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17:1-7
요절: 출애굽기 17:6
오늘은 광야의 불평 불만
제 3탄에 해당합니다. ‘교회는 성인들의 집회소가 아니라
죄인들을 위한 종합병원이다.’란 말처럼 광야의 교회
이스라엘은 정말 문제 투성였습니다. 이들의 목자였던
모세는 성도들의 불평에 혼이 기진할 정도였고, 돌에 맞아
죽을 위협에 놓였습니다. 광야의 회중들은 마라에서는 물은
있었지만 식수로 부적합한 쓴 물로 인해서 불평했고, 신
광야에서 먹을 것이 떨어졌다고 불평했습니다. 성경은 단지
불평했다고 하지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200만이 넘는
사람들이 모세를 향해 ‘우리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외치면 하늘과 땅이 진동할 것입니다. 전에 여의도 광장에서
“호헌철폐, 독재 종식!”을 외치는 데모를 하는데 약 백만
명의 시민이 모였을 때 그 엄청난 군중의 수로 인해 경찰은
아무 손도 쓸 수 없었습니다. 얼마 되지도 않는 노조
직원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임금인상!, 단결 투쟁, 쟁취!
등의 구호를 외쳐도 회사가 마비됩니다. 그런데 광야의
백성들이 복지 향상이나 임금 인상도 아닌 ‘먹을 것을 달라,
물을 달라!’는 생존권의 외침은 엄청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보통 200만 명의 시민을 통제하는데는 무장 군인 15만명
정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사전에 불평 불만을 지닌 사람들,
선동하는 사람들을 찾아내고 조기에 진압할 정보원들도
필요합니다. 모세는 경찰도, 군대도, 국가 정보원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불만은 전혀 여과 없이 모세를
향해 직격탄으로 날아 들어왔습니다.
하늘에서 내린 만나로
인해 일단 먹는 문제가 해결되고, 그들의 불평도
잠재워졌습니다. 이제 회중은 주의 인도하심을 따라 신
광야에서 르비딤으로 이동했는데 아예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특이한 사실은 이들의 움직임은 주님의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안내를 받는 여행이었지만 항상 뭔가
부족하고, 없는 그런 여정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여정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불평과 불만은
있었지만 구름 기둥이 가는 대로 갔고, 불기둥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지 따로 개인 행동을 하거나 자신들이 지도를
펴놓고 움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모세와 아론을
따돌리고 자기들끼리 여행하다가 이런 일을 만나면 ‘역시
주님은 공의로우시다. 쌤통이다! 벌을 받았다!’는 식으로
쉽게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었습니다. 성도가 주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다는 사실은 시험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근거를 갖는다는 뜻입니다. 광야의 여행 중에
끊임없이 불평 거리가 생겼습니다. 동시에 그 불평거리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주님도 함께 계셨습니다. 주님의
인도함을 받는 순례의 길은 불평거리, 근심거리, 염려,
문제가 전혀 없는 나날의 연속이 아니라 그런 것은 그대로
닥치지만 그런 것을 해결해 주시는 주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선한 목자되신 주님의 인도를 받으면 늘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만 다닌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성경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환경이 어렵다고 불평하는
것은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마실 물이 없고, 먹을 빵이
없다는 사실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며, 이런 곳으로 인도한
지도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취급 받기에 알맞은 그런
사건이지만 주님의 백성들에게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말입니다. 주님은 만나를 내려주셨지만 그들의 불평과
주님을 시험한 일을 무죄(無罪)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행한 죄악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또한
그들이 자기 욕심대로 먹을 것을 구하여 자기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시78:18).
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주]의 명령에 따라 신 광야에서 떠나
자기들의 여정대로 이동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거기에 백성이 마실 물이 없으므로](1). 주의 명령에 따라
신 광야에서 떠났고, 르비딤에 장막을 쳤습니다. 주님은
이곳에 마실 물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사실
광야란 곳이 물이 없기는 어디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인도하신 곳이라면 거기에는 주님의 해결책 역시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성도들에게 닥친 모든 환경은
모두 하나님의 안배하심이며, 믿음의 시험과 단련을 위해
준비된 것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전에 마라에서 쓴
물로 인해 주님을 불쾌하게 했던 백성들은 이번에는 이전
경험을 거울로 삼아 믿음을 발휘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그런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한 일에 대해서 은혜로 구출하시고, 다시 한번 그런
기회를 주셔서 승리를 쟁취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렇게
주어진 기회는 감사와 찬양으로 승리하기보다는 “왜 내게
또 이런 일이!”하며 짜증과 불평을 함으로써 실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백성이
모세와 다투며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주]를 시험하느냐? 하니라.](2).
