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6월 22일- 출애굽기
출애굽기(XXXVIII)
말씀: 출애굽기 13:17-22
요절: 출애굽기 13:
38. 주님은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우리말 가운데 “길은 달라도 목표는 하나”란 말이 있습니다. “산의 정상은 하나이지만 올라가는 길은 다양하다”는 말이나 “모로 가나 똑바로 가나 서울만 가면 그만”- 橫步行好去京 (횡보행호거경)이란 말도 있습니다. 이 말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만 도달하면 하면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목표 못지 않게 과정과 수단, 방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이라고 해서 결과만을 중시하지만 하나님은 동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한국 근대 문학의 선구자요, 대표적 친일 작가였던 춘원 이광수는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30년만에 '청춘이란 잡지'(7월호)에 ‘한국 사회에 끼친 기독교의 유익’이란 글을 썼습니다. 그는 기고문에서 기독교는 ‘일제의 종살이에서의 절망과 암흑을 희망을 주고, 새로운 문명을 소개해 주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한 기독교의 유익은 다음 일곱 가지입니다. 1. 희망이 끊어진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2. 무너져 가는 도덕을 다시 일으켜 주었다. -도덕심 재건. 3. 교육을 보급시켜서 교육을 대중화했다.-신교육 보급 4. 여성 지위를 향상 시켰다.-여권 신장(첩제도를 폐지했고...). 5. 조혼의 폐습을 없애고, 결혼 제도를 바로 세워주었다. 6. 성경을 한글로 발간하여 성경의 위치를 높였다. 7. 사상의 자주 정신을 주었다. -중국 사대주의, 공자, 맹자...8. 개개인의 자각심을 길러 주었다. -개개인의 인격성을 일깨워 주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조선 땅에 기독교가 들어와 한국 사회의 큰 은인의 역활을 했다.”입니다. 어느 나라에나 성경이 들어가고, 교회가 세워지면 인권은 향상되고, 자유는 신장되며, 복지는 늘어나고, 경제는 성장하며, 누구나 교육의 기회를 얻게 되며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게 됩니다. 교회란 무엇입니까? 교회란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출애굽이 구원의 역사라면 오늘 본문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인도하시는 주님과 성도의 관계성에 관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후 우리를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성도는 구원받은 이후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이집트에 머물고 있는 것보다 더 비참한 생활을 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받는 것은 새로운 삶을 사는데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구원없이는 새로운 삶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성도의 일생에서 전부는 아닙니다. 그것은 첫 걸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의 압제로부터 구속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자유를 얻었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통해 우리의 인생, 매 순간을 인도하시는 주님에 대한 영적 교훈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즘은 자동차, 선박, 비행기에 GPS(위성항법장치)라는 것이 장착되어 있어서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고 합니다. 만약 그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정확한 위치를 인공위성을 이용해서 알게 해 주기 때문에 실종되지 않습니다. 이번에 이라크전에서 미군들이 낯선 땅에서 그 기구를 사용했습니다. 3개 이상의 인공위성에서 정보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세계 어느 곳에 있어도 10-15m이상의 오차가 나지 않습니다. 이 시스템을 자동차에 설치하면 가고자 하는 목적지까지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줍니다. 달리는 도중에 ??100m 앞에서 좌회전을 하시오, 20m 앞에서 우회전 하시오?? 이런 식으로 아주 정확하게 가르쳐 주기 때문에 그 지시만 따라가면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일지라도 정확하게 목적하는 장소에 이를 수 있습니다. GPS(위성항법장치)는 여행객에게 아주 좋은 인도자가 되어 준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인생의 길도 이렇게 정확하게 인도해 줄 수 있는 GPS같은 도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미리 나의 고난과 장애물을 몇 백 미터 앞에서 가르쳐 주듯이 최소한 몇 일전에 아니면 몇 시간, 몇 분 전에라도 가르쳐 주고 인도해 주는 GPS 장치가 있다면 누구든지 다 마음 놓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해진 길을 안내하는 장치는 설계를 할 수 있지만 아무도 알 수 없는 길은 설계할 수가 없습니다. 길을 알 때만 GPS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GPS를 줄 수 있는 분은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의 인생의 앞 길을 다 아시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성경이란 인생의 지도를 주셨고, 성령이란 인생의 길을 인도하는 항해사를 주셨습니다. 오늘날 저희들에게는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첫째, 하나님은 가까운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집트에서 가나안에 이르는 길은 두 가지 길이 있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지름길, 첩경, 직선 코스입니다. 이집트에서 블레셋 사람들의 땅을 통과해서 직선 코스로 가면 가나안까지는 2주 정도의 거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다른 한 길은 우회해서 광야로 가는 먼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가까운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파라오가 백성을 가게 하였을 때에 블레셋 사람들의 땅에 있는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혹시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후회하고 이집트로 되돌아갈까 염려함이라, 하셨음이라.](7). 