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19:1-9
요절: 출애굽기 19:5-6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처음 말씀하신대로 시내산에 이르게
하셨고, 시내산에서 그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과 두 번의 계약을 맺는데 한 가지는 오늘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이고, 또 하나는 모압 땅에서 맺은
언약입니다. 시내 산에서 맺은 오늘 언약이 바로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주신 언약은
이전에 조상들과 맺은 언약과는 전적으로 다른 언약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의 골격과 체계라 할 수 있는 언약에
대해서 잠깐 살펴 보겠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신 언약이 있고, 인간과 쌍방간에 맺은 언약이
있는데, 전자를 무조건적 언약(Unconditional Covenant)라 하고,
후자를 조건부 언약(Conditional Covenant) 또는 행위 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첫 번째 언약은
에덴의 언약이라고 부르는데(창2:16-17), 이는 조건부 언약 즉
행위언약이었습니다. 아담의 행위에 따라서 복과 저주가
결정됩니다. [주 하나님께서 그 남자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동산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은 네가 마음대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이는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을
것임이라, 하시니라.](창2:16-17). 우리의 행위에 따라
하나님이 결정을 하십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저주를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아담과
한번 더 언약을 맺으셨는데, 이번에는 무조건적
언약이었습니다. 그 언약은 다름 아닌 여자의 씨를 통한
구속이었습니다.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여자의 씨 사이에 적대감(敵對感)을 두리니 여자의 씨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이 일은 아담의 의지나 행동에
근거한 언약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세 번째 언약은 노아와 맺은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씨와 언약을 맺으시기 위해 그들을
모두 방주 안으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言約)을 세우리니 너는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올지니라.](창6:18).
창세기 9장은 온통 언약의 이야기입니다. 내용은 홍수로
육체를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내용입니다(창9:9,11, 12,15).
주님은 언약의 증표로 무지개를 주셨습니다(창9:13,16,17). 이
언약 역시 무조건적 언약입니다. 노아나 사람들의 행위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네 번째 하나님의 언약을 맺은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일방적으로
부르시고, 그를 복주셨고, 많은 약속을 주셨습니다(창12:1-3,
13:14-17,15:18, 22:16-18). 땅에 대한 약속이 주어졌고, 씨에 대한
약속이 주어졌고, 왕국에 대한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 역시 무조건적 언약이었습니다.
주님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것 역시 이 언약에
기초한 것입니다. 주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도하여 내시고, 약속의
땅을 주신 것입니다. 언약의 증표는 할례였습니다. 이제 430년의
세월이 흘러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새롭게 언약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시기
직전의 모습입니다. 이 언약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맺은
언약과는 완전히 다른 언약이었습니다. [[주] 우리
하나님께서 호렙에서 우리와 언약을 맺으셨나니 이 언약은 [주]께서
우리 조상들과 맺으신 것이 아니요, 이 날 여기에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맺으신 것이라.](신5:2-3). 언약의 증표로는
돌판이 주어졌고, 그들은 매주 안식일을 지켰습니다(출31:16).
출애굽기 24:7을 보십시오. [언약의 책을 가져다가 백성이
듣는 데서 읽으매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행하고 순종하리이다, 하니](출24:7).
백성들은 율법을 행하고 순종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이로써
언약은 체결되었습니다. 이 언약은 철저히 행위
언약이었습니다. 후에 모압 땅에서 한번 더 언약을 맺었는데
역시 조건부 언약, 행위 언약이었습니다. [[주]께서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맺으신 언약 외에 그분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사 모압 땅에서 또 그들과 맺으신 언약의
말씀들이 이러하니라.](신29:1). 축복과 저주의 언약입니다.
이 언약의 체결은 구약을 관통하며, 침례인 요한까지 효력이
지속됩니다(마11:13). 그들은 언약의 말씀들을 지키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습니다. -다윗의 언약, 새
상속 언약, 새 언약은 후에 따로 다루겠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석 달째 되던 때 바로 그 날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렀으니](1). 이제 출애굽한지 3개월이
지나 일차 목적지인 시내 산에 도착했습니다. 주님께
희생제를 드리러 나간다고 말한 장소가 바로 이곳입니다.
