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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로마 캐톨릭이 이단임을 바르게 조명해 주는 유일한 성경
  




  로마 캐톨릭이 이단임을 바르게 조명해 주는 유일한 성경



저는 오늘 독특한 제목으로 킹제임스 성경의 우수성을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유일성을 무시하고 다양성을 인정해야하고, 절대적인
  기준보다 상대적인 기준으로 살아야 하는 것처럼 강요받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믿음을 공격하거나 내가 가진 종교 외에 다른 종교를 비판하는
  것은 매우 악하고 해로운 행위처럼 생각됩니다. 특히 기독교의 배타성은 모든 불신자들에게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며 유일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많은 크리스챤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와 캐톨릭의 차이를 전혀 모른 채 살아가거나,
  같은 것이라고 믿는 것에 대해 슬픔을 금할 수 없습니다. 마틴 루터는 종교를 개혁한 것이 아니라 로마 캐톨릭에서 분리되어 나온 것입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모두 분리주의자들이지 개혁가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종교 통합 운동의 바람이 불면서 천주교는 개신교의
  큰집이니, 원뿌리니 하는 뜻모를 소리를 해대는 사람들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감정이나 비교 종교학으로서의 캐톨릭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그들을 조명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캐톨릭은 수없이 많은 구절들을 자신들의 교리에 맞춰
  성경을 변개시켰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불태웠고,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여 고문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들의 몸을
  화형에 처하곤 했습니다.



오늘은 성경을 통해 캐톨릭의 치명적 오류를 살펴 보고 그들이 왜 이런 구절들을 변개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들은 모두 캐톨릭의
  뿌리를 흔드는 구절들이며, 오직 킹제임스 성경에서만 조명받을 수 있는 귀한 말씀들입니다.



첫째, 사도행전 8:37을 삭제함으로 유아 세례를 행하는 자신들의 죄악을 숨겼습니다. 사도행전 8:37은 침례의 요건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임을 분명히 말해 주는 구절입니다. 8:36에서 37절을 제거하고 38절을 바로 읽게 되면 물 침례는 아무나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을 펴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36...내시가 이르되, 보라, 여기에 물이 있으니 내가 침례를 받는데 무슨 거리낌이 있으리요?
  하매 37절. 삭제, 38절. 이에 명령하여 병거를 멈추게 하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속으로 내려가 빌립이 내시에게 침례를 주니라."
  37절을 삭제하면 침례를 원하면 누구나 바로 침례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침례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도 말씀도 아닙니다. 침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분명한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그들이 삭제한 8:37입니다. "빌립이 이르되, 만일 그대가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받을 수 있느니라, 하니 내시가 대답하여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노라, 하고" 바른
  신앙 고백의 전제없는 침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캐톨릭은 유아 세례를 그들의 전통으로 가르쳐 왔으며, 구원의 필수 조건인양 가르치고
  있습니다. 침례를 통한 중생 교리는 그들의 확고한 교리입니다. 그러나, 유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장로 교회에서 캐톨릭을 따라 유아 세례를 베푸는 것은 이들이 이미 음녀의 누룩에 깊이 취했음을 보여 주는 예입니다.
  성경은 캐톨릭의 전통과 교리가 하나님의 말씀과는 위배되는 죄악임을 바로 보여 줍니다. 그러나, 모든 현대 역본들은 이 구절을 삭제함으로써
  캐톨릭의 지휘 아래서 연주하는 나팔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직 킹제임스 성경만이 이들의 죄악을 폭로하며, 그들의 실체를 바르게 조명해 주고
  있습니다.



