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벧후3:18, 골1:10
[오직 우리 {주} 곧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토록 그분께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벧후3:18), [{주}께 합당하게 걸어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게 하시고](골1:10).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계속해서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평생을 연구해야 할 제목이요, 대상이지만 간략하게 살펴 보는 것은 이 주제야말로 모든 것의 초석이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조직신학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도 그 바탕이 됩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인 줄을 알지어다.](시46:10a). 하나님의 위엄과 지극히 높으신 존귀하심에 대한 감각이 사라지고, 인식이 흐려짐으로 인해 신앙은 지극히 형식적이 되고, 인간 본위로, 자기 중심으로 변질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생각할 때에 무슨 생각이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느냐가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이 어떻게 인식되고, 어떻게 여겨지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내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가? 이 문제야말로 초신자들 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에게 반드시 가르쳐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지식과 관념이 우상 숭배라는 오염된 물줄기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바로 우상 숭배인 것입니다. 우상 숭배자는 하나님께 대하여 마음대로 상상하고, 그 상상한 것들이 참인 양 행동합니다. 개인이든 교회이든 하나님께 대한 정확하고도 합당한 계시와 조명에서 벗어나는 순간 타락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잘 다루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시다. 주님이시다. 하나님이시다, 머리시다.”와 같은 말은 매우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 예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돌이시다. 예수님은 아멘이시오, 신실하고 진실한 증인이시다. 이런 속성은 잘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 돌이신 주님
주님은 돌이십니다. 하나님은 대언자 이사야를 통해 예수님을 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왜 돌이라고 했을까요? 돌은 인간의 삶에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돌은 건축재료입니다. 집이나 성을 지을 때, 도시를 건설할 때 모두 돌이 주 재료입니다. 돌을 쪼개면 예리한 칼이 됩니다. 이것으로 요리를하거나 사냥을 하거나, 적을 무찌르기도 합니다. 돌은 발화재료이기도 합니다. 부싯돌로 불을 붙입니다. 돌은 보석입니다. 가장 가치가 나가는 것이 돌입니다. 금강석(金剛石)-Diamond, 갖가지 보석은 지하에서 돌이 강력한 탄성을 견디어 냈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인류는 돌을 어떻게 이용하느냐로 문명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이사야 28:16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로 삼으리니 곧 단련한 돌이요, 보배로운 모퉁이돌이며 견고한 기초로다. /그것을/ 믿는 자는 다급하지 아니하리로다.](사28:16). 하나님께서 시온에 둔 돌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셨습니다.
이 돌은 그냥 돌이 아닙니다. 첫째, 단련한 돌입니다(tried stone). 주님이 단련된 돌이시라면 성도들 또한 철저히 단련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같은 재질의 돌이 아니면 같은 건축물에 사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련된 돌이라면 그분의 모든 말씀 또한 단련되었을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 모든 말씀은 철저하게 단련되었습니다. 삼하22:31, 시편12:6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으로 말하건대 그분의 길은 완전하고 [주]의 말씀은 단련되어 /순수하니/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가 되시는도다.](삼하22:31).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단련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시12:6). 둘째, 보배로운 모퉁이돌이십니다. 주님은 존귀한 보석이십니다.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주님의 가치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돌은 죽어 있는 광물이지만 주님은 살아 있는 돌이기 때문입니다. 모퉁이돌(cornerstone)은 건물의 면과 면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돌입니다. 모퉁이돌로 인해 돌돌은 건물이 될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성도들과 성도들을 이어서 한 몸을 만드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셋째, 주님은 견고한 기초입니다(sure foundation). 모든 건물은 터를 잡고 그 위에 지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내가 지혜로운 주건축자로서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이 그 위에 세우되 저마다 어떻게 그 위에 세울지 주의할지니라. 이는 이미 놓은 기초 외에 능히 다른 기초를 놓을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니 이 기초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고전3:10,11).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 기초 위에 어떻게 세울지 주의해야 합니다. 