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14:15-18
요절: 출애굽기 14:17
출애굽 후 처음으로 당한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백성들의 바닥난 믿음, 하나님을 향한
불신, 모세와 아론을 향한 분노와 대조적으로 모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준 위대한 말씀은 바로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조용히 있을지니라, 하니라.](14).
동일한 환경에서 동일한 시간대에 동일한 사건을 보면서
믿음의 사람 모세와 불신의 백성들 간에 뚜렷한 대조를 볼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모세를 통해서 위기에 처한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즉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 때 주님이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되](15).
주님은 모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였습니다.
이미 말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조용히 있으면 됩니다.
말씀을 받은 후에 우리는 그것을 다시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의 약속을 받았으면 그 약속을 믿고, 감사하고,
찬양하면 됩니다. 어떤 성도들은 이미 구한 것을 받은
후에도 계속 구하고, 또 구하는 잘못을 범합니다. 잘못을
회개한 후에 회개한 죄를 또 회개하고, 또 회개하는
반복적인 회개를 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모세는
주님께 부르짖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조용히 있을지니라,
하니라.](14)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도와 간구의
부르짖음도 들으시지만 백성들의 불평과 어려움, 괴로움의
부르짖음도 다 들으십니다. 홍해 앞에서 위기에 빠진
백성들의 부르짖음은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들으셨습니다. 이미 들으셨기 때문에 다시 모세를
통해 그것을 다시 들을 필요가 없으신 것입니다. 성경적인
예를 보겠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주님은
아벨의 피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아무도 고하지 않아도
주님은 아벨의 억울함과 부당함을 들으십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동생의 핏소리가
땅에서 내게 부르짖느니라.](창4:10). 지금 이 순간에도 저
병원에서 소리 없이 죽어 가는 낙태아들의 피 소리를 주님은
다 들으십니다.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사람들의 피소리를 주님은 다 듣고 계십니다. 출애굽기
22:23,27절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괴롭혀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을 것이요,](출22:23). [그에게는 그것이
유일하게 덮는 것이요, 그의 살을 덮는 의복이니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이는 내가 은혜로운 자이기 때문이니라.](출22:27). 이는
가난한 자들을 괴롭히면 주님께서 괴롭힘을 당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우리의 괴로움과 슬픔을 주님은 다 들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스스로 원수 갚지 말고 용서하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남을 탓하고,
원한을 품는 일은 그 당사자의 영적 생활에 손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은 너무 억울해서 미치고 펄쩍 뛸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면 그는 어떤
영적인 생각도, 감사와 찬양도 드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가 노리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께 사정을
아뢴 후에는 잊어버리십시오. 그리고 용서 해 버리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도리어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된바, 원수갚는 일이 내게 속하였으니 내가
갚으리라, {주}가 말하노라, 하였느니라.](롬12:19). 만약
그렇지 못하고 계속 그 문제로 씨름하고 기도한다면 주님은
분명히 여러분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주님은 모세에게 할 일을
주셨습니다. 다시 1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되](15). 이 명령은
14절과 모순되는 구절이 아닙니다. 흥분되고 들뜬 마음,
불신으로 인해 바다 위에서 요동치는 마음은 먼저
조용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받은 후에는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는 말씀을
통해 조용히 있게 되면 주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며, 그
후에는 주께서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순종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날벼락 같은 명령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라.”(15b). 이 명령은 자살 특공대에게나
내릴 수 있는 명령이 아닌가 생각들 정도로 무모합니다.
인간의 이성과 상식을 완전히 엎어 버리는 명령입니다. 앞에
거대한 배를 마련해 주신 것도 아닙니다. 홍해 앞으로 갓!
하나님의 군대로 명명 받은 이스라엘 군대가 진정한 군인
정신을 필요로 한 때입니다. 군인은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삽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 [주]의 군대였습니다.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바로 그 날에 [주]의 군대가 다 이집트 땅에서
나왔은즉](출12:41). 주의 군대는 이집트의 군대와 달리
칼과 창을 쓰고, 말을 타는 훈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주의
군대는 많은 총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주의 군대는 기도와
말씀이 필요하고 대장되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군대입니다. 주님은 주의 군대 대장이십니다.
