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6월 29일- 출애굽기
출애굽기(XXXIX)
말씀: 출애굽기 14:1-12
요절: 출애굽기 14:4
39. 믿음의 바닥을 보여준 이스라엘
오늘 본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하고도 유명한 사건입니다. 홍해를 건넌 사건은 신약 성경에서 주님이 무덤에서 부활한 사건에 비견될 정도의 큰 사건이며, 구약에서 계속해서 언급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대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시고, 자신을 계시하실 때 이 사건을 말씀하심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오직 나는 [주] 네 하나님이라. 파도가 울부짖던 바다를 갈랐던 자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주]니라.](사51:51).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을 늘 기억해야 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과 더불어 홍해를 가르신 출애굽의 하나님을 늘 기억해야만 했습니다. 홍해를 마르게 하신 사건은 주님의 권능과 구원의 은혜를 계시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는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권능이 크시며 사악한 자를 결코 무죄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는도다. [주]는 회오리바람과 폭풍우 속에 자신의 길을 두시며 구름들은 그분 발의 티끌이로다. 그분께서 바다를 꾸짖어 마르게 하시고 모든 강을 말리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시드는도다.](나훔1:3-4). 주님은 자신의 약속을 새롭게 하실 때에도 이 사건을 언급하셨습니다. [네가 이집트 땅에서 나오던 날들에 한 것같이 내가 그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이리라.](믹7:15). 이런 이유로 전 세대를 걸쳐 마귀의 그의 사역자들은 홍해가 갈라진 사건의 의미를 왜곡하고 축소하고 거부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홍해를 건넌 것이 아니라 홍해 위의 갈대밭을 건넌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달빛에 바다처럼 비친 모래 사막을 건넌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성경을 부정하는 이런 요상한 해석은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교에서 여과없이 수용되고 가르쳐 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통한 초자연적인 사건을 과학적이고 이성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결국 하나님을 부인하려는 마귀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뿌린 사건이 십자가에 해당하는 구원의 모형이라면 홍해의 사건은 죄와 완전히 단절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을 나타내는 모형입니다. 이집트에서부터 가나안에 이르는 출애굽의 여정은 성도의 일생을 보여 주는 예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나 광야가 아닌 가나안 땅에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집트는 세상, 가나안은 승리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유업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를 나온 후에 불신과 불순종함으로 광야에서 죽었듯이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가나안에서의 삶은 맛보지도 못한 채 육신대로 살다가 죽고 맙니다. 물론 그들은 어린 양의 피를 통한 구원을 받았고, 홍해를 통과하는 침례를 받았고,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예표되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경험도 있지만 그들의 마음과 몸은 여전히 불신 속에서 광야에 머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진 유업을 받기보다는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과 환경으로 인해 불평과 불만을 드러냅니다.
오늘 사건은 출애굽한 후에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인도를 받아 호해 앞에 진을 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들의 믿음의 바닥을 완전히 드러내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 속에 깊이 뿌리 내리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돌짝밭에 뿌려진 것처럼 조그만 햇살과 열기에도 타 들어가고 말았습니다(마13:5-6). 우리는 지은 집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에 제대로 지어진 집인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있듯이 우리의 믿음은 시련의 순간에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어떤 순간에 우리가 가진 믿음이 바닥이 났는지, 밑천이 다 드러났는지 살펴 보고 그리스도 안에 깊이 뿌리 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로 하여금 돌이켜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에 진을 치게 하라. 너희가 그 앞에 바닷가에 진을 칠지니](1-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시고, 그들을 홍해 바닷가에 진을 치게 하셨습니다. 이곳은 쉴 곳으로 적당한 곳이지만 적을 맞아 전쟁을 하기에는 적당한 곳이 아닙니다. 만약 전투가 벌어진다면 배수의 진을 치고 싸워야 하는 뒤로 물러 설 곳이 없는 그런 곳이 됩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정예 군사들이 아니라 이제 막 제식 훈련을 받듯이 걸음마를 배우는 그런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을 치게 한 ‘비하히롯’이란 지명은 ‘자유의 땅’이란 뜻을 지닌 이름입니다. 성경의 인명과 지명은 절묘하게도 계시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믹돌’이란 뜻은 ‘망대, 요새’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파라오로부터의 완전한 해방과 자유는 바로 이곳에서 일어날 것임을 암시해 주고있습니다. ‘바알스론’이란 지명의 이름은 ‘북쪽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성경에서 북쪽, 북편은 늘 심판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처소 역시 북편 회중의 산 위라고 언급됩니다. 주님은 이곳에서 다시 한번 이집트의 파라오를 심판하실 것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충분히 심판하셨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고, 추격하여 다시 종살이를 시키려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건드리는 것은 곧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입니다. [만군의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영광이 있은 뒤에 그분께서 너희를 노략한 민족들에게 나를 보내셨나니 이는 너희에게 손을 대는 자는 그분의 눈동자에 손을 대는 것이기 때문이라.](슥2:8).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손을 대는 것은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을 멸하겠다고 계획한 지난 역사의 수많은 군주나 독재자들은 하나같이 비참한 죽음의 심판을 맛보았습니다. 이는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요, 영적인 유대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규칙에 따라 걷는 모든 사람들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갈6:16). 유대의 사울이란 열혈 청년이 교회를 핍박했을 때 주님은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우리가 다 땅에 쓰러지니 내게 말씀하시는 한 음성이 있어 내가 들으매 히브리 말로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찍을 걷어차기가 네게 고생이라, 하시니](행26:14). 사울은 주님을 핍박한 것이요, 그 결과는 자신에게 고생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원리는 신, 구약을 구분하지 않고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가 형제들에게 잘 대해 주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존중하고 섬기는 이유도 이 원리에 입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반 유대인 정책을 입안하고 선동하는 정치인을 지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교회를 말살하고 핍박하는 정부나 단체에 우호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반공을 외치는 것은 그들이 기독교를 말살하고, 교회를 없앴고, 성경을 불태웠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라크 반전 여론에 동참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적대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반전 여론에 동참하고 시위를 하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으며 이르되, 왕이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돕고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셔야 하겠나이까? 그러므로 [주] 앞으로부터 진노가 왕에게 임하리이다.](대하19:2). 우리는 하나님의 대적자들을 동정하고 도와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민 유대인이나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교회를 대적하는 일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란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을 건드리는 것은 곧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입니다. [만군의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 이는 너희에게 손을 대는 자는 그분의 눈동자에 손을 대는 것이기 때문이라.](슥2:8).