하나님의 선택은 블레셋을 통과하는 가까운 길이 아니라 광야의 길이었습니다. 이유는 블레셋 땅을 선택하면 곧 바로 그들과 전쟁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너무 잘 아셨습니다. 이들이 노예 생활을 하다가 벗어나서 곧 바로 전쟁을 하는 생활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등산을 하든지 먼 여행을 할 때 먼저 지도나 가이드(Guide)를 구할 것입니다. 빠르지만 위험이 있는 길과 늦지만 위험이 없는 길이라면 어느 길을 택하겠습니까? 대부분은 위험이 없는 길을 택할 것입니다. 특히 오랫동안 종살이를 해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을 하자마자 블레셋과 전쟁을 해야 한다면 그들은 출애굽을 후회하고, 이집트로 되돌아가 버릴 것입니다. 당시에 블레셋에는 골리앗의 선조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거인들이 많이 있었고, 철병거로 무장한 기갑사단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굳건한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로서 고난을 견디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기꺼이 싸우겠다면 주님께서 능히 그 길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60만 장정이 있는 이스라엘은 오합지졸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우리의 영적 상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우리의 눈 높이에 맞추신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다 빠른 길, 지름길을 찾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길로 인도했을 때 우리의 반응과 결과를 미리 아시기에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길이 더디고 느려 보여도 그 길이 가장 좋은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를 가장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103:13-14,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것같이 주께서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우리의 체질(體質)을 아시며 우리가 다만 먼지임을 기억하시기 때문이로다.](시103:13-14). 하나님은 영적인 어린 아이에 불과한 이들에게 극심한 시험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심한 시험을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장성한 분량에 도달한 다음에 그 믿음에 대한 시험을 받았습니다.
다시 7절 말씀을 보십시오. [파라오가 백성을 가게 하였을 때에 블레셋 사람들의 땅에 있는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혹시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후회하고 이집트로 되돌아갈까 염려함이라, 하셨음이라.](7). 하나님은 광야로 그들의 발걸음을 정하셨는데 이는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인지 몰라도 모든 길은 두 갈래뿐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신 길과 그렇지 않는 길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길로 가다가 망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그 끝이 생명입니다. 사람들이 선택한 길은 옳게 보여도 그 끝은 사망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잠14:12).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가는 존재들입니다(사53:6). 이런 이유로 우리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절대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주께서 선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시37:23)라고 합니다.
둘째, 이스라엘은 무장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주의 군대로 부르셨습니다. 이들이 아직 전쟁 수행 능력이 없다 할지라도 이들은 분명히 주의 군사들입니다. 성도는 누구나 구원받는 즉시 주의 군대로 부름받습니다. 광야로 가는 길에 그들이 무장한 까닭은 이제 이들이 군사 훈련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 훈련의 기초는 총을 쏘고, 유격 훈련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군복을 입히고, 총만 잡았다고 군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군인에게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훈련은 명령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걷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버리고 명령에 순종할 때 이미 군인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어느 군대나 사병들에게 가장 먼저 시키는 훈련은 줄을 세워서 제식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갓, 뒤로 돌아 갓, 제 자리에 섯! 이것이 도대체 전쟁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지만 그 훈련이 안되면 아무 훈련도 받을 수 없습니다. 인도자의 인도를 받는 것, 지휘자의 명령에 순종하는 법이 군인의 가장 기초적인 덕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홍해의 광야 길을 통해 백성을 인도하시니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무장을 하고 올라가니라.](8). 이제 이스라엘은 한 걸음 한 걸음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홍해의 광야 길을 통해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신약 성도들은 손에 총칼을 잡는 무장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원수들이나 대적들이 아니라 영적인 원수, 대적들과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정신 무장, 신앙 무장을 해야 합니다.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을 잡고,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입고 무장을 한 후에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하셨은즉 그와 같이 너희도 같은 생각으로 무장하라. 이는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한 자가 이미 죄를 그쳤기 때문이라.](벧전4:1).
