을 때 생기는 병의 모형입니다. [첫째 /천사/가 가서 자기 대접을 땅에 쏟아 부으매 짐승의 표를 가진 사람들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한 자들에게 악취가 나며 몹시 아픈 헌데가 생기더라.](계16:2). 사람은 참으로 고통에 약합니다. 자신의 손톱 밑에 있는 작은 가시 하나가 심장병이나 간암을 앓는 환자의 고통보다 크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그런데 온 몸에 종기가 터지고 심한 가려움으로 헌데가 생긴다면 그 괴로움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았더라.](12). 10-11절 말씀을 볼 때 파라오는 종기가 걸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파라오는 더욱 완악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회개하기를 거부한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삶의 방향, 생각의 방향이 얼마나 빨리 달리는가 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빨리 달리더라도 방향이 잘못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한 때 전도서에 [내가 돌이켜 해 아래에서 보니 경주가 빠른 자들에게 돌아가지 아니하고...](전9:11a)란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방향을 말씀한 것입니다. 파라오는 지금 배교의 길을 달렸고, 그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굳게 정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더욱 그를 완악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출발점으로 삼고, 주님이 세우신 푯대를 향해 달리는 삶이 아니라면 아무리 빠른 경주자라도 느리게 걸어가는 올바른 성도를 이길 수 없습니다. 바른 길에 섰을 때, 주님은 은혜를 주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그러나 잘못된 길에 섰을 때 주님은 죄인들의 마음을 더욱 완악하게 하십니다.
9:18-35은 일곱 번째 재앙입니다. 일곱 번째 재앙은 우박이었습니다. 주님은 다시 사전에 무슨 재앙을 언제 어떻게 내릴 것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13-17절은 완악한 파라오를 향한 주님의 책망의 음성입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찍 일어나 파라오 앞에 서서 그에게 말하기를, 히브리 사람들의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 백성을 가게 하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13). 주님은 파라오에게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파라오는 간청을 하는 줄로 생각을 했든지 자신이 거부할 수도 있고, 묵살할 수도 있고, 무시해도 상관없다고 여겼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주] 하나님”이 전능하신 주요, 하나님이란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다스리는 이집트 땅에서 400년 씩(정확하게는 430년)이나 종살이를 하는1) 노예 백성들의 신을 대단하게 여길 왕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가능하면 어떤 이유와 명분을 대서라도, 힘으로라도 꼭 붙들어 두어야 할 사람들을 순순히 내어 줄 리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재앙은 필수적이었습니다. [이는 내가 이번에는 나의 모든 재앙을 네 마음과 네 신하들과 네 백성에게로 보내어 너로 하여금 온 땅에 나 같은 이가 없음을 알게 할 것임이라.](14). 주님은 남은 4 가지 재앙을 통해 끝장을 보실 것입니다. 심판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너로 하여금 온 땅에 나 같은 이가 없음을 알게 할 것임이라”(14b). 이것이 바로 주님이 내리신 재앙의 목적입니다. 완악한 죄인들이 주님을 아는데는 이렇게 값비싼 대가가 지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결과는 단지 불신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재앙으로 닥쳐오는 법입니다. 우리는 오늘을 살면서 이런 교훈을 마음 가운데 늘 새기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절대로 ‘그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주님을 알고, 믿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복인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이제 내가 내 손을 내밀어 역병으로 너와 네 백성을 치리니 네가 땅에서 끊어지리라.](15). 역병에 대한 경고는 이미 모세가 파라오를 처음 만났을 때 했던 것입니다. 죽음 다음으로 두려운 것이 질병입니다. 성경에서 질병은 출애굽기에서 이집트와 관련되어 처음 등장하는 말입니다. 창세기에는 질병이나 역병에 관한 기사가 전혀 없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하고 반역하면 이집트에 내린 질병을 그대로 이스라엘에 내리게 하실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또한 그분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이집트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붙게 하실 것이며](신28:60). 그러나 순종하면 그들은 어떤 병에도 걸리지 않게 됩니다. [이르시되, 네가 [주] 네 하나님의 음성에 부지런히 귀를 기울이고 내 눈앞에서 옳은 것을 행하며 내 명령들을 귀담아 들으며 내 모든 법규를 지키면 내가 이집트 사람들에게 내린 이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치유하는 [주]이기 때문이라, 하시니라.](출15:26). 오늘날 우리는 건강에 유난히 신경을 많이 씁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법이 바로 주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파라오와 이집트에 역병으로 치시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서는 ‘치유하시는 주님’이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바로 이런 까닭으로 너를 일으켜 세웠나니 /이것은/ 곧 네 안에서 내 권능을 보이고 내 이름을 온 땅에 밝히 드러내려 함이니라.](16). 주님은 파라오의 존재 목적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파라오가 왜 파라오가 되었는지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파라오는 자신이 잘 나서 왕위를 이어받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주님은 어떤 목적과 이유로 파라오를 일으켜 세웠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권세는 주님으로부터 나옵니다(롬13:1-8). 독재자나 포악한 왕, 잔인한 군주 역시 주님으로부터 세움을 받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대신 그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데모를 합니다.