실제로 출애굽과 가나안 입성을 총지휘하시는 대장은
주님이셨습니다.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지금 [주]의
군대 대장으로 왔느니라, 하매 이에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경배하며 이르되, 내 주께서 주의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주]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매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수5:14-15). 다윗은
골리앗을 앞세운 막강한 블레셋 군대를 맞이해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싸우러 나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윗이 자기 옆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저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에게서 이 수치를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느냐? 이 할례 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에게 도전하려
하느냐? 하니](삼상17:2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죽였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에게 도전하는 저
할례 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도 그 짐승들 가운데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삼상17:36). 다윗의 승리 비결은 그의
민첩한 동작이나 탁월한 판단력, 돌맹이를 기가막히게 쓰는
투석술, 골리앗의 약점을 이용할 줄 아는 지혜...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군대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란 사실을 알았고, 그것을 믿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는 것과 그렇지 안는 것의 차이가 승패를
가릅니다. 저와 여러분의 모두 우리가 그리스도의 예수의
좋은 군사(딤후2:3-4)란 사실을 알고, 믿는다면 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우리는 금과 은같은 재력은
없지만 ‘예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혈과
육에 속한 전투 장비는 없지만 어디서나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칼 성경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승리를 위해 저와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주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홍해 앞으로 갓!’ ‘사자 굴
속으로 들어 갓!’, ‘불타는 용광로 속으로 들어 갓!’ 이런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 승리를 가져 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너는
네 막대기를 들고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바다를 나누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한가운데를 지나 마른 땅위로 가리라.](16).
모세는 홍해를 가른 경험은 없었지만 이집트 땅에서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7:19에서 막대기를
이집트의 물들, 곧 시내들과 그 강들과 그 연못들과 그 모든
물웅덩위에 내밀라는 명령에 순종해서 물을 피로 바꾼
사건이 있습니다. 주님이 모세에게 주신 경험은 후에 더 큰
사건을 위해서 준비된 훈련이었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순종해서 믿음의 결과를 맛보고, 승리하게 되면 후에 더 큰
사건에서도 능히 순종할 수 있고, 승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직접 홍해를 나누시지 않으시고
모세를 통해 나누셨습니다. 모세에게 나누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나누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명령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때로 이런
명령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실 일을 우리를 통해서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9, 고린도후서 6:1을
보겠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농사요, 하나님의 건물이기
때문이라.](고전3:9). [우리가 그분과 함께 일하는
일꾼으로서 너희에게도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 모세가 하나님의
동역자였듯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함께 장사지낸바 되었고, 함께 고난을 받게 하심으로, 함께
영광을 나누고, 함께 상속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주님이 어떤 명령을 내리셨다면 여러분은 순종하면 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모세는 혼자서는 홍해를 헤엄쳐 건널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대로 순종했을
때 하라고 명하는 일을 하나님이 친히 이루시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이집트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백성을 따라 가리라. 내가 파라오와 그의 모든 군대와
병거와 기병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내가
파라오와 그의 병거와 기병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을 때에야 비로소
이집트 사람들이 내가 [주]인 줄을 알리라, 하시니라.](17-18).
하나님은 파라오와 그의 모든 군대와 병거와 기병을 멸할
계획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수 없는 회심의 기회가
부여되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점점 굳어져만 갔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파라오의 완악함이 하나님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이런 예를 우리 주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학창 시절을 회상해 보면 한 교실
안에는 맞으면 맞을수록 버티는 아이가 있습니다. 나중에는
선생님도 포기하게 됩니다. 때리면 그 순간에만 잘못했다고
뉘우치고는 또 다시 나쁜 짓을 하고, 또 맞고, 또 나쁜 짓을
합니다. 처음에는 안 걸리려고 조심을 하다가 나중에는
이번에 걸리면 몇 대 맞겠지! 예상을 하면서 나쁜 짓을 하고
불순종합니다. 그러다 결국에는 정학을 당하거나 퇴학을
당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범죄 세계에서 보면 전과 10범이
넘는 경우는 대부분 이번에 걸리면 몇 년 살겠지 하면서도
죄를 짓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전과자의 심리가 현재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의 영적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이집트의 파라오와 그의 군대를 통해 영광을 얻으시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영광을 얻으리니’라고 한 말씀은