둘째, 고린도전서 10:28과 사무엘하 5:21을 보겠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상이란 말을 삭제함으로 자신들의 죄악을 숨겼습니다. "그러나
  누가 너희에게 이것은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이라 말하거든 그것을 알게 한 사람과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이기 때문이라."(고전10:28, KJV). 우리는 모든 것을 먹을 수 있지만 우상들에게 바친 것이란 말을 해 주면
  먹지 않는 것이 그것을 말해 준 형제의 양심과 믿음에 좋습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캐톨릭은 수많은 형상들과 성상들, 성화들을 교회 안팎으로
  가득 채워 놓았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이교도의 풍습을 따른 것입니다. 그들은 우상이란 말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개역, 고전10:28). 성경에서 우상이란 말을 빼는 것보다
  성당에 있는 우상들을 빼 버리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입니다. 사무엘하 5:21에는 다윗은 형상들을 불태워 버립니다. "거기서
  그들이 자기들의 형상을 버렸으므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것들을 불태우니라."(삼하5:21,KJV). 형상들은 파괴하고 태워 없애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나, 로마 캐톨릭이 사용하는 공동 번역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보십시오. "다윗은 불레셋군이 그 곳에 버리고 간
  우상들을 부하들과 함께 말끔히 치웠다."(삼하5:21, 공동번역). 개역 성경도 이들의 뒤를 따라 갔습니다. 다윗과 부하들이 형상을
  모두 불태웠다면 우리는 교회나 가정에 어떤 형상도 두면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이 불태워 없애야 정상입니다. 기도하는 마리아 상이나,
  아기 예수상이나 예수의 초상화나 십자가의 형상들은 모두 필요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다 태워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학교 졸업식때 한
  다발의 선물을 받았는데, 대부분이 예수의 형상이 새겨지거나 그려진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알게 모르게 캐톨릭의 가르침에
  깊이 침투당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은 십계명이 담겨 있습니다. 그 중에 제 2계명이 바로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20:4,5a). 주님의 이 말씀에 따르면 천주교의 성당 내에
  있는 많은 동상, 석상, 조각상들은 모두 주님의 계명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죄악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말씀에 순종하는 대신 성경을 변개시켜
  버렸습니다. 그들이 쓰는 공동 번역 성경을 보면,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공동번역, 출20:4,5).
  이들은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라...어떤 모습이든지 말들지 말라"는 지엄한 명령을 초개같이 버렸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그들의 종교가 성경을 바탕으로 하는 기독교가 아니라 인간의 종교에 성경을 이용해 먹는 이교도임을 쉽게 간파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을 바꾸어 버린 자들이 무엇을 두려워 하겠습니까"?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시작이 없으면
  중간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캐톨릭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지혜가 전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셋째, 누가복음 1:28에 마리아에 관련된 것입니다. 마리아는 보통 여인과 다름없는 여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인이 아니며, 하늘의
  여왕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늘의 여왕은 이교도들의 신이며, 우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보통 여인들과 같이 한 남편의 아내이며
  여러 아이의 어머니며, 죄 가운데 태어난 그런 여자였습니다. 다만 주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낳는 도구가 되었을 뿐입니다. "천사가
  들어가 그녀에게 이르러 말하되, 크게 은총을 입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니 네가 여자들 가운데 복이 있도다,(Blessed
  art thou among women) 하니"(눅1:28, KJV). 가브리엘은 마리아가 여자들 가운데 복을 받았다고 말했지,
  여자들 보다 뛰어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among women이지 above women이 아닙니다. 마리아를 숭배하고, 신격화하는 성모
  교회인 캐톨릭은 이 구절로 인해 큰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즉시 이 부분을 완전히 삭제해 버렸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정상적인
  이성을 가진 건전한 신앙인이 보존된 킹제임스 성경을 읽고 믿는다면 로마 캐톨릭이 참 종교인지 아닌지는 금방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 이 부분을
  그들의 성경인 공동번역으로 보면, "천사는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 가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하고 인사하였다."(눅1:28)고 말하고 끝입니다. 뒷 부분이 없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그토록 캐톨릭
  교회에게 미움을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개역 성경이나 NIV를 비롯한 많은 현대 역본들이 제공해 주지 못하는 캐토릭의
  실체를 킹제임스 성경으로 정확하게 조명받고 있습니다.



