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15:23-27
요절: 출애굽기 15:26
홍해를 건넌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곧 바로 광야의 여행에 접어들었습니다. 광야를
통해서 주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연단과 시련을 통한
믿음을 심어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이집트에서의 열 가지
재앙의 특별한 체험과 홍해의 기적 등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흥분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체험과 감정적
흥분은 삼일의 광야 여행동안 마른 땅의 수증기처럼 모조리
말라 버렸습니다. 홍해를 건넌 후 부른 찬양은 마음 속에서
그 유효기간이 3일을 넘지 못했습니다. 광야 여행의 목적은 첫째,
이스라엘을 시험하시고 낮추시는 것입니다.
[[주] 네 하나님께서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너를 인도하신 그 모든 길을 기억할지니 이것은 그분께서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
또 너희가 그분의 명령을 지키려 하는지 그렇지 아니한지
알고자 하심이라.](신8:2). 주님은 우리의 믿음, 우리의
찬양이 심중에서 나온 것인지 광야로 인도하심으로
시험하십니다. 여러분이 지금 메마른 광야를 통과하는
중이라면 자신을 낮추는 시간이 되어 정금같이 빚어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사람이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광야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는 자연 환경입니다. 그런
곳에서 살아났다면 우리는 빵과 물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분께서 너를 낮추시며 주리게 하시고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하여금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3). 성도들이 아직 이 진리를 배우지
못했다면 오랫동안 광야 생활을 더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 주의
징계하심을 생각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또 너는
사람이 자기 아들을 징계하듯 [주] 네 하나님께서 너를
징계하심을 마음 속 깊이 생각할지니라.](신8:5). 현대
기독교는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과 사랑과 위로만 있는
반쪽짜리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에서 자기들이 발췌한대로 인위적으로
조작한 자기들의 마음에 맞는 하나님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주님은 징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광야는 징계를 통해
우리를 바로잡고, 훈육하는 장소입니다.
사람은 겪어 보아야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광야를
통과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 안에 있는 모든
육신의 죄성을 다 드러내 보였습니다. 크리스찬들에게 이
세상은 황량한 광야입니다. 자연인들은 이곳이 고향이지만
우리는 잠시 스쳐지나가는 여행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나그네요, 순례자입니다. 잠시 머물다 곧 다른 곳으로
이동할 곳에 시간과 정력을 쏟아 부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광야는 영적 생활에
접어든 성도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입니다. 홍해와
가나안 사이에는 걸어야만 하는 광야가 있습니다. 실로
광야의 교훈은 참으로 귀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귀한 시간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의 여행을
통해서 자신들이 왜 택함받았는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롭거나 거룩하거나 두뇌가 탁월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한 이유는 첫째,
사랑 때문입니다. [[주]께서 네 조상들을
사랑하셨으므로 그들의 뒤를 이은 그들의 씨를 택하시고
자신의 큰 권능으로 친히 보시는 중에 너를 인도하여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시며](신4:37).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특별히
믿음의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으로 인해 이들은
구원받았습니다. 둘째, 수가 가장 적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너희를 사랑하시고 너희를
택하신 것은 너희가 다른 백성보다 수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모든 백성들 중에서 수가 가장 적으니라.](신7:7).
하나님은 이집트나 바빌론이나 로마 제국을 택하시지
않으시고 가장 수가 적은 히브리 민족을 택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네가
가서 그들의 땅을 소유하게 됨은 네가 의롭거나 네 마음이
올바르기 때문이 아니요, 오직 이 민족들이 사악하므로 [주]
네 하나님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기 때문이니
이것은 [주]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로 하신 말씀을 친히 이루려 하심이니라.그러므로 /너는/
알지니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이 좋은 땅을 소유로 주신
것은 네가 의롭기 때문이 아니니라. 이는 네가 목이 뻣뻣한
백성이기 때문이니라.](신9:5~6). 이스라엘은 결코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이 의롭기 때문에
땅을 주시는 것이 아님을 반복적으로 강조하셨습니다.