다시 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 홍해의 광야 길을 통해 백성을 인도하시니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무장을 하고 올라가니라.](8).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뭔가 목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를 건너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일입니다. 주님은 홍해에서 이집트를 완전히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이것도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입니다. 주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과 순종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순례자의 길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막연히 걷는 것이 아니라 뭔가 배움을 얻는 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교회였습니다.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에 있던 교회에 있으면서 살아 있는 말씀들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바로 이 사람이라.](행7:38). 신약 교회 성도들은 광야의 교회 성도들이 얻은 영적 교훈과 훈련을 잘 배워야 합니다.
셋째, 뼈를 남기지 말라. 출애굽은 구원의 모형인 동시에 휴거의 모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을 예표하는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마귀를 예표하는 파라오의 권세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집트 땅에는 야곱의 유골이나 요셉의 유골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모세는 이집트를 떠나면서 요셉의 뼈를 취했습니다. [모세가 요셉의 뼈를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엄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여기에서 내 뼈를 가지고 올라갈지니라, 하였음이더라.](19). 성도들은 이 땅에서 휴거될 때 이 땅에는 성도들의 뼈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주님의 뼈는 이 땅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넷째, 주께서 그들 앞에 가시며 인도하셨습니다. 양치기들을 보면 양들 앞에서 따라오게 하는 목자가 있고, 양들 뒤에서 몰아가는 목자가 있습니다. 주님은 앞서 나가시며 인도하시는 목자입니다. [그들이 숙곳에서 떠나 광야 끝에 있는 에담에 진을 치니라. [주]께서 그들 앞에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빛을 주사 밤낮으로 가게 하셨으며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을 백성 앞에서 옮기지 아니하셨더라.](20-22).
여기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을 예표하는 것들입니다. 광야의 사막은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어린이와 노약자들은 도저히 여행할 수 없는 그런 환경입니다. 가끔 사하라 사막 횡단, 고비 사막을 횡단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거의 탈진하거나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겪습니다. 주님께서 구름 기둥을 주신 것은 그들에게 그늘을 주시고, 시원함을 보내신 것입니다. 밤에 불 기둥은 빛을 주시고 동시에 열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사건을 일컬어 [또 그들을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인도하사 그들이 가야 할 길에 빛을 주셨사오며](느9:12)라고 말했습니다. [주께서는 많은 긍휼을 베푸사 그들을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이 그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길을 인도하게 하시며 밤에는 불 기둥이 그들에게 빛을 보이고 갈 길을 비취게 하셨사오며](느9:19).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부족함이나 빈틈이 없습니다.
오늘날 신약 교회 성도들은 광야를 여행하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대신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실 성령을 주셨습니다. 로마서 8:14,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롬8:14).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성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성도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를 인도하는 몇 가지를 보겠습니다.
? 구약 시대의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 선생입니다.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訓育) 선생이었으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라.](갈3:24).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준수한다고 하면서 막상 율법의 인도함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지 못했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데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이 주어진 것은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함이었습니다.
? 성육신 하신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문지기는 그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10:3).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불러 인도하여 내십니다. 이것은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부르심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고 죽으심으로 양들을 불러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하여 한 번 고난을 받으사 의로운 자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육체 안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되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리심을 받으사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3:18).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싶다면 십자가를 보십시오. 갈보리 언덕에는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스스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무엇이든지 듣는 것만을 말씀하시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너희에게 보이실 것임이라.](요16:13). 성령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를 갈보리의 십자가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의의 길로 인도하시며, 생명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령을 점쟁이나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요술 방망이나 마법의 지팡이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성령은 자아 실현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도구가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이 땅에서 더 잘 먹고 더 잘 사는 법을 가르쳐 주는 성공학 강좌를 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고, 진리를 통해서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의 인도하심은 이 땅에서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 저 하늘에서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는 왕좌 한가운데 계시는 어린양께서 그들을 먹이시며 생명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임이라, 하더라.](계7:17). 주님은 영원히 우리의 인도자가 되십니다.
