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15:3-10
요절: 출애굽기 15:3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포기하려 하지도 않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른
것을 포기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 말은 어느 설교자가
강단에서 교인들을 향해 외친 음성입니다. 더불어 그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은 원하지만 그들의 구원자는 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어린 애들에게 선물을 주면 받은 선물에는
기뻐하며 입을 맞추지만 선물을 준 사람에게는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듯이 많은 성도들이 이와 비슷한 생활을 하는
듯이 보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매주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서 영적 생활의
변화와 성장을 기대합니다. 교회 생활이 있고, 직장 생활이
있고, 가정 생활이 있고, 학교 생활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루 24시간 일년 365일의 매 순간
어디에서나 영적 생활을 영위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일을
하든지 가정에서 집안 일을 하든지, 학교에서 공부를 하든지
모든 생활의 기본은 교회에서 듣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합니다. 현재 우리는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리의 찬양을 부르는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주]께 노래하고”란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은
한 주간 주님을 얼마나 찬양했습니까? 예배와 생활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면 여러분은 아무런 변화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주께 예배를 드리는 일, 설교를 듣는 일이 내
생각을 바꾸고, 내 생활을 바꿀 수 있도록 여러분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앤드류 보나르란 목사님은
많은 책을 저술했고, 위대한 부흥을 주도했던 목사였습니다.
그분이 쓴 책 중에 ‘시편에 나타난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란
책은 매우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 책을 쓸 당시, 그분의
일기에는 이렇게 씌여 있습니다. ‘나는 지금 나를 방해하는
사탄의 주요한 방법이 나로 하여금 반은 문서 사역에, 반은
성경 연구에 몰두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주님을 위해 자신이 하는 일이 기도 시간을 빼앗고,
묵상의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을 가장 경계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전력을 기울여 하는 일이
우리의 마음과 정력과 시간을 다 빼앗음으로서 기도와
묵상과 찬양이 거의 없는 메마른 영적 생활을 하도록 하지
않는지 돌아보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빕니다. 마음이 지치고 낙심될 때 주님이 내게 베푸신
일들을 돌아보며 찬양을 하는 일은 영적인 힘을 회복하는
첩경입니다. 찬양은 어떤 기도보다도 강력한 능력이며,
우리가 계속해서 드려야 할 입술의 열매입니다(히13:15). 시편
기자는 [내가 사는 동안에 [주]께 노래하며 내가 생존하는
동안에 내 하나님께 찬양하리로다](시104:33)라고 했는데
찬양은 우리가 평생 동안 해야할 의무요, 특권입니다.
찬양은 이 땅에서만 아니라 저 하늘에서도 여전히 울려 퍼질
것입니다. 찬양은 저 하늘의 보좌에서 성도들을 향해 주신
명령입니다. [왕좌에서 한 음성이 나서 이르되, 하나님의
모든 종들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아,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너희는 다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더라.](계19:5).
이 시간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3절을
보십시오. [[주]는 전사(戰士)시요, [주]가 그분의
이름이시로다](3). 이 얼마나 놀라운 찬양입니까? 이런
가사는 오늘날 복음 송가에서는 완전히 무시되는 가사일지
몰라도 성도들에게는 펄럭이는 깃발과 같은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은 사랑이시오’, ‘주님은 빛이시오’
이런 찬양은 잘 하지만 “주님은 전사시요”란 고백은 잘
하지 못합니다. 이는 그들이 평생동안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치열한 영적 전쟁을 수행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파라오와 그의 군대가 죽는 것을
보고 우리의 원수가 죽었다고 기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적자들이 망했음을 보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주께서
주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들을 주의 크신 위엄으로
엎으셨나이다.](7a)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가 회개도
구원도 없이 망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연민과 슬픔의
눈물을 흘릴 수 있지만 주의 원수들이 망할 때는 찬양을
불러야 합니다. 출애굽에서 모세와 이스라엘이 불렀던
찬양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이런 찬양을 부를 날이 올
것입니다. [이 일들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많은
사람들의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존귀와 권능이 {주}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이는
그분의 심판들이 참되고 의롭기 때문이요, 또 그분께서
음행으로 땅을 부패시킨 저 큰 음녀를 심판하시고 또 자신의
종들의 피의 원수를 그녀의 손에 갚으셨기 때문이라, 하고
그들이 다시 이르되, 할렐루야, 하니 그녀의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가더라.](계19:1-3). 저 하늘에서 주님이
집행하신 공의의 심판을 보면서 우리는 찬양을 부를
것입니다. 성경을 알지 못하는 인본주의자들은 공의의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고
불평을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판결과 심판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는지라, 결코 이런 찬양을 부르지 못합니다. 때로
하나님보다 사랑이 많고 의롭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불신자나 주의 원수들도 구원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하심을 완전히 짓밟아
버립니다. 전사는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할 때 노래하지
못합니다.