넷째, 요한복음 1:42의 게바는 반석이 아님을 바르게 조명해 주는 유일한 성경입니다. 이는 로마 캐톨릭에서 베드로가 반석이라고 주장하며,
  자신들만이 전 우주적으로 유일한 교회란 주장을 일시에 무너뜨립니다. 로마 캐톨릭은 베드로를 반석이라고 주장하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Peter라는 이름이 주는 상징성 때문입니다. 페테르란 이방신의 이름입니다. 초기 로마는 이교도와 기독교의 융합을 시도하며 국가 종교를
  만들 때, 자연히 그 이름이 가장 유사한 베드로를 반석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시몬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오매 예수님께서 그를 바라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나의 아들 시몬인즉 앞으로 게바라 하리라. 게바는 번역하면
  돌(A stone)이더라."(요1:42, KJV). The Stone이 아니라 a stone이란 점에 유념하십시오. 게바는 돌이란
  뜻이지 캐톨릭의 주장처럼 반석(Rock)이란 뜻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구절을 변개하여 자기들의 교리에 맞추었습니다.
  공동 번역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시몬을 예수께 데리고 가자 예수께서 시몬을 눈여겨 보시며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 아니냐? 앞으로는 너를 게파라 부르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게파는 베드로 곧 바위라는 뜻이다.)"(공동번역,
  요1:42). 이는 완전히 거짓말입니다. 게바는 돌이란 뜻이지 바위란 뜻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영적인 집으로 지어져 가는 돌입니다(벧전
  2:5). 베드로는 저와 여러분과 다를 바 없는 동일한 돌인 것입니다. 캐톨릭의 주장대로 베드로가 반석이라면 그들은 잘못된 반석이요, 그들의
  교회는 잘못된 교회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유일한 반석이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0:4에 말하기를,
  "...그 반석은 그리스도이셨느니라."고 못박고 있습니다. NIV를 비롯한 현대 역본들은 절묘하게 말씀을 변개시켜 놓았습니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개역,
  NIV, 요1:42). 게바를 번역하면 베드로란 것은 자가 당착입니다. 왜냐하면 게바와 베드로는 동일한 고유 명사이므로 동일한 고유명사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양을 번역하면 한성이라."고 했다면 그것은 번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렇게 불리는
  다른 이름을 갖다 댄 것 뿐입니다. 이들은 독자들의 눈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유는 게바를 베드로라고 함으로써 마태복음 16:18절에
  끼워 맞추기 위함입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16:18). 그러나,
  주님이 이 반석이라고 한 것은 베드로가 16절에서 신앙을 고백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지 베드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실을 조명해 주는 유일한 성경이 바로 킹제임스 성경입니다.



다섯째, 전통에 관련된 말씀입니다. 로마 캐톨릭은 전통을 성경과 동등한 권위, 아니 더 위에 둡니다. 그들은 늘 전통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런 전통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인간들의 전통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화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1:8에서 베드로는 전통의
  허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대속을 받은 것은 금이나
  은같이 썩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벧전1:18). 로마 캐톨릭은 자신들의 반석이라고 주장하는 베드로가 전통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견디지 못해 이 구절을 삭제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비성경적인 전통을 성도들에게 계속 지키게 함으로써 말씀이 아닌 자신들의 종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캐톨릭의 성서인 공동 번역을 보면,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 받은 헛된 생활에서 해방되었읍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것은 은이나 금 따위의 없어질 물건으로 값을 치르고 된 일이 아니라"(공동번역, 벧전1:18). 개역 성경이나 모든
  현대 역본들에도 "전통으로 물려받은"이란 말을 삭제했습니다. 이는 전통이란 이름으로 모든 것을 무마하고 정당화하는 자신들의
  죄악을 가리기 위함입니다. 전통이 비성경적일 때는 여지없이 없애 버리고, 성경에 순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경과 전통이란 두 가지에 동일한
  권위를 두는 캐톨릭의 죄악을 킹제임스 성경만이 바르게 조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섯째, 누가복음 9:54-56입니다. 이 말씀은 종교 전쟁이나 종교적 이유로 사람을 고문하거나 처형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잘 보여 주는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로마 캐톨릭은 1700여년 동안이나 자신들의 교리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고문하고, 투옥하고, 화형시켰습니다. 성경을
  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9:51절부터 살펴 보면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를 겸심하시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에 들리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눅9:53). 54절을 보십시오. 사마리아에 대한 민족
  감정이 있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이들을 멸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주여, 엘리야가 행한 것 같이 우리도 불에게 명령하여 하늘에서
  내려와 이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거늘, 55. 그분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56. 이는 사람의 아들이 사람들의 생명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음이라, 하시고 함꼐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KJV,눅9:54-56).
  주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영접하지 않고, 배척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벌주시거나, 멸하시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셨지 멸하러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캐톨릭은 언제나 자신들의 교회와 교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찾아 마녀로
  정죄한 뒤 죽여 버렸습니다.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되어 신부들을 보낸 뒤에는 반드시 함선에 대포를 싣고 군대를 보내 전쟁을 일으켰고, 양민을
  학살했습니다. 이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을 거부한 사마리아인들을 멸하고 싶어 했던 것처럼 자신들을 거부하는 누구라도 멸하고 싶어합니다.
  주님은 그런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로마 캐톨릭을 꾸짖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야고보와 요한의 살인 본능에 "너희가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 알지 못하는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요, 살인자였던 마귀의 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정당한 이유를 제시하려는 듯,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구약의 엘리야를 끌어 들였습니다. "엘리야가
  행한 것 같이"란 말은 종교적 이유로 사람을 죽이고 싶을 때 쓰는 말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배교한 이스라엘 앞에서 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입증하기 위해 불을 내린 것이지 이스라엘 사람들을 멸하기 위해서 불을 내린 것이 아닙니다. 공동 번역 성서는 물론이고 NIV를
  비롯한 새 역본들이 이 구절들을 마구 삭제한 것은 자신들의 죄악을 숨기고, 가리려는 의도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킹제임스 성경이 복음을 거절한 사람들을 죽이거나 고문하거나, 박해하는 것을 잘못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자료에
  따르면 로마 캐톨릭은 주후 1100년에서 1800년까지 6800만명을 고문하고, 죽이고, 화형에 처했습니다. 1550-1557년의 8년
  동안 메리 여왕이 통치하던 영국에서는 일시적으로 로마 캐톨릭으로 돌아가 무려 300명의 개신교도들을 화형에 처해 죽였습니다. 킹제임스 성경만이
  이들의 죄악이 얼마나 악하고 마귀적인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 유일한 성경입니다.