시내(Sinai)란 지명은 ‘가시나무 숲’이란 뜻이며, 시나이
반도에 있는 있습니다. 바란(Paran)광야 남쪽이며, 아카바만과
수에즈만 사이에 위치하며 거대한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성지 순례로 자주 가는 그런 곳입니다. 이
산은 모세가 불타는 떨기 나무에서 주의 음성을 들었고,
십계명을 받았던 곳이며, 엘리야가 도망쳐서 달려온 곳이며,
주님이 시험을 받으신 산이며, 후에 사도 바울이 다녀갔던
유서 깊은 곳입니다. 주님이 장차 재림하실 때 역시 이곳을
거치실 것입니다. 모세는 주님의 재림의 여정이 곧 출애굽의
여정임을 예언했습니다. [그가 이르되, [주]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오시며 바란
산에서부터 빛을 내시고 수만(數萬) 성도와 함께 오셨으니
그분의 오른손에서 그들을 위하여 불 같은 율법이 나왔도다.](신33:2)라고
했습니다. 시내산은 호렙산과 같은 지명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들이 르비딤에서 떠나 시내 사막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이스라엘이 산 앞에 장막을 쳤음이더라.](2).
르비딤은 이미 앞에서 다룬 대로 물이 없어 불평을 하다
반석에서 나는 물을 마신 곳입니다. 이제 그들이 주의 산, 즉
시내 산 앞에서 장막을 쳤습니다. 모세로서는 출애굽의 여정
중에서 가장 감개무량한 장면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3:12에서
[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하리라. 네가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낸 뒤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그 일이 내가 너를 보낸 증표(證票)가
되리라.](출3:12)란 말씀을 들었고, 드디어 그 역사의
현장에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이곳까지 오는 길은 너무나
멀고도 험한 길이었습니다. 파라오는 끝까지 저항을 했고,
그들을 추격했습니다. 홍해를 건넌 후에도 어려움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약속대로 이들을 이곳까지
인도하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주]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게 말하고 이스라엘의 자손에게
고하라.](3).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고하라 준 말씀은 먼저
구속하신 하나님, 구원자 하나님에 관한 자기 증거였습니다.
모세가 이 산에 오르는 장면은 19:9, 20, 20:1, 24:13, 32:31, 34:4에
계속해서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곱의 집’, ‘이스라엘의
자손’이란 말에 유념해야 합니다. 이 단어는 결코 오늘날
교회에 적용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들과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으셨는데, 이 언약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맺은 언약과 다른 언약이었습니다.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주] 우리 하나님께서
호렙에서 우리와 언약을 맺으셨나니 이 언약은 [주]께서
우리 조상들과 맺으신 것이 아니요, 이 날 여기에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맺으신 것이라.](신5:2-3)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집트 사람들에게 행한 것과 또 내가 독수리 날개에
너희를 실어 내게로 인도한 것을 너희가 보았느니라.](4).
출애굽 1세대는 하나님의 역사를 눈으로 직접 목격한
세대였습니다. 역사상 어느 세대도 경험해 보지 못한 놀라운
연속적인 이적들을 보고 들었으며, 역사의 현장에 동참한
그런 세대였습니다. 이집트에서 나온 극적인 과정을 일컬어
주님은 독수리 날개에 너희를 실어 내게로 인도하였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분명히 광야를 3개월 동안 걸어서 이곳에
왔는데, 주님은 왜 독수리 날개에 실어서 인도했다고 하신
것입니까? 독수리는 광야에서 무엇을 물어다 세상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먹이를 낚아채어 광야로 날아갑니다.
홍해를 건너온 것은 분명히 날개가 달린 독수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전갈과 독사가 우글거리는
광야를 3개월 동안 무사히 여행했다는 것 역시 날개 달린
독수리가 나를 들어 옮기지 않으면 도무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들의 지난 3개월의 여정은 지나고 나면 하늘의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어 자기 둥지로 오듯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낚아채어 시내 산에 도착했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32:11, [독수리가 자기 둥지를 휘저으며 자기 새끼
위에 너풀거리고 자기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받으며 자기
날개 위에 그들을 업는 것같이 [주]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그분과 함께한 다른 이방 신이 없었도다.](신32:11-12).
이 일은 후에 계시록에 한번 더 나옵니다. 그 때는 문자
그대로 독수리의 두 날개로 날 것입니다.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았으니 이것은 그녀로 하여금 광야 곧
자기 처소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얼굴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게 하려 함이라.](계12:14). 주님은
이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는데(마24:20), 이는 적그리스도에게 핍박을 받는
이스라엘이 비행기를 타고 페트라 지역으로 날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너희가 참으로 내 목소리에 순종하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내게 모든 백성들보다 뛰어난 특별한 보배가 되리니
이는 온 땅이 내 것이기 때문이라.](5). 백성들은 모두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고 언약을 지킬 것을 맹세했습니다.