왜 주님은 파라오를 일으켜 세우셨습니까? 오늘날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는 사람들로부터 도전을 받는 크리스천 청년들은 성경을 통해 분명한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왜 주님은 히틀러를 세우셨을까요? 왜 주님은 후세인을 세우시고, 김정일을 세우셨을까요?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요, 목사였던 본회퍼는 2차 대전중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했다가 발각돼 2년동안의 감옥생활 후 종전되기 직전 교수형으로 숨졌습니다. 독일의 부흥이 히틀러를 통해 완전히 말살되어 버렸기에 그의 마음은 더욱 비참했습니다. 신앙과 행동의 일치를 강조하던 그는 히틀러를 적그리스도로 보고 저항의 깃발을 들었습니다. 히틀러는 독실한 캐톨릭 교도였기에 독일의 교회를 ‘제국 교회’로 통합하여 자기 밑에 두었습니다. 이 때 일부 목사들은 ‘긴급 목사 동맹’을 결성하고 ‘고백 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이 때 본회퍼는 미국 뉴욕 소재 유니언 신학교에 초청 교수로 있었다가(1939년 7월) 히틀러 치하로 들어갔습니다. 전쟁이 나면 그곳을 떠나고 싶어하는 목사들과 달리 그는 본국을 향해 돌아갔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그의 귀국을 말렸지만, 미국과 독일 성도들에게 ??조국의 위기에 동포들과 함께 지내지 않는다면 전후 독일 기독교 재건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는 편지를 남겼습니다. 그가 독일에 가자마자 2개월 후 전쟁이 터졌고, 1943년 4월5일 비밀경찰 게슈타포가 본회퍼를 체포되었습니다. 1945년 4월9일 이른 아침 본회퍼는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다음과 같은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교수대로 끌려나갔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삶의 시작입니다”. 이런 그의 행동과 그가 남긴 옥중 서신은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의 저항 정신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가 남긴 말 중에 “만일 어떤 미친 운전사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인도 위로 차를 몰아 질주한다면 목사인 내 임무는 희생자들의 장례나 치러주고 가족들을 위로하는 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자동차에 올라타서 그 미친 운전사로부터 핸들을 빼앗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행동을 촉구하는 설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우리 성도들을 더욱 깨어 있게 합니다. “나는 히틀러를 죽이려고만 했지 그를 위해 기도해 보지는 않았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조국 교회와 이곳 미국에는 전쟁으로 인해, 여러 가지 이유로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크리스찬들은 어떤 경우에도 그런 행동에 가담해서는 안됩니다. 본 회퍼 목사는 위대한 신학자요, 행동하는 양심이었지만 그는 성경에서 보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파라오를 세웠듯이 히틀러를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이 세움을 받은 목적은 범죄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경건한 백성 위에 악한 지도자를 주시지 않습니다. 범죄한 백성들 위에 사악한 지도자를 주시는 것입니다. [또 내가 이집트 사람들을 잔인한 군주의 손에 넘겨주리니 포악한 왕이 그들을 다스리리라. {주} 곧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사19:4). 한국 사람들은 왜 이리도 지도자 복이 없는가? 하면서 한탄을 합니다. 그 전에 먼저 자신들의 무지와 어리석음, 범죄를 자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마지막 날 온 세상이 배교할 때 온 세상의 통치자로 주님은 적그리스도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민족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느부갓네살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보라, 내가 /사람을/ 보내어 북쪽의 모든 족속과 내 종 바빌론 왕 느부갓레살을 취하고 그들을 데려다가 이 땅과 그 거주민들과 주위의 이 모든 민족들을 치게 하고 그들을 진멸하여 그들로 하여금 놀랄 일과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며 영원한 폐허가 되게 하리라. [주]가 말하노라.](렘25:9). 오늘날로 하면 전범으로 몰려 죽어 마땅한 느부갓레살을 주님은 내 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주님이 민족들의 죄를 심판할 주님의 도구로서 도끼의 역할을 했습니다(렘51:20). 