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2003년 4월 06일- 출애굽기        




출애굽기(XXVII)




말씀: 출애굽기 9:18-35

요절: 출애굽기 9:27




27. 이번에는 내가 범죄하였노라




세상을 살다 보면 별의 별 일을 다 보고 듣습니다. 청렴결백하다고 국가에서 훈장을 받은 사람이 알고보니 사기꾼이었더라는 이야기나 평생 거지로 구걸하는 사람이 후에 보니 백만장자더라는 식의 예기치 않는 이야기들을 멀리서가 아니라 자신의 주변에서 보고 들을 때, ‘살다 보니 별 일을 다 보네’라는 말을 합니다. 여러분 주위에도 그런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가장 놀라게 하는 일은 어떤 놀라운 뉴스나 사건보다는 자신이 알던 사람이 변했을 때입니다. 부랑배나 모리배로 살던 건달이 착실한 사람으로 변했을 때, 반대로 높은 도덕성과 경건으로 존경받던 사람이 몰락했을 때 우리는 매우 놀라게 됩니다. ‘사람이 변했다.’, ‘사람이 달라졌다.’는 말을 들을 때면  “과연 사람도 변할 수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저는 사람이 딱 한 가지 경우에 변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을 경우입니다. 주님의 우편에 못 박힌 십자가의 강도가 동료 강도와 함께 주님을 욕하다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긍휼을 구하는 장면은 사람이 이렇게도 변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이런 변화된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로 넘쳐 납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시몬이 베드로로, 사울이 바울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인 교제와 만남을 지속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종교는 결코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사람은 변하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되면 사람은 변화됩니다. 저는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참된 변화를 겪은 사람들이라고 믿습니다.

기적을 체험하고, 은사를 많이 받았다고 영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3년 반 동안 예수님과 동행했던 제자들은 수없이 많은 표적을 보고 체험했습니다. 그들은 직접 병자들을 고쳐 보기도 했고, 마귀를 쫓아 내 본 경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체험과 능력은 그들 중 아무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육신적이었습니다. 그들이 참다운 변화를 경험한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은 후였습니다. 성도들이 인격적인 성숙과 성장을 위해서는 지속적인 은혜의 교제, 말씀 안에 거하며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통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은 파라오가 ‘나는 범죄하였노라’고 고백합니다. 파라오는 변한 것 같지만 결코 변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모세와 아론을 통해 우박 재앙을 온 이집트에 내렸습니다. 이 재앙의 목적은 ‘땅이 주의 것인 줄을 파라오에게 알게 하기 위함’(29b)이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일 이맘 때에 내가 심한 우박을 내리리니 이집트가 창건된 이래로 지금까지 이집트에 그와 같은 것이 있지 아니하였노라](18). 주님은 다시 먼저 경고를 주셨습니다. 우박 재앙은 단지 우박이 내리는 정도가 아닙니다. 천둥과 동반한 우박이었습니다. 동시에 불이 땅위로 달리는 그런 우박이었는데, 이는 천둥과 비가 섞여서 번개가 연이어 땅에 내리쳤음을 보여 줍니다. 땅에 계속해서 벼락이 쳤다면 이는 핵무기 못잖은 강력한 재앙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23-24절에 보면 이 재앙의 정도가 잘 나와 있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자기 막대기를 내밀매 주께서 천둥과 우박을 보내시니 불이 땅위에 달려 나가더라. 주께서 우박을 이집트 땅위에 내리시매 우박이 심히 맹렬하게 떨어지고 불덩이가 우박에 섞여 떨어지니 이집트가 국가가 된 이래로 온 이집트 땅에 그와 같은 것이 없었더라.](23-24). 시편 기자는 이 사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시편 78:47-48, [그들의 포도나무를 우박으로, 그들의 뽕나무를 서리로 멸하셨으며 또 그들의 가축을 우박에, 그들의 양떼를 뜨거운 벼락에 넘겨주셨으며](시78:47-48). 우박, 번개, 천둥, 서리, 벼락이 온 이집트 땅에 내리쳤다면 그 피해는 계산이 불가능할 정도일 것입니다. 특별한 자연 재해는 파라오와 이집트 백성들에게 일반적인 자연 현상이 아니라 주님의 심판임을 분명하게 알게 해 주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런 자연 재해가 일어나면 국가에서는 재해 본부가 설치되고 사후 수습을 해야하는데, 파라오는 감히 어떻게 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재앙을 어떻게 수습하라고 말씀하시는 대신 미리 알려 주심으로 피할 길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내리시는 재앙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재앙을 피할 수 있는 길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사람을 보내어 네 가축과 들에 있는 네 소유를 다 모으라. 이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들에 있어서 집으로 오지 않는 것들 위에 우박이 내려 그것들을 죽게 할 것임이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19). 주님은 심판에 앞서 그 피할 길을 주셨습니다. 심판에 앞서 경고가 주어진다!는 것은 성경의 일관된 원리입니다. 언제나 주님은 심판에 앞서 경고를 주시고, 피할 길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지 않을 때 재앙은 그대로 임합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무서워 떨어야 정상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문자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면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그러나 파라오는 끄덕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박국 대언자는 이런 재앙을 직접 보지 않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도 두려워 떨었습니다. [오 주여, 내가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두려웠나이다....](합3:2). 이것이 파라오와 하나님의 사람의 차이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두려웠고, 떨었습니다. 3: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들을 때에 내 배가 떨었으며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썩게 하는 것이 내 뼈속에 들어오매 내 몸이 내 속에서 떨었나니...](합3:16).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라면 주의 경고와 심판의 말씀을 들을 때 이런 떨림과 두려움이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현대의 기독교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주님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특히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습니다. 이는 파라오의 마음이요, 사악한 마음입니다.