일곱 번째, 성인들이냐? 순교자들이냐? 요한계시록 17:6을 보십시오.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의 순교자들의
  피에 취하였으므로..." 신약 교회는 스데반을 필두로 예수의 순교자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순교자들은 이교도들에 의해서
  양산되기 보다 로마 캐톨릭에 의해서 양산되었습니다. 캐톨릭은 오리겐이나 어거스틴, 제롬과 같은 사람을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려놓고 숭배하지만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다 성인(saint)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자들의 피의 발자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NIV를
  비롯한 새 역본들은 이 구절에서 순교자란 단어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는 그들이 순교자 보다는 성인을 더 숭앙하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개역,
  요17:6). 킹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모든 역본들에는 순교자란 말이 사라졌습니다.



여덟 번째,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을 주장하는 로카 캐톨릭이 거짓임을 밝혀 주는 유일한 성경입니다. 마태복음 1:25을 보십시오. "그녀의
  맏아들을 낳기까지 그녀를 알지 아니하다가 마침내 낳으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1:25). 이 구절은 마리아와 요셉이
  동침을 안 한 기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까지란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 이후에는 여러 아들과 딸들을 낳아 길렀습니다. 맏 아들이란 말은
  이미 다른 아들을 전제로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을 가르치고, 그녀를 신격화하는 캐톨릭으로서는 이 구절을 어떻게 하든지
  손봐야 할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맏 (firstborn)]이란 단어를 빼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외에는 어떤 아들도 둔 적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개역,마1:25). 마태복음 13:55,56절,
  마가복음 6:3에는 다른 네 명의 형제 이름이 나옵니다. 야고보, 요세, 시몬, 유다입니다. 킹제임스 성경만이 그들의 주장이 억지요, 거짓이란
  사실을 쉽고도 평범한 어휘로 선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홉 번째, 캐톨릭의 가장 치명적인 죄악 가운데 하나를 잘 보여 주는 구절은 마태복음 23:14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이여! 이는 너희가 과부들의 집을 삼키고 겉치레로 길게 기도하기 때문이라. 그런즉 너희가 더 큰 정죄를 받으리라."(KJV,
  마23:14). 일반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오래 삽니다. 특히 중세와 근세에는 전쟁이 많았고, 남자들은 전쟁에서 많이 죽었습니다. 자연히
  과부들이 많았습니다. 캐톨릭은 엄격히 이혼과 재혼을 금지하였고, 이들의 재산을 약탈했습니다. 방법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연옥에 가 있는 너의 남편을 천국으로 인도할 것이다."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캐톨릭 교인들은
  연옥 교리를 믿으며,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효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제들은 과부들에게 접근해 자신들이 대신 오랫동안 기도 해 주면
  더 빨리 연옥에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기부금이나 헌금을 요구합니다. 일반적으로 평범한 과부들은 먹고 살만큼의 돈외에 헌금이나
  기부할 만큼의 재산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럴 때 사제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집을 팔아서 헌금해라. 너의 남편이 연옥에서
  빨리 나오도록 내가 너를 대신해 기도해 주마.> 캐톨릭에 독실한 과부라면 금방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로마 캐톨릭은
  부를 축적해 갔으며, 사제들은 이 돈을 교황청에 갖다 바침으로 좋은 교구로 배치받거나, 계급이 올라 갔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의 죄악을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밝혀 놓았기에 이 구절들을 모조리 삭제해 버렸습니다. 개역 성경, NIV를 비롯한 새 역본들은 하나같이 이 구절들을
  삭제함으로써 캐톨릭의 죄악을 가려 주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성경 본문을 통해 캐톨릭의 오류와 죄악을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는 바른 말씀을 통해 늘 깨어 있도록 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