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2003년 5월 18일- 출애굽기        


출애굽기(XXXIII)

말씀: 출애굽기 12:1-13
요절: 출애굽기 12:11


33. 이것이 주의 유월절이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유월절이란 말을 들어보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의 최대 명절이었으며, 한 국가의 탄생일이기도 했습니다. 유월절은 세상 명절과 달리 인간이 기념하여 축제일을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절기입니다. 유월절은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희생되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신 이후에는 더 이상 절기나 명절이 필요 없고, 어떤 재물도 드려서는 안됩니다. 흔히 오늘날도 유월절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몇몇 교파들이 있습니다. 이 시간 잠깐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물과 헌물에 대해서 살펴보고 본문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세상에 들어오실 때에 이르시되, 희생물과 헌물은 주께서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히10:5). 주님은 더 이상 우리에게 어떤 희생물이나 헌물을 원치 않으십니다. [죄로 인한 번제(燔祭) 헌물과 희생물들은 주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히10:6). 죄로 인한 헌물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제물을 받으시는 분께서 원치도, 기뻐하지도 않는 희생물을 드린다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일 것입니다. 주님은 율법에서 정한 어떤 헌물도 받지 않으십니다. 이로써 구약의 율법 가운데 유월절이나 안식일, 어떤 명절은 지켜야 한다는 몇몇 교파의 주장은 성경의 말씀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위에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희생물과 헌물과 번제(燔祭) 헌물과 죄로 인한 헌물은 {주}께서 원치도 아니하시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으니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드리는 것이라.](히10:8).

하나님은 왜 자신이 제정하신 유월절과 헌물들을 더 이상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이는 그분께서 거룩히 구별된 자들을 단 한 번의 헌물로 영원토록 완전하게 하셨음이라.](히10:1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전성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드린 주님의 희생은 영원토록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희생물은 소용이 없습니다. [이제 이것들을 사면하셨은즉 다시는 죄로 인하여 헌물을 드릴 필요가 없느니라.](히10:18). 죄가 사면되었기 때문에 죄로 인한 헌물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아직도 헌물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그는 십자가의 죽음과 피를 헛되게 하는 사악한 불신일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헌물과 희생물로 드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향기로운 헌물과 희생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5:2b). 주님이 우리의 헌물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는 구약의 율법이 정한 희생물, 번제 헌물, 죄 헌물 등을 드리는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약 성도들은 율법에 따라 육신의 구약의 제사장들이 양이나 소, 염소로 드리는 그런 희생 헌물이 아니라 영적인 희생물을 드리는 영적인 제사장들입니다. 우리의 희생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드릴 수 있으며, 영적인 것들을 드려야 합니다. [너희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도다.](벧전2:5). 우리가 드릴 영적 희생물 제 1호는 우리 자신의 몸입니다. 우리 몸을 주님께 거룩하고, 받으실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려야 합니다(롬12:1). 다음은 찬양의 희생을 드릴 수 있습니다(호14:2, 히13:15). 구제의 희생을 드릴 수 있습니다(빌4:18, 히13:16). 이런 것들은 영적인 희생물들로서 주님이 기뻐하시며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쁨의 희생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제 /주께서/ 나를 둘러싼 내 원수들 위로 내 머리를 드시리니 그런즉 내가 그분의 장막에서 기쁨의 희생을 드리며 노래하여 참으로 [주]께 찬양을 드리리로다.](시27:6). 감사의 목소리로 주께 희생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나는 감사의 목소리로 주께 희생물을 드리며 내가 서원한 것을 갚겠나이다. 구원은 [주]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욘2:9). 매주 예배 때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은 우리가 영적인 제사장으로서 드릴 마땅한 영적 희생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구약과 같이 유월절, 무교절, 장막절, 오순절과 같은 절기는 지키지 않지만 교회에서 또 다른 절기들을 만들어 년중 행사로 지키는 못된 관습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것들을 넘어서 오직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만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12장입니다. 이제 아홉번에 걸친 아홉 가지 재앙이 끝나고 마지막 열 번째 장자 재앙이 이집트 온 땅을 휩쓸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은 이 달을 년호의 첫 해로 삼도록 하셨습니다. [[주]께서 이집트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 달이 너희에게 달들의 시작 곧 한 해의 첫 달이 될지니라.](1,2). 이스라엘은 세상 사람들과 달리 하루 밤낮의 시간이 달랐고 매년 첫 해가 달랐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종교력이라고 합니다. 구약을 읽을 때 아빕월이란 말이 나오면 모두 이 달을 말합니다. 오늘날로 하면 3월-4월에 해당합니다. 느헤미야 2:1에서는 니산월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바빌론 포로기 이후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은 종교력과 민간력이란 두 개의 달력이 있었습니다. 종교력과 민간력에 대해서는 오후 성경 공부 시간에 잠깐 다루겠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 달 십일에 너희 각 사람이 어린양을 취하되 자기 조상 집에 따라 한 집에 어린양 한 마리를 취할지니 그 어린양에 대하여 가족이 너무 적으면 그와 그 집의 이웃이 혼(魂)들의 수에 따라 그것을 취하되 각 사람이 자기가 먹는 양에 따라 그 어린양에 대하여 계산할지니라.](3-4). 10일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날입니다. 14일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날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주님은 어린 양에 대한 모든 행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집중시켜 두셨습니다.