백성들은 재시험에서 여지없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마라의 교훈과 신 광야에서의 교훈을 잊어 버렸습니다.
여러분은 학창시절에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한번
틀린 문제는 또 틀린다!’. 한번 틀린 문제는 다시 안 틀려야
하는데, 시험을 보면 틀린 문제는 계속해서 틀리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는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실패로부터
뭔가를 배우지 못하면 실패는 반복됩니다. 백성들은 물이
없자 곧 바로 모세와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는 말은 물 못 내면 너는 이 자리에서
죽어!란 협박이나 다름없습니다.
물이 없는 것은 현실이고,
지금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같은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주님의 신실하심과 공급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주님의 선하심을 믿고 구하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해결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주]를
시험하느냐? 하니라.](2)라고 그들의 죄를 책망했습니다.
주님을 시험한다는 말은 그들이 하나님을 향해 믿음대신 ‘이번에도
해결할 수 있는지 능력을 보여 봐라’는 식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마라의 물과 만나의 공급이란 초자연적인
두 번의 경험을 우연으로 돌려버리고, 과연 이번에도 능력이
되면 물을 내 보시오. 재주가 있으면 보여 주시오란
식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광야에서 백성들의 믿음과
순종을 받는 대신 이런 식으로 불평과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내 영광과 또 이집트와 광야에서 내가 행한 내 기적들을
보고도 이제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한 이 모든 사람들은](민14:22)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성도들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매우 큰 죄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믿음과 시험의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믿음은 물이
없을 때 물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을 바라는 것입니다.
시험은 물이 없을 때 하나님이 물을 주실 수 있을까?
의심하여 구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물을 안 주셔도 주님의
전능하심을 의심하지 않고 대신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게
합니다. 반면 시험은 물을 안 주시면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의심하고 더 이상 하나님으로 믿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믿음은 물의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라면 시험은 물의 여부에 따라 하나님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이 안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의심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라도 물을 내
주셔야만 하는 그런 이상한 처지에 놓이게 되셨고, 앞으로
이런 일은 계속해서 발생할 것이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번에 물이 해결되었다고 해서 다시 시험하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만 믿음과는 달리 시험은 계속해서 다른 시험을
낳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시험하고, 악한 영들을 시험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됩니다.
시험은 건수를 잡아서 자신의 욕구나 필요를 상대로부터
뜯어내는데 있습니다.
3절입니다. [거기서
백성이 물로 인하여 목마르매 백성이 모세에게 불평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와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으로 하여금 목말라 죽게
하느냐? 하니](3). 물건은 사용해 보아야 품질을 알 수
있고, 사람은 고난에 처해 보아야 그 성질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항상 튀어나오는
말이 이집트에서 왜 나왔던가?란 후회입니다. 이는 부부간에
약간만 문제가 생겨도 ‘왜 당신을 만나서 결혼했던가?’란
부부들과 흡사합니다. 이집트에서 나올 때만 해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즐거웠고 행복했습니다. 홍해를 건넌 후에는
찬양하며 머리 숙여 경배했습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없고,
마실 물이 없자 그런 과거는 모두 개들에게 던져 버리고,
이집트에서 나온 것을 후회하며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3절이야말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도 마음가운데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발언이며, 가치관입니다. 성도들이 모든
사건에서 하나님을 배제하고, 하나님을 두지 않을 때 나올
수 있는 말과 결정은 모두 배교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주]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곧 내게 돌을 던지려 하나이다, 하매](4). 모세는
하나님께 백성들과 변론하거나 싸우는 대신 하나님께
달려갔습니다. 이는 우리 주님의 모습을 잘 예표합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에게
자신을 맡기시며](벧전2:23). 모세와 백성들의 차이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였습니다. 문제가
터질 때 그 사건 자체와 부딪히거나, 그 사람들과 부딪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란 말은 자신의 한계 상황,
통제할 수 없는 환경에서 주님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문제 해결 방법으로 늘 기도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성도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 앞으로 나아가서 문제를
아뢰고, 주님께 의뢰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다투고
불평하는 대신 이렇게 주께 부르짖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5-6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데리고 강을 치던 네 막대기를 네 손에 잡고 가라. 보라,
내가 거기서 호렙에 있는 반석 위에서 너를 마주보고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 반석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하시매 모세가 이스라엘의 장로들 눈앞에서
그대로 행하니라.](5-6). 주님은 모세의 부르짖음에 곧
바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내리듯이 위에서
비를 내리시거나 땅에서 지하수를 솟아나게 하지 않으시고
반석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반석은 작은 돌맹이나 작은 바윗
덩어리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반석은 거대한
암석입니다. 200만명이 먹을 수 있는 물이라면 거대한 호수
하나 정도의 물은 나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반석을
통해 물을 내신 것은 생명의 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장 자주 예표하는 ‘반석’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반석이라고 하셨는데,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0:1-4에, [또한 형제들아,
나는 /이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곧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모두 바다를 지나가며 모두가
구름과 바다 속에서 침례를 받아 모세에게 속하게 되고
모두가 같은 영적 음식을 먹으며 모두가 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느니라. 이는 그들이 자기들을 따라가던 영적
반석으로부터 마셨기 때문이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였느니라.](고전10:1~4). 반석은 하나님의
타이틀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은 구원의 반석(신32:15)이십니다.
