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2003년 6월 08일- 출애굽기

36. 이 밤은 [주]의 밤이라
말씀: 출애굽기 12:40-51 
요절: 출애굽기 12:42 


오늘 말씀은 지난 시간에 설교한 출애굽의 밤에 대한 부연 설명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의 밤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셨는지 이 밤을 [주]의 밤이라고 명명하셨고, 이스라엘은 대대로 이 밤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창조를 완성한 날보다 출애굽의 밤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오늘날 서양 사회에는 사람 이름을 따서 ‘날’을 많이 정합니다. 콜롬부스데이, 발렌타인데이, 성페트릭스 데이 등 이렇게 날자를 정해서 기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절기를 몇 정해 주셨는데, 최초로 정한 절기는 낮이 아니라 밤이었습니다. 출애굽의 밤, 유월절의 밤을 [주]의 밤이라고 명명하셨던 것입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은 다 유월절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주님께서 희생당하심으로 속죄를 완성하시는 그 예표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각인시켜 주시기 위해서 이 날을 ‘주의 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이제 이집트에 머물던 이스라엘 자손의 거주 기간이 사백삼십 년이더라.](40).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백년동안 종살이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 학자들과 사본학자들 가운데 이 구절들은 상호 모순이란 견해가 지배적이었습니다. 430년이냐? 400년이냐?는 문제로 오랫동안 논쟁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확실히 알지니 네 씨가 자기들의 땅이 아닌 곳에서 나그네가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이 사백 년 동안 네 씨를 괴롭히리라.](창15:13). 스데반 역시 이 구절을 그대로 인용해서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의 씨가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그들을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 학대하리라, 하시고](행7:6). 하지만 사도 바울은 출애굽기를 인용해서 430년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한 연대의 기한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이 창세기 15:3에서 약속을 받은 후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기간이 430년이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확정하신 그 언약을 사백삼십 년 뒤에 생긴 율법이 취소하지 못하며 또 그 약속을 무효로 하지 못하리라.](갈3:17).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은 날부터 출애굽에서 시내산에서의 기간까지를 나그네 기간으로 보아야 합니다. 본문인 출애굽기 12:40절을 유념해서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땅에서 430년간 기거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기거했는데, 이들의 기거한 기간은 430년이었다’란 의미입니다(영어 KJV 성경 참조-주어를 주목할 것). 이집트에서 430년이 아니라 총 나그네 생활이 430년이란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땅에서 실제로 산기간은 215년 정도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얻지 못하고 430년간을 나그네 생활로 체류했다는 말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머문 곳이 이집트였고, 거기서 요셉을 알지 못하던 앗시리아 왕조의 파라오에게 학대를 받았습니다.

41절입니다.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바로 그 날에 [주]의 군대가 다 이집트 땅에서 나왔은즉](41). 하나님은 얼마나 정확하신 분이십니까? 하루도 가감없이 정확하게 430년이 끝나는 바로 그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때를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은 미리 말씀하신 대로, 정하신 때에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실 때나 이삭에게 야곱을 주실 때나 이들이 출애굽할 때나 모두 정확하게 미리 예언한 말씀대로 하셨습니다. 창세기 18:10, 14절과 갈라디아서 4:4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이르시되, 생명의 때를 따라 내가 확실히 네게 돌아오리니, 보라, 네 아내 사라에게 한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매 사라가 그의 뒤에 있는 장막 문에서 이 말을 들었더라.](창18:10). [[주]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 있겠느냐? 생명의 때를 따라 내가 정한 때에 네게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한 아들이 있으리라.](창18:14). 주님은 때를 따라서 일하시며, 움직이십니다. [그러나 충만한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 하셨나니](갈4:4).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요, 인내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성격이 급합니다. 주님의 때가 아닌 자신의 때에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인내와 오래 참음이란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말이 있습니다. 인내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인내란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반면 오래 참음이란 내가 부당한 일을 당할 때에 아무런 대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킹제임스 성경은 Longsuffering이라고 말합니다. 성도들은 이 둘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삭을 기다리는 아브라함이나 메시야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농부들 역시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역자들 역시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하는 동안 우리는 각종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기 마련인데 그때 우리의 태도를 ‘오래참음’이라고 합니다.