어린양은 아담이 범죄한 후에 가죽옷을 입을 때 처음 죽었고(창3:21), 아벨이 하나님께 희생을 드릴 때 죽었고(창4:4),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죽이기 위해 칼을 들기 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린 양으로 준비할 것을 말했으며(창22:8), 이사야 53장에서 이 양이 완벽하게 메시야로 인격화되어 예언되었고, 침례인 요한에 의해서 그 정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이 증거되었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오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로다.](요1:29). [예수님께서 거니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로다! 하매](요1:36). 그리고 아버지에 의해서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바다에 있는 것들과 그것들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이르되, 왕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토록 있으리로다, 하니](계5:13). 하나님은 어린양을 통해 세상 모든 죄를 제거하실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보여 주셨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너희의 어린양은 흠이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같은 달 십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저녁때에 이스라엘 회중의 전체 집회에서 그 양을 잡고](5-6).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베드로전서 1:19,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9)라는 말씀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거룩하고 순결한 모습을 예표하기 위해 주님은 흠이 없는 어린양을 취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죄가 없으셨고, 죄를 알지도 못하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6절에서 각별히 주의할 것은 ‘그 양을 잡고’(kill it)라며 양이 단수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양은 집집마다 잡습니다. 14일 저녁에는 온 회중이 모여 전체 집회에서 잡는데 모세는 영감을 통해 기록하기를 it(한 마리)으로 표현했습니다. 먼 훗날 이스라엘의 회중은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죽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피를 취하여 그 양을 먹을 집의 양옆 기둥과 위에 있는 문기둥에 뿌리고](7). 우리는 여기서 또 한번 신약의 놀라운 예표를 봅니다. 피를 세 곳에 뿌렸습니다. 양 옆 기둥과 문기둥에 뿌렸는데 이는 가운데가 가장 높습니다. 이는 갈보리에서 세워진 세 개의 십자가와 그 가운데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또 한 가지는 십자가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좌우 양편에서 피가 흐르고 가운데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피가 흐릅니다. 주님이 이스라엘 집에 어린양의 피를 뿌리게 한 모습은 갈보리의 십자가 사건의 현장을 완벽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 피를 통해 그들은 죽음을 면합니다. 어린양의 피는 죽음의 사자로 하여금 그 집을 넘어가게 합니다. 어린양의 피는 집안에 뿌리는 것이 아니라 문 밖에 뿌렸기에 집안 사람들이 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갈보리 십자가의 피는 내가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피를 보시고 우리를 넘어가십니다.