유업은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는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와
흡사합니다. 우리가 받게 될 상급 역시 모두 주님의 은혜의
결과이지 나의 땀의 수고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계시록4:10에 보면 자기들의 왕관을 주님 앞에 던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왕관이 자신들의 공로라고
주장하며, 쓰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스물네
장로가 왕좌에 앉으신 분 앞에 엎드려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는 분께 경배하고 자기들의 왕관을 왕좌 앞에 던지며
이르되,](계4:10). 우리 역시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나의
나된 것도 주님의 은혜로 된 것이며, 나의 수고 역시 주님의
은혜입니다(고전15:10).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15:10). 우리는
이런 점을 늘 기억한다면 많은 열매를 맺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2절을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니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 광야에서 사흘 동안 갔으나 물을 찾지
못하였더라.](22).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광야에서 눈에
보기 즐거운 것, 듣기에 아름다운 것, 머물며 살고 싶은 그런
곳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걸어도 걸어도 사막이요, 황무지
뿐입니다. 도시도 없고, 차도 없고, 빌딩도 없고, 시장도
없습니다. 오락실도 없고, 카지노도 없고, 스포츠 시설도,
카페도 없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따라 걷는
것외에는 아무런 즐거움이 없습니다. 이런 생활은 보통
사람은 3일만에 질려 버리는 그런 생활입니다. 주님과
친교가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곳에서 주를 찾고, 주를
갈망할 것입니다. 시편63:1-2을 보십시오. [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내가 새벽에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내 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사모하오니 이것은 내가 성소에서 주를 뵈온
것같이 주의 권능과 주의 영광을 보고자 함이니이다.](시63:1-2).
이 시를 쓴 다윗 역시 유다 광야 생활을 경험했고, 거기서 이
찬양을 드렸습니다. 다윗의 영적 생활은 광야에서나
성소에서나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물이 없는 문제, 갈증의
문제는 주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첫 번째
시험으로 물을 주시지 않으셨는데, 이는 성도가 목마를 때
해야 할 일이 오아시스를 찾거나 샘을 파는 일이 아니라
주를 찾아야 함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유다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7:37).
우리는 오직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을 찾아야만 합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이는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음이니 곧 그들이 생수의
샘인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물 저장고들을 판 것인데
그것들은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저장고니라.](렘2:13).
[오 [주]여,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여, 주를 버리는 자들은
다 부끄러움을 당하며 나를 떠나는 자들은 땅에 기록되리니 이는
그들이 생수의 근원이신 [주]를 버렸음이니이다.](렘17:13).
생수의 샘, 생수의 근원이신 주를 버린 결과 그들은 영적
갈증을 겪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마라에 이르렀을 때에 그곳의 물들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곳의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23).
광야에서 삼일간의 도보 행진을 한 후에 드디어 물을
찾았다고 만세를 부를 즈음에 찾은 물은 쓴 물이었습니다.
여기서 쓴 물이란 단순히 물 맛의 언급이 아니라 마시지
못하는 물이란 뜻입니다. 이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많이 겪는
문제입니다. 구원을 경험하고 찬양을 부른 뒤에 빠르면 몇
주, 늦어도 몇 달 내에 이런 경험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제 교회도 다니고, 첫 사랑의 기쁜 감격도 있고, 찬양도
불렀지만 겨우 찾은 직장은 파산이 나서 월급을 못 받고,
교회 내에서 만나 결혼한 배우자는 성격이 전혀 안 맞고,
취직 시험을 보았는데 면접에서 떨어지고...뭐 이런 것들이
마라에 이르러서 만난 쓴 물들입니다. 구원받은 후에 옛
친구를 만나 물 좋은 곳이라고 갔던 곳에 다시 가면 완전히
썩은 물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전에는 맛있게 먹었던
맥주나 소주가 입에 그렇게 독하고 쓸 수가 없습니다. 이
역시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 감사해야
할 성도들이 이제 나는 세상에서 무슨 낙으로 사는가?