다시 본문을 보십시오. [[주]께서 그들 앞에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빛을 주사 밤낮으로 가게 하셨으며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을 백성 앞에서 옮기지 아니하셨더라.](21-22). 구름 기둥은 유월절 어린 양이 죽고 나서 이집트에서 나올 때부터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 다음에 그 믿는 자들을 인도해 내십니다. 이스라엘이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을 수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들을 위해 죽은 어린 양의 피의 공로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을 받아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은 전적으로 십자가의 피의 공로 때문입니다. 십자가 없는 성령은 환상이요, 영적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구름 기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위에 주신 선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아무도 구름 기둥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들 중에 누구 하나 주님께 다른 위로자 성령을 보내 주시도록 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아시고 먼저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을 보내 주시도록 아버지께 기도한 분은 주님이셨습니다(요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분께서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거하게 하시리니](요14:16). 구름 기둥은 이스라엘이 광야를 여행하는데 인도자로 보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우리를 좁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빛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마찬 가지로 성령은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통해 빛을 줍니다. 구름 기둥은 덮개로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는 불을 펴사 빛을 주셨으며](시105:39). 이스라엘 백성들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신음하며 순례하는 것이 아니라 구름의 덮개로 인해 매우 시원한 여행을 했습니다. 어려운 길이라도 주님의 함께 하심이 있을 때 이외로 쉬운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빛 가리개나 양산이 필요하지 않았고, 부채나 선풍기, 에어컨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낮에 햇볕 아래서 일해본 사람들은 구름의 고마움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우리에게 이런 보호막이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구름 기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3:9, [모세가 성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와 성막 문에 서며 주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시편 99:7, [그분께서 구름 기둥 속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니 그들은 주께서 자기들에게 주신바 그분의 증거들과 규례를 지켰도다.](시99:7).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령께서는 교회들에게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말씀하십니다(계2:7,11,17,29, 3:13,22, 14:13). 구름 기둥은 이스라엘에게는 빛을 주었지만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어둠을 주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의 진영과 이스라엘의 진영 사이에 이르러 서니라. 이 구름 기둥이 저들에게는 구름과 흑암이 되었고 이들에게는 밤에 빛을 주었으므로 밤새도록 저편이 이편에 가까이 오지 못하니라.](출14:20).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빛의 창조자이신 동시에 어둠의 창조자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사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만들고 재앙도 창조하나니 나 [주]가 이 모든 일을 행하느니라.](사45:7). 주님은 신자들에게 진리를 계시하시는 분인 동시에 불신자들에게 진리를 감추어 버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오 하늘과 땅의 주이신 아버지여, 이것들을 지혜롭고 분별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아기들에게는 드러내셨사오니 감사하나이다](마11:25). 구름 기둥은 모세가 성막을 세웠을 때 즉시 그 성막 위에 머무셨습니다. [그가 또 성막과 제단 주위에 돌아가며 뜰을 세우고 뜰 문의 현수막을 다니라. 모세가 이와 같이 일을 끝마치니라. 그 뒤에 구름이 회중의 장막을 덮고 주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중의 장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그 위에 있고 주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기 때문이었으며](출40:33-35). 이는 성령께서 사람들 사이에 거하시는(장막을 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있고, 충만하신 것을 보여 주는 위대한 예표입니다(요1:14). 구름 기둥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반역하고 죄를 범했을 지라도 결코 떠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는 많은 긍휼을 베푸사 그들을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이 그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길을 인도하게 하시며 밤에는 불 기둥이 그들에게 빛을 보이고 갈 길을 비취게 하셨사오며](느9:19). 비록 이스라엘이 불신과 불순종을 일삼으며 모세에게 반역하고 하나님께 불평할 때도 구름 기둥은 결코 그들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어린 양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들이 육신적인 생활을 한다고 해도 떠나지 않는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분께서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거하게 하시리니](요14:16). 이 구름 기둥은 앞으로 다시 한번 이스라엘 위에 있을 것입니다. [또 주께서 시온 산의 모든 거처와 시온의 집회들 위에 낮에는 구름과 연기를 창조하시고 밤에는 타오르는 불빛을 창조하시리니 이는 모든 영광 위에 방벽(培壁)이 있을 것임이라.](사4:5). 주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모으시고 그들 위에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보내실 것이며, 성령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매우 짧은 본문 속에 결코 적지 않는 영적 보화들이 담겨있음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앞서 인도하시고, 가까운 길이 있어도 우리에게 더 안전한 길로 인도하시며, 힘들고 먼 걸이라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해 그 길에 평안을 주심을 배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출애굽기(XXXVIII)
