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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교만을 부추기는 성경들


 



마지막 시대의 타락상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에게서 겸손을 찾아 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 점에 대해서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2은 경고하기를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교만해 진다고 말합니다. 킹제임스 성경과 다른 모든 현대 역본들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교만을 어떻게 보고 계신지를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교만이란 한 단어만을 찾아서 비교해 보아도 킹제임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NIV를 비롯한 현대 역본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란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첨을 먹고 삽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칭찬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속이는 모순 속에 살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0:12,
디모데후서3:13을 보게습니다. 2Co 10:12 ¶ For we dare not make ourselves of the number,
or compare ourselves with some that commend themselves: but they measuring themselves
by themselves, and comparing themselves among themselves, are not wise.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칭찬하고, 추천하고, 높여 줍니다. 이런 자들은 사람들 앞에서 극도의 칭찬을 합니다. 결국 자신이 칭찬받기 위한 것입니다.
반대로 그들은 돌아서면 욕을 하고 속입니다. 2Ti 3:13 But evil men and seducers shall wax worse
and worse, deceiving, and being deceived. 이런 가운데서 점점 교만이 쌓여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표현하는데, 자기를 홍보하고 알리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있지 않는 것, 자신의 능력 밖의 일까지 일단
말해 놓고 보자는 식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모두 아첨의 대가들입니다. 지식을 팔아먹는 말쟁이들도 아첨의 대가들입니다. 강단에 선 목사들과 종교인들은 모두 아첨의
대가들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첨을 듣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자신들의 귀를 긁어 줄
선생들을 많이 둘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고 대신 아첨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그런 것을 가르쳐
줄 선생들, 설교자들, 부흥사들을 찾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썩고 부패했다고 욕을 합니다. 부패한 사회의 저 밑바닥에는 언제나 부패한 교회가
있고, 부패한 교회의 맨 중심에는 허물어진 강단이 있으며, 무능력한 강단에는 의의 사역자를 가장한 악한 설교자들과 선생들이 있습니다. 그
밑에는 그것을 즐겨 듣는 짐승같은 신자들이 앉아 있게 마련입니다. 2Ti 4:3 For the time will come when they
will not endure sound doctrine; but after their own lusts shall they heap to
themselves teachers, having itching ears; 그들의 귀를 긁어주는 유창하고 달콤한 말, 언변은 사람들의 마음을
썩게 만듭니다. 다니엘은 마지막 때에 마귀가 성도들을 어떻게 부패시키는가 분명하게 경고해 주었습니다. "그가 또 사악하게 행하여
그 언약을 대적하는 자들을 아첨하는 말로 부패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공적을 세우리라."(단11:32).
아첨하는 말은 언제나 사람의 신세를 망치는 도구입니다. 잠언 7:21에 창녀는 "자기의 많은 좋은 말로 그를 굴복하게 하여 입술의
아첨하는 말로 그를 강제로 이끌므로..."(잠7:21)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6:18에서 이르기를, "이는
이 같은 자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 배만 섬기며 좋은 말과 빼어난 말솜씨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속이기
때문이니라."


갈수록 자기 확신을 심어주는 설교, 자아 실현을 강조하는 설교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목사인 로버트 슐러는 자아 존중,
자기 확신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의 기록된 말씀에 완전히 굴복하는 대신 자기를 믿게 하는 것이 바로 마귀의 종교이며,
가르침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교만이 나옵니다. 성경은 교만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되..."(잠4:6).


"?너희는 듣고 귀를 기울이며 교만한 자가 되지 말지니 이는 주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니라."(렘13:15).


"?멸망에 앞서 교만이 있으며 넘어짐에 앞서 거만한 영이 있느니라."(잠16:18).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것 중의 하나는 교만입니다.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이유가 동성 연애를 비롯한 극심하게 타락한 성문란
때문인 것으로 말하지만 에스겔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보라, 네 동생 소돔의 불법은 이것이니 곧 그녀와 그녀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빵의 풍족함과 게으름이 많이 있는 것과 그녀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의 손을 강하게 하지 아니한 것과"(겔16:49), "이는
너의 교만하던 날에 네 입이 네 아우 소돔을 언급조차 하지 아니하였음이라."(겔16:56). 이들이 멸망한 것은 첫째가 교만이었음을
후대의 에스겔을 통해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킹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현대 역본들은 성도들의 교만을 부추기고, 사람들에게 교만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4과 고린도후서 5:12을 보겠습니다.


"just as you also partially did understand us, that we are your reason
to be proud as you also are ours, in the day of our Lord Jesus."(NASB).
NIV-boast of... KJV-your rejoicing.(고후1:14).


