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15:1-2
요절: 출애굽기 15:1-2
오늘 본문은 성경에서
처음 나오는 노래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부른 이 노래는 홍해를 건넌 후 전능하시고, 무한광대하신
하나님의 신성과 두려움을 깨달은 후에 심중에서 입으로
흘러나온 노래입니다. 야곱이 야반 도주를 하지 않고 당당히
나왔더라면 그의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은 노래를 불러
주었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내가 희락과 노래와 작은
북과 하프와 함께 너를 보내겠거늘 어찌하여 네가 은밀히
도망하여 몰래 떠나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창31:27).
만약 그랬더라면 창세기에 노래가 한번 등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라반의 인격을 볼 때 결코 그런 일은 없었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노래가 불러진 첫
번째 예는 오늘 본문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이 노래는 얼마
가지 않아서 완전히 변질되고 맙니다. 출애굽기 32:18, [모세가
이르되, 이것은 승리하여 외치는 자들의 소리도 아니요,
패배하여 부르짖는 자들의 소리도 아니라. 내가 듣기에는
노래하는 자들의 소리로다, 하더라.](출32:18). 노래가
변했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과 믿음이 변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찬송가와 복음송가의 가사와 곡조가 급격히
변화되는 것 역시 복음적인 믿음이 급격히 퇴조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입에서 찬송이 나오다가 흘러간
노래나 대중 가요가 나올 때 스스로 깨닫고 돌이켜야 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주]께 노래하고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주]께 노래하리니 이는 그분께서
영화롭게 승리하셨음이요, 말과 거기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1).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노래는
구속받은 성도들이 구속하신 주께서 하신 일에 대한
찬양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노래의 대상은
주님이십니다. ‘주께 노래하고’. 이들은 홍해를
건너기 전에 불신으로 불평을 발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마음으로 주께 노래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승리를 체험한
사람들의 노래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 사건을 두고, [이에
그들이 그분의 말씀들을 믿고 그분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도다.](시106:12)고 간략하게 언급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을 믿었기에 이런 찬양을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1-18절까지 주님이란 말이
무려 12번이나 나옵니다. 대명사로 처리된 he, him, thy, thou란
말까지 포함하면 주님은 무려 33회나 됩니다. 이는 오늘날
소위 찬양이라 불리는 현대의 찬송가의 가사와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본문을 읽으면서 금방
느끼는 한 가지는 노래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위대하심,
우리를 향해 베푸신 주님의 역사에 관한 것이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불리는 노래의 주종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감정이나 경험을
고백하는 가사가 대부분이고, 그리스도의 대속이나
피보다는 우리가 도달하려는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 대세를
이룹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이 노래한 가운데 자신들을
드러낸 것이라고는 ‘내가 그분을 높이리라’(2b) 밖에
없습니다.
노래는 누가 언제
부릅니까? 노래는 단순히 여흥이나 기분을 달래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노래를 매우 중요한 교육 수단으로
삼았고, 예배의 한 형태로 삼았습니다(신31:19). 특히
신명기는 "노래의 말씀들"이라고 불립니다(신31:30).
시편은 처음부터 끝까지가 모두 노래 가사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성전에 전속 찬양단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시대에 그 규모는 가히 천문학적이었습니다. 솔로몬
역시 노래에는 일가견이 있었는데 솔로몬의 노래가 바로 ‘노래들
중의 노래’라고 불리는 책입니다. 하박국 역시 악장에게
노래로 준 가사가 하박국서입니다. [[주]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니 그분께서 나의 발을 암사슴의 발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내
현악기들에 맞추어 우두머리 노래하는 자에게 준 것이니라.](합3:19).
이런 점에서 볼 때 찬양은 성도들의 신앙 생활에 얼마나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노래는 곡조있는 기도요, 리듬과 멜로디가 있는
말씀입니다. 이런 점에서 찬양은 호흡이 있는 자들이라면
누구나 다 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호흡이
있는 것마다 [주]를 찬양할지어다.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시150:6).
꼭 노래만이 찬양은 아닙니다. 찬송은 찬양의 일종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을 때 기도한 후에 즉시 찬양의 노래를 불렀는데 이로써
지진이 나고 옥문이 갈라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행16:25).