3절을 보십시오. [이는 파라오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헤매며 광야에 갇혔도다, 할 것임이라.](3).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면서도 이집트의 궁에 앉아 있는 파라오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고 계셨습니다. 10번째 재앙인 이집트의 첫 태생들의 전멸로 하는 수 없이 보내 주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권능과 말씀에 대해 마음으로 순복하고 두려워 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이스라엘을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전인격적인 변화가 아닌 일시적인 변화는 자신을 완전히 파멸로 이끈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회개는 마음으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을 내 보냈지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해 본 적이 없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은 사무엘 앞에서 잘못했다고 말했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발람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회개에 실패한 영혼은 그 일이 언제든지 다시 반복될 수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신이 넘어진 죄에 다시 걸려 넘어지고, 같은 죄를 반복적으로 짓는 것은 잘못을 시인하고 인정하기 하지만 마음으로부터 참된 회개를 하는데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이 광야에서 헤매다가 길을 잃고 갇혔다고 생각했습니다. 파라오는 하나님의 권능을 수십 번 보고 듣고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렇게 굴복한 것에 대해서 성질을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정당한 권위에 복종하고 합법적인 권세에 순종하는 것에 대해서도 화를 이기지 못하고 성질을 냅니다. 마음이 교만하고 반역적인 사람들은 부모의 권위, 선생님의 권위, 국가의 권위와 같은 그런 권위에도 자신이 순종해야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분노합니다. 육신적인 성도들은 교회의 권위나 목회자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심히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성경의 권위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것이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모순 덩어리라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우리 주변에는 널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불순종할 기회를 엿보는 성도들은 그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반드시 지불함으로 믿음으로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자아를 십자가에서 처리하지 못한 사람들은 인생의 가혹한 시련을 통해서 순종하는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파라오의 영을 지닌 성도들은 돈을 아무리 벌어도 어느 한 순간에 다 날아 가버리는 파산과 빈곤의 터널을 통과할 것이며, 신체적 질병으로 병원에 다 쓰게 되든지, 사건이나 사고를 통해 배상금으로 날아가 버리든지, 도둑이나 강도가 들어서 모조리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든지 애매한 소송에 걸려들어 날아가 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하게 만드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셨다가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심으로 철저히 믿음에 순종하게 만드시는데 ‘자식의 타락’이나 ‘불순종’으로 겸손하게 하시고, 배우자의 부정이나 이혼, 사별, 불임이나 끝없는 가정의 불화를 통해 삶의 즐거움을 완전히 빼앗아 버리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이 오직 믿음으로만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하시기 위해 고통의 용광로에서 연단받게 하시며, 빛이 없는 인생의 흑암에서 거닐게 하시거나, 걱정과 근심으로 뼈가 삭고, 알 수 없는 공포와 죽음의 두려움으로 혼이 떨리고, 죄의 정욕에 꽁꽁 묶여서 비참한 지경에 이르도록 하심으로 온전한 믿음의 영을 소유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얼마의 세월이 걸리든지 간에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자신의 선하신 뜻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전도 유망한 청년이 사고로 눈을 잃어 절망을 하고, 매주 성가대에서 특송을 하며 예쁜 외모와 노래 솜씨를 자랑하던 자매가 불타는 차 안에서 전신 화상을 입어 얼굴의 형체도 알아 볼 수 없게 되는 일은 남의 일만이 아닙니다. 이런 징계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깨뜨리시는데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교만한 목을 꺾고, 딱딱한 마음을 갈아 엎어서 성경을 믿음으로 읽고 오직 주님만을 신뢰하고 거기에 산소망을 두게 하십니다. 이런 징계와 연단을 통해 성도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죄를 극복하는지, 영생의 현재적 소망이 무엇인지, 우리가 받을 유업의 상속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저는 성도 여러분이 이런 훈련과 징계를 받기 전에 갈보리의 십자가를 통해 자신을 처리하고 믿음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 성령 안에서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내가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파라오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인하여 영광을 얻고 이집트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주]인 줄을 알게 하리라, 하시매 그들이 그대로 행하니라.](4). 하나님은 파라오의 완악한 마음을 아셨기에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열 가지 재앙으로 인해 이집트는 회생 불능의 타격을 입은 것 같았지만 여전히 최정예를 자랑하는 군대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특히 파라오가 이끄는 기병대는 여전히 제국의 강력한 힘이었습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무너진 왕의 위엄과 권위를 되찾고, 잃어버렸던 노예들을 다시 잡아들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파라오와 그의 군대를 통해 영광을 얻고, 이집트 사람들에게 자신이 [주]인 줄을 알게 하실 계획이셨습니다.