8-9절입니다.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과 함께 먹되 날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그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8). 어린 양의 피는 집의 기둥과 문 기둥에 뿌렸지만 그 고기와 내장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고기는 날로나 삶지 말고 구워서 먹어야 합니다. 머리, 다리, 내장도 다 구워서 먹도록 하셨습니다. 같이 먹는 음식으로는 누룩없는 빵과 쓴 나물을 함께 먹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유월절이 제사장들이 주도한 번제 헌물과는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각각 양을 잡아서 각각 먹어야 했습니다. 누가 대신 먹지 않습니다. 주의 유월절은 지극히 개인적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원 역시 개인적인 것입니다. 3-5절에 양에 대한 표현을 보십시오. 3절은 한 어린 양(a lamb)이라고 합니다. 4절은 그 어린 양(the lamb)이라고 합니다. 5절은 너희의 어린 양(your lamb)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한 어린 양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아무 어린 양이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이 정하신 그 어린 양이어야 합니다(4-the lamb). 예수 그리스도는 그 어린 양이십니다. 하나님의 그 어린 양일지라도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각 개개인이 자신의 양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4절의 그 어린 양은 5절에서 ‘너희의 어린 양’으로 각 개개인이 영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양의 어떤 부분도 물에 삶지 말라고 하신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심히 목마르셨고, 입에 물을 대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불에 구워 먹게 하신 것은 주님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채 영원한 지옥의 불꽃으로 고통을 당하셨고, 지옥으로 들어가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죄에 대한 주님의 심판이 불이란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룩 없는 빵은 세상과의 분리를 나타내고, 쓴 나물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보낸 지난날의 고달픈 생활을 나타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아침까지 아무것도(it)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불로 태울지니라.](10). 주님은 계속해서 어린 양을 단수 it으로 표현하셨는데, 실상 이날 죽은 양은 최소한 10만 마리가 넘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아침까지란 말을 세대적으로 적용하자면 천년 왕국의 아침이 될 것입니다. 현 교회 시대는 밤입니다. 어린 양을 잡고, 피를 뿌리고, 고기를 먹고, 태우는 모든 일은 밤에 이루어지고, 아침까지 어린 양의 어떤 것도 남겨 두어서는 안됩니다. 이 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음은 천년 왕국에서 현재 교회 시대처럼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지금은 은혜의 때요, 받아들일만한 해요, 구원의 때이지만 대환란 때는 주님의 원수갚으시는 해요, 보복의 때입니다. 천년 왕국은 의로 통치하는 때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대속에 근거한 어떤 은혜도 천년 왕국에서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주]의 유월절(逾越節)이니라.](11). 유월절 어린 양을 먹는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모습은 천천히 느긋하게가 아니라 매우 ‘급하게’, ‘속히’ 행하는 모습입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란 말은 종의 자세를 보여 주는 것이며, 군사의 모습입니다. 주님이 주인을 맞이하는 종의 자세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허리에 띠를 띠고 너희 등불을 타오르게 하며](눅12:35). 싸우는 군인의 모습 역시 동일합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를 동여매고 의의 흉갑(胸鉀)을 입고](엡6:14).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예스르엘로 달릴 때 허리를 동이고 아합 앞에 달렸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왕상14:46). 일반적으로 중동 사람들이나 유럽 사람들은 식사 때에 느긋하게 배불리 먹기 위해 허리 띠를 풉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허리에 띠를 띠고 먹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 역시,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오실 그 은혜로 인하여 끝까지 소망을 가질지어다.](벧전1:13)라고 권면했습니다.