불평하고 걱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삼일 동안 물을 찾지
못했다가, 겨우 찾은 물은 쓴 물이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전혀 기대하지 않는 그런 기도 응답입니다. 그렇게
위대한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주님으로부터 쉽고
평안한 길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누가 처음부터 이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역시 구원받았을 때 내 인생은 창창대로인 줄 알았을
것입니다. 특히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바른 진리에 눈을
떴을 때 남은 생은 주렁 주렁 열매맺는 승리만이 펼쳐 질 줄
알았지 이런 작은 교회에서 별 더러운 꼴 다 보면서 교회
생활하리라 생각을 했겠습니까? 이곳이 여러분에게는
마라의 쓴 물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다운 교회
찾다가 드디어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거기에는 물들이 써서
마시지 못했다...이런 식일 수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대로 광야는
세상을 예표합니다. 광야의 첫 번째 여행에서 물이 없고, 쓴
물을 만났다면 이 세상 역시 물이 없고, 있다 해도 성도들이
마실 수 없는 쓴 물 뿐입니다. 세상은 순례자들에게 양식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순례자들이 이 광야에서 각종 좋은 것을
다 먹어가면서, 즐기면서 가나안으로 가는 줄로 안다면 크게
잘못 안 것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백성이
모세에게 불평하며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24).
굶는데는 장사없습니다. 우리 속담에도 공자도 사흘 굶기면
남의 담 타 넘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물며 물이 없다면 그
분위기가 얼마나 험악했을까? 생각해 보십시오. 백성들의
고질병인 불평이 다시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은혜의 유효기간은 딱 3일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기사를 통해 영적 교훈을 받고, 경고와 훈계를 받아야
합니다. 구약 성경의 기록 목적이 우리에게 훈계를 주시기
위함임을 기억하면서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고전1:10).
불평은 불신의 대변인입니다. 전에 홍해를 건너기 전에는
그냥 모세에게 말을 했지만 이번에는 불평을 했는데,
성경에서 불평이란 단어가 사용된 첫 번째 예입니다.
백성들은 모세에게 불평을 했는데,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늘 1차 타겟이 됩니다. 성도들은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는 나름대로의 이상적인 목회자 상이 있습니다.
목회자는 이래야 한다는 모델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기
기준에 틀리거나 못 미칠 때 불평하거나 비난하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심지어 설교는 이렇게 해야 한다! 심방은 최소한
한달에 몇번은 와야 한다! 전화를 자주 해주어야 한다!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면 그들은 후에
반드시 문제를 일으킵니다. 여러분들은 먼저 이상적인
성도의 모델을 정해 놓고 자신이 그러한지를 늘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제대로 된 지역 교회 회원인가?
나는 지역 교회의 회원으로서, 성도로서 직무를 감당하고
있는가? 나는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깨어 있는가?
짐을 함께 나누어지는가? 서로 사랑하는가? 먼저 낮아져서
섬기는가? ...찾아 보면 엄청 많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성경의 기준에 맞추어 점검하다 보면 교회는 어느 덧 자신이
원했던 이상적인 지역 교회로 바뀌어 있을 것입니다. 불평
대신 감사와 찬양이 넘쳐 날 것입니다.
"불평은 반역의 첫
단계입니다. 반역은 마법과 우상 숭배의 죄와 같다고
했습니다(삼상15:23). 1. 마음에 불평이 있는 사람은 처음에
비협조적으로 나옵니다. 모임에 참석도 하지 않고, 무슨
일에든지 뒤로 빠집니다. 2. 다음에는 조용하게 분노합니다.
아직 표출하지는 않습니다. 3. 다음에는 성질을 냅니다. 4.
그리고 나서 서서히 불만을 표출합니다. 5. 다음에는 반골
기질이 있는 사람들끼리 따로 모여서 자기들끼리 불만을
토로합니다. 6. 그리고 나서 분노를 표현합니다. 7. 불평은 큰
목소리를 내고 여기 저기서 터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8.