성도들은 때(time)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70년의 포로 기간을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때가 되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유대인들의 귀환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때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너희 위선자들아, 너희가 능히 하늘과 땅의 생긴 모습은 분별하거니와 어찌하여 이때는 분별하지 못하느냐?](눅12:56). 모세 역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사백년이란 시간에 대해서 알았더라면 40년 전에 스스로 구원자로 자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의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도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을 단축할 수 없고, 연기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때에 대해서 너무나 강조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아무도 스스로 이 때를 알 수 없습니다. 때를 아는 것은 오직 주님의 말씀에 따른 계시와 조명 뿐입니다. 전도서 3:11, 9:12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모든 것을 만드시되 자신의 때에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 세상을 /생각하는/ 마음을 두셨으므로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 자가 아무도 없도다.](전3:11). 여기서 주님이 모든 것을 만드셨다는 말은 때를 만드신다는 말입니다. 왜냐한면 전도서 3:1-8절이 바로 그런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시기(時期)가 있고 모든 목적한 것에는 때가 있도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무너뜨릴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애곡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들을 버릴 때가 있고 돌들을 함께 모을 때가 있으며 껴안을 때가 있고 껴안는 것을 금할 때가 있으며 얻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화평할 때가 있도다.](전3:1-8). 하지만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때가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슬픈 현실입니다. [이는 사람 또한 자기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같이 사람들의 아들들도 재난의 때에 일이 그들에게 갑자기 닥치면 올무에 걸리느니라.](전9:11). 우리는 자기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와 말씀의 빛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인내와 오래 참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때가 이르면 출애굽을 합니다. 때가 이르면 심판이 임합니다. 구원의 때가 있고, 이방인들의 때가 있고, 환란의 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성경을 통해 이런 것에 대한 영적 조명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어둠에 거하지 않습니다.

다시 41절입니다.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바로 그 날에 [주]의 군대가 다 이집트 땅에서 나왔은즉](41). 주님은 노예 백성 히브리인들을 일컬어 주의 군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군대란 표현은 성경 전체에서 4번 나옵니다(출12:41, 수5:13, 15, 대상9:19). 군대는 대장이 있습니다. 이 대장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출애굽을 진두지휘하신 분은 모세와 아론처럼 보여도 이들은 하나님의 대사일 뿐 대장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지금 [주]의 군대 대장으로 왔느니라, 하매 이에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경배하며 이르되, 내 주께서 주의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주]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매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수5:14-15). 하나님께서 주의 군대라고 말씀하심으로 이들의 여정은 곧 전투의 연속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죄로부터 구원받을 때 곧 바로 죄와 전쟁을 벌이는 군사로 모집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대장이십니다(히2:10).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군사들입니다. 디모데후서 2:3-4, [그러므로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고난을 견디어 내라. 전쟁을 치르는 자는 아무도 이 /세상/ 삶의 일에 얽매이지 아니하나니 이것은 자기를 군사로 택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2:3-4). 그래서 바울은 에바브로 디도를 나의 형제요 동료 군사로 불렀으며(빌2:25), 아깁보를  우리와 함께한 동료군사라고 소개했습니다(몬1:2). 주의 군대로 소집된 군사는 첫째 고난을 견뎌내야 하고, 둘째 이 세상 삶의 일에 얽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자신이 군인이란 사실조차 모르고 있기 때문에 전쟁은 고사하고 여전히 죄의 종으로 포로처럼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군인이란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대장이 누구인지 적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세상의 예표인 이집트, 마귀의 예표인 파라오 아래에서 어린 양의 피를 통해 구원받은 히브리 백성은 그 날밤을 기점으로 주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느 하루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시점을 기준으로 죄의 종에서 죄와 대적해서 싸우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영적 전투의 현장에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가 있는 곳은 화약 냄새가 나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쟁터이지 조용하고 아늑한 커피 숖이나 호텔이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은 선한 싸움입니다. 디모데전서 1:18, 6:12절입니다. [아들 디모데야, 전에 너에 관하여 주어진 대언들에 따라 내가 네게 이것을 명하노니 곧 그것들을 힘입어 선한 싸움을 싸우며](딤전1:18).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영원한 생명을 붙들라. 이것을 위하여 너 역시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들 앞에서 선한 고백을 하였도다.](딤전6:12). 디모데가 선한 싸움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듯이 우리 역시 전투하는 군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싸움은 정욕에서부터 나옵니다. 야고보 사도가 [너희 가운데 전쟁과 싸움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속에서 싸우는 정욕(情欲)들로부터 나지 아니하느냐?](약4:1)고 말했듯이 대부분의 싸움은 선한 싸움이 아닙니다. 오직 마귀를 대적하는 전쟁만이 선한 싸움입니다. 