[[주]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삼하22:2)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반석이란 의미는 항상 주님을 나타내는 타이틀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2에도 이르기를, [[주]와 같이 거룩한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외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기 때문이로다.](삼상2:2). 이 시간 우리는
반석에 대해서 잠깐 살펴 보겠습니다.
반석이란 말에서 처음
다가오는 의미는 흔들리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견고성,
튼튼함 그런 의미입니다. 반석은 옮겨지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7:25에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그 집이 무너지지 아니하리니 그 까닭은
그것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라.](마7:25)고 했는데
반석은 세상의 환란과 시련 속에서 무너지지 않는 견고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반석 위에
세워진 유일한 건축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교회를 이 반석 위에 세우셨습니다. 한
마디로 교회를 자신 위에 세우셨다는 말씀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반석의 또 하나의 의미는
지속성입니다. 반석은 천년 만년 갈 것 같습니다. 비나
바람이나 무엇에도 반석은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바위에
무엇인가 부딪히면 바위가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부딪힌
물건이 부서집니다. [누구든지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부서지겠고 누구에게든지 이 돌이 떨어지면 그를 갈아서
가루로 만들리라, 하시니](마21:44). 반석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지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폭탄이 거대한 반석을 부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천연 암반석을 만나면 어떤 폭격이라도 그것을
부수지 못합니다. 공사 현장에서 땅을 파 내려가다 거대한
지하 암반을 만나면 포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Mountain Rock
같은 것은 핵무기로도 부수지 못합니다. 요세미티 국립
공원에 있는 Half Dome은 4000 피트에 이르는 거대한
바위입니니다. El Captain은 3000 피트 높이의 세계에서 가장 큰
화강암 바위입니다. 주님은 이런 바위보다 더 단단하고 큰
반석이십니다. 반석은 땅 속에 묻혀 있는 것 같지만 때로는
저 하늘 높이 솟아 있습니다. 흔히 암벽 등반이란 것은
바위들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세계 곳곳에 있는 바위
산들을 보면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이런 반석들의 특징은
주님을 잘 예표합니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분이란 점에서 반석과 흡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반석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다이너마이트나 화약이
아니라 나무 막대기로 치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막대기에
반석은 갈라졌고 물이 터져나왔습니다. 이것은 바로 주님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자신의 몸에 있는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이
몸이 터지심으로 쏟아진 생명은 모든 사람들의 영적 기근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16장에서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왔는데,
이는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려온 사건을
예표합니다. 17장에서 반석이 터졌는데, 이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사건을 예표한 것입니다.
다시 5-6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데리고 강을 치던 네 막대기를 네 손에 잡고 가라. 보라,
내가 거기서 호렙에 있는 반석 위에서 너를 마주보고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 반석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하시매 모세가 이스라엘의 장로들 눈앞에서
그대로 행하니라.](5-6). 여기서 주목해서 읽어야 할
말씀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홍해를 가르던 막대기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강을 치던 네 막대기를 손에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나일 강이 피로 변한 사건을 말하는데
능력의 막대기란 의미가 아니라 저주와 심판의 막대기를
말한 것입니다. 반석은 물을 피로 만든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 막대기에 맞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 저주와 심판을 받으셨음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데리고 가게
하셨습니다. 아론과 미리암을 데리고 간 것이 아니라
장로들을 데리고 간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다 데리고 간 것입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행하게 하셨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역시 몇몇
백성들 앞에서, 아니면 제자들 앞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당대의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관원들이 보는 앞에서
죽으심으로써 이스라엘을 민족을 대표하는 국가적 죽음이란
사실을 예표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모세가 그
반석을 칠 때 하나님은 그 반석 위에 서 모세를 마주 보고 서
계셨습니다. 이는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은 주님이
맞으시고, 못 박히실 때 그 장면을 다 보고 계셨습니다.