참 어울리지 않는 말씀 같습니다. 파라오의 일당을
멸망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겠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우리가 생활 가운데서 영광스럽다고 한 말과는 짝이
잘 맞지 않습니다. 전쟁에서 적군을 완전히 섬멸하고 이긴
장군의 명성이 드높아지면 그 장군은 적을 무찌름으로써
영웅이 되고, 영광을 얻었다고 할 수있습니다. 스포츠
게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집트의 한판 승부로 본다면 이 장면에서
하나님은 크게 영광을 받으신 것이 될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고 그 이름이 주위 모든 민족들에게 퍼졌으며,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주를 두려워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자들이
간증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저는 처음에 장로교인이 되어서 배운 것이
이것입니다. ‘인간이 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란 질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대답하도록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이름이나 신성이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악인을 징벌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을 수 있고, 성도들의 선한
행위를 통해서도 영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하늘과
땅을 통해서도 영광을 선포하시며, 말씀을 통해서도 영광을
드러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하시는 일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주님 자신이 하나님의
독생하신 분의 영광이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셨습니다(히1:3). 하지만 공생애 사역동안 한번도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지 아니하노라.](요5:41). 또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영광을/
구하고 심판하시는 이가 계시느니라.](요8:50). 이 말씀은
성도들이 이 땅에서 사람들과 어떤 관계성을 가져야
하는지의 표준을 설정해 줍니다. 저와 여러분은 결코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아서는 안되며, 자기 영광을 구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는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자기 영광을 구했던 이들은 다
멸망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은 사람들은 다
낮아지고, 최후가 비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대신 사람의 영광을 구하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변질시키거나 가로채거나 자기 영광으로 삼아 버리면
주님은 그를 치십니다. 성경에는 그런 대표적인 예로 두
사람이 나옵니다. 느부갓네살은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다가 7년간
소처럼 들에서 풀을 뜯어먹는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빌론은 내가 내 권능의 힘으로
건설하여 왕국의 집으로 삼고 내 위엄의 영광으로 삼은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아직 이 말이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한 음성이 내려와 이르시되, 오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이 왕국이 네게서 떠났느니라.](단4:30-31).
신약에는 헤롯 왕이 그런 사람입니다. [백성이 환호하며
이르되, 이것은 신의 음성이요, 사람의 음성이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천사가 곧 그를 치매 그가 벌레들에게 먹혀 숨을 거두니라.](행12:22-2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 영광을 구하는 일은 이렇게 무서운 일입니다.
잠언25:27에 이르기를,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한
것같이 사람들이 자기 영광만을 구하는 것은 영광이
아니니라.](잠25:27)고 했습니다. 육신적인 성도들은
서로 영광을 받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의란 측면에서
칭찬해 주고 칭찬 받는 것을 매우 즐깁니다. ‘김 집사님,
믿음이 너무 좋으세요.’ 하면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집사님에 비하면 새발의 피죠.’ 이런 식입니다.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는 마음이 있으면 그는 결코 믿음이 성장하지
못합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받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요5:44).
저희들이 이 땅에 사는 목적이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면 더욱더 두려움과 떨림으로 주님의 영광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어떻게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이 너무나 오용되고, 그릇되이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 또 뜬구름 잡는 식으로 막연하게 생각하는 분들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① 먼저
우리의 몸과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너희는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음이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주님께
드리고, 우리 영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는 일이야 말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첫 걸음입니다. 불신자들은 결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실 수는 있지만 불신자들이
영광을 돌린 것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복음을 믿고 거듭나야만 합니다. [모든
사람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습니다.
②
고난의 박해를 받음으로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이에
그들이 백성으로 인하여 그들을 처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더 위협을 하고 놓아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들이 그 일어난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기 때문이며](행4:21).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4:16).