우리가 이점에서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적을 분별하지 못하고 같은 지체들끼리 다투고 싸우는 것은 믿음의 선한 싸움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가나안에서 하나님이 심판하시고자 하는 이교도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우리는 마귀들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대상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을 대적(對敵)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정사(政事)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을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라.](엡6:12). 우리의 대적은 마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서 도망하리라.](약4:7).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으라. 너희 대적(對敵)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에 굳게 서서 그를 대적하라.](벧전5:8). 전쟁하는 군사가 적이 아닌 동료에게 칼을 들이대거나 자기의 상관에게 칼을 내민다면 이는 반역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마귀를 대적하지 않고 주님께 반역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을 대적하였듯이 우리 역시 그런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들은 불신과 사악한 생각으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육신적인 생각으로 주님을 대적할 수 있습니다. [그 까닭은 육신적인 생각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참으로 그리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롬8:7). 전쟁하는 군사가 대장을 불신하고, 대장에 대해 악한 생각을 품는다면 그 전쟁은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이런 군사들이라면 전쟁하기 전에 먼저 군기부터 잡아야 할 것입니다. 육신적인 생각은 그 자체만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역입니다. [이는 육신은 /성/령을 거슬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거스르기 때문이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갈5:17). 우리의 육신 역시 성령을 대적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짐으로써 육신이 성령을 대적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큰 싸움입니다. 단순한 말싸움이나 감정 싸움으로 시작했다 흐지부지 마는 싸움이 아니라 사생결단을 내야하는 그런 싸움입니다. 골로새서 2:1, 히브리서 10:32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모든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큰 싸움을 싸우고 있는지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골2:1). [그러나 너희가 빛을 받은 뒤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냈던 이전의 날들을 회상(回想)해 보라.](히10:32). 영적 전투는 늘 전면전입니다. 이런 싸움은 바울 사도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이 싸움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있음을 상기해 줍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바울이 행한 모든 것들 역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 법칙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이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또한 지금도 내 안에 있음을 듣는 바니라.](빌 1:30). 오늘날 현대 교회는 너무나 평안한 삶을 사는 나머지 무슨 전쟁이 있는지도 모르는 성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기껏 하는 고민이라야 내적 고민, 죄로 인해 받는 양심의 가책 정도이거나 가족간의 갈등, 직장에서의 갈등, 사업상의 고민 정도입니다. 이곳 미국은 신앙 생활 자체를 위협하는 그런 일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학교는 어디에 보내야 하는가? 이런 것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교회는 이제 생활고를 해결해 주는 상담소가 되었습니다. 군막이 아니라 포로 수용소가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장소요, 정보 제공의 장소의 역할을 해 주기를 바라는 분도 있습니다. 이 세상 삶에 얽매이지 말라는 성경 말씀과는 달리 세상 삶을 위해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오늘의 교회 풍속도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유월절 어린 양의 피뿌린 그 밤을 [주]의 밤으로 칭하시며 영원히 지킬 규례로 삼으신 것은 성도들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고민하며 더 풍요로운 물질, 더 높은 학위, 더 안락한 삶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주]의 군대가 이집트 땅에서 나왔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런 죄악되고 허망한 삶을 좇던 것에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를 위하여 이 밤을 많이 지킬지니 이 밤은 [주]의 밤이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42). 출애굽의 밤은 주의 밤입니다. 이 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민족으로서,국가로서, 군대로서 태어난 밤입니다. 모세는 신명기 16:1에서 [아빕월을 준수(遵守)하여 [주] 네 하나님께 유월절을 지키라. 이는 아빕월에 [주] 네 하나님께서 밤에 너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신16:1)고 그 의미를 기록해 두었습니다. 성도들은 모두 자신의 육신적인 생일뿐만 아니라 영적인 탄생일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2,24,26장에서 세 번에 걸쳐 자신이 어떻게 주님을 뵈었는가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을 만난 시각을 “열시쯤”이라고 정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요1:39). 바울이나 요한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준 그날을 잊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저는 약 11시쯤 되었습니다. 구원파 교인들처럼 당신이 언제 구원받았는지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모르면 당신은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자연적 출생과 마찬가지로 분명한 사건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처럼 죄로부터 해방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의 밤은 주님이 구원을 베푸신 날입니다. 신약 성도들에게 [주]의 밤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신 바로 그 날이 될 것입니다. [주]의 밤이란 주님이 우리를 주의 군대로 삼으신 그 밤이며, [주]의 밤이란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첫 걸음을 떼게 하신 밤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순례자요, 타국인으로서 평생을 살았기에 그들은 정복하거나 땅을 차지해야 하는 명령이나 의무를 받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모세와 함께 [주]의 밤을 보낸 이스라엘은 전쟁을 해야 합니다. 싸우고, 이기고, 땅을 정복하고, 차지해야 합니다.