4-10절은 주님이 왜
전사이신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일방적인
전쟁이었습니다. 주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대적하는 자들이
곧 주의 원수이며, 주를 대적한 것임을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파라오와 모세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파라오와
하나님, 이집트와 하나님의 대결이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대장되신 주님을 따라 이런 전쟁을 거의 매일 매 순간
치러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전쟁의 비결은 칼이나 창에
있지 않고, 주님을 잠잠히 신뢰하는 것임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이런 영적 진리를 정확히 통찰하고
있었습니다. [또 [주]께서 칼이나 창으로 구원하시지
아니함을 이 모인 무리로 하여금 알게 하리라. 이는
전쟁이 [주]께 속한 것인즉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임이라, 하니라.](삼상17:47).
흔히 재능이 있고, 머리가
비상하고, 뭔가를 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보고, 성공하면 그만이고 실패하면
주님을 찾습니다. 그들은 자기 교회 목사에게도 당당히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가 어디 믿음으로만 되나요. 돈도
있어야 되고, 사람도 있어야지요. 저희들이 목사님을 힘껏
돕겠습니다.’ 정신나간 목사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를 도와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언제부터
주님대신 물주들이 교회를 이끌어 나가게 되었으며,
언제부터 그들의 도움이 없으면 목회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단 말입니까? 오늘날 이곳 생활에서 월급쟁이들은
들어오는 돈은 일정한데 나갈 돈이 불확실하고, 사업하는
사람들은 나가는 돈은 정해져 있는데 들어오는 돈이
불확실합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다 보니 늘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불안합니다. 그러나 이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주님으로 섬기면서
월세와 급여를 걱정하다니...
역대기상 20:15을 보십시오.
[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주민들과
여호사밧 왕이여, 귀를 기울일지어다. [주]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는/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는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니라](대하20:15).
저와 여러분이 주님이 전사(戰士)시란 사실과 전쟁은 주님께
속한 것이란 사실을 깊이 명심한다면 늘 승리의 찬양을
부르는 일만이 저희들의 몫이란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파라오를 대적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인해 그들은 거저 주시는
승리를 맛보았습니다. 이는 출애굽의 사건 단회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수천 년의 믿음의 역사를 통해 주어진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에 ‘승리를 얻은 신앙의 위인들’이란 책을
다시 한번 읽게 되었습니다. 180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반의 믿음의 선배들에 대한 간략한 전기였는데 평범한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 때 주님이 주신 승리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군사들로서 마귀를 대적해야 하며, 싸워야 하지만 승리는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거주 주신 승리도 얻지
못하고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거나 도망 가 버리거나,
주님께 짜증과 불평을 내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이
일들을 말하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기운을
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사도
요한은 이 승리를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5:4-5).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는 물러납니다.
이는 주님이 전사시며, 구원의 대장이시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보고 물러나지는 않지만 내가 믿는 주님으로
인해 물러갑니다.