사도 바울은 기도와 전도만 잘한 것이 아니라 그의 생활이
늘 찬양과 찬송의 생활이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입니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서 찬양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홍해가 갈라진 것을 보고, 이집트의 모든
병거가 물에 빠져 죽은 것을 보면서는 누구나 노래가 나올
수 있지만 매를 맞으면서 노래가 나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에베소서 5:19, 골로새서 3:16, [시와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에게 화답(和答)하며 너희 마음 속에서 {주}께
아름다운 가락을 만들어 노래하며](엡5:19),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모든 지혜로 풍부히 거하게 하여 시와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며 너희
마음 속에서 은혜로 {주}께 노래하고](골3:16). 여기서
우리는 찬양의 노래에 대해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신약 성도들은 모두 영적인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노래라고 다 같은 노래가 아니며 모든 찬송가나 복음송가가
다 영적인 노래도 아닙니다. 영적인 노래란 주의 말씀에
기초한 가사에 곡조를 붙인 것을 말합니다. 둘째, ‘너희
마음 속에서’ 입으로만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마음 속에서
출발하여 입밖으로 나오는 노래여야 합니다. 셋째, 주께
노래하고. 찬양과 찬송의 대상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흔히 오늘날 CCM이라 일컫는 복음 송가들은 대부분 노래를
부르는 사람과 노래를 듣는 청중의 기분을 맞추고, 흥겹게
합니다. 주님은 안중에도 없고, 사람에게 노래하는 것은
찬양이 아닙니다.
다시 1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주]께 노래하고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주]께 노래하리니 이는
그분께서 영화롭게 승리하셨음이요, 말과 거기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1). 본문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주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와 복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하지만 본문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 언급도 없고,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위대한
일만 나타나고 있습니다. 찬양이란 주님을 드러내는 것이지
우리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온다고 성령이 충만하고, 말씀이 내 안에 풍성히
거하면 자신의 이름을 드러낼 구석은 단 한 줄도 없는
법입니다. 찬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분께서
영화롭게 승리하셨음이요, 말과 거기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1b). 그렇습니다. 찬양이란 간증이며,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께
노래하는 모든 노래는 주님에 대한 선한 증거요, 믿음의
고백입니다. 찬양의 주제는 주님과 주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전에 극심한 가난과 몸의
질병으로 고통받는 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몇몇
형제, 자매들이 심방을 갔는데 그 자매는 찬양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심방을 간 형제, 자매들이 무엇이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 자매는 찾아온
사람들을 도리어 위로했습니다. “나의 주님께서
승리하셨습니다. 나의 주님은 언제나 승리자이십니다.” 그
자매는 자신의 현 상황이나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상황에 관심을 갖거나, 대화의 주제가 되도록
틈을 주지 않고, 오직 주님께서 모든 것 위에 계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심을 증거 했습니다.
2절입니다. [[주]는 나의
힘이시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 되시는도다. 그분께서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분께 처소를 예비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분을 높이리로다.](2). 이
부분은 신앙 고백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주님과 자신의
관계를 다섯 가지로 규정했습니다.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 나의 하나님, 내 아버지의 하나님. 하나님이
나의 힘이라면 나는 힘이 없어서 고생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모세는 120세가 되어서도 힘이 조금도 쇠하지
않았고, 갈렙 역시 80이 되어서도 40세 때의 힘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지만 성경이 말하는 나의 힘이란 그런
육신적인 힘이 아니라 영적인 힘을 말합니다. 주님을 나의
힘으로 삼는 사람은 기진하거나 쓰러지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기진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힘이 없는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사40:29). 다윗은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건짐을 받았을 때에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오 나의
힘이 되시는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리이다. [주]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신뢰할 나의 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니이다.](시18:1-2).
나의 힘이 되신 주님께 힘을 얻는 비결은 주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학위나 경제력이나 좋은 직장이나 명문 가정이란
배경이 나의 힘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자신이 의지했던 그런
것으로 인해 망하고 말 것입니다. [[주]는 나의 힘이요,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그분을 신뢰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분을
찬양하리로다.](시28:7).
주님을 신뢰하는데서
떠나면 힘은 급격하게 사라지고 맙니다. 죄는 영적인 힘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불신과 불순종은 타이어에 바람이
빠지듯이 모든 힘을 빠지게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죄에
대해서 무방비 상태가 됩니다. 육신에서 솟아나는 성질이나
작은 짜증조차도 제어할 수 없습니다. 말은 함부로 나오고,
생각은 즉흥적이 되며, 신중하지 못하게 됩니다. 결정은
조급하며, 마음은 불안정하게 됩니다. 결과는 늘 엉망진창이
되고, 머피의 법칙만이 지배하게 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주를 신뢰하십시오. 새 힘이 솟아 날 것입니다. 육신의 힘과
육신의 지혜를 그치고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주께 노래하고,
주를 찬송하는 일은 저절로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힘이라고 믿고 고백한 성도들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대언자 하박국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니 그분께서
나의 발을 암사슴의 발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내 현악기들에 맞추어
우두머리 노래하는 자에게 준 것이니라.](합3:19). 이
말씀은 성도가 하나님의 힘으로 인해 죄악에 연루된 삶을
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높은 곳을 다니는 암사슴의 발은
더러움에 빠지지 않는 발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발을
씻겨주시고, 세상의 모든 죄악에서 벗어나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근원,
힘의 근원은 세상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는 나의 구원이
되시는도다”란 고백은 홍해 저편에서 오늘 주의 구원을
보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직접 체험한 것에 대한 고백입니다.