말씀을 듣고 두려워 떨 줄 아는 사람은 주의 은혜를 입습니다. 말씀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을 주님은 보살피십니다. 이사야 66:2,5절을 보십시오. [이는 이 모든 것을 내 손이 만들었기 때문이라. 그것들이 지금까지 존재해 왔느니라. 주가 말하노라. 오직 가난하고 영으로 통회하며 내 말에 떠는 자는 내가 보살피느니라.](사66:2).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에 떤다면 재앙은 없습니다. [주의 말씀에 떠는 자들아, 너희는 그분의 말씀을 들을지어다...](사66:5). 여러분은 파라오처럼 주의 말씀을 듣고도 두려움이 없습니까? 아니면 하박국 대언자처럼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꿀처럼 달다고 고백하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사랑했던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통치자들이 까닭 없이 나를 핍박하였으나 내 마음은 주의 말씀의 두려움 가운데 서 있나이다.](시119:161). 말씀을 사랑하는 자,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은 주의 말씀의 두려우심을 잘 압니다. 잠언 13:13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멸망할 것이나 명령을 두려워 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잠13:13). 파라오는 말씀을 멸시했기 때문에 멸망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입으로는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교회에 봉사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하나님이 철저하게 무시되고, 짓밟히고 있는 현실입니다. 성경도 없이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한 주일 동안 단 한번도 펴서 읽지 않는 성도들이 헌금을 들고 교회를 온다고 주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이것이 파라오의 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씀을 멸시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유업의 상을 많이 받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워하십시오.