시편 기자는 전쟁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전쟁이 나를
대적하여 일어날지라도 내가 이것을 확신하리로다.](시27:3).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싸움은 누구나 두렵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이길 수 있는 싸움은 두렵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승리를 확신하는 그런 보장된 전쟁을 하는
중입니다.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세상 전쟁은
부하들이 피터지게 싸우고 대장이 영광을 차지하는
전쟁이라면 영적 전쟁은 대장이 싸우고 부하들이 승리를
쟁취합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대로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하신 [주]시요, 전투에 능하신 [주]시로다.](시24:8)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오 [주]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화롭게 되었나이다. 오 [주]여,
주의 오른손이 그 원수를 산산조각 내었나이다. 주께서
주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들을 주의 크신 위엄으로
엎으셨나이다. 주께서 진노를 일으키시매 그 진노가
그들을 지푸라기같이 소멸시켰나이다.](6-7). 세계
평화주의자들은 이런 구절을 볼 때면 이스라엘이
호전적이고, 지독한 놈들이라고 비난을 퍼붓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원수를 산산 조각내고, 엎으시고, 지푸라기처럼
소멸시켰다는 말은 듣기에 상당히 거북한 어휘들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를 대적하는 자들이 받을 벌이요,
심판이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전 사건들은 모두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과 본보기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 때,
모든 불신자들과 무신론자들의 종말 또한 파라오와 별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주의
거센 콧김에 물들이 함께 모이되 큰 물들이 산더미같이
똑바로 일어서고 깊음들이 바다의 중심부에서
엉겼나이다.](8). 주님은 홍해를 가르실 때 강한 동풍을
일으키셨는데, 그 바람의 정체가 바로 주님의 강한
콧김이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자연
현상이 주님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진리를 분명하게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주님이 지으신
것이며, 주님의 속성과 권능을 표현하는 도구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거짓되이 일컫는 과학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자연을 통해 계시되는 주님의 지혜를 모두 앗아가
버렸습니다. 덕분에 하나님이 받아야 할 영광과 경배를
과학과 교육이 받고 있습니다.
주님은 바람의 무게를
정하시고, 방향을 정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람들의
무게를 정하시고 물들을 되어 무게를 정하시기 때문이라.](욥28:25).
오늘날 태풍이나 이상 기온 등에 대해서 걱정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할 것 없습니다. 바람, 천둥, 물,
비, 땅 어느 것 하나 주님의 손길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욥기 37:6, [이는 그분께서 눈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땅
위에 있으라, 하시며 자신의 권능에서 나오는 적은
비와 큰 비에게도 그와 같이 하시기 때문이라.](욥37:6).
눈, 비는 모두 주님의 명령에 따라서 내립니다. 오늘날 지구
과학이나 환경 공학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고기압, 저기압,
풍향, 온도, 습도 등 자연 현상에 대한 많은 이해를 가지면서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일기를 주장하시고, 모든 자연 현상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점점 의식이 멀어지고
있음을 많이 보게 됩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당장 기상도를
펼쳐 보이면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비가 너무 많이 오면
언제 어떻게 될 것이라는 예측을 사진과 함께 내 보여 주는
세상에 살다보니 눈, 비가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듯 합니다. 그러나 신실한 성도들은
창조주이시며, 모든 자연 현상을 주관하시는 주님을 믿고
기도합니다. 비가 내리는 원리는 여러분이 자연 시간에 다
배웠겠지만 성경은 사람들이 말하는 기상학의 원리를
말하기 수 천년 전에 욥을 통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는
그분께서 물방울들을 작게 만드시매 그것들이 자기의
수증기대로 비를 쏟기 때문이니](욥36:27). 핵심은 비가
내리는 원리 이전에 비를 내리시는 주체입니다. 물이
수증기가 되어 비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과학일지