주님이 단련된 돌이요, 보배로운 돌이요, 모퉁이 돌이란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 기초 재료에 맞게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이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 위에 나무나 건초나 그루터기를 세운다면 이것들은 모두 불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대언한 이 구절은 신약 성경에서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 중에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9:33을 보십시오. [/이것은/ 기록된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실족하게 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9:33). 하나님께서 시온에 이 돌을 두심으로 이스라엘은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음으로 그들은 고대하는 메시야 왕국 대신 온 세상으로 뿔뿔히 흩어졌고 2000년 동안 온 세상의 조롱과 멸시거리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죽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으러 섰을 때 수치와 모욕을 당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4,6을 펴 놓으십시오. 4절, [참으로 사람에게는 거부당하였으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은 /돌/ 곧 보배로운 산 돌이신 {주}께 나아와]. 6절, [그런즉 성경에도,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으뜸 모퉁이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당황하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이 들어 있으니](벧전2:6). 주님은 택하심을 받은 돌입니다. 지혜로운 건축자들은 건축에 사용될 돌들을 찾습니다. 대리석이 필요한지, 단단한 화강암이 필요한지 용도에 따라 적합한 재질을 지닌 돌을 구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전혀 필요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여 죽여 버렸습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예수님은 강도 바라바만도 못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그 예수님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만큼 쓸모 있는 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의 설교를 듣고 열을 받아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들이 이 말까지 듣다가 소리를 높여 이르되, 이런 놈은 이 땅에서 없애 버리라. 그를 살려 두는 것은 마땅하지 아니하다, 하며](행22:22). 바울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돌이었지만 주님께는 택함받은 돌이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모두 하나님께 쓸모없는 죽은 돌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택함받은 돌이요, 산 돌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living stone). 수석을 채집하는 사람들을 아십니까? 산천산하를 돌면서 특이한 모양의 돌을 찾아다닙니다. 정말 아름다운 돌들을 수집해서 팔기도 하고 전시를 하기도 합니다. 주말만 되면 전국을 누비며 돌을 찾아 나서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답고 신기한 돌이라 해도 죽은 돌에 불과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 사람이 평생동안 수집한 돌보다 훨씬 귀한 돌을 내 안에 소장하고 있습니다. 정말 가져야 할 산 돌은 찾지 않고 죽은 돌만 찾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이 살아 있는 돌이라면 우리 또한 살아 있는 돌입니다. 산 돌은 왜 필요합니까? 사도행전 7:47-50, 베드로전서 2:5을 보겠습니다. [솔로몬이 그분을 위하여 한 집을 건축하였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께서는 손으로 만든 전(殿)들에 거하지 아니하시니 /이것은/ 곧 대언자가 말하는바,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왕좌요, 땅은 나의 발받침이라.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느냐? 혹은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을 내 손이 만들지 아니하였느냐? 함과 같으니라.](행7:46-50). 솔로몬은 분명히 하나님을 위해 한 집을 건축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손으로 만든 전들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그럼 어디에 거하십니까? 벧전2:5절, [너희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고...](벧전2:5). 살아 있는 돌들로 지어진 집에 거하실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영적인 집을 다 건축하시면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고전15:28).
돌로 만들어진 건축물 중에 많은 문화 유산들이 있지만 가장 으뜸인 것은 이집트의 대피라밋(great pyramid)입니다. 규모면에서 정교한 건축 기술과 독특한 디자인으로 인해 두고두고 불가사의가 되고 있는 이 건축물은 “모퉁이 돌”(corner stone)과 머릿돌(head stone)이 똑 같은 유일한 구조물입니다. 그래서, 피라밋을 둘러싼 해석이 구구하고,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종교가 많이 있습니다. 대피라밋은 현재 머릿돌이 없습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놀라운 바로다, 한 말씀을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느냐?](마21:42). 이 돌은 심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쓸모 없는 돌처럼 버림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 돌을 통해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다니엘2:34, 마태복음 21:44을 보십시오. [왕이 /이것을/ 보시더니 마침내 손을 대지 아니하고 깎아낸 돌이 이 형상을 치되 쇠와 진흙으로 된 두 발을 쳐서 그것들을 산산조각 내매](단2:34). [누구든지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부서지겠고 누구에게든지 이 돌이 떨어지면 그를 갈아서 가루로 만들리라, 하시니](마21:44). 누구든지 피라미드의 뾰족한 부분에 떨어지면 신체에 구멍이 나거나, 몸이 부러지고 말겠지만 피라밋이 내 위에 떨어지면 나는 가루가 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바위(반석)이십니다.