한 가지 성경적 예를 더 보겠습니다. 유다가 멸망의 길로 들어설 때 하나님의 말씀을 대했던 왕과 신하들의 태도를 보십시오. 예레미야 36:23-24, [여후디가 서너 쪽을 낭독했을 때에 왕이 펜칼로 그것을 찢어 화로 위에 있는 불에 던지더니 마침내 그 두루마리 전부가 화로 위의 불에 소멸되니라. 그러나 이 모든 말을 들은 왕과 왕의 신하들 가운데 아무도 두려워 하거나 자기 옷을 찢지 아니하였더라.](렘36:23-24).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성경 기록이 철저하게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 타락하고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배교한 모습입니다. 이것은 결코 구약적 상황만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들 역시 구원받은 그 구원을, 우리 안에서 뜻을 두고 행하시는 주님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서 일하시고, 우리는 우리 몸으로 그것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순종한 것 같이 내가 있을 때 뿐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완수하라(work out your own salvation)](빌2:12). 말씀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이 없다면 이 시간 우리는 주님 앞에 통회하고 겸손히 그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다시 출애굽기 본문을 보겠습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파라오의 신하들 가운데 주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는 자기 종들과 가축을 피하게 하여 집으로 들였으나 주의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는 자는 자기 종들과 가축을 들에 그대로 두었더라.](20-21). 계속되는 재앙의 심판 가운데서 이집트에는 드디어 주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파라오의 신하들이 생겼습니다. “주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와 “주의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는 자”가 분명하게 나뉘어졌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믿음에 따라 자신들의 가축과 종들의 운명이 갈라졌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믿음대로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롯은 떠났고 사위들은 남았습니다. 홍수가 나서 세상에 멸망한다고 했을 때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로 떠났고, 다른 사람들은 남았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될 때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고스란히 당사자의 책임입니다.

22-25절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박의 재앙이 이집트의 온 땅에 집행되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이집트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이 재앙으로 인해 들의 나무와 풀은 꺾이고, 짐승들과 일하던 종들은 다 죽었습니다. 이집트의 국가적 재앙이 너무나 커서 그 피해액을 산출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결과는 이와 같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무관심한 사람들의 종말이 어떠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불이 꺼지지 않는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당할 것입니다. 말씀을 멸시하는 자들의 받을 고난으로 이 땅에서 인명과 재산상의 손실은 그나마 낳은 것입니다. 이것이 영혼에 관련된 영원한 문제라면 얼마나 더 무섭고 떨리는 일입니까?