몰라도 그 보다 한 단계 더 들어가 그 일을 하시는 분 즉 ‘그분께서...’란
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호흡으로
서리가 내리고 물의 너비가 줄어드느니라.](욥37:10)., [네가
눈이 있는 곳간에 들어간 적이 있느냐? 혹은 네가 우박이
있는 곳간을 본 적이 있느냐?](욥38:22). 우리가 이런
사실을 알 때 우리가 접하는 바람과 비와 물과 눈, 우박에
대해서 경이로움이 생길 것입니다. 몇일 전에 이곳에는
번개와 천둥이 쳤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너무나 드문
일이었든지 뉴스에까지 보도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께서
비를 위하여 법령을 정하시고 천둥이 칠 때 번개를 위하여
길을 정하셨으니](욥28:26). 이런 천둥 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사람들에게 한번에 모두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음성을 발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천둥
소리입니다. [번개가 있은 뒤에 한 음성이 우렁차게
울리나니 곧 그분께서 자신의 빼어난 음성으로 천둥을
치시는 것이라. 그분의 음성이 들릴 때에 그분께서
그것들을 멈추게 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음성으로 놀랍게 천둥을 치시며 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큰 일들을 행하시나니](욥37::4-5). 사람이 최고로
낼수 있는 소리는 산에 올라가서 계곡을 향해 소리쳐서
메아리를 울리게 하는 것입니다. 산에서 몇 사람이 합창으로
“야호”를 외치게 되면 산짐승들은 무서워서
혼비백산합니다. 그래서 요즘 산 입구에는 등반객들에게
산에서 절대 소리를 치지 못하도록 안내문을 돌리고 규제를
합니다. 그 소리 때문에 유산하거나 사산하는 짐승들이 많고,
놀라서 뛰다가 바위에 부딪히거나 다리가 부러지는
짐승들도 수두룩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산짐승들이 산 속 깊은 곳에서 들을 수 있는 사람의 음성이
메아리이듯이 사람이 땅에서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
천둥입니다. 주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음성을 발하는데 그
소리가 연속적으로 크게 날 때는 모두 무서워 떨게 됩니다.
사람들 가운데 누가 그런 소리를 낼 수 있습니까? 우리가
산에다 메아리를 울리듯이, 주님은 하늘에 대고 천둥소리를
냅니다. [네가 하나님같이 팔을 가지고 있느냐? 네가
하나님같이 음성으로 천둥소리를 낼 수 있느냐?](욥40:9).
저는 전에 불신자인 후배가 저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한번만
들으면 자신은 평생토록 하나님을 믿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 때 성경 지식이 없어서 천둥
소리에 대해서 말해 주지 못했는데, 후에 성경을 읽으면서
그 후배가 하나님의 음성을 해마다 여러 차례 듣고 있구나!란
생각을 했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내가 이미 영화롭게 하였고 또 다시 영화롭게 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곁에 서서 들은 사람들은 천둥이
쳤다고도 하며 다른 사람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음성이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요12:28~30).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천둥 소리 또는 천사가
말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 계시록에서는 일곱 천사의
음성을 일곱 천둥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겨울에
어는 얼음과 서리 역시 주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얼음은
누구의 태에서 나왔느냐? 하늘의 흰 서리는 누가 생기게
하였느냐?](욥38:29). 자연 현상을 통해 이런 기이한 주님의
솜씨와 능력을 체험하고 놀랄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매 순간 풍성한 자연
계시를 통해 놀라우신 창조주를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앞에서 주의 콧김으로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와 같은 주의 놀라운 권능의 역사를 늘
보고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한국에 살 때
우리나라를 향해 무섭게 진격하는 태풍들이 갑자기
사멸하고, 진로를 바꾸어 황해나 동해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비를 동반한 태풍이 사멸하고 진로가
바뀌는 것을 보면서 홍해가 갈라지는 경험을 한 것과 동일한
체험을 자주 했습니다. 그러나 기도한 사람을 제외하고 그
감격과 경이로운 흥분을 맛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9-10절을 보십시오. [그
원수가 말하기를, 내가 쫓아가서 따라잡고 노략물을
나누리라. 그들을 덮쳐 내 욕망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하였으나 주께서
주의 바람으로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강력한 물 속에 납같이 가라앉았나이다.](9-10).