전에 여러 차례 말씀드렸듯이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계시된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입니다.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주님을 알게 됩니다. 파라오와 이집트 백성들은 심판을 통해 주님을 알게 되었는데, 이런 지식은 너무나 피상적이어서 계속 반복을 해도 결코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5-9절을 보십시오. [백성이 도망하였음을 /어떤 사람이/ 이집트 왕에게 고하매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이 마음을 바꾸고 백성을 대적하여 이르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리를 섬기는 일을 그만두고 가게 하였는가? 하고 파라오가 자기 병거를 준비시키고 자기 백성을 데리고 가서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이집트의 모든 병거를 취하고 또 병거마다 대장을 취하였더라. [주]께서 이집트 왕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쫓았으되 이스라엘 자손은 높은 손과 함께 나갔더라. 그러나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추격하여 파라오의 모든 말과 병거와 그의 기병과 그의 군대가 바알스본 앞 비하히롯 옆 해변에 진을 친 그들을 따라 잡으니라.](출14:5~9).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미리 말씀하신 대로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GPS(위성항법 장치)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미리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심으로써 다가올 어려움들을 이기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려움을 없애주는 대신 어려움을 이길 힘과 지혜를 주십니다.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 올 일들을 한 가지씩 다 알려 주십니다. 여러분들은 예언의 은사를 받지 않아도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 요청한 것들을 받는 확신을 가질 수 있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경고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모스 3:6-7, [도시에서 나팔을 부는데 어찌 백성이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께서 행하지 아니하셨는데 어찌 도시에 재앙이 있겠느냐? 분명히 {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은밀한 일을 자신의 종 대언자들에게 계시하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암3:6-7). 죄에 연루되어 있다면 속히 회개하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어느날 갑자기 징계가 임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기도하기를 쉬고 있다면 즉시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여러분이 얻고자 해도 소유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이 발생한다면 성경을 읽으십시오. 깨닫지 못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말씀의 빛이 내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경과 성령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계시해 주십니다. 우리는 지각을 초월하는 풍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며, 지혜와 계시의 영을 통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십시오. 설교를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저는 저에게 하나님의 뜻과 음성을 어떻게 아느냐?는 상담을 받을 때마다 “지난 주에 당신의 교회에서 한 설교를 다시 들으시오. 그 본문을 다시 묵상해 보시오.”라고 답해 줍니다. 하나님은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를 통해 성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듣기를 거부한다면 여러분 안에는 어떤 빛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본문을 보십시오.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은 600대의 병거를 취하고 병거마다 대장을 두었는데 이는 최정예 기갑사단이었습니다. 이들이 출정할 때 곧 바로 복수의 기회가 왔구나 흥분과 설렘이 가슴을 휘몰아 쳤을 것입니다. 악인들이 일어날 때는 노도 광풍과 같이 무서운 기세를 발휘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단숨에 꺾어 버리십니다. 우리는 파라오를 통해 마귀의 모습을 봅니다. 마귀는 자신의 손을 벗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즉시 추격을 개시합니다. 이 때 성도들은 극심한 시험을 겪게 됩니다. 시험을 겪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이전에 많은 영적 체험을 했다 할지라도 새로운 시험이 닥치면 이전의 모든 경험은 없었던 것만 같습니다. 마음 속에 심겨진 말씀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는 우리의 경험이 되고 말 것입니다.
10절입니다. [파라오가 가까이 오매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보라, 이집트 사람들이 자기들의 뒤를 따라 행진하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주]께 부르짖으며] (10).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을 들어 주님을 본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뒤를 따라오는 이집트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밤에 불 기둥을 보았고, 지금 낮에는 구름 기둥도 보고 있지만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파라오와 그의 기병대만 눈에 크게 들어왔습니다. 이집트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다 보고 체험한 이후이지만 이들의 믿음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길이 없습니다. 표적 신앙이란 다 이런 것입니다. 표적을 통해 뜨거워진 신앙은 위기의 순간에 결코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들은 ‘파라오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만, 얼마나 더 혼이 나야 정신을 차릴꼬...’ 이런 마음이 든 것이 아니라 심히 두려워하여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움과 믿음은 결코 한 마음 안에 공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두려움은 사라질 것입니다. 반대로 두려움이 임하면 믿음은 사라지고 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FEAR NOT 이란 말은 성경에서 무려 365회나 나옵니다. 이는 우리가 얼마나 자주 두려움에 떠는지 주님께서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치유하는 방법은 파라오와 그의 병사를 보는 대신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들의 기병을 보는 대신 그들 위에 머물고 있는 구름을 보고, 그 안에 거하시는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환경과 처지를 보는 것은 영적 평안을 깨뜨리는 치명적인 무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움과 보호를 구하기 위해 주께 부르짖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본문의 부르짖음은 불신과 불평의 부르짖음입니다. 이들의 부르짖음은 주님의 제자들이 폭풍우치는 바다 위에서 [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하매]한 것과 비슷합니다. 울부짖기는 하는데 거기에는 불신과 불만, 불평이 가득합니다. 주님, 우리가 죽게되었는데 돌보지 않으십니까? 이것은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이 주님께 내뱉는 일성(一聲)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마음 가운데 무엇이 있는지는 일을 겪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 받은 은혜가 아무리 많아도 당장 지금 나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안면몰수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도 동일한 자세를 취함으로써 그들의 악한 마음이 다 드러났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이집트에 무덤이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를 대하느냐?](11). 믿음이 결여되면 사람들의 지각 역시 떨어집니다. 가장 돌머리는 가장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믿음이 터무니없고,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믿음이 있어야 깨닫게 되고, 믿음이 있어야 논리적이 되며, 믿음이 있어야 똑똑해집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이집트인들의 손에 죽게 하실 생각이라면 왜 그들을 인도하여 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에게 호렙 산에서 경배할 것임을 말씀해 주셨는데, 홍해 앞에서 죽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어지면 생각도 없어집니다. 믿음의 영은 건전한 생각의 영입니다. 믿음의 없으면 건전한 생각은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두려움의 영이 아니요, 권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이기 때문이라.](딤후1:7).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그러하듯이 곧 바로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에게 불평을 토해냈습니다. 기도하고 서로 격려하는 대신 그들은 비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신 곳에 진을 쳤다면 그들은 원수의 공격을 두려워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연단을 받아야 합니다.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은 모든 것이 충분한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믿음의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할 힘을 주시고, 피할 길을 내시는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고전10:13). 또한 이런 연단을 통해서 우리는 생각하는 것이나 구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도록 능히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엡3:20).