여기서 언약이란 십계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은 언약의 책으로 주시고, 따로 돌판에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언약의 책을 가져다가 백성이 듣는 데서
읽으매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행하고 순종하리이다, 하니](출24:7). 이 언약은 조건부
행위 언약이었습니다. 순종하고 지키면 주어지는 복은 첫째,
이스라엘은 모든 백성들보다 뛰어난 특별한 보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한(peculiar)는 단지 귀한, 고급스런 의미가
아니라 독특한 보석이란 의미입니다. 누가 봐도 좀 특이하고,
어떤 점에서는 약간 이상한 보석이란 뜻입니다. 시편 135:4, [이는
[주]께서 자신을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신의 특별한
보배로 택하셨음이로다.](시135:4). 이는 세상의 모든
민족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멀리서
보아도 단번에 구분이 가는 민족, 역사나 세계사를 공부해도
확연히 구분이 가는 민족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고,
언약을 지키지 않았을 때 모든 백성들보다 뛰어나기는
고사하고 가장 비천한 민족, 포로된 민족, 흩어진 민족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세계 일류 강대국이 아니라 3류
국가도 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리스도인들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주심은 모든 불법으로부터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정결하게 하사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 곧 자신을 위한 특별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 저와 여러분은 진주로 비유되는
특별한 백성입니다. 세상과 확연히 구분이 되는 그런
백성입니다. 일요일이면 놀러 가는 대신 교회로 갑니다.
유행가를 부르는 대신 찬송가를 부릅니다. 돈을 벌어서
자기를 위해 쓰지 않고 하나님과 교회, 이웃을 위해 사용해
버립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영원한 하늘에 소망을
둡니다. 의를 위해 고난을 받고, 손해를 보는 것을 감수할
뿐만 아니라 기뻐합니다. 주님은 바로 이것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고,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함
받은 세대(世代)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백성이니 이것은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께 대한 찬양을
너희가 보여 주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이 말씀은
우리의 역할이 바로 뭔가를 보여 주게 하려는데 있다고
합니다. 보배는 찬란한 빛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에 대한 찬양을 보여 주는 그런 빛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지 않을 때
세상의 빛과 소금은 고사하고 세상의 골치덩어리, 문제
덩어리가 되고 맙니다.
6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는 내게 제사장 왕국이 되며 거룩한 민족이 되리라.
너는 이 말들을 이스라엘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6).
제사장 왕국이란 말은 온 민족들에게 하나님을 알려 주고,
그분의 거룩한 명령과 말씀을 가르쳐 주는 그런 국가란
뜻입니다. 이들은 신앙이 단지 종교가 아니라 정치 체제였고,
신정일치 국가가 되었습니다. 제사장 왕국의 참 뜻은
하나님과 이방 민족 사이의 중재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부름받은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민족들마다 수많은 신들이 존재하지만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그분만이
홀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이란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영광을 이교도들 가운데, 그분의 놀라운 일들을
모든 민족들 가운데 밝히 알릴지어다.](대상16:24). 이것이
이스라엘이 부름받은 목적이며, 제사장 왕국으로서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역사는 이들이 주변 국가에
하나님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이 주변 국가의
신들을 따라 가 버렸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민족이 아니라 음란하고 더러운 민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주님의 목소리에 순종하고, 언약을
지킬 때 이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저주와 재앙이 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역사상 단 한
차례도 제사장 왕국, 거룩한 민족으로서 역할을 수행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천년 왕국 때 그들은 제사장
왕국으로서 역할을 다할 것입니다. 만약 이방인들이
유대인으로부터 성경을 배우지 않으면 그들은 철저히
멸망당하고, 뽑힐 것입니다. 예레미야 12:15-16절은
이방인들에게 주신 회복의 소망입니다. [그들을 뽑아 낸
뒤에 내가 돌이켜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각 사람을 그의
유산으로, 각 사람을 그의 땅으로 다시 인도하리니 그들이
내 백성의 길들을 부지런히 배워, [주]께서 살아 계신다,
하면서 내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자기들이 내 백성을 가르쳐
바알을 두고 맹세하게 한 것같이 하면 내 백성의 한가운데서
세워지려니와](15-16). 주님은 심판받은 백성들이 회개하고
부지런히 성경을 배우고,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신앙을
가지면 세움을 받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바알을 가르쳤듯이 이제 반대로
이스라엘로부터 주님을 배우고 맹세하면 됩니다. [만일
순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 민족을 철저히 뽑아내고
멸하리라. [주]가 말하노라.](렘12:17). 이방 민족들은
이스라엘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철저히 망할 것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잠깐이 전부가 아닙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날에
모든 역사는 결산됩니다. [이는 너를 섬기려 하지
아니하는 민족과 왕국은 멸망할 것임이니 참으로 그런
민족들은 완전히 피폐하게 되리라.](사60:12). 주님이
오시면 이스라엘은 호렙 산에서 얻은 약속들에 대한 완전한
성취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성도들을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며, 특별한 백성입니다.