발에 신을 신고 먹는 것은 화평의 예비한 신발을 신고 어디든지 달려 갈 수 있기 위한 것입니다(엡6:15). 손에 지팡이를 잡는 것은 야곱이 순례의 길에 지팡이를 잡았던 것과 같습니다. 이는 이제 순례의 길을 떠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집에 있는다면 신을 신고, 지팡이를 잡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그 고기를 먹는 자는 예외없이 어디론가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끝까지, 모든 민족에게로 가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급히 먹으라는 것은 그만큼 구원의 긴박성과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빨리 영접하면 빨리 영접할수록 좋고, 이집트를 빨리 떠나면 빨리 떠날수록 좋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의 유월절이란 의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집트의 온 땅에 사람이건 짐승이건 첫 번째 난 것은 다 죽습니다. 이것은 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죄에 대한 삯은 사망입니다. 하나님은 이집트 땅에 살던 이스라엘은 구분하셨는데, 이는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같이 범죄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집트나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죄인이며, 모두 범죄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란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도 차이가 없어야 의로운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누구의 죄이든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① 천사가 범죄했을 때에도 주님은 그들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천사들을 아끼지 아니하사 지옥에 던지시고 어둠의 사슬에 넘겨주어 심판 때까지 예비해 두셨으며](벧후2:4). ②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일지라도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을 때 저주하셨으며 아끼지 않으셨습니다(롬8:32). ③ 주님은 택함받은 이스라엘도 불신의 죄에 빠졌을 때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본래의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음이니 그런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까 조심하라.](롬11:21). ④ 아담 이후에 범죄한 인간들로 땅이 더럽혀졌을 때 주님은 옛 세상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옛 세상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의 선포자인 여덟번째 사람 노아만 구원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벧후2:5). 주님은 범죄한 대상이 누구일지라도 죄와 연루된 무엇일지라도 천사든 하나님의 아들이든, 세상이든, 이집트이든, 이스라엘이든 모조리 다 심판하시는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사실은 왜 온 이집트 땅을 다 심판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판하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해결책을 볼 수 있습니다. 이집트의 온 땅의 모든 집에는 다 죽음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에도 분명히 죽음이 있었습니다. 다만 당사자의 직접적인 죽음이 아니라 어린 양의 대속적인 죽음이었습니다. 심판은 당사자가 직접 받든지 하나님이 정해 주신 대리인이 받든지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대속적인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직접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월절 어린 양이 되십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들인즉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이는 우리의 유월절(逾越節)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음이라.](고전5:7).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함받은 민족이었지만 죄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고,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았지만 동일한 진노의 자녀였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았습니다. [지나간 때에는 우리도 다 그들 가운데서 우리 육신의 욕심대로 행하였으며 육신과 생각의 욕망을 채워 다른 사람들과 같이 본래 진노의 자녀들이었으나](엡2:3).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대속의 죽음을 받아 들였고, 세상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유월절(逾越節)이니라.](11). 흔히 우리는 이스라엘의 유월절이라고 읽고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주]의 유월절’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제정하신 유월절이며, 주님이 어린 양이 되시는 유월절이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은 주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월절 어린 양이라고 말합니다. [... 이는 우리의 유월절(逾越節)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음이라.](고전5:7). 유월절 어린 양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며, 또한 우리를 위한 것이란 뜻입니다.

이들은 이 유월절을 믿음으로 지켰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믿음을 통해 그는 유월절(逾越節)과 피 뿌리는 것을 지켰으니 이것은 처음 난 것들을 파멸시키는 자로 하여금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히11:28).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순종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에서 벗어났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죽음은 우리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내가 그 밤에 이집트 땅을 두루 지나가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이집트 땅의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또 이집트의 모든 신에게 심판을 집행할 것임이라. 나는 [주]라.](12). 지금까지 주님께서 이집트에 내린 재앙은 마지막 재앙에 비하면 예행 연습과도 같은 맛보기에 불과했습니다. 이번에 내리는 재앙은 소, 양, 돼지, 염소, 말같은 가축뿐만 아니라 모든 짐승이 다 포함되고, 거기에다 인간의 죽음이 있습니다. 강에는 개구리와 악어와 도마뱀과 같은 양서류와 파충류가 죽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산에 가면 들 짐승들이 죽어 있을 것이며, 들에는 들짐승들이 죽어 있을 것입니다. 동굴에는 박쥐가 죽어 있을 것이고, 계곡에는 고기들이 죽어있을 것입니다. 공중에서 떨어진 새들이 부지기수일 것이고, 땅속에 살던 두더쥐도 죽어 있을 것입니다. 죽음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이집트의 수많은 신들은 그 짐승들 안에 자신들의 영이 있다고 믿어졌고, 그 결과 뱀과 악어, 소와 같은 짐승은 물론이고 개구리와 이와 같은 짐승들까지 숭배를 받았습니다. 이들이 일거에 종류대로 처음 난 것들이 다 죽는 현상을 그들은 생생하게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집트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거하는 집 위에 있어 너희를 위하여 표가 되게 할지니라.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그 재앙이 너희 위에 임하여 너희를 멸하지 아니하리라.](13). 유월절의 어린 양의 피가 표(token)가 됩니다. 어린 양의 피는 죽음을 넘어가는 표가 됩니다. 주님은 네가 부자인 것을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네가 깨끗한 삶을 살았기에 너를 넘어가리니...하지 않으셨습니다. 너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이 사회에서 한 일이 많기에 내가 너를 넘어가리니....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네가 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네가 침례를 받았기 때문에, 네가 성가대에서 봉사하기 때문에, 네가 헌금을 많이 하기 때문에, 네가 죄를 회개했기 때문에...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우리의 상태가 어떤지를 보시지 않고, 어린 양의 피를 보십니다. 주님이 보시는 것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는 이 구절을 정확히 이해했습니다.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9). 베드로는 이 피를 보배로운 피(precious blood)라고 했는데, 이는 그 피가 구속을 주며(골1:14), 그 피가 깨끗함을 주고(요일1:7), 그 피가 정결케 하며(히9:14), 그 피가 대속을 주며(롬5:11), 그 피가 의롭게 하며(롬5:9), 그 피가 구원을 주기 때문입니다(롬5:9-10).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13). 하나님은 우리의 종교, 우리의 성별, 우리의 나이, 우리의 학력, 우리의 경제력, 우리의 죄, 우리의 어떤 외모도 보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그 피를 볼 때에 넘어가십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을 받았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모세가 전해 준말을 믿지 않고 어린양을 잡아 피를 뿌리지 않았다면 그는 아브라함의 씨라 할지라도,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그동안 모세의 말이라면 다 들었다 할지라도, 재앙을 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집트 사람이라 할지라도 만약 유월절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피를 발랐다면 그들은 분명히 살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순수한 이스라엘 백성들 외에도 섞인 무리들이 많았던 것을 볼 때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어린 양의 피를 발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집을 보시지 않았고,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문에 뿌려진 피만 보셨습니다.