다시 11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이집트에 무덤이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를 대하느냐?](11). 백성들은 즉시 모세를 향해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아마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이들은 모세의 목을 잘라 파라오에게 갖다 바치면서 용서를 빌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주의 이적들을 깨닫지 못하였으며 주의 풍성한 긍휼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바다에서 곧 홍해에서 그분을 격노하게 하였나이다.](시106:7). 하나님은 모세를 그들의 목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좋을 때는 목자로 인정하지만 자기들에게 조금만 불리한 일이 발생하면 언제든지 반역을 일삼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지휘만 잘 따르고 순종하면 절대 안전합니다. 하나님은 양떼들 위에 목자를 세워 두시고 목자를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제 아무리 똑똑하고 믿음이 좋다고 해도 목자 없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목사의 권위나 지위, 역할을 지나치게 신격화함으로써 오는 폐단에 반발하여 반대로 목자의 권위를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교인들이 많아졌습니다. 양들을 먹이는 대신 군림하려는 거짓 목자들로 인해 자신들을 먹이는 목자까지 배척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목자는 양들을 먹입니다. 목자는 하나님의 소명으로 세움을 받습니다. 성경에는 목자, 장로, 감독 등 다양한 직분이 나오지만 pastor(목양자, 목자)만이 주님의 소명으로 세워집니다. [또 내가 그들을 먹일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부족하지 아니하리라. [주]가 말하노라.](렘23:4). 하나님은 자신의 양들을 먹일 자를 그들 위에 세우십니다. [내가 또 내 마음에 맞는 목양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明哲)로 너희를 먹이리라.](렘3:15). 우리는 여기서 목자의 영적 권위가 주님으로부터 비롯되며, 그들의 역할이 양들을 먹이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목자로부터 양식의 공급없이 성장할 수 있는 양은 없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세 차례나 ‘내 어린 양들을 먹이라, 내 양들을 먹이라, 내 양들을 먹이라’(요21:15,16,17)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제가 잘 아는 교회가 큰 분란에 휩싸여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른 이야기는 저의 관심을 끌지 못했는데 한 마디 말이 저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목사님, 그렇게 하면 우리는 목사님 교회에 안 나갑니다.’ 몇 가정의 성도가 목사를 상대로 deal을 시도했습니다. ‘목사님, 그 성도 우리 교회 회원으로 받아들이면 저 성경 공부 안 나갑니다. 그 사람 우리 교회 나오면 저는 안 나갑니다.’ 이런 성도들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조폭 문화, 집단 노조를 연상케 합니다. 교회 내의 이런 현상은 성경적이도 영적이지도 않습니다. 이런 모습은 전형적인 불신과 불순종의 영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도가 교회를 나오고, 설교를 듣는 것이 흥정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집트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더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이집트 사람들을 섬기리라, 하지 아니하더냐? 이는 이집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았을 것임이라, 하였더라.](12). 불만은 계속됩니다. 이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 앞에 나가시며, 자신들을 위해 싸우신다는 사실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전에 이집트를 떠나기 싫어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은 마음에도 없는 출애굽을 했다는 것이며, 이집트에서 나온 것이 후회된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베푸신 은혜는 한 순간에 쓸데없는 짓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누가 구출해 달라고 했느냐? 이런 식입니다. 우리말로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란 말 그대로입니다.
이것이 바로 극단적인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있는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평상시에는 자신의 상태를 속일 수도 있고, 가릴 수도 있지만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결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평소에 꾸준히 주님과 동행한 사람들은 시험의 순간에 빛나는 믿음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런 대표적인 사람이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입니다. 반면 극적인 체험과 놀라운 이적들을 경험했지만 전혀 믿음다운 믿음이 없는 경우가 바로 출애굽한 이스라엘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자랍니다. 믿음은 믿음의 말씀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성경은 믿음의 말씀입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내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이런 불신의 성도들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계속 하겠습니다.