"We are not again commending ourselves to you but [are] giving you an
occasion to be proud of us, that you may have [an answer] for those who take
pride in appearance, and not in heart."(고후5:12).--glory on your behalf.(너희를
대신하여 자랑할 기회를...)


여기서 우리는 현대 역본들이 왜 '기뻐하다', '즐거워 하다'를 교만을 뜻하는 proud란 단어로 바꾸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 없이 proud의 현대적 의미가 '자랑하다'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마귀는 그런 틈을
타고 들어옵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kauchaomai로써 기쁨을 넘치게 표현할 때 쓰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육신을 신뢰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를 기뻐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졸지에 be proud라고 번역된 것은 의역이 아닌 변개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proud/pride가 언제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킹제임스 성경을 읽는 독자들은 누구나 '교만하면
망한다', '교만은 무서운 죄다'와 같은 개념이 마음 속에 자리잡습니다. 이는 머리로 생각해서 생기는 이성적 가르침이 아니라 읽으면서 마음
속에, 가슴 속에 자리잡히는 현상입니다.특별한 신학 교육을 받아서가 아니라 바른 성경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 가운데 바르게 자리잡히는 영적
가치관이며, 조명입니다. 반면 현대 역본들을 통해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교만이 악하고 나쁜 의미가 아니라 좋은 의미로 사용된 예를 계속적으로
보게 됨으로써 자신을 신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 줄 알게 됩니다. 이는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마귀의 강력한 군대가 이미 진을 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준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목사들이 그토록 자아를 사랑하고, 자아를 존중하고, 자신에 대해 당당하라고 설교하는 이유가
바로 그들의 성경에서 그렇게 읽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교만에 반대되는 말인 meekness(온유함)이란 단어는 킹제임스 성경에서 31번이나 나옵니다. 반면 새 역본들은 전체를 통털어서 3-4번만
이 단어가 등장합니다. 온유함은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의 하나로서 그리스도인들이 맺어야 할 귀한 열매임에도 불구하고 새 역본들에는 이 단어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킹제임스 성경과 현대 역본의 성령의 열매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KJV와 NASV 비교)


Ga 5:22 But the fruit of the Spirit is //love, joy, peace,// longsuffering,
gentleness, goodness,// faith, 23 Meekness, temperance:// (KJV)


But the fruit of the Spirit is //love, joy, peace,// patience, kindness, goodness,
//faithfulness, gentleness, self-control;// 주의해서 살펴 보면 성령의 열매가 다릅니다. 사람은 아무도
자신을 control할 수 없습니다. self-control은 self의 열매이지 Holy Spirit의 열매가 될 수 없습니다. Self
뒤에 붙을 수 있는 말은 언제나 자기 부인(self denial), 자기 십자가(self -cross)입니다. 아무도 자기를 드높이려 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셨지, 자기를 control하면서 나를 따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self-control이 성령의 열매라면 금욕과 절제, 고행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승려들, 티벳의 라마교도들, 인도의 요기들이야말로
거듭남과는 상관도 없이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부류에 들어 갈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비주의에서 주창하는 이단적
발상입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성령의 열매는 faith이지 faithfulness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믿음의 말씀을
마음에 받아 들이고, 듣고, 읽고, 묵상함으로써 믿음이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믿음의 씨앗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반면 faithfulness 는 인간적인 성실함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신실함, 충성스러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언제나 신실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 신실해야 함은 당연한 말이지만
그것이 성령의 열매는 아니란 것입니다. 온유함(meekness)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대신 kindness(친절함)이란 단어가 들어갔습니다.
온유와 친절은 다릅니다. 온유는 성령의 열매이지만 친절은 고객을 대접하는 business mind입니다. 친절은 온유한 자의 한 단면일
수는 있어도 같은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교만을 부추기는 현대 역본들은 온유함을 나약함으로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온유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셨지 "나는 마음이 친절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모세는 지상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Nu 12:3 (Now the man Moses was very
meek, above all the men which were upon the face of the earth.)