열혈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폭탄 테러를 하든지 자살 특공대를 조직해서라도 그를 죽이는 것이 애국, 애족인 것 같지만 주님은 예레미야 대언자를 통해 아무 저항도 하지 말고 순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심판인 줄 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식있는 젊은 크리스찬들이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일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명분없는 전쟁을 일으켰다는 비난을 하는 것을 보고 듣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주님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시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바로 이런 까닭으로 너를 일으켜 세웠나니 /이것은/ 곧 네 안에서 내 권능을 보이고 내 이름을 온 땅에 밝히 드러내려 함이니라.](16). 주님이 파라오를 제거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헤롯을 제거하실 때 간단하게 벌레를 먹게 하심으로 즉사(卽死) 시킨 예도 있습니다. 부하들의 반란으로 암살된 왕들도 부지기수입니다. 주님은 악한 영들을 보내셔서 아비멜렉(기드온의 아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는 떨어지는 맷돌에 맞아 머리가 깨어져 죽었습니다. 주님이 출애굽을 하는데 힘드실 일이나 걸리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재앙을 통해 하실 일이 있었습니다. 파라오를 일으켜 세우신 목적은 [... 곧 네 안에서 내 권능을 보이고 내 이름을 온 땅에 밝히 드러내려 함이니라.](16)는 말씀대로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단지 몇 몇 사람들에게만 이름이 알려지고 계시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식구 몇 명, 그의 종들 정도나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이삭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 부족들이 희미하게 이삭의 하나님에 대해 알았고, 야곱의 때에도 그의 식구 70명과 그 외에 몇 명 정도만이 하나님을 알았을 뿐입니다. 400년 동안 이집트의 노예 생활을 통해 이스라엘은 그 수에서는 능히 한 국가를 이룰 정도가 되었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완전히 잊혀져 가고 있었습니다. 이 때 이집트가 그 동안 행한 악행을 징벌하시고 심판하시는 과정을 통해 온 세상에 하나님의 권능과 이름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의도와 목적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성도들은 독재자들을 향해, 불의를 대적해서 끝없이 자살 폭탄이나 테러를 감행해야 할 것입니다.
출애굽의 과정을 통해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주변 모든 지역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다 알게 되었고, 간담이 녹아 났습니다. 이런 심판은 악인들에게 재앙이었지만 그 중에 몇몇에게는 명백한 구원의 기회가 제공되기도 했습니다. 여리고의 창녀 라합과 같이 하나님의 권능을 통해 하나님을 안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일들에 관하여 들을 때에 곧 마음이 녹았고 또 너희로 인하여 어떤 사람에게도 더 이상 용기가 남아 있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 너희 하나님 곧 그분께서 위로 하늘에서와 아래로 땅에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니라.](수2:11). 이것은 대환란 때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표를 받고, 배교하겠지만 몇몇 사람들은 구원을 얻는 기회가 제공될 것입니다.
다시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바로 이런 까닭으로 너를 일으켜 세웠나니2) /이것은/ 곧 네 안에서 내 권능을 보이고 내 이름을 온 땅에 밝히 드러내려 함이니라.](16). 구원 예정론에 빠진 일부 장로 교회 성도들은 이런 구절들을 대할 때면 매우 당황해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파라오를 멸하기로 세우셨구나! 하나님께서 누구는 구원하기로 정하셨구나! 이렇게 판단하고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확신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딤전2:4)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좀 더 정확한 본문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파라오를 사용하신데는 그를 심판하려는 목적보다는 그렇게 완악한 죄인을 향해서도 무려 10번에 걸친 오래 참으심을 보여 주는데 있습니다. 이미 파라오는 범죄로 가득 차서 파멸하기로 정한 그릇이었다 할지라도 주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노를 보이시고 자신의 권능을 알게 하고자 하사 파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들에게 심히 오래 참으심으로 인내하시고](롬9:22). 주님은 지금도 벌써 심판해도 몇 번을 더 심판해야 마땅한 죄인들을 향해서도 오래 참으심으로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계십니다.