출애굽기(XXXIX)
말씀: 출애굽기 14:1-12
요절: 출애굽기 14:4
39. 믿음의 바닥을 보여준 이스라엘
오늘 본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하고도 유명한 사건입니다. 홍해를 건넌 사건은 신약 성경에서 주님이 무덤에서 부활한 사건에 비견될 정도의 큰 사건이며, 구약에서 계속해서 언급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대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시고, 자신을 계시하실 때 이 사건을 말씀하심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오직 나는 [주] 네 하나님이라. 파도가 울부짖던 바다를 갈랐던 자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주]니라.](사51:51).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을 늘 기억해야 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과 더불어 홍해를 가르신 출애굽의 하나님을 늘 기억해야만 했습니다. 홍해를 마르게 하신 사건은 주님의 권능과 구원의 은혜를 계시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는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권능이 크시며 사악한 자를 결코 무죄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는도다. [주]는 회오리바람과 폭풍우 속에 자신의 길을 두시며 구름들은 그분 발의 티끌이로다. 그분께서 바다를 꾸짖어 마르게 하시고 모든 강을 말리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시드는도다.](나훔1:3-4). 주님은 자신의 약속을 새롭게 하실 때에도 이 사건을 언급하셨습니다. [네가 이집트 땅에서 나오던 날들에 한 것같이 내가 그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이리라.](믹7:15). 이런 이유로 전 세대를 걸쳐 마귀의 그의 사역자들은 홍해가 갈라진 사건의 의미를 왜곡하고 축소하고 거부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홍해를 건넌 것이 아니라 홍해 위의 갈대밭을 건넌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달빛에 바다처럼 비친 모래 사막을 건넌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성경을 부정하는 이런 요상한 해석은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교에서 여과없이 수용되고 가르쳐 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통한 초자연적인 사건을 과학적이고 이성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결국 하나님을 부인하려는 마귀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뿌린 사건이 십자가에 해당하는 구원의 모형이라면 홍해의 사건은 죄와 완전히 단절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을 나타내는 모형입니다. 이집트에서부터 가나안에 이르는 출애굽의 여정은 성도의 일생을 보여 주는 예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나 광야가 아닌 가나안 땅에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집트는 세상, 가나안은 승리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유업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를 나온 후에 불신과 불순종함으로 광야에서 죽었듯이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가나안에서의 삶은 맛보지도 못한 채 육신대로 살다가 죽고 맙니다. 물론 그들은 어린 양의 피를 통한 구원을 받았고, 홍해를 통과하는 침례를 받았고,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예표되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경험도 있지만 그들의 마음과 몸은 여전히 불신 속에서 광야에 머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진 유업을 받기보다는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과 환경으로 인해 불평과 불만을 드러냅니다.
오늘 사건은 출애굽한 후에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인도를 받아 호해 앞에 진을 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들의 믿음의 바닥을 완전히 드러내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 속에 깊이 뿌리 내리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돌짝밭에 뿌려진 것처럼 조그만 햇살과 열기에도 타 들어가고 말았습니다(마13:5-6). 우리는 지은 집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에 제대로 지어진 집인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있듯이 우리의 믿음은 시련의 순간에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어떤 순간에 우리가 가진 믿음이 바닥이 났는지, 밑천이 다 드러났는지 살펴 보고 그리스도 안에 깊이 뿌리 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로 하여금 돌이켜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에 진을 치게 하라. 너희가 그 앞에 바닷가에 진을 칠지니](1-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시고, 그들을 홍해 바닷가에 진을 치게 하셨습니다. 이곳은 쉴 곳으로 적당한 곳이지만 적을 맞아 전쟁을 하기에는 적당한 곳이 아닙니다. 만약 전투가 벌어진다면 배수의 진을 치고 싸워야 하는 뒤로 물러 설 곳이 없는 그런 곳이 됩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정예 군사들이 아니라 이제 막 제식 훈련을 받듯이 걸음마를 배우는 그런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을 치게 한 ‘비하히롯’이란 지명은 ‘자유의 땅’이란 뜻을 지닌 이름입니다. 성경의 인명과 지명은 절묘하게도 계시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믹돌’이란 뜻은 ‘망대, 요새’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파라오로부터의 완전한 해방과 자유는 바로 이곳에서 일어날 것임을 암시해 주고있습니다. ‘바알스론’이란 지명의 이름은 ‘북쪽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성경에서 북쪽, 북편은 늘 심판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처소 역시 북편 회중의 산 위라고 언급됩니다. 주님은 이곳에서 다시 한번 이집트의 파라오를 심판하실 것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충분히 심판하셨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고, 추격하여 다시 종살이를 시키려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건드리는 것은 곧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입니다. [만군의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영광이 있은 뒤에 그분께서 너희를 노략한 민족들에게 나를 보내셨나니 이는 너희에게 손을 대는 자는 그분의 눈동자에 손을 대는 것이기 때문이라.](슥2:8).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손을 대는 것은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을 멸하겠다고 계획한 지난 역사의 수많은 군주나 독재자들은 하나같이 비참한 죽음의 심판을 맛보았습니다. 이는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요, 영적인 유대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규칙에 따라 걷는 모든 사람들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갈6:16). 유대의 사울이란 열혈 청년이 교회를 핍박했을 때 주님은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우리가 다 땅에 쓰러지니 내게 말씀하시는 한 음성이 있어 내가 들으매 히브리 말로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찍을 걷어차기가 네게 고생이라, 하시니](행26:14). 사울은 주님을 핍박한 것이요, 그 결과는 자신에게 고생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원리는 신, 구약을 구분하지 않고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가 형제들에게 잘 대해 주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존중하고 섬기는 이유도 이 원리에 입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반 유대인 정책을 입안하고 선동하는 정치인을 지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교회를 말살하고 핍박하는 정부나 단체에 우호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반공을 외치는 것은 그들이 기독교를 말살하고, 교회를 없앴고, 성경을 불태웠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라크 반전 여론에 동참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적대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반전 여론에 동참하고 시위를 하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으며 이르되, 왕이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돕고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셔야 하겠나이까? 그러므로 [주] 앞으로부터 진노가 왕에게 임하리이다.](대하19:2). 우리는 하나님의 대적자들을 동정하고 도와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민 유대인이나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교회를 대적하는 일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란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을 건드리는 것은 곧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입니다. [만군의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 이는 너희에게 손을 대는 자는 그분의 눈동자에 손을 대는 것이기 때문이라.](슥2:8).
