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회개에 대해 올바른 조명을 주는 유일한 성경


 


지난 주에 저희는 피의 구속에 대해서 공부해 보았습니다. 개역 성경을 비롯한 현대 역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대속에 대한 분명한 구절들이
삭제되어 있거나, 약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살펴 보았습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일차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는 구속(救贖)의 진리에
대해 비교해 보겠습니다.



◆ 누가복음 9:55-56, 마태복음18:11을 펴 보겠습니다.


"그분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는 사람의 아들이 사람들의
생명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음이라, 하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킹제임스 성경).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개역 성경)


이 두 구절은 도저히 같다고 할 수 없는 구절입니다. 주님께서 사마리아를 멸하자는 요한과 야고보의 분노에 찬 저주를 듣고 그냥 꾸짖고
다른 마을로 가고 말았다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어떤 소망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배척하는
사마리아인들을 저주하거나 멸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그들이 주님을 믿지 않고 배척할 때, “인자는 사람들의 생명을 멸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왔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복음을 배척하고 멸시하는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우리는 그들을 향해 가졌던
주님의 마음과 목적을 온전히 기억하고 복음 전파에 전념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8:11입니다. "이는 사람의 아들이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려고 왔음이라."(킹제임스 성경). 주님은 복음서에서
반복적으로 잃어버린 자를 찾아 오셨음을 직접적으로 말씀하셨고, 또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모두 잃어버린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개역 성경을 비롯한 현대어 역본들을
펴 보면 <(없음)>이라고 성경 절 자체가 전부 삭제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공부를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그들의 믿음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바른 말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성경적인 믿음을 갖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말씀은 거기에 없어도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주님이 말씀하신 그 곳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도로, 어떤 목적 가운데, 왜
그 말씀을 하셨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중요한 상황에서 주님이 침묵하신 것처럼 되어 있고, 전혀 다른 상황에서 불쑥 이런 말씀이
나온다면 우리는 성경을 읽고 공부한다해도, 본래의 정확한 뜻을 이해하거나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말씀은 있을 곳에 있어야 말씀입니다.
우리는 계약서를 쓸 때, 아무 곳에나 성명하지 않습니다. 날짜를 쓰는 곳과 문서 번호를 쓰는 곳과 돈의 액수를 쓰는 곳이 뒤죽박죽으로 되어
있거나 있어야 할 곳은 통채로 삭제되어 있고, 엉뚱한 페이지에 적혀 있다면 그것은 문서로서, 계약서로서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생명의
법이요, 성령의 법이며, 우리에게 주신 왕가의 법(royal law)이란 주님의 말씀이 그렇다면 제대로 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원척적으로
불가능할 것입니다.



◆ 마태복음 9:13, 마가복음 2:17, 누가복음 5:32을 펴 보겠습니다. "오직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우라. 이는 내가 의로운 자를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음이라,
하시니라."(마9:13, 킹제임스 성경).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개역 성경). 우리는 성경을 정확하게 읽고, 읽는 그대로
읽고 믿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한다면 잘못입니다. 죄인들은 불러도 대답이 없거나,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의 유일한 희망은 복음을 통해 주님께로 돌이키는 회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죄인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이 회개하는
것을 사랑하시며, 죄인들이 회개할 때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을 들은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온전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나니 내가 의로운 자를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 하시니라."(막2:17, 킹제임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2:17, 개역). 주님은 분명히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많은
복음 전도자들이 죄인들을 위로하고, 힘을 주기 위해 이 구절들을 인용하지만 크게 잘못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가진 성경이 그렇게
때문에 빚어지는 어쩔 수 없는 현상입니다. 모든 무신론자들은 회개해야 할 죄인입니다. 모든 범신론자들은 회개해야 할 죄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이라고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회개해야 할 죄인인 것입니다. 회개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성경의 말씀을
삭제해 가면서 주장하고 싶은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리를 가려 함께 지옥으로 향하게 하는 마귀의 교리입니다. 누가복음 5:32을
보십시오. "내가 의로운 자를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 하시니라."(눅5:32,
킹제임스 성경).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NIV에는 삭제되어 있으나,
개역 성경에는 있음). 주님이 3번에 걸쳐 하신 말씀 가운데 개역 성경은 단 한번만 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독자들은
죄인이 회개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닌 줄로 생각하게 됩니다.