말씀: 출애굽기 13:17-22
요절: 출애굽기 13:
38. 주님은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우리말 가운데 “길은 달라도 목표는 하나”란 말이 있습니다. “산의 정상은 하나이지만 올라가는 길은 다양하다”는 말이나 “모로 가나 똑바로 가나 서울만 가면 그만”- 橫步行好去京 (횡보행호거경)이란 말도 있습니다. 이 말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만 도달하면 하면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목표 못지 않게 과정과 수단, 방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이라고 해서 결과만을 중시하지만 하나님은 동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한국 근대 문학의 선구자요, 대표적 친일 작가였던 춘원 이광수는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30년만에 '청춘이란 잡지'(7월호)에 ‘한국 사회에 끼친 기독교의 유익’이란 글을 썼습니다. 그는 기고문에서 기독교는 ‘일제의 종살이에서의 절망과 암흑을 희망을 주고, 새로운 문명을 소개해 주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한 기독교의 유익은 다음 일곱 가지입니다. 1. 희망이 끊어진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2. 무너져 가는 도덕을 다시 일으켜 주었다. -도덕심 재건. 3. 교육을 보급시켜서 교육을 대중화했다.-신교육 보급 4. 여성 지위를 향상 시켰다.-여권 신장(첩제도를 폐지했고...). 5. 조혼의 폐습을 없애고, 결혼 제도를 바로 세워주었다. 6. 성경을 한글로 발간하여 성경의 위치를 높였다. 7. 사상의 자주 정신을 주었다. -중국 사대주의, 공자, 맹자...8. 개개인의 자각심을 길러 주었다. -개개인의 인격성을 일깨워 주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조선 땅에 기독교가 들어와 한국 사회의 큰 은인의 역활을 했다.”입니다. 어느 나라에나 성경이 들어가고, 교회가 세워지면 인권은 향상되고, 자유는 신장되며, 복지는 늘어나고, 경제는 성장하며, 누구나 교육의 기회를 얻게 되며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게 됩니다. 교회란 무엇입니까? 교회란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출애굽이 구원의 역사라면 오늘 본문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인도하시는 주님과 성도의 관계성에 관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후 우리를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성도는 구원받은 이후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이집트에 머물고 있는 것보다 더 비참한 생활을 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받는 것은 새로운 삶을 사는데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구원없이는 새로운 삶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성도의 일생에서 전부는 아닙니다. 그것은 첫 걸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의 압제로부터 구속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자유를 얻었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통해 우리의 인생, 매 순간을 인도하시는 주님에 대한 영적 교훈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즘은 자동차, 선박, 비행기에 GPS(위성항법장치)라는 것이 장착되어 있어서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고 합니다. 만약 그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정확한 위치를 인공위성을 이용해서 알게 해 주기 때문에 실종되지 않습니다. 이번에 이라크전에서 미군들이 낯선 땅에서 그 기구를 사용했습니다. 3개 이상의 인공위성에서 정보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세계 어느 곳에 있어도 10-15m이상의 오차가 나지 않습니다. 이 시스템을 자동차에 설치하면 가고자 하는 목적지까지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줍니다. 달리는 도중에 ??100m 앞에서 좌회전을 하시오, 20m 앞에서 우회전 하시오?? 이런 식으로 아주 정확하게 가르쳐 주기 때문에 그 지시만 따라가면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일지라도 정확하게 목적하는 장소에 이를 수 있습니다. GPS(위성항법장치)는 여행객에게 아주 좋은 인도자가 되어 준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인생의 길도 이렇게 정확하게 인도해 줄 수 있는 GPS같은 도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미리 나의 고난과 장애물을 몇 백 미터 앞에서 가르쳐 주듯이 최소한 몇 일전에 아니면 몇 시간, 몇 분 전에라도 가르쳐 주고 인도해 주는 GPS 장치가 있다면 누구든지 다 마음 놓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해진 길을 안내하는 장치는 설계를 할 수 있지만 아무도 알 수 없는 길은 설계할 수가 없습니다. 길을 알 때만 GPS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GPS를 줄 수 있는 분은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의 인생의 앞 길을 다 아시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성경이란 인생의 지도를 주셨고, 성령이란 인생의 길을 인도하는 항해사를 주셨습니다. 오늘날 저희들에게는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첫째, 하나님은 가까운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집트에서 가나안에 이르는 길은 두 가지 길이 있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지름길, 첩경, 직선 코스입니다. 이집트에서 블레셋 사람들의 땅을 통과해서 직선 코스로 가면 가나안까지는 2주 정도의 거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다른 한 길은 우회해서 광야로 가는 먼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가까운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파라오가 백성을 가게 하였을 때에 블레셋 사람들의 땅에 있는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혹시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후회하고 이집트로 되돌아갈까 염려함이라, 하셨음이라.](7). 