43-48절은 유월절 어린 양에 관한 규례입니다. [[주]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유월절 어린양에 관한 규례가 이러하니라. 타국인은 그것을 먹지 못할 것이나 각 사람이 돈으로 산 종은 네가 할례를 준 뒤에 먹을 것이며 외국인과 품꾼은 먹지 못하리라. 한 집에서 그것을 먹되 그 고기를 조금이라도 집 밖으로 가지고 나가지 말고 그 뼈도 꺾지 말지니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이것을 지킬지니라. 타국인이 너와 함께 거하며 [주]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은 뒤에야 그가 가까이 와서 지킬지니라. 그가 이 땅에서 태어난 자같이 될 것이니 이는 할례 받지 아니한 자는 그것을 먹지 못할 것임이니라.](43-47). 유월절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타국인이 먹지 못한다는 것은 타국인들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뿌림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은 할례를 행한 후에 먹을 수 있는데,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입니다.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언약의 백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외국인과 품꾼은 역시 먹지 못하는데, 이들이 먹는 방법은 귀화하거나 이스라엘 백성의 종이 되어서 할례를 받으면 됩니다. 유월절 어린 양에 관한 규례는 오늘날 주의 만찬에 대한 규례와 비슷합니다. 거듭나지 않는 성도는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고기를 집밖으로 가지고 나가지 말라는 것은 어린 양의 피를 바른 그 집에서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피가 없는 곳에서 영적 양식을 취할 수 없습니다. 어린 양의 피가 없는 곳에서 생명의 빵을 취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없이 신앙 생활이란 있을 수 없고, 말씀을 섭취할 수 없습니다. 속죄의 피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에게만 말씀은 생명의 빵이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주님의 피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뼈를 꺽지 말라는 말씀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뼈가 꺾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일들이 이루어진 것은, 그의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 기록을 성취하려 함이라.](요19:36). 주님은 유월절 규례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시고, 그를 믿음으로 모든 사람이 다 구원에 이르게 할 인류 구원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49-51절입니다. [집에서 태어난 자에게나 너희 가운데 거하는 타국인에게나 한 법이니라, 하셨으므로 온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하되 [주]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으며 바로 그 날에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들의 군대대로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더라.](49-51). 이스라엘 백성들은 드디어 430년의 나그네 생활을 접고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나그네 생활을 했지만 이제는 약속의 땅을 향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무장을 했고(출17:13), 그들의 대장은 전사(man of war-15:3)이셨습니다. 보십시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잘 훈련된 군대처럼 명령대로 행했습니다. 군대의 최고 덕목은 명령에 대한 절대 복종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군대의 이동으로 보셨습니다. 군대는 일사분란합니다. 명령이 떨어지면 모두가 똑 같이 복종하고, 똑같이 행동합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외없이 모세와 아론의 입을 통해 떨어진 주의 명령대로 행했습니다. 명령대로 [주]의 밤을 지키자 주님은 바로 그 날에 이스라엘 자손을 그들의 군대대로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사람은 셋만 모여도 내려진 명령에 삐딱하게 굴거나, 눈치보거나, 슬슬 뒤로 미루어 버리는 일이 허다합니다. 수백년간 종살이를 하며, 남자의 수만 60만 명이 넘는 히브리 백성들이 일사불란하게 명령에 순종했다는 것은 그들이 과연 주의 군대란 사실을 보여 주는 훌륭한 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주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머리 숙여 경배하였던(출 12:27) 예배의 성공에 기인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 역시 주의 말씀을 듣고 경배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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