성도들이 고난과 박해를 받으면 박해자도 놀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성도들이 세상과 타협하면 처음에는
세상이 좋아하지만 약간만 지나면 도리어 타락한 성도를
향해 구역질을 냅니다. ‘야 너는 믿는다는 사람이 대체 왜
그렇게 사느냐?’고 도리어 훈계를 합니다. 오늘날 이곳
미국은 복음으로 인해 박해를 받는 교회가 없기 때문에
교회의 참다운 순수성이 거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③
죄인들의 회심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11:18). 복음 전파, 구령은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일입니다. 구령을
위해서 기도하고, 전도지를 돌리고, 상담하고, 직접 전하는
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④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강해지는 것으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됩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에 관하여 흔들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믿음이 강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롬4:20). 성도가 믿음 안에서
자라나는 일은 하나님에게 큰 기쁨이며, 영광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몸은 점점 커지는데, 나이는 들어가는데
자라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아마
답답해 미칠 것입니다. 조그만 일에도 부모를 불신하는
자녀라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믿음이 강해지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⑤
형제들을 서로 받아 들이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특히 믿음이 연약한 지체들을 비판하거나
배척하지 말고 받아 들여야 합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것같이 너희도 서로 받아들이라.](롬15:7).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그렇다면 서로 용납하고 서로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람을 가려 가면서 교제하고, 가려 가면서
교회 오게 한다면 곤란합니다. 전에 제가 다니던 교회는
분위기가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끼리끼리만 식사하고
교제하고 몰려 다녔습니다. 몇 년 동안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새 신자들이 와서 방황하기 마련이었고, 적응을
못했습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들었습니다만 서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아닙니다. 어떤 반에 전학 온 친구를 애들이 따돌려 버리면
담임 선생님에게는 근심을 끼치는 일입니다. 여러 형제들이
있는데 한 명을 따돌려 버리면 그것은 부모에게 큰 근심이
될 것입니다. 어떤 가정에 장애아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형제들이 그 장애아를 친형제로 더 연약한 지체로 사랑하고
보살펴 주면 부모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이지만 부끄러워
하고, 자기 형제가 아닌 것으로 생각하면 부모에게는 근심이
될 것입니다. 영적 원리도 이와같습니다.
⑥ 많은
감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하여 있나니 이것은 많은 사람의
감사를 통하여 풍성한 은혜가 넘쳐 나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4:15).
⑦ 연보,
구제 헌금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습니다.
[이 직무의 실행을 증거로 삼아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 이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시인하고 복종하며
또 그들과 모든 사람들을 향해 너그러이 나누어 주었음이라](고후9:13).
우리 교회는 헌금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질의 나눔은 매우 구체적이고 효과가 즉각적입니다. 누가
저에게 ‘기도해 주겠습니다’라고만 말하는 목사님과
교회보다는 누가 저에게 연보를 보내 주는 목사님과 교회에
훨씬 더 감사함이 넘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물질은
집착하면 죄가 되지만 나눌 줄 알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⑧
성도들의 정직한 행실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 가운데서 너희 행실을
정직하게 하라. 이것은 그들이 너희더러 악을 행하는 자라고
비방하다가도 너희의 선한 행위들을 보고 징벌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2:12).
그리스도인이 세인들로부터 정직하지 못하다는 평가만큼
수치스러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믿는 형제들끼리는
두말할 필요도 없고, 믿지 않는 불신자들 가운데서 행동할
때 정직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강조하는 것은 ‘이방인들
가운데 너희 행실을 정직하게 하라’입니다. 정직은 모든
사람에게 통하는 최선의 수단이며, 생활 방식입니다.
제가 아는 성도 중의 한
분은 얼마든지 가격을 떼어먹을 수 있고, 부풀릴 수 있는
직업에 종사하지만 늘 정직하게 가격을 책정합니다. 덕분에
그 가게를 찾는 사람들은 처음에 ‘그래도 다 남겨 먹겠지!’라고
하다가도 후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차가 아주
낡았는데, 가게에 온 손님이 ‘차를 바꾸라’고 권면하자,
새 차를 사게 되면 그만큼 수입이 늘어나야 되고 수입이
늘려면 약값을 더 받아야 하는데 그러기 싫다면서 수명 다할
때까지 타고, 중고차를 사겠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 말에 감동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저에게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정직한 행실이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입니다.
성도들이 저 하늘에 가서
가장 영광스런 일은 바울 사도와 같은 고백일 것입니다. [나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느니라.](갈2:24).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은 지옥에서 이런 고백을 할 것입니다. “나로
인하여 이집트 백성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느니라.”.
성경에는 따라야 할 좋은 본이 있고, 따르지 말아야 할
경고의 본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주님이 주신
말씀을 여러분에게 가감없이 그대로 증거했습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아멘으로 받으시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완악한 성도는 설교를 들으면
오히려 마음이 더욱 답답해 지고, 짜증이 나고, 열을
받습니다. 그러나 아멘으로 받으면 주님은 여러분이 듣고
아멘! 하는 그 말씀들을 이루심으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저희 교회 성도들이 설교를 들을 때 거의 침묵하는 수준인데,
버릇을 고치셔야 합니다. 아멘!을 자주 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분 안에서
예가 되고 그분 안에서 아멘이 되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 때문이니라.](고후1:20). 성경을 읽을 때,
찬양할 때, 설교를 들을 때 아멘!으로 화답하십시오. 아멘은
주님의 이름이며, 아멘은 확실한 동의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입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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