파라오는 하나님의 백성을 보낸 후에 마음이 바뀌어서
추격을 했는데 그는 모세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무효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열 번의
재앙도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누구도 참된 마음의 회심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인격적인
순종과 굴복이 없으면 일시적으로 눌렸던 마음은 다시
반역하게 됩니다. 파라오의 결심을 보십시오. ‘나’라는
말이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내가 쫓아가서, 내 욕망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 죄인들의
특징은 온통 ‘나’로 시작하여 ‘나’로 끝을 맺습니다.
이는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이 주신 권능을 자신의 것인줄
알고, [... 이 큰 바빌론은 내가 내 권능의 힘으로 건설하여
왕국의 집으로 삼고 내 위엄의 영광으로 삼은 것이
아니냐?... ](단4:30)고 하였다가 7년간 들에서 풀을 뜯는
병이 걸린 후에야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고백했습니다. 그는 이성이 돌아왔을 때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그 날들의 끝에 나 느부갓네살이 내 눈을
들어 하늘을 보매 내 지각(知覺)이 다시 내게로 돌아오니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를 찬송하며 영원토록 사시는 그분을
찬양하고 공경하였나니 그분의 통치는 영존하는 통치요,
그분의 왕국은 대대에 이르리로다.](단4:34). 마귀는
인간의 자아를 부추깁니다. 마귀는 성도들이 자아를
주장하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면 힘들이지 않고 스스로
범죄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땅에서 주님이 보여준
본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셨고,
자아를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내가 내
뜻대로 하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요5:30).
주님은 자신의 제자들 역시 그러해야 함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자아의 추구나 자기 완성의
삶이 아닌 철저히 주님 한 분을 의뢰하고 그 안에 거하는
의존적인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이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나니 이는 나 없이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요15:5).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입니다(빌4:13).
육신적인 성도들은 파라오나 느부갓네살이나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나란 말로 시작해서 나란 말로 끝을 맺습니다.
자아는 모든 불순종과 반역의 원천입니다. 나의 죄보다 더욱
처리하기 힘든 것이 바로 나의 자아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자아를 처리할 수
없습니다. 자아는 아무리 징계를 받고, 심판을 받아도 다시
범죄 합니다. 우리는 지옥에 간 혼들이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가는 모습을 봅니다. 물론 그들은 불타는
용광로 속에서 슬퍼하며, 통곡도 합니다. 지옥에 간
부자처럼 자신이 아닌 친척들이나 가족들이 자신이 있는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지옥에서 하는 일은 이를 가는 것입니다(마13:42, 50). 이는
자아가 죽음 이외의 어떤 방법으로도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파라오와는 전적으로 다른 부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나를 처리하지
않았다면 파라오와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파라오는 결국
주의 심판으로 바다 속에서 죽음으로 끝났습니다. 전사이신
주님은 흐지부지하게 전쟁을 종결짓지 않으십니다.
휴전이나 정전이나 평화협정은 없습니다. 주님은 원수를
무찌르셨습니다. 동시에 주님은 우리 안에 있는 자아를
철저히 정복하십니다. 적을 무찌른 주님을 찬양함과 아울러
우리 안에 있는 자아를 십자가로 철저히 처리해 주신 주님께
찬양을 돌립시다.
우리는 더 이상 “내가...하리라”고
말하지 말고, 주께서 원하시면 이라고 말합시다. [그러나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
우쭐대는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권능을 알아 보겠노니](고전4:19).
[이런 까닭에 너희가 마땅히 말하기를, {주}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요,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약4:15). 히브리서 6: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히6:3).
십자가에서 자아가 처리된
성도만이 주님의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고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전사이신 주님을 따라 승리하는 비결은
먼저 자신이 주님께 철저히 정복되고, 굴복함으로써, 주님의
권능이 지속적으로 머무르게 하는데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승전가를 높이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찬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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