회개(悔改)는 도대체 무엇이며,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마태복음 4:17과 마가복음 1:15을 보십시오. 회개는 주님께서 공생애 사역
동안 설교하신 첫 번째 주제였습니다. "이때부터 예수님께서 비로소 선포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 회개는 하늘의 왕국과 연관이 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부했지만 주님은 먼저 그들이
회개해야 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 왔으니 너희는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
회개는 하나님의 왕국과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장 먼저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회개였습니다. 복음을 듣고 내가 죄인이란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구원이 임하지 않습니다. 죄인이란 사실을 인정했으면 주님이
제시하신 죄의 해결책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죄에서 돌이켜 주님께로 나와 주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 바로 완전한 회개이며, 회심입니다.
어떤 이는 회개를 어떤 행위로 생각합니다. 회개는 행위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 어둠에서 빛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주님께로 돌아 서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굳이 행위란 말을 붙이자면 죄인이 행할 수 있는 첫 번째 “믿음의 행위”가 바로 회개입니다.


마태복음 11:20, 누가복음 13:3을 보겠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능력 있는 일들을 가장 많이 행하신 도시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꾸짖기 시작하시니라."(마11:20).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은 매우 단호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그들의
죄를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을 꾸짖었다는 점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심판석에서 가장 먼저 물으실 것이 바로
“왜 듣고도 믿지 않았느냐? 왜 돌이켜 회개하지 않았느냐?”일 것입니다. 죄인들이 지옥에 가는 유일한 이유도 그들이 지은 많은 죄들 때문이
아니라 구원의 복음을 듣고도 회개하지 아니한 자신들의 완악함 때문이라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그와 같이 멸망하리라."(눅13:3). 구원의 복음은 회개의 복음입니다. 성령이 임하고 유대인들을
향해 베드로가 한 첫 번째 설교 역시, “회개하라.”였습니다.


누가복음 15:7,10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회개가 바로 구원이란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 아홉 사람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으로 인하여 더 기쁨이 있으리라."(눅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의 눈앞에서 기쁨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5:10).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이란 말은 곧 복음을 믿어 구원에 이른 사람을 말합니다. 혼을 구원하는 믿음이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와 죄인 됨을
발견하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오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와 후회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여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저는 정말 나쁜 놈입니다. 정말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라며 눈물을 흘리며 후회를 하는 것은 “사실 나는 이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닌데,
이런 짓을 하다니..., 정말 내가 왜 이런 실수를 했지..., 나는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닌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아닙니다. 아직 자기 자신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죄인 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모르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자기가 자기를 평가하거나 사람들과 비교하는 상대적인 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보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5:8과 18:13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처음 만나 그분의 신성을 접했을 때, 그는 죄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무슨
일을 했기에 그런 고백을 했습니까? 살인, 간음, 도둑질과 같은 죄를 두고 한 말이 아닙니다. 그는 성실한 어부였고, 의리있는 뱃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며, 밤을 새워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런 그가 주님을 뵈었을 때,"...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이르되, 오 {주}여, 내게서 떠나소서. 나는 죄 많은 사람이니이다, 하니"(눅5:8).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데서 시작됩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긍휼을 베푸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라."(눅18:13).


누가복음 24:47, 베드로후서 3:9을 보십시오. "또 회개와 죄들의 사면이 그의 이름으로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들
가운데 선포되어야 하리니" (눅24:47). 회개는 주님이 주신 지상 사명이었습니다. 회개를 통해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디신 것이 아니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이와같이 중요한 “회개”란 단어가 곳곳에서 삭제된
것은 우리의 구원을 가로막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회개는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회개가 필요치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무지(無知)하던 때에는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셨으나 이제는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 명령하셨으니"(행17:30).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통탄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방향을 트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자신의 육신과 죄악된 생활과 습관들을 청산하는 것을 회개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정의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도 주님을 믿고 그분의 보혈과 성령의 능력을 통하지 않고 악습을 근절하고 육신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을 향해 마음을 돌이킨 회개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사도행전 20:21, 26:20을 보십시오.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증거하였노라."(행20:21).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입니다. 유대인들은 특히 하나님을
향한 회개가 필요했고, 이방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먼저 다마스커스와 예루살렘 사람들과 온
유대 지방에게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에 합당한 일들을 행하여야 함을 보이매"(행26:20). 주님께서
직접 들어 주신 회개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1:29을 보십시오.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가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더니 그 뒤에 뉘우치고 갔고"(마21:29).
후회와 눈물은 종종 회개와 동반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회개는 아닙니다. 회개는 동사가 2개입니다. 뉘우치고, 갔고. 챨스 스펄젼은 말하기를,
“살인자가 교수형을 싫어하듯이 사람은 죄를 싫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회개했다는 증거는 될 수 없다. 만약 내가 형벌 때문에 죄를
싫어한다면, 나는 죄를 회개한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란 사실만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죄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범죄로 볼 수 있다면, 내가 그분을 상처 입히고 죽게 만들었단 사실을 보고, 내 마음이 부서져 자신을 혐오하게 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회개이다.”