주님은 구원의 반석(삼하22:47)이시며, 구원의 뿔(삼22:3),
구원의 방패(삼하22:36), 구원의 망대(삼하22:51), 구원의 화살(왕하13:17),
구원의 하나님(대상16:35), 구원의 우물들(사12:3), 구원의 힘(사33:6),
구원의 투구(사59:17), 구원의 의복(사61:10)이십니다. 구원은
죄에서 구원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폭력으로부터,
적으로부터, 위험으로부터, 올무로부터, 비방과
험담으로부터, 때로는 질병이나 가난으로부터의 구원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구원이 필요하십니까? 구원의 주님을
부르십시오. 신약 성경에서는 여자가 임신하여 해산하는
일도 구원이라고 말함으써 미혹으로부터의 구원이 나옵니다.
주님은 우리를 모든 상황에서 능히 건지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신약 성경에는 구원과
관련하여 구원의 말씀(행13:16), 구원의 길(행16:17), 구원의
투구(엡6:17), 구원의 증표(빌1:28), 구원의 소망(살전5:8),
구원의 상속자(히1:14), 구원의 대장(히2:10), 구원의 창시자(히5:9)란
말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이런 말씀들을 그냥 대충 넘어가지
말고 한 마디 한 마디 깊이 묵상함으로써 주님을 찬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성경을
많이 아는 것처럼 보여도 이외로 기도 생활과 말씀 묵상,
찬양의 생활이 전혀 되지 않는 것을 많이 봅니다. 특히
기본에 약합니다. 구원, 중생이란 말은 성경에서 가장 기본
교리이지만 구원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이 매우 드물어
보입니다. 구원을 단지 나는 죽어서 지옥가지 않는다는
정도로 생각하고 마는 것은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구원은 새 생명을 얻은 성도의 출발일 뿐 아니라 성도의
전생애를 지배하는 영적 원리입니다.
이 땅에서 사는 성도의
일생은 구원의 기쁨과 감사로 넘치는 삶이며, 구원받은
감격이 바탕이 됩니다. 출애굽의 사건이 이후 역사에서
이스라엘의 기본적인 구원의 근거가 되는 것처럼
죄로부터의 구원은 성도의 전 생애의 영적 생활의 근거가
됩니다. 이 시간 여러분 안에 구원의 기쁨이 없다면 어떻게
주께 노래하고, 감사하며,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일생 동안
주의 구원에 대해서 가장 많은 시를 짓고, 찬양했던 다윗이
범죄했을 때 그는 구원의 기쁨을 잃어 버렸고, 그의 영은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자신의 상태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잠잠할 때에 하루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나이다. 이는 밤낮으로 주의 손이 나를
무겁게 누르므로 내 진액이 여름 가뭄에 /마른 것같이/
되었음이니이다. 셀라.](시편32:3-4). 영원한 지옥의 저주와
진노로부터 구원받은 성도들이 죄로 인해 이런 상태에 있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살인한 죄에서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을 구했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크게 노래하리이다.](시51:14).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지만 구원 그 이후에 짓는 죄악들에서 나를 건져
주시도록 죄를 시인하고 기도해야 합니다(요일1:9). 내
구원의 하나님께 피 흘린 죄든지 도둑질한 죄이든지, 험담한
죄이든지, 영적인 의무를 게을리 한 죄인든지 여러분은
생각나는 무슨 죄에서든지 건져 주시도록 구해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동시에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주의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주의 자유로운
영으로 나를 붙드소서.](시51:12).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구원의 기쁨이 회복되면 구원의 노래들이
나옵니다. [주는 나의 은신처시오니 고난에서 나를
보존하시고 구원의 노래들로 나를 에워싸시리이다. 셀라.](시32:7).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이
구원의 하나님께 늘 기도해야 할 한 가지는 죄로부터
깨끗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 설교는 아마 구원파
교인들이 들으면 이단이라고 정죄할 만한 말입니다. 또
구원에 대해 한 가지 의미밖에 모르는 성도들이 들어도
이해하지 못할 그런 내용입니다. 주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가
다시 죄로부터 깨끗하게 해 달라는 말은 구원받지 못한
증거가 아닌가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많은
성도들이 그렇게 생각해서 죄를 가벼이 여기고 죄에
연루됨으로써 영적 능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오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고 우리의
죄들을 깨끗하게 하소서.](시79:9).
여기서 제가 자주 받은
질문 한 가지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예수를 믿은
성도는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분명히 의인입니다. 그러면
죄를 안 짓습니까? 짓습니다. 그러면 죄인이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죄를 지은 의인입니다. 얼마 전 구원파 형제가
물은 질문과 답변입니다. 그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한국의 초대
대통령의 부인이였던 ‘프란체스카 여사’는 한국이었는가?