3절을 보십시오. [이는 파라오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헤매며 광야에 갇혔도다, 할 것임이라.](3).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면서도 이집트의 궁에 앉아 있는 파라오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고 계셨습니다. 10번째 재앙인 이집트의 첫 태생들의 전멸로 하는 수 없이 보내 주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권능과 말씀에 대해 마음으로 순복하고 두려워 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이스라엘을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전인격적인 변화가 아닌 일시적인 변화는 자신을 완전히 파멸로 이끈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회개는 마음으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을 내 보냈지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해 본 적이 없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은 사무엘 앞에서 잘못했다고 말했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발람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회개에 실패한 영혼은 그 일이 언제든지 다시 반복될 수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신이 넘어진 죄에 다시 걸려 넘어지고, 같은 죄를 반복적으로 짓는 것은 잘못을 시인하고 인정하기 하지만 마음으로부터 참된 회개를 하는데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이 광야에서 헤매다가 길을 잃고 갇혔다고 생각했습니다. 파라오는 하나님의 권능을 수십 번 보고 듣고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렇게 굴복한 것에 대해서 성질을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정당한 권위에 복종하고 합법적인 권세에 순종하는 것에 대해서도 화를 이기지 못하고 성질을 냅니다. 마음이 교만하고 반역적인 사람들은 부모의 권위, 선생님의 권위, 국가의 권위와 같은 그런 권위에도 자신이 순종해야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분노합니다. 육신적인 성도들은 교회의 권위나 목회자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심히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성경의 권위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것이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모순 덩어리라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우리 주변에는 널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불순종할 기회를 엿보는 성도들은 그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반드시 지불함으로 믿음으로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자아를 십자가에서 처리하지 못한 사람들은 인생의 가혹한 시련을 통해서 순종하는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파라오의 영을 지닌 성도들은 돈을 아무리 벌어도 어느 한 순간에 다 날아 가버리는 파산과 빈곤의 터널을 통과할 것이며, 신체적 질병으로 병원에 다 쓰게 되든지, 사건이나 사고를 통해 배상금으로 날아가 버리든지, 도둑이나 강도가 들어서 모조리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든지 애매한 소송에 걸려들어 날아가 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하게 만드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셨다가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심으로 철저히 믿음에 순종하게 만드시는데 ‘자식의 타락’이나 ‘불순종’으로 겸손하게 하시고, 배우자의 부정이나 이혼, 사별, 불임이나 끝없는 가정의 불화를 통해 삶의 즐거움을 완전히 빼앗아 버리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이 오직 믿음으로만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하시기 위해 고통의 용광로에서 연단받게 하시며, 빛이 없는 인생의 흑암에서 거닐게 하시거나, 걱정과 근심으로 뼈가 삭고, 알 수 없는 공포와 죽음의 두려움으로 혼이 떨리고, 죄의 정욕에 꽁꽁 묶여서 비참한 지경에 이르도록 하심으로 온전한 믿음의 영을 소유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얼마의 세월이 걸리든지 간에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자신의 선하신 뜻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전도 유망한 청년이 사고로 눈을 잃어 절망을 하고, 매주 성가대에서 특송을 하며 예쁜 외모와 노래 솜씨를 자랑하던 자매가 불타는 차 안에서 전신 화상을 입어 얼굴의 형체도 알아 볼 수 없게 되는 일은 남의 일만이 아닙니다. 이런 징계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깨뜨리시는데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교만한 목을 꺾고, 딱딱한 마음을 갈아 엎어서 성경을 믿음으로 읽고 오직 주님만을 신뢰하고 거기에 산소망을 두게 하십니다. 이런 징계와 연단을 통해 성도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죄를 극복하는지, 영생의 현재적 소망이 무엇인지, 우리가 받을 유업의 상속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저는 성도 여러분이 이런 훈련과 징계를 받기 전에 갈보리의 십자가를 통해 자신을 처리하고 믿음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 성령 안에서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내가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파라오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인하여 영광을 얻고 이집트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주]인 줄을 알게 하리라, 하시매 그들이 그대로 행하니라.](4). 하나님은 파라오의 완악한 마음을 아셨기에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열 가지 재앙으로 인해 이집트는 회생 불능의 타격을 입은 것 같았지만 여전히 최정예를 자랑하는 군대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특히 파라오가 이끄는 기병대는 여전히 제국의 강력한 힘이었습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무너진 왕의 위엄과 권위를 되찾고, 잃어버렸던 노예들을 다시 잡아들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파라오와 그의 군대를 통해 영광을 얻고, 이집트 사람들에게 자신이 [주]인 줄을 알게 하실 계획이셨습니다.