하나님의 선택은 블레셋을 통과하는 가까운 길이 아니라 광야의 길이었습니다. 이유는 블레셋 땅을 선택하면 곧 바로 그들과 전쟁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너무 잘 아셨습니다. 이들이 노예 생활을 하다가 벗어나서 곧 바로 전쟁을 하는 생활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등산을 하든지 먼 여행을 할 때 먼저 지도나 가이드(Guide)를 구할 것입니다. 빠르지만 위험이 있는 길과 늦지만 위험이 없는 길이라면 어느 길을 택하겠습니까? 대부분은 위험이 없는 길을 택할 것입니다. 특히 오랫동안 종살이를 해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을 하자마자 블레셋과 전쟁을 해야 한다면 그들은 출애굽을 후회하고, 이집트로 되돌아가 버릴 것입니다. 당시에 블레셋에는 골리앗의 선조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거인들이 많이 있었고, 철병거로 무장한 기갑사단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굳건한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로서 고난을 견디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기꺼이 싸우겠다면 주님께서 능히 그 길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60만 장정이 있는 이스라엘은 오합지졸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우리의 영적 상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우리의 눈 높이에 맞추신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다 빠른 길, 지름길을 찾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길로 인도했을 때 우리의 반응과 결과를 미리 아시기에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길이 더디고 느려 보여도 그 길이 가장 좋은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를 가장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103:13-14,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것같이 주께서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우리의 체질(體質)을 아시며 우리가 다만 먼지임을 기억하시기 때문이로다.](시103:13-14). 하나님은 영적인 어린 아이에 불과한 이들에게 극심한 시험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심한 시험을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장성한 분량에 도달한 다음에 그 믿음에 대한 시험을 받았습니다.
다시 7절 말씀을 보십시오. [파라오가 백성을 가게 하였을 때에 블레셋 사람들의 땅에 있는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혹시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후회하고 이집트로 되돌아갈까 염려함이라, 하셨음이라.](7). 하나님은 광야로 그들의 발걸음을 정하셨는데 이는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인지 몰라도 모든 길은 두 갈래뿐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신 길과 그렇지 않는 길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길로 가다가 망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그 끝이 생명입니다. 사람들이 선택한 길은 옳게 보여도 그 끝은 사망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잠14:12).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가는 존재들입니다(사53:6). 이런 이유로 우리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절대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주께서 선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시37:23)라고 합니다.
둘째, 이스라엘은 무장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주의 군대로 부르셨습니다. 이들이 아직 전쟁 수행 능력이 없다 할지라도 이들은 분명히 주의 군사들입니다. 성도는 누구나 구원받는 즉시 주의 군대로 부름받습니다. 광야로 가는 길에 그들이 무장한 까닭은 이제 이들이 군사 훈련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 훈련의 기초는 총을 쏘고, 유격 훈련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군복을 입히고, 총만 잡았다고 군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군인에게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훈련은 명령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걷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버리고 명령에 순종할 때 이미 군인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어느 군대나 사병들에게 가장 먼저 시키는 훈련은 줄을 세워서 제식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갓, 뒤로 돌아 갓, 제 자리에 섯! 이것이 도대체 전쟁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지만 그 훈련이 안되면 아무 훈련도 받을 수 없습니다. 인도자의 인도를 받는 것, 지휘자의 명령에 순종하는 법이 군인의 가장 기초적인 덕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홍해의 광야 길을 통해 백성을 인도하시니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무장을 하고 올라가니라.](8). 이제 이스라엘은 한 걸음 한 걸음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홍해의 광야 길을 통해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신약 성도들은 손에 총칼을 잡는 무장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원수들이나 대적들이 아니라 영적인 원수, 대적들과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정신 무장, 신앙 무장을 해야 합니다.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을 잡고,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입고 무장을 한 후에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하셨은즉 그와 같이 너희도 같은 생각으로 무장하라. 이는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한 자가 이미 죄를 그쳤기 때문이라.](벧전4:1).