이는 호렙산의 언약과 달리 우리의 행위에 근거한 약속이
아닙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에 근거한 새 상속
언약(New Testament)에 따른 것입니다.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면
‘제사장이 되리라’고 아니라 예수를 믿으면 이미 ‘제사장이
되었다’입니다. 이는 큰 차이입니다. [너희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도다.](벧전2:5). 성경은 되리라가 아니라 ‘되었도다’라고
선포합니다.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함 받은 세대(世代)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백성이니...](벧전2:9a). 이 말씀 역시
이미 단정적인 사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거룩한 민족(holy nation)이 없습니다. 기독교 국가는 있어도
거룩한 국가는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의
왕국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민족입니다. [하나님 곧 자신의
아버지를 위하여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분께
영광과 통치가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1:6).
여기서도 ‘제사장으로 삼을 것이다’가 아니라 ‘삼으신
그분’입니다. 한 구절 더 보겠습니다. [또 우리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셨음이니 우리가
땅에서 통치하리로다, 하더라.](계5:10). 삼으셨음이니(과거형)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입니다. 옛
언약과의 확연한 차이가 보이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모두 영적
제사장의 직분과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분이 참 하나님이시며, 이 땅을
심판하러 오실 재림의 주님이란 사실을 증거 해야 합니다.
이름뿐인 명목상의 제사장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일하는
제사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주님께 드리고, 영적인 희생물을 주님께 드리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주님께 드리는 그런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7-8절입니다. [이에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주]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들 앞에 내놓으매 온 백성이
함께 응답하여 이르되, [주]께서 말씀하신 것을 다 우리가
행하리이다, 하니 모세가 백성의 말을 [주]께 전하매](7-8).
모세는 중보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 앞에 내어놓고,
다시 백성들의 말을 [주]께 전했습니다. 백성들은 참으로
자신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조금만 자신을 성찰했더라도 감히 ‘주께서 말씀하신 것을
다 우리가 행하리이다’란 말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말한 것도 다 행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 행한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 그대로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서 확실하게 ‘다 행하리이다. 순종하리이다’고
외쳤습니다. [이에 모세가 와서 [주]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법도를 백성에게 고하매 온 백성이 한 목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주]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행하리이다, 하더라.](출24:3), [언약의 책을
가져다가 백성이 듣는 데서 읽으매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행하고 순종하리이다, 하니](출24:7).
특별한 보배, 제사장 왕국, 거룩한 민족이 되는 길은 차라리
맨 몸으로 광야를 통과하는 일보다 어려우며, 맨 손으로
홍해를 건너는 일보다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누구도 주님의
율법을 다 지키고, 행하고,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차라리 ‘주여, 우리가 연약하오니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은혜를 주옵소서! 주의 법은 감당할 수 없나이다’라고 해야
합니다.
그들 안에는 성령이
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거듭나지도 않았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한 목소리로 응답하며 "[주]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행하리이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들은
육신은 결코 율법을 다 행할 수 없는 무익하고 연약한
것이란 것을 아는데 약 1,50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육신은
무익하다! 육신은 연약하다! 육신은 율법을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때 그들은 주님의 은혜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는 탄식이 나올 때 자아를
포기하고 주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가 죄인이란 사실을 알고, 인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요구를 채울 수 없고, 만족시킬 수
없는 존재란 사실을 자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 선생이었습니다. 저는
오늘날 성도들이 호렙산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스스로
주님의 뜻을 다 행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분이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 한 가지도 행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 성령을 충만케 하셔서 행할 힘을 주옵소서.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하지 않고서는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시옵소서!” 하며 겸손하게
무릎 꿇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노라. 다만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노라”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참된 신앙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아가 강한 성도들은
무엇이나 자신의 힘과 능력, 지혜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한 가지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자아를 죽음에
넘겨주고, 성령의 능력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짙은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한 것은 백성으로 하여금 내가 너와 말할 때에 듣게 하려
함이며 또한 영원히 너를 믿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니
모세가 백성의 말을 [주]께 고하였더라.](9). 주님은
모세와 대화를 하시면서 모세의 영적 권위를 세워
주셨습니다. 백성들은 그 장면을 보고 이후로 모세에게
대적하거나 불평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모든 권위는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만약 모세가 스스로 권위를 세우려고
했다면 그는 독재자의 이미지만 남고 말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말씀이 약한
목회자들 가운데 유난히 신적 권위, 목회자의 권위, 강단의
권위를 외치며 성도들에게 순종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제대로 증거하고, 가르치고, 양들을 먹이면 따로
권위를 외치지 않아도 하나님이 영적 권위를 세워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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