모세를 향해 불평하고,
하나님을 불신하고 시험하던 이스라엘 회중들의 죄는 그
반석을 향해 내리치는 모세의 지팡이와 함께 모두
반석에게로 전가되었습니다. 나일 강을 피로 바꾼 모세의
손에 잡힌 막대기는 백성들을 향해 내리쳐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반석을 향해 내리 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백성들을 향해 내리쳤다면 백성들은
광야에서 전멸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은혜로우신 주님은
그들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반석을 치게 하셨고, 반석은
갈라지면서 물을 내었습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이 죽으시자
성령을 쏟아 부어주신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시편 105:41-42은
이 사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반석을
여신즉 물들이 솟아나 마른 땅에 강같이 흘렀으니 이는
그분께서 자신의 거룩한 약속과 자신의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시105:41-42).
하나님은 거룩한 약속과
자신의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사 죄인된 백성들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물을 주셨듯이 자신의 말씀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사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반석에서 나온 물을 마셨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살펴 볼
것은 물이 언제 터져나왔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경배할 때 물이 나온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찬양할 때 터진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불평할 때, 주의 종 모세를 향해 돌을
던지려 할 때 물이 나왔습니다. 그들의 불신은 극에 달해
주를 시험하고, ‘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아니 계신가?’
할 때였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가 그곳의 이름을
맛사와 므리바라 하였으니 그 까닭은 이스라엘 자손의 다툼
때문이요, 또한 그들이 [주]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아니 계신가? 하였기 때문이더라.](7).
심판이 집행되어야 할만한 그런 때에 주님은 물을
주셨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대로 주님의
풍성한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그들의
죄를 그냥 넘어가신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죄에 대한
심판을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치심으로 대신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풍성함으로 죄를 지어도
좋다는 것은 사탄의 논리이다.’(Wattson). 다만 우리가 지은
아무리 큰 죄도 주님의 은혜의 풍성함으로 해결받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광야의 백성들이 물을
마실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공로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돈을 낸 것도 아니며, 땀흘려 일한 것도 아니며,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드렸기 때문도 아니며, 주님의 명령에 잘
순종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갈증으로 죽지
않고, 영적 음료인 물을 마실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이집트의 나일 강 물을 피로 바꾸었던 심판의
막대기가 반석을 내리쳐셔 갈라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복음입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생명을 얻고, 말할 수 없는 풍성한 은혜를
얻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과 비슷한
한 가지 사건을 더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 무지한
신자들이 흔히 오해하는 기사입니다. 민수기 20:7-8을
보십시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막대기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집회를 함께 모으고 너희는
그들 앞에서 반석에게 말하라. 그리하면 그것이 자기 물을
내리니 너는 그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그들에게 주어
회중과 그들의 짐승으로 하여금 마시게 할지니라, 하시니](민20:7~8).
민수기의 사건은 출애굽의 본문과는 약 40년의 차이가 나는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은 동일한 반석이지만 너무나 다른
내용입니다. 출애굽기의 본문이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
수난 당하시는 모습이라면 민수기의 사건은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반석을 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막대기로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반석에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강을 내려쳤던 막대기였지만 민수기에서는
그냥 막대기입니다. 이 막대기는 아론의 막대기입니다.
아론은 제사장의 막대기를 가지고 있었고, 주님은 아론의
막대기에 싹이 나게 함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제사장임을
입증해 주셨습니다.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아니라
아론을 데리고 가게 하셨고, 백성들 앞에서 말하게 하신
것은 제사장적 사역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반석을 칠 때 아론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는 제사장 직분은 십자가 이후에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반석은 한번 친
것으로 영원히 끝이란 것입니다. 주님은 두 번 고난
당하시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9:26,28을 보십시오. [이는
그리하였더라면 그분께서 반드시 창세 이래로 자주 고난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세상 끝에 단 한 번 나타나사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셨음이니라.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단 한 번
/헌물로/ 드려지셨으며 또 자신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죄 /문제와
상관/없이 두번째 나타나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리라.](히9:26~28).
다시 물을 마시기
위해서는 반석이 갈라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한번
갈라진 반석, 즉 완성된 구속 사역을 믿음으로 주님께 말만
하면 됩니다. 만약 단지 주님께 말만 하면 되는 일을 자신이
뭔가를 더하겠다고 다시 반석을 내리치는 행위를 더 한다면
그는 분명 잘 못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 때 반복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으로 인해 성질을 내며 반석을
내리쳤는데, 이로 인해 꿈에도 소망하던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결국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순수한 복음에 다른 것을
더하거나 빼거나 변개시키는 행위는 우리로 하여금 유업의
상을 모두 빼앗아 버린다는 엄중한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반석’이신
주님을 배웠습니다. 우리의 불신과 죄악을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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