전에 여러 차례 말씀드렸듯이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계시된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입니다.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주님을 알게 됩니다. 파라오와 이집트 백성들은 심판을 통해 주님을 알게 되었는데, 이런 지식은 너무나 피상적이어서 계속 반복을 해도 결코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5-9절을 보십시오. [백성이 도망하였음을 /어떤 사람이/ 이집트 왕에게 고하매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이 마음을 바꾸고 백성을 대적하여 이르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리를 섬기는 일을 그만두고 가게 하였는가? 하고 파라오가 자기 병거를 준비시키고 자기 백성을 데리고 가서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이집트의 모든 병거를 취하고 또 병거마다 대장을 취하였더라. [주]께서 이집트 왕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쫓았으되 이스라엘 자손은 높은 손과 함께 나갔더라. 그러나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추격하여 파라오의 모든 말과 병거와 그의 기병과 그의 군대가 바알스본 앞 비하히롯 옆 해변에 진을 친 그들을 따라 잡으니라.](출14:5~9).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미리 말씀하신 대로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GPS(위성항법 장치)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미리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심으로써 다가올 어려움들을 이기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려움을 없애주는 대신 어려움을 이길 힘과 지혜를 주십니다.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 올 일들을 한 가지씩 다 알려 주십니다. 여러분들은 예언의 은사를 받지 않아도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 요청한 것들을 받는 확신을 가질 수 있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경고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모스 3:6-7, [도시에서 나팔을 부는데 어찌 백성이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께서 행하지 아니하셨는데 어찌 도시에 재앙이 있겠느냐? 분명히 {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은밀한 일을 자신의 종 대언자들에게 계시하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암3:6-7). 죄에 연루되어 있다면 속히 회개하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어느날 갑자기 징계가 임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기도하기를 쉬고 있다면 즉시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여러분이 얻고자 해도 소유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이 발생한다면 성경을 읽으십시오. 깨닫지 못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말씀의 빛이 내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경과 성령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계시해 주십니다. 우리는 지각을 초월하는 풍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며, 지혜와 계시의 영을 통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십시오. 설교를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저는 저에게 하나님의 뜻과 음성을 어떻게 아느냐?는 상담을 받을 때마다 “지난 주에 당신의 교회에서 한 설교를 다시 들으시오. 그 본문을 다시 묵상해 보시오.”라고 답해 줍니다. 하나님은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를 통해 성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듣기를 거부한다면 여러분 안에는 어떤 빛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본문을 보십시오.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은 600대의 병거를 취하고 병거마다 대장을 두었는데 이는 최정예 기갑사단이었습니다. 이들이 출정할 때 곧 바로 복수의 기회가 왔구나 흥분과 설렘이 가슴을 휘몰아 쳤을 것입니다. 악인들이 일어날 때는 노도 광풍과 같이 무서운 기세를 발휘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단숨에 꺾어 버리십니다. 우리는 파라오를 통해 마귀의 모습을 봅니다. 마귀는 자신의 손을 벗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즉시 추격을 개시합니다. 이 때 성도들은 극심한 시험을 겪게 됩니다. 시험을 겪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이전에 많은 영적 체험을 했다 할지라도 새로운 시험이 닥치면 이전의 모든 경험은 없었던 것만 같습니다. 마음 속에 심겨진 말씀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는 우리의 경험이 되고 말 것입니다.
10절입니다. [파라오가 가까이 오매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보라, 이집트 사람들이 자기들의 뒤를 따라 행진하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주]께 부르짖으며] (10).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을 들어 주님을 본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뒤를 따라오는 이집트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밤에 불 기둥을 보았고, 지금 낮에는 구름 기둥도 보고 있지만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파라오와 그의 기병대만 눈에 크게 들어왔습니다. 이집트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다 보고 체험한 이후이지만 이들의 믿음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길이 없습니다. 표적 신앙이란 다 이런 것입니다. 표적을 통해 뜨거워진 신앙은 위기의 순간에 결코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들은 ‘파라오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만, 얼마나 더 혼이 나야 정신을 차릴꼬...’ 이런 마음이 든 것이 아니라 심히 두려워하여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움과 믿음은 결코 한 마음 안에 공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두려움은 사라질 것입니다. 반대로 두려움이 임하면 믿음은 사라지고 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FEAR NOT 이란 말은 성경에서 무려 365회나 나옵니다. 이는 우리가 얼마나 자주 두려움에 떠는지 주님께서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치유하는 방법은 파라오와 그의 병사를 보는 대신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들의 기병을 보는 대신 그들 위에 머물고 있는 구름을 보고, 그 안에 거하시는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환경과 처지를 보는 것은 영적 평안을 깨뜨리는 치명적인 무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움과 보호를 구하기 위해 주께 부르짖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본문의 부르짖음은 불신과 불평의 부르짖음입니다. 이들의 부르짖음은 주님의 제자들이 폭풍우치는 바다 위에서 [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하매]한 것과 비슷합니다. 울부짖기는 하는데 거기에는 불신과 불만, 불평이 가득합니다. 주님, 우리가 죽게되었는데 돌보지 않으십니까? 이것은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이 주님께 내뱉는 일성(一聲)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마음 가운데 무엇이 있는지는 일을 겪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 받은 은혜가 아무리 많아도 당장 지금 나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안면몰수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도 동일한 자세를 취함으로써 그들의 악한 마음이 다 드러났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이집트에 무덤이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를 대하느냐?](11). 믿음이 결여되면 사람들의 지각 역시 떨어집니다. 가장 돌머리는 가장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믿음이 터무니없고,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믿음이 있어야 깨닫게 되고, 믿음이 있어야 논리적이 되며, 믿음이 있어야 똑똑해집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이집트인들의 손에 죽게 하실 생각이라면 왜 그들을 인도하여 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에게 호렙 산에서 경배할 것임을 말씀해 주셨는데, 홍해 앞에서 죽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어지면 생각도 없어집니다. 믿음의 영은 건전한 생각의 영입니다. 믿음의 없으면 건전한 생각은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두려움의 영이 아니요, 권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이기 때문이라.](딤후1:7).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그러하듯이 곧 바로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에게 불평을 토해냈습니다. 기도하고 서로 격려하는 대신 그들은 비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신 곳에 진을 쳤다면 그들은 원수의 공격을 두려워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연단을 받아야 합니다.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은 모든 것이 충분한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믿음의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할 힘을 주시고, 피할 길을 내시는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고전10:13). 또한 이런 연단을 통해서 우리는 생각하는 것이나 구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도록 능히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엡3:20).