주님이 반석이란 표현은 구약에서 30회, 신약에서 5번이나 직접적으로 언급된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우리는 반석을 통해 몇 가지 영적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반석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반석에서 물을 내신 사건이 일 것입니다. 반석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첫째 물을 냅니다. 출애굽기 17:6과 고린도전서 10:4을 보겠습니다. [보라, 내가 거기서 호렙에 있는 반석 위에서 너를 마주보고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 반석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하시매 모세가 이스라엘의 장로들 눈앞에서 그대로 행하니라.](출17:6). [모두가 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느니라. 이는 그들이 자기들을 따라가던 영적 반석으로부터 마셨기 때문이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였느니라.](고전10:4). 하나님은 모세에게 물을 찾아 계곡으로 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지하수를 파 보거나, 물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아무 것도 없는 광야, 호렙의 반석에서 물을 내셨습니다. 이는 주님을 따르는 저희들의 필요는 바로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물이 솟아나는 바위를 들어 보셨습니까? 200만이 넘는 사람들과 그들의 가축들을 충분히 먹이고도 남는 그 샘이 반석 안에서 쉼없이 흘러 넘쳤을 그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십자가에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몸이 터짐으로 온 인류가 먹고 마실 물을 공급하셨습니다. 생수의 근원이 터지신 것입니다. 예레미야 2:13과 17:13을 보겠습니다. [이는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음이니 곧 그들이 생수의 샘인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물 저장고들을 판 것인데 그것들은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저장고니라.](렘2:13). [오 [주]여,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여, 주를 버리는 자들은 다 부끄러움을 당하며 나를 떠나는 자들은 땅에 기록되리니 이는 그들이 생수의 근원이신 [주]를 버렸음이니이다.](렘17:13). 주님은 우리에게 물을 내시는 반석이십니다. 순례의 길에 지치고, 힘든 영혼에게 새 힘을 공급해 주시는 반석이십니다. [누구든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우물이 되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하리라.](요4:14).
둘째, 주님은 나의 강한(견고한) 반석이십니다.
이는 믿는 저와 여러분을 흔들리지 않게 붙들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든든한 반석 위에 올려 놓고 싶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집이든지, 우리 교회든지, 우리 나라든지, 나의 사업이든지, 자녀든지...무엇이든지 든든한 반석 위에 올리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강하고 견고한 반석이 무엇입니까?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속히 나를 건지소서. 주는 나의 견고한 반석이 되사 나를 구원할 방벽(防壁)의 집이 되소서.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요새이시기 때문이오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인도하고 지도하소서.](시편31:2,3). 예수 그리스도 위에 무엇이든 올리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하리라.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그 집이 무너지지 아니하리니 그 까닭은 그것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라.](마7:24,25).
셋째, 주님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거치는 반석이십니다.
불신자들에게 예수님은 무서운 심판자이십니다. [/이것은/ 기록된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실족하게 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9:33). 예수가 누구냐?고 조롱하는 사람, 예수를 욕하고 저주하는 사람, 예수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 듣고도 흘려 버리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걸림돌이요, 실족하게 하는 바위입니다. 물을 찾기 위해 땅을 파 내려가던 사람에게 반석이 나타나면 골치덩어리가 됩니다. 길을 닦는 사람들에게 거대한 반석이 땅 속 깊이 파묻혀 있으면 아주 힘듭니다. 바위산을 만나면 그것을 폭파하든지 우회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부술 수 없다면 예수님을 돌아가야 합니다. 거기는 지옥입니다.
넷째, 이 반석은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기암괴석과 절벽으로 이루어진 곳은 적이 침범할 수 없습니다. 페트라(반석)는 그냥 평범한 바위가 아닙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부터 남쪽으로 90마일 정도에 위치한 페트라를 지났습니다. 이곳은 여러 바위가 어우러진 것이 아니라 한 개의 바위가 한 개의 도시를 이룹니다. 페트라는 전체가 붉은 사암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사방이 절벽으로 방어된 신비의 천연요새로, 마치 지하 왕국을 연상시키는 도시입니다. 이스라엘은 대환란 때 이곳에서 3년반 동안 피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피난처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말하기를, [이는 원수들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아니하기 때문이니 우리 원수들도 스스로 판단하는도다.](신32:31). [[주]와 같이 거룩한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외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기 때문이로다.](삼상2:2).
다섯째, 이 반석은 내게 힘을 주는 반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힘의 반석이십니다. [오직 그분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방벽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나의 영광이 하나님께 있나니 곧 내 힘의 반석과 내 피난처가 하나님께 있도다.](시62:6,7). 이집트의 아스완 주에는 아스완 댐이 있습니다. 나일강을 막아서 댐을 건설했는데 세계 최대입니다. 높이 111m . 제방 길이 3.6km. 저수량 1,570억m3. 저수지 길이 500km. 아스완 부근 나일강(江) 급류를 막아 건설한 세계 최대의 록필(rock-fill)댐입니다. 이런 댐을 건설하기 위해서 설계사들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은 물의 힘을 견디고, 갑작스런 사고에도 견딜 수 있는 강력한 돌을 어디서 구하느냐?는 것입니다. 111m의 높이의 댐을 쌓기 위해서 세계 각국의 돌들을 조사해서 가장 단단한 돌을 구해와 제일 밑에 깝니다. 그 위에 공사가 진행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저와 여러분이 어떤 하중을 가해도 든든하게 견디는 힘을 주는 반석이십니다.