다시 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 홍해의 광야 길을 통해 백성을 인도하시니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무장을 하고 올라가니라.](8).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뭔가 목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를 건너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일입니다. 주님은 홍해에서 이집트를 완전히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이것도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입니다. 주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과 순종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순례자의 길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막연히 걷는 것이 아니라 뭔가 배움을 얻는 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교회였습니다.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에 있던 교회에 있으면서 살아 있는 말씀들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바로 이 사람이라.](행7:38). 신약 교회 성도들은 광야의 교회 성도들이 얻은 영적 교훈과 훈련을 잘 배워야 합니다.
셋째, 뼈를 남기지 말라. 출애굽은 구원의 모형인 동시에 휴거의 모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을 예표하는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마귀를 예표하는 파라오의 권세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집트 땅에는 야곱의 유골이나 요셉의 유골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모세는 이집트를 떠나면서 요셉의 뼈를 취했습니다. [모세가 요셉의 뼈를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엄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여기에서 내 뼈를 가지고 올라갈지니라, 하였음이더라.](19). 성도들은 이 땅에서 휴거될 때 이 땅에는 성도들의 뼈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주님의 뼈는 이 땅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넷째, 주께서 그들 앞에 가시며 인도하셨습니다. 양치기들을 보면 양들 앞에서 따라오게 하는 목자가 있고, 양들 뒤에서 몰아가는 목자가 있습니다. 주님은 앞서 나가시며 인도하시는 목자입니다. [그들이 숙곳에서 떠나 광야 끝에 있는 에담에 진을 치니라. [주]께서 그들 앞에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빛을 주사 밤낮으로 가게 하셨으며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을 백성 앞에서 옮기지 아니하셨더라.](20-22).
여기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을 예표하는 것들입니다. 광야의 사막은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어린이와 노약자들은 도저히 여행할 수 없는 그런 환경입니다. 가끔 사하라 사막 횡단, 고비 사막을 횡단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거의 탈진하거나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겪습니다. 주님께서 구름 기둥을 주신 것은 그들에게 그늘을 주시고, 시원함을 보내신 것입니다. 밤에 불 기둥은 빛을 주시고 동시에 열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사건을 일컬어 [또 그들을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인도하사 그들이 가야 할 길에 빛을 주셨사오며](느9:12)라고 말했습니다. [주께서는 많은 긍휼을 베푸사 그들을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이 그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길을 인도하게 하시며 밤에는 불 기둥이 그들에게 빛을 보이고 갈 길을 비취게 하셨사오며](느9:19).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부족함이나 빈틈이 없습니다.
오늘날 신약 교회 성도들은 광야를 여행하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대신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실 성령을 주셨습니다. 로마서 8:14,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롬8:14).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성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성도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를 인도하는 몇 가지를 보겠습니다.
? 구약 시대의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 선생입니다.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訓育) 선생이었으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라.](갈3:24).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준수한다고 하면서 막상 율법의 인도함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지 못했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데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이 주어진 것은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함이었습니다.
? 성육신 하신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문지기는 그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10:3).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불러 인도하여 내십니다. 이것은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부르심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고 죽으심으로 양들을 불러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하여 한 번 고난을 받으사 의로운 자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육체 안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되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리심을 받으사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3:18).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싶다면 십자가를 보십시오. 갈보리 언덕에는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스스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무엇이든지 듣는 것만을 말씀하시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너희에게 보이실 것임이라.](요16:13). 성령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를 갈보리의 십자가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의의 길로 인도하시며, 생명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령을 점쟁이나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요술 방망이나 마법의 지팡이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성령은 자아 실현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도구가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이 땅에서 더 잘 먹고 더 잘 사는 법을 가르쳐 주는 성공학 강좌를 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고, 진리를 통해서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의 인도하심은 이 땅에서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 저 하늘에서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는 왕좌 한가운데 계시는 어린양께서 그들을 먹이시며 생명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임이라, 하더라.](계7:17). 주님은 영원히 우리의 인도자가 되십니다.