공개적으로 터져 나옵니다. 9. 그런 불평은 공식적으로
하도록 힘을 얻게 되고 10. 온 무리를 선동하게 됩니다."-(Peter.
Ruckman, The Book of Exodus). 이것은 제가 오랫동안 교회 생활을
하면서 한번도 예외없이 목격했던 현상입니다. 이곳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은 만족하는 비결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주]께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보여
주시므로 그가 그것을 물들에 던지매 물들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그분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규와 규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시며](25). 모세는 자신을 향해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해명하거나, 요즘 한국의 어떤 대통령처럼 명예
훼손 혐의로 법원에 고발하거나, 자신의 친위대를 시켜서
입막음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향한 불평을
그대로 안고 주님께로 달려가 부르짖었습니다. 모세는
문제의 해결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
방법은 주님께 달려가 부르짖는 것입니다. 기도는 불평을
잠재우고, 독을 풀어주는 해독제입니다. 백성들이 불평을
한다고 해도 한명의 중보자 모세로 인해 백성들은 물을
얻었습니다. 이는 주님이 우리의 불평을 처리해 주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죄들에 따라 우리를
대우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불법들을 따라 우리에게 갚지
아니하셨으니](시103:10).
하나님은 중보자의 중보를
통해 우리를 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위대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매 순간 구원의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우리가 불평할 때 주님은 중보하십니다. 성령께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범죄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의로운 변호자가 되어주십니다. [나의 어린
자녀들아, 내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범죄하여도
우리에게 아버지와 함께 계신 변호자가 계시니 곧 의로우신
분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2:1).
모세의 기도에 주님은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주님은 나무 한 그루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 나무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던 나무였지만
주님이 보여주시기 전까지 모세는 그 나무를 알아 보지
못했습니다. 그 나무의 효용 가치도 몰랐습니다. 이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갈보리 언덕에 서 있는 십자가는 2000
년전부터 그 자리에 있던 십자가이지만 주님이 보여 주시기
전까지 우리는 그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 이와
유사한 예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열어 주시매 그녀가 우물을 보고 가서 부대에 물을 채워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니라.](창21:19). 하갈은 스스로
우물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눈을 열어 주셨을 때에야
비로소 우물을 보았습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 역시
주님께서 눈을 열어 주신 후에야 불 병거를 볼 수
있었습니다. [기도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여시사 보게 하옵소서, 하니 [주]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보라,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6:17). 이는 참으로
잠언 기자의 증언대로 [듣는 귀와 보는 눈 이 둘도 다 [주]께서
지으신 것이니라.](잠20:12)는 말씀 대로입니다. 우리 역시
영적인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도 영적인 것을 전혀 보지
못하는 소경들이 너무 많습니다. 죄는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마귀는 베일로 사람들의 마음을 가립니다. 특히
불신자들에게 영광스런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고후4:4). 뇌물은 눈을 어둡게 합니다(출23:8).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로운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만드느니라.](출23:8, 신16:9).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눈이 멀게 됩니다(요일2:11).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가운데 있고 어둠 가운데서 걸으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요일2:11).
이런 이유로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권고하노니
내게서 불로 단련한 금을 사서 부유한 자가 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네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나지 아니하게 하며 네
눈에 안약을 발라 보게 하라.](계3:18).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모든 성도들이 지각의 눈을 열어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표적과 같이 육신의 눈이 보는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것을 분별할 수 있고, 볼 수
있는 지각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모세는 주님께서 보여
주신 나무를 물들에 던졌는데, 물들은 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나무는 십자가를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십자가는
수치와 모욕을 받게 하지만 그것을 바꾸어서 영광과 유업의
상급으로 바꾸어 줍니다. 십자가는 죄의 결과로 인한 저주의
형벌이지만 새 생명의 탄생지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거침이 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영광이 됩니다.