[내가 이집트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거하는 집 위에 있어 너희를 위하여 표가 되게 할지니라.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그 재앙이 너희 위에 임하여 너희를 멸하지 아니하리라.](13). 이 말씀은 우리의 안전과 평안의 근거가 내 안에 있지 않고, 어린양의 죽음과 피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어린양의 피를 문에 바르고도 집안에서 두려워 떠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바르지 않고도 평안히 자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린양의 피는 분명히 그 집안에 있는 사람들을 죽음으로부터 지킬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에 이 말씀을 믿고 어린양의 피를 문에 발랐으면 끝입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오류를 범하는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는 대신 자신들 안에 체험이나 감정, 뭔가 특별한 것을 느끼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마귀가 가장 자주 애용하는 수법인데, 하나님의 말씀, 어린양의 죽음과 보혈 대신 자신을 쳐다보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눈을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말씀으로 돌리게 하십니다. 만약 자신을 바라보거나 가족을 보거나 모세를 본다면 그들은 결코 평안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때로 사람들은 거짓 평안을 지니고 있다가 망하는 사람이 있고, 믿음을 가지고도 근거 없는 걱정과 불안으로 떠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만약 ‘내가 이렇게 해 놓고 나서도 마음이 불안해 이 집에 있을 수가 없구나!’ 할 수 있지만 아침이 오면 자신의 불안과 걱정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안전은 어린양의 피에 있고, 우리의 평안과 확신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그 재앙이 너희 위에 임하여 너희를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으면 이 말씀을 통해서 평안을 얻어야지 다른 어떤 것으로도 평안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느낌, 감정, 체험은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종교적 체험은 때로 훌륭한 자극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인격 수양은 매우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완성된 사역에만 근거합니다. 진심으로 주님이 흘리신 피를 내가 믿고, 하나님의 약속들을 신뢰함으로써 받은 구원이 아니라면 소위 구원받은 것 같다고 생각하고 여기는 모든 것이 다 거짓입니다. 설령 마음에 평안이 있고, 확신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거짓 평안이며, 자기 확신에 불과합니다. 반대로 나는 진실로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을 진심으로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나를 위해 죽으신 그 십자가와 보혈을 믿는다 할지라도 마음에 평안이 없고,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는 자기 안에서 감정적 변화, 자기가 기대하는 어떤 변화가 수반되지 않을 때 오는 것입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의 근거를 두지 않고, 자신 안에 어떤 혁명적인 변화나 상상할 수 없는 어떤 감정적인 체험이나 도를 깨치는 듯한 각성의 경험을 구했지만 그런 것이 없을 때 흔히 빠지는 현상입니다. 마귀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이 아닌 체험과 느낌을 구하는 성도들에게 거짓 은사와 체험을 줌으로써 그들을 속여 버립니다. 여러분의 감정을 따르지 마십시오. 나를 구원한 것은 나의 눈물이나 기도나 후회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장자들이 피 아래 있음으로 안전했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평안할 수 있듯이 우리 역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과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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