파라오나 느부갓네살이나 앗시리아의 왕이나 유대의 악한 역대 왕들이나 근대사와 현대사의 사악한 통치자들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의 사악함보다 주님의 오래 참으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드러나지 않았을 뿐 그들 못잖은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보여준 주님의 오래참으심이 저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기에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입었던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디신 것이 아니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벧후3:15). 파라오보다 몇 백배는 의롭다고 생각하는 많은 불경건한 현대판 바리새인들이 파라오를 빨리 심판하지 않으셔서 죄없는 민중들의 경제 생활을 파탄에 빠뜨린다고 분개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들은 정말 위선의 극치를 달리는 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목적으로 파라오를 들어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쓰임 받는다는 자체가 영광은 아닙니다. 주의 사역에는 악인들도 얼마든지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돈을 벌 목적으로 출판사를 세워 성경을 인쇄하고, 복음 서적을 출간한다 해도 주님은 그를 들어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릇된 목적으로 신학원이나 신학교를 만들어 돈을 번다해도 주님은 그 기관을 통해 훌륭한 복음 전도자를 양성해 내실 수 있습니다. 은사란 주님께서 특수한 목적을 위해서 특정한 재능을 부여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 인격이나 열매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성도다운 삶을 사는데는 은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주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은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은사를 자랑하는 성도들 앞에서 자기는 더 많은 은사를 소유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의 고백을 보십시오.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하게 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 자신이 버림을 받을까 염려함이로다.](고전9:27).
17절을 보십시오. [네가 여전히 내 백성을 대적하여 네 자신을 높이고 그들을 가게 하지 아니하려느냐?](17). 파라오의 죄악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파라오는 반복적인 이적과 모세와 아론을 통해 전해지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자신을 높였습니다. 교만은 파멸이외에 치료책이 없습니다. 주님은 전대 미문의 우박 재앙을 내리시기 전에 그를 엄중히 책망하셨습니다. 이런 경고를 통해 뉘우침이 없다면 주님이 그를 위해 하실 수 있는 것이라곤 심판 밖에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책망을 거부하는 자는 주님을 도리어 책망하는 자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파라오는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자기 뜻대로 행하는 고집을 부렸는데, 이런 행위는 주를 책망하는 자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 태어난 자든지 타국인이든지 조금이라도 자기 뜻대로 행하면 [주]를 책망하는 자가 되나니 그 혼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니라.](민15:30). 이 말씀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두려운 경고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우리의 죄를 대신 감당하신 주님의 십자가를 향해 나아갑시다. 우리를 향해 오래 참으신 주님께 죄를 자백하고, 새롭게 은혜를 덧입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주의 뜻대로 살기를 거부하고 세상과 타협하고, 적당히 육신적으로 살며 은밀한 죄 가운데 사는 성도들은 깊이 있는 회개를 통해 주님과의 친교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파라오에게 [내가 바로 이런 까닭으로 너를 일으켜 세웠나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까닭으로 일으켜 세워졌습니까?
첫째, 우리는 복음 전파를 위해 일으켜 세워졌습니다. [이는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령하셨음이니 곧 이르시되, 내가 너를 이방인들의 빛으로 세웠나니 이것은 너로 하여금 땅 끝까지 이르러 구원을 이루게 하려 함이라, 하셨느니라, 하니](행13:47).
둘째, 우리는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세움심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호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느니라.](빌1:2).
셋째, 우리는 박해를 받도록 세움을 받았습니다. [아무도 이런 박해로 인해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런 박해를 받도록 세우심을 받은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아느니라.](살전3:3). 저는 목자와 교사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이방인들의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받았느니라.](딤후1:11). 이런 까닭에 내가 너를 일으켜 세웠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 깊이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권별 강해 > 출애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할 수 없나니 (0) | 2005.04.07 |
---|---|
이번에는 내가 범죄하였노라 (0) | 2005.04.07 |
구별을 두리니 (0) | 2005.04.06 |
이것은 주님의 손가락이니이다. (0) | 2005.04.06 |
열 가지 재앙에 대해 (0) | 2005.0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