호주 사람이었는가?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그를 호주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대한민국의 국적을
취득했지만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 신문에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답게 산 프란체스카 여사’였습니다. 기사
가운데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프란체스카
여사는 자신의 시신을 태극기로 덮어 달라고 했다’ 이런
기사였습니다. 한국인은 혈통주의이기 때문에 프란체스카
여사는 죽어서도 한국인들에게 한국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한국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거의 다
먹었고, 한복을 입었고, 한국말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혈통 상으로는 한국인이 아니라 외국인이었습니다.
법적인 문제는 자격이 갖추어지면 바꿀 수 있지만 혈통은
바꿀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법적으로는 의인이 되었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여 새 몸을 입기 전까지는 육신과 혈통은
여전히 아담 안에 있으며 바꿀 수 없습니다. 한국인 남편을
만나 한국을 사랑하고, 법적으로 한국인 되어서 어느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답게 살아 보려했던 프란체스카
여사처럼 사는 삶이 크리스찬의 삶입니다. 그분이 아무리
한국을 사랑해도 여전히 서구적 외모와 서구적 습관과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성도답게 살아 보려는 노력을 하면서도
여전히 육신의 습관과 생활 방식으로 인해 죄를 짓습니다.
한국인도 외국인처럼 살 수 있고, 외국인도 한국인처럼 살
수 있습니다. 의인도 죄를 지을 수 있고, 죄인도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왕국에
옮겨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말하지만 육신이
천사처럼 변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죄에서
구원받은 후 더욱 죄로부터 깨끗함을 입으려는 부단한
노력과 거룩함을 추구하고 열망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의 형벌과
저주로부터 구원받았기에 날마다 더욱 죄로부터 깨끗하게
되어야 합니다. [오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고 우리의 죄들을 깨끗하게 하소서.](시79:9).
다시 2절을 보십시오. [[주]는
나의 힘이시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 되시는도다. 그분께서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분께 처소를 예비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분을 높이리로다.](2).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므로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모세는 ‘내가 그분께 처소를 예비할 것이요’라고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새
예루살렘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저택을 제공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요14:2). [내 아버지 집에 저택들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말해 주었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요14:2). 저와 여러분은
모두 주님이 예비하신 이 집에 입주할 예정자들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실 또 하나의 집은 우리 몸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이 장막 집이 해체되면 하나님의 건물 곧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요, 하늘들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우리가 아느니라.](고후5:1).
영광스런 몸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집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께 처소를 예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영으로서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모세는 성막을
짓고, 솔로몬은 성전을 지었지만 주님은 본래 인간이 손으로
지은 곳에 거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도행전 7:47-50, [솔로몬이
그분을 위하여 한 집을 건축하였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께서는 손으로 만든 전(殿)들에 거하지 아니하시니
/이것은/ 곧 대언자가 말하는바,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왕좌요, 땅은 나의 발받침이라.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느냐? 혹은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을 내 손이 만들지 아니하였느냐? 함과 같으니라.](행7:47~50).
그렇다면 모세가 어떻게
주님께 처소를 예비합니까? 우리 몸을 주님께 성전으로 내어
드리면 됩니다. 하나님은 구약 성도들 모든 사람들 개개인을
자신의 처소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 가운데(among)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민족적으로 다루셨고,
그들 전체를 광야의 교회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믿는 각 개개인이 하나님의 성전이 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주의
구원을 맛본 성도는 누구나 주께 자신을 기꺼이 산제물로
내어 드림으로써 주님이 그 안에 거하게 됩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이런
기본적인 영적 진리에 대해서 무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구원, 중생, 몸된 성전과 같은 이런 진리는 성도의 전 생애의
삶을 결정짓는 매우 중대한 문제들입니다. 여러분의 몸이
성전이란 사실을 알고, 주님이 내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차이는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이냐? 너희 몸이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殿)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고전6:19). 홍해를 가르시고, 출애굽을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여러분은 이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느끼려고 하지 마십시오. 성령은 여러분의
오 감각으로 결코 느낄 수 없으며, 볼 수 없으며, 만질 수
없습니다. 대신 믿음으로 보고, 듣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으시면 됩니다. 한
구절 더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들이 어찌
조화를 이루겠느냐? 이는 너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고
그들 가운데 거닐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고후6:16). 주님은 성전의 지성소에
계셨듯이 우리의 지성소인 거듭난 영 안에 거하십니다.
그분께서 나의 하나님이시니 우리 몸은 당연히 그분이 거할
처소가 됩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나의 주인이 되시고, 나의 몸이 그분의 뜻대로
쓰임받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몸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몸을 주님께서 마음대로 사용하시도록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도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희생물이며,
주님이 가장 높임을 받는 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평생토록
주께 노래하고, 주님의 구원을 기뻐하며,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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