다시 본문을 보십시오. [[주]께서 그들 앞에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빛을 주사 밤낮으로 가게 하셨으며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을 백성 앞에서 옮기지 아니하셨더라.](21-22). 구름 기둥은 유월절 어린 양이 죽고 나서 이집트에서 나올 때부터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 다음에 그 믿는 자들을 인도해 내십니다. 이스라엘이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을 수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들을 위해 죽은 어린 양의 피의 공로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을 받아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은 전적으로 십자가의 피의 공로 때문입니다. 십자가 없는 성령은 환상이요, 영적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구름 기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위에 주신 선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아무도 구름 기둥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들 중에 누구 하나 주님께 다른 위로자 성령을 보내 주시도록 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아시고 먼저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을 보내 주시도록 아버지께 기도한 분은 주님이셨습니다(요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분께서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거하게 하시리니](요14:16). 구름 기둥은 이스라엘이 광야를 여행하는데 인도자로 보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우리를 좁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빛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마찬 가지로 성령은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통해 빛을 줍니다. 구름 기둥은 덮개로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는 불을 펴사 빛을 주셨으며](시105:39). 이스라엘 백성들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신음하며 순례하는 것이 아니라 구름의 덮개로 인해 매우 시원한 여행을 했습니다. 어려운 길이라도 주님의 함께 하심이 있을 때 이외로 쉬운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빛 가리개나 양산이 필요하지 않았고, 부채나 선풍기, 에어컨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낮에 햇볕 아래서 일해본 사람들은 구름의 고마움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우리에게 이런 보호막이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구름 기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3:9, [모세가 성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와 성막 문에 서며 주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시편 99:7, [그분께서 구름 기둥 속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니 그들은 주께서 자기들에게 주신바 그분의 증거들과 규례를 지켰도다.](시99:7).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령께서는 교회들에게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말씀하십니다(계2:7,11,17,29, 3:13,22, 14:13). 구름 기둥은 이스라엘에게는 빛을 주었지만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어둠을 주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의 진영과 이스라엘의 진영 사이에 이르러 서니라. 이 구름 기둥이 저들에게는 구름과 흑암이 되었고 이들에게는 밤에 빛을 주었으므로 밤새도록 저편이 이편에 가까이 오지 못하니라.](출14:20).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빛의 창조자이신 동시에 어둠의 창조자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사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만들고 재앙도 창조하나니 나 [주]가 이 모든 일을 행하느니라.](사45:7). 주님은 신자들에게 진리를 계시하시는 분인 동시에 불신자들에게 진리를 감추어 버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오 하늘과 땅의 주이신 아버지여, 이것들을 지혜롭고 분별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아기들에게는 드러내셨사오니 감사하나이다](마11:25). 구름 기둥은 모세가 성막을 세웠을 때 즉시 그 성막 위에 머무셨습니다. [그가 또 성막과 제단 주위에 돌아가며 뜰을 세우고 뜰 문의 현수막을 다니라. 모세가 이와 같이 일을 끝마치니라. 그 뒤에 구름이 회중의 장막을 덮고 주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중의 장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그 위에 있고 주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기 때문이었으며](출40:33-35). 이는 성령께서 사람들 사이에 거하시는(장막을 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있고, 충만하신 것을 보여 주는 위대한 예표입니다(요1:14). 구름 기둥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반역하고 죄를 범했을 지라도 결코 떠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는 많은 긍휼을 베푸사 그들을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이 그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길을 인도하게 하시며 밤에는 불 기둥이 그들에게 빛을 보이고 갈 길을 비취게 하셨사오며](느9:19). 비록 이스라엘이 불신과 불순종을 일삼으며 모세에게 반역하고 하나님께 불평할 때도 구름 기둥은 결코 그들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어린 양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들이 육신적인 생활을 한다고 해도 떠나지 않는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분께서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거하게 하시리니](요14:16). 이 구름 기둥은 앞으로 다시 한번 이스라엘 위에 있을 것입니다. [또 주께서 시온 산의 모든 거처와 시온의 집회들 위에 낮에는 구름과 연기를 창조하시고 밤에는 타오르는 불빛을 창조하시리니 이는 모든 영광 위에 방벽(培壁)이 있을 것임이라.](사4:5). 주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모으시고 그들 위에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보내실 것이며, 성령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매우 짧은 본문 속에 결코 적지 않는 영적 보화들이 담겨있음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앞서 인도하시고, 가까운 길이 있어도 우리에게 더 안전한 길로 인도하시며, 힘들고 먼 걸이라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해 그 길에 평안을 주심을 배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권별 강해 > 출애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희는 조용히 있을지니라. (0) | 2005.04.07 |
---|---|
믿음의 바닥을 보여준 이스라엘 (0) | 2005.04.07 |
구속받은 성도에게 주어진 임무 (0) | 2005.04.07 |
이 밤은 [주]의 밤이라 (0) | 2005.04.07 |
출애굽의 밤 (0) | 2005.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