25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
거기서 그분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규와 규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시며](25).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있을
동안에 주님은 법규와 규례를 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시험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법규와 규례는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만 유효한 것입니다. 은혜로 받은
구원이 무법은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는 우리를 그냥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은혜는 의를 통해 다스립니다(롬5:21).
[이것은 죄가 군림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것같이 은혜도
의를 통해 군림하여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5:21). 은혜의 통치
아래 없는 사람은 율법 아래 있거나 여전히 죄아래 다스림
받고 있습니다. 은혜는 우리를 가르칩니다. [이는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우리를 가르치시되 경건치 아니한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거부하고 이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딛2:11~12).
이스라엘 백성들은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들은 행위로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법규와 규례는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처음 행해진 시험에서 그들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F 학점을 받은 성도는 재시험을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냥 넘어 가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시험을 낙제없이 통과하시기 바랍니다.
26절입니다. [이르시되,
네가 [주] 네 하나님의 음성에 부지런히 귀를 기울이고 내
눈앞에서 옳은 것을 행하며 내 명령들을 귀담아 들으며 내
모든 법규를 지키면 내가 이집트 사람들에게 내린 이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치유하는 [주]이기 때문이라, 하시니라.](26). 하나님은
법규를 주신 후에 그것을 잘 지킬 때 보상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체적 질병을 주시지 않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인생에서 질병이 차지하는 심각성과 위협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이보다 더 큰
복된 약속이 없을 줄로 압니다. 주님은 치유하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이 복은 믿는다고 주어지는 무조건적
언약이 아니라 행할 때 주어지는 조건부입니다. 조건부
언약을 조건을 만족시키지 않을 때는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병원이나 의사가 필요 없으려면 말씀에
부지런히 귀를 기울이고, 옳을 것을 행하고, 명령들을
귀담아 들어서, 모든 법규들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이런 은혜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로써 주의 길을 땅 위에 알리시며
주의 구원하시는 치유(治癒)의 힘을 모든 민족들에게
알리소서.](시67:2)라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천년 왕국
때 이 은혜는 온 세상에 문자 그대로 임할 것입니다. 천년
왕국을 치유하시는 날이라고 했습니다(사30:6). 땅과 바다도
치유될 것이며, 사람들도 모두 치유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흔히 신유
은사주의자들이 이 구절을 자주 잘못 이용하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들이 가장 자주 이용하는 구절이 본문과
이사야 53:4,5절입니다. 이 구절은 신약 성경 마태복음 8:17에서
이렇게 인용되었습니다. [이것은 대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이르시되, /그가/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도다,
하였느니라.](마8:17). 그래서 성도들은 더 이상 질병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질병이 있다면 주님이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를 명하실 때 주신 권능으로 고칠 수 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잘못
나눈 오해입니다. 우리의 모든 질병은 주님이 담당하셨지만
이 세상에 그 효력이 다 발생되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짊어진 연약함과 질병은 천년 왕국에서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들입니다. 왕국 복음이 선포될 때
질병은 치유됩니다. 하지만 은혜의 복음이 선포될 때 신체적
질병이 동시에 치료되지는 않습니다. 몇몇 은사주의
교회들에서 신유집회를 자주 열지만 대부분은 가짜
치유입니다. 주님은 병을 고치실 때 대부분 도구를
사용하셨습니다. 히스기야의 병을 고치실 때는 무화과를
사용했고, 디모데의 위장병을 고치는데는 소량의 포도즙을
썼고, 모세 역시 불뱀에 물린 백성들의 독을 제거하는데
놋뱀 막대기를 들었습니다. 천년 왕국 때에도 주님은 생명
나무 잎사귀를 사용해서 고치실 것이며, 영원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계22:2).