주님이 이런 분이시기에 성도들은 그분을 찬양합니다. 죄인들은 죄를 고백합니다. 순교자들은 그를 위해서 죽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모든 사역의 효과는 오늘을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지금도 변함없이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8:9, 고린도후서 6:8-10을 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그분께서 부요하셨으나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자신의 가난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8:9).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이 되셨는가를 알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영예와 치욕으로 그리하고 나쁜 평판과 좋은 평판으로 그리하였나니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진실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하며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며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소유한 자로다.](고후6:8-10). 주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거수 일투족은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뜻 가운데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들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다시 태어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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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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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부활하신 이유는 우리로 부활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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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가난하게 되신 이유는? 우리가 부요하게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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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집이 없으셨던 이유는? 우리가 저 하늘에 집을 갖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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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굶주리신 이유는? 우리를 배불리 먹게 하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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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목마르신 이유는? 우리에게 생명의 샘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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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지치신 이유는? 우리에게 쉼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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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벗겨지신 이유는?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 주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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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상처를 입으신 이유는?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 주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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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버림받으신 이유는? 우리를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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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결박당하신 이유는? 우리의 결박을 풀어 자유를 주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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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죄가 되신 이유는? 우리에게 의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지옥으로 가신 이유는? 우리를 하늘로 들어올리시기 위함입니다.
*아멘이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자신을 일컬어 아멘이라고 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아멘(the Amen)이요, 신실하고 진실한 증인이요,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인 이가 이것들을 말하노라.](계3:14). 아멘은 “그렇게 될지어다.”란 뜻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마지막에 “아멘”이라고 합니다. 기도한 내용이 “그대로 그렇게 될지어다.”란 말입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매우 자주 사용하신 표현입니다. '진실로'(verily) 또는 '진실로 진실로'(Verily, verily)란 말이 바로 아멘이란 뜻입니다. 아멘은 단언할 때 씁니다. “진실로”라고 시작하신 주님의 말씀은 다른 말씀들보다 훨씬 더 강도가 강하며, 단정적입니다. 아멘은 동의할 때 씁니다. 성경을 읽을 때, 기도할 때, 찬송할 때, 설교를 들을 때 여러분은 “아멘”하는 것은 “동의한다”는 뜻입니다. 설교시간 내내 단 한마디도 아멘! 하지 않는 사람은 “당신 설교에 전혀 동의할 수 없소!”란 무언의 표시이며, 항의입니다. 반면에 뜻도 없이 아무 때나 “아멘!”을 연발하며 구호처럼 외치는 것은 망령된 행실입니다. 아멘은 청원할 때 씁니다. 기도를 다하고 마칠 때 우리는 “아멘” 함으로써 하나님께 이렇게 되도록 청원합니다!란 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아멘”이십니다. 주님은 모든 설교를 단순하고도 확실하게 단정적으로 하셨습니다. 주님의 설교 가운데, “내 생각에는...”, “아마”, “...일지도 모른다.”는 표현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혹시, 만약에, 아마...”와 같은 표현대신에 주님이 즐겨 하신 말씀은 “진실로...진실로”입니다. ....기록되었으되, 성경이 말하기를,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입니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동의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고, 그것을 기쁨이요, 즐거움으로 삼으셨습니다. 이 점에서 주님은 분명히 아멘이십니다. 주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이 아니옵고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22:42). 히브리서 10:7,9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바와 같이) 내가 주의 뜻을 행하러 오나이다, 하였노라, 하시느니라. 9. 그 뒤에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내가 {주}의 뜻을 행하러 오나이다, 하셨으니 그분께서 그 첫째 것을 제거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여러분은 주님의 뜻에 전적으로 동의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아멘!하고 계십니까?
주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성도들을 위해서 중보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한 명이라도 더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며, 하나님께 청원을 드리고 있습니다. 기도를 마치면서 여러분이 아멘할 때, 주님도 아멘! 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멘이신 주님께서 아멘! 하시지 않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시간 주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하는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이신 주님은 신실하시고, 진실한 증인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신실하고 진실한 증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누구인지, 어떤 분인지, 성경이 어떤 책인지,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에 대해서 신실하고 진실하게 증거하도록 합시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이전과는 다른 내일을 살 수 있도록, 올해와는 다른 내년을 맞이할 수 있도록 주님께 간구합시다. 주님의 모든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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