다시 11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이집트에 무덤이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를 대하느냐?](11). 백성들은 즉시 모세를 향해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아마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이들은 모세의 목을 잘라 파라오에게 갖다 바치면서 용서를 빌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주의 이적들을 깨닫지 못하였으며 주의 풍성한 긍휼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바다에서 곧 홍해에서 그분을 격노하게 하였나이다.](시106:7). 하나님은 모세를 그들의 목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좋을 때는 목자로 인정하지만 자기들에게 조금만 불리한 일이 발생하면 언제든지 반역을 일삼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지휘만 잘 따르고 순종하면 절대 안전합니다. 하나님은 양떼들 위에 목자를 세워 두시고 목자를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제 아무리 똑똑하고 믿음이 좋다고 해도 목자 없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목사의 권위나 지위, 역할을 지나치게 신격화함으로써 오는 폐단에 반발하여 반대로 목자의 권위를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교인들이 많아졌습니다. 양들을 먹이는 대신 군림하려는 거짓 목자들로 인해 자신들을 먹이는 목자까지 배척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목자는 양들을 먹입니다. 목자는 하나님의 소명으로 세움을 받습니다. 성경에는 목자, 장로, 감독 등 다양한 직분이 나오지만 pastor(목양자, 목자)만이 주님의 소명으로 세워집니다. [또 내가 그들을 먹일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부족하지 아니하리라. [주]가 말하노라.](렘23:4). 하나님은 자신의 양들을 먹일 자를 그들 위에 세우십니다. [내가 또 내 마음에 맞는 목양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明哲)로 너희를 먹이리라.](렘3:15). 우리는 여기서 목자의 영적 권위가 주님으로부터 비롯되며, 그들의 역할이 양들을 먹이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목자로부터 양식의 공급없이 성장할 수 있는 양은 없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세 차례나 ‘내 어린 양들을 먹이라, 내 양들을 먹이라, 내 양들을 먹이라’(요21:15,16,17)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제가 잘 아는 교회가 큰 분란에 휩싸여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른 이야기는 저의 관심을 끌지 못했는데 한 마디 말이 저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목사님, 그렇게 하면 우리는 목사님 교회에 안 나갑니다.’ 몇 가정의 성도가 목사를 상대로 deal을 시도했습니다. ‘목사님, 그 성도 우리 교회 회원으로 받아들이면 저 성경 공부 안 나갑니다. 그 사람 우리 교회 나오면 저는 안 나갑니다.’ 이런 성도들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조폭 문화, 집단 노조를 연상케 합니다. 교회 내의 이런 현상은 성경적이도 영적이지도 않습니다. 이런 모습은 전형적인 불신과 불순종의 영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도가 교회를 나오고, 설교를 듣는 것이 흥정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집트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더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이집트 사람들을 섬기리라, 하지 아니하더냐? 이는 이집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았을 것임이라, 하였더라.](12). 불만은 계속됩니다. 이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 앞에 나가시며, 자신들을 위해 싸우신다는 사실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전에 이집트를 떠나기 싫어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은 마음에도 없는 출애굽을 했다는 것이며, 이집트에서 나온 것이 후회된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베푸신 은혜는 한 순간에 쓸데없는 짓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누가 구출해 달라고 했느냐? 이런 식입니다. 우리말로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란 말 그대로입니다.
이것이 바로 극단적인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있는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평상시에는 자신의 상태를 속일 수도 있고, 가릴 수도 있지만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결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평소에 꾸준히 주님과 동행한 사람들은 시험의 순간에 빛나는 믿음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런 대표적인 사람이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입니다. 반면 극적인 체험과 놀라운 이적들을 경험했지만 전혀 믿음다운 믿음이 없는 경우가 바로 출애굽한 이스라엘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자랍니다. 믿음은 믿음의 말씀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성경은 믿음의 말씀입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내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이런 불신의 성도들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계속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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