본문은 문자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잘 지킬 때 주시는 보너스와
같은 것입니다. 이 구절을 신약 성도들에게 그대로
적용하자면 사도 바울이나 디모데는 주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늘 병을 앓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를 믿고,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은 불신자들
보다 훨씬 건강하며 오래 삽니다. 하나님이 치유자란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병이 낫을 때 당연히 치유자이신
주님을 불러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범죄하는
것입니다. [아사가 자기의 통치 제삼십구년에 발이 병들어
그 병이 심히 중하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주]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대하16:12). 죄로 인한
질병이라면 죄를 고백하고 병고침을 받도록 서로를 위해서
뜨겁게 기도해야 합니다. [너희 잘못들을 서로 고백하고
병 고침을 받도록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라. 의로운 자의
뜨겁고 효력 있는 기도는 많은 유익이 있느니라.](약5:16).
몇 가지 건강법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건강하게 사는 법은 첫째,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오 내 혼아, 어찌하여 네가 낙심하느냐?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느냐?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이는 내 얼굴의 건강이시요, 내 하나님이신 그분을 내가
여전히 찬양할 것임이로다.](시42:11,43:5).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잠3:8, 4:22). 이런 생활을
규칙적으로, 지속적으로 한다면 여러분은 병원비를
엄청나게 save 할 수 있을 것이며, 몸의 고통을 덜 겪을
것입니다. [이것이 네 배꼽에 건강이 되며 네 뼈들에
골수가 되리라.](잠3:8), [그 까닭은 그것들을 찾는
자들에게 그것들이 생명이 되며 그들 모두의 육체에 건강이
되기 때문이니라.](잠4:22). 셋째, 언어 생활입니다. 건전한
언어 생활은 여러분의 건강에 큰 도움이 됩니다. [칼로
찌르듯이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건강하게 하느니라.](잠12:18). [즐거운 말들은 벌집
같아서 혼에 달고 뼈에 건강을 주느니라.](잠16:24). 넷째,
복음 전도를 하면 다른 사람에게 건강을 줍니다. [사악한
사자(使者)는 해악에 빠져도 신실한 대사(大使)는
건강하게 하느니라.](잠13:17).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대사들입니다(고후5:20). 본국의 명령은 대사를 통해
주어집니다. 주님은 죄인들에게 우리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복음 전파자는 주인되신 주님의 마음까지 시원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신실한 사자(使者)는 그를 보낸
자들에게 마치 추수 때에 내린 차가운 눈 같으니 이는 그가
자기 주인들의 혼을 시원하게 하기 때문이니라](잠25:13).
다섯째, 주님이 택한 금식을 할 때 건강해 집니다. 주님이
택하신 금식이란 밥을 굶고, 혼을 괴롭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택한 금식은 이것이 아니겠느냐? 곧 사악함의 결박을 풀어
주고 무거운 짐을 벗겨 주며 학대당한 자를 놓아 자유로이
가게 함으로 너희가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들에게 네 빵을 나누어 주며 내쫓긴 가난한 자들을
네 집에 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벌거벗은 자를 볼 때에
입히며 네 살붙이를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7). 이런 금식을 할 때 주님은 건강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같이 쏟아지고 네
건강이 신속히 솟구치며 네 의가 네 앞에서 나아가고 [주]의
영광이 네 후위대(後衛隊)가 되시리니](사58:8). 주님은
어떻게 우리의 병을 고쳐 주시는가 보다, 병이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법을 더 많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희
성도들이 모두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 역시
사도 요한과 동일한 심정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무엇보다도 네 혼이 형통함같이 네가 형통하고 건강하기를
바라노라.](요삼2)
2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렀더니 거기에 우물 열두 개가 있고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더라. 그들이 물들 옆에 진을 치니라.](27).
엘림은 이스라엘이 두 번째로 진을 친 장소로 마라와 신광야
사이에 있었습니다. 엘림은 마라를 보충하는 지역적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쓰다고
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마라에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물이
있었고,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쓴 경험은 엘림에서
기쁨의 경험으로 바뀌었습니다(출15:27, 16:1, 민33:9,10).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처음 여정에서 마라의 쓴 물을 만나지만 주님을 통해
그것이 순수한 물로 바뀌고, 종려나무(야자수) 그늘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늘 마라의 쓴 물처럼
보여도 그것이 십자가를 통해 엘림의 우물이 되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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