파라오와 그의 동류들이 저지른 이런 죄에 대해 성경이 경고하는 바를 함께 살펴 보겠습니다. 민수기 15:31, [그 사람이 주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의 명령을 깨뜨렸은즉 그의 불법이 그에게로 돌아가 그 혼은 완전히 끊어지리라](민15:31).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그냥 웃어넘길 일입니까? 주님이 이렇게 말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느낌이나 마음에 다가오는 전율이 없다면 그는 분명히 파라오의 후예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의 성도가 계속해서 육신적으로 살고, 마귀처럼 산다면 그의 혼이 구원받았다 할지라도 생명은 매우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기를, [이는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로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임이라.](롬8:13)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신대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육신대로 사는 것은 주의 말씀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모독하는 것이며,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에게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치나? 성경에는 그렇게 적혀 있나 보지?’란 모욕을 받는 비참한 상황을 자주 보았습니다. 불신자들은 성도들을 지켜보는 파수꾼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아무 말하지 않아도 속으로는 다 판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주님께서 심판과 징계 외에 달리 치유할 방법이 없습니다. 역대기하 36:15-16을 보십시오. [주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자신이 백성과 자신의 거하는 곳을 불쌍히 여기사 자신의 사자들을 통하여 백성에게 말씀을 보내고 늦기 전에 일어나 보내셨으나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조롱하고 그분의 말씀들을 멸시하며 그분의 대언자들을 학대하여 마침내 주께서 자신의 백성을 향해 진노하사 구제할 방법이 없게 되었으니](대하36:16).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누구라도 멸망을 당합니다(잠13:13). 이스라엘이 멸망당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망했던 것은 바빌론이 강대국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고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한 가정이나 한 국가나 개인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의 가정이 무너지는 것은 결코 그 가족 구성원들의 경제적 능력이나 질병과 같은 우환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고 멸시하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의 성격 차이로 가정이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국가의 경제력이나 군사력이나 외교력의 부재로 망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음행과 폭력으로 자신들의 사는 땅을 더럽히고, 죄악이 충만해 짐으로써 망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지 않는 것은 주의 말씀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전도를 하지 않는 것은 주의 말씀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을 무시하고 시기하고, 다투고, 싸우는 것은 주의 말씀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24, [그러므로 불이 지푸라기를 삼키는 것같이, 불꽃이 겨를 태우는 것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그들의 꽃이 먼지처럼 날리리니 이는 그들이 만군의 주의 법을 버리고  이스라엘이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사5:24).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파라오와 이집트의 백성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재앙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미리 기록된 이런 역사를 통해 영적 감화와 깊은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시대가 어둡고, 영적인 침체기에 접어 들수록 우리는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말씀을 받고, 자신의 삶에 적용하려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재앙은 앞으로 대환란 때 있을 우박 재앙을 예표하는 재앙입니다. 요한계시록 8:7,16:21을 보십시오.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피 썩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 위로 쏟아지니 나무의 삼분의 일이 타버리고 푸른 풀이 다 타 버리니라.](계8:7). [또 무게가 각가 일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에서 나와 사람들 위에 떨어지매 사람들이 그 우박의 재앙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모독하니 이는 그 재앙이 지극히 크기 때문이더라.](계16:21). 주님은 대환란 때 우박으로 이 땅을 치실 것입니다. 그 때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있던 고센 땅에만 우박이 없었더라.](26).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구별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노예 백성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이요, 그들을 구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온 땅에 보여 주셨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이에 파라오가 사람을 보내어 모세와 아론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에는 내가 범죄하였노라. 주는 의로우시고 나와 내 백성은 사악하도다.](27). 그토록 완악하던 파라오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자신의 죄를 토로했습니다. 세상 사람들 말처럼,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파라오의 입에서 ‘이번에는 내가 범죄하였노라.’란 말이 나올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겠습니까? 파라오는 조용히 아무 말 없이 보내 주어도 될 일인데 모세와 아론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은 지금 현재도 재앙이 계속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대로 몇 일만 더 우박이 계속된다면 이집트는 초토화되고 말 것입니다. 그는 즉시 재앙을 멈출 방법을 생각했는데, 그것이 바로 27절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이 고백이 참된 회개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파라오는 모세와 아론에게 죄를 고백하기 보다 주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I have sinned)라고 고백한 파라오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회개라기 보다는 임시방편으로 일단 위기를 수습하고자 하는 술책이었습니다. 민수기 22:34에는 발람 역시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사울 왕 역시 사무엘 앞에서 ‘내가 범죄하였나이다’(삼상15:24, 30)라고 두 번이나 고백했지만 그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가룟 유다 역시 예수님을 배반한 후에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앞에서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마27:4)라고 하지만 그것은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한 사람 가운데 바른 회개를 한 사람은 다윗 한 명 뿐입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였노라](삼하12:13). 다윗은 자신의 죄를 지적한 나단 대언자에게 죄를 고백한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죄를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가 바로 주께 범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I have sinned’였지만 다윗은 I have sinned against the LORD(삼하12:13)라고 함으로써 마음으로부터 정확하게 죄를 뉘우쳤습니다. 사무엘하 24:10, [다윗이 백성의 수를 센 뒤에 그의 마음이 찔렸으므로 다윗이 주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하여 크게 범죄하였나이다. 오 주여 이제 간청하옵나니 주의 종의 불법을 제거하여 주옵소서. 이는 내가 매우 어리석게 행하였음이니이다.](삼하24:10). 여기서도 다윗은 자신의 죄를 주께 아뢰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우리 성도들이 참된 회개에 대한 깊은 영적 각성을 얻기를 원합니다. 주님 앞에 죄를 회개한다고 기도하면서 사실은 전혀 마음을 바꾸지 않는 거짓 회개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 고백입니다.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아버지가 무서워서, 선생님이 무서워서 일단 위기를 모면하려고 무조건 잘못을 빌 듯이 죄를 고백하는 것은 올바른 회개가 아닙니다. 캐톨릭 교인들이 사제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는 참회 역시 성경적 회개는 아닙니다. 회개는 사람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3:8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마3:8)라고 말씀합니다. 파라오, 사울, 발람, 가룟 유다 중 어느 누구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내가 범죄하였노라.’는 자책에 그칠 뿐이었습니다.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내가 잘못했구나. 이것은 반성과 후회이지 회개가 아닙니다. 챨스 스펄젼은 말하기를,  “살인자가 교수형을 싫어하듯이 사람은 죄를 싫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회개했다는 증거는 될 수 없다. 만약 내가 형벌 때문에 죄를 싫어한다면, 나는 죄를 회개한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란 사실만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죄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범죄로 볼 수 있다면, 내가 그분을 상처 입히고 죽게 만들었단 사실을 보고, 내 마음이 부서져 자신을 혐오하게 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회개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시27절을 보십시오. [이에 파라오가 사람을 보내어 모세와 아론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에는 내가 범죄하였노라. 주는 의로우시고 나와 내 백성은 사악하도다.](27). 파라오의 말은 일견 회개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단순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것 이상입니다. 많은 크리스찬들이 일이 안풀리거나 범죄한 후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 파라오 정도의 수준에서 죄를 고백하고 회개한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은 전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보다는 낫겠지만 주님의 긍휼과 은혜를 입는 회개라 할 수 없습니다. 회개하다(repent)란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 가운데 하나는 “돌아서다”란 뜻입니다.