참회를 행한 것이 회개를 한 것이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일을 행함으로써 자신의 죄가 사해지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고 생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런 비 성경적 가르침으로 인해 진정한 회개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회개는 마음이
변화되어 행동의 변화까지 도달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아들은 처음에 포도원에 가기를 거절했지만 나중에 회개하여 자신의 마음을 고쳐먹고 포도원으로 갔습니다.


누가복음 18:13, 고후7:9,10을 보겠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긍휼을 베푸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라."(눅18:13). "이제 내가 기뻐함은 너희가
근심하였기 때문이 아니요, 오히려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에 이르렀기 때문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어떤 일에서도 우리로
인하여 상처를 받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거니와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루기 때문이니라."(고후7:9.10).


슬픔이 회개의 진정한 표시는 아니지만, 참된 회개를 했다면 죄에 대한 슬픔은 필연적입니다. 세리는 자신의 가슴을 치며 마음에 슬픔이 가득찼으며,
회개했습니다. 누가복음 7:38에서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은 글자그대로 자신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슬픔과
회개로 인해 그녀는 구원에 이르렀습니다. 감정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란 질문에는 아무도 정확히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회개에는
감정적 변화가 수반되며, 죄에 대한 슬픔이 있다는 점은 성경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나지 않고, 단 한 방울의
눈물이 흐르지 않는다 할지라도 어떤 감정적인 변화가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죄인은 머리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갖고
있습니다. 죄인은 이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둘 다에 호소해야 합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감정이 움직이기 전에
회심하는 법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챨스 스펄젼).


회개하다(repent)란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 가운데 하나는 “돌아서다”란 뜻입니다. 누가복음 15:18의 탕자는 말하기를 “내가 일어
서리라(I will arise..).그리고 일어섰다.” 그는 자신의 갈 길에 대해서 생각만 하다 머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서 자기
집으로 향해 걸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이 되었을 때 회개하여 새로운 삶의 희망을 가집니다. 회개는 죄에 대한 마음이 상한 결과일 뿐만 아니라,
죄로부터 적극적으로 돌아서서 걸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 서신서에 회개란 단회적 행동 이상의 경험을 말합니다.(탕자는 일어나서 걸어갔다.).
탕자는 먼저 자신의 죄를 깨닫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죄의 고백은 하나님의 말씀의 조명을 받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세리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를..” 탕자는 “내가 하늘을 거슬러 죄를 지었다.”고 울부짖었습니다. 전에 깨달음의 구원을 주장하시던
분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 설교를 하신 목사님이 마지막에 “아들이 용서받은 때는 언제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듣고 있던 이 분의 머리에 깨달음이 왔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아들을 에전에 용서하셨다.” 그리고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간증인
것은 사실이지만 정확하지 않습니다. 아들이 용서받은 것은 돌아 왔을 때입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도 죄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55:7과 잠언28:13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의 단절을 볼 수 있습니다. "사악한 자는 자기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이는 그분께서 넘치도록
용서하실 것임이라."(사55:7). "자기 죄들을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누구든지 죄들을 시인하고 버리는 자는 긍휼을
얻으리라."(사28:13). 이미 말씀드렸듯이 회개는 동사가 연속 두 번 사용됩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뜻은 회개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죄인을 언제냐 용서하시며, 긍휼을 베푸십니다.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죄들을 시인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킴이 없이 죄로부터만 돌아서는 것은 거듭남이 없는 개혁과 개선에 불과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9과 요엘서 2:13입니다. "이는 그들이 직접 우리에 관하여 보여 주면서 우리가 어떻게 너희에게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살전1:9). "/너희는/ 너희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으며 [주]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올지어다. 이는 그분께서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니"(욜2:13). 회개의 핵심은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가장 심도있게 다루는 주제들 가운데 하나로써 100회 이상 언급됩니다. 하나님의 부담은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에 대한 실패는 영생을 얻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실제적인 경험, 고백, 회개, 믿음 이 모든 것들은 사실 동시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중요한 죄인의 회개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온전히 보존된 성경은 킹제임스 성경 뿐입니다.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 앞에서 우리는
자신을 돌아 보고 회개하는 생활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