야고보서 1:9은 이렇게 말합니다. "낮은 처지의 형제는 자기가 높아진 것을 기뻐하고..."(킹제임스). The brother
in humble circumstances ought to take pride in his high position(NIV). 'take
pride in'은 현대 영어 사전을 찾아 보면, '자랑하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는 현대인들이 pride란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정의하는지 잘 보여 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적 어휘의 정의가 결코 세상 사람들이 쓰는 정의에 길들여지고, 맞추어질 수 없음을 봅니다.
pride를 취하는 것이 자랑이라면 그것은 마귀적인 개념입니다. 성경은 지금 현재 낮은 지위에 있는 형제들이라 할지라도, 때가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높여 지는 것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지, 높은 지위를 점유함으로 pride를 점유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대 역본들의 자랑 중의 하나는 어려운 고어를 어린아이들도 읽기 쉬운 현대어로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인지
잘 보시기 바랍니다. rejoice in(기뻐하다- 킹제임스 성경)을 take pride in으로 바꾼 것은 의미의 변개이지 가독력을 높인
것이 아닙니다. rejoice란 단어는 매우 쉬운 단어이며 일상적인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pride를 가지도록
촉구하고, 그것이 성경적 가르침인 것처럼 오해하도록 반복적으로 그 단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pride를 가지는 것이야말로 마귀의 종이
되는 가장 빠른 길이요, 망하는 첩경이요, 하나님이 대적하시는 원수가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도들을 어떤 경우에도 버리시거나
포기하시지 않으시지만 단 한 가지 경우, 교만한 경우에는 마귀를 대적하시듯 그 사람을 대적하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경고하기를, "하나님께서는
교만하자를 물리치시되(resisteth)"라고 합니다. 마귀는 모든 교만한 자들을 다스리는 왕이기 때문입니다. 욥기 41:34을
보십시오. "그는 모든 높은 것을 바라보는 자요, 모든 교만한 자녀들을 다스리는 왕이니라"(KJV). 여러분이 개역 성경을
펴서 이 부분을 읽는다면 현대 역본들의 영어 성경과는 완전히 다르게 읽게 될 것입니다. "모든 높은 것을 낮게 보고 모든 교만한
것의 왕이 되느니라."(개역, 욥41:34). 마귀를여러분의 왕으로 삼고 싶다면 여러분은 언제든지 그의 수하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만을 부리면 됩니다. 현대 역본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마귀의 종으로 헌납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로처럼 보입니다.



뉴에이지 연구가이며, 많은 이단들을 연구한 Dave Hunt는 말하기를, '성경은 결코 자기 만족, 자기 확신, 자기 긍정, 자아 존중,
자존심, 자부심, 자기 사랑(자애), 자기 연민 등 어떤 것도 자아에 연관시키는 것을 촉구하지 않는다. 오늘날 저명한 목사들에 의해 그토록
인기를 얻는 자아 존중의 설교는 미혹한 영이 만들어낸 복음일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토록 거짓된 복음에 놀아나고
있는 것입니까? 이는 그들의 성경이 우리의 성경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다르다는 것은 그들의 하나님과 우리의 하나님의 다르며, 그들의
복음과 우리의 복음이 다르며, 그들의 생명과 우리의 생명이 다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오늘 매우 간략하게 교만을 부추기는 성경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새 역본들에 pride,
proud란 단어가 너무나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일일이 모든 구절들을 비교해 볼 생각을 하다가 한글로는 그 의미가
확연하게 와 닿지 않는 관계로 그만 두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영어 역본들을 참고할 생각이 있는 분들은 킹제임스 성경과 NIV, NASB성경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KJV의 rejoice란 단어가 대부분 proud/pride란 단어로 바뀐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만에 대해 보여 주시는 계시를 따라 우리도 마음 가운데 동일한 가치관을 소유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일생동안 항상 자기 자신을 능하신 하나님의 손 아래 낮추고, 다른 사람들을 나보다 낮게 여기는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을 통해 늘 온유함이 넘치는 그리스도인들로 빚어 주시기를 빕니다. 교만에 대한 바른 조명을 주는 유일한 성경인
킹제임스 성경을 읽고,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모든 선한 것에 철저히 구비된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 교육은 자기 개발(self-improvement)에 온 힘을 기울입니다. '당신의 몸값을 높이라.' 이것이 현대의 교육 철학입니다.
성경은 자기를 낮추라. 겸손하라. 온유하라.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의말을 따르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돌이켜
스스로 높아지고자 한다면 마귀의 길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높여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습니다. 그는 현대 교육학의 화신이요,
선구자였습니다. 이사야 14:14, 46:9을 보겠습니다. Isa 14:14 I will ascend above the heights of
the clouds; I will be like the most High. 힌두교, 불교, 도교를 비롯한 모든 이방 종교들의 목표는 그들의
선구자요, 아비인 마귀를 따라 신처럼 되는 것, 하나님같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사야 46:9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Isa 46:9 Remember the former things of old: for I am God, and there
is none else; I am God, and there is none like me,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안에 머물기를 원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열매
맺기를 원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온전히 내 안에 사시는 주님이 나를 통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하시도록 헌신된 삶을 살고자 합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은 주님의 성품이며, 하나님께 은혜를 더 많이 받는 비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