죄의 단절과 더불어 죄를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의 핵심입니다. 그렇지 않고 단지 반성문을 쓰듯이, 재판정에서 ‘네 죄를 네가 알렸다’에 대한 반응으로 ‘예’하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이사야 55:7절을 보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죄의 단절을 볼 수 있습니다. [사악한 자는 자기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이는 그분께서 넘치도록 용서하실 것임이라.](사55:7).-버리고/ 돌아오라. 이것이 회개입니다. 잠언28:13을 보겠습니다. [자기 죄들을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누구든지 죄들을 시인하고 버리는 자는 긍휼을 얻으리라.](잠28:13).-시인하고/ 버리는 자. 이런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요, 하나님이 받아 주시는 회개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원하시며, 오래 참고 계십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킴이 없이 죄로부터만 돌아서는 것은 거듭남이 없는 개혁과 개선에 불과합니다. 죄로부터 돌아서지 않고 자기 잘못만 시인하는 것은 일이 실패하고,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서 손해를 본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파라오, 발람, 사울같은 죄인들은 하나같이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했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불신과 불순종으로 인해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돌아왔기 때문에 잘못했다는 것이지 죄에 대한 슬픔과 애통함, 뉘우침이 아닙니다. 마치 카운셀러의 말을 듣지 않아서 주식 투자에 실패한 투자자가 ‘이번에는 내가 잘못했네, 자네 말을 들을 걸 그랬어.’, ‘당신 말을 듣지 않아서 손해를 많이 봤습니다. 제가 크게 잘못했습니다.’와 같은 식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주께 간구하여 (이만하면 충분하니) 더 이상 강력한 천둥과 우박이 없게 하라. 내가 너희를 가게 하리니 너희가 더 이상 머무르지 아니하리라, 하매](28). 파라오는 속히 재앙이 멈추기만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래서 조건없이 요구를 수용하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범죄한 죄인들이 때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파라오는 이런 기도 부탁을 한 것이 지금이 세 번째 입니다(8:8,28,9:28). 앞으로 한 번 더 이런 부탁을 합니다(10:17).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을 이용해 먹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기도를 부탁함으로서 자신의 죄악을 가리고, 희석시키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얄팍한 술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울이 범죄한 후에 사무엘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삼상15:24). 여로보암이 벧엘에서 분향을 드리다 심판을 선고받자 하나님의 사람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왕상13:6). [이에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응하여 이르되, 이제 주 곧 네 하나님의 얼굴에 은혜를 간구하여 나를 위해 기도하여 내 손이 다시 성하게 하라, 하매...](왕상13:6). 마술사 시몬이 베드로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행8:24). 베드로는 시몬에게 회개하라고 말했는데 시몬은 자신이 회개하는 대신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위해 주께 기도하여 당신들이 말한 이것들 중의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 하니라](행8:24). 우리는 이런 기도 부탁을 하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언제나 자신의 마음이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입니다. 우리는 파라오를 위해 얼마든지 중보 기도를 해 줄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네로 황제를 위해 기도했듯이 우리는 악한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속아서는 안됩니다.

모세는 파라오를 잘 알았고, 속지 않았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왕과 왕의 신하들로 말하건대 당신들이 아직도 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할 줄을 내가 아나이다, 하더라](30).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우박을 멈추었습니다. [...이로써 땅이 주의 것인 줄을 왕이 알리이다.](29)라고 말합니다. 우박 재앙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일곱 번째 재앙인 우박, 천둥, 벼락을 통해서 파라오와 이집트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땅이 그들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란 사실입니다.

아무리 불신자들이라도 이 사실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신명기 10:14, [보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도 주 네 하나님께 속하였으되], [이는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이 주의 것이기 때문이라.](고전10:26).

31-32절은 심판 중에서도 이집트의 식량을 남겨 두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밀과 호밀을 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은 아직 땅 속에서 자라나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두 다 거두어 가 버리시면 이집트 사람들은 다 굶어 죽어야 할 것입니다. 모세는 주를 향하여 손을 펼치므로 우박을 그치게 했습니다(33). 우박과 천둥이 그치자마자 그들의 본심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34-35절을 보십시오. [파라오가 비와 우박과 천둥이 그친 것을 볼 때에 여전히 더 범죄하여 자기 마음과 자기 신하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였더라. 파라오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 이스라엘 자손을 가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았더라.](34-35). 죄를 버린 것이 아니라 죄를 숨겨둔 채 잘못을 시인한 파라오는 더욱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참 회개와 거짓 회개의 차이입니다. 이것은 파라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터지기 시작한 둑은 막을 수 없다는 말처럼 한번 시작된 환난은 연달아 생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아이가 아파서 병원을 갔는데, 퇴원하고 나니 나는 교통사고가 나고, 차 값을 물어주고 나니 아버님이 길에서 강도를 당하고...’ 이런 식입니다. 그럴 때 주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눈물을 흘리는데, 몇 일이 지나지 않아서 풍랑이 잠잠해 듯이 집안이 평온해지면 다시 나태해지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저런 문제가 터지면 걷잡을 수 없이 터집니다. 이것을 통해 주님께 회개하고, 바르게 서면 전화위복이 되고, 오히려 강성해지지만 파라오처럼 얄팍한 잔꾀를 부리면 오히려 이전보다 더 강한 재앙이 들이닥칩니다.

‘이번에는 내가 범죄하였노라’는 고백이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써, 파라오는 후에 엄청난 부메랑이 자신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을 배워야 했습니다.

주의 은혜의 말씀을 통해서 변화되지 않는 사람은 심판과 징계를 받습니다. 심판과 징계를 통해서 변화되지 않는 사람은 멸망을 당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 나의 참된 변화를 위해서, 말씀에 무관심하지 않고 두려워 함으로 주님 앞에 합당한 회개의 열매를 맺는 결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의 범죄, 나의 완악함은 나의 영혼을 파멸로 몰고 간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두려워 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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